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복주 엎질렀다가 귀양간 오도일

이날 정조의 대화에 등장하는 대제학 오도일은 천하의 술꾼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일대기를 추적하기 위해 CD-ROM의 단어검색 기능올 들어가 '오도일'이란 질의어를 주자 다음
과 같은 사실들이 화면에 떠올랐다.
-- 숙종 20년(1694) 12월 25일 : 이조판서 유상운이 오도일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오도일이 친구들에게 실언하는 경우가 많음은 술버릇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지난번에도 서교의 전별하는 자리에서 술에 취해 예의를 잃었으니 깊이 죄줄 것이 없기는 하지만 경연의
장관은 처지와 명망이 있는 것이므로 이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대로 두고 죄를 가리지 않는다면 옳고 그름이 밝혀지지 못하고 조정이 존중받지 못할 것입니다."
-- 숙종 22년(1696) 12월 12일 : 정언 이탄이 상소했다. "
지난번 윤득신이 (술 취한) 오도일을 쫓아낸 행동은 매우 기이한 사건이나 오도일의 평소 언행으로 보면 자기가
저지른 잘못이 자기에게 돌아간 것입니다.
오도일은 글을 잘 꾸미는 재능을 믿고 매우 거친 기를 부리며, 자기 뜻에 거슬리면 술에 취한 핑계를 대고
미친 듯이 소리지르므로 전후에 망신당한 사람이 많습니다.
아, 오늘날 조정에 기율이 있다면 오도일이 동료를 짓밟고 좌우를 침범하여 가볍게 굴욕을 가하는 것이
이처럼 무엄하겠습니까.
조정에서 지나치게 용서하고 그 기질이 교만함을 이따금 논핵하는 한두 사람이 있어도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지난번에 임금께서 태묘에서 제사를 지내실 때 오도일이 몹시 취해서 묘정에 들어오자 좌우의 신하들이
오도일을 부축했으니 그 거동이 도리에 어그러져서 무엄했습니다.
이어서 망묘례(종묘를 참배하는 예식) 대는 자기 집에 물러가 있어 참석하지 않았고,
이튿날 아침 전하께서 신위에 이미 나가신 뒤에도 숙취가 풀리지 않아 교만하게 늦게 입장했습니다.
아, 태묘의 뜰은 신하가 부축받을 곳이 못 되고 친제하는 날이 어찌 신하가 몹시 취할 때이겠습니까.
바라건대 파직하고 윤득신의 죄를 감해 주소서.
" 임금이 답했다. "이미 술을 가까이 했는데, 어찌 바른 예의를 바라겠느냐. 우선 오도일에게 술을 경계하도록
주의를 주라."
-- 숙종 23년(1697) 윤3월 22일 : 정량 유명웅이 상소했다.
"오도일이 방종하게 술을 마시고 미친 듯이 날뛰며 말과 행동이 거칠고 사리에 어긋났습니다.
그래서 이탄이 상소하여 잠깐 외직으로 나갔다가 곧바로 들어왔으니, 나아가고 물러감이 근거가 없습니다.
태묘에서 부축을 받을 정도로 술에 취한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었습니다.
임금께서 그 일로 책망하셨는데도 지나치게 술 마사기를 좋아해 옛 버릇을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경기감영에 부임하기도 전에 먼저 술값을 억지로 구해 오라 하고, 그가 (술값으로) 가져다 쓴 것만도
적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두려워하고 삼가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떻게 이토록 방자할 수 있겠습니까.
오도일은 문장을 논하다면 세상에 그보다 나은 이가 많고, 사람됨을 말한다면 여러 사람이 함께 버린 지
오래입니다.
" 임금이 답했다. "술에 취해 실수한 것이 나쁜 행동인지 나는 모르겠고, 문장이 좋지 않다는 것도 나는
모르겠다. 그런데 오도일을 너무 업신여기고 짓밟으며 말도 어긋난 점이 많으니 이것이 정말 화평하게
하는 도리인가."
-- 숙종 23년(1697) 4월 22일 : 임금이 (기우제를 올리기 위해) 사직단에 기도했다.
작주관(제사 때 술에 취해 음복주를 엎지른 사건이 발생하자 여러 대신들이 상소를 올려 오도일의 탄핵을 주장하고 나섰다.
다음은 숙종 23년 4월 23일 유신일의 상소이다. -
사직단에서 의식을 연습할 때 보니 작주관 오도일이 비틀거리며 버티고서 혼미하게 정신을 차라리 못했습니다. 곧장 지존의 앞자리를 밟고서 구역질을 하는 듯 몹시 취한 것을 감당하지 못해 간혹 정신이 어지러워 넘어
지기도 했습니다.
또 단상에 비스듬히 서는 등 그의 거만한 행동을 모두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한데서 거처하시며 경건한 정성으로 밤이 새도록 조용히 기도하기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사의식을 미리 연습하는 것을 경건하고 조심스럽게 해야 할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감히 방자하게 술을 잔뜩
마시고 예의를 손상시키기를 이처럼 무엄하게 한단 말입니까.
오도일을 감싸고 돌던 숙종도 기우제를 올리는 자리에서 음복주를 뒤엎은 행동에 대해서는 화가 단단히 났던
모양이다.
유신일의 상소에 대해 임금은 이렇게 답했다.
- 크고 작은 제사에 있어 공경을 다하지 않을 곳이 없겠지만 기우제는 더욱 조촐하고 깨끗이 해야 한다.
어제 사직단에서 행사 때 오도일은 술기운이 안면에 가득 차고 행동거지가 괴이했다.
금주령을 금방 내렸는데 며칠 동안 술 끊는 것이 뭐가 어려워 군부 앞에서 방자하게 취했으니 극히
한심스러웠다.
엄숙하고 경건해야 할 곳에서 엎어질까 두려워했는데 결국 음복주를 엎지를고 말았다.
그 당시 내 마음이 불안하기가 실제로 자신이 엎지른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상소하여 변명하기를 다리 기운을 핑계대고 있으니 그 누구를 속이려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틀림없이 규탄하는 논의가 있을 것이라 여기고 우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양사에서 끝내 한 마디 말도 없으니...
의금부에서 오도일을 잡아다 처벌하라.
결국 오도일은 임금앞에서 음복주를 엎지른 사건으로 귀양을 갔다가 숙종 29년(1703) 2월 14일 장성유배소에서 죽었는데 그때 나이 59세였다.
실록은 그의 죽음에 대해 이러한 기록을 남겼다.
- 오돌일이 장성유배소에서 죽었다.
본래 방탕하고 몸을 단속하지 못했는데 만년에는 더욱 방자하고 패악해 사람의 도리가 없었다.
유배지에 있으면서 더욱 뜻을 잃고 슬퍼하여 오로지 술로 마음을 풀었는데, 취하면 옷을 벗고 벌거숭이가
되었다.
같은 당에 속한 고을 관리가 관청기생을 보냈는데 오도일은 이들을 발가벗겨 쫓아다니며 희롱하므로 사람들이 차마 볼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가서 이 모습을 구경하자 억지로 옷을 벗게했으나 그 사람이 달아나서 겨우 면했다.
남쪽 사람이 침을 뱉고 꾸짖으며 '사람 짐승'으로 지목했다. 젊어서는 자못 청백하다고 스스로 일컬었는데,
만년에는 명을 기다린다고 일컬으며 부유한 상인의 집에 붙어 살면서 날마다 술과 고기를 마련하게 하고
요구가 끝이 없어 상인이 크게 원망했다.
종실 전성군 이혼은 행동이 개, 돼지와 같아서 사람축에 끼지 못했는데 오도일은 그 부를 탐해 아들을 장가들게 하니, 그 당파 사람들도 더럽게 여겼다.
후에 다시 씌어진 숙종보궐정오에는 오도일의 죽음을 전하는 내용이 상당히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그 현장을 살피기 위해 숙종보궐정오 29년(1703) 2월 14일로 날아가 보니 이러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 전 판서 오도일이 장성 적소에서 졸했다.
오도일은 뛰어난 재주가 있으며 총명이 빛났고, 풍치가 사람을 움직이고 문사가 넉넉하고 민첩했다 외면은 박소한 듯하나 내면은 깨끗했다.
몸을 다스리기를 청백하게 하여 세상에서 그를 인정했다.
성품이 술을 좋아해 몹시 취한 적이 많아서 세상 일을 경영할 뜻이 없는 듯했으나 안팎 벼슬에 나가 문득
빛나는 명성이 있었다.
임금도 재주가 많음을 기특하게 여겼으므로 세상에 드문 특별한 은혜를 입었다.
그러나 성품이 단정하지 못하고 정성스러움이 부족하여 기를 숭상하고 남을 업신여기기를 좋아했다.
술이 취하면 같은 좌석에 잇는 사람을 욕하는 일이 많았고, 당론에 용감하여 과격한 주장을 했다.
또 영리에 담담하지 못해 기사년(1689) 후에 그 거취가 공론에 불만족한 것이 많았고, 갑술년(1694)에 이사명등을 논핵한 상소는 진실로 사람들이 말할 수 없는 것이어서 같은 당 사람들의 원망과 미움을 받았다.
행동이 방종하여 여러 번 실패를 당했으나 나감만 있고 물러감이 없었다.
이처럼 같은 인물에 대한 평이 상대적으로 다른 이유는 실록이 작성될 당시 당파싸움에서 승리한 쪽이 살록편찬의 주도권을 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뀐 후 당쟁으로 인해 실록 내용이 편파적으로 기록됐다는 판단이 설 경우 수정실록을 내거나
보궐정오등을 편찬해 두 가지 기록을 모두 남기는 방법을 선택했다.
두 가지 견해를 후세에 동등하게 전함으로써 사실에 대한 역사적 판단을 정확히 하려는 정신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조선시대에는 가뭄이 들면 곡식을 함부로 낭비하지 말자는 뜻에서 금주령을 내리고 일정기간 술을 금했다.
나아가 술 때문에 업무에 차질을 빚으면 가차없이 탄핵의 대상이 되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왕들은 신하의 음주행위에 관대했음이 여러 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 대표적 임금이 숙종이다.
위에서 밝힌 사례 외에도 오도일이 술에 취해 숙종 앞에서 실수를 저지른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때마다 오도일을 처벌하라고 상소하면 숙종은 '술에 취하여 실수한 것이 나쁜 일인지 나는 모르겠다'며 이해하고 넘어갔다.
나아가 신하에게 작은 술작을 내려 절주를 권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