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성


의암(義菴)
의암(義菴)은 논개(論介)기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殉國)한 바위다. 조선(朝鮮) 선조(宣祖)25년(1593년) 6월 29일 임진왜란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진주성이 함락(陷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논개는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의암으로 유인하여 이 바위에서 순국(殉國)하였다. 이에 논개(論介)의 순국정신(殉國精神)을 기리기 위해 영남(嶺南)사람들은 이 바위를 의암(義菴)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인조7년(1627년) 진주의 선비 정대륭(鄭大隆, 1599년~1661년)은 바위의 서(西)쪽 벽면(壁面)에는 전서체로 의암이라는 글을 새겼고 남쪽 벽면(壁面)에는 한몽삼(韓(夢蔘, 1598년~1662년)이 쓴 것으로 전하는 해서체로 된 의암(義菴)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의암(義菴의 바닥 넓이는 3,5m X 3.3m이다.

의암 사적비(義菴事蹟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3호
소재지: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500의8
의암사적비는 선조 26년(1593) 6월 29일 임진왜란(壬辰倭亂) 제2차 진주성(晉州城)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어 7만 민.관.군(民.官.軍)이 순절(殉節)하자 왜장을 끌어 안고 순국한 의기논개(義妓論介)의 사적(事蹟)을 기록한 비석이다.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의해 논개(論介)의 순국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진주의 사민(士民)들은 정 식(鄭 栻, 1683~1746)이 지은 비문(碑文)으로 비를 세웠고 경사우병사(慶尙右兵使) 남덕하(南德夏, 1688~1742)가 비각을 세워『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이 비(碑)는 아래의 의암(義菴)과 마주하고 있으며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시(時)가 새겨져 있다.
“그 바위 홀로 서있고 그 여인 우뚝 서 있네 / 이 바위 아닌들 그 여인 어찌 죽을 곳을 찾았겠으며 / 이 여인 아닌들 그 바위 어찌 의롭다는 소리 들었으리요 /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하리”



논개

촉석루(矗石樓)
촉석루는 진주의 상징으로 영남 제일의 명승으로 꼽힌다. 이곳은 고려 고종 28년(1241) 진주 목사 김지대(金之岱, 1190~1266)가 창건한 이후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고쳐 지었다. 전쟁때는 장수의 지휘소로 쓰였고, 평상시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명소였다. 촉석루는 강가에 바위가 우뚝우뚝 솟아 있다고 하는 데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일명 남장대(南將臺) 또는 장원루(壯元樓)라 부르기도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10년(1618)병사 남이홍(南以興, 1576~1627)이 전보다 웅장한 건물로 고쳐 지어 1948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50년에 6. 25전쟁으로 불탔다. 지금의 건물은 1960년에 진주고전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고쳐 지은 것으로 건물의 구조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되어 있다. 예로부터 남(南)으로는 진주 촉석루, 북(北)으로는 평양 부벽루(浮碧樓)라 할 만큼 풀광이 아름다워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글과 그림이 전해져 오고 있다. 현재 촉석루에는 하륜(河崙, 1347~1416)의 촉석루기(矗石樓記)를 비롯한 많은 글이 걸려 있다.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
영남포정사는 조선조말 경상남도 관찰사의 선화당 관문(宣化堂 關門)으로서 일명 망미루(望美樓)라고도 불렀다. 처음 창건은 조선조 광해군 10년(光海君, 1618)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 1576년~1627년)이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집무청(慶尙右道兵馬節度使)인 관덕당 내동문(觀德堂 內東門)으로 건립한 이래 경상도우병영의 관문으로도 활용되었다. 고종 32년(高宗, 1895)에 8도제(道制)를 폐지(廢止)하고 전국을 23부제(府制)로 시행함에 따라 이곳에는 진주부가 설영(設營)되어 진주관찰부의 선화당 관문이 되었다. 다음해인 건양원년(建陽元年, 1896)에 다시 전국을 13도로 개편(改編)함에 따라 경상남도가 설영되어 경상도 관찰사의 선화당 관문이 된 이래 1925년 도청(道廳)이 부산부(釜山府)로 옮겨 갈때까지 그 문루(門樓)로서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라 이름 하였다. 이 건물을 본따 영남 포정사(嶺南布政司)가 창원시 용지공원에 세워져 있다.

용다리 전설
지금의 동송동 212-1번지(삼성화재) 부근에는 예전에 용머리가 양쪽으로 붙어있는 돌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이 용다리에는 슬픈 사랑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때는 고려 초 진주의 한 마을 군수 이씨에게 딸이 셋 있었다. 그 중 둘째 딸은 불행히도 출가하자마자 남편이 죽어 친정으로 돌아와 지내고 있었다. 군수의 집 머슴 돌쇠는 이때부터 아씨를 사모하게 되었고 아씨 역시 돌쇠의 성실하고 충직한 모습에 마음이 끌리게 되었다. 그러나 신분상의 차이로 인해 서로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했으며, 둘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그러다 아씨는 상사병으로 그만 목숨을 잃게 되었고, 돌쇠는 아씨를 장사지내러 가는 도중 용다리 위에서 무심결에 도랑물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마치 죽은 아씨처럼 보여 “아씨”하고 소리치다 그만 미쳐버리고 말았다. 이후, 이군수는 딸을 잃은 이곳 떠나려고 막 용다리를 건너가고 있는데 뒤따라 오던 돌쇠가 보이지 않아 주변을 찾아보니 이미 돌쇠는 다리 옆 고목에서 목을 맨 상태였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조용하던 용다리 밑 개천에서 수천마리나 될 듯한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 왔는데 이는 마치 죽은 돌쇠가 우는 소리와 같았다. 그뒤부터 용다리 밑에는 진주에서 개구리가 가장 많이 모여 울게 되었다. 짝을 지은 남녀나 부부가 지나가면 울음이 끊겼으며, 상사병에 걸린 사람이 용다리를 두 번 왔다 갔다하면 씻은 듯이 병이 나았다고 한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돌쇠가 이루지 못한 사랑을 남에게 하고 이루게 하려는 돌쇠의 지성이라고들 말하고 있다. 6. 25전까지 돌쇠가 목매어 죽은 고목에 아들을 원하던 사람들은 한식에 한번씩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지금은 용다리의 흔적만이 진주성 안에 남아있다.

북장대(北將臺)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4호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167
북장대는 조선중기(朝鮮中期)에 건축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八作)지붕 다락집형 건물(建物)로서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에 포진한 성의 병력을 지휘(指揮)하던 곳이다. 일명 진남루(鎭南樓)라 부르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불타 없어진 것을 1619년 병사(兵使)남이흥(南以興, 1576년~1627년)이 중건(重建)하였고 현재의 건물은 1964년에 중수(重修)한 것이다.

진주성포루
진주성을 방어하는 포진지이다. 선조 40년(1607)병사 김태허(1555~1620)에 의해 진주성 내,외성에 포루 12좌가 설치 되었는데 “여지도서”의 “경상우도병마절도영”조에 의하면 “내성의 포루는 3곳이니 삼가, 의령, 곤양 등 3읍의 소속 ”이고“ 외성의 포루는 9곳이니 진주, 단성, 초계, 사천, 함양, 암해, 합천 등 8읍 소속”이라고 하였다. 1969년부터 진주성을 복원하면서 상징적으로 1개소만 복원하였다.

호국사(護國寺)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창건된 것으로 전하는 이 절은 원래의 이름은 내성사(內城寺)였다고 한다. 고려말기에 왜구(倭寇)를 막기 위해 진주성을 고쳐 쌓고, 승병(僧兵)을 가리기 위해 창건된 것으로 생각되는 이 절은 임진왜란 때는 승군(僧軍)의 근거지가 되었다.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임금께서 호국사(護國寺)란 이름으로 재건하였다고 전한다. 최근에 진주성을 정화하면서 일주문(一柱門)자리가 발견되어 새로 세웠으며, 사찰의 건물들은 모두 근년에 새로 이룩된 것이다.

서장대(西將臺)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6호
진주성의 서문에 속하는 장군의 지휘소이다. 여지도서(與地圖書)에는 회룡루(回龍樓)로 기록되어, 규모는 작으나 남장대인 촉석루와 같은 다락집이었다. 고 전한다. 지금의 건물은 허물어진 것을 1934년 서상필(徐相弼)씨가 출자하여 새로 지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옆에서 버면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을 올린 목조기와집이다.




촉석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