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산골짝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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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단풍도 붉게 물든 어느 가을날, 나는 커다란 배낭을 메고 지리산을 낑낑대고 올랐다. 이 사서 하는 고생스런 방문의 대상은 지리산 피아골 산장의 산장지기 함태식씨다. 그는 지리산 언저리 구례에 태어나 평생을 지리산과 함께 해 그의 인생에서 지리산을 빼놓고는 이야기가 되지않는 경력 28년(1998年현재)의 베테랑 산장지기이자 산지킴이다.
그가 머물고 있는 피아골산장으로 가는동안은 평일인데도 등산객들이 많았다. 요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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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도 힘들고 가정도 힘들어 산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지리산의 단풍은 아름답기는 했지만 예년에 비해 늦더위와 이상기온으로 인해 빛이 바랜 단풍이었다. 내가 찾아뵌 시기는 함태식씨의 몸이 편치않을 때였다. 벌써 고희(70)를 지낸 그이지만 자그마한 체구에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 , '노고단 털보'라고 불리우게끔한 멋진 수염에 고동색 베레모와 색안경(선글라스)을 쓰고 감색의 광목옷을 입은 멋진 풍모를 갖 춘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
노고산장에서의 18년
그는 1928년 전라남도 구례에서 태어났다. 그의 말처럼 항상 지리산을 올려다보고 살았던 까닭일까. 그의 71년 삶중 지리산을 빼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친우들과 지 리산악회를 조직해 그 활동으로 지리산을 우리나라 국립공원 1호로 지정되게 했다. 그리고 그때까지만해도 산장이 없던 지리산에 노고산장을 짓게 한 것도 그가 활동했던 지리산악회다. 관리인이 없는 무인 산장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그는 그가 노고 산장을 지키기로 마음을 다진다. 그리고 그 이후로 지리산 노고단의 산장을 18년간(1998년 현재)지켜왔다.
국립공원의 노고산장 직영화로 거의 쫓겨나다시피 지금의 삶의 터전인 피아골로 물러나게 된다. 그 이후 지금까지 10년을 피아 골 산장에서 지내고 있다. 함태식씨가 노고단 산장에서 피아골 산장으로 쫓겨나다시피 옮겨왔던 1988년 1월4일. 무릎까지 빠질만큼 수북이 쌓인 눈위로 걸음걸음을 옮겨 피아골 산장에 도착했을 때까지 육체적인 고통보다도 마음의 쓰라림이 발걸음을 더욱 더 디게 만들었다. 61세의 나이에 유랑길에 오른 듯 자식을 사지에 떼놓고 떠나는듯했다고 한다.
피아골 산장에서 좌측으로 고개를 돌리면 흰덤봉이라는 봉우리가 보인다. 그가 허한 마음으로 산장에 도착해 눈쌓인 흰덤봉을 바라보면서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 '석양녘의 흰덤봉은 장관이었다. 불그스레한 기운을 띤 백설의 봉우리가 화사한 미소를 짓고서 나에게 손짓을 하는 것처럼 보였 다. 흰덤봉은 내 심정을 알고 있을까...' 1991년 지리산 왕시루봉에 있는 외국인 별장의 별장지기일도 맡아서 하다 지금은 피아골 산장에만 전념하고 있다.
그 분이 사는 곳은 아침볕이 눈부신 곳입니다
그가 머물고 있는 피아골 산장은 양쪽으로 계곡을 끼고 있는 지형에 자리잡고 있다. 그곳은 아침볕과 저녁볕이 아주 좋고 인상에 남는다. "이 나무를 한 번 찍어봐. 기가 맥혀." 내가 사진을 찍는다는 말에 손수 질매재쪽 계곡과 샘터 사이에 있는 붉은 단풍나무에 대한 설명을 해주시며 감탄을 연발하신다 . "이 나무가 어떻게 된건지 겨울이 되도 잎이 떨어지질 않아. 그대로 잎이 오그라들었다가 봄이되면 봄이슬을 맞고 다시 잎이 벌어져." 그 단풍나무는 아침나절에 가장 눈부시게 아름답다. 피아골 산장 전기의 에너지원은 태양열이다. 태양열을 이용해 조명의 에너지를 조달하기에 산장에서는 전기를 아낀다. 그래서 밤이 긴 겨울에는 밤이 더욱 길 수밖에 없다. 해가 일찍 지면 잠자리에 드는 시간도 빨라지는 셈이다.
그는 조미료가 들어간 음식은 먹지 않는다. 산장이 산중턱에 있는지라 무, 양파, 감자 등의 무거운 식료품의 운반이 어렵고 또 막상 산에 가져다 두면 보관이 어렵다. 보관방법은 그 식료품들을 살려두는 것. 그것들이 숨쉬도록 하는 것이다. 무를 보관할때 도 무의 머리부분을 뭉텅 잘라내면 무가 숨을 쉴 수가 없다고 한다. 모든 사물은 생명이 있다는 그의 말.
산에서 나와야 그 산이 보인다
산에서 나와야 그 산이 보인다고 했던가. 피아골 산장에서 항상 올려다 보기만하던 흰덤봉에 오를 기회가 있었다. 알고보니 흰덤봉은 '무늬만 봉우리'가 아닌가. 아래에서는 그렇게 높아 보이던 곳이 올라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맞은편에 더 높이 솟아있는 지리산의 능선들을 바라보며 정말로 산에서 나와야 그 산이 보인다는 말을 실감했다. 아름답게 물들었던 흰덤봉 못지않게 피아골 산장이 파묻힌 산도 아름다웠다. 내가 저 아래에 있을때는 저렇게 아름다운 속에 내가 있는 줄은 모르고 흰덤봉 을 매양 바라보며 부러워하기만 했었다니...
섭섭하게도 이 사람에게는 사람은 무엇으로 산다고 생각해요라고 물어보지 못했다. 나의 불찰이지만 그 비슷한 물음을 던 짐으로써 그의 마음을 살짝 엿볼수는 있지 않을까? 당신의 가치관은 무엇입니까라는 정중한(?) 물음에 그가 대답한 말을 가위질( 편집)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그대로 여기에 옮겨본다. "사람은 태어났으니까 살고, 사는 동안 편안하게 살아야 한다. 빈부의 차이가 없고 고루 상부상조하면 지구상에는 평화가 온다. 남에게 폐끼치지 않고 나보다 약한자를 돕고 살면 남북통일·세계평화는 온다. 살면서 멋을 부리고 사랑하는 것은 풍류요, 예술이다." 피아골 산장을 떠나는 날 그가 나의 손에 쥐어준 작은 종이에는 이런 말들이 씌여있었다. 그리고, 무애막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걸려있는 '세계평화'라고 씌어진 작은 팻말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사람,사람,사람
며칠안되는 짧은 기간동안 한 인간을 안다는 것은 상당히 무리가 있다. 그러나 그 기간동안 온몸의 촉각을 곤두세우고 얻어낸 것이라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사기'를 쓴 사마천은 젊은 시절에 하루도 쉬는 일이 없이 여행을 했다. 그의 여행은 경물을 구경하는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장차 천하의 대관(大觀)을 보고 얻어 자신의 기(氣)를 조장하려는데 있었다. 그의 자그마한 체구가 커보이는 것은 지리산에 살아서 그 세월동안 그 웅대한 기상을 닮은 까닭이다. 지리산을 닮아가는 그는 지리산으로부터 이어받은 자신의 기를 조장해 자연보호와 산을 타는 사람들을 위해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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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피아골산장은 지나치기만 했는데...다음에는 꼭 한번 묵어가고 싶군요지리산을 닮은 사람과 정겨운 대화도 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을 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