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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부리성(정읍)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북쪽에 위치한 해발 133m의 성황산의 정상을 성곽으로 둘러 감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으로 형태는 북서-남동 방향으로 길게 뻗은 반달모양이다.
말안장과 같이 양쪽이 높고 가운데가 낮은 지형의 바깥쪽으로 성벽을 둘렀다. 이와 같은 형태의 백
제 산성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으며, 사방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
다.
백제가 부여(사비)에 도읍을 두었던 6세기 무렵에 지방을 5개 구역으로 나누어 다스릴 때 쌓은 5
방 중 하나인 중방으로 고사성이라고 불렀다.
전라북도 고부 지역의 정치 · 군사의 중심지로 활용하기 위해 처음 쌓았다.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
대를 거쳐 조선 영조 40년(1764)까지 고을을 다스리는 중심성곽(치소)으로 여러 차례 성벽을 고쳐
서 사용하였다.
성벽의 길이는 1,055m, 긴 쪽의 길이가 418m, 짧은 쪽의 길이 200m이며 면적은 63,484m2이다.
부속시설물로는 백제~조선시대의 성문지 3개소와 돌로 쌓은 물을 저장하는 우물 1개소, 조선시대
의 건물지 12동 등의 건물 유적과 기와 · 토기 · 자기류 등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었다.
관기 산성 (전북 관기리)
불명확
교룡 산성 (남원시)
전라북도 남원시 산곡동 16-1해발 518m인 험준한 교룡산(蛟龍山)의 의지하여 축조된 석축산성
(石築山城)으로 둘레가 3,120m이다. 현재 동문의 홍예(虹예)와 옹성(甕城) 그리고 산중턱의 성벽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남원은 백제 때 고룡군(古龍郡)이라 불렀다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 등 사서에 보이는 교룡(蛟龍)·거
물(居勿)·기문(基汶) 등의 명칭이 모두 고룡의 전사(轉寫)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산성이 백제 시대
에 쌓았다고 확증할 수는 없다. 다만 조선 초기에 이미 군창(軍倉)이 있었다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
實錄地理志)의 기록을 보면 그 연혁은 조선 초기 이전으로 소급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남원부(南原府) 산천조(山川條)〉에도 교룡산성이 남원부 서쪽 7
리에 있다는 기사가 보인다.
금구 산성 (김제시)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월전리와 선암리에 걸쳐있는 백제시대의 성터로 금구면에서 동쪽으로 2k
m쯤 떨어진 해발 250m 정도 되는 봉두산(鳳頭山)의 정상부를 에워싸고 있으며, 이 봉두산이 옛 금
구현(金溝縣)의 진산이다.
남쪽으로는 벼락바위라는 암반이 험준하게 드러나 있고, 암벽이 3m 이상의 절벽을 이룬 정상을 따
라 외연(外緣)으로 토루상의 성벽이 있고, 동남으로 잘록한 안부(鞍部)로는 석축된 성벽이 3m의 높
이로 약 100여m가 잘 남아 있어서 본래 토축이었으나, 석축으로 개축된 듯하다.
북향한 완경사를 이용하고, 동쪽의 완만한 평탄 대지에 우물이 있다. 정상에서 성벽 안쪽을 따라
내환도(內環道)처럼 성벽이 이어져 있으며, 백제시대에 축조되어 후대까지 금구의 읍 뒤에 있는 산
성이 남아있다.
남고 산성 (전주시)
전북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완산구 동서학동의 고덕산 서북쪽 골짜기를 에워싼 둘레 약 5,300m
의 성으로, 전주에서 남원, 순창으로 통하는 교통상의 요지를 좌우로 지키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성문과 장대 등의 방어시설터가 남아 있다.
이 성은 901년에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도성의 방어를 위하여 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입을 받았으나 이곳에서 끝까지 대항하였다 한다.
현존하는 성벽은 임진왜란 때 전주부윤 이정란(李廷鸞)이 이곳에 근거하여 왜군을 막을 때 수축하
였다. 그 뒤 1811년(순조 11)에 관찰사 이상황(李相璜)이 증축하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박윤수(朴崙
壽)가 관찰사로 부임하여 완성하였다고 한다.
서쪽에는 암문이 하나 있었고, 동서남북에 각각 하나씩 포루가 있었다. 남아 있는 북문터는 석축만
있는데, 너비 3.4m, 높이 1.2m이며, 세 봉우리에는 각각 10㎡의 장대지가 있다. 현재 성 안에는 남
고사·관성묘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낭산 산성 (익산시)
전라북도 익산시 낭산면 낭산리에 있는 옛 낭산현의 성터로 해발 160m의 낭산(郎山)에서 가장 높
은 봉우리인 선인봉에 서향의 경사면을 에워싼 석축 산성으로, 속칭 ‘마한성(馬韓城)’이라고도 하고,
‘구성(舊城)’이라고도 한다.
둘레가 약 870m로 남쪽의 미륵산성과 축조한 방식이 유사하다. 뿐만 아니라 출토되는 토기와 기
와조각도 유사하여, 부근의 석천대가 마한기준왕(簊準王)이 놀던 곳이라는 전설과 함께 마한의 유적
으로 여기고 있다.
지리지에는 마한성(馬韓城)이 낭산 위에 있는데 석축이며, 둘레가 1,306척이고 높이가 9척쯤이라
하였다.
두승 산성 (정읍시)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장문리·남복리·입석리 일대에 있는 두승산(斗升山, 443.6m)의 서쪽 골짜
기를 감싼 포곡형(包谷形) 산성이다.
고려 시대의 산성으로 지정면적이1,216,392㎡, 둘레 50,524m로 현재 문지(門址)·수구문(水口門)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두승산에 옛 석성이 있는데 둘레는 1만 812척으로 큰 골짜기에 걸쳐 있으며
영주(瀛州) 때의 옛 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문헌비고』에는 삼한시대의 석축이라고 되어
있지만 산성 내에서 채집된 기왓조각·토기조각은 대부분이 고려 시대의 것이다.
영주라는 명칭은 936년(태조 19)에 개명한 것이므로 고려 초에 관찰사를 두면서 쌓은 것으로 여겨
진다.
그러나 성곽의 북서편에 있는 유선암(遊仙庵) 일대에서는 백제토기조각 등이 발견되고 있어 백제
시대 중방고사부리성(中方古沙夫里城)의 남방을 막는 작은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산성의 구조는 수구에 서문을 설치하고, 동남면에 남문지(南門池)가 있다. 현재 석축의 대부분이
무너졌고 간혹 석벽원형이 남아 있다.
미륵산성(익산시)
전 북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높이 430m의 미륵산 동사면을 감은 산성으로, 지금은 성문터·수구문·
옹성·장대터·건물터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성벽은 할석을 이용하여 내외협축, 즉 속을 단단히 다지
고 겉을 쌓은 흔적이 보이며, 높이는 4m 정도의 삼국시대에 축조된 포곡식 산성이다.
최고봉과 수구까지의 거리는 210m인데, 수구 남쪽에 있는 동문터는 옹성을 ㄷ자형으로 둘렀고,
성문 안에는 양쪽에 돌출부가 있다. 성문 너비는 4.3m이며, 성곽이 직선을 이루는 곳에는 간간이 치
성이 돌출되어 있다. 동변은 양 우각과 동문 좌우에 모두 4개의 치성이 있고, 남변에는 4개소, 서변
에는 3개소, 북변에도 1개소가 있다. 서남부에 있는 최고봉은 평탄하여 장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
된다.
이 성 안에서는 ‘金馬渚(금마저)’라고 새겨진 백제의 기왓조각과 토기 조각 등이 발견되었으며, 동
문 안 건물지에서는 고려와 조선조의 기와편도 발견되었다. 이로써 그 축조연대와 이용된 시기를 알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이 산성은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이라고 전하는 준왕이 쌓은 성이라 하여 ‘기
준성’이라는 칭하기도 하지만, 백제시대에 처음 쌓은 것으로 보이며, 동문지 일대의 치성·옹성 등의
시설은 후대에 수축한 것이다.
반양리 산성 (서산시)
백산 산성 (정읍)
전라북도 정읍시 옹동면 산성리와 신태인읍 백산리 백산에 있는 산성이다.
옹동면 산성리는 이 산성으로 인하여 생긴 지명이곳의 성은 동서 방향으로 나란히 솟은 두 개의
높은 봉우리 능선을 따라 돌로 축조한 석성(石城)으로, 성곽의 둘레 670m, 높이 2~4m에 이르는 테
뫼 산성이지만 지금은 거의 붕괴된 상태이다.
신태인읍 백산리에 있는 성곽은 북변의 길이는 259.5m이고, 동변은 삼각형으로 좁아지며, 남변은
거의 직선으로 축조되었다. 성 안쪽의 폭은 255m, 최대 길이는 126m이며, 남문과 북문의 터 그리고
우물터를 확인할 수 있다.
삼국시대의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의 산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
다
백산(栢山, 107m)의 산봉우리를 이중으로 감싼 테뫼식 산성으로, 현재 훼손이 심하여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토성(土城)인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시대에 축조하여 고려시대까지 유지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고려 인의현(仁義縣)의 읍성으
로 보는 견해도 있다.
외성(外城)은 둘레 713m, 성곽 높이 4~5m이고, 내성(內城)의 둘레는 469m이다. 성 안쪽은 평탄
한 지형으로, 밭으로 개간된 곳도 있으며 우물과 성문의 흔적도 확인할 수 있다.
백산 산성 (부안군)
부모 산성 (청주시)
충북으로 사료됨
부선산성
비홍 산성 (남원시)
전라북도 남원시 대산면 신계리와 순창군 동계면의 경계지점에 풍악산 능선에 해당되는 응치(해발
고도 580m)라는 고개가 있다. 응치는 예전에 남원과 순창을 이어주는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었는데
이 고개의 북쪽에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석성(石城)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남원 서매리 산성과 함께 비홍산성(飛鴻山城,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74호)의 지성(枝城; 원래의
성 밖에 따로 지은 작은 성)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위치상 순창 쪽에서 일어날 수 있는 환란에 대
비하여 축조한 것으로 보며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산 산성 (고창군)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봉덕리동·서·남의 3면에 하천을 끼고 있는 백제시대의 테뫼식 석성(石城)
으로, 둘레는 약 730m, 성내 면적은 3만 5703㎡이다. 고창읍에서 북서쪽으로 약 6㎞ 거리에 있는
석치마을의 뒷산 섬틀봉(해발고도 150.3m) 꼭대기에 있다.
북동변에 성벽 높이 3m 정도만이 원형대로 남아 있을 뿐 거의가 붕괴되었으나, 자연석으로 튼튼하
게 쌓은 흔적은 찾아볼 수 있다. 북동쪽 모퉁이에는 남북으로 뻗어올라간 성벽에서 직각으로 돌출된
치성(雉城:전방과 좌우 방향에서 접근하는 적과 성벽에 붙은 적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이 있으며, 산
정상에는 계단식 건물터가 남아 있다. 주변에서는 약간의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이 수습되었고, 우
물터나 성문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축성법이나 입지로 보아 백제시대의 산성으로 추정되지만 당시의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없고,
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대동지지(大東地志) 등 조선 중기 이후의
문헌에만 언급되어 있다.
성미 산성 (임실군)
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 덕천리의 성미산(430m)을 중심으로 좁은 정삼각형 형태로 축성하였으며,
둘레는 약 518m이다.
신라와 백제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6~7세기에 소백산맥을 경계로 하는 주 저항선에 대해 진안·임
실·남원을 잇는 제2방어선 성격을 가진다.
〈신라 본기〉에는 이곳에서 신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8년(661) 두량이성과 정읍 태인에서 백
제군 2,000명의 목을 베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성미산성 주위에는 대리산성(신령면 대리), 방
현리산성(관촌면 방현리)이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6~7세기에 걸쳐 신라와 백제의 격전
지임을 알 수 있고,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장소이다. 우물터가 발견되었으며, 토기 파편들과 삼국사
기백제 본기에 무왕(武王) 6년(605) 2월에 축성하였다고 기록으로 미루어 백제시대에 조성된 설일
것이다.
성시리 산성 (남원시)
전라북도 남원시 보절면 성시리와 장수군 산서면의 경계 지역인 해발 400m 정도의 성산 북쪽의
산 정상에 있으며, 산서면의 봉서리 쪽이 성곽의 중심을 이룬다. 이 산성의 동쪽으로는 노령산맥과
소백산맥의 본간이 이어져 있으며, 백두대간 능선에는 아막산성과 그 동쪽에 성산산성이 있어서 남
원의 외곽을 막아주고 있다.
성은 테뫼식 산성이며 형식은 포곡식 산성이다. 축성은 판상 할석을 사용한 협축, 내탁법이 이용되
었으며 성의 외곽으로는 가파른 능선이 있어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외곽 방어선을 마련한 것으로 판
단된다.
성의 둘레는 350m 정도이며, 비탈을 깎아 쌓아올린 내탁면의 성벽 높이가 8.8m에 이르는 곳도 있
다.
성벽은 서쪽 부분이 잘 남아 있으며, 근래에 많이 붕괴되었다. 성내에는 조계종 사찰인 영월암(映
月庵)이 자리하고 있다. 내부의 부속 시설로는 문지·치성·우물·망대·암문 등이 확인되고 있다.
성벽의 상면부에서 삼국시대의 기와편이 출토되었고, 동문 터에서는 토기편도 다량 출토된것을 분
석해 보면 삼국시대의 성일 것이다.
아막 산성 (남원시)
어래 산성 (군산시)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 입점리(笠店里)에 있는 삼국시대의 성터로 군산시 나포(羅浦)와 익산시
웅포(熊浦)의 경계지점에 있는 어래산(御來山:해발 180.4m) 봉우리 동쪽 능선과 서쪽 비탈면을 감
싼 테머리식 토성이다.
내탁(內托) 및 협축공법(夾築工法:성을 쌓을 때 중간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에서 돌을 쌓는 방
법)으로 쌓은 토성이며 성벽이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다. 둘레 150m 정도 되는 소규모 토성
이며, 남문터와 동문터가 남아 있고 성 바깥에는 너비 2~3m의 회랑이 5m 정도 남아 있다. 일설에는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정벌할 때 쌓은 성이라고 하지만 주변의 함라산성(咸羅山城) 및 도
청산성(둘레 300m) 등과 함께 백제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남북으로 1.5㎞ 거리를 두고 능선으로 이어진 도청산(해발 179m)과는 같은 산줄기에 있으며, 정상
의 도청산성 사이로 지나가는 어래재와 금강변을 방어하는 것이 주임무였다. 특히 마한시대와 삼국
시대를 거치며 금강이 백제의 관문이 된 이후 요충지로서 더욱 중요해졌고, 왜구의 침탈이 잦은 시
기에는 금강을 따라 오르는 왜구가 내륙에 닿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주방어선이었을 것으로 짐작된
다.
어래·도청 두 산성의 서남쪽에는 불지산 봉수대가 금강 하구를 지키고 서북쪽에는 함라산맥(咸羅
山脈)의 소방산(所方山) 봉수대가 있어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지표조사 결과 백제
시대 토기조각 등이 수습되었으며, 인근 익산 입점리 고분(益山笠店里古墳:사적 347)과 관련이 있는
성곽으로 추정된다.
오금 산성 (전북 익산시)
불명확
용계 산성 (완주군)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금당리에 있으며 운주면 소재지에서 용계천을 따라 남쪽으로 약 4㎞ 정도
떨어진 천등산에서 뻗어내린 산줄기를 두른 석성으로, 둘레는 약 493m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고산고적조(高山古蹟條)’와 <문헌비고(文獻備考)> ‘고산조(高山
條)’에 백제시대에 쌓은 성으로 둘레 1,014척, 높이 10척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ㄷ자형으로 쌓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인데 절벽을 이루는 동벽은 능선을 따라 외벽만 쌓고, 다른
쪽은 내외를 쌓은 협축(夾築)이다. 남벽은 잡석으로 쌓았으며 높이는 내벽 2.2m, 외벽 4m, 폭 4.3m
안팎이다.
남동쪽 모서리에는 우루대(隅樓臺)가 있고 서벽에는 수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성 안에는 건물 터
가 남아 있는데, 이곳에서는 돗자리무늬를 새긴 백제시대 기와와 토기조각들을 분석해 보면 삼국시
대에 축주한 성르로 사료된다.
현재는 인적이 잘 닿지 않는 골짜기이지만 백제시대에는 육십령고개를 거쳐 신라땅으로 가는 군사
적 요로였다고 한다.
우금 산성 (부안군)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 산성으로 부안읍에서 남쪽으로 약 10㎞ 떨어진 개암사(開
巖寺) 뒷산에 있는데, 현재 수구(水口) 등 시설과 석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남변의 길이는 수구에서 동측선이 563m, 울금바위까지의 서측선은 675m, 계 1,238m에 이르며,
동변은 1,010m, 북변은 830m, 서변은 838m로서, 전체의 평면은 북변이 좁고 남변이 넓은 모양이
다.
성벽은 약간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그대로 쓰기도 하였다. 이 산성은 백제 멸망 후 일본에 인질로
가 있던 부여 풍(扶餘豐)을 받들어 최후의 항전을 벌였던 주류성(周留城)에 비정됨으로써 그러한 사
실의 줄거리가 후세에 와전되기도 하였다.
근세에는 김유신(金庾信)의 후손을 자처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소정방(蘇定方)과 김유신이 만났다
는 위금암이 우금단이 되고, 소래사가 내소사로 글자가 바뀐 결과를 가져왔으나, 이 곳은 복신(福信)
등의 백제부흥군이 최후까지 충혈을 뿌린 유적지이다.
본래 위금산성(位金山城)이라는 기록은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처음 보이는바 이에 의하면 신라의
장군 위금이라는 사람이 성을 쌓고 적을 막았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되어 있다. 또한, 《문헌비고》에는 우진(禹陳)이라는 고성은 삼한시대에 우(禹)·진(陳) 두 장군이 성을 쌓고 주둔하
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덕리 산성 (정읍시)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우덕리 일대에 있는 성터로 우덕리와 신월리의 경계를 이룬 해발 101m의
시루봉에 있다.
시루봉은 남북으로 132m의 거리를 두고 두 개의 봉우리가 있으며, 이 두 개의 봉우리와 중간의 말
안장 모양의 안부(鞍部)를 포함하여 테뫼식(산 정상을 둘러 쌓은 성)의 석축 산성을 만들어 전체의
둘레가 약 415m이다.
남북의 길이 약 180m, 북쪽에서의 너비 37m, 남쪽에서의 너비 45m, 중간의 너비 27m로서 평면
은 누에고치 모양을 이룬다. 성벽은 무너져서 안쪽에 내환도(內環道)의 형태를 둔 토루이나, 동남쪽
으로 석축의 축조된 흔적이 잇다.
성의 북쪽끝과 안부(鞍部)의 서측에 문터의 흔적으로 보이는 곳이 있다. 이 산성은 백제시대에 축
조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임진왜란 때와 동학 농민전쟁 시기에 격전이 벌어졌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운주 산성 (전북 연기군)
세종시?
위봉 산성 (완주군)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에 있으며 1407년(태종 7)에 축성하여 1675년(숙종 1)에 중수하였
는데, 태조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하여 축성하였다.
1675년(숙중1)에 축성하고, 1808년(순종8)에 관찰사 이상황(李相璜)이 중수하였다.
유사시에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있는 태조의 영정과 시조의 위패를를 봉안하기 위한 것으로 동학
농민운동 때 전주부성(全州府城)이 동학군에 의해 함락되자 태조의 영정과 시조의 위패를 피난시킨
일이 있다.
당시의 규모는 너비 3m, 높이 4~5m, 길이 16㎞이며, 서·동·북 3개 소의 성문과 8개의 암문이 있었
고, 성 안에는 4~5개의 우물과 9개의 못을 팠다. 지금은 성벽 일부와 전주로 통하는 서문만이 남아
있는데, 문 위에 있던 3칸의 문루(門樓)는 붕괴되어 없어지고 높이 3m, 너비 3m의 아치형 석문만 남
아 있다.
전주 8경의 하나로 성 안에는 위봉사가 있고, 북방수구처에는 위봉폭포가 있다.
익산 토성
낭산산성과 겹침
장수합미성(장수군)
00
전라북도 무주군 장수읍 해발 800m의 산능선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 산성이다.
합미성이란 이름은 후백제 때 성에 주둔한 군사들이 먹을 식량을 모았다하여 붙여진 것이라 하는데, 당시 군사들이 쓸 물을 땅속으로 보내던 수로관 시설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성의 둘레는 970척(320m)이며, 높이는 바깥쪽이 15척(4.6m), 안쪽이 5척(1.6m)이다. 현재 대부분의 성벽은 무너져 내린 상태이며, 다만 북서쪽과 남쪽의 일부 성벽만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다.
이 수군(守軍)터는 와전되어 오늘날에는 쑤구머리로 전해지고 있다. 성터에서 3㎞쯤 떨어진 곳에 신무산이 있는데, 이곳에 허수아비로 군사를 만들어 적군이 합미성으로 오지 않고, 신무산으로 유인하여 적을 무찔렀다고 한다. 지금도 성터가 남아있으며,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땅속을 파보면 불탄 쌀이 나왔다고 전해진다.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면 대성리에 후백제 시기의 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성리 북방의 해발 1,013m 고지와 잣고개 혹은 차고개라 부르는 고개의 사이 기슭에 있다.
둘레가 약 320m이고 높이는 바깥쪽이 약 5m. 안쪽으로는 약 1.5m이다. 후삼국시대에 군량미를 이곳에 모아 놓았다고 하여 합미성이라 한다고 한다.
이곳에 주둔하던 군사들이 마실 물을 지하로 급수하던 것이라는 수로관 시설이 작은 연못과 함께 흔적을 남기고 있으며, 이곳에서 3㎞쯤 떨어진 곳에 신무산(神無山)이 있다.
신무산에 허수아비로 군사를 만들어 적군이 합미성으로 오지 못하도록 유인하여 무찔렀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성 안에 쌓아두었던 쌀이 불탄 때문에 성안을 파면 불에 탄 쌀이 나왔다고 한다.
적상 산성 (무주군)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적상산은 신라와 백제가 각축을 벌였던 요지로서, 고려시대 거란
족이 침입했을 때 인근 수십 군현의 백성들이 도륙되었는데도 이곳 사람들은 안전하였으므로 그 후
최영(崔瑩)이 산성쌓기를 상주한 일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여지승람(輿地勝覽)》 <고적조(古蹟條)>에는 고성의 “석축 둘레는 1만 6,920자, 높
이가 7자였는데,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세종 때는 체찰사(體察使) 최윤덕(崔潤德)이 폐허가 된 이곳을 답사하고, 반드시 산성을 쌓고
보존해야 할 곳이라고 건의한 일이 있었으므로 지금의 성터는 세종 때나 그 후에 축조된 것으로 보
이며 처음 축조된 것은 고려시대로 추측된다.
1612년(광해군 4) 이곳에 실록전(實錄殿)이 세워졌고, 1614년에는 사각(史閣)이 세워짐으로써 조선시대의 5대 사고(史庫)의 하나가 되었다.
또 1641년(인조 19)에는 선원각(璿源閣) ·군기고(軍器庫) ·대장관(大將館)이 건립되었다. 이 밖에
상원사(上元寺) ·중원사(中元寺) ·호국사(護國寺) 등이 있어 별장(別將) ·참봉 ·승장(僧將)들이 지켰
다.
지금은 성벽이 무너져 울창한 숲 사이로 그 모습을 엿볼 수 있을 뿐 사각과 건물들은 터전만 남아
있다.
척문리 산성 (남원시)
전라북도 남원시 이백면 척문리에 있는 계곡과 산정을 함께 두른 포곡식(包谷式) 성으로, 산성이 있
는 산봉은 동쪽에서 뻗어내려 서남쪽을 향한 수구를 가진 골짜기를 감은 것인데 석축으로 되어 있
다.
가장 높은 곳은 해발 170m, 비고(比高) 50m 내외이다. 성의 둘레는 567m, 동서 길이 182m, 남북
길이 120m, 성내면적은 1만5523㎡에 이른다.
안으로 굽은 수구(水口)면은 길이 21m, 높이 8m의 석축을 쌓았다. 수구에서 서북 우각까지는 성벽
을 이중으로 쌓고, 가운데에 공호(空濠 : 물이 마른 못)를 설치하였다. 북변은 거의 직선을 이루는데,
요천(蓼川)변은 급준한 경사를 이루며 높이 9m의 견고한 석벽을 쌓았다.
북변을 따라 너비 11∼18m의 대지가 있는데 상성(上城)에 해당한다. 동북변에는 북문지가 있으며
수구의 남문지와 연결하는 통로가 있다. 남변은 돌로 쌓았는데 성 안에 너비 6∼10m의 회랑도가 설
치되었으며 최고봉은 동남 우각에 있는데 평탄한 장대지(將臺址)가 있다.
성내 수구 안은 통로 서쪽에 너비 30m 내외의 평지가 있고, 기와와 토기편이 퇴적되어 있다. 토기
편은 백제계 도질토기 또는 적색연질토기로서 삼족배(三足坏)·외반구호(外反口壺)·개배(蓋坏)·광구
호(廣口壺)·직립호(直立壺) 등이 있고, 승석문(繩蓆文 : 삿무늬)이 찍힌 백제 기와가 많기 때문에 삼
국시대에 만든 성일 것이다.
천호 산성 (익산시)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 익산에서 가장 높은 천호산(해발고도 500m)의 주봉을 감싸며 쌓
은 테뫼식 석성이다.
성곽의 둘레는 669m이며, 성벽의 높이는 2.5m 이상 남아 있는 부분도 있다. 대체로 성의 전체 윤
곽은 뚜렷이 남아 있다.
축조 방법을 살펴볼 수 있을 만큼 상태가 좋은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의 성벽이 무너질 위험에 처
해 있을 뿐 아니라 산봉우리에 군사시설과 민묘가 조성되어 있어 보호가 필요하다.
기록이 없어 성의 내력을 알 수 없지만, 성곽 주변에서 백제시대의 막새기와와 토기 조각들이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 백제시대 성곽으로 추정된다.
침령 산성 (장수군)
전라북도 장수군 계남면 침곡리에 위치하며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접경구역에 있었던 성으로,
신라와의 분쟁시기에 쌓은 백제의 전방기지로 추정된다. 침곡리와 천천면 춘송리의 경계를 이루며
남북으로 길게 뻗은 법화산 정상의 양쪽 골짜기를 막고 동쪽으로 노출된 산봉우리를 따라 할석과 자
연석으로 쌓았다.
전체길이 420m, 동서너비 약 170m, 남북 최대너비 약 140m이다. 성벽은 남쪽과 북쪽을 빼고는
대부분 무너져 내린 상태이며, 남아 있는 성벽은 길이 7m, 높이 약 6.25m이다.
합미 산성 (장수군)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 신학리 하신마을 뒷산인 성재산(200m)에 있는 테뫼식 산성(머리띠를 두
르듯 산 정상부를 둘러쌓은 산성)이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신유산성(辛有山城) 또는 합미산성(合米山城)이라 부른다. 산 정상과
중복에 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 약 300간이며 기와편이 산재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주민들은
이곳을 할미성이라고 부른다.
성 안에서 수습된 토기편과 기와편 등의 유물과 남쪽으로 약 2.5㎞ 떨어진 이평리 평산마을의 석실
분 등으로 볼 때 삼국시대에 초축된 후 조선시대까지 사용된 산성으로 보인다.
산성 둘레는 약 380m이며, 평면은 남북 장축의 타원형, 단면은 전체적으로 사다리꼴을 이룬다.
현재 남벽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붕괴되었는데 남벽의 경우 바깥쪽 성벽은 55~65×25㎝ 크기
의 잘 다듬은 장방형 석재로 수평을 유지하면서 쌓았고, 그 안쪽은 잡석으로 채운 뒤 흙을 덮었다. 4
5×30m 크기의 건물지(建物址)와 12×12m의 건물지 2개소가 확인되었다.
혜미산성
충청도?
홀어머니 산성 (순창군)
전라북도 순창군 백산리의 마을이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1.5km 떨어진 대모산 위에 있는 대모산
성 또는 백산리산성이라고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대모(大母)산성이라고 칭하며 석축으로
되어 있고 둘레는 780자이며, 높이가 26자다. 백제시대의 옛 산성터로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까지
군량미를 비축해 둔 곳이다.
약간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대모산의 두 산봉우리를 배 모양으로 두르고 있는 석성(石城)으로서, 동쪽으로 면한 수구는 직선으로 단을 쌓아 만들었다. 이 산성의 북쪽에 대모암(大母庵)이라는 작은사찰이 있다. 홀어머니산성이라는 호칭이 정해진 것은 아홉 아들과 더불어 홀로된 할머니가 쌓았다는 뜻에서 할미성이란 이름을 붙여왔다. 한편, 쌀을 저장하기 위해서 성을 쌓았다는 의미의 합미성(合米城)에서 비롯된다는 주장도 있다. 또 양씨 부인이라는 과부가 정절을 지키기 위해 성에서 뛰어내려 자결했다는 전설도 전해 오고 있다.이 살고 있었는데, 설씨 성을 가진 총각이 끈질기게 청혼을 해왔다. 견디다 못한 양씨 부인은 설씨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내가 이 산에 돌로 성을 쌓을 테니 그 동안 총각은 나막신을 신고 서울을 다녀오시오. 내가 만약 총각이 돌아올 때까지 성을 다 쌓지 못하면 총각의 청혼을 받아들이겠소.” 그러나 그가 마지막 성돌을 채 올려 놓기 전에 총각이 돌아왔다. 양씨 부인은 돌을 나르던 치마폭을 뒤집어 쓰고 성벽 아래로 몸을 날려 자결함으로써 끝까지 정절을 지켰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대모산성(大母山城)은 교룡산성, 금성산성 등과 함께 기
록되어 있어, 이미 고려시대 이전에 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