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독동포사회 45년을 돌아본다(29) -재독 한인사회 출판 움직임과 그 성과(1)
광부로나 또는 간호사로 독일에 취업했던 한인들은 처음에는 낯선 문화와 언어가 다른 장벽에 묻혀서, 남다른 외로움을 감수해야 했었고, 또 고국은 너무 멀고 당시 청취할 수 있었던 국내 소식은 겨우 KBS 라디오 단파 방송을 밤 11 시경에나 단 한번 청취할 수 있었던 실정 이였다. 이런 환경 때문에 자연스럽게 한글로 된 소책자를 만들어, 그 정보를 서로 보급하려던 움직임이 차츰 일어난 것은 당연한 귀결 이였다.
그
러나 외국이란 특수한 환경 아래서 이와 같은 움직임을 완전하게 흡수 할 수 있었던 재정문제 해결의 어려움과 또한 한 가지 겹쳐서
우리나라 문자의 그 특수성 때문에 꼭 필요했던 한글 타자기나 인쇄 시설 미비라는 열악한 환경때문에 한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초창기 몇 십년 동안에는 서로 엄두를 내지 못한 형편 이였거나, 그 결과 역시도 아주 미미했던 실적과 출판 사정 이였다.
그
런데 이 시절의 한인 구성 요원과 출신 분야를 좀더 구체적으로 크게 세분해 본다면 독일 한인 사회를 구성했던 한국인으로는 첫째는
광산과 병원 간호사들 이였던 독일 취업자들과 그 둘째는 독일 각 대학에 취학했던 한국인 유학생들로 크게 대별되었는데, 그 후
상당한 세월이 다시 흐른 뒤인 1980 년대 이 후부터 점차 한국 기업들이 독일 안에서 지사 활동을 시작하면서, 이 무렵에 진출하기 시작한 업체 직원들과 그들의 가족 구성 요원들로 또다시 크게 세분할 수 있겠다.
그런데 한국인들이 처음으로 진출하였던 1963 년 12 월 초창기의 광부 1, 2
차 진들이 소규모나마 교회 주보나, 회지를 발행하였던 희귀한 옛 자료들은 대부분이 영구 보존되지 못한 체 그냥 유실되어 버려서,
그 중에서 일부 확인된 당시의 자료들과 개인 증인들의 기술을 토대로 여기에다 재정리하면서, 또 다시 1977 년 3 월 이 후에 뒤늦게 야 제 2 차진 광부로 새로 진출을 하였던 이들의 기록들을 중심으로 추가 보충한다.
가) 광부 1 차진의 초창기 시절(1963-1978년)
◆ 기독교 교인 연합회의 첫 간행물「금주의 말씀」
우
리 성도들은 경,애사에 대한 예의를 표할 줄 알았다. 동료 중에 작업장 사고, 교통사고, 또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린 그같은
장례식들이 우리를 슬프게 했다. 또한 고국에서 전해오는 장마피해의 소식, 고국 교역자들을 수감하는 소식들은 한인근로자들이나
성도들의 마음을 슬프게 했다. 그런 수해자를 위한 구호금(Bochum교회가 앞장섬)과 재야 수감교역자 가족들을 위한 모금(2.073,85) 운동으로 구호금을 보내는 성의를 보였다.
그 중에서 우리들에게 당시의 유일한 기쁨은 한글로 작성된 「금주의 말씀」이란 인쇄된 우리 글을 보는 것이었다.
처음에 100 부로 시작하였던 것이 좋은 반응을 얻으며 1 년이 채 못 되어 1 천여부를 송부하였다. 당시에는 원고도 궁색하고 편집인도 없는 체, 정상 근무를 하면서 틈틈이 내용을 정선하여 두 손가락으로 일일이 타자하여 16
절지 양면을 채우려니 많은 시간이 소요했다. 발송을 하는 사역도 천부가 넘으니 주소는 프린트한다, 하여도 봉투에 부치는 일,
우표와 발신인 스탬프를 찍고 내용물을 넣고 봉하는 일만에도 그 때 세 살 된 셋째 아이까지 동원되었다.
총
회의 사역으로 분기 별로 교우지가 발간되어 배포하였고, 그리고 녹음 카세트에 설교 말씀을 담아서 지역 거리상 예배를 드릴 수 없는
분들에게 순회 적으로 돌려 가며 듣게 하였다. 이 무렵 해외 개발공사 사장이 내독하였는데, 그는 우리 글로 구독할 문서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모두 2 차례에 많은 수량의 신앙계와 성경, 찬송가를 보내 주어서 이를 보급하기도 했다.
총회에서는 총회산하의 성도들 외에도 「금주의 말씀」 이란 16 절지 한 장 짜리 주간 설교말씀과 총회와 지역교회 광고, 공고, 감사 헌금 내용들을 실었는데 깨알같이 작게 축소하였어도 우리말로 쓰여진 서간이 귀한 때라 눈을 비벼가면서 읽고 기뻐하였다는 편지들이 많았다.(1973 년7 월 10 일 초간) 당시에는 이 사역은 75 년 내가 총회 일을 그만둔 후에도 유충준, 엄인열 총회장의 팀에 의하여 계속되었다. 1979 년3 월 25 일자로 발행된 242 호가 내가 입수한 마지막 호 이었다.
언제 발행이 중단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금주의 말씀」의 독자들의 지역도 독일을 벗어난 스위스, 오지리에서까지 받기를 원했다. 아무런 외부의 도움 없이 독자들이 헌금과 우표를 보내줌으로 운영되었다. 멀리 Schweinfurt 에서 간호원으로 근무하시던 김상례 자매가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내왔는데 짧은 내용으로도 「금주의 말씀」배포의 그 효력을 짐작할 수 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16,9)
매주 보내 주시는 금주의 말씀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듯 영적으로 메마른 저에게 매주 말씀을 주심으로
믿음의 중추를 더욱 굳건히 쌓아가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기쁜 마음으로 감사헌금을 동봉합니다. 주님의 사업에 수고하시는 주님의
귀한 종들에게 주님의 평강이 함께 하실 것을 기도합니다”.
◆ 카톨릭 교회 ‘등불’지(誌)발간
교우들이 이국생활에 점차로 익숙해지면서 한국인들과 교류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당시 멀리 떨어져 사는데다가 교통수단이나 통신방법이 용이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교우들과의 소식을 나눌수 있는 잡지를 발간하기로 하고 1966 년 6 월에 ‘가톨릭노동청년회’가 지도신부 원필호의 지도 아래 당시 ‘등불’이라는 이름의 월간지 제 1 호를 발간하였다.
등불지는 재정과 편집의 어려움으로 수차에 걸쳐 결간되기도 하면서 1973 년 7 월 33 호까지 당시 서독의 방방곡곡을 비추었다. (1969 년에 나온 24 호 표지모습)
◆ 베를린 기독교 한인교회 회보 ‘갈릴리’
‘갈릴리’지는 1972 년 2 월 1 일 정하은 목사님께서 베를린 한인교회 취임하면서부터 본 교회는 ‘회보’를 발간하여 교회 소식 및 행사를 교인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거기에다 1973 년 12 월 20 일자로 창간호인 ‘교회와 사회’지가 발간되었다. 하나님의 말씀 즉 생동하는 진리를 깨닫고 배울 수 있도록 밝혀주며, 한국문화원(원장 정하은 목사)의 동향과 베를린의 현황을 알려주기 위한 목적이었다.
‘회보’는 1976 년부터 발간이 중단되고, ‘교회와 사회’지가 일년에 한번 내지
두 번씩 발간되어 21 호를 마지막으로 1991 년에 발간되었다. 그러다 1987 년 3월 첫째 주를 기해 ‘회보’를 다시 발간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일년에 한두 번 나오는 ‘교회와 사회’지로서는 교인들에게 신속한 정보를 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2 개월에 한번씩 발간하여 교인들에게 교회소식과 행사계획, 국내외소식, 신앙수기와 생활수필, 기도문, 시, 논문 등을 실었다. 또한 제직회에서는 ‘회보’에 명칭이 있어야 되겠다고 동의하여 교회에서 명칭을 공모했다. 명칭공모에는 1) 창문 2) 갈릴리 3) 방주로 세 가지 추천이 나왔고, 이 중에 제 2 번을 선택 결정하므로 그 후 제 3 호 회보부터는 회보 ‘갈릴리’로 명했다. 본 교회 기획위원회에서 일년에 한두 번씩만 발간하게 되었고, 이번 부활절 기념 49 호에는 ‘이집트-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특집으로 발간되었다.
◆ 함부르크 교회 교우지 「교우」와 「목회 통신」
그 외에는 북부지역 함부르크 한인교회(당시 담임목사 박 명철)에서 약 1975 년경부터 한글 타자기로 찍은 4 쪽 짜리(DIN A4) 월간 교우지 『교우』를 발행하였
던 희귀한 실정 이였고, 그밖에는 후일 박 목사가 타블로이드판 목회 통신을 발행했다. 또한 독일 중부 뒤셀도르프지역에서 독일
카톨릭 사회 봉사 원으로 근무하던 피 호균 집사에 의해서 한글판「흐름지」가 정기 발행되어서, 이와같은 움직임은 그나마 독일
땅에서도 그 어려운 언론의 여린 싹을 틔운 초창기의 한 예로 볼 수가 있겠다.
독일 중부지역 노오드라인- 베스트팔렌 기독교 한인연합회(회장 방 우찬)과 전임 유 충준 회장, 또 기독교 사회 봉사회 이 삼열 박사들이 활동했던 이 지방에서 한글 타자기를 이용한 월간 한글판 소책자『교우소식(Die Zeitschrift der koreanischen evangelischen Gemeinden in Nordrein-Westfalen)』을 처음으로 발행해왔고, 또한 복흠교회(담임목사 장 성환)에서도 소책자 월간『청년한국(1978. 3 월)』을 발행했었다.
◆ 흐름지
특히 두이스부르그 한인교회(장성환목사) 기독교 사회 봉사회(담당 이삼열 박사)가 관할 외국인 문제 전담기구(EKD-AußenamtːHr. P?sident Dr. Wischmann) 종교청 앞으로 1973 년 10 월달에 정기 보고했던 자
료에 따르면 초창기 한국인 노동자들이 독일 생활에 적응하는데 여러 가지의 어려움으로서 첫째는 언어 소통의 불편과 함께 독일 생활에
절대적으로 모자란 한글 홍보 자료(한글 신문, 또는 잡지)의 미비로 인해서 야기한 불행한 사건들을 지적, 몇가지를 그 사례별로
열거했다.
그중의 한 예로는 김(Kim)
모(某) 양은 라인 란드지방에서 병원 간호사로 재직하는 동안 운전 면허를 취득하였다. 그러나 어느 날 그녀는 자가 운전을 하다가
고속도로에서 상대방 벤츠 승용차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큰 교통 사고를 일으킨 후, 그대로 행방 불명이 되었다가 약 18 일 후에 자살 시체로 발견된 어처구니없는 사건다. 그런데 이 사건은 그녀가 남긴 유서로서 「독일 자동차 사고 보험 시스템」을 그때까지 전혀 알지 못하였거나, 아니면 독일 사회 생활에 대한 일반 정보(den Schadensersatz und die geistige Belastung wegen Unfall nicht ertragen glaubte.)가 너무 부족해서 스스로 일으킨 「불행한 한 사례」로 지적하고 있다.
그만큼 당시 한국인들에게는 어떤 형태로든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한글 정보 매체」가 너무나 절실 했던 사실들을 그대로 반증해 주고 있는 안타까운 사건이다.
아래 독일 타자기로 작성한 원문(사진)은 당시에 보고했던 문서(EKD Diakonische Werke/ 31. 10. 1973) 자료의 일부를 그대로 다시 옮긴 내용이다.
B. Einige traurige Beispiele
Um die Darstellung der oben geschilderten Problematik zu ergaenzen, koennten meiner Meinung nach folgende, konkret Beispiele zur lebhaften Auffassung von den Schwiringkeiten dienen.
1.Fraeulein K war seit einen Jahr im Rheinland als Krankenschwester taetig. Sie hat den Fuehrerschein gemacht und ein Auto gekauft. Eines Tages- hat sie auf einer Autobahn in der Naehe von Koeln aus `Ihre Schuld einen Zusammenstoß mit einem andren Wagen -Benz` aus diesem Unfall ergab sich, daß beide Wagen schwer beschaedigt wurden und die Leute von dem anderem Wagen auch schwer verletzt wurden. Seit diesem Tage ist Fraeulein K verschwunden, ohne irgend jemand, selbst ihrem Freund dies zu melden. 18 Tage nach diesem Unfall wurden an einem See ihr Paß und ein Brief entdeckt. Indem Brief ist geschrieben, daß sie Selbstmord begangen hat, da dieser Unfall sie zu sehr schockiert hat und sie den Schadensersatz und die geistige Belastung wegen Unfall nicht ertragen glaubte.
Dieser Fall zeigt, daß sie von dem Unfall Versicherungs- System nicht genug informiert war und die Lebensverhaeltnisse nicht kannte.
「재독한인 교회의 발자취」에 수록된 두이스부르그 교회 사회봉사회(Diakonische Werk)가 독일 교회청에다 보고한 독일에서 한국인들이 직접 겪고 있는 어렵고 불행한 사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