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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연합회 서장Ⅱ 특강 3강-2 (2013. 10. 28.)
陳少卿 季任(二). 答 趙待制 道夫
참~~ 아주 적절한 도인들의 말씀을 인용해서 이 한 편의 편지가 얼마나 무게가 나가는지 몰라요. 대혜스님 혼자의 글이 아니고, 조사스님들의 깨달음의 말씀을 그대로, 주옥같은 깨달음의 말씀을 이렇게 갖다 놓은 겁니다. 그러니까 그 편지 무게가 보통 무거운 것이 아니지요. 또 인용하지요.
又先聖이 云(우선성운), 그랬습니다.
여기 先聖은 달마대사입니다.
但有心分別計較(단유심분별계교)면
自心見量者가 實皆是夢(자심현량자실개시몽)이라하시니,
이렇게 했습니다.
但有心分別하면, 다만 마음을 두어서 분별 계교할 것 같으면,
自心見量者가, 자기 마음에 見量(현량).
見:현이라고 발음하지요. 나타날 현. 나타난 량이 그것이 전부 꿈이다. 뭐가 나타났든지ㆍ얼마가 나타났든지 見量하면 그 말입니다. 나타난 량이, 나타난 그것이 전부 꿈이다. 다 꿈이다. 우리 망상으로 분별해서 인식 되어지는 모든 것들은 꿈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한 생각 거둬들이면 아무 것도 아닌 겁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은 해몽을 하도 잘한다고 하는 소문이 있어서,
왕이, 이 사람이 진짜 해몽을 잘하는가? 시험하려고 불러서는
“내가 어젯밤에 이상한 꿈을 꿨는데 한 번 해몽을 해보라.” 그랬어요.
“어떤 꿈을 꿨습니까?” 하니까 왕이 하는 말이
“궁전에서 기와가 떨어지는 꿈을 꿨다.” 그렇게 말한 겁니다. 시험해 보기 위해서 사실도 아닌 겁니다. 그러니까 그 해몽하는 사람이 깜짝 놀라면서,
“아이고 큰일 났습니다. 오늘 이 궁중에서 무슨 살인 사건이 있을 수도 있겠다.” 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 해몽자가 나가기도 전에 왕에게 보고가 들어오는 겁니다. 궁녀들이 싸우다가 뭘 던져서 머리에 잘못 맞아서 사람이 죽었다는 겁니다. 이 왕은 벌써‘내가 이러한 것을 거짓말을 해서 저 사람을 시험해야지’하고 이미 마음속에 지어놨어요.
그 해몽하는 사람이 그대로 맞췄으니까 왕이 기가 막힐 노릇 아닙니까?
“내가 자네 시험하기 위해서 일부러 없는 이야기를 꾸며서 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똑 떨어지게 맞추느냐?” 그랬다고요.
그 사람 하는 소리가 그래요. “꿈만 꿈이 아니라 한 생각 일으킨 것은 전부 꿈입니다.” 그랬어요. “꿈만 꿈이 아니라 한 생각 일으킨 것은 전부 꿈입니다.” 뭐라고요? 自心見量者가 實皆是夢이라. 자기 마음에 드러낸, 나타낸 것들은 전부 꿈이다. 진실로 이것이 다 꿈이니라. 실로 이것은 다 꿈이다. 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꿈도 뭐지요? 晝思夜夢(주사야몽)이라. 그러잖아요. 생각해서 밤에 잘 때, 낮에 생각 많이 한 것이 꿈으로 나타날 수가 있고, 자기가 일부러 마음을 지어서 ‘내가 이것을 한번 시험해야지’ 하면 그것도 역시 꿈이 되는 것이고요. 우리마음 속에 무단히ㆍ무단히 한 생각 일으키면, 그것 다 허망한 것이지요. 허망한 일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切記取(절기취)어다. 간절히 기억해서 취할지어다.
記取 = 간절히 기억할지어다. 그 말입니다.
嚲避不得時(타피부득시)에,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곳에, 피하지 못하는 그 때에,
不得作擬心(부득작의심)이니,
마음을 헤아려서 짓지 말지니, 擬心. 헤아릴 擬자거든요. 마음 헤아림을 짓지 말지니, 嚲避不得時. 밤 먹게 되면 그냥 밥 먹어요. 잠 오면 그냥 잠자요. 잠 안 자려고 너무 그렇게 씨름하지 말고요.
不擬心時(불의심시)에, 마음을 헤아리지 아니할 때에,
一切現成(일체현성)하리라. 일체가 다 現成. 거기에 다 이루어져 있다.
그대로 완전무결하다 이 겁니다. 現成 = 이미 다 드러나서 이루어져 있다.
그대로 완전무결하다. 본래 아무 탈이 없는 겁니다. 본래 아무 탈이 없습니다.
대혜스님은 평소에 화엄경을 좋아 하셨습니다.
저~ 기 행장에도 보면 견성하고 나서 어디 가서 화엄경을 읽었다 하는 그런 말이 있고, 또 여기 편지에도 보면 간혹 화엄경을 인용하는데요.
화엄경의 이치가 그대로一切現成입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이미 그대로 頭頭物物(두두물물)이, 頭頭가 화장장엄이요, 또 物物이 비로이다. 비로자나부처님이다. 그런 주의 아닙니까? 그래서 화엄경을 잘 표현한 그 시에 소동파도 그런 표현을 했잖아요.
溪聲便是廣長舌(계성변시광장설)
山色豈非淸淨身(산색기비청정신)가?
시냇물 소리 그대로가 부처님의 광장설법인데,
산천초목이 그대로 어찌 청정법신 비로자불이 아닌가?
이것이 一切現成입니다. 일체가 다 드러나서 완성 돼 있는 것. 그대로 완성 돼 있는 것. 一切現成입니다. 이것이 화엄사상이지요.
亦不用理會利(역불용이회리)하며,
또한 영리한 것을 이해하려고 쓰지도 말며, 理會나 이해나 같습니다.
여기는 會라는 말을 잘 쓰는데... 그리고 또
亦不用理會鈍(역불용리회둔)이니,
둔한 것도 또한 이해하려고 쓰지도 말라. 영리한 것도 알려고 하지 말고 둔한 것도... ‘내가 영리한가? 내가 둔한가?’ 이런 것, 생각 하지 말라. 이겁니다.
總不干他利鈍之事(총불간타이둔지사)며,
모두 다 저 영리하다ㆍ둔하다고 하는 일에는 간섭되지 아니한다. 관계없다 이 말입니다. 무슨 가을이 돼서 울긋불긋 단풍이 드는데, ‘아이 자네 영리하고ㆍ둔하고 그것하고 무슨 상관이냐? 아무 관계없다.’ 이겁니다. 또
‘영리한 것을 알든지, 둔한 것을 알든지 하는 것 하고, 단풍 붉게 물드는 것 하고 무슨 상관이냐?’ 이 말입니다.
**總不干他利鈍之事입니다.
저 利鈍의 일에는 아무 간섭이 되지 아니해요. 만유가 다 그래요.
일체만유가 다 똑 같다고요.
亦不干他靜亂之事(역불간타정난지사)라.
또한 고요하다ㆍ시끄럽다ㆍ어지럽다하는 그런 일에도 간섭되지 아니한다.
관계되지 않는다.
正當嚲避不得時(정당타피부득시)하야,
그 확연히 깨달은 사람이 당신의 입장에서 이렇게 자유자재로 표현한 것을, 우리가 그것을 사량 분별로 꿰어 맞춰서 이해하려고 하면, 사실 이것이 우리입장에서는 상당히 마음을 써야 됩니다.
亦不干他靜亂之事라 正當嚲避不得時하야,
바로 嚲避不得時를 당해서, 피할래야 피하지 못할 때를 당해서,
밥을 먹게 되면 밥을 먹고, 울력하게 되면 대중들하고 울력을 해야 할 그 때에,
忽然打失布袋(홀연타실포대)하면,
홀연히 포대를 쳐서 잃어버릴 것 같으면, 布袋라고 하는 것은 識心布袋(식심포대)입니다.= 의식 = 딴 생각이 없다. 이 말입니다.
布袋를, “識心을 쳐서 잃어버린다.” 이 말은, 청소하면 그냥 청소만 하는 겁니다. 더 이상 사량 분별을 거기에 갖다 붙이지 않는 것이지요. 식사하면 식사만 하는 겁니다. 거기 더 이상 다른 것을 갖다 붙이지 말고, 딴 생각 갖다 붙이지 말고요. 그러면
不覺(불각)에 拊掌大笑矣(부장대소의)리니,
모르는 사이에 손바닥을 부여잡고 크게 웃을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확철대오 하는 소식이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밥 먹으면 밥 먹고, 옷 입으면 옷 입고, 잠자면 잠자고 하는 거기에,
거기에서 바로 망상 없이 오로지 그것에만 열중하다 보면, 무슨 일을 하든 그 하는 일에 열중하다 보면 어느 날 홀연히 깨닫는 소식이 있을 것이다.
記取記取(기취기취)어다. 기억해서 취하고ㆍ기억해서 취할지어다.
이것은 기어이 꼭 기억해라. 이 말입니다. 取자를 붙인 말은, 취할 取자가 ‘머리에 꼭 새겨두라. 반드시 새겨두라.’ 이 말입니다.
此事를 若用一毫毛나 工夫取證則如人이 以手로 撮摩虛空이라
只益自勞耳니라 應接時어든 但應接하고 要得靜坐어든
但靜坐호대 坐時에 不得執着坐底하야 爲究竟이니 今時邪師輩가
多以黙照靜坐로 爲究竟法하야 疑誤後昆일새 山野不怕結怨하고
力詆之하야 以報佛恩하며 救末法之弊也로라
此事(차사)를 若用一毫毛(약용일호모)나,
이 일을 만약에 一毫毛나, ‘공부에 취증해서 사용함이 있은즉.’ 그 말입니다.
工夫取證則(공부취증즉),
공부에 취해서 그것을 증거로 삼는다든지 한다면,
如人이 以手(여인이수)로 撮摩虛空(촬마허공)이라.
어떤 사람이 손으로써 허공을 만지는 것과 같다.
只益自勞耳(지익자로이)니라.
다만 스스로 더욱 피로할 따름이니라. 허공을 만지려고 손을 가지고 아무리 휘저어보고 휘저어본들 허공이 손에 맞히나요?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텅 빈데 거기에 뭔가를 이끌어다가 ‘공부에 해당 되는가? 안 되는가?
깨달을 수 있는가? 없는가?’ 이런 식으로 자꾸 마음을 쓰면 마치 그와 같이 된다. 如人이 以手로 撮摩虛空이라 只益自勞耳니라.
다만 더욱 더 스스로 피로할 따름이라. 그렇지요. 허공 잡으려고 아무리 손을 휘저어 봐야 피곤하기만 하지요.
應接時(응접시)어든, 사람을 응접할 때거든,
但應接(단응접)하고, 다만 응접하고,
要得靜坐(요득정좌)어든, 靜坐를 요하거든, 그 말입니다.
靜坐 = 고요히 앉아서 좌선을 해야 되겠다. 기도를 해야 되겠다.
‘만약에 고요히 앉기를 요하거든,’ 그 말입니다.
但靜坐(단정좌)호대, 다만 고요히 앉되,
坐時(좌시)에, 앉았을 때에
不得執着坐底(부득집착좌저)하야, 앉아 있는 것을 집착하지 말라.
爲究竟(위구경)이니, 집착해서 구경을 삼지 말라.
‘앉아 있는 것이 최고라고 그렇게 여기지 말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꼭 앉아 있는 것을 구경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거사한테는 참 대단히 죄송한데, 아주 여러 해 전에 제가 조계사 앞에 서점에 가서 불교 책을 몇 가지 사려고 기웃기웃하고 책만 쳐다보고 있는데, 거기 거사 분 들이 분들이 한 서넛이 앉아서 공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 나는 그 동안 좌선한 것이” 그 때 제가 듣기로 2천 몇 시간을 좌선했다고 하더라고요. 그것을 거기서 자기 도반에게 자랑삼아 하는 겁니다. “나는 그 동안 좌선한 것이 2천 몇 시간 좌선했다.”
그러는 겁니다. 제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야, 저렇게 공부하는구나. 좌선한 것을 몇 시간ㆍ시간 계산해가지고...’ 그것도 하기야 계산해볼 만도 하겠지요.
우리 그 전에 ‘1년에 예불을 몇 번 빠졌다.’ 1년간 예불을 다섯 손가락 이내에 빠집니다. 그런데 지금은... 저는 환자지만, 그래서 예불을 1년에 다섯 번도 못해요. 그런데 한 때는 채 다섯 번도 안 빠지고 살 때가 여러 해 있었습니다. 그것도 큰 자랑꺼리입니다. 그리고 흐뭇하고요. 그런 것이 있었듯이 그 거사분이 자기가 좌선을 2천 시간을 했다. 하는 것을 굉장히 흐뭇해하고, 화두가 되느니 안 되느니 그런 이야기는 아닙니다. 무조건 앉아서 시간 보낸 것이 2천 시간됐다는 겁니다. 그것도 상당한 시간이지요.
여러 해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아주 자랑으로 늘어놓는 것을 들은 바가 있어서 제가 그 이야기를 자주 기회가 되면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뭡니까?
앉았을 때 앉아 있는 것을 집착해서 구경으로,
최고의 가치로 삼지 말라.
앉아 있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수좌들이 또 이 시간에도 사실은 얼마나 많은지... 이것이 그 거사분만의 일이 아니라고요. 좌선을 구경으로 삼는 모든 사들에게 다 해당되는 것입니다.
今時邪師輩(금시사사배)가, 요즘 삿된 스승무리들이
多以黙照靜坐(다이묵조정좌)로,
많이들 묵묵히 비추면서 고요히 앉아 있는 것으로써
爲究竟法(위구경법)하야,
구경 법을 삼아서, 최고가는 법이다. 궁극적 법이다. 그런 뜻입니다.
疑誤後昆(의오후곤)일새. 後昆 = 후배들.
후배들을 의심하고 그르치게 함일세. 그렇지요. 고요히 앉아 있는 것을 가지고 최고 법이라면, 이거 참, 이 불교가요? 대승불교가 중국에 건너와서 대승불교는 어디 가버리고, 선불교가 神仙道(신선도)하고 딱 맞아 떨어지면서, 중국이라고 하는 어떤 토양에 禪法하고 神仙道하고 딱 맞아 떨어지면서 새로운 어떤 불교가 등장하게 된 겁니다. 이것이 선불교입니다.
그것이 선불교인데, 선불교를 하다보니까 앉아 있는 것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는 그런 풍토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 여기서도 우리가 지금 몇 시간을 봤지만 무슨 보살행을 해서 세상을 구제하고 하는 그런, 요즘 사람들이 고민하는 그런 이야기들은 한 마디도 없잖아요. 그래도 대혜스님은 간혹 저~ 앞에서 한번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을 구제하고,
이 간화선 법을 바로 세우는데 우리같이 힘씁시다. 그리고 또
나는 구업 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비난을 사정없이 한다.
그러다가 요즘 와서 그 어떤 영향으로 조금 달라지는 상황이 있더라. 이런 표현이 지난 시간에도 있었습니다만, 보살행 같은 그런 이야기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 것을 조금 하나의 보살행이라면 보살행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黙照靜坐로써 구경 법을 삼아서
疑誤後昆일새. 후배들을 그르칠세.
여기 그것 나오네요. 山野가
不怕結怨(산야불파결원)하고, 원수 맺는 것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力詆之(력저지)하야, 힘써 꾸짖어서,
사정없이 욕하고 비난하는 겁니다. 여기 나오네요.
以報佛恩(이보불은)하며,
대혜스님은 그것을 부처님 은혜를 갚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救末法之弊也(구말법지폐야)로라.
말법의 폐단을 구제하노라. 그랬습니다. 바로 여기 나오네요.
원수를 맺었으면 맺었지, 간화선법에 있어서 黙照靜坐는 안 된다 이 겁니다. 묵조선 가지고는 이것 안 된다. 그러니까 무조건 화두 들고 공부하도록 해라. 하는 그런 내용을 여기서 마지막에 싣고 있습니다.
대혜스님은 묵조선 배척하고 간화선을 주장 하는데 있어서는 아주 기를 쓰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斥邪解現正見(척사해현정견). 서장을 한 마디로 표현할 때, 삿된 견해를 물리친다. 라고 하는 것은 묵조사선을 물리치는 것이고, 現正見. 바른 견해를 나타낸다. 라고 하는 것은 간화선법.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을 現正見.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에게 한 것인데요.
答 趙待制 道夫
示諭를 一一備悉호라 佛言有心者는 皆得作佛이라하니
此心은 非世間塵勞妄想心이라 謂發無上大菩提心이니
若有是心하면 無不成佛者리라 士大夫學道호대 多自作障難은
爲無決定信故也라
佛이 又言하사대 信爲道元功德母라 長養一切諸善法하며
斷除疑網出愛流하야 開示涅槃無上道라하며
又云信能增長智功德하며 信能必到如來地라하시니
趙待制 道夫(조대제 도부).
이 사람은 이름이 벌써 道夫입니다.
待制라고 하는 것은 벼슬이름입니다. 우리도 김씨가 장관 벼슬을 하면
“김장관” 또 국회의원 하면 “김의원” 이렇게 부르잖아요. 이것이 옛날 습관입니다. 여기도 보면 “조대제” 趙씨가 待制벼슬을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름은 道夫다. 이렇게... 여기 전편에 전부 그런 식 기록입니다.
참고로 그렇게 아시고요.
示諭(시유)를, 가르쳐 보인 것을
一一備悉(일일비실)호라. 낱낱이 갖추어서 알았노라.
이럴 때 다 悉자도 알 실자라고 해석합니다. 갖추어서 알았다. 낱낱이 다 갖추어서 알았다. ‘당신이 보낸 편지를 세심하게 읽었다.’ 이 말입니다.
佛言有心者(불언유심자)는,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있는 사람은
皆得作佛(개득작불)이라하니, 다 부처를 짓는다.
皆得作佛이라, 화엄경에 있는 말입니다.
此心(차심)은 非世間塵勞妄想心(비세간진로망상심)이라.
이 마음은, 우리 근본본심이지, 우리가 금방 경계에 따라서 움직이는
世間塵勞妄想心이 아니다 말입니다.
謂發無上大菩提心(위발무상대보리심)이니,
謂發 = 이를테면 無上大菩提를 발하는 마음이다.ㆍ無上大菩提를 발하는 마음이다. 若有是心(약유시심)하면,
만약에 이러한, 無上大菩提를 발하는 마음이 있다면
無不成佛者(무불성불자)리라.
성불하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士大夫가 學道(사대부학도)호대, 사대부들이 도를 배우되
多自作障難(다자작장난)은,
많이들 스스로 障難을 짓는 것은 = 장애와 어려움을 짓는 것은
爲無決定信故也(위무결정신고야)라.
결정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말입니다. 결정적인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불성을 가졌고, 부처될 소질을 가졌고, 근본입장에서는 모두가 부처입니다. 모두가 부처인데, 부처로 살지 못하는 것은 결정적인 소신이 없습니다. 별 신심이 없습니다. 요즘 너나 할 것 없이 신심이 참 문제입니다. 신심이 잘 없습니다. 불교에 대한 신심이 있어야 되는데, 결정적인 믿음이 없다.
佛이 又言하사대, 부처님이 또 말씀하사대,
위에서 佛言有心者는 皆得作佛이라. 한 번 인용했잖아요.
그 다음에 금방 또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하니까 又言.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信爲道元功德母(신위도원공덕모)라
長養一切諸善法(장양일체제선법)하며
斷除疑網出愛流(단제의망출애류)하야
開示涅槃無上道(개시열반무상도)라하며, 또
又云信能增長智功德(우운신능증장지공덕)하며
信能必到如來地(신능필도여래지)라하시니,
이것이 현수 품에 있는 말이지요. 화엄경 39품 중에서 현수품은 전부 시 형식으로 됐습니다. 전부 시 형식으로, 일곱 자 시 형식으로 되어서 한 품만 가지고 강의를 하려면, 현수 품 가지고 하는 것이 좋아요. 화엄경 한 품을 가지고 이야기하려면요.
거기에 있는 말인데요.
信爲道元功德母라.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다. 믿음만 있으면 도가 이루어진다. 또 공덕도 저절로 이루어진다. 공덕 닦아진다. 우리가 공덕을 닦느니ㆍ복을 짓느니 하는 말은 흔히 하면서,
실지로 그런 것을 구체적으로 행동으로 안 옮기는 것은, 사실은 믿음이 별로인 겁니다. 우리는, 예를 들어서 제일 쉬운 문제가 경제적인 문제 아닙니까? 그 경제적인문제가 제일 아주, 이 세상 모든 사람들 99.99프로가 경제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사는데요. 그런데 경제의 원리가 우리불교적인 경제 원리하고 세속적인 경제 원리하고 다르잖아요. 반대거든요.
세속적인 경제 원리는 ‘무조건 내 주머니에 들어온 것이 내 것이다. 그랬을 때 내 재산이 불어난다.’ 이렇게 생각하고, 불교적인 경제 원리는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적게 가지고 있더라도 남에게 주는 것이 내가 부자가 되는 길이다.’ 이것 정 반대 길인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믿는 사람이 몇이나 있습니까? 우리스님들 중에도 ‘내가 가진 것을 쓰는 것이 내가 부자가 되는 길이다.’ 라고 믿는 사람이 몇이나 있습니까? 실질적으로 돈이 더 생깁니다. 분명히 더 생기는데도 그것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 없습니다.
뭐 다른 신도들은 그만 두고 프로인, 불법에 프로인 우리스님들도 그 이치를 믿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거의 없어요.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세속사람들이야 세속 계산법으로 살아야지요.
세속의 계산법은 내 주머니에 들어왔을 때, ‘내가 부자가 되고 내 것이 된다.’ 라고 생각하고, 불법은 ‘나눠줬을 때 그때 내 주머니도 더 커지고 내가 부자가 되는 길이다.’ 라고 이렇게 되어있는데, 그것을 제대로 믿고 실천하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거기부터 우리는 사실은 아직 불자가 아닙니다. 거기서부터 우리는 신심이 아직은 없습니다. 그것부터 불자라고 명함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 실지로 말은 그렇게 하면서, 신도들 앞에는 우리가 “보시하라. 보시하면 복을 짓는다.” 하면서 정작 우리는 보시 안하잖아요. 물론 이 가운데 있는 스님들 다 싸잡아서 하는 소리는 아니고요. 대 다수 스님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대 다수 스님들이 신도들에는 보시해서 복 지으라고 하면서 나는 왜 보시해서 복안 짓느냐고요? 솔직하게 거기서부터 우리는 아직 불자가 아닙니다. 그것 가장 기본적인 것이고, 기초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불교의 ABC라고요. 계산법이 그래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이치도 우리가 제대로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 여기에부터 우리는 지금 걸려있는 것이지요.
제대로 그런 이치를 믿기만 하면 도의 근원이 되고 공덕의 어머니가 됩니다. 무한한 공덕이 쌓인다고요.
長養一切諸善法이라. 一切諸善法을 長養한다.
모든 선법ㆍ모든 좋은 일들을 계속 키워내는 겁니다. 사정없이 키워내는 겁니다. 봄에 산천초목 자라듯이 그렇게 쑥쑥 자라는 겁니다.
1년만 지나 봐요. 그 이치 알고 우리가 살아간다면 그 사람 선법이 얼마나 자라 있는가?
斷除疑網出愛流하야, 疑網을 끊어, 의심의 그물을 斷除.
끊어서 제거해서 愛流에서 벗어난다. 애착의 흐름에서 벗어난다.
의심을 끊지 못하는 것이지요. 야~ 내가 경전대로, 또 들어온 소리대로 복 지으라고ㆍ복 지으라고 하면서 나는 정작 의심하고 있는 것이지요.
疑網의, 나는 의심의 그물에 얽혀있는 것이지요. 야~ 참, 그것 갈등이지요. 그것 아주 고민인 겁니다. 부처님은 내주라고 했는데, 나 보다 더 못한 사람ㆍ불행한 사람. 그 요즘 불교TV를 봐도 유니세프라든지, Save the Children(세이브더칠드런). 그 어린 아이들, 저~ 기 아프리카에 있는 어린 아이들 돕자고 하는 그런 광고가 그냥 쏟아지잖아요. 불교 TV뿐만이 아니라, 곳곳의 TV에서 광고하거든요. 그러면서 정작 거기에 보시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있냐고요.
그리고 불교TV나 BBS라든지 이런데 틀면 계속 운영상 필요한 돈이 필요하니까 여러분 ARS 한통 걸어주십시오. 라고 끊임없이 광고 나오잖아요.
그 광고 보기 싫어서 TV 안 본다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 정도로 광고가 많이 나옵니다. 그럼에도 不顧(불고)하고 여러분 ARS 한번 걸어줍니까?
솔직하게 잘 안 걸어주잖아요. 제 자랑 한번 할까요? 저는 휴대폰에다가 BBS하고, 불교TV 하고 그 입력을 다 해놨어요. 아침에 딱 일어나가지고 TV를 켜면 그것부터 합니다. 하루에 두 통이 안 되대요? 하루에 두 통 세통 하려고 해도 하루에 두 통이 안돼요. 하루에 한 통밖에 안 되는 겁니다. 하루에 한 통씩 걸어도 두 곳에 5000원 씩ㆍ5000원 씩 만원 밖에 안 되잖아요. 그래봐야 한 달 안 빠지고, 안 잊어버리고 해봐야 한 달 30만원 밖에 보시 안 됩니다.
그런데 30만원 보시가 문제 아니라, 그러한 마음을 내가 낸다는 것.
이 마음은요? 30만원 보다 백배ㆍ천배 넉넉하고, 백배ㆍ천배 부유합니다.
저는 딱 입력을 해놔 버렸어요. 딱 입력해놓고 한번 딱 터치하면 되니까요.
일일이 찾아서 번호 누르지 않고, 입력해놓고 딱 한번 터치하면 되니까 얼마나 쉬워요? 저는 생각 날 때 마다 꼭 한번 씩 합니다. 두 곳에 한번 하면 만원이니까... “불교” 해놓고 BBS하고, 불교TV 해놓으니까 딱 붙어있다고요. 전화번호가 아무리 많아도 붙어있으니까 찾기도 쉬워요.
그런 것들도 우리가 불교 계산법으로 하면 결국은 내가 부자 되자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불교 계산법으로 하면 내가 부자 되자고 하는 겁니다.
한 달에 30만원 두 곳에 보시 하는 것이 내 부자 되자고 하는 거라고요.
그런데 꼭 그런 계산으로 물론 하지는 않지요. 하지만 불교 계산법으로는 “자기 부자 되려고 한다.” 이렇게 해도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닌 겁니다.
의심의 그물에서 벗어나는 것. 참 중요한 것이지요.
그리고 애착의 흐름에서 벗어난다.
開示涅槃無上道라. 涅槃無上道를, 열반이라고 하는 최상 가는 도를 열어 보이는 것이다.
又云, 또 말씀하시기를,
信能增長智功德하며,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능히 지혜의 공덕을 증장시킨다. 지혜의 공덕을 증장시킨다. 이 신심. 참 중요합니다. 여러분요?
각자 사찰에서 신도님들에게 설법할 때, 신심에 대해서 설법을 자꾸 많이 해야 됩니다. 信心. 신심 설법을 하면 나도 신심이 나져요.
첫째, 설명을 하는 내가 신심이 나집니다. 그리고 이 불법은 신심가지고 밀어붙여야지, 그 뭐 어쭙잖게 포교당 열어서 무슨 예능활동하고ㆍ운동이나 하고ㆍ다도교실이나하고ㆍ서예교실이나하고, 저~ 기 해운대 신도시에서 포교당해서 망한 사람, 제가 연구를 해봤습니다.
곳곳에서 포교당해서 망한 사람을 연구해 보니까, “포교당” 해서 열자마자 뭐 하느냐? 무슨 다도교실하고ㆍ서예 실하고ㆍ태권도 교실하고ㆍ무슨 요가하고ㆍ명상호흡하고, 불법하고 거리가 먼 것 하는 겁니다.
신심을 증장시켜주는 일을 안 해요. 그것이 자기가 평소에 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아~ 내가 포교당 열면 이것부터 해야지.’ 하고, 그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포교당 열어서 망한 사람들을 제가 살펴보니까 거의 그렇게 망해요. 무조건 신심을 가지고 밀어붙여야 됩니다. 기도시키고ㆍ교양대학 열어서 계속 기도하게하고ㆍ교양대학해서 불교 가르치고, 이것을 가지고 한 10년간 하는 겁니다. 밀어붙이는 겁니다. 성지순례하고, 이렇게 밀어붙여서 10년쯤 지난 뒤에 그 때야 그 다음에 무슨 다도교실을 하든지ㆍ무슨 합창단을 하든지 그 때야 그런 것을 부수적으로 해도 그때는 괜찮아요.
그렇게 자리 잡혔을 때는...
믿음이라고 하는, 신심이라고 하는 그 뿌리를 콱~ 깊이 박아놓고 나무가 무성할 때, 그때는 거기에 그 무성한 나무 가지에다가 등도 달기도하고, 무슨 연도 달기도하고 별별 것 달수도 있는 겁니다. 이치가 그렇게 되어있는데, 아이 도대체 그것을 모르고는 자기하고 싶다고 무슨 다도교실해서 차 가르치고, 다도교실이 무슨 불교인가요? 또 요즘 큰 폐단 하나가 사찰음식. 그것도 불교 아닙니다. 사찰음식도 그것이 1식 3찬입니다. 절에는 사찰요리라는 것이 없습니다. 아예 요리가 없습니다. 1식 3찬 아닙니까?
밥하나하고, 밥공기하나에다가 반찬 세 가지 이상 안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사찰요리가 성행하게 되었느냐?
조선시대에 아무리 배불정책을 썼다 하더라도 상궁들ㆍ옹주들ㆍ궁녀들 이런 사람들이 나중에 퇴출당하면 올데갈데없어요. 절밖에 없습니다.
100년 전만 하더라도 용상스님 계실 때 역경 사업하는데 상궁들이 패물 갖다 주고, 돈 갖다 주고해서 역경 사업했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상궁들이 있었던 겁니다. 상궁들은 끊임없이 절로 출입을 많이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갈 곳이, 쉴 곳이 절 뿐이었습니다. 상궁들이 절에 와서 사니까 그 사람들 대접하려면 궁중에 있는 요리사들이 따라오는 겁니다.
요리사들이 상궁 따라오는 겁니다. 대통령이 어디가도 요리사들이 따라가잖아요. 그 사람들이 따라 와서는 고기만 빼고는 전부 최고요리를 만든 겁니다. 채소로 할 수 있는 최고요리를 하다 보니까 상다리가 부러지게 요리를 차려 놓는 것이지요. 이것이 스님들은 착각하고는 사찰요리인줄 아는 겁니다. 요즘 사찰요리ㆍ사찰요리 하는데, 그것 아주 잘못된 폐단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알기는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 어릴 때만 해도 부엌에 “禁煙(금연)” 이라고 써 붙였습니다. 禁煙 = 담배 피우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불 떼지 말라ㆍ때 아닌 때 불 떼지 말라.” 이 말입니다. 때 아닌 때 불 떼지 말라 = 禁煙이라고 딱 써 붙여 놨습니다. 제가 일본 어느 절에 가니까 지금도 있더라고요.
일본에 옛날 부엌을 그대로 놔두고 있습니다. 안 건드려요. 사용 안합니다. 거기가면 “禁煙” 이라고 써 붙여 있어서 어떻게나 반가운지요.
우리도 어릴 때 객질 할 때, 식사 기간 딱 지나서 가면 아예 밥 먹을 생각도 안하고, 밥 달라고도 못하고, 달라고 해도 주지도 않고, 불을 못 떼게 되어있으니까요. 그 때는 전기가 안 들어왔을 때니까 물 한 그릇 끓이려 해도 불 떼야 했으니까요. 물 한 그릇 끓이려 해도 불 떼야 되는데 어떻게 물을 데웁니까? 못하지요.
그러니까 “禁煙” 이라고 딱 써 붙여 놓고서, “때 아니면 절대 불 떼지 말라.” 객스님 아니라 우 객스님이라 하더라도 때 아닌 때 오는 사람, 식사제공 안 하도록 되어있는 겁니다. 절 집안의 음식 문화라는 것이,
음식 문화라 할 것도 없지요. 사찰음식에 대한 청규가 그렇게 되어있는데ㆍ그렇게 되어있는데, 세월이 좋아지다 보니까 요리니 뭐니 해서 궁중요리를 그대로 갖다놓고 사찰요리라고해서 세상을 오도하는 겁니다.
스님들도 이런 기회에 이것 아셔야 됩니다. 사찰요리 전시회를 하든ㆍ말든, 할 때 하더라도 알기는 알고 하자 이 겁니다. 그것이 전통 사찰음식에 대한 청규입니다. “1식 3찬” 딱 외워놔요. “1식 3찬”
부엌에는 “禁煙” 요즘 스위치 한번 누르면 물 푸르르 끓으니까 그런 어려움이 없지만, 옛날에는 물 한 그릇 끓이려 해도 불을 떼야 됩니다.
“때 아닌 때 불 떼지 말라 = 禁煙” 딱 써 붙여 놓은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우리 전통 사찰음식에 대한 청규입니다.
信能增長智功德하며
信能必到如來地(신능필도여래지)라하시니,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여래의 지위에 이른다.
示諭에 鈍根이 未能悟徹인댄 且種佛種子於心田이라하니
此語雖淺近이나 然이나 亦深源하니 但辨肯心하라
必不相賺이니라
示諭(시유)에, 편지를 보임에,
諭자는 가르친다는, 상대의 편지를 존중해서 諭자를 씁니다. 편지를 보임에,
鈍根(둔근)이 未能悟徹(미능오철)인댄,
둔한 근기가 능히 깨달아 사무치지 못할진댄, 이것이 우리 흔히 할 수 있는 생각입니다.
且種佛種子於心田(차종불종자어심전)이라하니,
조대제라고 하는 그 사람이 그랬나 봐요. “아이고 나는 둔한 근기라 크게 깨닫지 못할 팔자니까 또한 부처님의 종자, 佛種子라도 마음 밭에다가 심겠다.” 심을 種자입니다. 佛種子라도 마음 밭에다가 심겠다. 이런 편지를 대혜스님에게 해왔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했으니,
此語가 雖淺近(차어수천근)이나,
이 말이 비록 淺하고 가까워, 아주 얕은 소리기도 해, 그리고 아주 가까운 소리야, 사실 실제적인 소리입니다. 우리도 대개 그런 생각하지요?
‘확철대오 못할 바에는 뭐 이렇게 저렇게 포교나 하고, 절이나 좀 잘 운영해서 신도들 좋은 데로 복이나 많이 짓게 하고, 불교를 좀 가르치고 이렇게 해서, 그것으로써 내 수행을 삼는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요.
그런데 淺近한 것 같지만,
然(연)이나 亦深源(역심원)하니,
깊고 멀다 = 아득하다. 상당히 이것이 깊이 있는 소리다.
但辦肯心(단판긍심)하라.
다만 긍정한 마음을 마련하라. 辦 = 마련하라ㆍ가져라. 긍정한 마음을,
肯心을 가져라. 긍정한 마음을 가져라.
必不相賺(필불상잠)이니라. 반드시 서로 속이지 않으리라.
이 賺자는 되팔기 잠자 입니다. 물건을 받아서 다시 파는 것이지요.
그러면 속여야 팔지요. 받은 대로 그대로 팔면 1000원주고 책사서 1000원에 팔면, 남는 것이 없잖아요. 자기 아버지에게도 “내가 이것 1500원주고 샀는데, 아버지니까 본 값에 드리겠습니다.” 이러잖아요. 장사꾼들은요. 당연히 그렇게 하잖아요. 하하하하하하 제가 한문공부 하면서 ‘이 賺자가 참 묘한 잠자다.’ 생각이 들어요.
이것을 옥편에 보면 되팔 잠자 입니다.
되팔 = 다시판다ㆍ되판다 말입니다. 물건사가지고 또 판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속일 賺자로 나와 있습니다. 속일 잠자로... 원가 안속이면 장사 안 되니까요.
첫댓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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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爲道元功德母..._()()()_
감사합니다.()
나무 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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