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리 장터
오늘은 연만들기 기인 김판용씨를 만났다
동갑내기 여자친구와 흘러간 사연을
순번없이 호출하던 치기를 간신히 씻어낸 뒤
장터에 오면 무슨 약속들도 둥둥 떠 다닌다
섬 구석에 내몰린 묵은 설움도 함께 풀리는 우수날
해진정육점 탁자에 앉아 소맥 한 잔을 들이킨다
참연 오살연 가오리연 쌍연 썩을년
막걸리잔 위 닷새만에 정겨운 욕이 떠다닌다
농민장사 철웅이형도 납부닥에 버짐이 늘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호파폐기처분에 매달려
남쪽 섬마을 2월이 그렇게 흐른다
이 산 저 산 분명코 봄이련다? 실업고 선생이
단가 한 곡을 부를 때 어디서 장기판 알치는 소리
서촌 뻘밭 간재미는 맛도 좆도 두배나 된다
이렇게 간간이 재미를 보는 조금난리 장터에 오면
딴 주머니가 없어도 파릇한 봄동 한 잎에
붉은 구기자 떠다니는 동동주가 넘쳐난다
여기서 산다는 것이 모두 약속이다
다시래기 허튼 춤사위로 장판을 휘젓는 홍장군
홍림이형은 딸들이 장하다 그게 진도다
또 어디서 펑 깡냉이 튀밥이 튄다 너도 나도
부풀린 가슴 연처럼 떠오르는 조금리 장터.
하얀 달집의 동거
정월 보름날이 되자 어머니가 오셨다
당산 빈 터엔 커다란 달집이 들어서고
파전내음 가득한 천막 아래 누구라도
꿈을 달아매는 일들도 시들한지 오래지만
바람이 가득한 2월의 벌판이 그리워
우리는 모두 사천리로 갔다
서툰 발음처럼 장난기 가득한 해인이는
달음박질이 빨라지고 다급한 어머니는 허리가 휜다
해인이가 일어서면 어머니가 주저앉고
아내가 화장을 하면 어머니가 화장실로 간다
어머니가 주무시면 해인이가 나를 흔든다
뽀롱뽀롱 뽀송한 얼굴로 웃음치며
세살난 온갖 재주를 다 피우는 아들이
어른어른 어머니 백태 낀 눈을 어지럽힌다
밥숟갈이 제법 익힌 점심 밥상 앞에
어머니는 틀니 사이로 무른 밥알을 놓친다
하루 종일 외줄타기 하듯 거실 방을 돌다
저녁상 모서리 눈엣가시처럼 부러 외면할 때
잘 구운 조기살 가시를 발라 아이 숟갈에 얹는다
아침이면 몇 번이나 손을 더듬어도
붉은 속바지 꼼마리 주머니는 텅 비었다
간신히 붙들은 기억들은 쉬이 일그러지고
정월 대보름이 되자 더 이상 부풀릴 곳 없는
만월의 길을 따라 어머니가 오셨다
갈 곳은 이미 정해졌지만 시간은 자투리로 남아
이리 저리 주소지를 돌다가 절망에 붙들려 오셨다
병원생활에 오히려 지쳐버린 팔학년 2반
거실 양탄자에 하루 종일 허리를 붙이고서
아침 저녁 약봉지만 찾을 때
마우스를 굴리며 신나는 뽀로로 동영상
어머니에게도 헤인이에게도
꿈결같은 세상 실타래에 풀려나고
한 지붕 아래 이 겨울이 비껴가고 있다.
운림화첩 5
구름숲에 서성이다
너도 좋은 시절이 분명 있었더냐
봄이 지난 갈림길에서 신열을 앓고
꽃버짐 가득하더니 바람없어도 흔들리는
배롱나무 곁에서 흰 구름만 쳐다보느냐
연못가에 이르러 동백의 단아한 손목
윤기 어린 머릿결을 따라
너도 꽃피는 시절에 물가를 서성이며
누군가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보지 않았드냐
세상은 멀리 흐르는 강
강 언덕에 무성한 잎사귀 사이
소풍왔던 누이들 숨결이 흘러가고
석무동 큰 바우에 큰 울음 놓던 준배
막걸리 심부름에도 취하던 그 시절이
좋았지 않았더냐 고구마 신우대통
작은 방에서 나이롱 뽕 내기하던 밤
어느 다리 밑에는 짧은 전설이 새겨지고
교복색깔이 미칠 것만 같다고
기어코 서울로 튀던 가시내들
의신면 비끼내 골짜기를 찾아가면
누구나 봄날은 그렇게 흘러만 갔구나
실없는 벚꽃나무 비듬만 날리고
봉오지 젖무덤 흘러내린 곳
꿈처럼 인연을 털어버리고 돌아와
안개를 마시던 늙은 화가는 더 미치지 못했네.
△박남인
전남 진도 사천리 출생
광주고교(28회 졸업)
인천노동자문학회
「노둣돌」로 시작 활동
진도타래시
목포작가회의.
사람의 등대
우리는 언제나 타오른다
한 겨울밤 올라갈 길을 잃었을 때
지상의 아슬한 방벽들이 어깨를 풀고
청계천 휘황한 불빛에 스러지면
동아줄을 놓친 오누이가 마침내
하늘의 태양과 달이 되듯
우리는 우리의 내일을 심지삼아
침묵마저도 철저하니 소진하여 타오를 수밖에 없다
꿈이 넘칠수록 일렁이는 불안의 그림자
강물을 따라 한없이 드리워지는데
밤의 끝으로 떠밀린 선택
2009년 1월 20일 세밑의 찬 바람
행인들의 발걸음 떠밀어대는 그 순간
전격투입 고공낙하로 짓누르는
개발전사들의 눈빛이 먼저 타올랐다
불의 눈에서 튀어나온 불이 옮겨 붙자
재빨리 카메라 셔터의 불빛이 반짝인다
누구에게로 점화되는지 모른 채
마구 불꽃을 터트리는 또 다른 벽의 아들
검은 제복들의 계급장 아래
통과의 세례를 받고 화상을 지운다
우리는 언제나 타오른다
여름화산의 폭발같은 기억들의 저쪽
전태일이 바로 이쯤에서
우리들 가슴에 화엄처럼 타올랐다
6월의 거리마다 성냥곽을 이루거나
고공의 크레인에서 할활 지피던 한없는 물의 불
매웁게 말라버린 산골 고추들의 함성
기억하는가
단 한번도 변하지 않는 그 벽의 법칙에 기대여
우리들은 언제나 타오른다
은밀한 어둠이 압력을 가할수록
우리는 우리의 꿈으로만 타오른다
너무 친근한 벗이었던 절망
나무처럼 나무처럼 스러지며 보았던 햇살 하나
우리들의 아침은 더욱 찬란하게 타오르기 위해
때로는 희망도 기다림도 불쏘시개로 던지면서
우리는 우리를 태워 세상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