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전: 김두규, 조선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궁리출판사 2000. 축약
윤선도
정조 임금이 인정한 풍수학인 문학가로서 더 잘 알려진 윤선도(1587-1671)는 풍수학사에서도 비중을 갖는 인물이다. 지금까지도 그의 고가(해남 녹우당)와 무덤이 명당으로 알려져 많은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고, 또 실제 그 두 곳이 풍수지리상 좋은 자리이다. 뿐만 아니라 윤선도 자신이 풍수지리에 정통한 까닭에 왕릉 선정에 관여하기도 한다. 참의 벼슬을 마지막으로 은거하고 있던 윤선도는 당시 산릉 역사의 총책임을 맡고 있던 좌의정 심지원에 의해 왕릉 선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추천을 받는다. 그때 고산의 나이 73세로 병든 몸이었다. 병든 몸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러 곳을 간산하여 수원 땅을 최고의 길지로 추천한다. 훗날 정조임금은 윤선도의 풍수실력을 무학대사와 같은 반열로 놓을 정도였다. 정조임금은 윤선도의 풍수를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참의 윤선도는 호가 고산인데 세상에서 오늘날의 무학이라고 부른다. 풍수지리의 학문에 대하여 본래 신안의 실력을 갖추었다."
풍수학인으로서 최고의 단계인 "신안"으로 정조임금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던 윤선도가 언제부터 어떠한 연유로 풍수지리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홍우원이 쓴 윤선도 시장(諡狀)에서 "의약, 복서, 음양지리"까지 통달하였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 처럼 개인적이 취미와 처고모부로 알려진 광해군 때의 명풍수 이의신과의 만남 등을 통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그가 풍수학사에서 비중을 갖는 효종의 왕릉선정 작업에 참여한 뒤 당시 임금인 현종에게 올린 [산릉의](1659년)와 당시 좌의정으로서 총호사였던 심지원에게 보낸 편지 및 [산릉간산시추고함답]에서 자신의 풍수관을 비교적 자세히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산릉의]와 심지원에게 보낸 편지는 17세기 중엽의 풍수지리 면모를 살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윤선도가 당시 효종이 죽자(윤선도는 개인적으로 효종의 대군시절의 사부였다), 좌의정 심지원 등과 함께 살펴본 땅은 과천의 임영대군 묘, 장단의 김영렬, 교하의 윤반, 광주의 정난종, 남양의 홍언필·홍기영, 광주의 이증 등의 묘가 있는 산과 양재역 뒷산, 한강 북변의 산, 왕십리 해동촌 그리고 이충작의 산과 정토 근처 등지였다. 우선 윤선도의 [산릉의]를 그대로 소개하여 당시의 풍수지리가 무엇인지를 우선 살피도록 한다.
윤선도의 산릉의
"김영렬 묘가 있는 산 평지의 용(龍)으로서 멀리서부터 발원하는 아주 어린 룡(嫩龍)입니다. 꾸불꾸불 내려오다가 강과 큰 들판을 만나 똬리를 틀었는데 마치 등나무가 서로 엉킨 듯 합니다. 산마다 물마다 유정한 곳이니 바로 이런 곳에 혈이 맺히는데 진실로 옛사람들이 말한 '마디마디마다 옥의 땅(玉之地)'란 바로 이런 곳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김영렬의 산소는 바로 이렇게 여러 개 맺힌 혈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많은 혈이 맺힌 까닭에 그 가운데 단연 뛰어나 특이한 혈이 없어서 국가의 왕릉으로 쓰기에는 불가능할 듯합니다.
윤반 묘가 있는 산 용혈사수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칭찬을 하니, 진실로 쉽게 얻을 수 없는 길지인 듯합니다. 그러나 큰 용에 크게 혈이 맺힌 것이 아니기에 왕릉으로서 생각해보기에는 부족합니다. 게다가 여기는 세조 임금의 장인 무덤이 있기에 산을 보러 감에 있어서도 그리고 그 산에 들어가서도 마음이 편하지가 않습니다. 감히 그 좋고 나쁨을 논할 수 없습니다.
광주 속달에 있는 동래군(東萊君) 묘지 산세가 울창, 약동하면서 뭇 산이 한곳으로 모여들어 감싸 돌고 있어 길지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당이 한쪽으로 기울었고, 내수구가 죄여있지 않아 빠져나가는 물이 2천 보 거리나 보이고 있습니다. 완전무결한 국세가 아닌 것으로 사료됩니다. 또 비록 이곳이 길지라 하더라도 한 능선 위에 분묘가 17기나 쓰여져 있습니다. 이 집안에서 이미 200여 년 동안 큰 벼슬아치들을 배출하였습니다. 지기발설이 이미 오래되었고 더 이상의 지기가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남양 홍정승 묘소 홍기영 족장(族葬) 용세는 멀리서부터 숨었다 나타났다 하면서 구불구불 내려오고 있습니다. 소조산은 높고도 위엄스럽게 솟아있으며 명당국세가 주밀합니다. 조산과 안산은 유정하여 길지가 틀림없습니다. 홍정승 묘와 홍기영 두 무덤이 모두 같은 국(局)안에서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홍기영의 묘 약간 위에 또 홍섬의 무덤이 있는데 이는 곳 홍기영의 아버지로서 역시 정승을 지냈습니다. 등록에 기록된 전술한 '홍정승'은 이름이 홍언필로서 이는 다시 홍섬의 아버지입니다. 또 홍언필의 무덤 바로 아래에 또 하나의 무덤이 있는데 그 비명에 벼슬이름인 홍동지라고 적혀있을 뿐 그 이름이 적혀 있지 않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홍언필의 아버지 무덤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이곳은 이 산으로 인해 명당발복을 본 홍씨의 시조무덤들로서 대대로 높은 벼슬을 배출하였는데 백 여 년이 채 안된 사이에 그러한 것입니다. 이로 볼 때 산천정기가 제대로 비축이 된 완전한 땅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여기에 무덤을 써 명당 발복을 바란다는 것은 마치 백발의 노파에게서 아들 낳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것으로 옛사람들이 심히 경계하였던 것입니다. 어찌 감히 이런 곳을 왕릉 후보지로 논의를 할 수 있겠습니까?
수원 호장(戶長) 집 뒷산 신이 삼가 이 산을 살펴보았는데 용혈사수(龍穴砂水)가 지극이 좋고 아름다워 작은 흠집하나 없습니다. 진실로 탁월한 길지로서 천리를 살펴도 그와 같은 곳은 없으며, 천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하는 자리입니다. 안팎과 주변 모두가 길격입니다. 모든 술관들이 충분히 이에 대해 진달할 수 있을 것이어서 제가 반드시 중복하여 자세히 말씀드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대체로 그 용의 국세는 영릉(세종임금의 능)에 버금가는 것으로서 주자(朱子)가 말한 종묘를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는 계책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낙생역 이증(李增) 묘 용과 사가 모두 순하긴 하나 이 국내(局內)에 작은 혈이 맺혔을 뿐으로 볼 것이 없습니다.(...)
양재 신천산 주변이 잘 둘러싸여 있으나 산세가 매우 어립니다. 높은 곳에 자리를 잡을 경우 너무 지나치게 드러나고, 낮은 곳에 자리를 잡을 경우 푹 들어가 보여 비록 자리가 되긴 하였으나 왕릉으로서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벌아치(伐兒峙) 산 남산의 끝 부분에 잇는 곳으로서 몸을 돌려 역세를 이루었습니다. 청룡백호가 갖추어져 있으나 청룡백호의 끝 부분에 힘이 있습니다. 안산 앞의 말은 역수가 되어 활처럼 감싸안았으며 조산은 유정합니다. 길지를 이룬 것은 완연하나 전체적으로 볼 때 이곳은 산의 앞의 아니라 산의 뒷면에 있습니다. 따라서 그 여기(餘氣)는 오래 가지 못하고, 명당은 반듯하지가 않고, 산능선 고개 진 곳(과협처)이 손상되어 있습니다. 옛사람들이 말한 병든 용에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임금의 옷과 관을 묻을 만한 장소가 아닌 듯 합니다.
왕십리산 주변이 잘 둘려 쌓여 있고, 조산과 안산이 모두 갖추어져 있어 혈을 맺은 곳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혈 근처 맥이 보내고 맞이함이 없고(변화가 없고), 맥의 형태 또한 둔합니다. 혈 앞의 여기(餘氣)가 뭉친 순전(脣氈)은 단정하지가 않아 쓸 수가 없습니다.
건원릉(이태조 무덤)안에 있는 신득산 신이 삼가 목릉(선조 임금 무덤) 옛터가 있는 곳의 우측 두 번째 언덕을 살펴보았습니다. 산능선의 기복 횟수가 4회인데 그 기상이 매우 어립니다. 안산은 유정하고 수구는 잘 죄여있는데다가 조산은 수려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곳은 좋습니다. 그러나 혈도(穴道)가 급하여 혈처에서 골바람이 비스듬하게 불어오는 것이 흠입니다.(...)
건원릉(이태조 무덤) 좌측 첫 번째 언덕 일찍이 주자가 말하기를 조상근처에 무덤을 쓰면 조상의 영혼을 놀라게 하니 불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건원릉 좌측 첫 번째 언덕은 건원릉의 입장에서 보면 청룡에 해당되며 그 거리가 60보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목릉(선조 임금 무덤)의 입장에서 보면 백호에 해당되는데 목릉과의 거리는 40보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연히 편안할 수가 없습니다. 청룡과 백호의 땅을 파서 상하게 한다면 이는 곳 선왕의 능에 해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선왕의 능에 해다 있다고 한다면 용맥, 혈도가 제대로 되었는가 여부나 그 좋고 나쁨의 여부는 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산릉의]에서 윤선도는 수원에 있는 땅을 가장 좋은 자리로 보고 "도선이나 무학과 같은 사람이 무덤에서 다시 일어난다 해도 같은 말을 할 것"이라고 극찬한다. 윤선도는 당시 자신을 추천하였던 좌의정 심지원에게 보낸 편지에서 수원 땅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 전문을 살펴보면 윤선도의 풍수지리를 더욱 자세히 살필 수 있다. 다음은 심지원에게 보낸 편지이다:
"감여의 법에 비록 진룡의 대지라 하더라도 혹 혈을 짚는데 착오가 있거나 혹 좌향에 착오가 있으면 길하고 흉함이 하늘과 땅의 차이가 생기니, 옛사람이 말한 바 이는 징험한 일게 관계된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수원의 산은 큰 풍수로서, 안목을 갖춘 사람이라면 감히 흠을 잡지는 못하겠지만 다만 혈을 짚을 때 보는 바에 의견의 차이가 있으니, 옛사람의 말에 이르기를 '산세를 바라보고 용을 찾기는 쉽고 산에 올라 혈을 짚기는 어렵다'고 한 것이 맞습니다. 또 이르기를 '3년을 배워 용을 찾을 수 있으나 10년을 배워도 혈을 짚지는 못한다'하였습니다. 이 산이 입수하는 맥은 명백하여 의심이 없으나, 맥 아래에 유두(乳頭)가 있고 유두 아래에 평탄한 곳이 있으며, 평탄한 곳 아래에 요(褥)가 있으니, 자세히 살펴보면 그 유두는 달리고 희롱하는 기세가 중지되지 않고 또 둥글게 뭉친 곳이 없으며, 청룡과 백호가 점점 낮아져서 흡족하지 못하니, 혈이 맺힌 곳이 아닌 듯합니다. 그리고 평탄한 곳은 형체가 구불구불하니 여기가 진실로 둥글게 뭉친 뜻이 있고, 청룡 백호가 흡족하여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으니 여기에 혈을 맺은 것이 분명한 듯합니다. 만약 좌향을 논한다면 구슬을 안대하여 빈곳으로 향을 놓는 것이 바꿀 수 없는 정리입니다. 전설에 옥룡국사(도선국사)가 이 산을 서린 용이 구슬을 희롱하는 격이 된다고 하였는데, 이 용은 진실로 복룡의 대지이고 국을 이룬 형세는 완연히 서린 용과 같고 하나의 둔덕은 앞에서 구슬이 되니, 이는 고격(古格)에서 말하는 품안으로 들어온 안대이니, 전설의 말이 헛되지 않은 듯합니다. 어떤 사람은 한 둔덕은 낮고 작아 중시할 것이 못된다고 하지만, 고격에 이르기를 '천 길이나 되는 높은 산이라도 평지의 한 둔덕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낮고 작다 하여 하찮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물건의 형상은 이치가 있으니, 지형이 물건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 아니고 물건의 형상이 천지를 본받는 것입니다. 이 둔덕은 이미 용의 턱 아래 구슬을 형상한 것이니, 하필 커야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작을수록 더욱 귀한 것입니다. 고격에서 안산을 논하기를 '세 봉우리는 중간의 봉우리를 대하여야 하고 두 봉우리는 공간을 대하여야 한다. 공간을 대하는 이유는 요컨대, 두 봉우리를 아울러 쓰자는 것이고 좌우가 고르고 바람을 요하는 것이다. 또 공간을 대하면 공간이 당면(當面)이 되어 해로울 것이 없고, 한 봉우리만을 치우치게 대하면 공간의 바람이 혈속으로 침범하여 쏠 것이니 해로움이 작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생각해보면, 두 봉우리에서 공간을 대하는 법이 조화의 묘법에 맞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형국은 본체가 되고 음양은 작용이 됩니다. 진실로 참된 형국과 바른 좌향을 얻는다면 스스로 천연적인 자연의 묘용에 합하므로 음양은 구구하게 구애될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구슬을 안대로 하고 빈곳을 향으로 하여 좌우로 옮긴다면 어찌 음양에 맞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음양에 구애된다 하더라도 120 분금이 이미 많아 참된 것을 얻기가 어려운데, 더구나 360 분금에서 꼭 참된 것을 얻겠습니까.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산에 오르면서 반드시 나경(패철)을 찰 필요는 없다'고 하였고, 또 '다만 좋은 주인이 어진 손님을 대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감여가에 있어서 대중지정(大中至正)의 긴요한 의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의 얕은 소견으로는 평탄한 곳에 구슬을 안대로 하고 빈곳으로 향을 놓는 것이 바꿀 수 없는 이치가 됩니다. 그러므로 유두에 혈을 짚으면 평탄한 곳에 못 미친다 하더라도 구슬을 안대로 하고 공간을 향으로 하니 오히려 가하겠지만, 평탄한 곳의 진혈을 잃고 또 구슬을 안대하여 빈곳으로 향을 놓은 묘법을 잃어버린다면 대룡(大龍)의 대국이 한갓 겉치레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애당초 혈을 짚을 때 힘써 다투려고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나를 믿어주지 않아 말을 하더라도 유익함이 없고, 저 역시 이 산이 꼭 나라에 쓰일 것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다만 여러 번 소견을 진술하고 다투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어쩔 수 없이 꼭 이 산을 쓴다면 착오를 일으켜 해를 입을까 두렵습니다. 여러 술객 가운데 이최만이 구슬을 안대로 하고 빈곳으로 향을 놓은 것이 분명하다는 이치를 압니다. 대개 이최만은 자품과 식견이 무리에서 뛰어나고 그 아버지의 대사를 위하여 여기에 종사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법술을 다 배웠고 또 큰 근본을 세워서 그 요령을 터득하는데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윤선도가 편지에서 밝힌 것처럼 자신의 주장이 채택하지 않는다. 결국 효종의 능은 이태조가 묻혀있는 경기도 구리시 건원릉 부근으로 정해진다. 윤선도는 이에 대해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한다. 첫째는 혈이 맺히지 않았으며, 둘째는 조상 무덤 근처에 장사를 지내서는 안 된다(不可侵葬祖塚)는 이유이다. 그러나 당시 당파를 달리하던 송시열, 송준길의 의견이 채택되어 효종의 무덤은 건원릉 옆에 조성된다. 이때 윤선도는 개인적으로 친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10년이 채 안가 능에 큰 변고가 있어 반드시 이장을 할 것이요. 나는 이 일을 보지 못하고 죽겠지만 제공들은 보게 될 것이오. 그 때 내 말이 생각날 것이오."
그로부터 15년 후 윤선도의 예언대로 효종 왕릉에 붕괴사고가 발생하여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로 옮겨진다. 윤선도가 극찬하였던 수원의 땅은 그로부터 130년이 지난 다음에야 정조 임금에 의해 그 진가를 인정받아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융릉)이 된다. 정조 임금은 사도세자의 능을 이장하는 과정에서 수원 땅이 길지임을 알아본 윤선도를 높이 평가하여 몇 번씩이나 그를 칭찬하였을 뿐만 아니라 윤선도의 후손에게 벼슬을 주도록 하였고, 능의 조성으로 옮겨진 신(新)수원에 집터를 사주도록 할 정도였다. 결국 130년만에 윤선도의 풍수지리가 명예회복을 한 셈이다.
[산릉의]에 나타난 윤선도의 풍수지리 산릉의에 타난 윤선도의 풍수지리 특징은 다음과 같다. 그는 ---유학자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주자(朱子)의 [산릉의장]에 따라 풍수를 논하고 있다. 따라서 풍수지리의 두 가지 유파 가운데 형세론에 입각하여 풍수를 논하며 좌향 및 수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기론은 전혀 언급이 없다. 조선 초기 천도 과정과 중기 선조 임금 때 잠시 언급되었던 호순신의 이론도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용혈사수의 좋고 나쁨만을 가지고 산을 논하였다. 또한 이미 명당 발복을 본 산에 다시 무덤을 쓸 경우 지기가 이미 모두 누설되어 명당발복이 불가능하다고 하여 '고총불가장(古 不可葬)'론을 고수하고 있는 점도 특징이다. '고총불가장' 뿐만 아니라 조상 무덤 근처에 무덤을 쓰는 것도 조상의 영혼을 놀라게 하기 때문에 묘지로 쓸 수 없다는 주자의 주장을 그대로 따른다. 그는 "산을 보는데 일이 처음 보는 것보다는 두 번째 보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 하여 간산의 신중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현대까지도 묘지 풍수가 극성을 부리면서 일부 직업 풍수들이 남의 산을 대충 한번 훑어보고 길흉을 논하는 경박함과 대조적이다. 윤선도의 풍수지리에서 눈에 띄는 것이 안대(案對)론인데, 훗날 정조에 의해 그대로 수용되어 사도세자의 무덤의 좌향 정하기에 그대로 적용된다. 윤선도는 좌향을 정할 때 이기론에서 중요시하는 분금법을 거부하고 앞산의 형상을 보고 좌향을 정하려 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안대론은 해남에 있는 그의 무덤의 좌향에서도 그대로 적용된 듯하다. 윤선도의 [산릉의장]과 심지원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묘지 풍수만이 풍수의 전부인 것처럼 논의가 되어있다. 그것은 왕릉선정 과정에서 쓰여진 것이기도 하지만, 이때는 이미 조선 초기까지 남아있던 양기풍수나 비보풍수는 사라지고 묘지 풍수만이 풍수지리의 전부로 자리 잡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의신이 소점한 자리를 알아본 윤선도 해남지방에 지금까지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이의신이 해남의 연동 녹우당에서 고산과 함께 기거하고 있었다. 이의신이 밤중이면 몰래 말을 타고 집을 빠져나가 새벽녘이면 들어오곤 하였다. 평소 이의신의 풍수지리 실력을 알고 있었던 고산은 이의신이 명당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짐작하였다. 어느 날 고산은 이의신으로 하여금 술에 먹여 일찍 잠에 들게 하였다. 잠이 든 것을 확인한 고산은 평소 이의신이 타던 말을 앞세웠다. 말은 주인 이의신이 밤중이면 언제나 가곤 하던 그 길을 따라 한참을 가다가는 어느 지점에 멈추었다. 고산이 말에서 내려 그 자리를 살펴보니 과연 길지였다. 고산은 주변에서 썩은 말뚝 하나를 찾아내 혈처에 묻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고산은 이의신에게 자신이 잡아놓은 자리가 하나 있으니 한번 보아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고산이 이의신을 안내한 곳은 바로 이의신 자신이 잡은 자리였다. 이의신은 깜짝 놀라 '명당에는 임자가 따로 있다'라는 말과 함께 그 자리를 고산에게 양보하였다. 다른 이야기가 또 전해진다. 윤선도에게 명당을 빼앗기자 화가 난 이의신이 윤선도와 크게 싸우고 연동을 떠나 서울로 가다가 둔주포에서 어느 장사꾼에게 자리를 하나 잡아주었다. 그 덕으로 장사꾼은 큰 부자가 되었다. 지금부터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그곳에는 해마다 음력 6월 초하루 전날 저녁에 6-70명씩의 상인들이 낫을 들고 와 무덤 주변에서 잠을 자다가 새벽이면 서로 그 무덤 벌초를 하곤 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일년 장사운이 좋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위 두 가지 이야기는 모두 이의신과 윤선도가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윤고산 묘 윤고산의 무덤은 해남군 현산면 구시리와 삼산면이 경계하는 "성터"(이곳 사람들이 山정상에 축성된 성을 그렇게 부르나 축성 년대나 용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가 자리하는 산 끝 지점에 위치한다. 고산의 풍수실력이나 그 밖의 정황으로 보아 이의신의 추천으로 고산이 직접 정한 자리라고 보여진다. 고산 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무덤까지 이어지는 산줄기(용)이다. 이 명당의 태조산이라 할 수 있는 해남군 삼산면 두륜산(대흥사 위치)이 자리한 남쪽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가 다시 북쪽으로 이어지다가 또다시 방향을 틀어 서쪽으로 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몸을 360도 돌려 거의 정북에 가깝게 좌향(巳坐亥向)을 정하고 있다. 대개 용들은 변화를 보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일직선으로 흐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경우 마치 달팽이 껍질이나 소라 껍질 마냥 나선형으로 뱅뱅 돌아가다가 맨 끝에서 하나의 혈을 맺는다. 이렇게 나선형으로 뱅뱅 감아 들어가는 경우를 특격으로 치며 큰 명당이 성국된다. 이 무덤의 안산과 조산은 해당되는 산들은 이 무덤에서 거꾸로 거슬러 360도를 돌아나가면 도달할 수 있다. 이러한 형국의 용을 회룡(回龍) 혹은 반룡(盤龍: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모습과 같은 산줄기)라 부른다. 많은 풍수지리서의 물형도(명당의 형상을 사물에 유추하여 그려놓은 명당도)에서는 이를 반사형(盤蛇形: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형국), 회룡고조혈(回龍顧祖穴: 자신이 처음 출발하였던 산을 되돌아 보는 형국) 혹은 반룡은산혈(盤龍隱山穴: 똬리를 틀어 명당을 숨기는 형국) 등으로 표현한다. 고산의 무덤이 자리한 혈장은 그 크기가 왕릉에 버금간다. 윤선도의 풍수지리술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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