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솔 나무 스치는 바람, 삶은 댓돌에 쌓인 눈송이’라더니, 북경에 올 때 고민하던 때가 엇 그제 같은데 벌써 약속된 시간이 되어 이제 본대로 귀대(歸大)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 돌아갑니다. 돌아가서 북여동이 있어 중국 생활이 즐거웠다고 기억하렵니다.
돌이켜보면 무지 더웠던 8월의 북경, 혼자 씨름하며 외로움에 쩔쩔매던 그 때 우연히 알게 된 북여동과의 만남이 있었고, 첫 여행지 운몽협을 가면서 만나 친숙해진 왕징의 큰오빠 임사장님과 이 시대의 휴머니스트 최박사님, 그리고 후덕하신 방장 bobo님과의 인연을 맺게 되었네요. 그러나 만나자 이별이라고 너무 늦게 북여동을 알게 된 터라 운몽협 여행이 북경에서의 첫 여행이면서 마지막 여행이 되었습니다.
저는 8월 25일 중국 생활의 2번째 기착지인 이곳 내몽고 호화호특(呼和浩特: 호호트)으로 왔고,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 진다’고 정말 그러려니 했는데, 이상하게도 북여동 생각이 애틋해지는 것이 매일 이 카페에 들러보는 것이 저녁 일과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건 아마도 ‘주저리중국사’란 끈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 듭니다.
이곳으로 오기 바로 전, 방장님과 오도구 ‘뜨레쥬르’란 빵집에서 만나 ‘중국사 이야기’를 써 줄 것을 부탁 받고, 한편으론 많은 부담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지만 쓰다 보니 어느덧 30여 편의 글을 올리게 되었네요. 요즈음 이곳 내몽골에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몽골관련 이야기로 인해 전보다 북여동 식구들의 관심이 줄어든 것을 느낍니다. 언젠가 말씀드렸듯이 ‘주저리 중국사’는 말 그대로 주절거리듯이 쓴 것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코너이면서, 개인적으로는 이곳에 있으면서 이때 이런 생각을 했다는 의미를 두고 싶은 50대방이기도 합니다.
이런 인연으로 해를 마무리하는 송년모임에는 꼭 참여하고 싶었고 즐거운 마음으로 4개월 만에 ‘경성 겨울 나들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밤중에 도착한 크리스마스이브 날의 북경의 밤거리는 오랜만에 전장터에서 휴가 나온 병사를 맞이하듯이 매우 평화로웠고, 차가운 밤공기는 오히려 간만에 느껴보는 포근함으로 다가왔습니다.
리수이차오남(立水橋南)역에 친히 마중 나오신 최박사님을 만나 늦은 시간이었지만 훠궈(火鍋)집에서 이과두주를 마시며 두 홀아비끼리 그 간의 회포도 풀었습니다. 다음날엔 영화박물관과 798예술구라는 곳엘 갔었죠. 영화박물관에서는 고등학교 시절, 그 특유의 괴성과 쌍절권의 달인으로 쿵후 붐을 일으켰던 우리시대의 우상 이소룡도 만났습니다. 그리곤 798이라는 곳에도 갔습니다.
북경에 있으면서 꼭 가봐야 하는 곳이 산리툰과 798예술구라는데, 산리툰은 전에 비오는 날 불란서 술집에서 맥주를 마신 적이 있고, 798는 이날 북여동 덕분에 처음 보았습니다. 역시 논리적이지 않고 정형화 되지 않는 곳에서 예술의 창작력이란 것이 생겨난다는 것을 느꼈고, 그런 창조예술의 힘이 인류의 미래를 끌고 가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느 한적한 미술관 대형 그림 앞 의자에 최박사님과 앉아 쉬면서 도대체 뭘 그렸는지 몰라 안내원에게 물어보니, 허름한 조선의 백면서생들이 그림을 사려는지 생각했는지 예쁘고 친절하게도 설명해 주었습니다. 미국에서 유학한 양..모라는 화가의 추상그림으로 하나는 꽃이 개화하는 생명력을, 다른 하나는 석양을 그린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습니다. 값을 물어보니 각각 35만 위안이라 하네요. 역시 예술품은 값으로 환산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간만에 겨울 미술관에서의 여유와 평화를 느껴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휘황한 빛의 상업구 솔라나에서 자본주의보다 더 자본주의스러운 북경 부자들의 풍족함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수천 위안의 명품 파카를 한 점 망설임 없이 카드로 긁는 북경의 연인들, 머리엔 헬멧을 쓰고 무릎과 팔꿈치에는 보호대를 착용하고 아이스하키를 즐기는 영양 상태가 좋아 보이는 아이스링크의 꼬마들. 한 지역 전체를 바다 속으로 꾸며 놓은 스케일 큰 중국인들의 상상력과 투자. 각종 양주를 파는 고풍스러운 술집 거리. 짧은 시간이나마 이것이 지금 북경의 진면목이라는 것도 실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1박 2일 밤새도록 배터지게 먹을 수 있는 ‘8호 공관’이란 곳에도 갔습니다. 청나라 건륭제 때 영국의 사절 매카트니가 와서 중국과 장사 할 것을 요구하지만 중국은 그 ‘자체가 세계로 나지 않는 것이 없고 부족한 것이 없는 곳’이라 거절했듯이 ‘지대물박(地大物博)’한 중국을 실감했습니다. 1인당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북경에 살면 가끔 식구들끼리 한번 가 볼만하다고 생각 들더군요. 종종 잠자리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하지만요..
이곳도 저는 충분히 좋았습니다. 사진 설명에서 토를 달았듯이 부족함이 없는 안주에 어릴 적 흠모했던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내 누님' 같이 은은하면서도 맑음을 간직한 coco님, 윤짱님, 안-개꽃님, 최박사님, 보헤님, 20대지만 정신연령은 40대를 이해하는 용준이, 모두들 한 번을 봤지만 천년을 본 것 같은 마음들이란 걸 느꼈습니다. 언젠가 다시 기회가 되면 그 청순한 맨 얼굴로 가운들 입고 원탁에 둘러 앉아 의미 없는 탁상공론으로 열내가며 맥주 한 잔 마셔보시지요.
하나 아쉬운 것은 ‘프리스타일’ 윤성 군이 지적했듯이 서로를 좀 더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 생각나네요. 학생들 MT때처럼 한 곳에 모여 서로 소개도 하고, 아이들 장기자랑도 볼 공간이 없었던 것이 아쉽기도 하지만, 이제 출범한지 한 돌도 안됬다는 것을 감안하면 북여동은 충분히 최고의 동호회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체국에 가서 책과 짐을 1,500위안을 주고 다 부쳤습니다. 짐을 부치고 나니 갑자기 허전한 것이 일이 잘 손에 안 잡히네요. 그래서 한번 회상하며 써 봤습니다. 이제 며칠 후면 몸은 이곳에 있지 않겠지만, 그래도 마음은 항상 북여동과 같이 하렵니다. 물론 ‘주저리중국사’도 계속 연재하구요. 지금 세상에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지 공간이동은 가능하니까요.
북여동이 있어 기대와 설레임이 있어 좋았습니다. 모두들 언제나 한결같이 건강하시기 빕니다.
보보, 호야, coco 파이팅!
첫댓글 ^^* 세첸님.... 회자정리는 불변의 진리이고 만고의 법칙인가 봅니다. ㅎㅎㅎ 세첸님과의 인연이 가는년(?)과 오는년(?)사이에 끼어 서로 머뭇거림과 짧은 훍어봄으로 끝은 아닐거라 생각합니다. 비록 배움이 모자라서 수인사도 예가 아니고 대접도 도를 벗어났지만 너그럽게 이해하고 수용해주시는 세첸님의 마음 한올이라도 잡을 기회가 또 오리라 굳게 믿습니다. ^^*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은다 함은 세첸님의 몽골사랑이 그만큼 깊고 넓다하겠으니 달라이라마의 영력으로 기필코 세친님을 몽골로 돌아오게 하지 않을까 소심하게 상상해봅니다. ^^*
세첸님 그동안 수고하셨고 안녕히가시고 기회가 되면 다시 만나요..언제어디 계시든 세첸님은 북여동의 특별회원이십니다.중국에 관한 재미난 역사역사 이야기를 기대합니다. 성탄절 여행때 북경에 안 머무르시고 급히 가시는것 많이 걸립니다. 2011년에는 더욱 건강하시고 하시고자하는일이 대박나시길빕니다..세첸님 또만나요... 귀국하시기전에 일정이 맞으면 북경에 살짝 다녀가세요...공항과 왕징은 20분이면된답니다.
세첸님을 만나 뵌적은 없지만 "주저리 중국사"로 만년에 알아가는 중국사가 참으로 흥미거리 였습니다.
쉽고 재미나게 풀어 주시는 중국사를 계속 볼 수 있겠지요? 항상 건강 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