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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화
나무를 사랑한 도끼
구연경
주르륵.
흔들리던 별 하나가 밤하늘의 눈물인 듯 소리 없이 떨어집니다. 새벽이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는 ‘번쩍이’의 마음속에도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번쩍이는 늘 웃는 표정이지만 자신의 일그러진 웃음이 죽도록 싫습니다. 험악하고 날카로운 이는 새벽달빛에조차 빛나고 무언가를 찍고 부수고 베려는 살기로 번뜩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부터입니다. 번쩍이가 갑자기 달라진 건. 번쩍이는 지금껏 자신이 무얼 하며 살아 왔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새벽잠에서 깨어난 목수 할아버지의 어깨에 업혀 숲 속으로 나가서는, 울창하게 팔을 뻗고 있는 나무들을 찍어 쓰러뜨리는 일을 묵묵히 해왔을 뿐입니다. 번쩍이는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인 줄로 알았기에 한 번도 그것의 의미를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자신은 마치 목수 할아버지의 팔인 것처럼 여겼으며, ‘생각’을 하는 것은 자신의 일이 아닌 번쩍이의 주인인 목수 할아버지의 일이라고 여겨온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수 할아버지가 여느 때와 같이 나무를 세차게 내리치는데 갑자기 번쩍이의 귀에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악!”
그와 동시에 나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번쩍이는 고개를 돌려 함께 일하던 톱 아저씨와 망치 아주머니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나무를 자르고 못을 박는 등의 일을 묵묵히 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번쩍이는 어리둥절하여 놀란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습니다. 난 언제부터 이 세상에 태어나 이런 모습으로 살고 있었던 거지……. 하늘은 높고 파랗고 숲은 우거져있으며 맑고 화창한 날씨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나무는 허리에 깊은 상처를 입고 몹시 아파하고 있었고 주변의 나무들도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나무의 비명소리가 온 숲속에 울려 퍼지자 새들도 다람쥐들도 모두 도망가 버렸습니다. 목수 할아버지는 나무의 허리를 치기 위해 다시 한 번 번쩍이를 높이 들어 올렸습니다. 공중으로 번쩍 올라간 번쩍이의 이가 햇빛에 반사되어 번쩍하고 날카롭게 빛이 났습니다. 번쩍이는 자신의 마음과 다르게 무서운 표정의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다시 나무를 향해 내달으려는 순간, 눈물이 맺힌 나무와 눈이 마주친 번쩍이는 자신도 모르게 목수 할아버지의 손에서 도망쳐버렸습니다. 할아버지가 손을 뒤로 뻗는 순간 몸을 빼내어 뒤쪽으로 휙 달아난 것입니다. 그리고는 수풀 속으로 깊이 숨어버렸습니다. 목수 할아버지가 찾지 못하도록 꽁꽁 숨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밤새 슬피 울었습니다. 번쩍이는 자신의 모습과 행동이 끔찍하고 혐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부터 난 이렇게 살게 된 걸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내가 왜, 어떻게 누군가를 다치게 하고 죽이는 도끼로 태어나게 된 거지…….’
밤하늘엔 수많은 별들이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두 너무 멀리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난 어디에서 왔을까.’
번쩍이는 수풀 사이로 고개를 내밀어 자신으로 인해 상처를 입은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나무의 푸르던 얼굴은 창백해 보였고 많이 아픈지 눈을 감고 조용히 앓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번쩍이는 마음이 몹시 괴로웠습니다.
‘난, 더 이상 도끼로 살아가고 싶지 않아. 차라리 이대로 죽어버리겠어! 시간이 지나면 비바람에 흙과 나뭇잎이 날아와 날 묻어주겠지…….’
번쩍이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작별의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 잠에 들기 위해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별 하나가 또르르 흘러 내렸습니다.
“그건 안 된다, 아가야.”
갑자기 어디선가 나지막이 타이르는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번쩍이는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습니다. 그건 바로, 번쩍이로 인해 상처를 입은 나무의 목소리였습니다. 나무는 번쩍이를 향해 슬프지만 따뜻한 미소를 띠며 말을 해주었습니다.
“부디 포기하지 말거라. 너는 소중한 존재란다.”
번쩍이는 그 소리에 울컥 울음을 터뜨리며 소리쳤습니다.
“저는 흉측해요! 당신을 다치게 하고, 죽게 만들잖아요! 저의 날카로운 이와 잔인한 웃음을 보세요! 저는 세상에서 없어져야 하는 흉기일 뿐이에요…….”
“서두르지 말거라.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단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다른 이들을 위해 죽는다면 그건 죽는 게 아니라 영원히 사는 것이란다. 그들의 마음속에 집을 짓고 온기를 퍼뜨리며 그들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되는 거야. 나의 몸이 다른 이들의 마음속으로 옮겨가는 셈이지. 그러니까 보이는 것만이 너의 전부가 아닌 거야. 가만히 흙의 숨소리에 귀 기울여보렴. 가만히 바람의 무늬를 읽어보고, 새들이 날아온 먼 길을 더듬어 보렴. 너를 이루고 너와 함께하는 많은 것들을 느껴보렴.”
“저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자신이 죽어도 좋다는 건가요?”
“나는 죽는 게 아니란다. 비록 아픔은 겪겠지만 나의 몸이 변해서 무엇이 되는지 한 번 보려무나. 내일 새벽 목수 할아버지가 오면 그분이 하시는 대로 맡겨보렴. 그럼 알게 될 거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내가 행복해지도록 도와주겠니? 나를 믿고 부디 그렇게 해 주겠니…….”
번쩍이는 나무의 입에서 ‘행복’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고민이 되었습니다. 지금껏 자신이 모르는 빛나는 어떤 것이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무의 눈빛은 진심인 것 같았습니다. 번쩍이는 결국 나무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다음 날 목수 할아버지가 나타나자 번쩍이는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던 혐오스런 웃음을 더욱 크게 지어보였습니다. 번쩍이의 날카로운 이가 더욱 희번득하게 빛이 났습니다. 눈이 어두운 목수 할아버지가 금세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여기 있었구나! 에이 녀석, 내가 너를 얼마나 애타게 찾은 줄 아느냐? 밤이슬을 맞아 흠뻑 젖었구나. 녹이 슬지 않도록 다시 갈아야겠다.”
목수 할아버지는 가져온 갈돌을 꺼내어 번쩍이의 이를 더욱 날카롭게 갈기 시작했습니다. 서걱서걱 하는 소리가 섬뜩하게 숲 속에 울려 퍼졌습니다. 번쩍이는 가슴이 미어졌지만 눈물을 머금고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이를 갈았습니다.
“자아, 이만하면 한 방에 나무를 쓰러뜨릴 수 있겠구나.”
할아버지는 눈부실 정도로 빛이 나는 번쩍이의 이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번쩍이의 미소도 한층 더 잔인해보였습니다. 번쩍이는 할아버지 등 뒤로 곧 쓰러질 나무의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나무는 침착하고 차분한 표정으로 번쩍이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흔들림은 없었습니다. ‘쩌억’하는 마지막 비명소리가 하늘로 울려 퍼지며 나무는 철썩 하고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화창한 대낮임에도 번쩍이의 가슴 속에 커다란 별이 떨어져 내렸습니다.
이윽고 할아버지는 나무를 쪼개고 다듬어 부지런히 뚝딱뚝딱 무언가를 만들었습니다. 번쩍이와 톱 아저씨, 망치 아줌마가 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도왔습니다. 얼마 후 튼튼한 집 한 채가 탄생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집이 없어 추위와 배고픔에 죽어가던 사람들을 불러 모아 그 집에서 살게 해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되찾고 새로운 가족을 얻었습니다. 그들의 삶에 빛과 같은 따뜻한 온기가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확실히 예전보다 훨씬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것을 본 번쩍이는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저릿해 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번쩍이는 본래의 모습이 사라진 나무를 불러보았습니다. 나무로 만든 집으로부터 따스한 온기가 뿜어져 나와 번쩍이를 포근하게 감쌌습니다…….
목수 할아버지는 다시 번쩍이를 데리고 나무를 베러 나갔습니다. 번쩍이는 마주 선 나무를 향해 물었습니다.
“당신도 집이 되려는 건가요?”
“아뇨. 저는 책이 될 예정이랍니다.”
번쩍이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굳이 책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어내는 것은 옳지 못해 보였습니다.
“저는 당신을 베고 싶지 않아요! 책이 없어도 사람은 살 수 있잖아요. 책이 굶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지는 않잖아요. 그건 헛된 죽음이에요!”
번쩍이는 몸부림을 쳤지만 할아버지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베어진 나무는 완전히 으깨어져 형체가 사라지고 납작한 종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엔 글자가 찍히고 책이 되었습니다. 잠에 들기 위해 침대에 든 아이들은 희미한 등불 아래 엄마가 읽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상상과 꿈의 세계로 빠져들었습니다. 장차 위대한 지식과 지혜가 될 생각의 씨앗들이 아이들의 잠결로 새처럼 날아들었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자신을 일깨우는 책을 통해 미래를 꿈꾸며 가슴이 벅찬 나날을 보내었습니다. 세상의 온갖 험난한 장애물에 부딪쳐 쓰러진 사람들이 책 속에서 지혜를 구하여 다시 일어날 힘을 얻었습니다. 헛되고 어리석은 삶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던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새로운 삶을 향한 희망을 얻었습니다. 번쩍이는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어느덧 추운 겨울이 왔습니다. 눈이 내려와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은 어느 날, 대부분의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만 드러내고 있는 겨울 산에 목수 할아버지는 번쩍이를 데리고 가 싱싱하고 푸른빛을 띤 전나무 앞에 섰습니다.
“당신은 무엇이 될 예정인가요?”
한층 목소리가 깊어진 번쩍이는 담담하게 전나무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될 예정이랍니다.”
푸르른 생기로 넘치는 전나무는 해맑은 미소까지 지어보였습니다.
“아니, 그건 너무 헛된 죽음이 아닌가요? 단지 즐거움이나 아름다움을 위해서 죽다니요. 트리가 없어도 사람들은 얼마든지 살 수 있잖아요. 그것은 사람들에게 지식 같은 것을 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결국 크리스마스 트리가 된 전나무는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 사는 고아원으로 보내졌습니다. 전나무는 마지막 힘을 다해 고아원의 아이들을 위해 따뜻한 온기를 내뿜었습니다. 아이들은 전나무 트리의 신비로운 초록에 반하여 트리를 에워쌌습니다. 그리고는 설레는 마음으로 오색 빛깔의 아기자기한 장식들을 달았습니다. 마치 트리의 아름다운 마지막을 장식해 주려는 듯. 언제나 그리움과 슬픔 속에서 지내던 아이들은 트리를 보며 해맑은 웃음을 띠었습니다. 트리를 둘러싼 아이들은 손을 잡고 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속에 식어있던 난로에서 불꽃이 활활 타오르며 잃어버린 엄마아빠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웃음을 보며 깜빡거리는 크리스마스 장식 불빛 뒤에서 전나무는 마지막 미소를 지었습니다. 함박눈이 한없이 내려와 지붕과 길에 쌓이고 겨울은 깊어져 갔습니다. 전나무는 아이들의 마음 속에 다시 심어졌고 또 쑥쑥 자랐습니다.
번쩍이는 행복해 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흐뭇했지만 나무들의 희생은 여전히 슬펐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도, 나무의 눈물도, 상처도 그 모든 것을 보지 못했던 때가 더 나았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번쩍이는 잠이 오지 않는 새벽, 괴로움 속에서 밤하늘을 향해 물었습니다.
‘왜 갑자기 저는 나무의 비명소리를 듣고 나무의 눈물과 상처를 보게 된 건가요? 나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요? 차라리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나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던 때로요. 아픔이든 기쁨이든 아무것도 느낄 수 없던 때로요. 그저 목수 할아버지의 일부인 것처럼 시키는 대로, 주어진 대로 살았던 때로요…….’
이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낯익고 포근한 목소리였습니다.
‘나의 비명소리를 듣고 나의 눈물과 상처를 본 것은 바로 너란다. 너의 사랑이 너의 눈과 귀를 열어준 것이야. 사랑의 온기를 품은 이는, 다른 이의 아픔을 보고 들을 수 있는 귀한 능력을 가진 거란다. 그것으로 인해 몸이 부서져 흩어진다 해도 영원히 다른 이들의 마음속에 살 수 있는 선물을 받는단다. 언젠가는 집을 짓는 데에, 책을 만드는 데에, 그리고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드는 데에, 내가 쓸모없어지는 날이 오겠지. 하지만 새로운 것이 필요해지고 또 새로운 아픔과 희생이 생겨날 거야. 우리는 세상의 아픔이 줄어들도록 노력해야겠지만 완전히 없애는 건 불가능해. 그것은 한편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고. 밤이 있기에 낮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한 아픔이 있어. 우리가 소중한 것을 깨닫도록 하는 아픔이. ’
어느덧 세월이 지나 번쩍이는 녹이 슬고 이가 빠져 나무를 벨 수 없을 정도로 늙어버렸습니다. 목수 할아버지도 늙어서 돌아가시고, 번쩍이는 고물상을 거쳐 철물공장으로 보내졌습니다. 번쩍이의 몸은 뜨거운 용광로 속에서 완전히 녹아 다른 쇳물과 섞여 건축 재료가 되었습니다. 번쩍이의 몸은 이제 완전히 흩어지고 영혼마저 차갑게 식어 잠이 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번쩍이는 끼룩끼룩 하는 갈매기 소리에 조용히 눈을 떴습니다. 파도가 끝없이 밀려오는 드넓은 바다가 보였습니다. 번쩍이는 어느새 사람들의 왕래가 없던 섬과 육지를 잇는 다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가 몰랐던 새로운 세상을 향해 그 다리를 건넜습니다. 병원과 학교가 없어 불편을 겪었던 가난한 섬사람들은 훨씬 수월하게 육지를 오갔습니다. 큰 꿈을 가진 소년소녀들이 그 다리를 건너 넓은 세계를 꿈꾸며 육지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자연이 숨 쉬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섬을 보기 위해 육지의 많은 사람들이 그 다리를 건너갔습니다. 서로를 알게 된 육지와 섬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 새롭고 멋진 계획들을 만들어나갔습니다. 번쩍이는 자신의 안에서부터 따뜻하게 번져나가는 온기를 느꼈습니다. 이제야 나무가 뜻한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과 닮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드넓은 하늘에 광활하게 태양이 빛났습니다. 태양빛을 받아 번쩍이의 영혼도 영롱하게 빛났습니다. 먼 길을 가던 갈매기들이 잠시 날개를 쉬려 다리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그 아래 옹기종기 물 위에 모여 있던 나룻배들도 두둥실 미소를 지어보였습니다. ♧
첫댓글 "부디 포기하지 말거라. 너는 소중한 존재란다." 이 말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데 희망이 되는 메시지네요. 연경씨의 꿈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