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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안산시민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한유수(비나리투어)
▣ 억새는
가을이 여물어 가는 9월 중순께 피기 시작해 10월 중순에 그 장관을 이룬다. 그 색깔은 햇살 강도와 방향에 따라 하얀색이나 잿빛을 띤다. 가장 보기 좋은 흰색은 태양과 억새가 45도 이하를 이루며 역광을 받을 때. 따라서 오전 9시 이전이나 오후 5시 이후에 태양을 안고 바라보아야 그 모습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 천관산억새
억새가 손짓한다.
가을의 정취가 한아름 느껴지는 억새바다로 나를 오라고 유혹한다.
단풍만큼 화려하지 않지만 "소박한 빛깔"로 산야를 하얗게 뒤덮은 억새는 깊어가는 가을산을 ‘가을의 심연’으로 이끈다. 청동 빛의 가을하늘, 소슬바람에 일렁이는 억새물결을 헤치며 걷는 가을산행은 또 다른 운치를 느끼게 한다.
전국 어디서나 억새의 아름다운 자태를 볼 수 있지만 장흥 지역에서는 다도해의 풍광과 기암괴석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장흥 천관산이 최고로 손꼽힌다. 이른 아침 탑산사에 도착해 전국 최초로 조성된 천관산 문학공원에서 국내 유명 문인 54명의 문향을 담긴 문학비를 감상하며 천관산을 오른다.
소나무 가지아래 동백나무가 늘어섰고 상수리나무, 때죽나무, 노각나무가 등산객을 맞이한다.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는 발걸음을 더욱 가볍게 해준다. 아직은 제때가 아니지만 능선을 따라 오르다 보면 제법 색깔을 갖춘 나뭇잎들이 바위들 사이에서 물들어 산행하는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천태만상의 기암괴석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기바위, 사자바위, 종봉, 천주봉, 관음봉, 선재봉, 대세봉, 석선봉, 돛대봉, 갈대봉, 독성암, 아육탑, 환희대, 아홉 개의 봉우리가 모여 만든 구룡봉, 모든 봉우리들이 여느 산에서 흔히 대할 수 없는 기이한 얼굴들을 하고 있다. 그 모습이 주옥으로 장식된 천자의 면류관과 닮았다 하여 이름도 천관산(天冠山)이라 불린다. 거친 숨을 몰아 쉴 틈도 없다.
눈앞에 펼쳐진 다도해의 절경, 아침이슬에 촉촉이 젖어 하얗게 눈송이처럼 핀 억새 한 무리, "와"~ 하며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능선을 따라 연대봉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130만㎡에 펼쳐진 비단결같은 억새가 은빛을 내품는다. 연대봉쪽에서 넘어 온 다도해의 가을바람에 억새들이 고개를 숙였다 일으켰다 하며 군무를 춘다.
어른들 키 만큼이나 훌쩍 자란 억새의 너울따라 몸을 숨겨본다. 덧없는 세상사의 고민도 어느새 사라진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억새가 쓰러지면 내 마음을 들켜버린 것처럼 부끄러워진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미 청동빛 하늘은 석양으로 물들어졌고 억새밭은 그야말로 은빛으로 물결을 이뤘다. 그 위를 거닐다보면 은빛 바다위로 배를 타고 가는 것 같은 황홀감에 빠져든다. 저녁 노을 질 무렵 우수수 소리를 내며 파도처럼 출렁이는 황금물결을 지켜보는 것으로 억새와의 하루여행은 끝을 맺는다. 때론 살갑게 피워 오르는 초승달과 동행하며 하행길에 느끼는 캔맥주 한모금의 여유는 미래를 새롭게 만든다.
10월에는 "으악새(억새) 슬피우는" 소리 들으러 장흥으로 가자. 천관산으로 떠나자.
◇ 장천재에서 환희대로 오르는 능선에서는 관산읍 일대의 들판이 내려다보인다.
들판을 가로지르는 고읍천이 득량만을 향해 흘러간다. 저 들판과 바다에서 목숨을 이어가는
민초들에게 천관산은 언제나 고개만 들면 보이는 존재였다.
전남 장흥군 관산읍 용전리 들판,
이제 누렇게 익어가기 시작하는 논에서 허리를 구부린 농부가 나락 사이를 더듬어 피를 뽑는다.그러다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이윽고 허리를 펴고 하늘을 본다.새털구름이 지나는 가을하늘 자락에 듬직한 산등성이가 동서를 가로지른다.그 등성이 서쪽 끄트머리께는 마치 가시처럼 삐죽한 암봉들이 하늘을 찌르며 솟구쳤다.
노력도를 오른편에 끼고 회진항으로 돌아오는 뱃전, 고기잡이를 마치고 포구로 들어서는 어부의 눈에 ‘큰산’ 하나가 가득 찬다.곳곳에 희끗한 돌무더기가 쌓여있지만 남쪽 바다에서 바라보는 산은 뾰족함 없는 그냥 큰 산이었다.그것은 잔뜩 웅크린 거북이거나 입을 꽉 다문 조개의 형상이기도 했다.
천관산(天冠山·723m)이다.
장흥 땅에서는 으뜸으로 치는 산이다.
지리산, 내장산, 능가산, 월출산과 더불어 호남 땅 5대 명산으로 손꼽힌다.
천자의 면류관을 닮았다거나, 신라 김유신이 화랑시절 사랑했던 천관녀(天冠女)가 숨어살았다는 전설이라거나 또는 바람이 많이 분다 하여 천풍산(天風山), 가끔 흰 연기와 같은 이상한 기운이 서린다 하여 신산(神山), 천관보살이 머무는 지제산(支提山) 등으로 불렸다거나 하는 산이름 유래가 전한다.
그러나 이 산자락에 기대 힘겹게 생을 이어온 가난한 농꾼과 고기잡이에게는 그저 ‘큰산’으로 부르면 족했다.
제암산을 지나 사자산으로 이어져 바다로 빠질듯하던 호남정맥이 다시 고개를 북으로 돌려 일림산으로 이어질 때 사자산에서 슬쩍 가지 친 산줄기 하나가 억불산과 부용산을 지나 마지막 바닷가에서 잔뜩 힘을 돋워 올린 것이 바로 천관산이다.
산 북쪽 마을 관산에서 바라보면 동서로 길게 드리운 정상능선은 족히 십리는 돼 보인다.
그 능선의 서쪽 끄트머리쯤에는 수십 개의 뾰족한 암봉이 자리 잡아 독특한 풍광을 지어낸다.
또 정상능선에서 갈래 친 세 개의 능선마다 각양각색의 기암들이 즐비하다.
고읍천 주변의 들판에서는 허리만 펴면 천관산의 이런 풍광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이곳의 농부들은 날 때부터 천관산을 바라봤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서도 천관산을 바라본다.
이들에게는 그냥 ‘큰산’이었다.
산 남쪽 마을 대덕이나 회진에서의 천관산은 그냥 둥글넓적한 육산의 풍모를 지녔다.
곳곳에 너덜지대가 있지만 북쪽에서처럼 찌르는 듯한 기세는 찾아볼 수 없다.
회진면 신상리 외지고 궁벽한 포구에서 나고 자란 소설가 한승원은 탑산사 입구 문학공원 시비에 새긴 글에서 천관산을 이렇게 적었다.
“이 관내 모든 학교의 교가 속에 우뚝 솟아 있듯이 내 육체와 영혼 속에 이 산이 들어와 우뚝 솟아있다."
그이가 뛰 놀았던 넓바우 포구에서 바라보는 천관산은 과연 우뚝 솟은 ‘큰산’이었다.
천관산을 바라보며 필력을 키운 문인들은 한승원 말고도 더 있다.
송기숙, 이청준, 김석중, 이승우, 이성관, 이대흠 등 많은 소설가와 시인들이 바로 이 산자락에서 나고 자랐으니 이 산은 농부와 어부의 것만이 아니라 문사의 것이라 해도 무방할 듯. 이들의 육필원고 등을 모아 산 남쪽자락 탑산사 앞에는 문학공원이 조성되었다.
◇ 천관산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억새와 기암들. 드넓은 억새밭에 불쑥불쑥 솟아오른 암봉들은
기이한 풍경이기도 하다. 푸르른 가을 하늘과 억새와 기암들.
천관산의 역사와 경관을 가장 자세히 기록한 것은 관산읍 방촌에서 태어나 평생을 이곳에서 보낸 조선 후기 호남실학의 대가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가 지은 <지제지>를 손꼽는다.
존재는 이 책 서문에서 ‘큰 액운이 겹쳐 사람도 비고 형태도 변하여 89암자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신선이 옮겨놓았던 신령스럽고 찬란했던 절은 주춧돌 잔해만 남아있고, 수도승들의 발길도 끊어져 기암수봉으로 오르는 길마저 묵어 막혀 버렸다.아! 이것이 어디 천관산의 본 모습이랴. 내가 만일 탄식만 하고 매몰된 채 내버려 둔다면 저 돌무더기들이 반드시 나를 친구로 여기지 않을 것이니 어찌 나의 허물이 아니겠는가’라며 탄식했다.
89암자가 다 사라지고 사찰은 주춧돌만 남았으며 기암수봉으로 오르는 길이 막혀버린 것은 고려 말부터 이 지역에 자주 출몰했던 왜구 탓이다.
지금이야 간척사업 덕분에 해안이 멀어졌지만 당시 관산은 해안가 포구마을이었다.
왜구는 마을과 사찰을 불태우고 노략질을 일삼았다.
사람들은 그때마다 천관산으로 올라가 진을 치고 싸웠다.
존재가 수학했던 장천재 오르는 입구에는 아직도 회주산성 터가 남아있다.
구룡봉에서 연대봉까지 이르는 십리 안팎의 주능선에는 나무 한그루 자라지 않는다.
사만 여 평에 이르는 이 광활한 산등성이를 온통 차지한 것은 억새다.
억새로 뒤덮인 늦가을 천관산 정취는 이제 전국에 그 이름자를 드높여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나무 대신 억새가 자라기 시작한 사연도 왜구와 무관치 않다.고려말 원나라의 강요에 의해 일본정벌에 나서기 위한 배 900척을 만들기 위해 모조리 베어 버린 탓. 관산읍 죽청리에는 배를 만들던 조선장터가 남아있다고 한다.
천관산 주변 고을은 또한 민중들의 저항이 치열했던 곳이다.임진왜란 때는 관산·대덕 출신 의병장이 수십 명에 달했고, 철종 때는 부패한 관아를 습격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동학 최후의 격전이 치러진 석대뜰 싸움에서는 관산출신 동학군이 26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천관산은 민중들과 함께 수난의 역사를 함께 한 ‘큰산’이기도 하다.
억새와 더불어 천관산을 대표하는 것은 각양각색의 암봉들이다.산 곳곳에 자리 잡은 이 기암기봉들은 자칫 밋밋했을 이 산에 스타카토를 찍는다.
존재는 이 형상을 <지제지>에서 ‘입석과 기암의 볼만한 바위가 무려 천 가지나 되며 모나고 둥글며 빼어나고 비기고 기울어진 것들과 높고 낮고 걸치고 포개진 것들, 넓은 골짜기와 일그러진 모양, 그리고 반반하게 되사린 것과 울창한 것들, 또한 웅장하고 험악하면서 신령스러워 그 경관이 천태만상으로 항상 볼 때마다 새로움을 느끼게 한다’라고 썼다.
천관산 바위의 모습은 존재가 그려낸 것이 가장 적확하다.
자, 이제 천관산으로 향하는 그대에게 몇 가지 일러둔다.
그대가 만일 천관산을 찾는다면 그때는 이른 봄이나 늦은 가을이 좋겠다.
북쪽 산 아래 장천재 부근의 동백 숲과 연대봉으로 이어지는 진달래 능선은 그대를 위한 이른 봄의 성찬이다.남쪽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춘풍이 일깨운 화심을 누구보다 먼저 만날 수 있으리니 그대는 그저 꽃길을 허위허위 걸으면 된다.환희대 바위에 걸터앉아 봄바람이나 실컷 들이키고 돌아와도 좋다.
늦가을 천관산은 억새의 바다가 된다.
연대봉에서 구룡봉까지 십리쯤 되는 정상능선에는 하얗거나 누런 억새의 군무가 출렁댄다.
이제는 천관산의 간판이 되어 버린 이 억새밭에서는 해마다 10월이면 축제가 열려 수많은 인파가 몰려든다.이 능선은 거의 평지나 다름없어 한가롭게 억새밭 사이를 거닐며 사방을 구경하는 것이 좋다.
북쪽으로 내리 뻗은 능선마다에는 수많은 기암괴석들이 즐비하게 자리 잡았고, 남쪽으로는 올망졸망한 다도해의 섬들이 점점이 흩뿌려져 한없이 정겹다.
서쪽 강진만 어간으로 노을이라도 물든다면 그 붉고 검은 그림자를 향해 허청허청 걸어도 좋다.
그 억새밭에 달이라도 둥실 뜬다면 그대는 아마 그대로 넋을 빼앗겨 달빛을 쫓아 다도해 섬 사이를 밤새워 헤맬 지도 모른다.
천관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연대봉에는 봉수대가 있다.
제주도 한라산의 신호를 내륙으로 전하는 곳이었다니 날씨만 좋다면 그대는 이곳에서 한라산을 볼 수도 있으리라.
봄이나 가을이 아니라도 천관산으로 향하는 그대는 언제나 기이한 암봉의 향연에 초대된다.
선인봉, 종봉, 석선봉, 대세봉, 천주봉, 진죽봉 등 제멋대로 깎아 세운 돌 기둥들이 한 굽이를 돌 적마다 불쑥 불쑥 나타나 인사를 건넨다.건너편 구멍바위(금수굴)를 향해 불끈 솟은 양근암, 원숭이 모양의 불영봉과 다채로운 형태의 정원석, 저절로 생긴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아육왕탑(阿育王塔) 등, 등성이마다 어디에나 기암괴석이 즐비하다.그 바위들은 한결같이 모나고 둥글며 일그러지고 뒤틀렸으며 기울어지고 쭈글쭈글하다.사라진 89개의 암자가 모셨던 불상들이 어쩌면 그 바위들인지도 모른다.
그것들을 보며 농부의 굽은 허리와 어부의 갈라터진 손가락 마디를 그대가 일부러 떠올릴 필요는 없다.
산에서 내려온 그대는 이제 이 땅의 정남진(正南津) 회진포구로 가서 고소한 전어회에 소주한잔 마시며 천관산을 바라볼 일이다.
그때 그대도 천관산이 ‘큰산’으로 보인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산 행]
장천재~대세봉~환희대~연대봉~양근암~장천교
남도의 들판은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이 땅에서 봄과 여름은 북진하지만 가을은 오직 남진할 뿐이다.
가을을 몰고 남으로 남으로 향했다.
전남 장흥군 관산읍. 아직도 촌티가 역력한 읍내를 한 바퀴 돌다가 썰렁한 장터거리에 들어섰다.
배 가른 민어를 씻어 햇볕에 말리는 장꾼 부부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어제가 장날이었으니 오늘은 ‘가는 날이 장 다음날’이었다.
세상사가 다 그렇게 ‘가는 날이 장날’ 일 수는 없는 법. 어쩌랴! 고요하기 이를 데 없는 장바닥에서 전깃줄만 어지러운 하늘 너머로 천관산의 하늘금만 올려다 볼 수밖에.
기암괴석 연이은 환희대 코스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한없이 높아지고, 길고 긴 가을해가 중천을 넘어설 즈음에야 장천재 주차장에서 산행 채비를 마쳤다.
그러고도 산 아래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한가로이 마치고 나서야 산으로 들어섰다.
이런 게으름에는 이유가 있었다.
“천관산은 한 나절이믄 다 돌아부러. 아무리 살살 올라도 두 시간이면 환희대까지 충분헝께 거기서 노을이나 보고 있으랑께. 나는 이따가 저녁때 탑산사로 혀서 올라 갈라니까. 거그서는 한 시간도 안 걸려부러”라는 엄길섭씨(48세·장흥군청문화관광과 홍보팀)의 친절한 안내가 그것이었다.
게다가 환희대 쯤에서 노을을 보다가 밤을 보낸 후 고흥반도와 득량만 일대의 다도해 사이로 솟는 일출을 보려는 계획도 이런 게으름의 이유였다.
평일이라선지 산으로 들어서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 5분쯤 오르자 장천교 앞에서 세 갈래로 길이 나뉜다.
장천재 주차장을 기점으로 천관산을 오를 경우 각각 능선을 따라 세 개의 코스가 정상능선으로 이어진다.
장천교에서 양근암을 거쳐 연대봉으로 오르는 코스와
체육공원에서 갈라져 금수굴을 지나 닭봉으로 이어지는 코스,
체육공원에서 대세봉을 지나 환희대로 오르는 코스 등 3개의 등산로가 모두 잘 정비되어 있어 길을 잃거나 할 염려가 없다.
세 코스 모두 오르는 데 1시간 30분 정도 걸리며 군데군데 조망이 좋은 바위와 기암괴석이 많아 지루하지 않게 오를 수 있다.
취재팀은 기암괴석이 연달아 이어지는 대세봉~환희대 코스로 산행에 나섰다.
장천교를 건너자 굵은 소나무 숲이 이어졌다.
장천교부터 장천재(長川齋)에 이르는 100m 정도의 계곡은 존재 위백규 선생이 청풍담(淸風潭)·백설뢰(白雪瀨)·도화량(桃花梁)·세이담(洗耳潭)·명봉대(鳴鳳臺)·추월담(秋月潭)·청령뢰(淸靈瀨)·와룡홍(臥龍弘) 등 장천8경이란 이름을 지어 붙인 장천동이다.
길 오른쪽에 ‘풍호대’라는 전망대가 있었다.
‘정남진 조망대’라는 설명이 있었지만 정남진의 조망은 그리 신통치 않았다.
정남진에는 일출을 보기 위해 인파가 몰려든다는데 풍호대에서는 정남진을 보라는 것인지 아니면 일출을 보기 위해 정남진에 몰려든 사람들을 보라는 것인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풍호대를 지나자 수령 600년이 넘는다는 소나무 태고송이 장천재를 향해 비스듬히 몸을 기울인 채 일행을 맞이했다.
장천재는 장흥 위씨(魏氏) 문중이 영은암이란 암자를 헐고 지은 문중 사우(祠宇)로 위백규 선생 등 여러 학자들이 수학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장천재 마루에 한참을 걸터앉아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굵은 나무기둥들과 주춧돌, 토방의 돌 틈에는 세월의 더께가 겹겹이 스며있었고 벽면 곳곳에는 한자를 쓴 편액들이 빼곡히 걸려있었다.
솔바람이 스치는 마루에서는 금방이라도 낭랑한 글 읽는 소리가 들릴 것 만 같았다.
태고송이 장천재를 향해 비스듬히 몸을 기울인 것도 글 읽는 소리를 더 잘 들으려 한 탓은 아닐까 싶다.
장천재 근방에서 눈길을 한 번 더 사로잡는 것은 동백 숲이었다.
지금이야 짙푸른 잎사귀뿐이지만 이른 봄이면 붉은 동백꽃이 장천재의 고색창연한 기와며 담벼락 아래를 핏빛으로 수놓을 테다.
체육공원을 지나면서부터 본격적인 산길로 접어든다.
오른쪽 능선의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 계곡을 하나 건너고 다시 잡목 숲이 우거진 산길을 오르는 동안은 그저 매미 소리만 벗한 채 땀을 흘리며 답답하게 걸어야 했다.
9월의 산중에는 아직 가을이 다 몰려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잡목 숲을 벗어나자 땀과 답답함은 일순간에 사라졌다.
선인봉 어간에서 암릉길이 시작되었고 사방으로 시야가 트이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동쪽 금수굴 능선이 지척이고 머리 위로는 각양각색의 기암들이 늘어섰다.
환희대에서 연대봉에 이르는 정상능선도 손에 잡힐 듯 다가선다.
촌스럽기만 했던 관산읍내 풍경도 누렇게 물들기 시작한 들판과 어우러져 정겹게만 보였다.
이제 이어지는 산행은 지루하거나 답답할 새가 없었다.
전망 좋은 바위를 하나 지나면 쉬어가기 좋은 너럭바위가 나타났고, 기묘한 형태의 암봉들이 연달아 길을 막아섰다.
그런 곳에서는 어김없이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취재팀은 그때마다 쉬어가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물을 마시거나 바람을 맞거나 사방을 조망하기는 했지만 더 큰 목적은 환희대까지 최대한 게으름을 부리며 가는 것이었다.
너무 일찍 도착해서 일몰까지 속수무책 기다리는 짓이 얼마나 따분한 일인지를 잘 아는 탓이다.
정상능선의 억새밭이 장관
종(鐘)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종봉에는 작은 굴이 하나 있었다.
금강굴로 불리는 이 굴 안에는 여기저기 치성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나무계단을 따라 종봉 왼편을 돌아 오르자 노승봉이란 암봉이 나타난다.
가만히 들여다보자니 과연 쭈글쭈글한 늙은 중의 형상을 하고 있다.
노승봉을 지나면서부터는 더 이상 게으름을 부릴 수 없었다.
시시각각으로 나타나는 기암들의 모습에 홀려 최대한 게으르게 오르기로 한 당초의 약속을 모조리 잊은 탓이다.
대세봉 앞에서는 천관사를 기점으로 오르는 등산로와 만나는 삼거리였다.
천관사 쪽 능선에도 몇 개의 기묘한 암봉이 솟아올랐다.
대세봉부터는 저절로 발걸음이 빨라졌다.
솜털구름이 지나가는 새파란 하늘을 이고 늠름하게 혹은 찌를 듯 솟은 암봉들 사이를 돌아가는 것은 억누르기 힘든 즐거움이었다.
이 암봉을 지나면 어떤 형상의 바위가 또 나타날까 하는 호기심이 자꾸만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하늘을 받쳤다는 천주봉을 지나 드디어 환희대에 도착했다.
편평한 바위 몇 개가 포개져 그곳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기 좋은 환희대에서는 지나온 능선의 바위들을 모조리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동쪽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바로 억새의 바다! 환희대에서 천관산 최고봉인 연대봉까지의 펑퍼짐한 능선에는 이제 막 패기 시작한 억새이삭이 허옇게 일렁이고 있었다.
바닷가로부터 불어온 바람이 아직 푸르른 억새 잎을 흔들어대자 그 푸르고 허연 일렁임은 마치 파도처럼 눈부셨다.
환희대에서 억새의 바다를 감상할 시간은 아직도 충분했다.
올라오는 도중 더 게으름을 부렸어야 했다.
멀지않은 구룡봉을 향해 다시 길을 나섰다.
억새 숲을 헤치며 구룡봉으로 가는 길에서는 서쪽 천관산자연휴양림으로 이어지는 지장봉 능선에 자리한 진죽봉이 세세히 드러났다.
존재 위백규 선생이 지은 <지제지>에는 ‘관음보살이 석가모니의 말씀을 따르고자 진불(眞佛)을 돌배(石船)에 싣고 바다 건너 천관산으로 가서 그 불경을 내려놓은 곳이 대장봉, 돛대가 진죽봉, 돌배가 석선봉이라 한다’고 전한다.
진죽봉의 돌 돛대가 바람에 펄럭일 듯했다.
아홉 마리의 용이 놀았다는 구룡봉 정상은 득량만과 다도해의 훌륭한 전망대였다.
거금도와 금당도, 금일도, 생일도, 조약도, 고금도, 신지도 등 수많은 섬들이 겹쳐져 육지인지 바다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그 중 고흥반도 끝자락에 있는 소록도를 애써 찾아보았다.
구룡봉에서 빤히 내려다보이는 회진면 진목리 갯나들에서 나고 자란 소설가 이청준은 소록도를 <당신들의 천국>의 배경으로 삼았다.
용의 발자국이라는 알터가 여러 개 있었는데 물이 고인 곳마다 개구리와 올챙이가 헤엄치고 있었다.
내처 구룡봉 바로 아래 탑산암지를 들러 아육왕탑을 둘러본 후 다시 환희대로 돌아왔다.
해가 어느덧 설핏 기울어가고 있었다.
기울기 시작한 해는 서서히 붉은 빛을 발하며 서쪽으로 기울었는데 그 빛은 온전히 억새밭을 비추는 조명이었다.
더군다나 조금 더 거세진 바람은 억새밭의 파고를 한층 드높여서 장관을 연출했다.
억새의 바다는 뒤챌 때마다 황금빛으로 또는 붉은 빛으로 번쩍였다.
환희대에 선 채 드센 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면서도 움직일 줄 몰랐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두꺼운 구름이 서녘 하늘에 가득해 기대했던 낙조를 감상하지는 못했지만 일렁이는 억새의 파도만으로도 환희대에서 맞이한 저녁은 충분한 보상이었다.
어둠이 몰려왔고, 산 아래 포구마다 따스한 불빛이 별처럼 반짝였다.
밤새 바다로부터 바람이 불어와 먹구름을 동쪽으로 몰고 갔다.
억새의 사이를 헤집는 바람소리는 또한 파도소리처럼 들렸다.
밤에 이곳으로 오려 했던 엄길섭씨는 일이 끝나지 않아 끝내 오지 못했다.
그이에게도 오늘은 ‘가는 날이 장날’이 아니었다.
아침, 끝내 해가 뜨지 않았다.
새벽 찬바람을 맞으며 일출을 기대했건만 사위가 서서히 밝아지기만 했지 해는 끝내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해가 뜨지 않는 날이야 없겠지만 산 위에서 해 뜨는 모습을 보기란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저녁햇살 못지않게 아침햇살에 번뜩이는 억새의 모습도 볼만 한 것임이 분명할진대 그저 아쉬울 뿐이었다.이래저래 우리에겐 계속 장날이 엇갈렸다.
연대봉에서는 한라산이 보인다
어쩌랴, 그래도 갈 길은 가야했다.
연대봉을 향해 억새 밭 사이 길을 따라 걸었다.키 큰 억새가 지나갈 때마다 서걱거렸다.
연대봉까지의 주능선길은 거의 평지나 다름없이 이어졌다.
여인의 젖가슴처럼 봉긋한 연대봉을 향해 서편제 가락처럼 유연한 억새능선을 느릿느릿 걸었다.
이청준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서편제>의 한 장면을 떠올리는 사이 어느새 헬기장이 있는 닭봉을 지났고 길은 연대봉 가는 길과 금수굴 능선으로 나뉘었다.
이 억새 무성한 정상능선에서는 해마다 10월이면 억새축제가 열려 전국의 등산인들이 구름처럼 몰려온다.
어디 억새 무성한 산이 천관산 뿐 이겠냐마는 억새밭 사이사이의 기암괴석과 그 너머로 보이는 다도해의 풍광을 따라올 산이 또 있으랴. 정상 능선에서는 어느 곳으로든 막힘없이 통쾌한 조망이 펼쳐졌다.
그중 점점이 떠 있는 다도해의 풍광은 한 폭의 그림인 듯싶었다.
그런 풍광을 보며 자랐을 한승원, 이청준, 송기숙 등이 타고난 이야기꾼이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억새밭 사이 감로천에서 물 한 모금을 마신 후 이윽고 연대봉 정상에 올랐다.
천관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연대봉에는 1986년 복원한 봉수대가 있었다.
고려 의종 3년(1149년) 봉수대를 처음 쌓아 개축을 거듭했고, 왜적의 침입을 장흥의 억불산(510m)과 병영면 수인산(561m)으로 알렸던 곳이었다.
봉수대 정상에서는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하늘은 온통 검은 빛이어서 어제 보았던 다도해며 소록도의 모습은 도무지 찾아볼 길 없었다.
하물며 한라산의 모습을 보길 어찌 기대하랴. 연대봉 봉수대는 과거 한라산의 봉화를 내륙으로 연결하던 곳이라 전한다.
하여 날씨만 맑다면 한라산의 모습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역시 우리에겐 장날을 맞추는 재주가 없었던 모양이다.
금세 비라도 쏟아지지 않는 것이 다행일 정도로 하늘은 흐려졌고, 우리는 서둘러 하산길로 접어들어야 했다.
파도처럼 일렁대며 파도소리를 들려주던 억새밭을 뒤로 하고 장안사로 이어지는 능선길로 접어들었다.
여전히 능선에는 이러저러한 사연과 이름을 단 바위들이 나타났고, 다채로운 형상으로 등산로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정원석의 틈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쌓아놓은 작은 돌탑들이 또 무수했다.
작은 돌탑을 하나 만들며 작은 소망 하나를 기원했다.
“제발 가는 날이 장날 좀 되도록…”정원석을 지나면 나타나는 것은 양근암이다.
뒤에서 보면 전혀 연상이 되지 않지만 앞에서 보면 제법 위세가 그럴듯한 남근석이다.
건너편 능선의 금수굴과 비슷한 높이에 자리잡고 있어 그 음양의 조화가 제법 신비롭게 여겨졌다.
양근암을 지날 때 끝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서둘러 장천교로 내려서서 주차장까지 하산을 마쳤다.
그리고 돌아 본 천관산은 온통 검은 비구름에 휩싸여 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어제 천관산을 올랐다가 오늘 일찍 하산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정원석에서 돌탑을 쌓으며 기원한 장날이 한번은 들어맞은 셈이었다.
[산 정보]
전남 장흥군 관산읍과 대덕읍에 걸쳐있는 천관산(723m)은 예로부터 지리산·내장산·능가산·월출산과 더불어 호남의 5대 명산으로 손꼽히는 산이었다.
산 곳곳에 솟아난 암봉들이 천자의 면류관을 장식하는 옥석같다 하여 천관산이라 불렸다고 한다.
존재 위백규가 지은 <지제지>에서는 이 산의 옛이름을 지제산·천풍산·신산·불두산·우두산 등으로 적고 있다.
1998년 10월 13일 관산읍 천관사·장천재 일대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봄에는 장천재 일대의 동백 숲과 연대봉 능선의 진달래 군락이 아름다워 찾는 이들이 많고, 가을이면 정상 능선의 억새군락이 장관을 이뤄 수많은 등산인들이 찾는다.
해마다 10월에는 장흥산악회가 주관하는 억새제가 열린다.
13회째를 맞는 올 해 천관산억새축제는 9월 30일부터 10월 2일까지 3일간 열린다.
[산길정보]
천관산 산행은 대개 장천재, 천관사, 탑산사 등 3개 기점에서 시작된다.
이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장천재 주차장을 기점으로 삼는다.
▷장천재 주차장에서는 정상능선으로 올라가는 세 개의 등산로가 있어 원점회귀 산행이 가능하고 능선마다 기암괴석이 즐비해 산행이 지루하지 않다.
특히, 장천재를 거쳐 환희대에 오른 다음 연대봉 정상을 거쳐 하산하는 원점회귀 코스를 추천한다.
이 코스에는 능선상에 기암괴석이 즐비하고 조망이 시원해 잠시도 지루하거나 힘든 줄 모르고 산행을 마칠 수 있다.
어느 코스로든 2시간이면 정상능선에 오를 수 있다.
장천재주차장 주차요금 하루 2000원(승용차), 입장료 500원(어른).
▷탑산사를 기점으로 삼을 경우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정상능선까지 오를 수 있다.
이곳에서도 탑산암지와 구룡봉을 거쳐 환희대와 연대봉을 들러 불영봉으로 하산하는 원점회귀 산행이 가능하다.
산행 내내 남쪽으로 펼쳐지는 다도해의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탑산사 입구에는 작은 주차장이 있으며 입장료는 없다.
▷천관사를 기점으로 삼을 경우 환희대까지 호젓한 산행을 즐길 수 있지만 불편한 교통을 감수해야 한다.
▷ 이밖에도 천관산자연휴양림을 기점으로 지장봉 능선을 따라 오를 수도 있다.
※ 천관산 산행은 어디서 시작하든지 4시간 이내에 마칠 수 있다.
[볼거리]
천관산문학공원
천관산 남쪽 탑산사 바로 아래 위치한 천관산문학공원은 지난 2002년 1월 완공되었다.
한승원, 이청준, 송기숙, 이승우, 이대흠 등 이 고장 출신 문인들은 물론 구상, 안병욱, 김병익, 박범신, 차범석, 양귀자, 이호철 등 50여명의 유명 작가들의 육필원고를 바위에 새겨 모아 두었다.
탑산사를 기점으로 천관산 산행시 한번 둘러 볼만하다.
방촌유물전시관
관산읍 방촌리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마을 곳곳에 선사시대 유적인 고인돌이 남아있으며, 장흥 위씨의 고택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1993년 문화마을로 지정되었으며 문화유산 답사행렬이 끊이질 않고 있다.
2005년 9월 개관한 방촌유물전시관은 방촌리 일대의 유물을 총 4개의 전시실에서 전시하고있다.
농경과 주거, 음식과 복식문화, 놀이문화, 세시풍속 등의 각종 유물과 이 고장 출신 존재 위백규 선생의 여러 유물 등을 전시하고 있다.
장천재 입구 주차장에서 대덕방면으로 가는 23번 국도변에 있다.
입장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09:00~17:00(동절기), 09:00~18:00(하절기)
방촌유물전시관 061-860-0529
장천재
1978년 9월 전남유형문화재 제72호로 지정된 장천재(長川齋)는 조선 중종 때 강릉참봉 위보현이 장천동에 어머니를 위한 묘각을 짓고 승려로 하여금 이를 지키게 한 것이 그 유래가 되었다.
1659년(효종10) 사찰을 철거하고 재실을 창건하였으며, 1873년(고종 10) 현재의 형태로 중수하였다.
조선 후기 호남실학의 대가 존재 위백규(魏伯珪·1727∼98)가 이곳에서 수학하고 후배를 양성했다 하며, 여러 학자들이 시문을 교류했던 곳이라고 전한다.
현재도 장흥위씨 방촌계파의 제각으로서 이용된다.
장천재 앞 수령 600년의 태고송과 주변 동백숲이 볼만하다.
장천재 직전 풍호대에서는 정남진을 조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