(33) 만엽집에 제주 사투리로 지은 노래가?
이영희 작가는 오늘, 「만엽집」에서 제주도 사투리로 노래한 시가를 찾아낸다.
제주도는 일 년 삼백예순 닷새 꽃이 없는 날이 하루도 없고, 돌-바람-여인과 함께 삼다도(三多島)로 일컬어진다.
특히 눈이 시원스럽고 가무스레한 살갗이 매력적인 미인의 고장으로도 정평이 났다.
제주도에는 또 다른 삼다(三多)가 있는데 바로 민요-민화-무가(巫歌)이며 모두 제주도 사투리로 전해져 있다.
「만엽집」에도 제주 사투리로 읊어진 노래가 있다면 곧이들리겠는가?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바로 고시(高市) 왕자의 노래다.
* 고시(高市) 왕자: 「일본서기」(720년 편찬)에는 천무왕의 제1 왕자로 되어있으나 부상략기(扶桑略記)(1094-1106 편찬)에서는 천지왕의 제3 왕자로 되어있다.
고시 왕자의 어머니는 북구주(北九洲) 일대와 주변을 주름잡는 해양 호족 무나카타씨의 딸인데 전형적인 제주도 형의 미인이었던 같다고 한다.
이 집안의 사당에는 세 여신(女神)을 모셨고 그 제사 터는 대대로 고궁제장(高宮祭場)이라 불려왔는데 이로 미루어 제주 고씨와 연관이 있는 집안은 아니었을까 하고 작가는 추측한다.
이 세 여신은 제주의 고, 부, 양 씨의 조상이 일본에서 온 세 여인과 결혼했다는 제주의 신화를 떠올리게 한단다.
고시 왕자 이름도 고씨 집안 인물을 나타낸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일본의 고대 인명은 흔히 출신 가계나 출생지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었기 때문이란다.
고시 왕자는 아버지 천지왕이 이복형제 대우를 왕세자로 삼자, 이에 반발하여 아버지의 정적인 천무와 제휴, 쿠데타를 일으키지만, 왕위는 천무에게 빼앗긴다.
그러자 고시 왕자는 아버지 천무왕에게 원한을 품은 아들, 대진 왕자와 함께 모반하여 천무를 시해하고 지통왕과 함께 연립정권을 세운다.
그런데 이 모반 전에 천무의 딸 십시 왕녀(천무와 액전왕 사이의 딸)이 급사하게 된다.
십시는 원래 고시 왕자와 연인관계였으나 고시 왕자의 이복형제 대우와 혼인하여 아들 갈야왕을 두었다.
이 무렵 고시 왕자가 지은 노래는 십시 왕녀의 장례 때 지은 진혼가였다.
그리고 십시가 죽기전 탐라국(제주의 옛 지명) 왕자 일행이 일본 도읍지 아스카에 와 있었다.
왕자 일행이 십시의 장례 때까지 아스카에 머물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시 왕자가 지은 진혼가가 제주 사투리로 읊어졌다면 비상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노래 또한 이중가로 구성되어 겉 노래는 진혼가이지만, 속 노래는 <천무를 치자>는 격문이기 때문이다.
천무를 치려는데 하필 제주 사투리로 엮어져 있을까?
고시 왕자가 평소 제주말을 썼을까?
아니면 제주도 세력에 호소하기 위해 이 노래를 지었다고 볼 수는 없을까?
왜냐하면 쿠데타를 일으켰을 경우 천무의 해상 퇴로를 막기 위해서는 수군이 필요하기에 탐라국 왕자에게 당부한 것을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제주와 연관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 제주말로 과시한 것은 아닐까?
이 노래는 그 해석이 난해하여 만엽학자들도 오역으로나마 풀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도 악전고투 끝에 어떤 학자가 23자로 된 가사의 원문 중 5자가 오자라고 하며 멋대로 고쳐 해석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미모로(三諸) 신의 신 삼목(杉木), 꿈에서나마 보려고 하지만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아라
이것을 해독이라 할 수 있는지, 실로 아연해 지지 않을 수 없다고 작가는 실소한다.
작가 역시 이 노래 해석엔 애먹었다고 한다.
읽어도 읽어도 읽을 수 없었던 차에 神之神(신지신)의 일본식 고대 음훈이 <가무시카무>라 읽히는데 착안하게 되었단다.
우리식으로 고치면 <감시감>. 요즘 제주 말로 <감수강(가십니까)>와 비슷하다!
혹시 제주 방언으로 읊어진 노래는 아닐까?
고시의 외가는 제주도 가까운 북구주이잖아!
이런 궁리 끝에 제주 방언을 뒤지고 다니다가 다행히 <제주방언연구>라는 저서를 낸 강정희 한남대 교수의 도움을 받아 이 노래의 제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미 모르지 감수감 수기 배암거이 의자 독미감사 기엉 아니쉼야서다
무덤이 마르네. 가십니까. 쉬이 뵈옵기 빌자. 독을 먹여 기어이. 잡지 아니하였습니다.
‘무덤의 흙이 마르니 당신도 정녕 가시는구려’ 라는 애틋한 이별의 노래. 하지만 가사의 흐름으로 보아 고시 왕자는 십시 왕녀의 독살 음모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끝내 말리지 않았다>고 그는 노래에 자백하고 있다.
누가 그녀를 죽였을까?
반 천무 세력의 움직임의 한 표출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고 작가는 말한다.
여기서 첫 구절 <미 모르지>의 ‘미’는 ‘물’의 고어로 천무를 상징하는데 그것은 천무 스스로가 물에서 태어난 수룡(水龍)이라고 자칭하였기 때문이란다.
따라서 <미 모르지>는 <천무 몰지(몰아내자)>란 뜻의 가사가 된다.
즉 겉으로는 사랑의 진혼가, 속으로는 ‘왕을 내몰자’는 정치 메시지인 살아있는 옛 제주 사투리의 노래라는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글을 마무리한다.
한국과 일본은 7세기까지는 한 덩어리였다.
그것은 우리의 상상 이상의 끈끈한 관계로 얽혀져 있었다.
그 시기의 사랑과 갈등과 야망의 드라마 속에서 태어난 노래가 바로 「만엽집」이다.
한-일이 한 덩어리였던 시기의 4,516수의 노래는 두 나라의 소중한 공동재산이다.
역사와 언어와 민속과 사상이 장차 이 노래의 대광맥에서 눈부시게 캐내질 것이다.
30년 전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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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아니었던가?
그가 펼쳐낸 소설마다 영화화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불의 나라>에서 <은교>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그가 절필을 선언하고 은둔하기 이전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것을 책으로 출간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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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의 진화는 끝이 없다.
국산 제품으로 금성, 삼성, 대우가 있었지만, 그래도 그 당시에는 소니를 비롯한 필립스 등의 외제가 인정받는 시기였다.
그러나 이 TV는 여전히 브라운관 방식의 TV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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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이 시기에도 종아리 안마까지 해주는 이런 안마기가 있었네^^
<허리 보호! 모든 정력은 허리로부터 나옵니다>는 문구가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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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먼센스 : 이 무렵 처음으로 아내의 손에 이끌려 미장원이라는 곳에서 이발하기 시작했던 것 같은데, 아줌마들 틈에서 순서를 기다리며 뒤적이던 잡지 중 하나였던 것 같다.
- 먹으면 치료가 되는 음식 672 : 그때는 이러한 식이요법이 알려지며 녹즙기를 할부로 구매했던 기억이다.
이 글은 1993년 5월 30일부터 조선일보 일요판에 연재된 기획물 ‘노래하는 역사’를 간추린 내용이다.
더불어 스크랩한 신문의 뒷면에 실린 30년 전의 사회 실상을 추억하는 내용을 덧대었다.
* 작가 李寧熙(1931-2021) 선생은 이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동화작가, 한국일보 기자, 논설위원을 역임하였다.
* 만엽집(萬葉集·まんようしゅう /만요슈)
8세기 나라 시대에 편찬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 모음집( 20권 4,516수).
5세기부터 8세기까지의 시가이지만 대부분 7세기 초반에서 8세기 중반에 지어짐.
당시 일본에는 문자가 없어 우리의 향찰(이두 문자)와 비슷하게 일본어 발음을 한자로 표기.
그러나 문자에 대한 해석이 완전하지 않아, 여러 가지로 번역되고, 현재도 정확한 의미가 불분명한 것들이 있다. 만요슈의 많은 노래는 중국, 한반도(특히 백제)의 영향을 받았다고 분석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