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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사랑 김종해
5월의 사랑
그대는 내 남쪽바다의
작은 섬으로 떠 있누나
섬으로 떠서
그대는 노오란 유채꽃으로 웃고 있누나
맑은 바람 있는 대로 풀어놓고
내 남쪽바다의 물결을 다스리누나
다도해의 봄밤은 깊어가는데
잠 못 드는 젊은 짐승
내 베갯머리에
물결로 와 찰싹이누나
초파일 꽃등행렬 위로
물인 듯 바람인 듯
그대는 내 남쪽바다의
작은 섬으로 떠 있누나
그대, 5월의 사랑아
바람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문학세계사, 1990
가을 문안 김종해
가을 문안
나는 당신이 어디가 아픈지 알고 있어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말할 수 없습니다.
오오, 말할 수 없는 우리의 슬픔이
어둠 속에서 굳어져 별이 됩니다.
한밤에 떠 있는 우리의 별빛을 거두어
당신의 등잔으로 쓰셔요.
깊고 깊은 어둠 속에서만 가혹하게 빛나는 우리의 별빛
당신은 그 별빛을 거느리는 목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요.
종루에 내린 별빛은 종을 이루고
종을 스친 별빛은 푸른 종소리가 됩니다.
풀숲에 가만히 내린 별빛은 풀잎이 되고
풀잎의 비애를 다 깨친 별빛은 풀꽃이 됩니다.
핍박받은 사람들의 이글거리는 불꽃이
하늘에 맺힌 별빛이 될 때까지
종소리여 풀꽃이여…
나는 당신이 어디가 아픈지 알고 있어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 아니 오시나요, 문학예술사, 1979
가을 속삭임 김종해
가을 속삭임
인간의 아들아, 신(神)의 어머니가 와서 너희 날의 아픔을 꿰매려는 이 시각에 너희들은 모두 숨어 있구나. 어서 나오너라, 시들지 않는 풀잎을 주리니
이제 날은 저물고
우리 깊은 마음에 구르는 한 장의 잎사귀에서도
우리 님은 떠나려 하노니
바람이 불기 전에, 큰 어둠이 오기 전에
어서 흔들어 깨워라
우리 깊은 마음에 날려와 쌓이는 가랑잎을 타고
우리 님은 떠나려 하노니
이 가을에 우리가 까마득히 잠들고
우리 님이 떠나가면
또 다른 여인이 우리를 다시 낳아주지 않으리라
오래오래 닦아둔 은빛의 등촉대에
까물거리는 우리의 영혼이 서로 부둥켜안고
서걱이는 갈대밭의 갈대꽃에게나 지껄이듯
이 가을에 떠나지 않는
단 하나의 영원을 말해주어라
바람이 불기 전에, 큰 어둠이 오기 전에…
왜 아니 오시나요, 문학예술사, 1979
기다림 김종해
기다림
까무러치듯 외로운 날빛이
서창(西窓)에 걸리고
흉흉한 황사바람 몇 날 며칠 부는데
왜 아니 오시나요 왜 아니 오시나요
굳게 닫힌 하늘에
복사꽃은 또 한 번 하얗게 떨어지고
깊은 밤 별들은 새벽빛 수틀 위에 자수로 뜨이는데
왜 아니 오시나요 왜 아니 오시나요
청천벽력이라도 못 깨어날
깊은 잠이 드셨나요
극락 왕생 별천지에 홀로 단꿈 꾸시나요
까무러치듯 캄캄하고 외로운 이날에
순정한 마음의 바늘 끝에 뜨이는
아픈 사연 감추옵고
이 마음에 맺혀 있는 철천지 원망을
사랑으로 불꽃으로 모두 오려서
당신 오신 날 밤
길 밝히는 연등(燃燈)으로 내걸리렸더니
왜 아니 오시나요 왜 아니 오시나요
왜 아니 오시나요, 문학예술사, 1979
녹차를 마시며 김종해
녹차를 마시며
그대여
눈빛보다 먼저 입술로 오는구나
눈 오는 날 밤이 아니더라도
그대 연록의 잠옷을 입고
뜨겁게 뜨겁게 나를 깨우는구나
봄밤의 푸른 달빛으로 감기는
우리들의 은밀한 접합
알 수 없어라
두 손으로 감싸쥔 잔 속에
그리운 이의 몇 모금 향기이듯
그대여
오늘밤 내 잔 속에
뜨거운 몇 잎의 봄을
풀어놓고 가시려는가
바람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문학세계사, 1990
물, 우리의 사랑법 김종해
물, 우리의 사랑법
이 여름날
내가 물이 되어 흐르고 있을 때
그녀는 대지가 되어 와 눕는다
그녀를 향해 끝없이 하강하고
그녀의 모든 굴곡을 더듬어
익숙하게 흐를 때
솟구쳐오르는 분수의 말이거나
절정의 높이에서 하얗게 투신하는
폭포의 말이거나
나는 나의 화법으로
그녀 위에 되풀이 쏟아짐으로써
나의 여름은 완성된다
낮은 데로 낮은 데로 임하는
우리들의 사랑법
우리 살아가는 일 저와 같아서
이 땅 있음에
사랑은 영원하여라
바람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문학세계사, 1990
바람부는 날 김종해
바람부는 날
사랑하지 않는 일보다 사랑하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날마다 가고 또 갑니다. 어둠뿐인 외줄기 지하통로로 손전등을 비추며 나는 나는 당신에게로 갑니다. 밀감보다 더 적은 불빛 하나 갖고서 당신을 향해 갑니다. 가서는 오지 않아도 좋을 일방통행의 외길, 당신을 향해서만 가고 있는 지하철을 타고 아무도 내리지 않는 숨은 역으로 작은 불빛 비추며 나는 갑니다.
가랑잎이라도 떨어져서 마음마저 더욱 여린 날,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그래서 바람이 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바람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문학세계사, 1990
새 김종해
새&
님과 나는 날지 못하는 한 마리 새 되어
숨어서 울어라
떨리는 님의 숨소리 내 품속에 사무쳐오니
이 아픔 함께 나누노니
식어가는 그대 입술 위의 마지막 향기
아, 나는 그윽한 그 향기를 입술에 물고
천고(千古) 뒤까지 날아야 하네
커다란 죽음이 님과 나를 덮을지라도
아, 나는 날아가 그것을 전해야 하네
왜 아니 오시나요, 문학예술사, 1979
섬 김종해
섬&
동백잎으로 얼굴 가리고
밤이면 내 바다로 오는 여자,
그리운 섬 하나 머리에 이고
내 배의 이물에 오르는 여자
내 오늘 우리나라 남해에서 흔들리나니
집어등을 켜지 않아도
밤바다는 내 그물마다 넘치나니
불빛이 실리나니
그대가 이고 온 섬 하나에
대륙의 숲과 바람을 가득 채워서
천년의 사랑으로 떠 있게 하마.
다만 사랑할 일 하나만
저 섬에 동백나무로 심어두고
아침이면 물결로 돌아오나니
바람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문학세계사, 1990
항해일지 1 김종해
항해일지 1
을지로에서 노를 젓다가 잠시 멈추다.
사라져가는 것, 떨어져가는 것, 시들어가는 것들의 흘러내림
그것들의 부음 위에 떠서 노질을 하다.
아아, 부질없구나
그물을 던지고 낚시질하여 날것을 익혀 먹는 일
오늘은 갑판 위에 나와 크게 느끼다.
오늘 하루 집어등을 끄고 남몰래 눈물짓다.
손이 부르트도록 날마다 을지로에서 노를 젓고 저음이여
수부(水夫)의 청춘을 다 바쳐 찾고자 하는 것
삭풍 아래 떨면서 잠시 청계천 쪽에 정박하다.
헛되고 헛되도다, 무인도여
한잔의 술잔 속에서도 얼비치는 저 무인도를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다.
그러나 눈보라 날리는 엄동 속에서도 나의 배는 가야 한다.
눈을 감고서도 선명히 떠오르는 저 별빛을 향하여
나는 노질을 계속해야 한다.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항해일지 2 김종해
항해일지 2
이웃에서 항해하던 배가 한 척 침몰하였다.
야음(夜陰)을 타고 우리는 그가 살았을 때
떠 있던 그의 항로 위를 가 보았다.
대전 오류동의 물살이 거세었나
하늘에는 별, 땅에는 시인(詩人)
이승을 밝히던 그의 항해등도 울음소리도
물결 속에 흔적없이 가라앉았다.
그의 손때묻은 돛폭이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다감하던 우리의 선량한 어부,
흰 갈매기 한 마리가 날아와
노질하는 우리의 돛대 위에 앉아 깃털을 날렸다.
해저를 걸어
천주교 공동묘지에 그의 유해를 조용히 내렸다.
해저 속에 그를 수장(水葬)하며 비로소 우리는
고인(故人) 몰래 눈물을 뿌렸다.
감추고 억제하던 우리의 슬픔을
우리들이 맞이한 이날의 부음(訃音) 위에
비로소 마음놓고 뿌릴 수 있었다.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항해일지 3 김종해
항해일지 3
아무리 노질을 해도 이 도시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는 없구나.
물길은 사납고 며칠째 비가 오고 있다.
오늘은 노예선을 보았다.
약 5천만 톤의 선적 위에 그들의 고뇌와 슬픔이 못질되어 있었다.
여보, 이 배는 어디로 가지요.
황량한 을지로의 물목에서 손을 흔들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저희 배를 갖지 못한 자의 노질을 바라보다가
선창을 닫았다.
어제 삼각지의 비 오는 해협에서 침몰했던
한 불행한 남자(男子)의 난파 때문에
깊게 방수되어 있는 나의 조타실이 침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선창을 굳게굳게 닫아걸고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핑계삼아 읽다.
비안개 속에서 어디선가 슬픈 무적(霧笛) 소리
길게 두 번 울린다.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항해일지 4 김종해
항해일지 4
상어는 이 도시의 어느 건물 안에서도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 보였지만
정작 나는 갑판 위에서 작살을 날리지 못하였다.
날마다 작살의 날을 시퍼렇게 갈고 또 갈았지만
나는 작살을 쓸 수 없었다.
무엇인가 그물에 걸려서 퍼덕일 것 같은 번쩍임의 예감을 끌어올리기 위하여
날마다 을지로나 청계천으로 노를 저어가지만
헛일이었다. 아아, 헛일이었다.
눈은 와서 이미 겨울 바다는 서쪽으로 서쪽으로 기울어지고
석유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물 사이로 빠지는 눈 오는 바다를 금전출납부 위에 올려놓고
아침마다 도장으로 눌러대지만,
계산기 위에 결제서류의 숫자를 두드리고 또 두드리지만,
한 장의 방한복으로 추위를 가린 젊은 수부의 항로는 어디로 열려 있나.
상어가 출몰하는 흉흉한 바다,
그물을 물어뜯고 배를 뒤엎어놓는 저놈의 상어,
음흉한 상어는 이 도시의 어느 건물 안에서도 몸을 숨기고 있었지만
아아, 나는 왜 작살을 날려 저놈의 심장을 꿰뚫지 못하나.
춥고 어두운 겨울 항로 가운데
오늘은 한 젊은 수부가 사는 화곡동에 닻을 잠시 내리고 잔을 나누다.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항해일지 6 김종해
항해일지 6
암초를 보았다
청계천이나 을지로, 삼일로나 종로
혹은 퇴계로의 어느 쪽이거나
노를 저어가는 곳마다 그것은 불쑥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뿌리를 내리지 않은 어뢰마냥 둥둥 떠서
그것은 나의 배 곁에 따로 다가와 있었다.
항해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저 절대적인 힘의 덫을 우회하기 위하여
나는 한낮에도 날개를 접고 돛을 접고
점화하는 일마저 삼가야 한다
저 암초에 부딪혀 부질없이 사라져간
어리석은 수부들을 생각하라
우리가 날마다 떠 흐르는 바다 위에서
상하고 으깨어진 일이 어디 이것뿐이랴
진달래.개나리가 그리운 오늘은
선창을 활짝 열고
4월에 침몰했던 젊은 수부들의 혼을 떠올리다.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항해일지 7 김종해
항해일지 7
을지로 쪽을 날마다 항해하다가 느낀 일이지만 나는 바람 한 점 없는 이 고요한 바다에서 해적들을 불러 모으리라 작심하였다. 을지로 2가에서 닻을 내리고 한밤중에 자주 나는 이 부근에 가라앉았던 해적선을 인양하려 했지만, 마하트마 간디가 갖고 있을 법한 해저 케이블에 걸려 쓰러지기를 여러 번 하였다. 퇴계로 목에서 흐르는 물살을 타고 1960년 4월에 가라앉았던 수부(水夫)들이 갑판 위로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오는 시각에 황량한 바다를 항해하고자 하는 해적들과 함께 나는 안개 자욱한 이 항구에서 무적(霧笛)을 울리고 싶었던 것이다. 목발을 짚은 이 시대의 절름발이들, 애꾸눈이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보물을 싣고, 의(義)와 사랑을 선창 가득히 싣고, 개인적인 우수(憂愁)를 존중할 줄 아는 해적선의 수부들과 함께 날카롭게 이 시대의 물살을 가르고 싶었던 것이다.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항해일지 10 김종해
항해일지 10
노를 젓다가 기진맥진한 종로 뒷골목에서
우리는 흡반을 길게 드러내 놓고 서로 엉겼다.
포장술집에서 우리는 밧줄을 잡아당기며
부담없이 정박하기 위해
한 잔, 한 잔, 한 잔을 붓고 또 부었다.
너도 나에게 열어 주지 않았고
나도 너에게 열어 주지 않았던
우리의 단단한 껍질이 뜨겁게 달 때까지.
우리가 우리를 지키기 위해
맞물고 있는 두 개의 껍질,
상처받지 않으려는 조심조심조심 때문에
우리의 낱말 위에 새로 돋아난 단단한 조가비
그 속에서 우리가 숨기고 있는 슬픔이야
하얗게 진주가 되든지 말든지
가슴 아픈 소금이 되든지 말든지
오늘은 노를 젓다가 기진맥진한 종로 뒷골목에서
우리는 흡반을 길게 드러내놓고 서로 엉겼다.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항해일지 12 김종해
항해일지 12
조선소의 전기용접공 김씨는 평소 말이 없다.
그가 사용하는 말이란
그가 하루 종일 땜질하는 용접봉의 숫자보다 적다.
용접공 김씨가 하는 일이란
도크 안으로 들어온 폐선의 내장을
새것으로 바꿔 끼우는 일이다.
빨갛게 녹슬은 쇠붙이에 불을 당기고
그가 든 용접봉이 적개심으로 이글거릴 때
그의 언어는 불꽃으로 나타난다
용접공 김시가 절단기를 들고 일하는 날은
바다는 흰 파도를 거칠게 물었고
해저의 먼 산악은 우뢰 소리를 내었다.
그가 사용하는 용접봉은
전류의 충전으로 불꽃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숨기고 있는 한(恨)으로 불꽃을 점화시킨다
그는 자신의 한(恨)을 숨기고 있었지만
젊은 나의 눈엔 그것이 보였다
이십오 년이 지난 지금
그의 항해가 끝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소의 전기용접공 김씨가 든 그 용접봉이
종로 뒷골목의 거친 물목을 항해하는
나의 손에 어느 날 문득 쥐어져 있었다.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항해일지 13 김종해
항해일지 13
시인들은 서울의 수위(水位)가 위험하다고 말했지만, 그리고곧 해일이 일어나 바람 한점 없는 평온한 이 도시가 침몰될 것이라고 얘기들을 했지만, 정작 그들은 지진의 진앙지를 어디라고 꼬집어 말하지는 않았다. 이 도시의 밑바닥에서 그물을 던져 살아가고 있는 하찮은 수부(水夫)인 나는 밑바닥에서 울렁거림과 부르짖음과 그날그날의 흔들림을 잘 알고 있다. 지진의 진앙은 해저의 어느 곳에 잠복된 지층의 엇갈림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해저가 아닌 더욱 다른 의미의 지층간의 엇갈림 때문이란 것을 나는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단지 하찮은 수부(水夫)에 지나지않으므로 형이상학적 진단을 내릴 수 없었다.
오늘도 약간의 미진이 또 있었다.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항해일지 14 김종해
항해일지 14
나는 문을 열어주지 않기로 했어
뜨거운 모랫바람
햇살에 잘 익은 청동빛 근육
깊고 깊은 바다에서 해신(海神)들이 울리는
종소리마저도
오늘은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어
깨질지언정 열리지 않는
석회질 속에 깊이 감춘 슬픔 때문에
나는 걸어갈 수 없었어
말하지 말라 말하지 말라
지킬 것 하나 없는 빈 공동(空洞)에
우리의 슬픔은 하얗게 진주로 굳어지고
갯흙바닥에 나뒹굴며
나는 결코 문을 열지 않기로 했어
안개를 걷으며 무적(霧笛)을 불며
그대 내 조가비의 햇살로 닿을 때까지
오늘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어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항해일지 15 김종해
항해일지 15
에게해(海)는 청람빛,
삶과 죽음의 일천 겁 물굽이를 돌아
포세이돈 신전에 와서 나는 나의 바다를 비워내다
해신(海神)들이 울리는 아침 종소리는
어디에서도 울려오지 않았지만
귤빛 젖가슴을 드러낸 그리스 소녀가
에게해(海)를 지키고 있었다
지진과 바다를 관장하는 포세이돈,
나는 아직 그를 만나지 못했지만
오늘 그가 지키는 청람빛 바다에
잠시 닻을 내리다
바람은 머리칼을 날리며
대리석 신전의 일만 년 허적(虛寂)을 뒤적이지만
포세이돈, 그대만은 알리라
내가 숨기고 있는 한(恨)과
내 해저에 잠복한 큰 지진을 그대만은 알리라
에게해(海)는 청람빛,
포세이돈 신전에 와서 잠시 정박하다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항해일지 16 김종해
항해일지 16
갠지스강(江) 물 위에 촛불을 띄웠다
황토물에 몸을 씻는 고행자의 기구(祈求)를
갠지스강(江)은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늙은 갠지스강(江)이 인도를 안고 잠들었을 때에도
동방의 지혜로운 빛은 강물 위에 넘실거렸다
형제여, 나는 타고르의 음성을 들었다.
형제여,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붉은 천에 묶은 2구의 시신이
물가로 걸어나왔다.
죽은 자의 흰 뼈가 가라앉고
허무 사이로 빠지는 바람은
끝없이 되풀이되는 고별을 받아들였다
갠지스강(江) 물 위에 촛불을 띄우며
기우뚱기우뚱 삐걱거리며 흘러가는
이방인의 서툰 노질마저도
그녀는 부드럽게 품어 주었다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항해일지 17 김종해
항해일지 17
파리 정박 이틀, 나는 가보았다
셍 미셀 여자형무소의 단두대
돌벽으로 된 지하 암벽에
암혈의 어둠을 껴안고 죽어갔던 여인들을 만났다
죽을 때까지 돌벽에 새긴 저희의 이름
헬렌, 엘레나, 마들렌…
단 하룻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그녀들은 차라리 지상의 자유와 공기를 버렸다
활달하고 부드러운 눈짓으로 그녀들은 달려나와
금빛 정조대의 열쇠를 흔들었고
나는 7백 년 저쪽의 시간의 벽 속으로
노질하기 시작했다
새벽 두시의 보랏빛 파리
술잔을 기울이며
정조대가 벗겨진 파리의 탄력을 힘껏 껴안았다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항해일지 20 김종해
항해일지 20
오늘은잔잔,황사바람마저불지않았다. 어느바다에도물이보이지않았으므로나는노를젓지않았다. 항해등도꺼버리고드디어나는빈손으로표류하기시작하였다. 흘러간시간속에서부표가하나씩떠오르기시작했다.
―대낮에씨를받기위해이웃의유부녀와아버지가화간(和姦)하고있을때말이지요. 그때종마가되어달리던아버지가말이지요. 어떤체위로신음소리를내고있는지말이지요. 궁금하게여기고있을어머니가말이지요. 그때어머니는두남녀의대낮정사를돕기위해그간음을지켜주기위해말이지요. 문바깥에서문고리를잡고보초를서고있었지요. 그때도어머니의남빛바다에는물이보이지않았는데요. 항해등도꺼졌는데요.
그때다른여인의몸에서태어난여아(女兒)를나는항해중에여러번만났다. 순애야순애야, 그녀의얼굴은내가가진거울속에기끔비쳐보였는데성별만다른나의얼굴이었다. 아버지의생애를담은배가당감동의화장터에서소각되고난다음에도나의배는표류하였다. 아버지가물길을거슬러오르며꽃씨를심던그날불가사의한부표가오늘종로의물목에서불쑥떠올랐다. 순애야, 그러나나는너를알지못한다.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항해일지 21 김종해
항해일지 21
마당에서 장작을 패고 있는 아버지를 보면
나는 도끼로 패주고 싶은 것이 있다.
나는 민중시를 쓰지 못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한낱 장사아치의 계산기가
더 소중스럽지만
민중민중민중민중민중민중
말의 남발보다
땀 흘려 일하는 개인주의를 더 사랑한다.
절망과 눈물과 구호를 단지 속에 묻어놓고
마당에서 장작을 패고 있는 아버지를 보면
나는 도끼로 패주고 싶은 것이 있다.
사십 년 전,
아버지가 쥔 도끼자루는 녹슬었지만
밑바닥을 살았던 아버지의 적개심이
이 가을에
문득 내 손에도 쥐어져 있구나.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항해일지 23 김종해
항해일지 23
우리들의대장만출이가스스로저희삶과바다를반납한것(좋게해석해서)이라고가정한다면, 공구는정말달랐다.
공구는정말달랐다. 그녀석은이른봄에제일먼저피는할미꽃이고, 이른봄에천사에게서제일먼저날개를받아날아다니는찔찌리새였다. 청승맞게새의울음소리를잘내는공구의겨드랑이에는언제나날개가두장달려있다.
녀석이날개를퍼덕이며날아다닐때우리들은하늘속이거나별속에떠있었다. 위험해위험해, 초장동사람들은우리들이떠있는것이위험하다고항상공구의날갯죽지부터묶어놓았다. 우리들이숲속에서잡은찔찌리새를갖고놀다가새가죽자공구는울었다. 이른봄바다가보이는언덕에서새의장례식을올리며공구는한마리찔찌리새가되어울었다. 어른들에게날개를뺏긴공구는결코날지않았지만그대신한마리새가되어울었다. 며칠뒤공구가죽고우리들의머리위로처음보는커다란날개를퍼덕이며공구가날아올랐을때, 우리들은저마다함께날아오르려고버둥거렸지만모두땅으로떨어졌다. 그새는먼별속으로날아갔다.
별을보며인사동에정박하다. 새벽두시, 수부들은부질없이날아오르기를다투며술을마시다. 공구가가진날개를빌지않고나는착실하게나의노만저으리라. 노를젓고저어서저별에닿으리라.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항해일지 25 김종해
항해일지 25
서울대공원의 열대실에 죽은 듯이 엎드린 악어는 박제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동전을 던져 악어를 깨우려 들지만, 악어는 정작 깊은 잠에 빠진 것이 아니다라고 굳게 믿고 있는 나도 정작 이 여름에 박제된 한 마리 악어일까. 종로나 청계천 물목을 어렵게 노질하는 수부, 내 친구 가운데도 악어가 한 마리 있다. 돈이든 여자든 먹성 좋게 해치우는 걸 나는 언제나 못본 척했다. 톱니같은 이빨로 강철과 대지를 잘라먹는 더 큰 악어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늘같이 태풍이 이는 날은
나도 어차피 서울대공원의 동물원에나 가서
물질하는 한 마리
포악한 짐승이 되는 수밖에 없다.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항해일지 27 김종해
항해일지 27
우리의 수부 이탄(李炭)이 쓰러지고
죽은 임홍재(任洪宰)가 누웠던 휘경동 위생병원
이승과 저승의 물길을 넘나들던
우리의 수부 이탄(李炭),
우리는 마음 졸이며
바람이 어느 쪽으로 부는가를 귀기울였다.
삶과 죽음의 절반
그때 중환자실에서
그의 아내가 외던 기도 소리
그의 가족들이 탄 배가 좌초해 있을 동안
우리는 진눈깨비 뿌리는 외항을 돌며 깃발을 흔들었다
고장난 그의 배가 수리되고 있을 동안
우리는 기울어진 그의 심전도를
지켜보고 또 지켜보았다
그의 배가 따뜻한 남쪽나라로 가기까지
우리 또한 가야 할 물길
젊은 시인이여, 일어나라
그대 찢어진 돛폭에 우리가 달 수 있는 것은
한 줄의 맑은 사랑
한 줄의 궁핍한 시밖에,
더 무엇을 바라랴.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항해일지 28 김종해
항해일지 28
부제: 한려수도 물길에 사량도(蛇樑島)가 있더라
사량도 눈썹 밑에 노오란 평지꽃이
눈물처럼 맺힌 봄날
나도 섬 하나로 떠서
외로운 물새 같은 것이나
품어주고 있어라
부산에서 삼천포 물길을 타고
봄날 한려수도 물길을 가며
사랑하는 이여
저간의 내 섬 안에 쌓였던 슬픔을
오늘은 물새들이 날고 있는
근해에 내다 버리나니
우는 물새의 눈물로
사량도를 바라보며
절벽 끝의 석란으로 매달리나니
사랑하는 이여
오늘은 내 섬의 평지꽃으로 내려오시든지
내 절벽 끄트머리
한 잎 난꽃을 더 달아주시든지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항해일지 30 김종해
항해일지 30
정박등을 켜고 임시로 닻줄을 내린 곳
서초동, 그러나 아직도 안개고 밤이다
봄은 선미(船尾) 끝으로 물결처럼 사라지고
한 평의 바다도 얻지 못한 채
저 피안의 수풀과 꽃잎은 사라져가는구나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날마다 별로 떠 있어
이승의 노질이 서툴지 않구나
한 사람의 별, 한 사람의 새
한 사람의 섬
이런 단순한 사랑의 말을 읽기 위해
오늘도 갑판 위에 나와 등피를 닦다
―그리워하는 일 하나로 화재가 있었다고 나는 쓴다
―사랑하는 일 하나로 화재가 있었다고 나는 쓴다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회항 김종해
회항
겨울비 내리는 새해의 첫주말
나는 너를 보려고
김포에서부터 날아올랐다
내가 가진 두 장의 은빛 날개
두 눈을 감고서도 고향 가는 길을 나는 안다
육신을 벗어난 영혼의 날기
그리움의 날기
나는 너를 보려고
시시때때 기체를 활주로로 끌어낸다
저 조그만 지상의 불빛이
우리 살아 있음의 사랑의 주소
겨울꿈들이 구름으로 떠올라 있는
네 하늘 위에서
그러나 나는 일순 멈칫거린다
접근 금지.
겨울 폭우 속에 빗장을 굳게 잠근
네 공항 위에서 몇 바퀴 돌고 돌다가
네 얼굴 언저리
두 뺨 위를 돌고 돌다가
깜빡이는 비행등을 달고 회항하는
겨울의 내 사랑아
바람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문학세계사,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