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아버지께로...”(마태 21:23-32)
김희영(드보라) 신부 / 전주교회
그리스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명언이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이 말은 그의 ‘정치학’이라는 저서에 등장하는 말로 사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는 말이 번역의 과정에서 ‘사회적 동물’로 전환되었다고 합니다. 정치는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거나 통제하는 것으로 우리의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사실 들여다보면 정치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럼 정치는 어떤 힘의 논리로 작동할까요? 정치의 힘이란 ‘누구 혹은 어느 진영이 그 사회 구성원들의 마음을 더 많이 얻을 명분을 갖느냐?’는 대의명분에 있습니다. 그래서 정치가들은 각자의 대의명분을 세우고 자신들이 속한 진영에 더 많은 대중을 포섭하려 합니다. 그러니 더 민주적이고 더 성숙한 사회에서의 정치는 사안에 따라 엎치락뒤치락 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런데 어떤 사회에 하나의 대의명분이 고정된 채 어느 개인, 혹은 어느 집단의 정치가 막강한 힘을 발휘하며 특권으로 계급화 된다면 어떨까요?
오늘 우리가 만나는 복음서에서 예수님께 무슨 권한으로 성전 뜰의 상인들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며 하늘나라를 선포하는지 묻는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그러합니다. 그들은 어느새 정치 권력자들과 결탁하여 성전중심적인 이스라엘 사회에서 율법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대의명분으로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특권층이 되었습니다.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두 아들의 비유를 들며 “아버지의 말에 ‘아니요!’ 라고 답하고는 아버지의 말을 이행하는 큰 아들과 ‘예!’ 라고 답하고는 아버지의 말을 이행하지 않는 둘째 아들 중 누가 아버지의 뜻을 받든 사람이냐?” 묻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하느님의 가르침인 율법의 수행자로 자칭하면서 사실은 자기 욕망만을 채우는 너희보다 죄인으로 낙인찍힌 세리와 창녀들이 하느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가고 있다는 말씀도 하십니다. 그 말씀은 하느님 나라는 종교, 정치, 경제적 권력가들이 입구를 틀어막고 세금을 걷어가며 ‘들어가라 마라.’를
결정하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나라는 세상의 자기 욕망으로 가득 찬 정치적 힘의 논리가 아닌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삶의 태도에서 벗어나 겸손과 자비, 사랑과 섬김의 태도로 삶을 살아가는 이들 누구나 참여 할 수 있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나라는 비단 우리 그리스도교만의 전유물도 아닙니다.
현재 우리 대한민국 사회에는 수많은 기독교 종파, 교단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근간에 격고 있는 코로나 사태속에서 교회는 종파와 교단의 구별 없이 세상으로부터 그 존재에 대한 답변을 요구 받는 거 같습니다. ‘교회는 왜 존재하는가?’ 이 물음 앞에 우리는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는 말씀을 새겨야 합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세리라서, 창녀라서가 아니지요. 자신들이 살아온 삶의 태도를 뉘우치고 올바른 삶의 길에 대한 가르침을 믿고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올바른 삶의 길을 예수에게서 깨닫고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정치적 힘의 논리로 자기욕망만을 채우는 세상은 하느님을 거대한 힘, 권력자로 이해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안에서 이해합니다. 아들의 존재는 더 큰 존재인 아버지에게서 그 근원을 찾고 나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믿으며 아버지에게 배운 사랑대로 세상을 살아갈 때 깨달아집니다. 그러나 관계란 늘 불완전해 보이며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이 필요하고 서로의 믿음을 거울처럼 비춰줄 벗과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현재 많은 교회들이 모임이 금지되며 대면예배의 어려움을 격을 줄 압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 우리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 교회의 존재, 신앙인의 삶의 태도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 깨달음으로 어둠속에 빛을 밝히며 교회 공동체를 새롭게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