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래의 기억
통통배가 제 고요를 두들기는 동안
내 기억의 관절을 부러뜨리며
광안리 검은 모래 해변을 걸었다
발이 보이지 않는다
펄은 나를 먹어치울 셈인가?
몰아 치는 물마루가 날 덮치고 나면
두통거리는 너덜너덜해질 것이다
실망을 탕진한 다음에야 비로소
잠시 기억조차 내다 버린 발걸음
문득 검은 모래 속에서 발소리를 듣는다
제 집 문패를 흔들어대는 달랑게는
바닷새의 식욕을 온몸으로 읽어내곤
서둘러 모래를 닫는다
기다림만 키우다가 수 없는 날을
무너져 내린 시간
기억은 변명처럼 꺼내든 진한 커피
저녁은 자꾸 길 밖으로 흘러 내리고
모래알 하나하나가 집이었을 그 속으로
침몰을 증명하기 위해 태어나
입 밖으로 흘러내리는 것들은
저녁 물때를 기다리는 갯벌 정거장
서성거리는 발끝은 지척에 와 섰다
2. 하얀 겨울
허연 성에 움켜쥔 유리창은
생의 외투가 턱없이 얇아 보였다
어둑어둑 밀려드는 저체온 증에 시달리다
시퍼런 거리도, 언 손발도
휘청 휘청
얇은 유리 한 조각 곧추세운 게발선인장
뜨거운 사막을 품은 목덜미마저 뻣뻣하지 않겠니?
파지 위에 얹힌 눈송이는
배고픔에서 도망치는 중이야!
가파른 언덕으로 파지 올린 손수레가 올라선다
해골 같은 고드름이 줄줄이 바리게이트를 쳤지
폭도들처럼 터져 나오는 사이렌 소리,
하얀 겨울을 죄다 틀어막으며
목울대까지 여민 함박눈
이건 산자만의 기록이라
한겨울 발 묶인 나목裸木도 도망치고 싶었지
집집이 언 시체들만 빈 화분처럼 쌓여서는
복도마다 항의하듯
현관문을 쾅 닫는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