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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씨(全氏) 광장 원문보기 글쓴이: 한강의 언덕(전과웅)
도은집 제3권
시(詩)
전오륜의 산방에 제하다〔題全五倫山房〕
춘풍이 나보다 먼저 산 집에 도착해서 / 春風先我到山家
산 북쪽 산 남쪽 일만 나무에 꽃 피웠네 / 山北山南萬樹花
소매 잡을 필요 있소 내 머물며 담소할걸 / 談笑自留休挽袖
흥이 나면 술 사고 싶은 생각도 날 테구요 / 興來更覺酒須賖
[주D-001]소매 …… 담소할걸 : 《예기(禮記)》 〈치의(緇衣)〉에 “사적인 은혜를 베푸는 것일 뿐이요 덕의(德義)와 상관이 없는 것이라면, 그런 자리에는 군자가 스스로 알아서 머물지 않는다.〔私惠不歸德 君子不自留焉〕”라는 공자(孔子)의 말이 나온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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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시고 제16권
시(詩)
중지(仲至)의 자설(字說) 후미에 제하다.
넓고 깊숙한 큰 집이 바로 나의 집인데 / 渠渠夏屋是吾家
타향에 쏘다니다가 두 귀밑이 희어졌네 / 客走他鄕兩鬢華
처자식은 의지할 곳 없어 처량도 해라 / 妻子凄涼無所主
적막한 문정엔 해가 장차 비끼려 하네 / 門庭寂寞日將斜
【이르기 전이다.[未至]】
고생 끝에 돌아오니 실가가 그대로 있어 / 辛苦歸來有室家
창 아래 향 사르니 모두가 청화로워라 / 焚香窓戶儘淸華
다시는 타향의 나그네 될 마음 없어져서 / 無心更作他鄕客
흥이 나면 때때로 붓 들어 시를 쓰노라 / 遇興時時點筆斜
【이르고 난 뒤이다.[旣至]】
아득한 천지가 다 똑같은 내 집이거늘 / 茫茫天地共爲家
동이에 살면서 중화 사모한 게 한스럽네 / 只恨居夷却慕華
한 조각 마음은 우주를 능히 포괄하기에 / 一片心田包宇宙
연래엔 절뚝발이 걸음 삐딱하거나 말거나 / 年來蹇步任欹斜
【본원(本原)을 말한 것이다.】
[주C-001]중지(仲至) : 고려 말기에 벼슬이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른 전오륜(全五倫)의 자이다. 고려가 망한 뒤에는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다가 뒤에 다시 서운산(瑞雲山)으로 들어가 은거했다고 한다. 저자가 일찍이 그의 자설(字說)을 지어서 지(至) 자를 도(道)의 경지에 견주어 설명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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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시고 제25권
시(詩)
느낌이 있어 한 수 지어서 백지 염사(伯至廉使)에게 보이다.
덕을 세우긴 하늘에 오르기 같고 / 立德如登天
공을 세우자면 내가 이미 쇠했고 / 立功吾已衰
말은 남겨도 전할 만하지 못한데 / 立言不足傳
가을 벌레도 스스로 때를 알아서 / 秋蟲自知時
서리와 이슬이 날로 차가워지매 / 霜露日以嚴
요란히 울어 사람을 슬프게 하네 / 喞喞令人悲
방금 내 번민이나 풀 따름이지 / 方將遣吾悶
어찌 후손 위할 계책을 생각하랴 / 豈念孫謀貽
봉황새는 이미 멀리 떠났거니와 / 鳳鳥去已遠
기린은 어찌 그리도 더디 오는고 / 麟也來何遲
유유하여라 군자의 이 마음을 / 悠悠君子心
후세에 알아줄 이가 그 누구일꼬 / 後來知者誰
[주C-001]백지 염사(伯至廉使) : 백지는 당시 안렴사(按廉使)였던 전오륜(全五倫)의 자이다. 그는 공양왕 때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고, 고려가 망한 뒤에는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은거했다고 한다.
[주D-001]덕을 …… 못한데 : 춘추 시대 노(魯)나라 대부(大夫) 숙손표(叔孫豹)의 말에 “가장 높은 것은 덕을 세우는 것이요, 그다음은 공을 세우는 것이요, 또 그다음은 훌륭한 말을 남기는 것이라, 아무리 오래되어도 폐해지지 않으면 이것을 영원히 썩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太上有立德 其次有立功 其次有立言 雖久不廢 此之謂不朽]” 한 데서 온 말이다. 《春秋左傳 襄公24年》
[주D-002]봉황새는 …… 떠났거니와 : 가의(賈誼)의 〈조굴원부(弔屈原賦)〉에 “봉황새는 훨훨 높이 날아가서, 본디 스스로 제 몸 이끌어 멀리 떠난다.[鳳縹縹其高逝兮 夫固自引而遠去]” 한 데서 온 말로, 이는 곧 난세(亂世)를 피해 은거하는 현자(賢者)를 비유한 것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3
【한국고전용어사전
안렴사[ 按廉使 ]
고려 시대 도(道)의 장관. 충렬왕 2년(1276)에 안찰사(按察使)를 안렴사로 개칭. 임무는 도내의 주현을 순안(巡按)하면서 첫째는 수령의 현부(賢否)를 살펴 출척하는 일, 둘째는 민생의 어려움을 살피는 일. 셋째는 형옥(刑獄)을 다스리는 일. 넷째는 조세의 수납. 다섯째는 군사적 기능에 관한 것이었음. 안렴사는 조선 시대와 달리 도에 상주하는 전임관이 아니라 사명지임(使命之任)으로 임기는 대체로 6개월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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圃隱先生文集卷之二
[詩]
送全五倫掌令出按慶尙
之子欲何適。秋涼騘馬驕。心淸代祀事。任重採風謠。陜水藍光嫰。晉山楓葉凋。朱輪舊遺愛。玉節又逍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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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1년 임신(1392,홍무 25)
7월28일 (정미)
태조의 즉위 교서
중외(中外)의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한량(閑良)·기로(耆老)·군민(軍民)들에게 교지를 내리었다.
“왕은 이르노라. 하늘이 많은 백성을 낳아서 군장(君長)을 세워, 이를 길러 서로 살게 하고, 이를 다스려 서로 편안하게 한다. 그러므로, 군도(君道)가 득실(得失)이 있게 되어, 인심(人心)이 복종과 배반함이 있게 되고, 천명(天命)의 떠나가고 머물러 있음이 매였으니, 이것은 이치의 떳떳함이다.
홍무(洪武) 25년(1392) 7월 16일 을미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와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이 말을 합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기를, ‘왕씨(王氏)는, 공민왕이 후사(後嗣)가 없이 세상을 떠남으로부터 신우(辛禑)가 사이를 틈타서 왕위를 도적질했다가, 죄가 있어 사양하고 물러갔으나, 아들 창(昌)이 왕위를 물려받았으므로 국운(國運)이 다시 끊어졌습니다.
다행히 장수(將帥)의 힘에 힘입어 정창 부원군(定昌府院君)으로써 임시로 국사(國事)를 서리(署理)하게 하였으나, 곧 혼미(昏迷)하고 법에 어긋난 행동을 하므로, 여러 사람이 배반하고 친척들이 이반(離叛)하여 능히 종사(宗社)를 보전할 수 없었으니, 이른바 하늘이 폐하는 바이므로 누가 능히 이를 흥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사직(社稷)은 반드시 덕(德)이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게 되고, 왕위는 오랫동안 비워 둘 수가 없는데, 공로와 덕망으로써 중외(中外)가 진심으로 붙좇으니, 마땅히 위호(位號)를 바르게 하여 백성의 뜻을 안정하게 하소서.’ 하였다.
나는 덕이 적은 사람이므로 이 책임을 능히 짊어질 수 없을까 두려워하여 사양하기를 두세 번에 이르렀으나,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백성의 마음이 이와 같으니 하늘의 뜻도 알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의 요청도 거절할 수가 없으며, 하늘의 뜻도 거스릴 수가 없습니다.’ 하면서, 이를 고집하기를 더욱 굳게 하므로, 나는 여러 사람의 심정에 굽혀 따라, 마지못하여 왕위에 오르고, 나라 이름은 그전대로 고려(高麗)라 하고, 의장(儀章)과 법제(法制)는 한결같이 고려의 고사(故事)에 의거하게 한다. 이에 건국(建國)의 초기를 당하여 마땅히 관대한 은혜를 베풀어야 될 것이니, 모든 백성에게 편리한 사건을 조목별로 후면(後面)에 열거(列擧)한다. 아아, 내가 덕이 적고 우매하여 사정에 따라 조치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데, 그래도 보좌하는 힘을 힘입어 새로운 정치를 이루려고 하니, 그대들 여러 사람은 나의 지극한 마음을 몸받게 하라.
1. 천자는 칠묘(七廟)를 세우고 제후(諸侯)는 오묘(五廟)를 세우며, 왼쪽에는 종묘(宗廟)를 세우고 오른쪽에는 사직(社稷)을 세우는 것은 옛날의 제도이다. 그것이 고려 왕조에서는 소목(昭穆)의 순서와 당침(堂寢)의 제도가 법도에 합하지 아니하고, 또 성 밖에 있으며, 사직(社稷)은 비록 오른쪽에 있으나 그 제도는 옛날의 것에 어긋남이 있으니, 예조(禮曹)에 부탁하여 상세히 구명하고 의논하여 일정한 제도로 삼게 할 것이다.
1. 왕씨(王氏)의 후손인 왕우(王瑀)에게 기내(畿內)의 마전군(麻田郡)을 주고, 귀의군(歸義君)으로 봉하여 왕씨(王氏)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그 나머지 자손들은 외방(外方)에서 편리한 데에 따라 거주하게 하고, 그 처자(妻子)와 동복(僮僕)들은 그전과 같이 한 곳에 모여 살게 하고, 소재 관사(所在官司)에서 힘써 구휼(救恤)하여 안정된 처소를 잃지 말게 할 것이다.
1. 문무(文武) 두 과거(科擧)는 한 가지만 취하고 한 가지는 버릴 수 없으니 중앙에는 국학(國學)과 지방에는 향교(鄕校)에 생도(生徒)를 더 두고 강학(講學)을 힘쓰게 하여 인재를 양육하게 할 것이다. 그 과거(科擧)의 법은 본디 나라를 위하여 인재를 뽑았던 것인데, 그들이 좌주(座主)니 문생(門生)이니 일컬으면서 공적인 천거로써 사적인 은혜로 삼으니, 매우 법을 제정한 뜻이 아니다. 지금부터는 중앙에는 성균 정록소(成均正錄所)와 지방에는 각도의 안렴사(按廉使)가 그 학교에서 경의(經義)에 밝고 덕행을 닦은 사람을 뽑아, 연령·본관(本貫), 삼대(三代)와 경서(徑書)에 통하는 바를 잘 갖추어 기록하여 성균관장이소(成均館長貳所)에 올려, 경에서 통하는 바를 시강(試講)하되 사서(四書)로부터 오경(五經)과 《통감(通鑑)》 이상을 통달한 사람을, 그 통달한 경서의 많고 적은 것과 알아낸 사리(事理)의 정밀하고 소략한 것으로써 그 높고 낮은 등급을 정하여 제일장(第一場)으로 하고, 입격(入格)한 사람은 예조(禮曹)로 보내면, 예조에서 표문(表文)·장주(章奏)·고부(古賦)를 시험하여 중장(中場)으로 하고, 책문(策問)을 시험하여 종장(終場)으로 할 것이며, 삼장(三場)을 통하여 입격(入格)한 사람 33명을 상고하여 이조(吏曹)로 보내면, 이조에서 재주를 헤아려 탁용(擢用)하게 하고, 감시(監試)는 폐지할 것이다. 그 강무(講武)하는 법은 주장(主掌)한 훈련관(訓鍊觀)에서 때때로 《무경칠서(武經七書)》와 사어(射御)의 기술을 강습시켜, 그 통달한 경서의 많고 적은 것과 기술의 정하고 거친 것으로써 그 높고 낮은 등급을 정하여, 입격(入格)한 사람 33명을 출신패(出身牌)를 주고, 명단을 병조(兵曹)로 보내어 탁용(擢用)에 대비하게 할 것이다.
1. 관혼 상제(冠婚喪祭)는 나라의 큰 법이니, 예조에 부탁하여 경전(經典)을 세밀히 구명하고 고금(古今)을 참작하여 일정한 법령으로 정하여 인륜(人倫)을 후하게 하고 풍속을 바로잡을 것이다.
1. 수령(守令)은 백성에게 가까운 직책이니 중시(重視)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을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와 대간(臺諫)·육조(六曹)로 하여금 각기 아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여, 공평하고 청렴하고 재간이 있는 사람을 얻어 이 임무를 맡겨서 만 30개월이 되어, 치적(治績)이 현저하게 나타난 사람은 발탁 등용시키고, 천거된 사람이 적임자(適任者)가 아니면 천거한 사람[擧主]에게 죄가 미치게 할 것이다.
1. 충신(忠臣)·효자(孝子)·의부(義夫)·절부(節婦)는 풍속에 관계되니 권장(勸奬)해야 될 것이다. 소재 관사(所在官司)로 하여금 순방(詢訪)하여 위에 아뢰게 하여 우대해서 발탁 등용하고, 문려(門閭)를 세워 정표(旌表)하게 할 것이다.
1. 환과 고독(鰥寡孤獨)은 왕정(王政)으로서 먼저 할 바이니 마땅히 불쌍히 여겨 구휼(救恤)해야 될 것이다. 소재 관사(所在官司)에서는 그 굶주리고 곤궁한 사람을 진휼(賑恤)하고 그 부역(賦役)을 면제해 줄 것이다.
1. 외방(外方)의 이속(吏屬)이 서울에 올라와서 부역에 종사함이 기인(其人)과 막사(幕士)와 같이 하여, 선군(選軍)을 설치함으로부터는 스스로 그 임무가 있었으나, 법이 오래 되매 폐단이 생겨서 노역을 노예(奴隷)와 같이 하니, 원망이 실로 많다. 지금부터는 일체 모두 폐지할 것이다.
1. 전곡(錢穀)의 경비(經費)는 나라의 떳떳한 법이니, 의성창(義成倉)·덕천창(德泉倉) 등의 여러 창고와 궁사(宮司)는 삼사(三司)의 회계(會計) 출납(出納)하는 수효에 의뢰하고, 헌사(憲司)의 감찰(監察)은 풍저창(豐儲倉)과 광흥창(廣興倉)의 예(例)에 의거하여 할 것이다.
1. 역(驛)과 관(館)을 설치한 것은 명령을 전달하기 위한 것인데, 근래에 사명(使命)이 번거롭게 많아서 피폐하게 되었으니 진실로 민망스럽다. 지금부터는 차견(差遣)하는 공적인 사행(使行)에게 〈관(官)에서〉 급료(給料)를 주는 일을 제외하고는, 사적인 용무로 왕래하는 사람은 지위의 높고 낮은 것을 논할 것 없이 모두 공급(供給)을 정지하게 하고, 이를 어긴 사람은 주객(主客)을 모두 논죄(論罪)하게 할 것이다.
1. 배를 탄 군사[騎船軍]는 위험한 곳에 몸을 맡기고 힘을 다하여 적을 방어하니, 불쌍히 여겨 구휼(救恤)해야 될 처지이다. 그 소재 관사(所在官司)로 하여금 부역을 감면해 주게 하고 조호(助戶)를 더 정하여 윤번으로 배를 갈아타게 하고, 그 생선과 소금에서 나는 이익은 그들이 스스로 취(取)하도록 허용하고 관부(官府)에서 전매(專賣)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1. 호포(戶布)를 설치한 것은 다만 잡공(雜貢)을 감면하기 위함인데, 고려의 말기에는 이미 호포(戶布)를 바치게 하고 또한 잡공(雜貢)도 징수하여 백성의 고통이 적지 않았으니, 지금부터는 호포를 일체 모두 감면하고, 그 각도에서 구은 소금은 안렴사(按廉使)에게 부탁하여 염장관(鹽場官)에게 명령을 내려 백성들과 무역하여 국가의 비용에 충당하게 할 것이다.
1. 국둔전(國屯田)은 백성에게 폐해가 있으니 음죽(陰竹)의 둔전(屯田)을 제외하고는 일체 모두 폐지할 것이다.
1. 고려의 말기에는 형률(刑律)이 일정한 제도가 없어서, 형조(刑曹)·순군부(巡軍府)·가구소(街衢所)가 각기 소견을 고집하여 형벌이 적당하지 못했으니, 지금부터는 형조는 형법(刑法)·청송(聽訟)·국힐(鞫詰)을 관장하고, 순군(巡軍)은 순작(巡綽)·포도(捕盜)·금란(禁亂)을 관장할 것이며, 그 형조에서 판결한 것은 비록 태죄(笞罪)를 범했더라도 반드시 사첩(謝貼)을 취(取)하고 관직을 파면시켜 누(累)가 자손에게 미치게 하니, 선왕(先王)의 법을 만든 뜻이 아니다. 지금부터는 서울과 지방의 형(刑)을 판결하는 관원은 무릇 공사(公私)의 범죄를, 반드시 《대명률(大明律)》의 선칙(宣勅)을 추탈(追奪)하는 것에 해당되어야만 사첩(謝貼)을 회수하게 하고, 자산(資産)을 관청에 몰수하는 것에 해당되어야만 가산(家産)을 몰수하게 할 것이며, 그 부과(附過)해서 환직(還職)하는 것과 수속(收贖)해서 해임(解任)하는 것 등의 일은 일체 율문(律文)에 의거하여 죄를 판정하고, 그전의 폐단을 따르지 말 것이며, 가구소(街衢所)는 폐지할 것이다.
1. 전법(田法)은 한결같이 고려의 제도에 의거할 것이며, 만약 증감(增減)할 것이 있으면 주장관(主掌官)이 재량하여 위에 아뢰어 시행할 것이다.
1. 경상도(慶尙道)의 배에 싣는 공물(貢物)은 백성에게 폐해가 있으니 또한 마땅히 감면할 것이다.
1. 유사(有司)가 상언(上言)하기를, ‘우현보(禹玄寶)·이색(李穡)·설장수(偰長壽) 등 56인이 고려의 말기에 도당(徒黨)을 결성하여 반란을 모의해서 맨처음 화단(禍端)을 일으켰으니, 마땅히 법에 처하여 장래의 사람들을 경계해야 될 것입니다.’
하나, 나는 오히려 이들을 가엾이 여겨 목숨을 보전하게 하니, 그 우현보·이색·설장수 등은 그 직첩(職帖)을 회수하고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아 해상(海上)으로 옮겨서 종신토록 벼슬길에 나오지 못하게 할 것이며,
우홍수(禹洪壽)·강회백(姜淮伯)·이숭인(李崇仁)·조호(趙瑚)·김진양(金震陽)·이확(李擴)·이종학(李種學)·우홍득(禹洪得) 등은 그 직첩을 회수하고 장(杖) 1백 대를 집행하여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게 할 것이며,
최을의(崔乙義)·박흥택(朴興澤)·김이(金履)·이내(李來)·김묘(金畝)·이종선(李種善)·우홍강(禹洪康)·서견(徐甄)·우홍명(禹洪命)·김첨(金瞻)·허응(許膺)·유향(柳珦)·이작(李作)·이신(李申)·안노생(安魯生)·권홍(權弘)·최함(崔咸)·이감(李敢)·최관(崔關)·이사영(李士潁)·유기(柳沂)·이첨(李詹)·우홍부(禹洪富)·강여(康餘)·김윤수(金允壽) 등은 그 직첩을 회수하고 장(杖) 70대를 집행하여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게 할 것이며,
김남득(金南得)·강시(姜蓍)·이을진(李乙珍)·유정현(柳廷顯)·정우(鄭寓)·정과(鄭過)·정도(鄭蹈)·강인보(姜仁甫)·안준(安俊)·이당(李堂)·이실(李室) 등은 그 직첩을 회수하고 먼 지방에 방치(放置)할 것이며,
성석린(成石璘)·이윤굉(李允紘)·유혜손(柳惠孫)·안원(安瑗)·강회중(姜淮中)·신윤필(申允弼)·성석용(成石瑢)·전오륜(全五倫)·정희(鄭熙) 등은 각기 본향(本鄕)에 안치(安置)할 것이며, 그 나머지 무릇 범죄한 사람은 일죄(一罪)로서 보통의 사유(赦宥)에 용서되지 않는 죄를 제외하고는, 이죄(二罪) 이하의 죄는 홍무(洪武) 25년(1392) 7월 28일 이른 새벽 이전으로부터 이미 발각된 것이든지 발각되지 않은 것이든지 모두 이를 사면(赦免)할 것이다.”
교서(敎書)는 정도전이 지은 것이다. 정도전은 우현보(禹玄寶)와 오래 된 원한이 있었으므로, 무릇 우씨(禹氏)의 한집안을 모함하는 것은 도모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그 실정(實情)에는 맞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10여 인으로써 원례(援例)로 삼아 극형(極刑)에 처하려고 하여, 조목마다 자질구레하게 획책하여 임금에게 바쳤다.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안경공(安景恭)으로 하여금 이를 읽게 하고는 놀라면서 말하기를,
“이 무리들이 어찌 극형(極刑)에 이르겠는가? 마땅히 모두 논죄(論罪)하지 말라.”
하였다. 도전 등이 감등(減等)하여 과죄(科罪)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한산군(韓山君)과 우현보와 설장수는 비록 감등하더라도 또한 형벌을 가할 수는 없으니, 결코 다시 말하지 말라.”
도전 등이 다시 나머지 사람들에게 장형(杖刑)을 집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곤장을 받은 사람은 죽지 않을 것이라 여겨, 이를 강제로 말리지 아니하였다.
【원전】 1 집 22 면
【분류】 *왕실(王室) / *행정(行政) / *인사(人事) / *군사(軍事) / *재정(財政) / *교통(交通) / *농업(農業) / *역사(歷史) / *구휼(救恤) / *어문학(語文學) / *풍속(風俗) / *윤리(倫理)
[주D-001]칠묘(七廟) : 주대(周代)의 천자(天子)의 종묘(宗廟). 곧 태조(太祖)의 종묘와 삼소(三昭)·삼목(三穆)의 총칭.
[주D-002]오묘(五廟) : 제후(諸侯)의 종묘(宗廟). 곧 태조(太祖)의 종묘와 이소(二昭)·이목(二穆)의 총칭.
[주D-003]소목(昭穆) : 종묘(宗廟)에 신주(神主)를 모시는 차례. 천자(天子)는 태조(太祖)를 중앙에 모시고, 2세·4세·6세는 소(昭)라 하여 왼편에, 3세·5세·7세는 목(穆)이라 하여 오른편에 모시어, 3소·3목의 칠묘(七廟)가 되고, 제후(諸侯)는 2소·2목의 오묘(五廟)가 되며, 대부(大夫)는 1소·1목의 삼묘(三廟)가 됨.
[주D-004]좌주(座主) : 고려 때 감시(監試)의 급제자가 시관(試官)을 일컫는 경칭(敬稱).
[주D-005]성균 정록소(成均正錄所) : 성균관(成均館)의 직원(直員)이 시정(時政)을 뽑아 적어서 보관하던 곳.
[주D-006]책문(策問) : 시무(時務)의 문제(問題).
[주D-007]《무경칠서(武經七書)》 : 일곱 가지의 병서(兵書). 곧 《손자(孫子)》·《오자(吳子)》·《사마법(司馬法)》·《위료자(尉繚子)》·《황석공삼략(黃石公三略)》·《육도(六韜)》·《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임.
[주D-008]기인(其人) : 고려 초기에 향리(鄕吏)의 자제(子弟)를 뽑아 서울에 데려와서 볼모로 삼는 한편, 그 출신 지방의 사정에 관한 고문을 삼았음.
[주D-009]선군(選軍) : 고려 때 군사를 뽑는 일을 맡아 보던 관아.
[주D-010]삼사(三司) : 고려 때 전곡(錢穀)의 출납과 회계의 사무를 맡아 보던 관아.
[주D-011]조호(助戶) : 봉족(奉足).
[주D-012]가구소(街衢所) : 순검군(巡檢軍)에게 체포된 범금자(犯禁者)를 구치(拘置) 치죄(治罪)하는 일종의 구류소(拘留所)와 같은 것임.
[주D-013]사첩(謝貼) : 직첩(職牒).
[주D-014]《대명률(大明律)》 : 중국 명대(明代)의 기본적인 형법전(刑法典).
[주D-015]부과(附過) : 공무상 과실이 있을 때에 곧 처벌하지 않고 관원 명부에 적어 두는 것.
[주D-016]한산군(韓山君) : 이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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