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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론의 장미(I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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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좌 스크랩 08강 타락 (3)
최재구 추천 0 조회 11 11.08.08 19:5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창세기 공부를 안했기 때문에 절을 해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제사드릴 때 어찌 할 바를 모릅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이 와서 나도 아직은 젊은데 명절에 와서 세배를 한다고 합니다. 그건 절대 안 됩니다. 하나님도 아직 절을 못 받는데, 세상의 모든 온갖 잡신들은 절을 받는데, 하나님은 아직 절을 못 받습니다. 석가모니도 절을 받고, 알라도 절을 받고, 온갖 귀신 잡신들은 절을 받는데, 하나님은 아무도 경배하지를 않습니다. 절을 안합니다. 또 노래할 때 보면, 엎드려 절하세 해 놓고 절을 안 합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면, 절을 해야 된다고 봅니다. 예배라는 말이 예의를 다하여서 절을 한다는 말입니다. 절 배(拜)자입니다. 맞습니까? 예배한다면서 뒤로 젖혀가지고, 설교 잘 하는가 보자하고 있고. 하나님만 절을 못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내까진 게 누구관대 사람들에게 절을 받겠어요. 또 절을 받으면 세뱃돈을 줘야 하니까. 저보고 절하지 말라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절 받기까지는 절 못 받는다 하는 겁니다. 어른들도 생각을 해봐야 되요. 하나님이 절 받기까지는 우리가 좀 보류합시다.

 

솔직히 예배당들, 우리 교회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거 같아요. 의자를 다 들어내고 바닥에 카펫을 깔고, 예배 시작하면 하나님께 대하여 절~ 하면, 강대상에서 댕하지 말고, 징하면, 절 다 하고, 그리고 앉아서 말씀 듣고, 마치고 나갈 대, 인사하고 나가야 할 거 아니에요. 징소리 징하면, 반드시 코하고 이마가 땅에 닿게. 그렇게 해야 할 거 아니에요? 옛날에는 그렇게 했어요. 옛날에는 한 30년 전에는 예배당에 의자가 없었고, 마룻바닥에 방석 있고, 무릎 꿇고 앉아서 예배드리고, 기도도 물론 엎드려 기도하고, 무릎 꿇고 기도드리고 했단 말입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심리가 충족이 되었는데……. 맨 처음에는 의지가 엉덩이만 걸치는 포장마차 집에 있는 거, 이런 의자가 있었는데, 뒤에 뭐 대었으면 좋겠다고 하고, 처음에 댄 의자는 직각으로 선거 하고, 꼿꼿이 앉아서 예배했어요. 또 뒤로 제쳤으면 좋겠다하고, 대고, 등짝에 뭐 좀 깔았으면 좋겠다하고 대고, 발을 좀 얹었으면 좋겠다 해서 얹었어요. 조금 있다가 누웠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인간 편의주의로 가니까, 그런 식으로 가니깐 예배하고도 예배하는 기분이 안 나는 거예요.

 

지금 영국 같은 데는 기독교가 텅텅 비고, 의자 다 들어내고 엎드려 절하는 종교는 이런 건 다 잘 되요. 가서 무릎 꿇고 경배해 보니까 예배한 맛이 나는 거예요. 실감이 나는 거예요. 절대자 앞에 무릎 꿇고 경배해 보니까 경배심리, 종교심리가 충족이 된다는 거예요. 공부할 때는 공부하는 강의실에서는 교회에서도 의자 놓고, 책상 놓고 하되, 예배하는 곳에서는 의자 없이 카펫 깔아가지고 절하는 게 옳지 않겠는가 하는 겁니다. 절간도 그렇게 하고, 안 바꿉니다. 절대로요. 부처 앞에 대웅전에 의자 있는 데가 어디 있어요? 의자 없어요. 또 알라신에게 이슬람교회 알라신에게 의자 없어요. 어디 의자 있어요? 감히요. 세계 만국을 가 봐도 카펫 깔고 바닥에 절해요. 하루 다섯 번씩이나. 세상에 그런 잡신들도 하루 다섯 번이나 절을 받는데, 하나님은 그저 일 년 내내라도 하나도 절을 못 받고. 어떻게 이렇게 되었어요? 아무도 예배학에서, 무슨 실천신학적으로 예배학적으로 가르치는 곳이 없습니다. 저 혼자 얘기하는 거예요.

 

우리 동기 목사 중에 한분은요, 나보다 우리보다 몇 살 젊은데, 추수감사절을 제사를 하면요, 예배가 아니고 추수감사제라고 하면서 온 면민을 다 모아요. 학교 운동장에. 그리고 제상을 차려요. 온갖 과일을 다 차려놓고 전체 면장부터 와서 시작해서 초혼하면서 절을 하고, 온 면민이 다 같이 절을 한 후, 하나님께 잔을 드리고. 전체 면민이 줄다리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씨름하고 합니다. 참 대단한 사람이죠. 그리하니까 온 면민이 다 하나님을 믿는 겁니다. 신앙생활의 상태는 모르나 면민이 다 하나님은 믿는 겁니다. 이분은 예배 시간에 장구치고 북 치면서 이렇게 찬양도 하고, 징~하고 하니까 노회에서 말썽이 난 거예요. 종교 재판에 불려갔어요. 왜 예배당에서 피아노를 하지 않고, 징을 치고 장구를 치고 하느냐? 고 신문을 당하는데, 이게 종교재판이구나 하고 걱정이 되었다고요. 나는 성경대로 합니다. 성경에 보면 소고 치고 춤추며 예배를 드리는데, 여러분들은 왜 성경에 없는 피아노를 치면서 예배를 합니까? 했더니 아무도 말을 못하더랍니다. 나는 갑니다 하고 왔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엉뚱한 짓하면서 제대로 하는 곳을 비판을 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렇게 성경강좌 하는 게 정상인 겁니다. 안하는 게 이상한 것이고. 하나님께는 절을 하는 게 옳다고요. 의자는 최근에 생긴 것입니다. 지금은 누가 주일날 의자를 싹 다 들어내고, 바닥에 엎드려서 절했다면 십자가 숭배했다고 하면서 온갖 이단 삼단하면서 난리굿이 날 것입니다. 성경을 깊이 있게 본질적으로 공부를 해가면, 우리가 너무 너무 잘못돼 가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본질에서 너무 많이 이탈되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이탈되어 가기에 잘못 느껴서 그렇지, 사실은 너무 멀어졌습니다. 예배당에서 지금 의자를 다 들어낸다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고, 개인적으로는 기도실을 만들어서, 기도실에서라도 거기서라도 하나님께 좀 절하는, 엎드려 경배하는 그런 경배가 있어야 되지 않겠나. 여기는 절할 입장은 아니지요. 책상이 있어가지고. 여기는 의자는 안 들어올 겁니다. 여러분이 보통 높은 책상 놓고 의자에 앉으면 편할 것 같이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 발등을 만져봐요. 4박5일 동안 있으면 발이 통통 붓습니다. 장시간 앉아 있으면 지금 그냥 앉아있는 것이 가장 편한 자세입니다. 피가 다 밑으로 가니까 공부가 안됩니다. 아침부터 긴 시간 할 때는 그게 가장 편하다는 겁니다.

 

여러분, 용을 잘 보셨나요? 용을 잘 보면 그게 아주 웃기는 겁니다. 용은 머리가 자기 것이 아니고 돼지 대가리입니다. 몸은 뱀 것을 또 가져왔습니다. 뿔은 사슴 것을 훔쳐 왔어요. 발은 봉황 발을 훔쳐 왔습니다. 전부 자기 것이 아닙니다. 몸 안에 있는 엔진은 마귀입니다. 안에 들어 있는 영은 마귀고, 몸은 뱀 것이고, 발은 봉황발이고, 머리는 돼지 대가리고, 뿔은 사슴 것을 가져와서 자기 것인 양 행세하는 것이 용입니다. 그러니까 용은 생물학적으로는 존재를 하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세계 도처에 어느 민족에도 용이 있습니다. 이런 생물이 지구상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런 형상의 실상은 사탄이고, 형상은 뱀, 혹은 용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하면 비로소 신학이 되는 것입니다. 이 창세기에 나오는 뱀에 대한 신학, 용에 대한 신학은 이렇게 하면 정리가 되는 거니까, 절대로 뱀이나 용을 다른 말로 고치면 안 됩니다. 그냥 놔두어야 됩니다. 우리는 이해가 되는데 서양 사람들은 죽어도 이해를 못합니다. 신학자들도 말입니다. 신학적으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기본 실력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거기 가서 서양 가서 신학을 해 가지고 와서 뭐가 될 거라고 착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나중에 시간나면 서양 신학이 어디까지 잘못 나갔는가? 알면 기절할 겁니다.

 

사람은 누구의 형상? 하나님형상. 뱀은 누구의 형상? 마귀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이 마귀의 형상을 보고 절을 하면 되는 거예요? 안 되는 거예요? 안 되는 겁니다. 왜 우리가 우상숭배를 하면 안 되는 지 답이 나오죠?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다른데 구푸려서 절하면 안 되는 것이고, 우리가 사람을 학대하면 왜 안 되느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옆 사람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실상을 모독하는 겁니다. 모든 우리의 윤리가.

 

그냥 내 인격이 소중한 것처럼 네 인격이 소중하다 그런 정도가 아니고, 기독교의 윤리의 맨 기초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겁니다. 제가 신학교에 가 보면 우리 앞서서 신학교 졸업한 사람들이 이른바 하나님의 형상 이마고 데이라고 해서 논문을 많이 써 놓았어요. 읽어보면 전혀 아무것도 모르게 써놓았어요. 그런 거 통과된 거보면, 논문 쓴 사람도 모르고 심사한 사람도 모르는 거예요. 학위 주고. 한심한 노릇이죠. 성경을 제대로 읽어야만 그런 개념들, 용이라든지, 뱀이라든지, 사탄이라든지, 죄라든지, 타락이라든지, 창조라든지 이런 개념들이 정확해야 합니다. 이런 전체 주제가 다 맞아야 성경에 있는 퍼즐이 맞아져서, 계시록까지 맞아야 비로소 설교를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안 된 상태에서 설교나 강의는 항상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다 흩어져 버리고, 영원히 맞출 수 없는 퍼즐, 그저 횡설수설에 불과합니다. 진리가 체계화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떠돌아다니는 설교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만이 진정한 경배의 대상입니다.

 

한번은 겁대가리도 없이 사탄이 마귀가 예수님을 보고 절을 하라고 합니다. ?내게 한번만 절을 하라. 다 넘겨주겠다.? 아주 수지맞는 것 같죠? 그런데 다 받아 봤자, 마귀에게 절을 하면 마귀의 밑이죠? 하지만 예수님이 뭐라 하세요? ?다만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하셨습니다. 경배라는 말은 우러러 절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우러러 보고 절을 하는 것이 경배에요. 그런데 절을 안 해요. 제가 안타까운 얘기에요. 제가 절한다고 해서 무슨 또 한 교단 만들면 이단 뭐라 할 겁니다. 알긴 알면서도 실천을 잘 못하고 있어요.

 

창세기에서 이런 점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많은 걸 놓치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도 뱀이, 마귀가 우리 꿈속에 나타났을 때라든지, 의식과 무의식속에 나타났을 때, 뱀이 사람보고 말을 합니다. 내가 무안교회에 있을 때, 할머니 한 분이 교회에 나오는데, 할머니도 정신이 온전치 못하고, 아리송한 할머니인데, 집에 가면 방에 남자가 둘이 누웠다는 거예요. 그리고 항상 자기 귀에 뭐라 뭐라 떠든다는 거예요. 귀신이. 또 어떤 때는 뱀으로 나타나서 말을 한다는 거예요. 이것이 영적으로 실제적으로 악령이 하는 겁니다. 여자가 처음에 뱀이 와서 접근을 할 때 보면 아주 놀랍게 합니다. 잘 봐야 해요.

 

뭐라 하느냐? ?하나님이 참으로 동산 모든 나무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렇게 질문을 헷갈리게 던집니다. 질문을 정직하게 하면 답이 정직하게 나오면 이야기가 안 돼요. 수작을 걸 때 질문을 헷갈리게 하니까, 답도 헷갈려요. 여자가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실과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고, 먹는 날에는 죽을까 하노라?한 것 같다. 아리까리 한 거죠. 뱀이 단호하게 하죠. ?결코 죽지 않으리니 먹으라.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네가 눈이 밝아져서 네가 하나님처럼 될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는 오래 갈등을 하지 않습니다. 남자는 한 15일 갈등하지만, 여자는 15분도 갈등을 하지 않아요. 그래서 여자가 좀 오래 삽니다. 남자들은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고민하고 갈등을 하니까, 결단하는 데 오래 걸려 고민하고, 여자들은 머리가 잘 돌아가기 때문에, 빨리 결단을 합니다.

 

인류 역사상 여자는 철학자가 안 나와요. 깊이 생각을 해야 철학이 될 텐데, 깊이 생각할 시간이 있어야지. 또 여자가 철학을 하면 또 그거 가관이겠지요? 뭐 생각하는 여자 해봐요. 조금 갈등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먹지 말라. 뱀은 먹으라. 먹지 말라면 좀 기분이 나쁘죠? 뱀은 먹으라. 또 하나님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죽는 게 뭔지 모르지만 기분 나쁜 거야. 뱀은 네가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누가 긍정적입니까? 예, 긍정의 힘이죠. 뱀이 훨씬 긍정적이고 항상 적극적이고, 하나님은 소극적이고 먹지 말라 부정적이고.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그래 여자가 가만히 생각을 해 볼 때, 어차피 한 편은 거짓말이에요. 그죠? 둘 다 참 말일 수 없어요. 한 가지 사실을 두고 상반될 때, 한 가지는 거짓말인 거예요. 하나님 말씀을 들어보니까, 까딱하면 먹어보지도 못하고 속는 거예요. 뱀의 말을 들어보면 속을 때 속더라도 먹어보고 속는 거죠. 어차피 하나는 거짓말인데 어느 한편을 택해야 돼요.

 

여자가 빨리 계산을 해서 까짓 것 속을 때 속더라도 먹을 때 먹어보고 속는 걸로. 여자는 금방 답이 나옵니다. 남자들은 보름이 가도 답이 안 나와요. 남편에게 부인들이 뭐 물으면 당장 대답을 안하죠? 안하면 부인들은 금방 삐져요. 자기가 말을 하는데, 들은 척도 안하더라면서. 들은 척도 안하는 게 아니고, 목하 고민에 빠져 있어요. 여자들이 벌써 잊어버리고 있어요. 여자들은 질문한 걸 모르고서 한 게 아니고, 관심을 가져달라는 고하면서 질문한 것뿐인데, 여자는 잊어버렸는데 한 보름 있다가니 ?참, 전에 뭐라고 했지…….? 합니다. 그때까지 고민을 한 겁니다. 그러니까 남자들은 메카니즘이 달라요. 기계가. 그런 특성을 서로 이해를 못하면 참으로 어려워요. 그러니까 대부분 이혼을 합니다. 성격이 너무 차이가 난다. 차이가 나죠. 하나는 남자고 하나는 여자인데.

 

여러분, 다른 걸 즐겨야 되요. 나하고 다른 것을 즐겨야지. 나하고 다르다는 것을 즐기고 그걸 누려야지 똑같으면 둘 중에 하나는 필요 없습니다. 똑 같으면 뭐 때문에, 한 집에 둘씩 두겠습니까? 하나면 되지. 다른 것 때문에 조화를 이루고 다른 걸 즐거워해야 되요.

 

머리가 빨리 돌아갔어요. 속을 때 속더라도 먹을 때는 먹어보고 속자. 그래서 빨리 땄어요. 보니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사실 그것이 아무 문제가 되는 것은 안 되는데, 문제가 안 되는 것인데 자꾸 뱀이 그걸 지적해서 문제를 삼으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호기심에 끌리면, 반드시 따든지 사든지 먹어봐야 해요. 그래서 여자가 선악과를 땄는데 먹어야지. 먹어 봤을 때, 여자가 먹자마자 그 자리에서 즉사를 했다면, 문제가 전혀 다릅니다. 역사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 것입니다. 문제는 여자가 따서 먹고 죽지 않은 데 있습니다. 그러면 누구 말이 많습니까? 뱀의 말이 맞다니까요? 뱀이 말이 맞기 때문에, 우리가 속는 겁니다. 뱀의 말이 안 맞으면 누가 속겠습니까? 안 죽었습니다. 이 원수가. 원수가 아니라 우리 할머니죠. 안 죽을 뿐 아니라. 결국은 안 죽으니까, 뱀의 말이 맞네 하면서 자기 남자에게도 주는 겁니다. 여자 말 안 듣는 남자가 없는 거지요.

 

남자도 먹으니 남자도 안 죽었어요. 둘이서 죽지 않는다는 체험을 해 봤습니다. 시험을 하고 실제적으로 체험을 해봤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입장이 곤란하게 되었어요. 하나님도 이 사람들을 믿게 하기가 어려워요. 하나님은 정녕 죽는다고 했는데 안 죽던데요. 그래서 안 죽는 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에 눈이 밝아. 누가 한 말입니까? 뱀이 한 말인데 그대로 눈이 밝아져 벗은 줄 아니라, 벗은 줄 알기는 뭘 벗은 줄 알아. 입어 본 것도 없는데 벗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부끄러워했다, 부끄러워해서 치마를 했는데, 당시 옷을 만들 수 있는 천이 있어야지. 그래서 무화가 잎을 엮어서 부끄러운 곳을 가렸다는 말입니다.

 

그러고 있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거죠. ?아담. 네가 어디 있느냐?? 물을 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묻는 거 아니지요.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 어느 편에 어느 처지에 있느냐? 어떤 자리에 있느냐? 네 삶의 자리가 어디냐?? 이걸 묻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물으실 때는 그 존재의 처지를 이야기하는데, 아담의 대답은 기하학적인 공간을 이야기 합니다. ?내가 동산을 걸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워하여 나무 뒤에 숨었나이다.? 숨었으면 말을 하지 말아야지. 아까 눈이 밝아서 부끄러워했다는 것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워했다고 하죠?

 

감정의 하나가 두려움이고 또 하나는 부끄러움입니다.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합하면 죄의식이 됩니다. 죄의식. 이런 게 굉장히 중요한 신학적인 용어이죠.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합하면 죄의식이 됩니다. 죄의식이……. 죄의식이라는 개념이 아직 정립이 안 되었을 때 뭐로 나타나느냐? 부끄러움과 두려움입니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 중에 지나치게 부끄러워하는 것. 좋은 것이 아닙니다. 물론 지나치게 뻔뻔스러운 것도 곤란하지만, 지나치게 부끄러워서 말도 못하고 눈도 못 뜨는 것은 곤란합니다. 누구 이야기가 아니고 제가 좀 그랬거든요. 얼마나 부끄러워하는지, 대인공포증, 여성공포증, 관청 공포증에다가. 여자들 앞에 가면 눈도 제대로 못 떴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그게 다 교만이고 다 죄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걸 다 드러내고 그러고 나니깐 자유한 거예요. 다 같은 실수와 부족을 할 수 있기에 더 편안한 것입니다. 한때는 다른 사람들은 다 굉장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내나 거기가 다 거기야. 코대대 눈대대 거기서 거기야. 가서 보니까 별 것도 아닌 거라. 최근에 알았어요.

 

제가 시골에서 컸기 때문에 바깥세상을 전혀 모르죠. 그러니까 나는 처음에 시골교회 전도사님이 저 정도 실력인데, 목사님 같으면 얼마나 굉장하겠는가? 목사님은 하나님 다음인 줄 알았어요. 그리고 목사님을 길러내는 신학교, 그 대학교수님들은 얼마나 위대하겠는가? 벌벌 떨면서 신학교 간 거예요. 이제 깨닫고 보니, 목사도 별 게 아니고, 신학대학 교수도 별 게 아니고, 신학도 순엉터리이고 말이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실망을 한 겁니다. 신학교 가가지고. 처음에는 1학년이니까 그러겠지. 2학년이면 뭐가 나오겠지. 나오긴 뭘 나와. 3학년 되면 뭐가 있겠지. 있긴 뭐가 있어. 4학년 되면 뭐가 있겠지. 4학년 되니까 졸업논문 하나 쓰고 나니 졸업여행 갔다 오니까, 끝나 버린 거야.

 

세상에 이거 좀 폭로 좀 해야 되겠어요. 졸업 여행을 가는데요. 신학생들이 제주도로 졸업여행을 가요. 뭐 하러 가나, 신혼여행갈 때 가게 아끼게 놔두지 말이야. 가는데 부산에서 카페리 호에서 타고 가는데, 페리호에서도 타면서부터 시작해서 제주도 도착할 때까지 고스톱을 해요. 끝났느냐? 3박 4일 동안 제주도 호텔에서 고스톱을 계속 해요. 제주도 돌아보는 건 7명만 돌아보고, 나머진 고스톱을 계속하는 거예요. 한라산까지 올라가는 사람 7명 올라갔어요. 저런 사람 신학교에 왔으니까, 한국교회 미래가 훤하다 훤해. 뭐 하러 왔어? 신학교에 와서 말이야. 전혀 거짓말 같죠? 사실을 얘기하는 거예요. 그래도 목사도 하고, 목회도 하는 거예요. 죽 보내면서 더 기가 막힌 소리는 신학교 교수들이 하는 소리가 성경도 모르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다른 학설도 있나 보다 하고 들었는데, 아니에요. 성경을 몰라요. 그렇게 엉터리일 수가 없어요.

 

여러분, 혹시 김요석 목사님 라는 한국 경남 사람인데, 독일에 가서 15년을 신학을 해왔습니다. 하도 신학교에서 실망을 했기에 카톨릭 신학교에까지 가봤데요. 별 수가 없어서 한국에 돌아왔는데, 그 분 이야기를 들어보면, 독일 신학이 기가 막힙니다. 독일의 튀빙겐 대학인데, 그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교수님의 강의를 등록을 했는데, 이분은 얼마나 인기가 있든지 그분 강의를 수강 신청한 학생들이 천명이 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반 교실에서는 안 되고 강당을 빌려서 첫 시간에 강의를 하는데, 첫 시간에 교수가 말하기를 ?여러분, 이 성경책이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이 우리 학생 중에 있습니까?? 아무도 대답을 안하더래요. ?이 성경을 자세히 보면 앞뒤에 있는 가죽은 진짜고, 안에 있는 내용은 별로 볼만한 게 없다. 우리 학교를 왔으니 잘 살펴보라고. 내 말이 진실인 것을 알게 될 거라고?

 

그래서 이따금씩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느냐로 묻기에 한국에서 간 학생이 손을 들었어요. 뒷자리에 앉아서 손을 들어서, 일어서라고 해서 보니 얼굴을 약간 노란색이니, 독일사람 같지 않으니까, 교수가 웃으면서 ?당신 어디서 왔느냐?? 하기에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아 그럴 줄 알았다.?고 웃으면서 ?한국은 아직도 미신이 심하기 때문에, 계몽이 덜 되어서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는가 본데, 우리 학교에 잘 왔다고 하면서 공부를 잘해보라?고 하더랍니다.

 

첫 시간의 강의를 마치고 기숙사로 와서 독일 친구인 룸메이트에게 물었다고 그래요. ?내가 오늘 독일어가 서툴러서 잘못 알아들었나? 아니면 진짜 그 교수가 그렇게 물었나? 나는 진짜 그렇게 대답을 했느냐??고 물으니 그 독일 친구인 룸메이트가 하는 말은 ?너 그럼 정말 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느냐??고 하드랍니다. 그래서 ?너는 안 믿느냐?? 하니까, 자기는 안 믿는다고 하기에 그럼 여기 뭘 하러 신학교에 왔느냐고 물으니 ?직업이 좋잖아?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해서 왔다는 거예요.

 

독일에서는 목사가 제일 좋은 최고급 공무원이랍니다. 목사가 되면 비서가 나오고 그 다음에 주택이 주어지고 봉급이 장관하고 똑같고, 삶이 완전히 보장이 됩니다. 최고인격자로. 한국에서면 수능은 만점을 받고, 내신 일등급쯤 되어야 신학교를 갈 수 있는 거예요. 그 다음 단계인 2단계 쯤되는 사람들이 철학과를 가고, 그 밑에 등급이 법대나 의대를 갑니다. 그런 곳에서 신학을 하고 왔답니다. 서구 신학 전체가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잘 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서양교회들이 하는 것을 따라 하면 안 됩니다. 미국교회들이 하는 것을 따라하면 안됩니다. 엉터리가 너무 많기에.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사대주의 근성이 있어서, 뭐든지 미국이나, 영국이나, 독일이나 그 뭐 배워 와야 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가서 보면 교회들이 다 죽었습니다.

 

하여간 창세기에 나오는 뱀의 이야기는 신학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고, 거기서 타락이 되면서. 결국은 선도 알고, 악도 아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더니. 이 부분을 사도 바울이 자기의 내면을 보면서 하는 말이 있는데, 로마서 7장에 나옵니다. 뭐라고 하느냐? 이상하다는 거예요. 자기가 봐도 이상하다는 겁니다. '선을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원치 않은 바 악은 잘도 행한다.'는 겁니다. 이게 도대체 뭐냐? 어떻게 원치 않는 악은 잘도 행하면서 선은 안하느냐? 가만히 자기의 내면을 들어다 보니까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다시 말하면 이중인격자라는 겁니다. 자기가. 이런 말을 하는 유일한 사람이, 최초의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 사도바울이 자기 자신이 이중인격자라고 고백을 합니다.

 

여러분,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라고 있죠? 기억나세요? 오래 전에 읽었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읽었는데, 신학을 하고 와서 이 문학을 재평가하면, 아주 진실한 자기 내면의 이중성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빛이, 진리가, 그 복음의 광체가, 자기 영혼의 내면에 비추기 전까지는 뭐가 뭔지, 암흑 속이었는데 빛이 들어오니까, 이 속에 선과 악이, 다른 내가 분열이 일어나요. 자기분열. 그게 로마서 7장입니다. 로마서 7장'선을 행하기 원하는 내게 악이 함께 있다'는 사실이 나와요. 이게 바로 창세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선악과 이야기를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릴 때에는 천사같이 깨끗하다가 나이가 점점 들어갈수록 사람이 악에 익숙해져요. 악에.

 

여러분,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을 먼저 쳐라?고 했더니, 누가 먼저 도망을 가던가요? 나이가 많은 자로부터 도망을 갔다고 하죠. 그래요? 안 그래요? 왜 나이가 많은 자부터 도망을 갈까요? 나이가 많은 자가 죄가 더 많거든요. 나이가 많으면 죄도 많은 거예요. 이 구절은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했더니, 전부 다 도망가고 여자 하나만 남아있어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며 끝이 나는데, 인간의 내면 속에 죄성이 있다는 거예요. 이것이 원죄입니다.

 

   

이게 가만히 놔두면 이렇게 됩니다. 완전히 지옥 가죠. 이쯤 되면 하나님도 고치지 못합니다. 이만큼이라도 선의 씨가 있어야 되요. 완전히 고갈되면 시동도 안 걸립니다. 그 말을 하나님과 말이 통할 수 있는, 인격적 대화가 될 수 있는 씨가 남아 있어야, 그걸 되살릴 수 있는 것이지, 완전히 영혼이 끝나버리면 예수님이 와도 안 됩니다. 예수님이 와도 사두개인들, 율법학자들, 바리새인들도 되는 거예요? 안 되는 거예요? 안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이 독사의 자식들아,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면하겠느냐?? 예수님이 왔을 때도 안 되었습니다.

 

인격적으로 대화가 안 되면 누가 와도 예수님이나 열두 사도가 다 와도 안 됩니다. 그런 것도 모르면서 책을 너무나 함부로 씁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지 못할 죄인은 없다.? 그런 책이 나왔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지 못할 죄인은 없다는 말은 좋게 말해서 하나님을 좋게 말하는 것 같이 보이죠? 하나님은 아무리 흉악한 사람이라도 구원할 수 있는 것처럼 좋게 말하는 것 같이 보이는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구원하지 못한 인간은 없는데, 그렇다면 어떤 사람은 왜 구원하지 않은 것입니까? 하나님이 게을러서 안합니까? 하나님이 사랑이 없어서 안합니까?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하나님도 어쩔 수가 없어요. 그런 이야기를 구약성경을 안 읽어 봤기에 함부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지금부터 차근차근 읽어가면서 공부를 하게 되면, 하나님도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계속 들은 이야기인데,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하신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능력으로 하시지 않습니다. 능력이나 완력으로 하지 않고 뭐로 하느냐?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하십니다. 안되면 안 되더라도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하십니다.

 

인격적으로 한다는 말은 뭐로 한다는 이야기입니까? 말로 한다는 것입니다. 주먹으로 하지 않고. 대화를 통해서 말을 해서 인격적으로 말이 될 때만 한다는 겁니다. 말로 하시기에 누가 필요합니까? 그래서 목사나 전도사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과 대화를 하려고 할 때, 그걸 소통시키는 게 성경과 목사에요.

 

그런데 성경을 바르게 읽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소통시키는 그 일을 오늘날 목회자들, 신학자들, 목사, 교사, 선교사 이런 사람들이 제대로 해야 되는데, 2차 전달이 바르게 안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안 되고 있다는 것을 앞으로 계속 볼 것입니다. 앞으로 더 안 됩니다. 여기 지금 한 400명이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꼬박 앉아서 듣고 있다는 것은 창세 이후에 이런 일이 없었어요. 이거 잘 안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주일날 낮 예배에 가서 1시간 예배하는데, 거기다가 뭐 설교하는데 30분도 아니고, 20분 하는데, 소통된다? 그건 꿈같은 얘깁니다. 전혀 어림도 없어요. 상상도 할 수 없어요. 사람은 많이 모아 놓았는데, 거기 성분 내용을 들어보면 정말 경악할 얘기입니다. 되는 게 아니에요. 제대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가 되려면, 아무 말 말고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다 들어봐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뱃세다 광야에서 오병이어 사건이 일어날 때, 남자만 5천명이었습니다. 보통 모일 때는 여자들이 더 많잖아요. 여자도 많습니다만, 아이들이 또 얼마나 많아요. 그때는 아이들이 학교도 안가는 때인데. 아이들이. 엄마 따라 와야지 어디 있겠어요? 남자만 5천명이라면, 여자들도 5천명만 잡고 아이들까지 합하면 근 2만 명이 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당시 2만 명 이상이라면 굉장히 목회에 성공한 것 같지요? 2만 명 교인들을 이끌면서 배고플 때는 오병이어로 먹이고 목회에 성공한 거 같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몇 말씀하시니 싹 다 가버립니다. 어이가 없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갈 거냐고 묻습니다. 그때 열두 명만 남았습니다. 몇 마디에 그 많던 사람들이 다 가버렸습니다. 그것은 몇 만 명이 모였을지라도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큰 교회를 가보면,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고, 기적이나 보려고 모여드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아무런 인격적인 대화가 되지 않으면서, 그런 어이없는 일들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다고 하지만, 선이 항상 지고 악이 이겨요.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마음은 있으나, 행하는 것은 없는 거예요. 원치 않은바 악은 행하면서 항상 나를 악이 사로잡아 온다는 것을 보면서 바울이 절규를 합니다. ?오호라 나는 골치 아픈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곳에서 나를 건져낼 것인가?? 그래서 비로소 예수님을 부르게 돼 있어요.

 

타락의 이야기를 보면 사람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고 나면, 다른 반대쪽으로 못 돌아옵니다. 특히 우리들은 한국 사람들은 더합니다. 어느 교단이나 어느 체험이나 그곳에 빠지게 되면, 처음 접하는 게 너무 커 보이기에, 먼데 있는 것은 작게 보이고 자기가 경험하고 체험한 것만 커 보이기에 나머지는 다 작게 보입니다. 예를 들어서 처음에 교회 가서 성경을 한 번도 제대로 안 읽어보고, 방언이 터졌다. 그러면 방언이 그것이 최고인 줄 압니다. 사실은 은사 중에 방언은 가장 거지같은 게, 꼴지의 은사가 방언인데. 지혜의 은사, 지식의 은사, 말씀의 은사, 병 고치는 은사, 맨 나중에 각종 방언 하는 것들과 그리 나오는데, 그것이 조금 신비하니까 그게 최고인 줄 아는데, 그 다음부터는 교육이 안 됩니다. 뭘 배우려고 안합니다. 더 쇼킹 하는 거 없는가, 더 짜릿한 거 없는가, 더 뿅 가는 거 없는가? 하고 이 산 저 산 몰려다니면서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데. 그런 사람들은 신비한 게 일어나면 정상이고. 사실은 신비가 비정상입니다. 아무 일 없이 해가 뜨고 해가 지고, 이게 정상이고. 태양이 멈추는 것, 그건 비정상입니다. 비정상을 정상처럼 계속 추구하다보면,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는 거죠. 신비주의 위험이 거기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중요한 것은 맨 먼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다 읽어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3년을 성실히 가르친 후에 그리고 오순절이 임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까지 다 본 후에, 오순절을 체험하게 합니다.

 

반면에 1988년도부터 시작해서 ?92년까지 한 5년 동안 한국교회를 생몸살을 앓게 했던 일이 있었는데, 이게 다미선교회라는 것입니다. 곳곳에서 철야하면서 기도를 할 때 방언들이 터졌습니다. 그곳에 가면 초등학생이나. 초신자나 불신자나 아무나 가면 방언이 터집니다. 갔다하면 방언이 터지는데, 그 방언을 하고 통역을 하는데, 1992년도 자정에 예수님이 온다는 것입니다. 방언하고 통역한 그 결과가. 한 두 사람이 아니고 열 명이면 열 명, 백 명이면 백 명이, 똑같이 당시에 십 몇 만 명이 방언을 하고 통역을 하는데, 1992년 10월 28일 자정에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왔습니까? 그 많은 방언, 그 많은 통역이 다 가짜라는 것입니다. 귀신의 방언이고, 성령의 방언이 아닙니다. 유창하지요? 그러면 거기 간 사람들의 방언은 가짜고, 오늘 일반 기도원에서 날나리 방언, 할렐루야 방언은 진짜냐? 그것도 99%가 가짜입니다. 열매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비인격적으로 그냥 사람이 알지도 못하는 덮치는 식으로 그렇게 임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너무 신사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임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위험한지도 모르고. 우리가 만약에 어떤 지식이나 상식이나 성경 구절의 해석이 잘못되는 것은 그것도 잘못되면 안 되죠. 그런 실수는 매우 작은 실수라고 할 수 있지만. 어떤 영을 잘못 받게 했을 때는 어떤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달려 있는 겁니다. 그 받은 영이 성령이 아니고 잘못되었을 때는 큰 책임이 있는 거예요. 목회자들이. 그런 어떤 신비한 것이 나타났다고 아무 것도 모르는 성도들이 막 모여드니까, 목회에 성공하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막 보이면서 하는 모양인데, 그런 것은 현기증 나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위험하겠어요?

 

일전에 장유에 어떤 큰 교회의 성도가 독일까지 가서 공부를 하고 온 사람이 자기 기어이 안수를 받으라고 해서, 안수를 받으면 방언이 터질 것이니까, 억지로 강제로, 안 받고 싶은데 강제로 받으라고 해서 받았데요. 받았는데 귀신이 들어간 거예요. 계속 방언이 터져 나오는데, 주체도 못하고 절제도 못하고, 터져 나오는데, 나중엔 본색을 드러내면서 내가 너를 죽이겠다. 자기 입에서 방언이 터져 나오는데, 그 귀신이 내가 너를 잡아먹겠다 하는 거예요. 결국은 담임목사에게 가니까 이것은 영적인 것이니까 육신적으로 판단하면 안 되고 괜찮다는 거예요. 전혀 분별력이 없는 목사에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귀신인데, 또 정신병원에 가니 정신분열증이라고 해요. 정신분열이 아니라 귀신합병증이야. 그래 어느 침례교목사를 찾아가니까 정신분열이 아니라 귀신이 들어갔다는 거예요. 귀신 들어갔다고 하니까 기분 나빠서 가기 싫은데, 또 안가면 약을 안주니까, 가긴 가고 약을 먹으니까 잠을 좀 잔다는 거예요. 이게 뭔지 분별 좀 해달라고 하니. 내가 침례교 목사님 말대로 귀신이다. 쫓아내야 한다고. 이 부인도 잘 안 믿고, 남편은 정신이 말짱한데 남편도 귀신이란 말을 못 믿어요. 왜 기독교가 귀신이라고 자꾸 그러느냐? 아직도 전혀 악령을 모르니까, 교회가.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런 이상한 집회를 만들거나, 그런 것까지 동원해가지고 목회 성공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잘못된 것 아닌가요? 하나님 말씀을 처음부터 철저히 공부해가지고 인격적으로 응답하게 만들어야지요. 창세기부터 제대로 가르쳐야지요.

 

결국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뱀의 말을 믿으면 인간이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 단락입니다. 기승전결할 때. 이 부분을 정확하게 해 놓지 않으면 진도 아무리 나가도 헛방이에요. 그 후로부터는 하나님의 진실을 이해시키려 해도 쉽지가 않습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에덴동산에서 시작된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것을 인식을 해야 거기서부터 신학을 할 수 있어요. 거기서부터 신학이 필요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먹은 후부터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지 않듯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편에서 인간을 찾아나서는 겁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런 것도 창세기에 나오는 신학적인 주제입니다. 하나님이 찾지마는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어조로 나옵니다. 책임을 물으니 아담이 뭐라 합니까? ?하나님이 여자를 만들어 주어서 그 여자가 내게 주기에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이 원인을 제공했으니 1차적인 책임이 있고 직접 딴 것은 여자가 땄기에 나는 책임이 없다. 아주 순발력 있게 변명이 나오는지요. 하나님과 여자에게 올가미를 씌우고, 자기는 주는 것을 먹었을 뿐이라니. ?여자야! 네가 어찌 했느냐?? 고 물으니 여자도 웃기는 여자입니다. ?뱀이 나를 꾐으로 먹었나이다.? 뱀이 꼬여도 먹지 말아야지요. 그 때에 여자가 꾐을 받았고 여자가 땄지만은,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먼저 부르는 게 아니고 책임을 남자에게 물었습니다.

 

남자들은 잘 들으세요. 여자가 꾐에 빠지고 여자가 땄어도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남자에게 물으셨는데, 이 남자가 책임을 안지겠다 못 지겠다 하는 거예요. 그럼 넌 저리 비켜. 여자에게 물었더니 여자도 책임 안진데. 뱀이 꾐으로 먹었다네. 또. 그래서 이 장면, 타락한 장면이 굉장한 신학적인 장면입니다. 이건 설화가 아니고, 매우 신학적인 이야기입니다. 남자에게는 내가 너더러 직접 명했는데, 너는 안 들었어. 하와는 나한테 직접 들은 것 아니고 간접적으로 들었지만, 내가 네게 명한 것을 네가 어겼다는 거야.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땅을 저주합니다. 땅을.

 

이 부분을 많은 사람들이 바르게 보지를 못하고 아담이 저주를 받았다고 합니다. ?땅이 저주를 받아서 소산을 잘 안내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고, 그래서 네가 수고를 해야 한다. 수고를 해도 힘이 들 것이다.?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는 열심히 행하고 열심히 선을 행하는 길만이 죄를 짓지 않는 유일한 길입니다. 부단히 부지런히 열심히 일을 해야 죄 지을 시간이 없지, 타락한 인간은 배부르고 편하면, 반드시 죄를 짓습니다. 여유가 생기면 죄를 짓습니다. 자꾸 편하게 가려고 하는데, 편하면 죄를 짓습니다.

 

물질주의 다음은 그 물질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선교를 하면서 사용하는 게 아니고, 물질주위가 되면 향락과 쾌락으로 빠집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난한 것을 가지고 염려한 적은 한 번도 없고, 늘 하나님의 염려는 일관성 있게 너희가 먹고 배불러서 여호와가 누구냐 할 것 같으니 내가 제일 걱정이다. 배부른 것이 제일 걱정이라고 합니다.

 

국민 소득이 높아지는 것을 하나님은 제일 걱정을 하십니다. 우리나라가 3천불 시대에는 이렇지가 않았습니다. 경제가 어렵고 배가 고파야 죄를 덜 지을 것인데, 배가 부르니 열심히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국민소득이 2만 불이 넘어가면, 우리나라뿐 아니고 다른 나라들도 전도가 선교가 되지 않는 답니다. 만 불이 되면 모든 선교는 중단이 되고, 2만 불이 되면 전도가 되지 않는 답니다. 지금은 1,200만에서 860만입니다. 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건강도 땀을 흘리도록 일을 해야, 건강하게 만들어 놓았어요. 지금은 어떻습니까? 땀을 흐르기만 하면 에어컨을 틀어 버리고 아예 땀나는 일도 안하고. 지금 청년들은 마우스만 움직여서 먹고 살겠다고 합니다. 마우스 쥐꼬리를 붙잡고 있으니 봉급도 쥐꼬리만큼 받아서 사는데, 그거로는 집도 못 삽니다. 애들이 힘든 일을 안하려고 하니까. 돈을 작게 받든 말든 관계하지 않고, 마우스만 가지고 놀면서 살겠다.

 

그런 사람들에게 어떤 대통령인들 어떻게 직장을 만들 수 있습니까? 책임을 아무도 못 집니다. 하나님은 땀이 흘러야 된다고 했는데 손가락에 땀이 납니까? 앞으로는 어떤 사람이 대통령을 해도 일자리를 만들기가 어렵습니다. 경제 규모는 성장을 하는데도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이라고 합니다. 사람을 고용하지 않는 성장. 사람을 쓰니까 이것들이 일은 안하면서 자기주장만 외치면서 데모를 하는데. 선진국은 일 년에 데모하는 날수가 1일 아니면 2일, 3일을 데모하는 나라가 없습니다. 한국은 100일내지 150일까지 데모하는 날수가 간 답니다. 그러고도 우리나라가 성장하는 걸 보면 정치를 잘한 것입니다. 일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열심히 일을 하는데, 꼭 일은 하지 않고 여기 저기 데모나 하러 다니는 그런 집단들이 있습니다. 데모해서 먹고 사는 족속들입니다. 모든 단체에는 꼭 그런 인물들이 있습니다. 지금의 정치인들은 각성들을 해야 합니다. 기업은 망하는데 꼭 어떤 일들을 데모로 쟁취하려는 뭐, 민주노동당 그런 정치인들은 각성을 해야 합니다.

 

아직은 다 배가 부르기에 연봉이 8천만 원 하는 사람들이 데모를 한답니다. 정신이 바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지금 국민 전체가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땀이 흐르도록 일을 해야 되는데, 땀이 흐르는 힘든 일을 안하려고 합니다. 앞으로 5, 10년만 지나면 농촌의 노인들은 다 돌아가시고 텅텅 빌 것입니다. 모두가 땀을 안 흐르려고 도시로만 가니 농촌은 일할 사람이 없습니다. 앞으로 진짜 눈을 뜬 사람은 농촌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살면 여유가 만만합니다. 교통체증 걸려 애먹을 것도 없고. 여기 사는 게 인생의 삶이지.

 

우리가 무심코 넘어가기 쉬운 창세기에 있는 대화가 하나님과 아담, 하와와 뱀이 함께 한 대화인데, 아담에게는 ?수고하고 양식을 먹을 것이다.? 한 것이고, 여자에게는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뱀에게는 뱀이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 뱀이 그렇게 집요하게 여자를 꾀어서 금단의 열매를 먹게 한 것은 그걸 먹으면 정녕 죽는다는 것을 알기에, 그걸 먹고 죽으라고 먹인 것인데, 이 원수가 먹고도 죽지를 않습니다. 안 죽는 것도 충격인데, 나중에 하나님의 판결은 ?너는 여자의 후손의 발뒤꿈치를 물 정도이지만,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몰랐지?? 이 말은 하나님의 극비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여자의 후손이란 것은 마귀나 뱀은 천사 중에서 아주 교만한 천사가 하나님의 보좌를 넘어보다가 타락을 했죠. 천사들은 한 번도 애를 낳아본 적이 없어요. 결혼해 본적도 없고, 아이들을 낳아본 적도 없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먹고 죽으라고 꼬여서 먹여놨는데, 여자의 후손이 나온다. 이런 이야기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런 후 뱀이 사라지게 되는데, 골머리를 감싸 쥐고 여자의 후손이 뭐냐? 그때는 인터넷을 뒤져봐도 여자의 후손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뭔지를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을 때, 남자 따로 창조하고 여자 따로 창조한 게 아니고,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어가지고, 아담에게서 갈비뼈를 빼내서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히브리식의 사고방식은 남자와 여자를 합해서 하나를 만든 게 아닙니다. 하나를 가지고 둘로 나누어서 만들어 놓았다는 거예요. 개념이. 그 본질이 원래는 하나라는 겁니다. 더 놀라운 것은 남자는 남자를 낳고 여자는 여자를 낳는 게 아니고, 또 여자하고 남자가 합해서 하나가 나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께서 아마 천사 창조는 대량 생산한 것 같습니다. 천사들은 한꺼번에 동시다발 형으로 해서 대량으로 만드는 것 같은데.

 

사람은 굉장히 비능률적인 방법으로. 비능률적인 방법이란 남자를 하나 딱 만들었습니다. 에덴동산에는 흙이 많이 있었습니다. 생기야 무한히 불어 넣을 수 있는데, 아담 하나만 만들었고, 여자도 아담과 같이 흙으로 만들면 될 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남자를 깊이 잠들게 해서 만들어 짝을 지어서 그 둘 사이에서 하나가 나오니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왜 이렇게 했을까요? 그 답은 말라기에 가서 나옵니다. 말라기서 2장 1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영이 유여 하실 찌라도 오직 하나를 아니 하셨느뇨?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동시다발형으로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고, 경건한 자손을 얻게 하려고. 다시 말하면 천사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습니다. 천사 같은 존재가 아니고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경건한 자손을 기르기 위해서 하나만 지었고, 그 하나에서 또 하나가 나오게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녀들은 학교가 책임을 질 것이라고 믿으면 안 되고요. 반드시 어머니, 아버지가 가르치고 길러야 합니다. 경건한 자손으로 길러야 합니다. 지금도 창세기를 철저히 가르치는 유대인 랍비들은 진짜 어머니, 아버지가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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