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성경예언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박용진
밀러 이후의 재림운동의 열기
밀러는 성경 연구를 밤새도록 하였다. 겔 4:6에서의 하루에 대한 시간 해석을 일년으로 잡아 2300주야를
2300년으로 해석하여 BC 457년에 시작하여 끝나는 시간을 1843년으로 계산하였다. 성소의 정결은
세상 역사의 마지막 사건인 재림과 연결하였다.
밀러는 이에 대한 발견을 1818년에 만 2년 동안 연구하여 결론을 내렸다. 남은 기간이 25년 밖에
안 남았다. 그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초조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경고를 받아야만 하였다.
한 음성이 그에게 들려왔다. 너는 가서 세상에 말하라 였다. 그가 몇 년 동안을 그대로 지나쳤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평가하여 본다. 그는 마음이 한편 매우 두려웠다. 나중에 그는 기록하기를 내가 혹시나
잘못해서 어떤 사람들을 잘못으로 인도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그는 많은 반대들이 그의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수년간 연구 끝에 모든 의심들은 사라졌다. 다시 대중 앞에서 말을 함에 대하여 두려움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주님께 말하기를 나는 수집은 사람이며 필요한 자격을 지니지 못하였다고 실토하였다.
그는 그러면서도 지방교회에서 매우 활동적인 역할을 하여 나갔다. 죄인들의 회개에 깊은 관심을 가지며
저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확신을 같이 나누면서 편지를 나누곤 하였다.
그러나 설교하도록 하는 끊임없는 내부 안의 부르심에는 만족시킬 수가 없었다.
1831년 여름에 13년이란 긴 해를 꾸물거리던 때에 그의 영혼에 부담이 갑자기 억제할 수 없는 듯이 보였다.
그때에도 역시 가서 말하라는 음성이 들여온 것이다. 그가 읽던 성경을 쳐다보면서 하나님의 음성으로
깊게 고통을 받았다.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일까? 그는 의심 없이 그 것을 진단하여야만 하였다.
그는 책상에서 그의 주먹을 치면서 일어나 무릅을 꿇고 기도한다. “아닙니다. 하나님, 절대로 안 되요,
나는 설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오 주여, 나와 언약을 맺읍시다.
길을 주셔서 설교를 하도록 초대해주신다면 그때에 제가 가겠습니다.”
한편 그는 그렇게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 자위하며 만족한다.
내가 이제 50살이 된 농부인데, 누가 나에게 주의 오심을 설교하도록 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30분이 지났을까. 밖에서 그를 깨우는 녹크 소리가 들린다. 그는 정신 나간 듯이 아니
토요일 아침에 누구일까? 다시 문 소리가 들렸다. 내가 가서 무엇인지 보아야 하겠다고 하였다.
“윌리암, 아저씨” 라고
한 소년인 그의 조카가 부르면서 아침 인사를 건냈다.
이른 아침 16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말을 타고 달려온 것이다. 웬일이냐고 묻는다.
아저씨, 나의 교회 목사님이 내일 설교를 할 수가 없어서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이렇게 아침도 먹지 않고
삼촌을 모시러 왔습니다, 우리 교회에 오셔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설교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는 한 마디의 답변도 없이 돌아서서 부엌문을 통하여 질풍같이 밖으로 나가 숲으로 달려가 주님과
씨름을 한다. 그는 자신에 대하여 화를 내었다. 또한 하나님께 대하여 매우 두려워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그의 먼저 번 서약을 취소하여 대신 다른 사람을 보내어주기를 기도한다.
그는 고통스러운 눈물을 흘린 뒤 하나님 편에 서약을 한다. 이때에 행복함이 그의 영혼을 덮쳤다.
13년 동안 마음에 쌓였던 것들이 순간적으로 극복된 순간이었다. 기쁨의 순간을 맞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린다. 그는 뛰어오르면서 하나님께 크게 찬송을 돌린다. 그의 작은 딸은
집으로 달려오면서 엄마, 빨리 와 보세요 라고 보고하다. 그때에 밀러는 점심을 먹고 그의 조카와 함께
그가 전날에 싸움이 임하였던 장소를 경유하여 드레스덴으로 누이의 집으로 갔다.
그곳에 앉아서 성경 말씀을 편 것이 미국에서 최초로 재림운동을 알리게 된 시작이다.
밀러의 성경 연구는 대단하였고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의 진기한 호소로 드레스돈에 있는 사람들은
그에게 일주일 내내 밖에서 집회를 가지도록 강권하였다. 순식간에 마을에서 마을로 퍼졌다.
12 가정이나 한 주일에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와서 회개하였다. 그는 길드포트 가정에서 교회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그를 부르는 초대가 기다려졌다. 주께서 함께 하시는 언약이
입증된 것이다. 그가 목회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의 부르심은 예수님의 제자를 부르신 부르심과
똑 같은 것이었다.
그는 그후 감당할 수 없으리라 만큼 많은 초청들을 회중교회, 침례교회, 감리교회, 장로교회에서 받으며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옮겨다녔다. 그의 믿은 바를 알리기 위하여 자신의 비용으로 팜플렛을 만들어
사람들이 알고 싶어 하는 요구가 쇄도하였다. 그는 2년 후에는 지방 침례고회 목사로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
2년 뒤에는 예언에 관한 강사로서 자격을 받게 되어 많은 교회의 지도자 중에 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된다.
그가 설교하는 곳마다 회개와 부흥이 일어나고 마을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때에는 마을마다
불량자들이 많았었다. 떼를 지어 다니던 무리들이 있었다. 그런 자들로부터 많은 질문들을 받았다.
그럴 적마다 그는 침착하게 예수님의 정신을 발휘하여 답변하여 한 주일에 그의 기별을 받아드리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고 있었다. 그는 그의 생애 기간 동안에 500개의 도시를 다녔다.
그리하여 6,000여명의 회개자를 내었다. 그가 처음에는 주께서 길을 열어 주시면 가고자 하던 것이
많은 곳을 다니면서 쉴 사이 없이 바빴다. 1839년 가을에 Exeta예배 끝에 뉴 헴프샤에서
그의 생애의 판도를 바꾸게 하였던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죠수아 하임스였다.
그는 34세의 뉴 잉글란드에서의 명성 있는 노예, 알콜, 전쟁 금지에 대한 열렬한 투쟁가로 이름 있는
자였다. 그는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자 하던 차에
밀러의 2300주야에 대한 기별을 듣게 되었다. 집회가 끝났을 때에 그는 밝은 미소를 지으면서 밀러를
초대하면서 그의 보스톤의 챨톤 거리의 교회에서 설교를 부탁하였다. 그래서 1839년 12월에
첫 번 설교를 큰 도시에서 하게 되었다. 관심들이 너무도 크게 쇄도하였던 고로 하루에 두 번 씩
설교하고 수백명의 사람들이 돌아가야만 하였다. 하임즈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지구를 새롭게 하는 모든 잡다한 것을 그치게 하는 호소로서 군대를 지휘하는 사령관으로 그를 보았다.
그는 어느 날 그의 집에서 그를 상대로 물었다. 우리에게 설교하시는 것을 당신은 참으로 믿습니가?
그는 그렇다고 답하였다. 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설교할 까닭이 없지요. 당신은 어떻게 세상을
통하여 알리게 할 작정입니까? 그는 그의 시도를 얘기한다. 모든 도시와 마을을 나에게 초청을 보내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하임즈는 이 말에 아연질색을 하였다.
아니 작은 도시와 마을이라니요. 어느 도시를 말입니까? 그는 당시의 큰 도시들을 열거한다.
미국의 인구가 당시에 1,700만 명이었다. 저들 모두를 준비시키지 않은 채로 끝낸다는 말입니까?
그러면 나머지 세상은 어떻게 하고요?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믿는바 대로 수년 안에 오신다면,
저들에게 천둥소리로서 기별을 알려 준비하도록 할 것인바 시간이 없습니다.
그때 밀러는 하임즈 형제여, 나는 압니다. 그는 무겁게 답하기를 나는 늙은 농부요, 무엇을 내가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대중 설교를 잘 하지 못합니다. 그는 조용히 있고 싶습니다.
그는 탄식하면서 목사들이 나를 설교하도록 하고 회중을 모아온 곳에서 설교를 하여 오곤 하였는데
아직은 모든 곳을 못했습니다. 나는 도움을 바라고 있습니다. 하임즈는 마음에 불이 붙었다.
그는 그 짐을 자신에게 지우기로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제단 앞에 나아가 밀러를 도와서 세상 끝날까지
그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그는 밀러를 관리하는 도움자가 되었다. “그러면 밀러 씨
초청을 받으시면 도시로 가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면 가겠습니다.” 그러면 모임을 준비합시다
. 문이 열리어 질 것입니다. 모든 경고가 세상 끝까지 퍼져갈 것입니다. 하임즈는 약속을 굳게 지켜 나갔다.
그의 명성이 있는 터이라 큰 도시에서도 이름이 나 있었다.
하임즈는 자신이 속하여 있는 교파의 목사들에게 설득하여 많은 교회들로부터 설교를 하게 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10대였던 엘렌 화몬 양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곳이 포틀란드 마이네였다.
하임즈는 설교의 기회를 만드는 것 이외에도 많은 잡지들을 출판하였다. Signs of the times의 책자는
그가 시작한 것이다. 그는 1844년 10월 22일 실망 전까지 꾸준하게 이 일을 지속하면서 무려
800백 권의 재림주의자들에게 문헌들을 남겨 백성들을 깨우쳤다. 그 편지와 책들을 받기 위하여
우체국은 아우성으로 비볐다.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밀러의 기별은 날자에 대한 소동이 아니었다. 그의 기별은 첫째 천사의 기별이었다.
영원한 복음과 그의 심판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저들에게 주님을 만나게 하는 복음이었다.
1844년 가을까지 4만명의 새로운 신자들을 감리교회에서는 확보하고, 침례교회에서도 4만 5천명을
확보하였다. 일 주일 기간 동안에 지방교회들은 천 명씩 늘어났다. 포트란드 마이네에서는 한 방탕한
젊은이가 숨도 쉬지 않은 채로 홀로 뛰어들어 그의 친구들에게 말한다. 얘들아, 카스코 거리에 세상이
끝이 온다고 말하는 자가 왔다. 도박을 그치고 그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들어보라.
그래서 그 여파가 뉴 헴프샤로 종교적 부흥이 고조화되었다.
교회는 종소리가 매일 울려나고 매일 일요일처럼 기도로 메아리쳤다. 술집들은 모임의 장소로 둔갑하고
수백 명씩 회개하며 수 천 명의 사람들이 침례를 받는 것을 보려고 운집하였다. 많은 목사들이 이 일을
도왔다. 그 중에 죠수아 하임즈는 대표적인 한 사람이다. 또 한 사람이 있는데 죠시아 리츼이다.
그는 감리교 목사로서 밀러가 가르치는 사상이 저들의이론과 틀리지 않다고 보았다.
그는 200페이지의 책으로 밀러의 강연을 모아서 설교하였다. 또한 챨스 피치는 조합교회의 목사로
그를 도왔다. 그는 1843년 도표를 만들어 성경상의 예언이 1843년에 일치함을 나타냈으면
다니엘 2장의 열국의 나누어진 그림을 그렸다. 이 외에도 많은 지도자들이 함께 하였다.
함께 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 그리스도 연합교회의 목사였던 재임스 화잇이다.
또한 평신도로 죠셉 베이츠가 있다. 후에 목사가 된 분이다. 700명에서 2,000명이 저들을 돕는 자들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중에 174명의 알려진 목사들이 있는데 반은 감리교회 목사, 4분의 1은 침례교회
목사이며 나머지는 다른 교파로 형성되어 있다. 밀러가 단독으로 밀러 운동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합세하여 그를 받들고 하나님이 일으키신 그 운동에 합세한 것이다.
밀러주의란 이와 같이 그리스도가 중심된 많은 교회지도자에 의하여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때에 무신론자들, 자연신론자들, 종교하고는 상관이 없는 자들 기타 다수의 사람들이 호응을 하였다.
그 운동이 전 미국 판도를 뒤흔들었다.
그 해에는 이 세력을 저지하기 위한 운동도 있었다.
그러나 많은 교회에서는 사업를 위한 일련의 회의를 갖는 것으로 일관하였다 1840년 가을을
처음 계기로 20번 이상의 대총회의 모임이 각기 다른 장소에서 가진바 되어 두 달 석 달에 한 번꼴로
끊임없이 개최되었었다. 밀러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 동안에도 일련의 회합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밀러는 자신이 시작했던 운동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알았다. 이 일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회합은 1842년 캠프 미팅(야영 집회)로 변모하여 갔다. 이스트 킹톤,
뉴 헴프샤의 6월 28일 모임에 가졌던 그곳에는 7,000명에서 1만 명의 사람들이 땅에서 설교를 들었다.
그때에 보스톤 대일리 신문은 그때의 기사를 대서특필하였다. 야영 집회의 정겨운 장면을 시로
쓰는 사람들, 그때에 보여준 다니엘 2장의 그림, 계 13장의 짐승들의 그림, 그곳에 울려퍼지는 향기 등
저들의 열성적인 모습들은 잊을 수 없는 당시의 장면에 대한 수회였다.
한 장소에게서 아니라 여러 장소에 여러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남녀 노소, 지방에서부터 배를 타고 오는
사람들, 철도에 화물처럼 실려오는 사람들, 소달구지로 타고 오는 사람들, 걸어서 오는 사람들,
저들 모두가 손에 성경을 들고 오는 진기한 모습들이었다.
밀러는 더욱 더 큰 텐트의 필요성을 느꼈다. 접었다가 다시 펼 수 있는 대형 텐트를 준비하여
중심 기둥이 55피트, 직경이 120 피트로 4,000명이 자리할 수 있는 큰 텐트가 주문되어져서
어떤 때에는 한 달씩 개최가 되었다. 1843년 더 이상 잃어버려질 시간이 없다. 신문들이 배로
열차로 마차로 실려졌다.
대형 텐트가 마을에 쳐질 때마다 몇 사람들은 과연 채워질까 염려를 하기도 하였다.
일단 회합이 시작되면 체워졌다. 기차 시간도 군중들을 위하여 조정되어야 할 판국이었다
로체스터에서는 갑작스러운 돌풍으로 15자의 의자들이 대형 천막으로 떨어지는 일이 발생되었다.
사람들의 머리 위에 날아들었으나 아무런 사고는 생겨나지 않았다. 텐트를 뚫어 헤어진 곳을
고치기 위하여 각자 헌금을 냈다. 계속 그 모임은 이어져갔다.
이러는 동안에 일요일에는 하임즈는 어느날에는 8시간 동안에 32 그룹의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기도
하였다. 당시에 재림주의 성도들은 일요일에 저들의 교회에 나왔다. 그러다가 모임이 있을 때에는
같이 모여 기도하였다. 1842년 대총회 모임이 그해에 세 번의 야영 집회를 가졌다. 그리고
31번의 모임을, 1843년에 40회, 1844년 54회 모임을 가짐으로 도합 125회의 집회를 가졌다.
이 모임에 참여한 인원이 50만, 그 외에도 수만의 사람들이 다른 교회에서 빌려진 홀에 모였다.
하나님께서 첫째 천사의 기별은 이와 같이 해서 울려 퍼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어느 구석진 한 곳만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다. 세상을 향하여 전하도록 울려 퍼진 것들을 실감나게 하는 것들이다.
발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