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은 언제나 도전거리였다.
올란도는 영화로, 델러웨이 부인은 앞부분 읽다 던져버렸다.
언젠가 꼭 그녀의 세계로 들어가리라 맘 먹던 중, 올 겨울 방학 드뎌 그녀를 만났다.
울프의 작품은 초반에 많은 인내를 요한다.
아주 일상적이고 내면적인 풍경들의 서술이 번역투의 문구로 지리하게 계속되기 때문이다.
다 읽고 난 후, 그녀의 문체를 번역해 낸다는 일이 참으로 만만한 일이 아닐거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번역은 직역을 했기 때문에 대화의 경우 정말 자연스러운 읽기를 차단할 정도로 거북하다. 언젠가 영어로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영어 공부 열씨미~~~
초반의 지리한 인내 끝에... 그녀의 탁월하고 예리한 감수성은 머리가 따 찌릿하고 섬찟해질 정도로 감동적이다.
1880년에서 현재까지... 그러나 현재는 몇년인지 밝혀지고 있지 않다. 아마도 50년의 세월동안 한 가족과 그들의 사촌들이 살아가고 죽어가고, 태어나고 늙어가는 이야기다. 각 장은 년도이다. 1년 혹은 2년의 시간을 넘어 각 장은 한 인물, 한 인물을 타고 넘어간다. 그들은 감춰야할 사랑으로 청춘을 보내기도 하고, 라틴어의 히랍비극의 세계에서 지고하게 살기도 하고, 혁명에 빠져 벽돌을 던지기도 하고, 가난 속에서 외로워하기도 하고, 결혼하기도 하고, 이별하기도 하고, 저녁의 황혼 속에서 삶이 지나는 걸 보기도 하고, 여행하기도 하고, 서로 기대며 삶의 불안을 위로하기도 한다. 그렇게 늙은 이와 젊은 이들이 한 자리에 보여 밤샘 파티를 벌이는 마지막 '현재' 장으로 끝이난다.
일단, 그 인물의 광범위함과 긴 시간의 스케일을 장편으로 엮어내면서도 전체적 구성을 치밀하고 예술적으로 완성해낸 작가의 구성력이 대단하다. 우리의 대하 소설 "토지"에는 비견될 수 없지만, 토지가 민족의 고난사라는 대 서사를 타고 있지만, 이 작품은 사건이나 서사가 강하지 않다. 그저 일상과 대화와 관계와 심리 묘사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건져올리는 내면의 풍경들이 기후나 셋트에 대한 묘사, 등장인물들의 일상적 대사, 관계의 주저함과 드러냄... 들이 부딪히고 상보하면서 이루어내는 이미지는 대단한 경지다.
살아간다는 일, 스쳐지나는 시간들, 순간 순간 속에서 존재한다는 일이 흐르고 흘러 세월이 되고 삶이 되고 되새김할 의미도 없이 그렇게 흘러가고 스러져간다. 그 순간들에 대한 집요한 포착... 은 작가의 지성과 감성의 치밀함과 예민함과 진지한 사고없이는 불가능하다.
마지막 현재의 장, 파티 장면은 압권이다. 대사와 행동들, 생각들, 이미지들이 중첩되고 어긋나고 드러나고, 충돌하면서 짜들어가는 개 개인의 관계와 갈등과 연민과 애정을 그토록 섬세하게 서술해 나가는 인내에 혀를 내두들 밖에...
"거기에는 또 다른 삶이 있었음이 분명해. 의자 속으로 몸을 움츠리면서 그녀는 화가 나서 생각했다. 꿈 속에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 사람들이 있는 이 방 안에, 그녀는 마치 자신이 머리를 뒤로 휘날리면서 벼랑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느꼈다. 그녀는 자신에게서 달아나려는 무엇인가를 막 잡으려는 순간이었다. 거기에는 뭔가 다른 삶이 있었음이 분명해. 그녀는 되풀이 했다. 그것은 너무 짧고, 너무 부서져 버렸어. 우리는 아무것도 몰라. 심지어 우리 자신들에 관해서도. 우리는 다만 여기저기를 이해하기 시작한 거야. 그녀는 로즈가 손을 귀에다 갖다대는 것처럼 손으로 자신의 무릎을 감싸쥐었다. 그녀는 손을 감싼 채 그대로 있었다. 그녀는 현재의 순간을 보관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현재의 순간이 머무르도록,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지금 이 순간을 가득 채우고 싶었다. 그것이 깊은 이해와 더불어 빛나며, 완전하게, 밝게 될 때까지...."
파티에서 할머니가 된 엘리너는 생각한다.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