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실을 구한 최 사전
최 사전은 1077년 고려 문종 31년에 태어나 의관과 문관 벼슬을 지낸 우리고장 강진이 본관인 탐진 최씨의 시조이다. 그는 예종 임금 때부터 대궐에서 임금의 건강을 보살피는 의사가 되어 인종 임금 때까지 어의로써 소부소감의 벼슬을 지내기도 했다.
그런데 그 당시는 나라가 매우 위태로울 때였다.
예종 임금이 죽자 인종이 14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그의 외조부 이자겸이 세력을 잡게 되었다. 전부터 왕실의 척실이 되어 세력을 누려왔던 이자겸은 자기의 세력을 더욱 튼튼하게 하고자 외손자인 인종에게 다시 두 딸을 왕비로 삼게 하였다. 이렇게 자기의 세력이 커지자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내쫓고 아첨하는 사람만을 중요한 자리에 등용시키니 그의 생활은 임금보다 더 호화롭고 날이 갈수록 행패가 심했으며 끝내는 임금의 자리까지 빼앗으려고 하였다.
한편 이를 미리 알아차린 임금은 신하 김 찬, 안보림에게 그 계책을 의논하게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아뢰였다.
그러나 왕은 듣지 않고 최탁, 권수, 고석 등의 장수들에게 비밀리에 이씨 일파를 없애라는 밀지를 보냈다.
밀지를 받은 최 탁 등은 1126년 인종 4년2월 어느 날 밤에 척준경의 아우 척준신과 최준경의 아들 척 순 등을 죽여 그 시체를 궁성밖에 내동댕이쳤다.
이때 왕 의라는 사람이 몰래 성벽을 넘어 급히 이자겸에게 알리니 이 자겸은 척 준경과 군졸 수 십 명으로 하여금 대궐로 쳐들어가게 하였다. 척 준경은 성문을 뚫고 대궐로 들어가 불을 지르고 최 탁, 권 수, 고 석, 안보림 등을 죽였다.
이리하여 임금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도리어 임금은 그에 3월 이자겸의 집에 갇힌 몸이 되고 말았다.
이자겸은 왕비(자겸의 넷 째 딸)로 하여금 독약을 먹이도록 하였으나 왕비는 거짓으로 쓰러져 독약을 엎어버림으로써 겨우 화를 면했다. 이자겸과 척준경은 날이 갈수록 횡포가 심해 졌다. 어쩌면 임금의 신변은 점차 위험해졌으며 고려왕실의 장래가 걱정이었다. 이때 어의로 있던 우리 강진 출신 최 사전이 이자겸을 물리칠 계략을 짜냈으니 이자겸이 마음대로 권력을 부리는 것은 척준경 뿐이라 이 척준경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때부터 최 사전은 척준경을 찾아 다니며,
“큰 일났오, 지금 이자겸의 형편으로 보아 왕을 죽이고 나면 그 다음은 척준경 당신을 없애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두 사람을 없애는 계획을 세우는 비밀회의에 참석하였다가 돌아오는 길이오”하고 말을 하였다.
단순한 척준경은 그 말을 듣자 화가 나서 펄펄 뛰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귀에다 대고
“이자겸을 없애면 귀한 공신이 될 터이니 거사를 하시오. 내 기어코 임금님께 고해서 당신의 벼슬을 높여 드리리다”하고 꾀었다.
이에 척준경은 즉시 군사들을 동원하여 이자겸을 습격하였다. 별스런 방비도 없었던 때라 이자겸은 사로잡힌 몸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인종 임금은 풀러 났으며 이자겸을 전남 영광 지방으로 귀양 보내고 자기를 구해준 최 사전에게는 중추위사 공신이 되어 문화사랑 평 장사(지금 국무총리)라는 신화로서는 최고의 벼슬을 주었다.
또 승하 임금의 죽음)하시면 서도 내 무덤 곁에 최사전을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최사전 무덤은 인종 무덤과 함께 모셨다.
이처럼 최사전은 우리고장 강진에서 태어나 임금님을 보살피는 어의에서 신하로서 최고의 직분인 문하시랑 평장사가 되었음은 그의 지혜로움과 목숨을 걸고 나라의 위기를 구하시기에 힘쓴 그의 충성심 때문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고려사, 고려절요 한국의학사 조선금석총람등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