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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쇠망을 불러온 훈족의 서방진출과 게르만의 대이동
훈족 - 동고트(게르만) - 서고트(게르만) - 로마
훈족과 서고트족이 서남으로 이동하면서 로마의 쇠망을 초래했다.
훈(Hun, Hunni, Huna)이 흉노(Hsiung-nu)에서 연유했다는 것은 1750년대에 프랑스의 드 기네(Joseph de Guignes, 1721∼1800)가 처음으로 제시했지만 곧바로 정설로 받아진 것은 아니다.
흉노(匈奴)는 중국 북방에서 첫 유목민족국가를 건립한 민족으로 기원전 4세기경부터 중국의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흉노(匈奴)’의 어원에 관한 여러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흉(匈)'자는 '훈(Hun 혹은 Qun)'의 음사이며, '훈'은 퉁구스어에서 '사람'이란 뜻으로 흉노인 스스로가 자신들을 '훈(Hun, 匈)'으로 불렀다고 추정한다. 문제는 '노(奴)'자인데 대체로 이 글자는 한자에서 비어(卑語)인 '종'이나 '노예'의 뜻으로 그들을 멸시하는 의도에서 '노'자를 첨가해 '흉노'로 불렀다고 알려진다.
4∼6세기에 유럽에서 일어난 게르만민족의 대이동이라 하면, 흑해(黑海)의 북쪽 해안에 있던 게르만계(系)의 고트족(Goths 族)이 4세기 말 서진(西進)하여 온 훈족(Hun 族)에게 밀려서 376년 서고트족이 다뉴브강을 건너 처음으로 로마제국의 영토 안으로 이주한 것을 계기로 라인강·다뉴브강 등 로마제국 국경선의 북동쪽 일대에 있던 게르만인의 여러 부족이 잇따라 이동을 시작했는데, 특히 동게르만에 속하는 여러 부족이 서로마 영토 안으로 깊숙이 이주·정착하여 각 지역에서 각각의 부족국가(部族國家)를 세운, 거의 6세기 말까지 210여 년 간의 과정에 일어난 일을 가리킨다.
학자들은 로마의 멸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로마제국의 유적.
기번을 비롯한 몇몇 학자들은 이렇게 로마제국의 멸망 원인을 외부에서 찾고있다. 특히 기번은 로마 제국의 멸망 원인을 무기력한 기독교를 수용하여 국교로 한 점, 그리고 로마제국이 당시 기술수준으로 보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대해진 점 이 두 가지로 압축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 밖의 외적인 요인으로는 로마 변경에서 야만적인 생활을 하고 있던 게르만족의 침범과 동방의 사산 조 페르시아 세력의 영향을 들 수 있다. 로마는 이러한 외부의 침입을 물리칠 수 있는 군사력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의 군대에서 이탈리아인은 소수에 불과 하였고 대부분의 병사들은 속주에 속한 군인이거나 아니면 로마 영내로 들어온 게르만 용병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 같은 외적인 요인도 무시 할 수 없지만, 제국의 흥망은 그 하부구조의 튼튼함에 의해 좌우되기 마련이므로, 우리는 로마 쇠퇴의 원인이 바로 로마 내부 발전원인의 쇠퇴임을 추론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수한 제도가 더 발전적인 제도로 바뀌지 못한 채 잘못된 제도로 변경되고 귀족들이 모범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 로마의 쇠망을 불렀다 할 것이다.
기원 375년, 내륙 아시아에서 강력한 유목민인 훈족이 발라미르(Balamir, Balamber)의 인솔하에 서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볼가강을 건넜다. 기마집단 훈이 동고트인들이 거주하던 동쪽 국경을 유린하자 동고트 왕 헤르만리크(Hermanrik)는 자살하고 아들 후니문드(Hunimund)는 훈족에게 투항한다.
반면에 훈족에 투항하지 않은 알라세우스(Alatheus)와 사플락스(Saflax)는 동고트인들을 이끌고 드네스터 강 서쪽의 서고트족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들에게 쫓긴 서고트족의 왕 알라리크는 6만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도나우 강 남쪽의 로마 영토로 무작정 들어와서 동쪽 로마 황제 발렌스(재위 364∼378)에게 트라키아로 이주하여 살 수 있도록 청원했다.
서고트 왕, 알라리크.(Alaric, King of the Visigoths)
알라리크(Alaric, 370? ~ 410)는 도나우강 하류 남안(南岸)에 이동하여 비잔틴제국의 영토인 트라키아에 정주한 서고트족의 족장으로,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교묘한 정책에 조종되어 그와 동맹을 맺었다. 395년 테오도시우스가 죽자 왕으로 추대되고, 서고트족을 지휘하여 마케도니아로부터 그리스를 공략하였다. 397년 로마의 장군 스틸리코의 대군을 맞아 에페이로스로 피하였으나, 이듬해 비잔틴제국의 황제 아르카디우스와 화약을 맺어 일리리쿰(아드리아해 東岸)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401년 북이탈리아에 침입하여 여러 도시를 빼앗고, 403년에 베로나에 침입하였으나 그때마다 로마의 재상 스틸리코에게 격퇴되었다. 408년 스틸리코가 죽자 세 번째로 로마에 입성하여 황제 호노리우스로부터 돈을 받고 물러났다. 409년 다시 로마를 위협하여 로마시의 지사 아탈루스를 대립황제(對立皇帝)로 세웠으나 이듬해 이를 폐하고, 호노리우스와 유리한 조건으로 화약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호노리우스가 이를 거절하자 마침내 로마시내로 쳐들어가 3일 동안에 걸쳐 약탈하였는데(410), 이것이 게르만 족장으로서는 최초의 로마 침입이었다. 그는 아프리카 원정길에서 폭풍우를 만나 수난(水難)으로 급사하였다.
서고트족의 이동이 종전에 제국의 변경 지방에서 일어났던 부분적이고 우발적인 이주와는 크게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발렌스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그들의 청을 승낙했다.
사실 발렌스 황제는 서고트족의 이주를 처음에는 반겼다. 속주민들이 징집을 면제받기 위해 매년 납부하는 거액의 황금으로 황실 재정을 튼튼히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단 다뉴브 강을 건너기 전에 무장을 해제하고 부모들의 충성을 담보할 인질로 어린이들을 따로 떼어 아시아의 여러 속주에 분산시킨다는 조건이었다.
이 당시 다뉴브 강을 넘은 서고트족의 이주민 총 숫자는 남녀노소를 합쳐 100만 명(당시 서고트족 무사의 수를 20만 명으로 추정)에 이른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거주지를 잃고 쫓겨 내려 온 서고트족들을 진정한 피난민으로 대우하지 않고 마치 전쟁의 포로처럼 하대한 것이 문제였다.
알라리크(King of the Visigoths)는 6만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도나우 강 남쪽의 로마 영토로 들어가 동로마 황제 발렌스에게 이주허가를 청원했다.
그들은 토지도 할당받지 못하고 생활필수품에는 무거운 세금이 매겨졌으며 로마인들은 보잘 것 없는 식품도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팔았다. 서고트족은 빵 한 조각을 얻으려 해도 일 잘하고 값비싼 노예를 넘겨주어야만 했다.
마침내 화가 난 서고트족은 378년 아드리아노플에서 발렌스 황제가 직접 지휘한 로마 군을 공격하여 격퇴한 후 여세를 몰아 가는 곳마다 초토화 시키면서 발칸 반도를 마음대로 유린했다. 이 전투에서 발렌스 황제가 전사한다.
아드리아노플 전투는 로마에 칸네의 전투보다 더 치명적인 결과를 미쳤으며 전쟁사에 있어 보병에 대한 중장기병의 첫 승리라는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로마를 상대로 전투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서고트 인들은 계속 로마 영토 안으로 남하했다.
결국 로마는 382년 도나우 강 남쪽에 정착한 서고트 인들에게 자치를 허용했고 전투원들은 명목상으로 로마군단의 번병(황제에게 봉사하는 군대, confederates)이 되었다. 그러나 서고트 인들이 새로운 땅에 정착했지만 자신들이 샌드위치 신세임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로마 남성은 모두 병역의 의무가 있었으므로
로마 군대는 전투병의 지속적인 공급이 가능했다.
로마 제국의 압력이 사라지지 않은 데다가 북방의 훈족에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들 번병은 로마군단에 속해있었음에도 자신들의 우두머리로부터 직접 지휘를 받고 있었으므로 강력한 로마 제국과 훈족의 위협을 벗어나기 위해 정공법을 택했다. 발칸 반도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자신들의 상전인 로마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Theodosius I). 훈족이 서유럽을 처음으로 공격한 지 25년이 지난 401년 12월, 현재의 독일 땅에 한파가 몰아닥쳐 라인 강이 얼었다. 라인 강이 얼어붙자 알라리크 왕 휘하의 약 1만 5000명의 반달족이 로마의 속주인 갈리아로 들어가 프리울리 지방을 지나 이탈리아의 포 강 유역의 평야로 진격했다. 그들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로마제국의 상비군으로 4만 명에 달하는 반달족이 포에데라티(동맹군)란 이름으로 봉직하면서 급료 등 보조금을 받았는데 이것이 중단되거나 삭감되었기 때문이다. 스틸리코(Flavius Stilicho, 365년경 – 408년) 장군. 스틸리코는 로마인과 반달족의 혼혈아로 태어났다. 그는 직업군인이 되어 383년에 페르시아 왕 샤푸르 3세에게 사절로 파견되었고 그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총애하는 조카딸 세레나와 결혼했다. 그는 385년경에 근위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393년 또는 그 전에 육군 총사령관이 되어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스틸리코는 자신의 동족인 반달족에게 일단 승리했지만 그들을 회유하여 예전처럼 동맹군으로 묶어두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알라리크에게 많은 공물을 주어서 변방의 우려를 씻어야 한다고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을 설득했다. 이당시 로마에서 알라리크에게 제시한 보조금은 황금 4000파운드였다. 그의 강경노선은 처음에 성공을 거두어 406년 야만족 혼성군(반달, 알란, 동고트족 등)이 토스카나 지방에 침입했을 때 스틸리코가 이들을 격퇴한다. 그러나 스틸리코의 위세에 겁을 먹고 있던 호노리우스 황제는 원로원 의원들의 사주에 따라 스틸리코가 황제직을 찬탈할 수 있다고 의심한 후 그를 살해했다. 로마로 진격하는 서고트족(게르만) 리더 알라리크(Alaric). 이 당시 로마의 성벽의 둘레는 원형으로 거의 21마일에 달한다고 알려졌고 가옥 수는 5만여 동이었으며 로마의 주민수를 120만 명으로 추정한다. 알라리크는 대군을 교묘하게 배치해 놓고 로마 성벽을 둘러싸고 있는 중요한 12개의 문을 장악한 후 인근 지방과의 모든 교통을 차단했다. 로마를 약탈하는 알라리크(Alaric) 군대. 알라리크는 로마에서 철수하자마자 사망했고 의형제 아타울프가 반달족을 이끌었다. 그들은 수비에 족과 합류하여 오랫동안 평화롭게 살고 있던 이베리아 반도(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역에 정착했다. 한편 훈족에 의해 쫓겨났던 알란족은 피레네산맥으로부터 바다 쪽에 걸쳐 에브르 강의 계곡을 따라 정착하고, 다시 루시타니아(현재의 포르투갈)의 각지로 흩어졌고 강력한 함대를 이용하여 탕헤르(아프리카 모로코)에도 상륙했다. 반달족은 439년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점령하고 트리폴리까지 진격했으며 지중해의 코르시카, 시칠리아, 사르데니아 섬도 점령했다.
로마의 국토가 유린되는데도 불구하고 테오도시우스 황제(재위 379∼395)는 종교 정책에만 매달렸다. 그는 그리스도교 이외의 다른 종교는 모두 이교로 취급하면서 신전을 파괴하고 이교를 믿는 자들은 모든 도시에서 추방했으며 그들이 갖고 있는 영지는 몰수했다. 또한 테오도시우스는 죽으면서 제국을 동과 서로 분리하여 동로마제국은 17살의 아르카디우스(재위 395∼408), 서로마제국은 10살의 호노리우스(재위 395∼423)에게 주었다.
당시 서로마 제국의 제국군을 지휘하고 있는 장군도 같은 반달족인 스틸리코였다. 그는 테오도시우스의 임종시에 두 아들과 로마제국을 돌보도록 부탁받은 터였다. 스틸리코 장군은 402년초, 알라리크의 군대를 피에몬테 지방에서 격파한 후 402년 말에 베네토 지방에서 결정적으로 패배시킨다.
알라리크가 잠잠하자 호노리우스 황제는 서로마 수도를 로마에서 라벤나로 옮기는데 이 결정은 로마가 야만족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대항하기 위한 조처였다. 호노리우스는 수도를 옮긴 후 야만족들에 대항하여 이제까지 취했던 보조금 정책을 취하하고 공격적으로 나선다.
스틸리코의 사망으로 상황이 바뀌자 알라리크는 408년 로마를 직접 공격한다. 명분은 로마제국에서 그들에게 지급해야 할 황금을 제때에 지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알라리크는 곧바로 로마로 진격하여 마침내 로마 성벽 아래에 진을 쳤다.
로마의 생활필수품 공급로인 티베리스 강의 항해가 봉쇄 당하자 로마는 로마 시를 점령하지 않겠다는 알라리크의 화의조건을 수락하고 410년에는 3일간 알라리크에게 약탈을 허락한다. 당시의 여건을 볼 때 알라리크가 로마를 점령한 후 로마를 직접 통치할 수도 있었다고 학자들은 믿는다. 알라리크가 이런 절호의 기회를 왜 회피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여하튼 알라리크는 로마에서 마음껏 약탈한 후 자진 철수했다.
브리타니아도 게르만 민족인 주트와 색슨에 의해 점령당했고 그 후에 또 다른 게르만 민족인 앵글 족이 브리타니아를 침공했다(이 당시 게르만 민족의 침입에 대응한 브리타니아 인들의 저항도 완강하여 유명한 아더 왕의 영웅적인 전설이 나오게 된다). 여하튼 브리타니아를 포함하여 서유럽은 이후 각 지역에 정착한 민족들에 의해 새로운 국경이 세워지며 현재까지 커다란 변동 없이 이어지고 있다.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의 기마군단.
훈족은 걸출한 영웅인 아틸라(395∼453)가 통치한 450년경에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다. 아틸라가 지배한 지역은 남쪽으로는 도나우 강 남쪽의 발칸 반도, 북쪽으로는 발트 해안, 동쪽으로는 우랄산맥, 서쪽으로는 알프스에 이르는 실로 광활한 영토에 걸쳐 있었다. 훈 제국은 세계 역사상 칭기스칸, 알렉산더 대왕에 이어 세 번째로 광대한 영토를 점령했다고 추정하며 치하의 종족 수만도 45여 족에 이르렀다.
훈족이 유럽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단 100여 년에 지나지 않지만 훈족이 유럽 대륙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훈족의 침입으로 민족대이동이 이루어졌고 이후 이들 민족들의 새로운 정착지를 기준으로 새로운 국경이 만들어 졌다. 서유럽의 국경이 새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사실상 훈족에 의해 새로운 질서가 도입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아틸라가 지배했던 제국의 영토(450 A.D.)
일반적으로 '유럽'이라고 지칭할 때는 서유럽을 뜻하는데 서로마 제국이 게르만 인인 오토아케르 정복된 후(476년) 봉건 제도가 출현하기까지 약 600년 간, 학자들의 분류에 의하면, 비생산적인 시대 또는 암흑시대로 빠져든다. 훈족에 의한 게르만 민족의 이동이 그만큼 큰 파장을 갖고 왔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