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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복대에서 본 서북능선. 가슴을 울리는 우리의 산하다. 오른쪽 아래 움푹 꺼진 곳이 시암재.
성삼재로 오르는 택시 안에서 바라보는 지리산은 초록이 한결 짙어졌다. 지난겨울 치밭목을 거쳐 천왕봉을 찾았을 때는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다시는 봄이 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저 가슴 벅찬 신록은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차창을 내리고 그 푸름 속으로 손을 내밀어 본다. 어찌할 수 없이 탁한 몸과 마음이 조금이라도 저 빛깔로 물들까 해서.
평일인데도 성삼재는 꽤 많은 이들이 눈에 띈다. 이제 막 산행을 시작하려는 이들이 대부분이고 휴게소에서 차를 마시거나 고개를 넘던 중 잠시 풍광을 감상하려는 이, 산행을 마치고 노고단 도로를 막 빠져나오는 산꾼들도 여럿 보인다.
정령치로 내려서는 중에 만난 초여름의 철쭉꽃. 뒤 왼쪽 봉우리가 만복대다.
트렁크에서 배낭을 내리고 택시비를 지불하려니 우리를 태우고 올랐던 구례개인택시 김태석 기사가 손사래를 친다. 출발할 때 아래에서 다 계산했다고. 노고단 남쪽 문수골에서 지리산산간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지리산산악구조대 김종복 구조대장이 후배들이 내려온다고 터미널까지 마중을 나와 맛난 점심을 챙겨 먹이더니, 차비도 미리 계산하고 성삼재로 올려 보낸 것. 그 묵묵하고 깊은 산정(山情)에 가슴 먹먹해진다.
돌탑과 표석이 선 만복대. 멀리서 찾아 온 이석찬 위원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간만에 찾은 지리산인데, 날씨가 썩 좋진 않네.”
“내일은 비가 올지도 모른다니 오늘 부지런히 가 봐야죠.”
많은 산꾼들이 분주히 오가는 성삼재를 뒤로 하고 정 기자와 나는 서북능선으로 접어든다. 들머리 이정표에 ‘만복대 5.3km, 당동마을 3.0km, 상위마을 6.1km’라 적혔다.
신록으로 가득한 터널을 지나게 되는 서북능선.
지리산을 자주 다니는 이들은 지리산 구역을 크게 네 곳으로 나눈다. 성삼재에서 천왕봉까지 이르는 주능선과 천왕봉에서 왕등재, 밤머리재 지나 웅석봉까지 이어진 동부능선, 영신봉에서 청학동 위의 삼신봉으로 가는 낙남정맥의 남부능선 그리고 성삼재에서 만복대, 세걸산, 바래봉 지나 덕두산까지 이르는 서북능선이 그것이다.
만복대 1킬로미터 전쯤에 만나는 알바위. 조망명 소기도 하다.
주능선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는 동부능선은 현재 비법정탐방로로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남부능선은 오르는 내내 지리산 주능선의 장쾌한 능선미를 볼 수 있어 좋다. 서북능선은 고리봉과 만복대, 세걸산, 바래봉 등을 잇는 산세가 수려할뿐더러 지리산 주능선의 변화무상한 산세를 조망하기에도 더없이 좋은 곳이다. 지리산국립공원에 속하면서도 흔히 말하는 지리산과는 뚝 떨어져 있어 한갓지고 편안한 산행을 즐길 수 있는 멋진 산길이다.
함께 산행하려던 광주의 이석찬 사진편집위원이 사정상 조금 늦어져 정 기자와 내가 먼저 출발한다. 안 그래도 한적한 서북능선을 둘이 걸으니 더 깊은 적막감에 발걸음 떼기도 조심스럽다.
성삼재에서 정령치 구간은 유난히 헬기장이 많다. 출발 후 만난 작은 봉우리를 내려서자마자 첫 헬기장이 나온다. 헬기장이란 산림을 관리하거나 구조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시설이지만 평상시엔 산꾼들에게 더없이 좋은 쉼터로 사랑받는다. 삼삼오오 모여서 식사를 하고, 예전엔 최고의 야영지로 손꼽혔다. 첫 헬기장을 지나자마자 이정표가 나타나며 지리산온천이 멀지 않는 당동마을로 길이 갈린다. ‘2.5km’로, 내려서는 데 30분이면 족하다.
“정 기자, 여기 좀 봐. 다목적위치표지판도 이젠 스마트 시대야. 표지판 꼭대기에 QR코드가 붙었어. 국립공원이 최첨단일세.”
핸드폰으로 QR코드를 찍어보니 표지판의 모든 정보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창이 뜬다. QR코드 검색용 에플리케이션이 있는 ‘스마트폰’이 앞으로는 산행필수품이 될 것 같다.
성삼재 오르면서 우리를 들뜨게 하던 차창 밖의 신록이 서북능선에서는 직접 손에 잡히고 호흡할 수 있다. 몸서리치도록 푸르고 푸른 숲을 알뜰히 지나온 바람이 온 몸을 훑고 간다. 이런 ‘쿨 샤워’는 산 능선을 지나는 자만 누릴 수 있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행복일 게다. 두 팔을 활짝 벌리고 그 행복을 한참 즐긴다. 해탈이라도 할 것 같은 기분이다.
복대 오름길에 본 구례산동 일대. 당동마을과 산수유마을, 지리산온천을 품고 있다.
고리봉(작은 고리봉) 오름길에 들어서자 오른쪽으로 깊이 내려선 달궁계곡 건너 반야봉이 그야말로 ‘우뚝’ 선 풍광이 눈에 가득 든다. 그 능선을 이어 노루목과 임걸령, 돼지평전, 노고단, 코재, 종석대, 성삼재, 시암재가 파노라마로 펼쳐지며 감동을 이어간다. 이만한 다큐멘터리가 또 있을까 싶은, 참으로 장쾌하고도 벅찬 장면이다. 수도 없이 지났던 저 길은 그만큼 많은 추억으로 기억된다. ‘그들도 나를 추억할까?’ 생각하다가 그리움만 자꾸 커진다.
“종복 형님께서 말씀하셨던 표지석이 이거구나. 이거 옮겨와 세우느라 정말 고생하셨겠어.”
고리봉에 앞서 오른 정 기자가 근래 설치한 오석의 정상석을 가리킨다. 지리산산악구조대원들과 함께 이 돌과 받침을 직접 짊어지고 올라 세웠다고 했다. 여기뿐만 아니라 밤재를 지나 견두봉과 천마산, 깃대봉을 잇는 능선에도 여럿 설치했단다. 지역사랑이란 바로 이런 것일 터. 덕분에 산행이 한결 편리해졌다.
예서 바라보는 달궁계곡이 장관이다. 골짜기를 중심으로 서북능선과 주능선 산줄기들이 그 너른 품을 자랑하며 멋진 산세를 펼치고, 계곡이 이어간 만수천 끝에 삼봉산(1187m)이 우뚝하다.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지리산 풍광의 한 장면이다. 진행방향으로는 가야 할 능선과 만복대가 손에 잡힐 것 같다.
고리봉에서 내려서는 길에 질경이가 뒤덮은 두 번째 헬기장을 만난다. 막 피기 시작한 쥐오줌풀도 꽤 보인다. 무척 예쁜 쥐오줌풀 꽃은 그러나 코를 갖다 대면 쥐 오줌 냄새가 진동을 한다. 이렇게 악취가 나는 꽃이 몇 있다. 이즈음에 피는 백선이 그렇고, 관상용으로 키우는 제라늄 또한 툭 건드리면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 자연이란 참 신비롭고 흥미롭다.
잠시 후 또 나타난 미나리아재비가 만발한 헬기장. 산수유로 유명한 상위마을로 길이 갈리는 묘봉치다. 오래 전에 묘봉치 이름 뜻이 궁금해서 찾아본 적이 있는데, 이렇다 할 자료가 보이지 않았다. 쉬운 짐작으로 ‘묘한 봉우리가 있는 또는 보이는 고개’라면 그 묘하다는 봉우리는 또 어디일까? 예서 가늠할 수 있는 만복대나 반야봉, 고리봉 중 하나일 텐데, 어디가 묘한지 아무리 살펴도 모르겠어서 그냥 만복대로 걸음을 옮긴다.
능선에서 자주 보이던 쥐오줌풀. 산뜻한 모습과는 달리 고약한 냄새가난다.
묘봉치에서 만복대 오름길은 철쭉이 자주 보이지만 키를 잴만한 숲이 별로 없어서 조망에 거침이 없다. 가을이면 억새꽃이 아름다운 이 능선은 지리산에서 거의 유일한 초지대다. 그래서 만복대 오름길은 힘들었던 기억이 한 번도 없다. 한껏 기분 나는 길, 그래서 그리운 이와 꼭 걷고 싶은 아끼는 산길이다. 한참 앞서간 이도 시야에 들어와서 덕유산을 걷는 듯한 기분도 든다. 10년 전쯤에는 이 길이 움푹 파여 훼손이 심했는데, 국립공원에서 양쪽으로 말뚝을 박고 줄을 매 두는 등 복구에 힘을 써 지금은 길 상태가 아주 좋아졌다.
만복대를 출발하는 취재진 앞으로 서북능선이 힘찬 산세를 펼쳤다. 이정표 오른쪽 멀리 희미한 봉우리가 바래봉이다.
만복대를 1킬로미터쯤 남긴 곳 등산로 옆에 알 바위가 있다. 멀리서도 잘 보이는 이 바위는 볼 때마다 신기하고 조망명소기도 해서 늘 들리는 곳이다. 알 바위를 지날 즈음 전화벨이 울린다. 이석찬 위원이 정령치에 도착해 거꾸로 올라오고 있단다. 참 먼 길을 달려 온 반가운 이. 우리 걸음도 바빠진다.
사각기둥 모양의 정상석과 돌탑이 선 만복대는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사방으로 조망이 뻥 뚫려 천왕봉 못잖은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정령치를 지나 백두대간이 갈리는 고리봉과 세걸산, 바래봉으로 뻗어가는 서북능선 마루금이 훤하고, 그 자락에 들어선 운봉과 산내가 정겹다. 지리산 주능선은 더욱 깊어져 반선에서 반야봉으로 치고 오른 심마니능선과 그 너머 삼정산능선이 맨 뒤쪽의 촛대봉에서 장터목 지나 천왕봉, 중봉, 하봉으로 산세를 펼친 지리산의 얼굴과 산너울을 이루며 숨 막히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지나온 능선 또한 모든 굽이굽이가 눈물겹게 아름답다. 그래서 걷고 있으면서도 그리운 산이 지리산이다.
정 기자와 몇 장의 사진을 찍는 동안 이석찬 위원이 도착한다.
“어~따! 옛날엔 정령치서 단숨에 치고 올랐는디, 지금은 솔찬히 힘들구마이.”
쉰을 넘긴 지금까지 수도 없이 올랐던 그의 산이 지리산이다. 분신 같은 카메라들과 각종 렌즈에 삼각대까지 갈무리한 커다란 배낭을 메고 지리산 구석구석을 안 가 본 곳 없이 제집처럼 드나들던 지난 세월의 흔적이 그의 말과 행동과 생각에서 고스란히 배어난다. 그래서 이 위원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지리산의 모든 골짝과 능선, 봉우리에 얽힌 추억들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만복대에서 본 산동 야경. 불이 가장 밝은 곳에 지리산온천이 있다.
한참을 쉬면서 가없이 트인 사방 조망을 즐기며 사진을 찍다가 하산을 시작한다. 해발 1172미터인 정령치까지는 2킬로미터 거리. 서산대사가 쓴 〈황령암기(黃嶺庵記)〉에 의하면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정(鄭)씨 성을 가진 장군을 파견해 지키게 했는데 이로 인해 정령치(鄭嶺峙)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먼 길을 달려와 힘들게 오른 길을 다시 되짚어 내려서야 하는데도 싫은 기색 없는 이 위원이 너무 고맙다. 1킬로미터쯤 내려섰을까, 초여름에 접어든 6월인데 능선에 때늦은 철쭉꽃이 환하게 펴 있다.
Information 지리산 서북능선 만복대
난이도 ▲▲△△△
성삼재 > 5분 > 첫번째 헬기장 > 30분 > 고리봉 > 15분 > 두번째 헬기장 > 25분 > 묘봉치 > 15분 > 네번째 헬기장 > 15분 > 만복대 > 30분 > ‘정령치 1km’ > 20분 > 이정표 > 정령치
교통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화개를 거쳐 하동까지 가는 시외버스가 구례에 선다. 1일 9회(06:30, 08:00, 09:30, 11:30, 13:30, 15:30, 17:30, 19:30, 22:00) 출발한다.
3시간 10분 걸리며 요금은 19100원.
용산역에서 구례구역으로 가는 열차가 05:40~22:45까지 수시로 출발한다. 무궁화호는 4시간 20분쯤 걸리고, 새마을호는 4시간쯤 걸린다.
무궁화호는 주말 기준 23600원, 새마을호는 35000원이다.
구례공용버스터미널(061-780-2730)에서 노고단까지는 1일 8회(04:00, 06:00, 08:20, 10:20, 11:40, 13:40, 15:40, 17:40) 버스가 출발한다.
요금은 4000원. 택시로 갈 경우 30000원 받는다. 중간에 천은사매표소에서 1인당 1600원의 문화재관람료를 무조건 징수한다.
구례개인택시 011-622-5848
동서울터미널에서 인월까지는 1일 8회(07:00, 08:20, 10:30, 13:20, 15:20, 17:30, 19:00, 24:00) 시외버스가 출발한다. 3시간 20분 걸리며 요금은 19100원. 인월에서 정령치까지는 택시를 이용해야 한다.
30분쯤 걸리고 25000원(주간)~30000원(야간) 받는다.
인월개인택시 063-636-5123
좌)정령치휴게소. 간단한 음료와 차를 판매하는 이곳은 직원들이 상주하지 않고 출퇴근한다.
우)구례공용버스터미널 건너편의 전일식당 생선구이 상차림.
잘 데와 먹을 데
구례공영버스터미널 건너편에 ‘전일식당(061-782-5428)’이 있다. 가정식백반집으로 생선구이와 낙지볶음, 추어탕, 재첩국, 감자탕 등이 있다.
뱀사골계곡 입구인 반선에 음식점이 모여 있다. 지리산에서 난 각종 산나물로 상을 차리는 ‘지리산산채식당(625-9670)’이 유명하다. 일출식당(626-5071). 대부분의 식당에서 민박도 겸한다.
캠핑을 하려면 달궁자동차야영장(625-8911)을 이용할 수 있다. 2001년 조성되었으며, 도로변에 있어 접근이 쉽다. 맑고 시원하게 흐르는 달궁계곡을 끼고 있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편의시설로 화장실, 취사장, 음수대, 집회장, 22개의 전기사이트가 설치되어 있다. 정령치와 노고단이 가깝다. 이용시설에 따라 요금이 다르다.
이 외에 구례나 인월, 반선 등지에 숙박업소가 많다.
좌)인월 실상사.
우)달궁자동차야영장.
볼거리
쪾실상사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있는 실상사는 신라 구산선문 중 처음으로 문을 연 사찰이다. 산내 암자인 약수암과 백장암의 문화재를 포함하여 국보 1점과 보물 11점, 17점의 지방문화재 등 넓은 경내가 비좁으리만치 단일 사찰로는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보광전 앞에 동서로 나란히 세워진 쌍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걸작품으로 상륜부가 온전히 남은 희귀한 탑이다. 이 탑은 불국사 석가탑의 사라진 상륜부를 복원할 때 모델이 되기도 했다.
천왕봉을 바라보며 들어선 실상사는 여느 지리산 자락의 산사와는 달리 평지에 터를 잡아 분위기가 색다르다. 낮은 담장을 따라 갖가지 아름다운 나무들이 자라고 있어 멀리서 바라보는 풍광도 빼어나다.
절 앞을 흐르는 만수천 위에 놓인 해탈교 양옆으로는 해학스러운 얼굴의 돌장승 세 기가 세워져 있다. 원래 네 기였지만 1963년 홍수 때 한 기가 떠내려갔다고 한다. 실상사에서 약수암, 삼불사, 문수암, 상무주암과 영원사를 거치는 암자산행을 이어갈 수도 있는데, 산행 내내 천왕봉을 조망하는 눈맛이 좋다.
지도
2만5천분의 1 덕동•연파
5만분의 1 남원•운봉
(※특별부록 지도-지리산 동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