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왕(荷知王), 남제(南齊)에 사신 파견
신왕(神王:좌지왕)이 재위 14년만에 승하하고 7대 혜왕(惠王:취희왕)에 이어 세자 질지(銍知)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가락국을 중흥시킨 8대 장왕(莊王:질지왕)이다. 장왕은 즉위 다음 해인 서기 452년 시조대왕과 허왕후를 위하여 수로왕과 허왕후가 처음 궁합하던 곳에 왕후사(王后寺)를 짓고 전토 10결을 내려 그의 명복을 빌었다.
장왕은 즉위 28년 서기 479년에 중국 남제(南齊)에 사신을 보냈다. 남제(南齊)의 고제(高帝)원년이니 고제의 즉위식에 사신을 보낸 것이다. 남제서(南齊書)에서도 이 사실을 가야(伽耶)의 하지왕(荷知王)이 사신을 보낸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 하지왕에 대하여 대가야의 가실왕(嘉悉王)일 것이라는 주장과 가락국의 8대 장왕인 질지(銍知)왕일 것이라는 주장이 맞서 있다.
남제서(南齊書)에 의하면 「가야는 삼한(三韓)의 일종인데 건원(建元) 원년에 국왕 하지(荷知)의 사신이 와서 조공을 바쳤다. 이에 남제의 고제(高帝)가 조서(詔書)를 내려 말하기를 '가야왕 하지는 관문과 바다 밖에서도 동쪽 먼 곳에서 폐백을 바치는구나!' 라고 하며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을 제수한다」고 했다.
이 기사에서 보이는 가라왕(加羅王) 하지(荷知)에 대하여 기존의 설들을 보면 고령(함안), 김해 등지의 가야제국왕으로 비정해 왔다. 어쨌든 그 당시 한반도 남부와 중국과의 항로 관계는 경기 황해도 지방의 해안에서 북상하여 요동연해로를 이용했거나 또 황해를 횡단하여 산뚱지역으로 들어가는 항로가 보편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항로가 어느 경로이든간에 신라 백제에 대한 정치 관계에 따라 많은 제약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내적 외적인 제약들을 극복하고 가라왕 하지가 대중교역(對中交易)을 독자적으로 성공시켰다는 점은 당시 상당한 지배세력의 성장이 있었다는 증거로 제시될 수 있다. 당시 하지왕이 남제로 부터 받은 보국장군 본국왕의 벼슬은 제3품에 해당한다. 고구려, 백제, 왜왕이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 등 제2품에 해당하는 벼슬을 받았으니 하지왕이 받은 본국 왕이란 작호는 가락국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는 왕이란 인정을 대외(南齊)적으로 받은 것이니 독자적인 지배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한편 실학의 대가 정약용(鄭若鏞)은 이 하지왕에 대해서 말하기를 「수로왕의 자손에는 좌지(坐知)왕, 질지(銍知)왕, 겸지(鉗知)왕이 있었는데 하지는 이 삼지의 하나라고 했으니 그 연대로 보아 질지왕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김태식교수 등은 하지왕은 대가야의 가실(嘉悉)왕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원전 : 1995년 김시우저 가락국 천오백년 잠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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