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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기미 위쪽 해안 절벽 위에서
[청산기행] 목섬에서 범바구까지 / 김류수
2014년 첫 여행은 가벼웠다. 한껏 지고 가던 무거운 짐을 가는 해에 떠맡기고 새해 가벼운 마음으로 고향 청산에 가자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이주일 전쯤 내 마음 속의 풍금 같은 누나가 전화를 해왔다.
‘류수야 청산도에 갈려면 어떻게 가야돼?’
나의 반응은 즉각적 이었다.
‘누나 청산에는 제가 모시고 갈께요’
너빠퉁과 함께 가려 했던 계획이 찰나에 바뀌었다. 나는 녀석보다 풍금 소릴 좋아했으므로...
누나는 내가 대학교 때 만났다.
아마 대학교 이학년 때였을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나는 장애인 선교기관의 활동가를 자처하며 내 시간의 대부분을 장애인들을 만나고 섬기는데 보내고 있었다. 누나는 밀알선교단 활동가(단원)로서 시각장애인 학교인 서울맹학교 담당 팀장격이었다.
이후 내가 지켜본 누나는 150이 안되는 작은 키에 장애인 타이틀을 달고 사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해맑은 웃음을 가진 하나님의 사랑을 온몸으로 반사하는 거울이었다. 그 이전에는 그런류의 사람을 보지 못했던 내게는 그런 누나의 삶과 섬김이 충격이었다. 당시 나보다 일곱 살 정도 많았던 누나는 고등학교 행정실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후 일과 대학공부를 함께 하고 대학원을 다닌 후 현재는 특수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매형인 남편은 함께 교회를 섬기던 분인데 나는 매형을 맹학교 봉사활동을 하던 당시 교회에서 보았다. 그 누나에 그 남편 이었다. 매형도 강남에 있는 여고 교사로 재직 중이다. 누나는 나를 ‘자기야’ 또는 ‘상형아’라고 부른다. 물론 매형 앞에서. 애정이 뜸뿍 담긴 누나의 순수 언어를 알기에 매형도 나도 그런 애칭에 어색하거나 토를 달지 않는다. 누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최대한 애정을 담아서 불러 줄 것임으로, 오랜 세월 나의 삶의 아픔과 방황을 누나는 늘 말없이 품어 주었다.
▲ 누나와 매형과 함께
그런 내 마음 속의 풍금과 그 연주자가 청산에 함께 가자는데 내가 너빠퉁 눈치를 보며 저어할 이유가 있었겠는가.
D-Day는 1월 6일 월요일 새벽 시간이라 할 수 있는 5시에 집에서 출발해 누나가 사는 암사동으로 갔다. 그곳에서 내차를 두고 누나네 차에 짐을 옮겨 싣고 출발한 시간이 아침 8시였다. 청산을 가는 동안 매형은 운전을 하고 나와 누나는 그동안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완도에서 해오라기님이 여객터미널에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번 느린섬카페에서 모아진 기금 일부를 완도군 해초박람회를 준비하고 있는 완도군에 기부한 것과 관련하여 완도 군수님의 요청에 의해 면담을 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청산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30분. 작가의 집에 짐을 풀었다. 청산 작가의 집이 조성된 이후 한번쯤 이곳에 머물고 싶었는데 마침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작가의 집은 두 채의 건물에 각각 방 2개와 주방 화장실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우리는 그중 안쪽 건물에 머물렀는데 펜션처럼 몸만 가면 해결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4인이 사용할 수 있는 주방 식기까지 일습으로 갖추어져 있어 요리도 해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비록 대부분의 식사를 밖에서 해결하기는 했지만...
첫날은 해오라기님의 차량을 얻어 타고 물푸레와 너빠퉁에게 부탁받은 것들을 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청산중학교에 가서 교장선생님에게 ‘결’을 전달하고 과일 상자를 들고 너빠퉁 집에 방문하여 아부지께 인사를 드리고 물푸레 엄니한테 들렀더니 아뿔사 어머님은 경로당에 가서 안계셨다. 과일만 들여다 놓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작은집 형수님께 들렀지만 들에 나가고 없어서 그곳에도 과일만 놓고 그냥 왔다. 해오라기님이 아짐찬하게 저녁식사에 초대해서 세 사람이 대접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해오라기님을 청산에 빼앗기고 독수공방 한다는 사모님과 이번에 완도군수상을 수상했다는 박은선 문화해설가님께 위로와 축하의 선물로 책을 선물했다. 해오라기님이 책을 보여 달라고 하면 꼭 돈을 받고 보여주라는 당부와 함께. 해오라기님의 청산에 열정은 오롯이 사모님의 인내와 배려의 뜻이 담겨있다는 생각을 하였으므로 당연히 나는 사모님께 위로와 고마움을 표현해야 했다. 이번 여행도 해오라기님의 시간을 본의 아니게 많이 빼앗는 여행이 되었다.
호 친구에게 전복을 미리 주문했더니 가져왔다. 책 한권은 호에게 갔다. 선물이라 했지만 한사코 돈을 놓고 간다. 저녁시간 작가의 집에서는 전복 잔치가 벌어졌다. 누나와 매형에게 청산의 특산물인 전복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대접을 하게 되어 마음이 흐뭇했다. 식사 후 누나가 잠시 쉬는 동안 두 사람은 별구경을 나섰다. 작가의 집에서 1km정도의 거리에 있는 상산포까지 걸으면서 멀리 보적산 쪽의 초승달과 별무리들이 은하수 계곡을 따라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비록 옛 시절 온 하늘에 황홀하게 반짝이던 별무리 정도는 아니었지만 도시에서 볼 수 없는 광경을 오랜만에 볼 수 있었다. 낮엔 포근하던 날씨가 상산포까지 걸어가는 동안 제법 찬 기운이 옷 속에 파고든다. 방파제 끝에서 목섬 쪽을 바라보니 잠자는 공룡의 등만 보였다. 30여분의 산책은 맑은 고향을 호흡하기에 충분한 시간 이었다. 정신이 다 맑아온다.
둘째 날 일출을 보면서 슬로길 산책하기로 하고 7시 기상하여 30분경 읍리쪽으로 갔다. 차는 앞개로 들어서는 큰길 입구에 세워 두고 산책을 시작했다. 해는 이미 떠올랐는지 범바위쪽 하늘이 환하다. 시간과 방향을 잘 못 잡아 결국 일출은 산위로 떠오르는 눈부신 태양을 바라보는데 만족해야 했다. 지난번 산책을 했던 대로 앞개-화랑포-서편재길을 따라 읍리가지 오는 길을 두 시간 여유 있게 걸었다. 두 분은 연신 감탄사다. 호수처럼 고요한 바다와 산길 밭둑길에서 만나는 열매와 아직 고개를 들고 있는 이름 모를 들꽃 하나하나가 신기한 듯 했다. 여행 후 남는 것은 사진 밖에 없다는 듯 길목마다 두 분의 사진을 남겼다. 여행 가이드의 역할을 이만큼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어렸을 적 지게지고 걷던 산길에 대한 추억과 바다에서 뱁을 잡아 팔던 추억 뱅꼬 주워다 팔아 공책 샀던 추억까지 온갖 추억이 슬로길과 함께 펼쳐졌다. 세 사람의 아침 산책길은 한 토막의 오래된 필름이 돌아가는 극장이었다. 이 극영화는 오랜 시간 기억의 롤 속에서 맴돌며 끝없이 상영되어질 것이다.
▲ 화랑포 길 위에서
슬로우길 산책이후 누나 네는 휴식을 취하기로 하고 해오라기님과 대성산에 올랐다. 지난번 해오라기님이 대성산에 혼자 올라가 요망대를 찾아 봤으나 없었다고 했지만 한 번 더 올라가 좀 더 샅샅이 돌아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성산’과 ‘대선산’이 청산팔경 사료에서는 겹쳐지는 부분이 있어 요망대의 유무가 ‘대성산’과 ‘대선산’의 본래 이름을 찾아주는 키 역할을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했다.
선음약수터까지 해오라기님 차를 타고 올라가 그곳에 주차를 하였다. 들고 간 보온병에 너빠퉁 아부지가 날마다 길어 나르는 약수를 가득 채워 넣었다. 붕리재를 거쳐 대성산을 오르기도 하고 길을 걸었다.
걷다보디 곳곳에 멧돼지가 파헤쳐 놓은 자국들이 있었다. 아마도 이 겨울에 들에 곡식이 없으니 뿌리를 찾느라 땅을 헤집어 놓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붕리재를 오르는 길은 등산로를 비교적 정비해 놓았다.
오르는 길에는 사패나무(사철나무) 군락지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어릴 적 염소가 즐겨 먹어 겨울이면 뒷산에 올라가 베어다가 염소를 먹이곤 했었는데 사람의 두 길이 다되는 높이의 사패나무가 이처럼 넓게 군락을 이룬 곳을 본적이 없어서 사파나무터널 이라고 불러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사패나무(사철나무) 터널
대성산 정상 부근에는 요망대가 있었을 거라 추정할 수 있는 곳이 세군데 있었다. 대성산 정상지점에서 10m 정도 거리에 마치 담을 쌓은 듯 한 곳과 돌무더기가 있어서 주변을 10여분 동안 전지가위를 동원해 나무와 풀을 일일이 헤치고 자세히 살펴본 결과 큰 바위가 여러 조각 금이가 마치 쌓은 듯 한 모양이 된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정상과 정상5m 정도 위치에도 그와 비슷한 자리가 두 곳이 있어서 각기 나뭇가지와 풀을 헤치고 살폈지만 요망대로 판단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대선산의 요망대와 고성산의 성터, 봉수대의 쌓은 돌담과 같은 사적은 없는 것으로 최종 판단 할 수밖에 었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사는 청산팔경 중 제4경인 대성야우- ‘밤비 내리는 대성산의 요망대’ 에 대한 최종확인 작업으로서의 의미를 부여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대성산에 요방대 자리가 없다면 청산도 고지도에 나타나는 대성산에 표시된 요망대는 검증이 필요한 숙제로 다시 남게 된 것이다. 함께 해준 해오라기님께 감사를 전한다.
점심은 느린섬학교에서 슬로우푸드로 했다. 도시 사람들이 먹어 볼 기회가 없는 탕과 청산도 특유의 호박나물 해초류의 식단을 두 분에게 소개하고 싶어서였다. 지난번 작가 팸투어 때 메뉴와는 차이가 나는 식단 이었지만 깔끔하고 건강식 위주여서 좋다들 했다.
내겐 오래된 숙제처럼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너는 청산도 사람이여’ 하고 말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청산도 산하를 한번쯤은 밟아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스스로에게 ‘청산사람’의 의미부여를 하는 무슨 의식 같은 것이 바로 지난번 종주(상산포->오산->대봉산-대성산->대선산->고성산->보적산->범바구)에 이은 2차 종주(목섬->매봉산->작은기미->큰기미->범바구) 하는 것이었다.
점식을 먹자마자 대풍 동생과 목섬으로 이동 했다. 목섬의 모가지를 가보는 것은 내일 아침 일출을 그곳에서 보는 것으로 미루고 바로 산행을 시작 했다. 목섬에서 출발 시간은 2시 45분이다. 지난번 대풍과 너빠퉁이 걸었던 길이다. 그때와는 다르게 목섬에서 치거리재 까지는 등산로 정비를 해 놓아 걷기에 수월했다. 대풍은 장기미까지 약 세 시간 거리라고 했다. 푸른 바다가 나무 사이로 얼핏 보이는 동촌 뒷산 길은 비교적 완만한 길의 연속이었다.
▲ 목섬 입구에서 대풍과 함께
걷다보니 어제 대성산 길처럼 멧돼지가 여기 저기 파헤친 흔적과 물가에 멧돼지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두 사람은 멧돼지 뒷 담화를 한찬동안 하며 걸었다. 멧돼지가 주변에 숨어서 들렀다면 귀가 간지러웠을 것이다. 생명에 대한 외경으로 살려고 하는 멧돼지 마당으로 들어와 무작정 터 잡고 자기네 땅이니 하는 것이 누군데 ‘도대체 인간들이란 느자구가 없는 것들’이라고 욕할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이기적이다. 고로 나도 이기적이다. 삼단논법의 정언명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실 인간의 삶은 이기적인 활동의 연속인 것이다. 청산에 발자국을 남기는 이 걸음조차도 뭔가를 이룬 듯한 착각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자 하는 이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부인 할 수 없다.
걸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대풍은 자꾸 뒤쳐진다. 목섬이 보이는 길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의 1/5 정도에 지나지 않는데도 하소연이다. 자신의 몸무게가 얼만지 아느냐. 너빠퉁이랑 걸었을 때는 그래도 비까비까 했다. 앞서 걷다가 기다리는 것이 반복 되었다. 나는 오늘 아침에 슬로길 5km 가량을 걷고 대성산 왕복 6km를 걸었으니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따지면 만만치는 않을 길이었지만 젊으나 젊은 대풍이 내게 하소연을 할 정도였다. 걸어보지 않았던 길이니 겨울 짧은 해를 감안해서 조금 빨리 걸어야 하지 않은가 생각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길안내를 맡은 동행자의 걸음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갯내와 소나무 향기가 마음을 맑게 한다. 며칠 전에 북한산을 다녀왔는데 그곳은 온통 낙엽송이 대부분이 어서 숲이 텅 빈 듯한 느낌이 이었다면 청산의 숲은 겨울에도 이름 그대로 푸르른 소나무가 대부분이다. 이런 숲은 육신을 정화할 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청정하게 한다. 역시 청산은 청산이다.
▲ 목섬이 보이는 구간
걷는 길에 자주 바다 쪽으로 눈길이 간다. 서쪽과는 다르게 이곳 산길은 대부분이 해안절벽에서 수십 미터 씩 거리를 두고 있다. 목섬이 보이는 마지막 산등성이 펑퍼짐한 돌에 다다라 대풍은 꼭 쉬어줘야 할 자리라며 주저앉는다. 그곳에서 사진 하나를 남겼다. 등산 지팡이에 물병을 넣은 작은 배낭을 멘 것이 제법 트래킹을 나선 차림 이었지만 그에 비해 나는 보온병 하나를 달랑거리며 들고 걸어서 그런지 영 모양이 나지 않는다. 마침 그것에 누군가 가지고 걷다가 기대어 둔 나무 지팡이가 있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혹 멧돼지가 나타나면 침략자의 심성으로 선제공격을 해야 할지도 모르잖은가. 대풍은 멧돼지를 하나 붙잡고 뒹굴면 둘 중에 하나는 승부가 날거라지만 들이받고 튀면 사상자는 이쪽이 될 가능성이 컸다.
땀이 식기 전에 서둘러 길은 나선다. 가는 길에 선홍빛 동백꽃도 보이고 이름을 압 수 없지만 단비 머리에 꽂으면 이쁠 것 같은 송이송이 빠알간 빛깔의 이름모를 열매도 사진에 담았다. 산길을 돌아드니 동촌 방향 표지판이 서있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어지는 길도 그렇게 가파르거나 힘든 길은 아니었다. 청산의 어디를 가나 걸었던 그런 소소한 길이다.
너빠퉁과 대화중에 자주 등장했던 그 이름도 유명한 치거리재가 아직도 멀었냐고 물었더니 한참을 더 가야 한단다. 대풍은 ‘거기 올라 갈라믄 죽을 똥 살 똥 할거요’ 라며 지레 겁을 준다. 두 번째 휴식 장소에서 올려다본 치거리재는 산 이부능선 쯤에서 8부 능선까지 가파르게 이어지고 있었다.
▲ 산길에서 만난 이름을 알 수 없는 열매... 천남성 이란 열매라는데...
휴식 장소에서 제법 한참을 내려 간 다음에 다시 올라가는 코스였다. 시간은 한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치거리재는 대풍에게는 천천히 올라 오라고 말하고는 단숨에 끝까지 쉬지 않고 올라갔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는 땀도 거의 흐르지 않았었는데 가파르게 이어지는 길을 오르자니 몸에서 열기가 올라오고 제법 이마에는 땀이 맺힌다. 그래도 쉬지 않고 고개를 채고 나서 아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나는 다 올라 왔네’ 물을 마시고 땀을 훔치며 4분여를 기다리니 대풍이 보였다. 걷는 폼이 천근 만근 지고 올라오는 폼이다. 올라오면서 ‘대단하요. 어떻게 치거리재를 그렇게 뛰 댕기듯이 가베요’ 한다. 깔딱고개로 불릴만한 곳까지 올라 잠시 숨고르기를 하고 3분여를 수평이동 하듯 약간 경사진 길을 조금 더 가니 치거리재 정상이다. 제법 너른 초지가 있는 이곳은 매봉산 7부 능선중턱이며 청계리와 작은기미 이정표가 서있는 곳이기도 하다. 등산로 정비는 치거래재까지 되어 있었다.
치거리재까지 한 시간 이십여 분 정도가 걸렸다. 다시금 작은기미 방향으로 산길을 걸었다. 정비가 되어 있지 않아 마른 풀이 스치기는 하지만 길은 확연하고 걷는데 지장이 없었다. 이곳에서 부터는 평지 걷듯이 오르내리막이 거의 없었다. 10여분을 걸으니 꽁돌바구가 나온다. 옛날 함마이가 꽁놀이(공기놀이)를 하다가 꽁돌바구가 생겨났다는 그런 전설이 있는 바위다. 이전에 말로 들었을 때는 더 큰 방위로 여겼었는데 바위로 몇 개로 갈라져 있었고 세워진 모양으로 서 있었지만 그렇게 커 보이지는 않았다. 전설 앞에서 사진을 하나 남겼다. 언젠가는 청산에 있는 바위와 그에 관한 전설도 기록 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참을 걸으니 멀리 범바구 있는 산자락이 보이는 재다. 이곳도 매봉산 7부 능선쯤 되는 곳으로 이곳에서 금방 매봉산에 오를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재 이름을 물었더니 대풍도 모른다고 한다. 그곳에서 부터는 내리막길이다. 한참을 내려가다 보니 너럭 바위가 나온다. 시원하게 바다가 내려다보이고 작은 거북이라는 상섬이 바로 내려다 보였다. 시원하게 바람도 올라와 땀을 씻어준다. 그리 멀지 않은 산자락 떨지락에 열 댓마리의 흑염소때가 보인다. 대풍의 말로는 아무나 잡은 사람이 임자라는 염소다. 임자가 없다는 말에 몰이나 한번 해볼까 욕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지만 바위산의 염소는 바다의 날치만큼 날쌔다는 것을 생각하며 욕심을 눌렀다. 잠시 그곳에서 땀을 식히며 아름다운 청산의 산하를 내려다본다. 이런 곳을 두고 도시의 시멘트에 갇혀 사는 삶의 애처로움에 마음이 갔다. 무엇을 바라고 도시 한켠에서 사는가. 내고향 청산을 이곳에 두고...
▲ 제주도에 여행 같다는 제수씨와 통화 하고 있는 대풍
▲ 건너편 산골짜기에 흑염소 때
비탈길을 내려오니 낭떠러지 앞에 서있다. 내려다 보니 아찔하다. 언젠가 앞개민박 형님과 배를 타고 청산일주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올려다 본 느낌과는 전혀 다르다. 그야말로 깎아지른 절벽이다. 사진에 담으면서도 이런 아찔함 까지는 사진에 담길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내리막길이다. 통통 튀듯이 달려 내려갔다. 대풍은 멀리 걸어 내려온다. 나는 산을 혼자 탈때는 내려 올 때는 통통거리며 달려 내려온다. 통통 거리면서 뛰면 다리에 무리도 안갈 뿐더러 올라가는 시간의 반이면 내려온다. 나만의 등산법이다. 내려서니 작은 기미다. 지나는 길에 보니 돌로 쌓인 곳이 있다. 맬 막 이란다. 이렇게 먼 곳까지 맬막을 짓고 삶을 이어 갔으려니 생각하니 그 마음이 아득하다. 한창을 올라 고개를 채니 바로 아래 장기미가 보인다. 잠시 그것에 앉아 장기미 주변의 절경을 내려다본다. 청산의 해금강리라는 곳이다. 병풍바위가 기둥처럼 해안을 장식하고 있다. 오래도록 두고 보고픈 풍경이다. 이곳까지 두 시간이 걸렸다. 해는 늬엇 거린다. 원래는 장기미까지 걷기로 했으나 내친김에 범바구까지 걷기로 했다. 부지런히 걸어 내려갔다. 가다가 해변쪽으로 돌아드니 이곳에도 사패나무 군락이다. 키는 어제 보았던 봉리재 군락지도다는 작았지만 너른 지역을 온통 사패나무가 차지하고 있다. 넓게 조성된 길을 조금더 내려가니 공룡알 해변 이라는 장기미다. 3시간 거리를 2시간 10분이 걸린 셈이다. 대풍은 해변까지 이어진 골짜기 물이 길어서 장기미라고 한다고 했다. 그 뜻을 확인을 해봐야겠지만 작은기미에는 골짜기가 없는 것을 보면 다른 뜻이 있지 않을까 싶다.
▲ 고갯길에서 내려다 본 장기미 해안 절경
쉴 틈도 없이 범바구를 향해 돌계단이 이어지는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가파른 산길에 돌계단을 만들어 놓은 이의 마음을 헤아리며 앞서 올라갔다. 중간쯤에 제법 큰 바위가 있었다. 청산 곳곳에 있는 바위에 관심이 간다. 이름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선대부터 삼람들에게 바위가 주는 의미를 짚어 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겠기 때문이다. 마지막 고개턱을 오르니 전망이 좋은 곳에 누군가 탑을 쌓아 놓았다.
사진 찍기 좋은 곳이라는 푯말과 함께. 이제 해는 어스름만 남기고 져가고 있었다. 정상에 오르니 연인 두 사람이 사진을 찍고 있다. 범바구 전망대에서 시간을 보았다. 정확히 2시간 40분의 시간동안 목섬에서 이곳까지 걸었다. 대풍은 잠시 후 도착 했다. 청산 다람쥐 따라 걷느라 힘이 들었겠다. 덕분에 기록적인 시간에 그 먼 거리를 주파 한 것은 내덕이 아닌가. 슬로우 길을 빠르게 걷는 게 아니지만 어쩌면 50대라는 자신의 체력을 실험 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 목섬~범바구 종주를 마치고 어스름 녁
이로써 스스로에게 주어진 ‘청산사람’ 타이틀을 땄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을 타이틀이지만 청산에서 나고 자라 스스로 청산 사람이라고 하는 내가 꾸어온 꿈의 한 자락을 오십이 넘은 지금에야 이룬 셈이다. 아마 다음부터는 청산의 산하를 좀 더 마음 편히 대하며 걸을 수 있을 것도 같다. 한번쯤 꼭 밟아 보고픈 길이었다. 이번 여행은 2014년 새해 나에게 준 큰 선물이다. 함께 길을 나서 준 대풍 동상에게 고맙다. 어떤 사람의 꿈은 히말라야 트래킹 코스 일수도 있지만 나는 작고 소박한 그 일을 꼭 해보고 싶었다. 언젠가는 그 산하에 나를 묻고 싶어서 인지도 모른다. 청산의 순한 그 길에 서 있을 때 나는 행복 했다. 길은 많지만 모두 같은 길은 아니다. 어쩌면 청산도의 길만이 연어가 귀향길을 거슬러 올라가서 만나는 태 같은 곳인지도 모른다. 2014.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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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인연과 함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고, 고향산 정기를 흠뻑 받았으니
새해 건강은 물론 매사 순조로울 거네.진정한 애향인으로 인정하네
읽는동안 나는 실향인?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누가 내게 고향을 물으면
어찌할꼬! 미안스럽구만 올 한해도 부족한 내게 많은 울림을 주시게나. 고맙네.건강하게.
삶의 핑계로 훌쩍 다녀왔던 고향이었죠!
시인님 덕분에 아련히 멀어지던 지명이 떠오르네요.
어린시절 매봉산 정상에서 청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육지를 동경 했던 기억이 어제의 일처럼 생각드네요.
긴 ㅡ
기행문을 뵈는동안 그곳에 있는 기분입니다.
번던행님 그것은 저에게 지워진 멍에입니다. 행님은 늘 고향에 마음을 두고 계시니 재향인 입지요. 덕분에 분에 넘치는 한해 보낸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잊지않겠습니다.
씨윌드사랑님 고향분이셨군요. 귀한 시인 오셨으니 이곳이 더 풍성해질 것 같습니다.
행님 그열매가 천남성 이라고 그라요야~^^
우리는 뱃터에서 만남의 기쁨과 이별의 짠한 맛을 동시에 느끼고 삽니다, 배가 작은점으로 사라지면 훵하니 서 있는 두개의 등대만 보이지요,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 라는 막연한 생각과 쓸쓸함은 익숙해지지 않나 봅니다, 섬사람이 다 됐을까요? 귀한분(내외분) 안내 할 곳이 있었는데 2박3일이 깜짝 할 사이에 지났습니다, 류수님의 시한편 듣지못했습니다
새목아지 일출 계획이 우천관계로 아쉽습니다, 청산도 가장 동쪽 끝머리에서 솟는 여명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벌써 자정이군요, 초저녁에 수도꼭지가 얼고 매섭습니다,
따뜻함으로 더 많이 포용하여 류수카페가 철철 넘치시길 바랍니다.
청산에 머무는 동안 내내 해오라기님 내외께서
귀한 시간을 저에게 투자해주시고 도와 주셔서 너무도 감사합니다.
덕분에 시를 쓰고 자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짧은 일정에 너무 많은 일들을
처리하느라 아쉬웠지만 조만간에 또 뵐 수 있겠지요.
이곳은 영하 10도를 오르내립니다. 바깥이 추으니 마음도 함께 추워지는 군요,
천남성.. 처음 들어본 열매네. 어렸을적 산을 갈고 댕겠어도 못본 열맨데...
행님 울칭구가 한약 쪽에 있는디 물어본깨로 천남성 이라 그랍띠다. 인터넷 참조 ~^^
한약제로도 쓰인다는 말이네... 인터넷 찾아보니 나오는구먼....천남성은 강한 자극이 있어서 생것을 입에 넣으면 입안이 부르트고 목안이 아린다.
유독성분이 함유되어 있어서 허약한 사람이나 임산부에게는 쓰는 것을 조심해야 하는 생약으로 한방에서는 수분대사를 시키는 거담제(祛痰劑)로 쓰고, 진통 진정제로 관절염, 신경통, 해소, 상한, 파상풍, 창종, 구토, 간질, 진경, 허리가 아픈 담에 효과가 있으며 중풍으로 인한 반신불수, 언어장애, 안면신경마비증에도 많이 쓴다. 이렇게 나오는구먼...
귀한 글 인자사 끝까지 읽었네.
대봉산 줄기에 이어 매봉산 줄기까지 나도 이녁따라 숨가쁘게 걸었구마.
나도 그 길을 함 꿈꿔볼라네.
언제 청산 함께 갈일 있으면 그땐 자네하고 둘이 걷고 싶네. 그길을 천천히 걸으며 50년 세월을 이야기 하고 싶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