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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섯째 날(8월 29일)
(23)
순천, 광양, 하동 찍고 남해까지
2차 목적지는 울진 월송정이다.
남해에서 동해의 중간쯤까지지만 서해와 달리 서울로 부터 멀기 때문에 드나들 수 없는
장거리 구간이다.
8월 25일(2012년)에 서울을 떠나려 했으나 태풍 볼라벤으로 인해 자꾸 미뤄졌다.
볼라벤이 중부지방을 통과해 북상한다는 날, 역(逆)으로 남하길에 나섰다.
서울을 통과한 날(2012년 8월 28일) 밤, 순천행 심야열차(무궁화호)에 올랐다.
태풍 일과 후의 정적을 실감하게 하는 순천의 새벽거리.
청소원들을 몸살 앓게 하고도 남을 만큼 어지럽게 널려있는 새벽의 순천 거리를 걸었다.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느니 걷는 것이 편한 길손이니까,
문상간 일이 있어서 낯익은 성 가를로 병원이 중간 이정표가 되어 어렵잖게 나아갔다.
2번국도(순광로) 따라 광양교를 건너 광양공영버스터미널까지 막힘 없이.
나그네의 눈을 끈 것은 관광홍보대.
자료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회의 땅 광양! 세계로 미래로'
그러나 텅 비어있는 홍보대.
광양에는 세계도 미래도 없다.
(1년 후 섬진강자전거도로를 걷기 위해 다시 방문했을 때도 광양신문 몇부 담겨있는 것
말고는 1년 전 그대로인 홍보대)
태인동(메뉴 '강따라 길따라' 1번글 참조)에서 태인교를 되건너 이순신대교까지 역으로
갔으나 엑스포 기간중에 임시개통한 대교는 공사중.(2013년 2월 7일 개통했단다)
2.260m로 국내에서 최장이고 세계에서도 4번째로 긴 현수교라고 자랑하지만 신물나게
판에 박은 설계 누가 알아준다고.
견학 명목으로 거금을 들여 해외에 보내건만 뭘 보고 왔는지.
하프의 현을 연상하게 하는 아름다운 현수교도 있건만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가.
태인동으로 되돌아와 국가산업단지의 바닷가 길을 따라서 섬진대교로 갔다.
남해길 하동으로 넘어가는 다리다.
망덕포구 4.6km, 매화마을 21.1km, 안내 표지판이 있다.
1년 후에 그 길을 걸으리라 어찌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지난달 17일 하마터면 배알도 해변공원에서 여기까지 알바할 뻔 했는데.
폭우를 동반한 태풍 볼라벤으로 인해 황토 섬진강물이 공포심을 갖을만 하게 불었다.
더구나 만조때라 강인지 바다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인 바다 최측근 섬진대교에서
마도가 고립무원으로 보였다.
경상남도 땅, 하동군 금성면에 들어섰지만 사천길을 확정하지 못하고 더 걸었다.
늘 현장에서 결정하는 내 습관 탓이다.
59번도로는 운명적으로 초대형 탱크로리, 트레일러 등 공포의 난폭자들 세상이다.
국가산업단지, 광양제철소 및 연관단지, 국민임대산업단지 등 공단지역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 지역 전구간을 걸을 배짱은 없으므로 남해를 경유하면 창선면을 거쳐 삼천포
해안을 따라 고성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지체없이 그 길을 택했고 그 길을 얼마 걷지 않아 행운의 히치-하이크가 이뤄짐으로서
나의 하동땅 체류 최단 기록을 세운 셈이다.
지리산 종주, 낙남정맥 종주 등 산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적어도 한밤은 보냈는데.
정지한 마티즈II(04로3025)의 백미러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고 남해 다운타운이 행선지
라고 미리 말하는 스마일형 운전자.
고맙게도 자기의 서비스를 남해읍 버스터미널까지 연장하면서도 유감스럽게도 잔잔한
미소 이상은 아무 것도 남기지 않으려는 그를 내 어찌하겠는가.
나 또한 미소 외에는 줄 것이 없는데.
양 날개를 단 남해섬과 죽방렴
전라도 해안을 쑥밭만든 볼라벤이 경상도에는 관대했던가, 길목이 달라서 였는가.
여수와 남해 사이에는 그리 넓잖은 한려해상국립공원이 있을 뿐인데도 피부로 느끼지
못했다는 말대로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있는 것 같다.
삼동면 지족리, 창선교 아래의 쉼터에서 김밥과 캔맥주 하나로 두끼를 묶어서 해결하고
하동에서 끊긴 걷기를 이어갔다.
남해대교가 하동과 남해를 이어줌으로서 남해섬의 육로를 개척했는데 창선도를 남해에
묶어놓은 다리가 지족해협의 창선교다.
그래서, 창선에서 육지로 가려면 남해대교를 건너야 했는데 2003년 창선.삼천포대교의
개통으로 남해군의 육지와의 교통은 양 날개를 단 셈이다.
"섬과 섬,산과 바다를 잇는 천혜의 자연경관과 조화된 국내유일 교량전시장"이라는 창선.
삼천포대교는 단항, 창선, 늑도, 초양, 삼천포 등 총 연장 3.4km 다리들의 집합명사다.
지족해협의 죽방렴이 창선교 위에 한동안 걸음을 묶어놓았다.
죽방렴(竹防簾)은 일명 대나무어살로 대나무 발 그물을 세워 고기를 잡는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명칭이란다.
물때를 이용해 안으로 들어오는 고기를 가두었다가 필요한 만큼 건지는 재래식 어항.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쌍끌이 저인망으로 씨마저 훑어내는, 내일이 없는 이즈음의 어로와 달리 안에 들어오는
고기만 잡을뿐더러 수요공급까지 조절하는 여유로움이 있었다.
물살이 빠른 수역의 고기가 탄력성이 높아서 맛이 특출하단다.
이곳에서 잡히는 생선들이 바로 그러해서 최고의 횟감으로 손꼽힌다나.
멸치를 대표 어종으로 하는 이 일대의 어로작업, 죽방렴은 우리나라 고유의 어획법이라
해서 명승 제71호 문화재의 지위를 획득했다.
지족해협의 양안(兩岸), 창선교의 양단은 삼동면 지족과 창선면 지족이다.
창선 지족에서 당저, 면소재지를 지나 당항, 단항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3번국도와 77번
해안도로가 겹쳐서 간다.
부산을 비롯한 영남권 길이 놀랍게 단축되었다.
창선면은 무한궤도처럼 맨 뒤가 가장 앞이 되었으며 창선교로 연결된 삼동면이 특별한
시혜지역이 되었다.
창선대교타운은 남해와 사천을 잇는 창선대교의 산물이다.
남해땅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또는 남해땅에 들어오면서 입장 신고로 지갑을 열게
하려면 획기적인 전환이 있어야 한다.
억지로 여는 것이 아니라 감동적인 환대에 지갑이 절로 열리도록.
이미지 제고하고 수익도 올리고, 뽕 따고 임도 만들고, 일석이조인데 왜 지갑만 노릴까.
'삼천포로 빠진다'가 왜 나쁜가
드디어 삼천포 땅이다.
지금은 사천시의 핵심 지구, 도심 지역이지만 한때 삼천포시(市)였던 곳.
사천은 낙남정맥 종주와 통영별로 걷기 때 상당한 지역을 밟았으나 삼천포는 처음이다.
남해쪽을 택한 것도 삼천포가 이유였다.
사량도 지리망산에서 인상적이었던 창선.삼천포대교에 마침내 진입한 것.
삼천포는 "삼천포로 빠진다"는 이상한 관용구의 회자로 명성(?)을 얻게 된 땅이다.
"이야기가 곁길로 흘러가거나 순조롭게 진행되던 일이 낭패를 본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이 관용구에는 여러 민간어원이 있다.
"부산과 진주 사이를 운행하는 전동열차 3량중 1량은 삼천포가 종착역인데 진주로 가는
이가 삼천포 칸에 타고가다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삼천포까지 가버렸기 때문에"
"고성의 어느 분이 진주의 사돈댁에 가다가 상리면 척번정리(진주와 삼천포 갈림길 삼
거리)에서 잘못 들어 삼천포로 가게 되었기 때문에"
"승용차로 부산에서 하동으로 출장갔던 한 고위관리가 심야에 귀가하던 길인데 헷갈린
운전기사가 그만 삼천포로 빠지고 말았기 때문에"
"한 장사꾼이 장사가 잘되는 진주로 가려다가 길을 잘못 들어 장사가 안되는 삼천포로
가는 바람에 낭패를 당했기 때문에"
"진해에서 서울로 휴가나왔다가 귀대할 때 삼랑진에서 진해행 열차에 환승해야 하는데
삼천포행 열차를 탐으로서 귀대시간을 어겨 벌을 받는 병사들로부터 나온 말"
"어느 유랑극단이 진주로 가던 중에 잠시 삼천포에 들렀으나 실속이 없었던지 터무니
없이 해댄 악담"이라는 등 분분한 설은 내가 사천땅 3번 방문에서 수집한 내용이다.
2번째 관뮬면의 유식한 이장 K씨와 3번째(이번) 삼천포 땅에서 얻은 수확이 가장 크다.
사천시민들은 이 표현을 지역 차별로 여기고 예민하게 반응하며 한국방송윤리위원회도
이 표현을 비속어, 은어로 규정해 방송에서 사용하지 못하게 했단다(1977년).
그러나, 이 말의 부정적인 면 보다는 지명의 홍보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어느 지점인지 모르는 이가 태반일 정도로 남해안의 자그마한 삼천포가 이 말의
유행으로 전국적 지명이 되었으니까.
더구나, 남해 창선과 삼천포 대방을 잇는 창선.삼천포대교는 사천8경중 단연 1위다 .
홍보 심리학에서는 몹시 기분 상하게하 는 것도 특단의 홍보효과라는데.
창선.삼천포대교에 대한 칭찬과 자랑은 남해와 사천이 호형호제다.
"5개의 다리가 모두 다른 공법으로 만들어져 각각의 개성을 뽐낸다"
"섬과 섬, 산과 바다를 잇는 천혜의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룬 국내유일 교량전시장이다"
"주변의 해상 자연경관과 연육교의 예술적 조형미가 어우러진 관광명소다"
"건설교통부(당시) 주관 한국의 아름다운 길 대상에 선정되었다" 등.
하지만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나는 기술적인 분야는 무지무식하므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지만 시각적 미를 말하란다면
당당히 말한다.
우리나라의 교량 설계사들은 복사기에 불과하다.
철면피가 아니라면 시각장애인들이다.
미적 감각이 부족하다면 남의 것 보는 눈과 느끼는 감정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액땜의 피였으면....
도로의 난폭자들이 달리지 않아서 안심하고 가는 중이었다.
늑도대교를 지나 초양도를 반쯤 지나는 지점으로 기억된다.
아마, 소형 모터보트가 남기는 두줄 파문이 특이해서 디카에 담고 있었을 것이다.
순간적 폭풍에 쓰러졌으며 굴러가지 않으려고 버둥거렸다.
정신을 수습한 후 돌이켜 보니까 폭풍이 아니고 달리는 초대형 트레일러의 삐어져 나온
짐이 밀어서 나뒹굴어진 것이다.
눈섭 옆 이마가 찢어졌는지 제법 많은 피가 흘러내렸다.
약통을 꺼내어 지혈조치를 했으나 계속 흘러서 애로가 여간 아니었다.
이 때문에 디카를 놓치지 않으려다 손가락 마디들이 입은 상처는 느낄 겨를이 없었던가.
한 손으로 이마를 누르고 물어물어 찾아간 삼천포의 외과의사가 이마보다 손가락 마디
걱정을 더 함으로서 비로소 통증을 느끼게 되었으니까.
우선은 진통제 주사로 안정시켰지만.
걷는 동안에도 병원과 보건소에서 거의 주기적으로 치료했으나 걷기를 마치고 귀가한
후에도 병원 출입을 하는 등 고생했다.
이처럼 가볍지 않은 부상에도 초양대교, 삼천포대교, 대방진, 삼천포항 동동까지 꽤 먼
거리를 끝내 걸어간 늙은이의 고집을 평가해야 하나.
나그네에게 가장 서글픈 때는 몸에 이상이 있을 때다.
가드레일이 있으나 시늉뿐이고 높은 둑길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은 것,더 심각한 부상을
당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지만 첫날에 부닥친 불상사에 의기 소침해질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더 악화되어 갈 것이 분명한 공차증을 어떻게 극복할 지.
부산에서 포항까지의 동해길은 원자력발전소와 공단으로 인해 해안로가 거의 없는데.
묻고 또 묻고, 삼천포시를 거의 한 바퀴 돌다시피 해서 간신히 찾은, 삼천포버스터미널
옆 찜질방 앞에서 퍼뜩 정신이 드는 듯 했다.
내가 왜 여기에 와있는가.
손도 얼굴도 물을 댈 수 없는 몸이 왜 그토록 애타게 찜질방을 찾아 헤맸을까.
고소(苦笑) 불금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황급히 나와 발견한 한내천을 따라 내려가 보았다.
천변에는 소공원이라도 있을 것이고, 그러면 정자도 있겠지.
예상은 적중했고 골라잡아야 할 만큼 연달아 있는 정자들.
연배쯤 되어보이는 한 영감의 조언으로 선택한 정자는 이상적인 환경이다.
또 하나의 태풍이 오는 중이라는데 바람과 들이치는 비까지 막아줄 만큼 우람한 나무들
사이에 있으니까.
그는 내 식사 걱정을 하며 지근의 좋은 식당도 소개했다.
천막 안에 누움으로서 안정은 찾았으나 좀처럼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밤.
진통제 효과가 끝나가는지 통증을 다시 느끼게 되고 태풍의 예고인지 바람도 불어오고
외로움을 타기 알맞게 을씨년스럽고 심란이 깊어만 가는 밤.
오늘 사고가 항해에 앞서 드리는 기원제였으며 내가 흘린 피가 액땜의 피였으면 좋겠다.
봉화대로를 걸을 때 죽령고개를 넘어오다가 이마를 찢어 단양병원에서 응급수술을 받은
후, 그날 밤에도 같은 염원이었는데. <계 속>
첫댓글 큰일날번 하셨습니다 ! 그렇게 굴러서 다치면서도 잡고 있던 디카 덕에 저희가 사진을 보는거네요.새삼 감사합니다
삼천포 지명 말인데 제가 예전에 배운 기억으론 강점기에 공출되어 부산에 가야하는 쌀 일부가 삼천포항으로 빼돌려지곤 해서 생겨난 말이라고 알고 있거든요 .그리곤 잘 쓰여졌다든가 했던거 같아요. 삼천포 사람들이 왜 그런 이야기를 안할까요? 공출 쌀이 실려 일본 으로 간걸 제가 거꾸로 알았을까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다만, 삼천포는 옛적부터 나룻배가 드나드는 곳이기는 했으나 부산,마산,여수 등지와 통하는 항구가 되기는 1960년대였습니다.
일제때 남해안 지역의 공출미를 해로를 통해 부산항으로 운송은 했으나 삼천포는 경유할 만한 곳이 되지 못했고 부산과의 육로가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해안은 일본인 손아귀에 들어있었는데 가능했을지요.
만일, 그랬다면 삼천포 주민으로서는 지역차별이라고 항의하고 수치로 여기거나 숨길 일이 아니고 되레 내세울 자랑거리지요.
아무튼, 이 기회에 더 알아보겠습니다.
참, 예원님, 저번에 찍어온 사진을 보내드리려 하는데 e-메일 좀 주실 수 없으신지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3.08.29 0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