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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담! 그와 나는 송광사에서 행자 시절에 만났다. 그는 카투사를 제대한지 한 달이 채 안 됐고, 나는 군대에 가기 전이었다. 서울공대생답게 그는 확실히 수재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송광사에서는 행자 때에 <초발심자경문>과 <사미율의> 같은 기본 과정을 가르쳤는데, 그는 이미 배운 것처럼 잘 이해하고 한문에도 밝았다. 그렇게 행자실에서 몇 달을 보낸 가을의 초입이었을 것이다. 도량석에 기상을 하자 그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날 낮 그의 책상 서랍에서 발견된 메모는 이랬다. " 출가위승(出家爲僧)이 수계위승(受戒爲僧)에 있지 않다. 스승을 찾아 떠난다." 그 느낌이 너무 강렬하여 그가 마치 어느 별천지의 초인처럼 느껴졌다.
내가 군 제대를 한 다음해부터 우리는 지리산 칠불암을 시작으로 여러 해를 같이 선방마다 붙어 다니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그는 특이한 정신의 소유자였고, 사물에 대한 인식과 용심(用心)도 남달랐다. 대학 때는 야학 선생도 했고 카투사에 있을 때에는 시간을 아껴 많은 책을 봤다고 했다. 그는 선천적으로 심장질환을 갖고 있어서 대학 때 미국 평화봉사단의 도움으로 미국에 가서 대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1990년 초에 지금 송광사에 있는 유나 현묵스님, 파계사 보설, 고운사 호성, 백양사 석장 등, 10여 명이 지리산 칠불암에서 3년 결사를 시작했는데 그때 병이 다시 재발했다. 진주의 청년 불자 15명의 수혈을 연달아 받아가며 대수술이 집도되었다. 같이 결사에 들어갔던, 지금 대구 삼보사 주지로 있는 등운스님은 일생일대의 결사를 파하면서까지 병간호를 했다. 그 후, 생사의 기로를 넘나든 그는 한결 성숙된 수행자의 기품을 보여주었다. 그때 그가 보내준 엽서를 나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11세기 티베트의 성자 밀라레파는 제자인 감포파에게 자신이 배운 것을 전수하는 자리에서 제자 주위를 한 바퀴 돌고는 자신의 가사를 들어 올려 등을 보이며 물었다. " 이것이 보이느냐?" 밀라레파의 등에 난 수많은 상처를 보고 놀라는 제자에게 그는 다시 말했다. "이것이 깨달음에 이른 방법이다. 쉼 없이 좌선하고 명상했기 때문이다. 너도 나와 같이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이 같은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가르침이다."
목욕탕에서 그의 마른 가슴을 질러 난 큰 수술 자국을 볼 때마다 나는 밀라레파를 떠올렸다. 1990년대 말, 등운스님과 함께 티베트의 카일라스로 순례하러 간다고 했을 때, "괜찮겠냐?"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은 날 버리지 않을 것이야." 그는 그런 사람이다. 지금은 외국의 한 무문관에서 3년 결사 중인 그는 시종 여여부동하다. 옥이 묻혀 있는 산은 다르다 했던가. 안과 밖이 한결같은 수행자. 원담과 같이 살아본 사람은 이 말이 과장이 아님을 안다. 그가 사자후를 토할 날을 기대해본다. ㅡ 보경스님의 저서 '사는 즐거움' 에 수록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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