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대(石臺) 영양천씨(潁陽千氏) 효열가(孝烈家) (李 聖 惠(경성대 한국학연구소) ~ 펌
1. 머리말
2. 석대 입향 내력
2-1. 한국 영양 천씨의 유래
2-2. 석대 입향 내력
3. 5代 6孝 내력
3-1. 千聖泰의 孝行
3-2. 千世慕의 孝行
3-3. 千述運의 孝行
3-4. 千相璉의 孝行
3-5. 千禹炯의 孝行
3-6. 金海 金氏의 烈行
4. 맺음말
1. 머리말
효는 백행(百行)의 원천이라고 한다. 그러나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드물지만, 부모에게 생명의 은혜를 보답하는 자식은 많지 않다. 때문에 자식을 잘 사랑했다는 정문(旌門)은 없지만, 부모에게 효를 잘 했거나, 여인으로서 정렬(貞烈)을 잘 지켰음에 대한 정문(旌門)은 사회에 한 본보기가 되며 칭송된다.
조선조가 주자 성리학을 받아들이고,『주자가례』가 보급되면서 이러한 충효열(忠孝烈)의 개념이 분명해지고 실천이 강조되지만, 현실생활에서의 실천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그런 때문인지 효행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늘의 응답이 있었다는 얘기들이 전해온다. 뿐만 아니라 집안에 정문(旌門)이 내린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었다.
부산 석대에 세거(世居)하는 영양 천씨의 집안에도 하늘이 응답한 효자를 배출하였다. 한 가문이 하나의 효자를 내기도 어려운데 이 집안은 5대에 걸쳐 6효열(孝烈)을 내었으니 한마디로 효열가(孝烈家)라 하겠다.
이 글은 우리 부산 토착 성씨의 하나인 석대 영양 천씨의 내력과 5대 6효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1)
2. 石臺 入鄕 내력
2-1. 한국 영양 천씨의 유래
한국에 영양(潁陽) 천씨(千氏)의 뿌리를 내린 사람은 영양(潁陽) 천씨(千氏) 중시조(中始祖)인 천만리(千萬里)이다.2)
천만리(1543~? )3)의 자(字)는 원지(遠之)이고, 호는 사암(思庵)이다. 그는 명나라 가정(嘉靖) 22년인 1543년 8월 1일에 태어났다. 12살에 유년(幼年)으로 경과(慶科)에 급제하여 황제로부터 상을 받았고, 1571(28세)년에는 무과(武科)에 장원급제 하였다. 1575년(32세)에는 총절사(摠節使)로 공을 세우고, 태청전수위사 겸 총독오군수(太淸殿守衛使 兼 總督五軍帥)로 승진하였다.
1592년(49세) 4월, 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서울이 함락되고 평양까지 빼앗겨 선조임금이 의주까지 파천(播遷)하자,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이때 천만리는 황명(皇命)을 받들어 조병영량사겸총독장(調兵領糧使兼總督將)으로 장남 상(祥)을 데리고 총수사(摠輸使)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평양에 왔다.
이 명나라 원군(援軍)은 평양에서 왜적을 크게 이기고 곽산(郭山)과 동래까지 추격하여 왜적을 섬멸하였다. 이를 삼전삼첩(三戰三捷)이라고 한다. 그 뒤 1597년(54세) 정유년에 왜병이 다시 조선을 침략하자 천만리는 다시 울산까지 추격하여 왜병을 물리쳤다. 이때 명나라 군사는 회군(回軍)하였는데 천만리는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남았다.
조선 조정에서는 천만리에게 임진왜란일등공신으로 정이품(正二品) 자헌대부 봉조하(資憲大夫 奉朝賀)를 내리고, 화산군(花山君)에 봉했다. 또 30결의 사패지(賜牌地)를 내려주었으며, 자손들에게는 부역을 면해주고 대대로 나라에서 녹(祿)을 내려주게 하였다.
그의 장남 상(祥)도 한성좌윤(漢城左尹)에 임명되었다. 뒤에 천만리에게 ‘나라를 염려하여 집안을 잊음은 충(忠)이요, 적을 물리쳐 난을 극복함은 장(壯)이다.(慮國忘家曰忠, 勝敵克亂曰壯)’라 하여 충장(忠壯)의 시호를 내렸다.
영양 천씨의 중시조이며, 한국 영양 천씨의 시조인 천만리는 이렇게 조선 왕실의 공신으로 평양에 안착하였다.
2-2. 석대 입향 내력
명나라가 원군(援軍)을 보내어 왜적을 물리치자 명나라와 조선은 안정을 찾은 듯했다. 그러나 임진년과 정유년의 왜란으로 조선과 명나라가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 만주에서 후금(後金)이 일어났다.
후금의 세력은 점차 강성하여 후금의 태종은 자신을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청(淸)이라 하였으며, 1636년(병자년) 4월에는 청 태종이 직접 1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였다. 청의 세력에 밀린 조선은 인조임금이 남한산성에 피신하였다가 결국 강화조약을 맺었다. 이때 맺은 조약에는 명나라 사람을 잡아드리고 도피시키면 용서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있었다고 한다.
1662년 명나라가 마침내 청나라에 멸망당하자, 명나라 출신 사람들과 명나라에서 조선에 귀화한 사람들은 쫓기는 신세가 되어 심산(深山) 유곡(幽谷)으로 피신해야했다. 영양 천씨 역시 명나라 출신 천만리의 후손으로 이런 화(禍)를 면할 수 없었다. 때문에 영양 천씨 일족(一族)들은 뿔뿔이 헤어져 피신했으며,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가야 했고, 그로인해 사적(事蹟)과 문헌(文獻)을 많이 잃어버렸다고 한다.
석대에 입향 한 영양 천씨는 천만리의 4세손 찬석(贊鉐)이다. 찬석의 자(字)는 영유(永儒)이며, 호는 석암(石庵)이다. 안악군수(安岳郡守)와 황주목사(黃州牧使)를 거쳐 경기도 광주부윤(廣州府尹)을 지내던 중, 명나라가 망하자 모든 관직을 버리고 동래부 석대동으로 피란(避亂) 이주(移住)하였다.
이가 바로 영양 천씨 선전공 석대동파의 시작이다. 이후 석대동에는 300여년이 넘게 영양 천씨가 집단으로 세거하게 된다. 찬석의 묘는 석대 마을 입구 언덕에 있다. 현재 석대는 부산시 해운대구 반송1동에 속한다.
3. 5代 6孝 내력
3-1. 1대 千聖泰의 孝行
천성태(千聖泰, 1725~1789)4)는 동면(東面) 석대리 3통 3호에 사는 교생(校生)이다. 그의 자(字)는 일보(一甫)이며, 초명은 상업(尙業)이다. 충장공 총독오군사(總督五軍師) 만리(萬里)의 8대손인 익휘(益輝)의 아들이다. 그가 행한 효행은 이렇다.
① 1746년(병인년, 22세) 봄에 그의 어머니가 갑자기 중병을 얻어 여러 날을 누워있었다. 성태는 곁을 떠나지 않으며, 변을 맛보고, 음식을 마련하며 약을 드릴 때에는 직접 먼저 맛을 보며 정성을 다했지만 어머니는 차도가 없었다.
어머니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숨이 끊어지게 되자 성태는 하늘을 향해 부르짖으며 대성통곡을 하고 칼을 가져다 오른쪽 손가락을 잘라 목구멍으로 피를 떨어뜨려 회생시켰다. 성태의 어머니는 이후 36년을 더 살았다.
② 가을에는 그의 아버지가 앓아누웠다. 성태는 봄에 어머니를 보살피던 것처럼 하였지만 역시 차도가 없었다. 아버지가 사경(死境)에 이르자 이번에는 왼쪽 손가락을 잘라 입에 피를 넣어 드려 회생시켰다. 그의 아버지는 이후 6년의 수명을 연장하였다.5)
천성태는 이 효행으로 당시 사또로부터 백미(白米) 여섯 말과 청어 여섯 두루미를 상으로 받았다.
③ 1746년 성태의 효성으로 회생한 아버지는 그 뒤 6년을 더 사시다가 1751년(신미년) 12월 갑자기 중병을 얻어 이틀 만에 운명했다. 천성태는 당시 전답의 곡식을 수확할 일로 울산 처가에 있었다.
그는 부음을 듣고 밤을 새워 돌아와 애통해하며 상례(喪禮)를 정성껏 치루고 곧바로 묘소 아래에서 손수 죽을 끓여 먹으며 시묘(侍墓)하였다. 3년 동안 그가 먹은 것이라곤 소금뿐이었으며, 단간장[甘醬]이 베인 반찬은 끝내 가까이하지 않았다.
천성태의 효성어린 시묘는 소문이 났고, 예리(禮吏)가 벼 한 섬과 황육(黃肉) 두 근과 대구 한 마리, 미역 한 단을 내렸다. 천성태의 효성은 이뿐만이 아니다. 1753년 <동면상단풍헌약정서목(東面上端風憲約正書目)>에 의하면, 성태는 여막에 거처한 뒤에도 살아계시는 조부를 위하여 배곡(拜哭)하는 틈틈이 짚신을 삼아 사람을 보내어 시장에 팔아서 조부의 반찬을 마련해 드렸으며, 굶주린 사람을 보면 때에 상관없이 밥을 나누어 주었고, 추위에 떠는 사람을 보면 옷을 벗어 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1760년에 올린 <본부사림송광적등상서성주(本府士林宋光迪等上書城主)>에는 새로운 성태의 효행에 관한 일화가 추가되어 있다. ① 성태가 시묘살이를 할 때, 암수 두 마리의 쥐가 그의 근처를 오가며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밥알을 던져주면 몸을 숙여 먹었으며, 때로 무릎에 올라앉고 손에도 앉았다는 것이다. ② 또 밤이면 호랑이가 와서 묘 뒤쪽 대여섯 발짝쯤에 지키고 있다가 새벽이면 돌아가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성태가 가여워 밤에 찾아가 같이 머물다가 호랑이를 보고 깜짝 놀라면 성태는 “저 호랑이는 밤마다 나를 보호해 주지 다른 일은 없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한다. ③ 1759년 12월 9일 밤에는 성태가 측간에 갔다가 돌아오는데 호랑이가 뒤에서 그를 낚아 채어가려 했다.
성태가 큰 소리로 다급하게 소리치자 그의 두 아들이 급히 뛰어나와 큰아들은 그의 허리를 부여잡고, 둘째아들은 그의 바지를 잡아 당겨 그 바지로 아버지 머리를 씌운다는 것이 잘못하여 호랑이의 머리를 씌우자, 호랑이는 크게 울부짖으며 성태를 놓고 몇 발짝 가다가 바지를 땅에 떨치고 가버렸다고 한다. 이 두 아들 역시 모두 효행이 있었는데, 큰아들 세모(世慕)는 아버지 성태를 이은 석대 천씨 가문의 2대째 효자다.
④ 1761년(신사년, 37세) 8월에 조부가 여든여덟의 노인으로 이질에 걸리어 설사를 자주하게 되어 증상이 위급해지자, 사람들은 회복할 희망이 없다고 했으나 성태는 밤낮으로 지켜 이십일이 되어도 옷도 벗지 않은 채 잠을 자며 여러 가지로 약을 써서 어렵게 간호하여 평소같이 걸어 출입하도록 완쾌시켰다. 그러나 11월 24일 다른 병으로 하루도 못되어 조부가 돌아가시자 통곡하며 빈소를 지키고 예를 다하였다.
⑤ 1781년(신축년, 60세)6)에 어머니 상을 당했는데, 초상의 예절과 여막에 머무는 법도가 아버지의 상 때와 똑같이 했다. 당시 성태의 나이 예순의 노인인데 소년의 나이 때와 같이 여막에 머무는 법도를 행했다.
천성태의 효행은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 행한 두 번의 단지(斷指), 3년 시묘 살이, 조부에 대한 간호와 정성, 그리고 예순 노인으로서의 시묘이다. 이런 성태의 효성과 효행은 온 고을에 회자되었으며, 이민(里民)과 사림(士林)들에 의해 여러 번 효자로 천거되었으나 국가의 공식적인 포상의 은전을 입지 못한 채 1789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성태의 효행은 특별히 가르칠 것도 없이 그대로 보기가 되어 자식들에게 전달된다.
3-2. 2대 千世慕의 孝行
천세모(千世慕, 1743~1810)는 천성태의 큰아들이다. 자는 국중(國仲)이며 초명은 문택(文澤)이다. 그는 부모께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로웠다. 성품은 단아해서 동네 아이들과 다투는 일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말을 함부로 입 밖에 내지 않았으며, 남들과 마주앉아 대화할 적에는 하루 종일 바보같이 듣기만 했다. 하지만 물고기나 과일 같은 작은 물건도 자신이 먹어버리는 일이 없고 반드시 집에 가지고 가서 부모께 드렸으며, 정성온청(定省溫淸)의 법도를 지켰다. 때문에 부친을 이은 효자로 이름이 났다.
① 1759년(기묘년, 17세) 12월 9일 밤에 부친 성태가 측간에 갔다가 돌아오는데 호랑이가 뒤에서 아버지를 낚아 채어가려 했다. 아버지가 큰 소리로 다급하게 소리치자 세모와 그의 동생 세룡(世龍)이 급히 뛰어나가 세모는 아버지의 허리를 부여잡고, 세룡은 아버지의 바지를 잡아 당겨 그 바지로 아버지 머리를 씌운다는 것이 잘못하여 호랑이의 머리를 씌우자, 호랑이는 크게 울부짖으며 아버지를 놓고 몇 발짝 가다가 바지를 땅에 떨치고 가버렸다. 그의 아버지와 두 아들 모두 다친 곳이 없었다.7)
② 1785년(을사년, 42세) 4월 초에 어머니 정씨가 돌림병으로 돌아가셨다. 당시 세모 또한 병에 걸린 지 5일째라 의식이 없는 상태여서 어머니께 단지(斷指)하지 못했다. 세모는 장사를 지내는 날에 곧바로 묘 곁에 여막을 짓고 몸소 불 때고 밥 지어서 조석으로 곡하며 제전을 올렸다. 아울러 상중에 짚신을 삼아 아버지를 섬겼다.
③ 또 1789년(기유연) 4월 19일 사시(巳時)에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밤낮으로 곡을 하여 뼈가 드러나도록 모습이 말랐지만 죽만 먹으며 지냈다. 그리고 장사를 지내는 날 손수 묘 곁에 여막을 지어 삼동의 추운 때이지만 비바람을 가리지 않고, 새벽엔 곡을 하고 저녁엔 슬피 울며 하루에 세 번 살피기를 한 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세모의 효행은 아버지를 이은 효행이라는 점과 그의 효행이 일시적 단발성이 아닌 천성에서 우러나왔다는 것이다. ①의 효행은 우연히 그럴 수 있지만, ②의 효행을 보면 ①의 효행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라는 것이다.
3-3. 3대 千述運의 孝行
천술운(千述運, 1767~1835)8)의 자는 성칙(成則)이며, 초명은 계손(繼孫)이다. 효자인 조부 성태와 역시 효자인 부친 세모에서 자신의 대에까지 늘 가난하여 학문을 하지 못했다. 술운은 힘을 다해 농사를 짓고 정성을 다해 고기잡고 나무하여 자식 된 도리를 다 하였다. 술운의 효행과 그에 대한 하늘의 감응은 이렇다.
① 1810년(경오년) 7월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장사를 치르고 집안의 법도를 따라 장례를 치르고 시묘하였다. 시묘 하던 1811년(신미년) 1월 23일 밤에 한 마리의 큰 범이 여막 옆에서 으르렁거리며 한참동안 가지 않았다. 술운이 “내 어른을 여의고 여묘한다. 효성이 천박하여 흉악스런 짐승이 침노하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 어서 나를 채어가거라”하고 큰 소리로 외치며 문을 밀고 나갔다. 그러자 범은 고개를 떨구고 조금 물러났으나 가지 않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사라졌다. 이후 범은 밤마다 나타나 무덤 아래서 울거나 여막 앞에 쭈그려 앉기도 했다.
② 그해 3월 3일 외아들이 돌림병에 감염되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술운의 노모가 “네 자식이 죽어간다. 네가 와서 살려야겠다”라고 여막에 알려왔다. 그러나 술운은 “아들의 병이 비록 무겁다한들 어찌 차마 부친의 무덤을 버리고 가겠습니까?”하고는 여막을 지켰다. 다행이 아들의 병은 호전되었다.
3일 뒤 술운은 동생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자 “동생은 나와 상제(喪祭)를 같이 하는 사람이다. 사정이 급박하니 가보지 않을 수 없구나 또 노모의 근심을 위로해야지”라고 하며 그날 밤 자정 무렵에 향을 피워 무덤에 알리고 한 되 쌀을 털어 몸소 죽을 쑤어 가서 동생의 병을 보고는 밤 내내 간호하고 새벽에 여막에 돌아왔다.
③ 여막이 있는 마을 뒷산기슭 산등에는 물이 없었다. 그러나 여막을 설치한 지 한달이 못되어 여막 곁의 돌 아래 다섯 걸음쯤 되는 곳에서 찬 샘물이 저절로 솟았다. 이 샘의 줄기는 마르지 않고 대한(大旱)에도 보존되었으며 아침저녁 길어도 졸졸 흘러 끊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를 ‘효자천(孝子泉)’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술운이 여막을 철수하고 집에 돌아온 지 10일도 못되어 샘은 말라버렸다.
④ 1815년(을해년) 3월 17일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술운은 아버지의 상례(喪禮) 때와 같이 하고, 무덤 아래 초막을 짓고 시묘하였다.
술운의 지극한 효심에 하늘이 감응하여 호랑이가 밤마다 지켰으며, 샘물이 솟아났던 것이다.
3-4. 4대 千相璉의 孝行
천상련(千相璉, 1795 ~ 1871추정)은 술운의 아들이다. 일갑(鎰甲)은 초명(初名)이며, 자는 보여(寶汝)다. 상련 역시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효심을 타고나 어려서부터 부모를 섬김에 정성을 다하였다.
4대째 내려오는 가난에 집에는 한 뙈기의 땅도 없었으므로 나무하고 고기 잡아 간신히 끼니를 이었으며, 품삯 일을 하며 조석의 끼니를 마련하여 돌아와 부모께 드리고, 자신은 그 나머지를 먹었다. 낮에는 품팔이 일을 하고 밤이면 짚신을 삼아 팔아서 추위와 더위에 알맞게 옷을 마련해 드렸다.
상련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음을 늘 애통해 하였고, 형제가 없어 아버지를 공양할 사람이 없으므로 어머니에 대한 시묘살이를 못했음 또한 가슴아파했다. 그러다가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추운 겨울에 옷이 몸을 가리지도 못하였지만 시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① 1835년(을미년) 1월 17일 아버지가 병이 들어 돌아가셨다. 상련은 장사를 지내고 반우(返虞)를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묘 앞에 엎드려 이틀 낮 밤을 연이어 곡하며 일어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매서운 바람과 추운 날씨에 그가 얼어 죽을까 걱정하여 흙과 사초를 모아 여막을 만들어 바람과 비를 막게 하였다.
3년 상을 치르는 것은 태어나 3년이 되어야 비로소 부모 품을 벗어나 걷기 시작함으로, 품안에 있던 3년에 대한 보본으로, 자식이 부모에 대한 최소한의 보담을 실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상련은 부모와 조부모의 효를 받아 3년 상을 치뤘다.
3-5. 5대 千禹炯의 孝行
상련의 아들 천우형(千禹炯, 1843~1886)은 자가 귀락(龜洛)이고, 초명(初名)은 공덕(恭德)이다. 역시 대대로 이어온 가난에 품팔이를 하며 부모님을 섬겼다. 혹 생선과 고기의 맛있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몰래 싸서 돌아와 부모님께 드렸다. 이웃마을에서 모두 “효자집 아이(孝子家童)”라고 불렀다.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셨는데 여묘하지 못해 항상 애통해 하더니,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처에게 말하기를, “내 죄가 막대하여 어머니의 묘에서 여묘 살지 못하였는데 아버지의 장례에 또 여묘하지 못하니 가정으로서는 남겨준 법을 이어가지 못하였고, 자식으로서는 효를 실행하지 못하였으니 이와 같고서 어찌 사람의 자식이라 할 수 있겠는가?”하고는 하관하고 엎드려 곡하는데 한 밤중까지 곡성이 끊어지지 않았다. 비가 계속 퍼붓자 마을사람들이 그를 위해 여막을 지어주었다.
무덤 옆에는 물을 마실 샘이 없었는데 여묘 산 지 몇 달 만에 샘이 그 곁에서 솟아났으며, 맛이 매우 달고 차가웠다. 이는 우형의 효성에 감동한 하늘을 응답이라 하겠다. 마을 사람들은 우형의 할아버지 술운이 여묘살이 할 때 솟아났던 ‘효자천’이 다시 솟은 것이라 칭송하였다.
3-6. 金海 金氏의 烈行
김해 김씨는 천우형의 처이다. 그녀는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부부가 함께 나무하고 품팔이 하여 조석을 도모하였다. 1862년 봄에 자식 하나를 얻자9) 친척과 마을 사람들이 효자 가문에 대를 이었다고 기뻐하며 축하하였다. 김씨는 어린애를 업고 행상을 하며 고용살이하는 남편을 도왔다.
1879년(기묘년) 4월 29일 밤에 읍에 사는 김한명이 천우형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양 무덤 위에 투장하였다. 마침 우형은 품팔이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우형의 처 김씨가 그 투장함을 듣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원수의 시체를 잠시라도 시아버지와 시할아버지의 묘 위에 둘 수 없다”하여 대낮에 몸을 던져 맨 손으로 묘를 파서 길 위에 관을 꺼내놓았다.
김씨는 젖먹이를 안고 젖을 먹이며10) 이웃사람들에게 울면서 말하기를 “이처럼 천지에 지극한 통분을 당해 어찌 잠시라도 어린 아이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어린애를 보살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미 스스로 묘를 팠으니 자수하여 달가이 옥에 갇혀 엄한 벌을 받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면 원망하는 말은 없었다.
그 일로 인하여 남편이 엄한 심문을 받자, 가슴을 치고 울며 “첩이 스스로 화를 만들어 죄가 남편에게 미쳤으니 만 번 죽어 마땅하다. 하물며 첩의 죄 때문에 재앙이 지극히 가난한 시가(媤家)에까지 미쳤는데 어찌 구하여 주기를 바라겠습니까?”라고 하며 젖먹이를 안고 구걸하며 남편을 공양하였다.
보는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고 듣는 사람들은 상심하며 이렇게 말했다. “심하도다, 김한명의 투장함이여! 애석하도다, 효부의 죄받음이여!” 남편은 다행히 효부를 가상히 여기는 고을원에 의해 풀려났다.
4. 맺음말
성리학이 조선후기 사상을 지배하고, 그 성리학의 기반인 이기(理氣)의 현실적 구현 중 하나는 삼강(三綱)과 오륜(五倫)의 실천이다. 조선조 많은 사람들이 충효열(忠孝烈)로 정려(旌閭)를 받았지만, 5대에 걸쳐 효자와 효부가 나기는 참으로 드문 일이다.
석대 천씨의 다섯 효자와 한 열부의 효열(孝烈)을 기리기 위해 1752년부터 1903년까지, 장장 150여년에 걸쳐 수만의 사림(士林)이 동원되어 백여 장의 서소(書訴)와 제청(提請)이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정려를 받지 못하다가 공부자 탄신 2470년인 1918년에 <공자부성적도 오륜행실중간소(孔子夫聖蹟圖 五倫行實重刊所)>에서「포창완의문(襃彰完議文)」을 내렸다.
석대 영양 천씨 문중은 1960년 3월에 완의문을 근거로 문중 산에 정려각을 건립하였다. 그 뒤 정려각은 석산공사 때문에 일시 철거되었다가, 1988년 한 독지가의 희사로 현재의 위치에 중건하였다.11)
이곳 정려각에서는 매년 5월5일 일가친척과 자제들이 모여 향사를 봉행한다. 그러나 이런 행사가 한 집안의, 한 마을의 행사가 아니라 온 나라의 행사가 되었으면 한다.12)
<참고자료>
『사암실기(思庵實記)』상․하.
『석대동 영양천씨 오효자일효부 포창완의문』
『석대천씨오대육효고문서(石臺千氏五代六孝古文書)』, 경성대 향토문화연구소 편, 도서출판 민족문화, 1995.
『영양천씨선전공 제3자 광주부윤 찬석계 가첩』, 영양천씨 부산시 석대동 종중회, 1984.
『영양천씨세록(潁陽千氏世錄)』1-4권, 영양천씨 부산 종친회, 1995.
『오효자일효부실기(五孝子一孝婦實記)』, 석대동 영양 천씨.
(부록)
- 천만리 장군 유적비 앞면 : 자성대
- 천만리 장군 유적비 뒷면 : 자성대
- 석대 영양 천씨 입향조 천찬석 묘소
- 석대 영양 천씨 입향조 천찬석 묘
- 석대 영양 천씨 5효자 1효부 정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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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천석대 효열가에 대한 잘 못된 논문이 있어 본인이 작성한 글을 별도로 게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