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마지막 70년대를 보내고 80년의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젠 입대한지도 어언 1년이 가까와 오고 있었는데,
GOP때 부터 FEBA에 가서 종합훈련끝나면 바로 휴가간다고 손 꼽아 기다렸는데
10.26과 12.12를 거치면서 휴가는 기약없이 연기되었을 뿐이고
업친데 덮친격으로 교육계라는 이상한 보직을 맡다 보니 또 연기되었다.
3소대에서 1소로 갔던 동기 이ㅎ돈이는 휴가 떠난다고 약을 올리는데
교육계되고 처음 맞는 행사가 전술공사라 "끝나고 휴가가라!"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당근은 중대장께서 너는 어떤일이 있어도
정기휴가를 4번보내준다고 큰소리치면서 휴가를 보내주지 않았다.흑~흑~
[사진1] 중대막사(1소대와 2소대사이)뒤에서
왼쪽부터 나, 나주産 병기계 김ㄱ현일병, 2소대 양평産 박ㅇ식이병, 2소대 모병장, 1소대장 대구産 모중위
지금까지 중대막사앞 중대연병장과 9중대로 착각했는데 기억의 착오였네요.ㅎㅎ
다시 수정하면 굴둑대가 1소대 빼치카이고, 왼쪽에 대대상황실이 보이고 뒤쪽에 대대장벽고와 고량포 사미천에서 채취해 만든 갈대 울타리가 보인다.
1소대장은 같은 대구출신으로 대대에서 "통대구 클럽"으로 통했고,
친하게 지냈는데 80년에 예편하셨는데 나를 무척 아껴 주셨던 분이다.단~결~^^
다만,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미안할 뿐이다.
너무 긴~시간이고 세파에 찌들려 기억을 도둑 맞았다.ㅎㅎ
중대본부에서의 바로 위 고참인 나주産 병기계 김ㄱ현일병은 나보다 한살 작은
조선대 기계과에 다니다 입대한 친구로 4개월 고참이지만
난 농으로 "밑관물^^", "따블빽^^"으로 불렸고 앞으로 사진에서 많이 등장한다.
그 김ㄱ현일병은 작은 체구로 얼굴이 앳된 앞짱구, 살색이 뽀얀, 작은키, 잘룩(^^)한 허리....
남자가 보기에도 성적충동을 느낄 만한 그런 사람이 였다.
우리 중대는 늘~앞장서는 중대장님 덕분에
우리 중대에 부여된 작전인 "전술공사"에 모든 중대원들은
작업도구 준비와 교육훈련에 정신이 없었고,
나 또한 교육계를 맡고 처음 맞이 하는 작전준비에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칠흑같은 어둠에 전술공사지역으로 이동했다.
틸교를 지나 고량포 우리 사단지역으로 기억되는
서부전선 어느 2ㅡ3부 능선에서 80년의 봄을 2-3개월 만킥하는 노가다생활이 시작되고 있었다.
물론 원시적인 자연만 있는 곳이라 아침마다 대하는 중대원 외는
다른 사람이라고는 없는 외롭고 단조로운 2-3개월이 지속되었다.
그 많은 병력이 2-3개월 일을 하는데 준비없이 떠날 수는 없다.
장현리를 떠나기 전에 공사판에서나 구경해본 질통, 당까, 나무막대기, 나무망치,
물지게,물통... 뭐 이런 것들을 중대원들이 일일이 제작했다.
그때 군이란 데가 사회의 축소판임을 보았다.
그런 준비 하나 하나가 명령 하나에 사급되는 원자재(?)없이
감악산 북쪽자락과 임진강가에서 채취후 신속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는게 신기했다.
전투중심의 중대가 노가다중심의 공사판으로 조직을 재편했다.
소대장, 선임하사, 분대장들과 같이
공병삽조, 곡괭이조, 자갈(질통)조, 모래(질통)조, 시멘트(운반)조, 물지게조,
오삽(배합)조, 막대기조, 망치조, 물조, 양생조, 땟장조....
주로 왕고참은 막대기조, 양생조,...덩치 좋은 고참은 오삽조, 물지게조,...
허약한 쫄병은 망치조, 양생조, 몰탈조...
뭐 이렇게 나름의 합리적인 방법으로 중대를 작업중심으로 조직을 편성했다.
그리고, 소대장 딱까리는 주로 먹는 물을 입까지 공급하는 담당이 였다.
공사판의 하루 노가다는 목이 얼마나 말랐던지
사단에서 지원된 급수차는 샘물을 실고와서 공급해 주었다.^^
교육계는 준비없이 작전을 수행할 수 없다.
목표(언제부터 언제까지 방카 몇개를 만든다면)가 주어지면
중대장님의 지시하에 병력수에 비례하여 각 소대에 분배하고
텃파기, 구축, 양생, 훍덮기...일정계획을 수립하고...
물론, 계획대비 실적을 항상 체크할 수 있는 야전상황판을 제작하고 지참했다.^^
[사진2] 고생하는 병력을 특식으로 위문하는 연대 간부님 부인들
3분 중 어느분이 김ㅊ희연대장(갑종, 경북대출신) 부인이고...오른쪽 반쪽이 나의 반쪽이다.
뒤쪽에는 식사집합하는 중대병력 뒤로 비닐하우스 막사와 붉게 물든 진달래가 보인다.
이 지역은 사진에서 보듯이 진달래가 매우 넓게 분포되어 있어 일반에 개방되면 명소가 될 것이다.
이 사진은 25사단역사에 기록되어 있을런지 궁금하다.
그때 연대장 부인이 식사후에 사병들이 짭밥통에 식기을 탁~탁~치는 걸 보고
중대장에게 "식기를 저렇게 사용하니까 식기의 수명이 짧다"면서 질타를 했었다.
요즘은 식기가 스텐레스 재질이지만 그때는 프라스틱으로
쫄병들은 늘 귀퉁이가 부서지고 없는 식기를 사용해야 했다.ㅋㅋ
연대장이 가고 난 뒤에 중대장이 벌겋게 얼굴이 달아 올라 핏대를 세우면서
"에이~ 18년~ 좆그치 말이야~"
"지가뭔데 지랄이여~"라며
화풀이를 해대던 기억이 지금도 새록 새록하다.
사진속에서는 증언하지 못하지만 그 연대장 부인은 장교용 항공잠바를 입고
지휘봉을 들고 다니면서 부대를 지휘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80년 가을에 휴가 귀대하니 연대장이 바뀌어 있었다.
전역하는 연대본부의 병사가 연대장 부인의 참견에 대하여
소원수리를 쓰는 바람에 연대장이 바뀌었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사진을 보면 상단 비닐하우스 뒤로 진달래가 만개한 때다.
그 당시 친구들에게 전선의 소식을 전하면서 남쪽에는 한달전에 있었던 소식을
전했던 아주~ 또렷한 기억이 남아 있다.
소월님의 진달래꽃을 떠올리면서
"친구야!
일전에 비슬산에서 솟아 올랐던 붉은 참꽃의 도화선이
서부전선의 임진강가 여기 이름 모를 언덕까지 태웠다.
이제 머지않아 타오를 영변의 약산 아람드리 진달래꽃이
눈에 보인다..."
라는 때 늦은 봄소식을 남으로 알렸던
80년의 봄이 35년의 세월 속에서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사미천에서 장현리 그리고 수색중대-[9]80년의 봄앓이"편으로
80년 이른 봄 서부전선 고량포 어느 계곡과 능선에서 3개월 가량 진지구축전술공사라는 이름의
작전으로 고달픈 노가다 생활을 추억해 본다.
첫댓글 아! 언제 통일이 되어 내가 만든 방카를 가볼까나... 질통을 메고 산을 오르내리던 기억이 아삼삼 합니다.^^
첫번째 사진의 정체불명의 고참이 2소대 윤철*병장입니다. 박영*이도 2소대, 김국*이도 2소대 출신...
선뱃님 첫번째 사진에 대한 기억의 착오를 정정합니다.
사진은 "중대막사(1소대와 2소대사이)뒤쪽"입니다.
여태껏 "중대막사앞 중대연병장"으로 그리고 뒤쪽 막사는 9중대막사로 생각했는데 기억의 착오였네요.ㅎㅎ
다시 수정하면 굴둑대가 1소대 빼치카고, 왼쪽에 대대상황실이 보이고 뒤쪽에 대대장벽고와 고량포 사미천에서 채취해 만든 갈대 울타리가 보입니다.
우리가 낳은 서른다섯살짜리 벙커는 지금쯤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의 일부분으로 자림김하고 있을 겁니다.
저 사진을 들고 그곳을 찾는 다면 아마 벙커 왜에는 어떤 흔적도 없을 겁니다.ㅎ
아~ 옆모습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는데 윤병장이 였군요.ㅎㅎ
인제사, 왜 1소대장과 2소대 병력들이 중대본부 야외촬영에 카메오 출연을 했는지 이해가 됩니다.
바로 2소대 막사뒤에서 사진을 찍어 대고 있었으니 당연히 처다 보다가 출연을 하게 된거네요.ㅋㅋ
@뚜루기 네~ 맞습니다. 장벽고가 보이고,부대 뒷산이 보이는 걸로 보아서 굴뚝은 1소대 베치카 굴뚝 입니다.ㅋ
콘크리트로 만든 벙커도 흐르는 세월을 감당할 수 없나봅니다. 전에 율포리에 있는 대공초소에서 파견근무할 때
가 생각나서 그 시절을 떠올리며 대공초소 옆에 있던 벙커에 올라가 봤더니 우거진 숲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더군요. 당시는 민둥산에 벙커만 있었는데... 세월이 무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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