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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구간 (상구보리 하화중생, 上求菩提 下化衆生)
웅석봉(熊石峰) -보살행(菩薩行)의 모습
제7구간은 웅석봉 자락의 성심원 또는 어천에서 시작하여 웅석봉의 7부 능선인 하부 헬기장까지 올랐다가 웅석봉의 반대편 자락인 운리로 내려온다.
말하자면 구간 전체가 웅석봉 답사코스라 할 정도로 웅석봉을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곰바위산, 웅석봉(熊石峰)은 산의 모양새가 곰을 닮았다고 해서, 또는 가파른 바위에서 곰이 떨어져 죽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웅석봉은 국립공원 지리산의 지능선으로서 지리산 동부능선의 마지막 봉우리라는 사실을 생각하는 이가 많지 않다.
지리산의 서쪽 끝인 노고단에서 만복대, 세걸산, 바래봉 덕두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지리산 서북부능선’이라 하며 많은 사람들이 종주코스로 즐기는 것과 대비된다.
지리산 주능선의 동쪽 끝인 천왕봉에서 중봉, 하봉, 새재, 외고개, 왕등재, 밤머리재를 거쳐 웅석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나는 ‘지리산 동부능선’이라 이름 짓고 종주를 하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장장 33km의 거리도 거리이지만 중간에 변변한 대피소 하나 없는 능선을 종주하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에서 포기를 하였다.
지리산 서북부능선 끝의 덕두산이 둘레길 3구간에서 만났던 람천을 건너지 못하고 멈추었듯이 지리산 동부능선의 끝자락 웅석봉은 경호강을 건너지 못하고 멈추게 된다.
웅석봉을 오르는 길은 다양하다.
지나온 6구간 둘레길에서 만난 바람재, 성심원 및 그 인근의 내리의 지곡사, 7구간의 시작점 언저리인 어천과 기착점인 청계, 운리 그리고 밤머리재, 홍계, 마근담 등 무수히 많은 들ㆍ날머리길이 있다.
그만큼 웅석봉은 많은 산등과 골들을 거느리고 있는 녹녹치 않은 산이라 할 수 있다.
대표적 골짝만 일별(一瞥)하여도 어천골, 홍계의 동촌골, 청계골, 내리골 등이 동서남북으로 가르고 있는데, 하나같이 수정같이 맑은 물길과 빼어난 풍광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남・북사면에 맞맞이로 골을 이루고 있는 청계계곡과 내리계곡은 웅석봉이 범상치 아니한 산이라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한 이유를 가진 곳이라 할 수 있다.
내리계곡은 지곡사에서 선녀탕을 거쳐 웅석봉 바특한 곳까지 이어진 청담과 옥류의 비경을 간직한 곳으로 곰골이라고도 부른다.
실제로 이곳의 선녀탕은 1987년 경향신문사에서 선정한 한국명수백선(韓國名水百選)에 들 정도로 맑고 아름다운 곳이다.
청계계곡 역시 이름 그대로 청계옥류의 선경을 만들면서 웅석봉 남사면의 골을 이루고 있다.
나는 여름철이면 숨겨두었던 꿀단지를 찾듯이 비밀스럽게 이곳을 찾아 피서를 즐기곤 한다.
아직까지 많이 알려지지 않은 탓으로 계곡을 따라 조금만 오르면 한여름에도 인적이 거의 없다.
티 없이 맑은 물과 우묵주묵한 너럭바위가 만들어 놓은 소(沼)와 담(潭)들이 계곡의 상류까지 이어져 속진이라고는 범접할 수 없는 별유천지가 바로 이곳이 아닐까 생각되는 곳이다.
이렇듯 심오한 계곡을 가진 웅석봉은 우뚝 솟아 있는 산이다.
우뚝 솟은 만큼 위엄스럽고 고고하고 굳건한 산이다.
그러나 웅석봉은 위엄하지만 위압적이지 않고, 고고하지만 독단적이지 않으며, 강고하지만 자비가 충만한 산이다.
아래에서 올려다 보이는 웅석봉 산정(山頂)은 그 존엄함이 감히 보리(菩提)라 칭할 만하고, 산정에서 내려다보는 모습에서 보살행으로서의 자비지심을 느낄만하다.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한다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은 하화중생을 위하여 상구보리를 하는 보살행(菩薩行)을 일컫는 말이다.
웅석봉은 이 경구를 생각하게 하는 산이다.
달뜨기 능선
제7구간 둘레길은 웅석봉의 하부헬기장에서 임도의 오름길을 따르다 좌측의 내림길로 꺾어 든다.
그대로 직진의 오름길을 따르면 웅석봉 상부헬기장에 이르게 되는데 그곳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능선을 일컬어 달뜨기 능선이라 한다.
둘레길은 이 능선의 동사면 허리로 이어지는 임도의 내림길이다.
시퍼런 강줄기가 내려다보이는 어느 산모퉁이를 돌아섰을 때였다.
앞서 가던 문춘 참모가 걸음을 멈추고 한참 정면을 바라보고 있더니 뒤를 돌아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동무들 저기가 달뜨기요. 이제 우리는 지리산에 당도한 것이요!”
눈이 시원하도록 검푸른 녹음에 뒤덮인 거산이 바로 강 건너 저편에 있었다.
달뜨기는 그 옛날 여순사건의 패잔병들이 처음으로 들어섰던 지리산의 초입으로, 남부군은 기나긴 여로를 마치고 종착지인 지리산에 들어선 것이다.
제2병단 이래 3년여의 그 멀고 험난했던 길이 이제 다시 그 출발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1천4백의 눈동자가 일시에 그 시퍼런 연봉을 응시하며 “아아!”하는 탄성이 조용히 일었다.
여순 이래의 구대원들이 마치 고향을 그리워하듯 입버릇처럼 되뇌이던 달뜨기…, 이현상이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열린다’고 했던 빨치산의 메카, 대지리산에 우리는 마침내 당도한 것이다.
나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회에 젖으며 말없이 서 있는 녹음의 산덩이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지리산아, 이제 너는 내게 어떤 운명을 가져다주려느냐….’
이태의 자전적 수기 ‘남부군’에서 달뜨기 능선을 이르는 대목이다.
누가 보아도 똑같은 대목이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에도 나온다.
앞서 걷던 문춘 참모가 걸음을 멈추고 한참 정면을 바라보더니 뒤를 돌아보고 감격어린 소리로 외쳤다.
“동무들! 저기가 달뜨기요. 이제 우리는 지리산에 당도했소.”
거산(巨山)의 모습이 강 너머 저 쪽에 나타나 있었다.
가까운 곳은 선명한 푸르름이고, 멀어져 감에 따라 보라색으로 변하고, 아득한 정상은 신비로운 빛깔 속에 안겨 있었다.
달뜨기는 지리산의 초입이다.
남부군은 드디어 그 긴 여로를 겪어 목적한 곳 지리산에 들어선 것이다.
수백의 눈동자가 일시에 그 신비로운 웅봉(雄峯)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아!’하는 탄성이 대열 속에서 바람 소리처럼 일었다.
여순병란 이래의 빨치산들이 마치 고향을 그리듯 입버릇처럼 말하던 달뜨기가 아닌가.
박태영으로서도 감회가 없을 까닭이 없었다.
그는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열린다’라고 한 이현상의 말과 ‘과연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있을까’라고 쓴 홍행기의 탄식이 뒤범벅 된 감정으로 넋을 잃고 지리산을 바라보았다.
지리산을 찾은 빨치산들은 조개골 등에 숨어 이곳 달뜨기 능선 위로 떠오르는 달을 보며 고향과 가족을 생각했다.
낡은 총자루를 옆에 두고 구수하게 풍기던 된장냄새와 아내의 젖비린내와 어머니의 말라붙은 가슴팍을 떠올렸을 것이다.
입술을 악 물고, 밤새 울어대는 소쩍새 소리에 넋을 놓은 채 달을 보고 있었으리라.
이를 두고 이병주의 ‘지리산’은 이태의 수기를 토대로 씌어져 표절의혹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이태는 합천 가회전투 이후 지리산을 향하는 길, 둔철산 자락을 돌면서 경호강 건너편의 산줄기 보고 달뜨기라는 (문춘 참모의 외침을) 언급하였지만 그곳이 왜 달뜨기였는지의 설명을 생략하였다.
‘…여순 이래의 구대원들이 마치 고향을 그리워하듯 입버릇처럼 되뇌이던 달뜨기…’라고 표현한 것이 그 전부였다.
비록 표절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지만 이병주의 소설에서는 친절하게도 ‘달뜨기’라는 이름의 연원을 쉽게 유추할 수 있게 각주처럼 달아 놓은 대목이 나온다.
아무튼 달뜨기는 지리산의 빨치산들에 의해 이름 지어지고 불러졌던 웅석봉의 남쪽으로 늘어진 지리산 지능 중의 하나를 일컫는다.
해방이후 발생한 여수ᐧ순천사건 이후 지리산으로 퇴각하였던 빨치산들은 지리산 곳곳에 자리 잡고 군경 토벌대와의 쫓고 쫓기는 치열한 싸움을 벌이게 된다.
이 와중에서도 휘영청 떠오르는 달을 보고 고향을 그리워하고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던 대원들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치밭목, 조개골 비트에 자리 잡았던 빨치산들이 보았던 동녘 산능에서 솟아오르는 달은 그들로 하여금 노스탤지어(nostalgia)의 상념에 젖어들기 충분한 분위기를 자아낸 것 같다.
그들은 웅석봉 아래의 검게 드리워진 능선 위로 떠오르는 달을 보면서, 구수하게 풍기던 된장냄새와 아내의 젖비린내와 어머니의 말라붙은 가슴팍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곳이 달뜨기 능선이 된 것이었다.
달뜨기 능선, 서정성 짙은 이름과 달리 현대사의 질곡이 묻어있는, 그래서 능선 위에 뿌려진 핏자국 같은 철쭉꽃의 처연함과 함께 지리산의 또 다른 그림을 이루는 것이다.
청계골 전설 - 신행당 고개, 승지골
어천마을에서 청계리 대현촌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다.
과거에는 이곳을 신행당 고개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현재의 아스콘 포장로가 과거의 고갯길과 일치하는지는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 고갯마루에는 커다란 돌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전해져 온다.
옛날에 결혼을 한 후 신부가 아이를 낳아야만 신행(新行)한다는 풍습이 있었을 때의 이야기이다.
어느 신부가 결혼을 마치고 아이를 낳기를 기다리면서 친정에 있던 중에 우연히 신병에 걸렸다.
친정에서는 약을 써도 되지 않자 죽기 전에 신행이라도 보내야 할 것이라 판단하고 신랑집에 연락한 후 신행을 서둘러 보냈다.
그리하여 신행을 가게 된 신부는 신랑집에 도착하기 전 이 고갯마루에서 그만 죽고 말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신랑 집에서는 신부의 시체를 받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신부 측에 시체를 가져가라고 하였고, 신부 집에서는 죽어도 당신네 귀신이니 되돌려 받을 수 없다 하였다.
서로 옥신각신 하던 끝에 결국은 그곳에 시체를 묻고 타고 가던 가마도 함께 버리기로 하였다.
그 후 신랑은 다시 장가를 들게 되었는데 첫날밤에 새신부의 꿈에 죽은 신부가 나타나서 내 남편을 너에게 줄 수 없다고 하면서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래서 양가에서는 무당을 불러 무덤에 굿을 하게 되었다.
무당은 죽은 신부의 원혼을 풀어 주려면 가마가 있던 자리에는 산을 쌓아 만들 되(造山), 고개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돌을 하나씩 던지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양가의 사람들은 무당이 시키는 대로 그곳에서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돌을 하나씩 던지라고 부탁하였는데 나중에는 그것이 풍습이 되어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돌무더기가 산더미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신행을 하다가 죽은 신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돌무더기 조산(造山)을 만들었다 하여 이곳을 신행당 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산청군청 문화관광 홈페이지의 역사전통(전설ㆍ설화)에서 발췌)
청계리 뒷산의 승지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이곳 역시 슬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옛날 이 근처 마을에 어느 가난한 선비 집안이 있었다.
이 집안의 선비는 결혼을 하면서 아내 덕분으로 공부를 하고 과거를 보게 되었다.
선비는 정성껏 여비까지 마련하여 주면서 과거를 보게 한 아내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선비의 어머니는 며느리를 학대하기로 소문이 나 있을 정도로 성격이 괴팍한 것이었다.
선비는 아내에게 과거에 급제하여 오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꼭 참고 기다려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그런데 과거에 급제하여 오리라던 남편은 3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고 시어머니의 구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결국 선비의 아내는 시어머니에게서 남편을 쫓아낸 죄인으로 몰리어 쫓겨나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친정으로 돌아갔으나 친정 역시 죽어도 시집에서 죽으라고 하면서 받아주지 않았다.
오갈 곳이 없는 선비의 아내는 신행당 고개의 대현촌 뒷산의 골짜기로 들어가 거기서 숨을 끊었다.
그녀는 풀 베러 간 마을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어 그 자리에 묻히게 되었다.
과거에 급제한 남편이 ‘승지’벼슬을 하고 있다가 임금으로부터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내려왔으나 반겨 줄 아내의 행방이 묘연하였다.
이리저리 수소문 끝에 아내의 사연을 알게 된 선비는 부인의 무덤을 찾아 통한의 눈물을 흘리면서 아내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숨을 끊고 말았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은 선비 부부의 슬픈 사연이 맺힌 이 골짜기를 벼슬 이름을 따서 ‘승지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단속사(斷俗寺)
둘레길의 웅석봉 임도가 끝나면서 만나는 점촌고개를 내려서면 운리 탑동마을이다.
마을 중간에 탑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원래 이곳은 단속사라는 거대한 가람이 있었던 자리이다.
그러나 지금 이곳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 옛날 거대한 가람이 있었다는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은 그저 초라한 한촌(寒村)에 불과하다.
다만 마을 중간에 덩그렇게 서있는 2개의 탑과 한쪽이 부러진 당간지주가 이곳이 가람터라는 사실을 겨우 알려줄 뿐이다.
아무튼 이 단속사는 신라시대 경주 황룡사에 버금할 정도의 대찰이었다고 한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이곳에서 쌀 씻은 물이 십리를 흘러 내렸고, 가람을 한 바퀴 돌고나면 집신이 다 헤질 만큼 규모가 컸다고 한다.
그런 만큼 단속사에 대한 이야기 역시 많은데 그 중 몇 가지만 추려볼까 한다.
단속사의 창건과 폐사
이 절 창건에 관하여는 삼국유사에 두 가지의 각기 다른 창건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가 743년에 이준(李俊, 고승전에는 李純이라고 하였다)이 창건하였다는 별기(別記)의 기록이고, 또 다른 하나는 763년 신충(信忠)이 창건했다는 신충괘관(信忠掛冠)편의 기록이다.
별기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 때 직장(直長) 이준이 일찍부터 발원하기를 자신의 나이 50세가 되면 출가하여 절을 짓겠다고 하였는데, 그의 나이가 50세가 되자 조연(槽淵)의 작은 절을 고쳐 단속사라 하고, 스스로 삭발하여 법명을 공굉장로(孔宏長老)라 하였다고 한다.
또 하나의 창건설화, 신충괘관에는 “경덕왕 22년에 신충은 두 친구와 서로 약속하여 벼슬을 버리고(掛冠) 남악(南岳: 지리산)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는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세우고 그곳에 살면서 평생을 속세를 떠나 왕의 복을 빌겠다고 청하니 왕은 이를 허락하였다.”라고 이야기 한다.
어느 것이 정설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신라 경덕왕 때에 창건하였다는 것과 속세를 떠나(斷俗)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는 ‘단속(斷俗)’의 의미에 있어서는 이준 창건설이든 신충 창건설이든 다름이 없다.
아무튼 이곳은 신라시대 북종선(北宗禪)을 전래시킨 인물 신행선사(神行禪師: 704~779)가 만년에 불법을 선양하다가 입적하였고, 고려 중기의 고승으로 우리에게는 명필로 알려진 대감국사(大鑑國師) 탄연(坦然: 1070~1159) 도 이곳에서 불법을 전하다가 입적하기도 했을 정도로 신라・고려대의 이름난 고찰이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김일손의 지리산 유람기 ‘속두류록(續頭流錄)’에는 김헌정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신행선사비(神行禪師碑)와 이지무가 지었다는 대감국사비(大鑑國師碑)가 이곳에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나, 현재 비는 없어지고 탁본만 각각 전해지고 있다.
또한 지금은 찾을 길이 없지만 신충이 그린 경덕왕의 초상화와 솔거가 그린 유마상(維摩像)이 단속사에 있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 보건데 단속사는 예사 절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용두마을의 청계천변 바위에는 최치원의 글씨라고 전해지는 ‘광제암문(廣濟嵒門)’이 새겨져 있는데, 단속사의 입구를 표시한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단속사의 경내는 현재의 탑동마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광제암문에서부터 운리・청계골 전체를 일컫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거찰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거찰이 어떻게 하여 폐사로 방치된 것인지의 정확한 기록은 없다.
김일손의 속두류록에 “… 절간이 황폐하여 승려가 거쳐하지 않은 곳이 수백 칸이나 되었다. 동쪽 행랑에는 석불(石佛) 5백구가 있는데 그 기이한 모양이 각기 달라 형용할 수가 없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따라서 이 무렵(1489년) 단속사는 이미 쇠락하고 있었다.
일설에는 1568년(선조 1)에 남명의 제자 성여신 등 유생들이 단속사를 불질러버렸다고 하며, 정유재란 때 왜군의 방화로 소실되어 재건되기도 하였으나 그 후 폐사가 되었다고도 한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에 의해 전하는 또 다른 단속사의 이야기가 있다.
이 절은 공부하는 스님들이 수백 명에 이를 정도의 대찰이었는데, 이곳을 찾는 신도들 역시 너무 많아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고 한다.
이곳의 스님들은 신도들을 맞이하느라 자신들의 공부는 뒷전이었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주지스님은 큰스님에게 어떻게 하면 자신의 학승들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큰스님은 절 이름을 단속사(斷俗寺)로 바꾸라고 하였다.
주지스님은 그 즉시 절 이름을 단속사로 바꾸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신도들이 하나 둘 줄어들더니 나중에는 발길이 뚝 끊어져 비로소 스님들은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신도들의 시주가 떨어진 단속사는 얼마가지 않아 폐사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단속(斷俗)을 이야기하기에 참으로 간명하다.
단속사지 앞에 섰다.
역사 깊숙한 곳으로 단속(斷俗)한 가람의 터에는 속(俗)이 잡초처럼 자라고 있었다.
수탈의 현장
단속사가 단속(斷俗)의 청정 가람이 아닌 탐욕(貪慾)의 가람으로 타락하였던 시절이 있었다.
고려 중기까지 청정도량으로 선풍을 드날리던 단속사가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어느 날 갑자기 정치적 세속에 휘말리게 된다.
세속과 결탁하게 된 단속사는 무자비한 수탈의 장소로 전락되어 가람 본연의 모습을 잃게 되는데, 이에는 최충헌 일가와의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1170년, 정중부에 의해 시작된 무신정권은 1196년 이의민을 몰아내고 실권을 잡은 최충헌에 의해 60년 최씨 정권의 기틀을 세우게 된다.
1201년, 정방의(鄭方義)의 반란은 반민중적 토호세력의 준동으로 오히려 진주민들인 일반백성들에 의해 타도되게 된다. (1200년 진주의 공・사노비들이 주리(州吏)들의 탐학에 항거하여 난을 일으켰으나 이내 주리들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그 과정에서 주리의 한 사람인 정방의는 반란을 진압하다 무장한 채로 당시 진주 사록(행정의 실무책임자)을 찾아갔는데, 이로 인해 그가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다는 혐의를 받게 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의 아우 정창대가 형을 옥에서 구해내면서 이 난은 천민・농민들의 난이 아닌 토호세력의 폭거로 변모되었고, 결국 그들의 반민중적 처사는 이듬해인 1201년 진주민들의 분노를 사게 되어 민에 의해 타도되었다. 일부에서는 이 난을 진주민란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개인 정방의라는 토호의 준동에 불과한 것이다. 민중에 의해 타도된 이 사건은 결국 최충헌으로 하여금 힘 안 들이고 진주를 자신의 영유지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최충헌은 진주민을 무마하면서 진주를 자신의 영유지로 만들게 된 계기가 되었고, 이후 진주는 최충헌 일가의 중요한 물질적 토대가 되었다.
1206년, 공식적으로 최충헌은 진강후(晉康候)로 책봉되는 동시에 당시 남강 유역의 가장 비옥한 토지였던 진강군(晉康郡:단속사가 위치한 단성을 포함한 진주일대)을 식읍으로 받았다.
또한 봉작에 따르는 후작관부(侯爵官府)로 흥년부(興寧府:후에 진강부로 개칭)를 설치하고, 여기에 관원을 배치하여 식읍 등의 사무를 맡게 했다.
이 식읍은 최충헌의 뒤를 이은 아들 최우가 그대로 물려받게 된다.
최우에게는 기생 서련방에게서 낳은 만종(萬宗)과 만전(萬全)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후계자로 삼기에는 출생에 흠이 있는 그의 아들을 배제하고 사위 김약선을 후계자로 내정하게 되는데, 만종과 만전이 후계자 김약선에게 불만을 품고 정변을 일으킬 여지를 없애기 위하여 그들을 수선사(송광사)의 진각국사 혜심에게 출가시켰다.
곧이어 만종을 단속사, 만전을 쌍봉사(전라도 화순)에 주석하게 하였다.
최우의 또 다른 목적은 진주지역과 전라도지역에 있던 최씨 일가의 경제기반의 효율적 관리를 위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만종은 단속사에서 무뢰승(無賴僧)들을 모아 문도(門徒)로 삼고 백성들의 재물을 마구 수탈하였다.
심지어 쌀 50여만 석을 백성들에게 꾸어주고 이식을 거두어 들였는데, 가을에 곡식이 익자마자 가혹하게 징수해 백성들은 가진 것을 모두 그의 문도들에게 빼앗기고 조세마저 내지 못하였다.
단속사는 더 이상 눈 푸른 납자들이 용맹정진하는 수도도량이 아니었다.
탐욕에 눈먼 만종과 그의 문도들의 가혹한 수취의 현장, 냄새나는 저자거리일 뿐이었다.
1240년 경상도 안찰사 왕해는 만종의 고리대로 인한 횡포를 저지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또 1247년 형부상서 박훤과 경상도 순문사 송국첨이 만종의 횡포 때문에 지방민들의 민심이 흉흉해 몽고군들이 내침했을 때 반역할 가능성이 있다며 만종형제를 소환하고 그 문도들을 처벌하여 민심을 위무하자고 최우에게 건의하였다.
이에 최우는 어사 오찬 등을 단속사와 쌍봉사로 파견하여 만종 형제들이 쌓아둔 전곡(錢穀)을 풀어 백성들에게 돌려주게 하였다.
그리고 고리대 문서를 불태우고, 무뢰배로 활동하던 만종형제의 문도들을 잡아 가두게 하였다.
그러나 만종 형제의 눈물어린 하소연에 마음을 바꾼 최우는 오히려 부자사이를 이간했다는 이유로 박훤을 흑산도로 유배보내고 송국첨을 좌천시켜 버렸다.
그리고 최우는 만전을 환속시켜 이름을 항이라 고치고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물론 후계자로 낙점한 사위 김약선이 이미 제거된 뒤였고, 그 후 만전(최항)은 아버지의 사망으로 정권을 이어받게 된다.
동생 만전과 달리 만종은 환속하지 않고 단속사로 돌아가 최씨정권이 몰락할 때까지 주지로 주석하였다.
그러나 만종에 의해 단속사는 탈속(脫俗)의 청정한 가람에서 세속의 무지막지한 수탈의 속가로 전락하였으니, 단속(斷俗)이란 이름이 탐속(貪俗)으로 오염되었던 시절이었다.
정당매(政堂梅)
폐사된 단속사를 지키고 있는 것이 동서삼층석탑과 당간지주 말고도 하나가 더 있다.
동서삼층석탑 뒤쪽에 수령이 600여년이 된 매화나무가 그것이다.
이 나무는 고려 말 문신 통정공(通亭公) 강회백(姜淮伯)이 단속사에서 공부를 하면서 손수 심었던 것으로서 그가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이르렀다하여 정당매(政堂梅)라고 하였다.
강회백(1357~1402)은 진양출신으로 여말 선초(麗末 鮮初)의 문인이다.
우왕(禑王) 2년(1376년) 문과에 급제하면서 관료생활을 시작하였고 공양왕 2년(1390년) 정당문학 겸 대사헌(政堂文學兼大司憲)에 오르게 되었다.
그의 나이 불과 35세였다.
공양왕 3년(1391년) 정몽주의 사주를 받은 김진양 등이 조준, 정도전 등을 탄핵할 때 강회백은 이에 동조하여 상소하였다.
이듬해 정몽주가 피살되면서 조준, 정도전이 복귀되고 그들을 탄핵했던 이들이 오히려 반격을 당하게 되는데, 강회백은 동생인 강회계(姜淮季)가 공양왕의 사위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탄핵을 면하였으나 곧 고향인 진양으로 유배되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 지나지 않아(1392년 7월) 고려왕조는 망하게 된다.
그는 이성계 일파에 의한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 :우왕과 창왕은 왕씨가 아니라 신돈의 자손이다)로 폐출된 우왕 ․ 창왕을 거쳐 폐가입진(廢假立眞 : 가짜를 없애고 진짜를 세운다)으로 보위에 올랐다가 폐위당한 공양왕까지의 정치적 격변기를 겪었던 관료였다.
젊은 나이에 정당문학이라는 요직에 등용된 것과 탄핵에 의한 유배지가 자신의 고향인 진양으로 된 것은 비록 실권이 없는 임금이었지만 공양왕의 관심과 배려에 의한 것임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귀향이라 할 수 있는 유배생활은 그에게 있어서 조선건국의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아무튼 그가 심었던 정당매는 인근 남사리의 원정공 하즙이 심었던 ‘원정매(元正梅)’, 덕산 산천재의 남명 조식이 심은 ‘남명매(南冥梅)’와 더불어 ‘산청삼매(山淸三梅)’로 불린다.
산청삼매 중에서 수령으로 치면 원정매가 최고(最古)일 것이고, 선비의 명성으로 치면 남명매가 으뜸이 되어야 할 것임에도 사람들은 정당매를 그 첫째로 꼽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두 개의 매비(梅碑)와 이를 보호하기 위해 건립한 정당매각(政堂梅閣)까지 거느린 당당한 위상 때문일까, 아니면 스러진 가람터를 변치 않고 지켜왔던 끈질긴 생명력 때문일까?
어쩌면 이 정당매에 열려있는 수많은 선비, 묵객들의 시문들 때문일지도 모른다.
강회백의 손자 강희안(姜希顔)은 그의 저서 ‘양화소록(養花小錄)’에 정당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단속사의 스님이 공(강회백)의 덕과 재주를 사랑하고, 깨끗하고 높은 인격을 흠모하여 매년 뿌리에 흙을 북돋아 주고 가꾸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계속 전해져 정당매라고 부른다. … 영남으로 가는 사대부는 이 고을에 이르면 모두 절을 찾아 매화를 둘러보고서 운(韻)을 빌려 시를 지어 처마 밑에 걸어 두었다.”
남명선생도 정당매 앞을 비켜가지 않았다. 두 수의 시가 전해진다.
그 하나는‘증산인유정(贈山人惟政:유정(사명당)에게 주다)’이라는 시다.
꽃은 연못가 돌 위에 떨어지고 (花落槽淵石)
옛 절의 축대엔 봄이 깊었네. (春深古寺臺)
이별의 때를 기억해 두시도록 (別時勤記取)
정당매 푸른 열매 맺었을 때를. (靑子政堂梅)
또 하나의 시는 ‘단속사정당매(斷俗寺政堂梅)’이다.
절도 중도 쇠잔하니 산도 옛 산이 아니로세 (寺破僧羸山不古)
전조의 임금 집안 단속을 잘하지 못하였네 (前王自是未勘家)
추울 때 피는 매화 일을 조물주가 그르쳐서 (化工正誤寒梅事)
어제도 꽃 피우고 오늘도 꽃 피우 누나 (昨日開花今日花)
천하의 남명도 고려와 조선 양조에 걸쳐 벼슬을 한 강회백을 슬쩍 빗대어 정당매를 시샘한 것은 아닌지.
여기까지가 정당매와 관련한 이야기이다.
그냥 끝맺음하려니 허전한 아쉬움이 든다.
이왕에 통정공(通亭公) 강회백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약간 보충하고 나의 엉뚱한 상상으로 각색한 스토리텔링으로 덧칠을 할까한다.
강회백의 부친 강시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냈으며, 산청삼매 중 하나인 원정매의 주인공 하즙의 사위이다.
강회백의 둘째 아우 회중은 ‘강고집’의 주인공으로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에 은거하였고, 막내 회계는 공양왕의 사위가 되었으나 공양왕이 폐위되면서 참형을 당하였다.
세종의 총신(寵臣) 강희안과 세조의 총신 강희맹 형제는 그의 손자이다.
강희백은 1392년 진양으로 유배되었다가 1398년(태조 7) 조선 태조에 의해 동북면 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로 임명되었고 그 4년 후인 1402(태종 2)년 사망하였다.
1392년부터 1398년까지의 귀양살이 7년은 피를 말리는 중앙정계의 치열한 암투에서 벗어나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적(自適)의 평화를 누린 시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약관의 나이에 출발하였던 15여년의 관료생활을 접고 불혹을 앞둔 30대 후반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10대 시절 학문에 정진하였던 단속사를 찾아 자신이 심었던 매화나무 앞에서 소회의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단속사수종매(斷俗寺手種梅)
우연히 옛 고향을 다시 찾아 돌아오니, (遇然還訪古山來)
한 그루 매화 향이 사원에 가득하네. (滿院淸香一樹梅)
무심한 나무지만 옛 주인을 알아보고, (物性也能知舊主)
은근히 나를 향해 눈 속에서 반기네. (慇懃更向雪中開)
그 무렵의 그는 유배지인 자신의 고향에서 귀양생활의 고단함보다는 귀향생활의 안온함에 자족하였던 것 같다.
물론 내 주관적인 판단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7구간 답사를 위해 정당매 관련 자료를 찾아보다가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강회백의 당시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있는 그림을 발견하였다.
그 그림은 그의 손자 강희안이 그린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였다.
사실 내가 강희안에 대하여 아는 것이라곤 조선 초기(1417~1464)의 문신으로 시・서・화에 능하였다는 정도와 그의 그림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는 혜곡 최순우(1916~1984, 전 국립박물관장)선생의 책에서 본 것이 전부이다.(선생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의 책에서는 이 그림의 화제(畵題)를 ‘한일관수도(閑日觀水圖)’라고 하였다.)
“이 작품은 큰 암벽 아래 바위에 엎드려 흐르는 물을 진종일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 있는 한 사람의 백의거사를 그린 것으로 말하자면 인재(仁齋:강희안의 호)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그림 속에 들어앉힌 것으로 볼 수 있다.”라는 설명과 함께였다.
그런데 나는 고사관수도 속의 주인공이 혜곡선생께서 설명하신 화가 본인인 강희안이 아니라 그의 조부 강회백이라는 아주 엉뚱한 상상을 한 것이다.
내가 이러한 상상을 하게 된 첫 번째 이유는 이 그림의 배경이 ‘광제암문’과 판박이로 닮았다는 점에서였다.
광제암문은 청계리, 운리, 진자마을을 거친 남사천이 작은 독뫼의 직벽 단애를 만들면서 휘감아 흐르는 곳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최치원의 글씨라고 전해지는 ‘광제암문(廣濟嵓門)’이 직벽 바위에 각자되어 있으며, 그 옛날 단속사의 입구라고도 한다.
그리 높지 않은 직벽에 드리워진 덩굴풀과 계곡에 맞닿은 너럭바위…
강희안이 고사관수도를 그릴 때 이곳 광제암문을 배경으로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림에서 묘사한 풍경이 흡사 광제암문을 실사(實寫)한 것 같이 닮아도 너무 닮아 있었다.
나는 여기에서 이 그림의 주인공을 강회백으로 설정하고 그림 속의 이야기를 각색해 볼까한다.
낙향(?)의 유배시절 어느 날 강회백은 추억의 단속사를 찾았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그는 광제암문의 너럭바위에 엎드려 한나절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였다.
그는 삭탈관직으로 무장해제 된 죄인으로서의 절망감보다는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중앙정가에서 벗어난 야인으로서의 홀가분함을 즐기고 있었다.
지극히 평온하고 안락한 기분으로 흐르는 물을 관조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고사관수도이다.
물론 이는 나의 엉뚱한 상상에서 출발한 픽션으로서의 ‘통정(通亭)의 관수(觀水)도’이다.
강회백은 고려와 조선의 왕조가 교차되는 격변기를 겪었던 인물이다.
그는 이성계 일파인 조준, 정도전, 남은 등을 탄핵하는데 동조하다 밀려나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으나 새 왕조 개창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찬동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나중에 동북면도순문사에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태조의 강권에 의한 것이지 그가 원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이를 두고 남명 조식은 두 왕조를 섬겼다고 비웃기도 하였지만 강회백은 권력을 향해 사투를 벌였던 정치적 계파에서 약간 벗어나 있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그를 두고 흑도 백도 아닌 회색분자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는 물처럼 살아가고픈 무색무취한 선비일 뿐이었다.
그는 광제암문의 너럭바위에 엎드려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서 노자의 도덕경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상선약수(上善若水), 가장 아름다운 인생은(上善) 물처럼 사는 것(若水).”
청계・운리골 단상(斷想)
운리 마을길을 지날 때면 가끔 떠오르는 기억 하나가 있다.
그 기억은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흐릿하면서도 몽환적인 느낌으로 다가서곤 하는데, 오래된 나의 기억들 대다수가 그러하듯이 술과 관련된 사건이면서 술 깬 뒤의 기억처럼 필름이 끊어졌다 연결되었다 하는 그런 식이었다.
운리마을의 어느 점빵에서 스님과 도사와 함께 낮술을 먹고 있었다.
어떤 연유로 합석을 하였는지, 어디에 계신 스님인지, 어떤 공부를 하고 있는 도사인지 도무지 깜깜한 상태이다.
분명한 것은 서로 초면이었다는 사실, 그날 엄청난 양의 술을 함께 마셨다는 사실 그리고 도사의 토굴(?)로 자리를 옮겨 밤을 새웠다는 것이었다.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의 술자리를 이어갔다면 서로 죽이 맞아 많은 이야기들을 주고받았을 것인데 기억에 남는 것은 별로 없었다.
도사는 단속사 자리가 옥녀직금혈(玉女織錦穴)의 명당터라고 주장하였고, 나는 명당은 자신의 자리를 보전한다고 들었는데 폐사지가 어찌 명당이 될 수 있느냐고 반박을 하였다.
이에 대해 스님은 자리가 나빠서 절이 망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자신은 이곳 운리골에 속과 단절하는 단속사가 아닌 속과 함께하는 동속사(同俗寺)를 짓고 싶다고 하였다.
그러자 도사는 옥녀직금혈의 정확한 혈자리를 찾아서 자신의 공부를 마무리하고 싶다고 하였다.
우리는 운리 점빵의 평상에서 각자의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소주를 마셨다.
같은 소주병에서 따른 술을 스님은 곡차로 마시고, 도사는 선주(仙酒)로, 나는 그저 소주로 마시면서 각자의 이야기를 독백처럼 이어간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도사의 토굴로 자리를 옮겨서 계속 술을 마셨다.
어떤 연유로 바깥에 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다시 도사의 토굴을 찾으려 안개가 자욱한 옥녀봉 기슭과 탑동마을을 수없이 돌았다는 것이 그 다음의 기억이었고, 결국은 안개 속에 깊이 숨어버린 도사의 토굴을 찾지 못하고 단속사지 삼층석탑 앞에 망연히 서 있었던 것이 그날 기억의 끝이었다.
그날 안개 속 운리골은 어쩌면 도연명이 말하던 무릉(武陵)의 도원(桃源)일지도 모른다는 몽환적 선계(仙界)로 내 기억 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런 선입견 때문인지 청계・운리골을 접할 때 마다 범상치 아니한 곳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청계・운리를 그대로 풀이하면 맑은 계곡이 구름 속에 쌓여있다는 곳인데, 이곳이 바로 도연명이 말한 무릉도원이라는 내 나름대로의 해석을 하게 된 것도 이에 연유한 것이다.
이곳을 풍수적으로 일러 주산인 웅석봉을 중심으로 석대산(石垈山)인 좌청룡과 백운산(白雲山)인 우백호가 둘러싼 길지로서 지리산의 또 다른 청학동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무릉도원이든 청학동이든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비속처(非俗處)라는 점에서 이곳의 단속(斷俗)과 의미가 통한다.
그러나 속세와 단절된 곳, 그곳이 선계(仙界)이든 피안(彼岸)이든 간에 인간을 배제한 공간이라면 더 이상 우리 범부중생들의 터전이 아니다.
그곳은 우리들의 현생계(現生界)에서는 결코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신기루 같은 보리계(菩提界)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 청계・운리골은 뜬구름 잡는 단속의 땅이 아니라 중생들과 함께하는 광제(廣濟)의 활인지지(活人之地)가 되어야 하는 곳이다.
이곳의 관문이 애당초 사람들을 널리 구제한다는 광제암문이었다면 그것은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터전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이곳은 현생계의 명당으로 가꾸어지고 자리 잡아야 할 광제의 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도 웅석봉은 하계(下界)를 품고 있다.
후기 (구간전체 13.4km) 2018. 11. 4
(성심원 ⇨ 아침재 : 1.8km)
지난 2월 10일, 6구간을 끝낸 후 한동안 지리산 둘레길 순례를 중단하였다.
뚜렷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약8개월 만에 다시 재개한 지리산 둘레길이다.
그동안 숙제를 미룬 것 같은 찜찜함이 있었는데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기쁘고 홀가분하다. 가벼운 설렘까지 인다.
오늘 구간의 들머리는 성심원이다.
성심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등산화 끈을 조여 매었다.
지난 2월의 제6구간은 아침재에서 마무리 하였으나, 오늘 우리는 그것을 무시하기로 하고 제7구간을 성심원에서 시작하기로 한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2015년 10월 17일, 제7구간을 거친 이후 3년 만에 2회독의 순례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성심원을 벗어나는 후면의 오름길 임도는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그때 그대로의 풍경과 그 정취를 간직하고 있다.
나무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경호강의 물줄기도 예전 그대로의 싱그러운 느낌이었다.
건너편 둔철산의 건강한 능선이 살갑게 다가선다.
(아침재 ⇨ 웅석봉 하부헬기장 : 2.8km)
아침재는 성심원과 어천마을을 잇는 고갯길이다.
둘레길은 아침재 고갯마루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산길을 따른다.
완만한 오름의 산길 역시 예전 그대로의 한적하고 평화로움의 모습이다.
길은 어천계곡 상단을 가로지른다.
작고 소박한 계류이지만 때 묻지 않은 순수(純水) 그대로의 물길이 옥계(玉溪)를 이루고 있다.
작은 담(潭)에 떠있는 진홍의 단풍잎이 고혹적이다.
몇 년 전 어천 마을 주민들이 마을의 식수원 오염을 염려하여 이곳을 통과하는 둘레길 구간을 폐쇄하여야 한다면서 실력저지에 나섰던 적이 있었다.
어천 마을 주민들의 심정을 알 것만 같았다.
그런 와중에 이곳에 둘레길의 나무다리를 설치하자 누군가가 교각을 자르기도 하였다.
2015년 이곳을 지날 때 교각이 잘려서 기울어진 나무다리가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었던 모습이 기억난다.
오늘 이곳을 지나면서 그때의 기억으로 현장을 확인하려 하였으나 그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깨끗이 정리된 것 같아 홀가분한 마음이 인다.
이곳에서부터 된비알의 오름길이다.
웅석봉 동사면의 급경사 구간으로 웅석봉 하부헬기장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색 바랜 단풍잎들로 늦가을 색이 완연하다.
그러나 때를 잊은 선홍의 붉은 단풍이 중간 중간 섞여 있어 오히려 늦가을의 완숙(婉淑)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가쁜 숨을 고르면서 뒤돌아보면 나뭇가지사이로 둔철산의 묵직한 능선이 우리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있었다.
숨이 턱밑까지 차올라 헐떡거리기를 수없이 반복한 끝에 도달한 곳은 웅석봉 하부헬기장이다.
드디어 시야가 훤히 열리면서 사방을 조망할 수 있었다.
(웅석봉 하부헬기장 ⇨ 점촌고개 ⇨ 단속사지 ⇨ 운리 : 8.4km)
웅석봉 하부헬기장은 신행당고개 근처에서 시작되는 임도와 연결되어 있는데, 그 길은 계속하여 상부헬기장까지 이어진다.
둘레길은 그 길을 따라 오른다.
임도를 따라 한 모랭이를 돌아 오르면 길옆의 전망 좋은 곳에 정자가 있다.
우리는 그곳에 짐을 풀고 점심을 준비하였다.
메뉴는 항상 그랬듯이 솔잎에 찐 돼지고기 수육과 라면이 전부였지만 푸짐한 산상 성찬이었다.
이곳에서 둘레길은 상부헬기장을 향하는 오름의 임도를 버리고 좌측으로 꺾어진 내림의 임도를 따른다.
정면에 보이는 능선이 달뜨기 능선이다.
빨치산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이름, 그러나 이곳에서는 저 능선에 달뜨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오로지 써리봉이나 치밭목, 황금능선에서만 볼 수 있을 뿐이다.
둘레길은 달뜨기 능선의 동사면 허리를 타고 내려간다.
이 길은 길게 늘어진 완만한 비알의 임도로 점촌고개까지 변화 없이 밋밋한 구간이다.
자칫 따분할 수도 있는 길이지만 건너편 신행당고개로 이어지는 동쪽 능선의 경쾌한 마루금과 눈 아래 언뜻언뜻 보이는 청계호수의 푸르름을 보는 것만 하여도 즐거운 여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덤으로 동행자들과 재미난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실컷 웃을 수 있었던 길이 되었다.
둘레길의 묘미는 동행자들과 이야기하면서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구간이 많다는 것이다.
팬션이 있는 점촌고개에서 택시를 불렀다.
우리가 단속사지에 도착할 때쯤 택시도 도착할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고개를 내려서 1001번 지방도를 만나는 삼거리에 닿자말자 택시가 도착한 것이다.
결국 단속사 순례는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 제7구간은 점촌 삼거리에서 마무리한다.
첫댓글 우리주위의 둘레길에 역사와 전설이 이렇게 재미있고 깊다는 것을 오늘도 배우게 됩니다. 교수님. 감기 조심하세요^^
감사
인문학이 있는 지리산 둘레길..언젠가 동행하고 싶네요.^^
언제든지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