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던 동네는 참으로 촌(村)동네였다. 그렇다고 공산당이 싫다고 외치던 이승복 어린이가 노루나 사슴과 놀던 하늘 아래 첫 마을 평창 봉화나 절해고도의 외롭고 적적한 섬 이어도의 어촌(漁村) 만큼 후미진 곳은 아니다. 춘천에서 산이 높은 동쪽의 북한강을 따라 20리 쯤 더 들어가면 만날 수 있는 잘 난것 없이 평화롭고 정이 넘치던 엄숙한 유교(儒敎)풍의 꽃피는 산골 동리가 내고향 양지마을(諒至)이다. 호롱불이나 석유를 태워 불을 밝히는 호야불(남포라고도 부르는)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숙제도 하고 책도 읽고 어머님은 바느질도 하시고 아버님 종친회 가실 때에는 축문이나 예식문도 그 어둑어둑한 불빛 아래에서 써 드리곤 했다. 명절이나 경조사때는 호사스럽게 남포불(아마 램프등을 그렇게 발음한 듯)을 방마다 특별히 매달아 놓았지만 서울서 온 조카들이나 친척들은 답답하다며 밤길을 우수꽝스럽고 보기 사납게 어기적 어기적거리며 돌아 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경천동지 할 일이 생겼는데 바로 전기불이 들어 온 것이다. 1970년도의 일이다. 콘크리트 전봇대가 장승처럼 길을 따라 세워지고 굵은 전선이 수레바퀴 모양의 엄청난 크기의 나무 물레에서 풀어 올려져 5천년 동안 한번도 방해 받지 않고 세상을 내려다 보던 시원하게 열린 하늘을 거미줄 처럼 얽어 매놓았다. 관청의 높으신 분들이 참석하는 공식적인 점등식은 아직도 며칠이나 남았는데 한전 직원들을 따라 다니며 곁눈질로 기술을 배우며 허드렛일을 돕던 봉화형이 변압기 스위치를 몰래 올리고 불을 밝혔던 것이다. 천덕 꾸러기 취급을 받던 아들이 만든 모처럼의 쾌거에 의기 양양한 봉화형 어머니가 일찌감치 마을 사람들에게 서둘러 입소문을 내서 다들 알고는 있었다. 전기불을 난생 처음 봤는데 세상이 그렇게 환히 보인다는게 신기해서 줄곧 땅에다 나무 막대기로 글씨도 쓰고 그림도 쉬지 않고 그려 댔다. 그때의 감격을 잊지 못한다. 큰누이가 월급날 사다 준 맘모스 빵맛이 그때까지 내가 입을 댄 도시문화의 전부였다. 시내(市內)는 한번도 못 가보고 짜장면 생긴모양도 모르는 때국물 흐르고 촌티나는 눈빛만 똘똘한 초등학교 4학년 시골소년 이었기에 말이다. 귀(貴)하고 중(重)한 것은 없다가 있어 본 사람과 원래 있던 사람은 처신과 반응이 다르다. 감격과 감사의 반응에 있어 퍽 차이가 난다. 처음 받은 마징가 젯트 장난감을 밤새 껴안고 자는 아이에겐 세상 어떤것도 대체물이 될 수 없는 보물인것 처럼 사람들은 전기불에 눈길을 빼앗기고 어쩔줄 몰라 했다. 칠흑같은 밤도 대명천지가 됐다. 기껏해야 보름달이 비추는 겨울밤 눈덮인 풍경이나 유독 달빛에 환하게 웃는 배꽃이(梨花) 뿌려놓은 한층 밝아진 달빛을 좋아라 했던 시골 인심(人心) 위에 홀연히 들이 닥친 전기불은 도깨비 방망이나 다름 아니었다. 잠을 잊은 온동네 사람들은 괜시리 바쁘게 뛰어 다니고 손뼉을 치며 좋아라 했다.
집집마다 깊숙히 숨겨놓은 술이며 안주에다가 송아가루 묻힌 엿이나 조청을 듬뿍 묻힌 고구마. 잔치나 명절때나 맛보는 산자.약과 같은 귀한 음식을 마을 회관 마당에 아낌없이 진설하고 마흔 다섯 가구 300여 주민이 광복절날에나 있을 법한 만세삼창을 외치며 기뻐했다. 어려서 부터 도드라지게 뭐하나 잘 하는것 없어 관심밖에서 서성이던 봉화형이 혜성같이 나타나 그날 이후 점등식이 있는 날까지 밤마다 영웅이 되어 마을의 중심에 우뚝섰다. 전공(電工)용 가죽 허리 띠를 떡하니 빗겨 매고 도둑 고양이 처럼 전봇대를 타고 올라 변압기 스위치를 제것인양 척하고 올렸다 . 위험천만한 불법(不法)이었지만 면사무소 총무계장으로 있는 원구형도 경찰지서장이던 경화 아재도 나무라기는 커녕 은근슬쩍 밤마다 동네 잔치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잔치를 같이 즐겼다. 돌아보면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헛헛하기도 하지만 다시 못 올 촌놈만이 간직할 수 있는 잔잔한 격정의 추억이기에 소중하게 생각하기로 한다. 과수원을 크게 하시던 정면장님은 오토바이 끝에 막걸리 말술을 비끄러 매고 다니시며 이동네 저동네 흐믓한 인정(人情)을 돌리고 다니셨다. 그렇게 전기세도 내지 않고 온동네가 전기불에 콩궈먹듯 요란을 떨며 떡도 해먹고 두부도 함께 만들어 먹은지 수일 후 점등식이 면사무소 앞 마당에서 2군단 군악대의 특별 연주와 더불어 거창하게 열렸다. 두루마기에 갓을 쓴 어르신들이 앞줄에 서고 인산인해를 이룬 남녀노소가 엉켜서서 숨죽여 지켜보는 가운데 도지사님과 군수가 연달아 국가시책과 전기(電氣)의 위대함을 잔뜩 힘주어 연설하고 나서 축하 잔치가 질펀하게 벌어 졌다. 멀쩡하고 금쪽같은 문전옥답(門前玉畓) 한가운데에 떡하니 박힌 수십개의 전봇대를 타박하지 않고 크게 양보한 땅부자 원구씨네와 병풍 처럼 어깨를 붙이고 늘어선 야산(野山) 자락을 연달아 가로지른 전기공사에 통크게 전신주 선로(線路)를 희사한 여주이씨네 종친 문중이 감사패를 받았다.
먹을게 그리 흔하지 않은 시절이었지만 그날 시골 잔치는 떡 벌어진 상차림 만큼 크고 후하고 알찼다. 단군이래 최대 이변의 이벤트 이기도 했고 전기불은 문명인으로 거듭 나는 촌사람들에겐 혼을 쑥 빼 놓을 만큼 기쁜 신분상승의 기분이 드는 고마운 일이 였기에 흥분된 잔치가 밤을 잊고 새벽을 맞아서야 끝을 봤다. 도청과 군청은 물론 면사무소까지 나서서 줄줄이 하사(下賜)한 무진장한 술과 떡에 주민들이 아낌없이 때려잡아 쌓아놓은 돼지고기 편육이 10살배기 내 어린 눈에는 산더미 같았다. 내 친구 광호네 아버지가 꾸리던 조약국집 텃밭 400평을 천막으로 덮고 마련된 축하연(宴)에는 하늘로 머리를 둔 사람은 사람은 누구나 할 것없이 술과 고기에 배불러 취했고 펄펄끓는 가마솥에서 막 퍼담은 돼지국밥은 길게 나래비를 선 어린아이들의 군침을 달래 주었다. 가끔 리드컴이나 스트라스 필드를 가서 돼지국밥을 시켜 먹을라 치면 그때 그시절 추억이 말끔한 컬러 영상처럼 기억된다. 왁자지껄 시끌벅적이는 잔치에는 빠짐없이 영웅담도 넘치고 자화자찬도 섞여 오가는게 일반인데 다름 아닌 전기가 들어 오기까지의 공(功)을 자랑하는 목소리가 취기와 함께 깊어지고 과장되고 목소리는 높았다. 여자처럼 헤어 스타일을 한 땅달한 키의 김모 지역구 의원은 자신의 입김을 과장했고 때맞춰 공사중이던 소양강 댐공사(67-73년까지) 장에 일용직으로 일다니던 광수.광열이 형제는 아직 전기발전도 하지 못하는 소양강 사력댐에서 전기를 끌어 와서 불을 켠다고 허풍을 떨었다. 여기 저기서 마땅한 뿌리도 없는 제잘난 허세를 부렸지만 전기불의 위력에 눌려 누구하나 타박하거나 눈을 흘기지는 않았고 그져 호탕하게 웃던 얼굴들만 기억된다. 훗날 세상을 알만한 나이가 돼서 보니 전기공급은 나라가 순차적으로 정해놓고 실행한 정책이었을 뿐 어느누구도 전깃불이 들어 오는데 힘을 쓴 사람은 없었다. 암튼 봉화형은 그후로도 한동안 끊어진 전구 교체나 간단한 배선을 해주느라 이집 저집 불려다니며 기술자 대우를 받고 밥술도 챙겼는데 느닷없이 어느 명절 때 나타나 성인만화 작가가 됐다고 빨간색 만화책을 돌리며 자랑하다가 동네 어른들에게 혼줄이 나서 서울로 다시 내뺏다. 지금 칠순이 다 됐을 그형이 추억속에 궁금하기도 하고 그립다.
전기는 이제 시골 사람들의 매일의 삶에 한 부분이 되었다. 한동안 사람들은 대낮에도 집을 들낙거리며 괜히 전기불을 켰다 끄기를 반복하며 피식 웃어댔다. 그만큼 신기했던 것이다. 소여물 창고에도 외양간에도 곳곳에 백열전구가 환하게 매달려 있었다. 전기세가 싸다고 형광등으로 바꾼 것은 한참 뒤의 이야기다. 불편한 것이 있었다면 벽마다 스위치가 없이 알전구 소켓이 천장에 매달려 있어 자다가 일어나도 두손을 높이 올려 소켓옆에 달린 팔랑개비 같은 스위치를 직접 돌려 켜고 꺼야 했다. 그래도 생활환경의 혁명은 전기의 힘이 몰아다 주었다. 소소한 가전제품이 하나 둘 장만 되었다. 시골부자 일(노동)부자 라고 현금이 없는 빤히 아는 눈치 빠른 행상(行商)들이 쌀이나 참깨. 마늘 같은 고가(高價) 농산물과 전기제품을 맞바꿔 주는 물물교환을 했다. 아낙네들이 계를 모아 전축을 사들이고 마지막 남은 큰 이슈는 쌀 열가마니 값에 육박하는 테레비(T.V)를 누가 먼저 안방에 들여 오느냐 그것이 문제 였다. 노래 잘하고 키가 훤칠한 둘째 형수가 당시에는 보기드문 대형 전축을 사들이는 바람에 농사일에 방해 된다고 눈을 부릅 뜨신 나의 부모님과 눈치싸움을 벌이기도 했지만 대청마루를 닦으며 부엌을 오가며 형수가 틀어 놓은 꽝꽝이 (부친께서 전축을 그렇게 부르셨다) 에서 대중가요가 종일토록 집안에 울려 퍼졌다. 형수의 애창곡중에 가수 최숙자가 부른< 눈물의 연평도>라느 노래가 있는데 연평도 특산물인 조기가 나온다. 오다 가다 들은 기억을 더듬어 중학교 어느땐가 기말고사에서 정답을 맞춘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결단력이 있고 우리형제중 가장 머리가 비상한 둘째 형님이 급기야 사고를 쳤다. 테레비를 들여 온 것이다. 기억하기로는 쌀 열가마니 값이었는데 대한전선이라는 회사에서 나오는 미닫이 문이 달린 케이스 안에 담긴 테레비 였다. 당연히 흑백이고(컬러 T.V는 81년부터) 채널은 일일이 손으로 잡아 돌리는 방식이어서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우습겠지만 당시엔 전화기와 함께 재산목록1.2위를 다투었고 중산층 이하에서는 부의 상징이되기에 충분했다. 테레비는 바보상자라고 불리기도 하고 요물단지라고도 별명 되어진다. 놀랄만한 발전을 거듭한 요즘의 첨단 TV라고 해도 마주 바라보는 화면속 영상과 교감하는 시청 방식엔 큰 변화가 없어서 인지 요물단지를 넘어서서 가슴이 터질것만 같았고 동공에 지진이 나던 첫 시청은 평생 잊을 수가 없다. 일밖에 모르시고 검소하시던 아버지의 노여움과 못마땅하신 걱정도 얼마가지 않아 식구들의 문화생활 만족도에 밀려 가라 앉으시니 테레비는 몇년간 우리식구보다 동네사람들이 더 좋아하고 즐긴 보물단지가 되었고 우리집은 밤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동네극장이 되었다. 당연히 테레비 주인집 귀한 신분인 늦둥이 도련님이던 나는 간혹 친구들에게 위세를 부리며 으스대기도 했다. 1974년 독일 월드컵축구 예선에서 날리던 차범근과 고재욱을 대한전선 테레비속에서 만났고 홍콩까지 갔던 최종 3차전에서 키다리 김재한 선수의 노마크찬스 헛발질로 호주에 무릎을 꿇는 통한의 장면에 보탠 안타까운 눈물도 똑같은 테레비를 통해서 였다. 그때 호주국가 대표팀 선수였던 조니 노먼 워렌(Johny Norman Warren) 과는 시드니에서 오랜 친구가 되어 테레비의 역사와 차범근 김재한 선수 이야기로 방담을 많이도 했었다. 10살에 시작된 T.V나 라디오와의 사랑과 동행은 나의 삶에 내재한 문학에 대한 열정과 다양한 문화를 구축하는데 바탕이 되고 힘이 되어 주었다. ☆ ☆ ☆ ☆
<2편에서는 라디오와 TV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어찌보면 단순하고 간단한 소재를 알맹이도 없는 보따리를 플어 제끼듯 길고 지루하게 만연(漫然)하고 있다고 느끼시겠지만 차제에 써보려고 작정한 긴 글들을 위한 습작(習作)으로 용납하시는 인내를 부탁드립니다>
첫댓글 지금 석기시대 이야기하는거죠 ? ㅋㅋㅋㅋㅋ
ㅎㅎㅎㅎ 최소 철기시대는 가줘야 징 ^^☆
그시대를 살아보지않은분은 석기시대 철기시대란 말씀이 나올법합니다. 두분 코멘트가 재미있네요
축음기를 지나 전축 시대의 배경이니 완죤 응답하라 0000
단군이래 끼니걱정하지않고 살았던 시대가 얼마나되겠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