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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새 [‘{영혼의 의사}<회심의 5 단계 도형>에 대한 설명]
holyjoy | 조회 132 | 2011.12.27. 14:39
개혁파는 은혜를 몆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리처드 멀러 신학사전에 나오는 것을 제가 예전에 나름 정리한 것이 있는데, 지금 보니 오역도 있고 이해가 허술한 부분도 있습니다만, 참고가 될까 하여 올립니다.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이 은혜들을 회심의 5 가지 요소에 맞추어서 풀이를 했습니다. 이 게시판 맨 처음에 올라와 있는 그림(아래 그림)을 생각하시면서 읽으시면 도움이 어느 정도 되리라 믿습니다.
{영혼의 의사} 회심의 5 단계
1. 영적 수태: 초기 중생
2. 각성과 죄에 대한 확신: 동시 사건
3. 회개와 믿음: 동시 사건
4. 칭의와 (의식적인) 새 출생: 동시 사건
5. 확신
효과적 부르심에 대비되는 개념이 일반적 부르심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롬 10:17) 때문에 효과적 부르심이 있다면 3번에 <회개와 믿음> 전에 이미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 마음에 믿음이 주입된 습관(Infused habit)으로 이미 있는 것이다. 이 단계를 초기 중생이라 부르고 4번의 단계를 중생이라 부르는 것처럼 이 단계를 믿음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이 때 일어나는 은혜의 역사를 prevenient grace라고 한다. 물론 이는 반펠라기우스주의의 선행적 은총과 구별되는 개념이다. 말씀을 통하여 죄인들에게 베풀어지는 성령의 은혜를 <선행적 은혜>라 한다. 물론 이 은혜는 다시 <보통 은혜, common grace>와 <특별 은혜, special grace>로 나뉜다. 보통은혜는 구원과 관계없는 마 13장의 길가, 돌짝, 가시밭에 베풀어진 말씀의 은혜이며, 선인과 악인에게 고루 해와 비를 베푸시는 은혜이다. 이에 비해 특별은혜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능력으로서 은혜>를 가리키며, 효과적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은혜이다. 이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은 이미 초기 중생과 영적 수태, 그리고 믿음이 생겼다는 의미이다.
각성과 죄의 확신의 단계에 베풀어지는 은혜는 <preparing grace, Gratia praeparans>이다. 이는 성령께서 효과적 부르심을 입은 사람의 마음에 자신의 무능력과 복음의 약속을 받아들이려는 욕구를 주입해 주시는 은혜를 가리킨다. 이는 율법이 2 용도 즉, 몽학선생의 용도와 같이 죄를 깨닫고 그 죄의 각성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이 시기에 신자는 죄로부터 돌아서려는 애씀(endeavor of turning to God)이 나타난다. 죄에 대한 각성과 확신이 효과적 부르심을 입은 영혼을 압박하는 것이다. 복음의 약속으로 나아가도록 이런 과정이 생략된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율법의 본래적 기능은 <정죄의 기능>이다. 로마서 7장에서 중생자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고 함은 바로 이 정죄가 이제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 더 이상 효력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지, 율법의 기능이 멈춘 것은 아니다. 이 단계에서 일반적 부르심과 보통 은혜 가운데 있는 길가나 돌짝이나 가시밭은 기쁨으로 잠시잠깐 말씀을 받기는 했으되, 환난과 핍박, 재리, 일락, 염려로 결실치 못한다. 신자 안에 주입된 믿음은 우리로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결실토록 한다.
3번의 회개와 믿음의 시기에 은혜는 <operating grace, Gratia operans>로 협의적 회심 즉, 회개와 믿음에 실제적으로 역사하는 은혜이다. 그간 잠재태로 있던 믿음과 효과적 부르심이 현실태로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하며 신자가 자신이 회심한 자임을 성령의 회심케 하시는 효과적 은혜에 의해 각성케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성령에 의해 의지가 새로워지며 우리의 마음이 성령의 조명을 받으며 실제적으로 믿음이 주입된다(imparted).
카톨릭의 반펠라기우스주의는 펠라기우스적 요소를 모면하기 위해서 <의의 주입>의 결과 이 공로를 근거로 의를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교리를 말한 반면 종교개혁자들은 믿음을 <주입>한다고 설명함으로 공로는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 있고 내적 습관(habitus>인 믿음을 주입한다는 교리를 채택했다. 이는 조나단 에즈워즈가 말한 참된 신앙은 대체로 거룩한 감정(holy affection)안에 있다는 말의 참된 의미이기도 하다. 믿음은 반드시 거룩을 향한 성향으로 나타난다. 그 결과 참신자는 말씀을 힘입어 하나님을 향한 애씀(endeavor only toward God)이 나타난다.
4번의 칭의와 중생의 단계는 그림의 아래 설명된 대로 새로운 본성을 받는 일이 일어난다. 앞서 3번을 설명하면서 믿음의 주입을 설명했는데, 같은 설명이다. 다만 칭의와 중생은 그 종결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회개와 믿음은 그 과정을 말해주는 것이다. 효과적 부르심에서 시작된 믿음의 씨앗이 발아하여 그 실체의 최종적 상태가 칭의와 중생의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거룩한 기질은 이제 막 태어난 것이지 완성된 것은 아니다. 효과적 부르심에서 이 거룩한 기질의 씨앗이 수태되었다가 이제 막 태어났지만 앞으로도 여전히 자라가야 하는 과업을 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상태는 존 머레이가 말한 <결정적 성화, Definitive Sanctification>의 상태를 의미한다. 성도가 믿음으로 의에 이르게 되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성화를 거쳐 영화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통 개혁주의적 성화론의 핵심이기도 하다.
한국교회 성화론은 대체로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그래서 마치 성화가 2 단계 구조를 가지는 것처럼 묘사하지만 성도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연합하게 되면 그 사실만으로 이미 결정적 성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 다음에 오게 될 확신은 바로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성도가 갖는 내적이며 외적 성령 열매들로 갖는 확신이다. 성도가 칭의를 받는 것은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과 동의어이며 이것은 결정적성화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 단계에 베풀어지는 은혜를 <Gratia cooperans, cooperating grace>라고 한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시고 믿음을 주입하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내주하시게 된다. 그래서 <내주하시는 은혜>라고 부르기도 한다. 내주의 결과 신인협력으로 우리의 의지와 지성을 거룩하게 하는 이 일을 강화하신다. 이 단계를 직접적으로 성화라 부르고 신자가 확신을 갖게 되는 것도 이 내주하시는 은혜와 성령의 직접적인 내주의 결과로 알게 되는 것이다.
5번째의 확신까지가 전통적인 기독교회의 회심의 단계이다. 우리는 위의 그림의 3단계만을 회심으로 생각하지만 회심의 과정은 이처럼 하나의 긴 연속적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흔히 <연속적 중생론>이라 부른다. 현대 교회가 회심을 순간적 결단에 의해서 죄를 뉘우치고 그리스도의 구주되심에 대한 지적 동의만 보이기만 해도 그를 회심한 자로 본 것은 불과 100 년이 안된 일이다. 그 이전 1900 여년 간 교회가 회심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본 적이 없다.
아무튼 확신은 성령의 내주하심과 인치심의 결과로 성도가 갖는 것이다. 이렇게 중생한 상태를 아직 영적 어린아이임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야 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중생했음에도 여전히 우리 삶에는 죄의 지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혜의 지배아래 놓이도록 그리고 이 중생이 무효화되지 않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이를 <Gratia conservans, conserving grace>라 부른다. 즉 보존하시는 은혜라 한다. 이 은혜는 하나님의 구원이 취소될 수 없고 실패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불가항력적 은혜로 불린다. 그 결과 우리 안에 은혜의 기질이 점차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란다.
한국교회는 많은 경우 가시밭이나 돌짝밭의 상황에 있는 일반적 부르심의 상태에 있는 구도자들을 향해 마음에 확신을 주고 그들의 구원이 취소될 수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의 원리를 따르면 이와 같은 회심의 과정과 체험이 없는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 아니다. 거듭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취소는 사실 무의미한 주장에 불과하다. 혹은 아직 그 부르심을 분별하기 어려운 중생 전의 구도자의 상태에 있는 구도자들에게 과도한 확신을 심어줌으로 이들이 중생의 과정 속에 가져야 할 죄로부터 돌이킴과 하나님을 향하는 애씀을 무력화시킨다. 이는 주님의 바리새인들을 향한 책망처럼 한 영혼을 얻어 배나 지옥의 자식이 되게 하는 악행이라는 점이다. 물론 위와 같은 회심의 과정을 경험한 신자의 구원은 결코 취소될 수 없다. 그것은 지극히 이단적인 주장이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정말 구원의 반열 위에 서 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쉬운 복음과 신앙이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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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쓴 글인데, 최근에 연속 중생론을 생각하면서, 믿음의 주입의 시기가 믿음의 때가 아니라 유효적 부르심의 때라는 생각이 여러 글들을 보면서 듭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서 읽어주시면 될 거 같습니다.
댓글 4
holyjoy 11.12.27. 14:39
댓글로 두기에는 아까워서 정리해서 올려둡니다. 바보새 님, 감사드립니다. ^^
┗ 정야베스 11.12.27. 14:49
저도 준회원 게시판에 게재하였습니다!!~
요즘 생각케 되는 것은,.회심 모델을 전제로 한,.전도용 팜플렛을 만드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진심으로 자신의 구원을 가늠할 수 없는 신자들이 많을 겁니다..지난날 ,이러한 <구원의 서정>을 들어볼만한 교회가 없어,.많이 번민하고 방황하였지요!! 교회가 제시하여 할 방향을, 늦게나마 이곳에서 배우니,.참으로 마음이 더욱 평안 합니다..
찬송 11.12.27. 14:54
《 율법의 본래적 기능은 <정죄의 기능>이다. 로마서 7장에서 중생자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고 함은 바로 이 정죄가 이제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 더 이상 효력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지, 율법의 기능이 멈춘 것은 아니다.》 ← 이 구절도 참으로 유익한 공부입니다.
수고하시는 모든 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