껌 하나의 추억
내가 중국에 갔을 때의 이야기다. 소주의 ‘졸정원’ 관광 중에 일행 중 하나가 무심코 씹던 껌을 길 가운데에 뱉은 일이 있다. 뒤따라오던 노인 한 분이 화장지를 꺼내더니 그 껌을 곱게 싸서 호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남이 씹던 껌을 도대체 어디에 쓰려고 저렇게 소중하게 간직할까.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곁에 다가가서
“할아버지, 그 껌 뭐 하려고 그렇게 곱게 싸서 넣으세요?”
하고 물어보았다. 그 할아버지가 무어라고 말하는데 중국말이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옆에 따라오던 가이드가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한답니다. ‘졸정원’이 더러워지는 것은 중국의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이라고 하는데요.” 라고 통역을 해 주었다. 나는 그 말 한마디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참으로 커다란 감동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자기 나라의 문화재를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 이것이 바로 나라와 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아니고 무엇이랴. 문화재 위에 떨어지는 작은 티끌 하나라도 참지 못하는 저 노인의 자긍심이 모여 오랜 잠에서 깨어나 바로 거인으로 발돋움하는 중국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 아닐까?
몇 년 전이던가 ‘숭례문’이 한 노인의 방화로 화마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우리 국민들은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숭례문’은 1396년(조선 태조 5년)에 축조된 것이니 햇수로 612년이 된 건물이다. 서울의 도성 정문으로서 우리 민족의 부침을 지켜본 역사의 증인이며, 서울시에 남아있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 된 건물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병란도 피해갔으며, 일제치하에서 조선 문화의 잔재를 말살하려던 일본인들조차 보호해 주었던 민족의 자존심과 얼이 담겨있는 소중한 문화재이다. 국보 1호로서 온 국민의 사랑을 받던 이 건물이 자연 발생적 화재도 아니고 우리 국민 중 1인의 방화로 인해 전소되었으니 참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조상들에게도 죄송스럽고, 국보 1호를 보존하지 못한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전 세계 사람들에게도 참으로 부끄럽다. 국민 성금을 모으고 국고를 헐어 ‘숭례문’을 재건축하기는 하였지만 겉모습만 겨우 복원하였을 뿐이다. 외형적 숭례문은 다시 세울 수 있었지만 그 속에 담겨 소실된 소중한 역사는 어찌 되살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풍요한 나라라 하더라도 문화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선진국이 될 수 없다. 프랑스나 영국과 같은 선진국들은 산업화 속에서도 문화재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경제적 풍요를 위해서도, 교통의 편리를 위해서도 쉽게 문화재를 훼손시키지 않는다. 어디를 가도 문화재 한 귀퉁이에 낙서를 한 곳도 없으며, 기분이 나쁘다고 발길질하는 사람도 없다. 세익스피어에 대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으며 랭보를 그 무엇보다 사랑한다. 자신의 문화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으며, 그런 문화의식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아파트를 짓기 위해 오랜 역사적 유적지를 망설임 없이 옮기는 나라, 심심풀이로 문화재 벽에 낙서하는 사람이 많은 나라, 작은 사회적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국보 1호에 불을 지르는 사람이 있는 나라, 그런 나라의 국민인 것이 참으로 부끄럽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은 나라, 전통을 소중하게 계승하려는 노력을 하는 나라, 자신의 문화를 진정으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나라에 살고 싶다.
국민들의 자부심을 남김없이 불살라버리고 조금의 뉘우침도 없는 뻔뻔한 방화범 그 노인의 얼굴을 보며, 소주 ‘졸정원’에서 껌을 주워 주머니에 넣던 그 노인의 모습이 그리워지는 것은 어찌된 연유일까.
<문학사랑> 2008년 봄호
첫댓글 남편과 함께 그곳을 간 적이 있습니다. 남편의 함부로 버린 담배꽁초 때문에 문제가 되었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문화재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자연에 심은 문화재 보호에 나부터 앞장설 마음이 생깁니다. 감사합니다.
우린 가끔 위대한 영혼을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거창한 일이 아닌 남들이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문화재의 개념조차 무시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유럽에서 근무할 당시 삶의 또 다른 철학을 느끼고 배웠습니다. 껌을 주워 쓰레기 통에 넣었던 분보다. 함부로 껌을 버린 다음, 새로운 앎을 얻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행분도 많이 배우셨을 겁니다. 빗방울이 하늘을 긋습니다. 텃밭에 채소와 꽃밭 꽃들이 환하게 웃는 아침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국화향기', '바다마루' 두 분 선생님 고맙습니다. 글을 올리면 보아주는 분들이 제일 고마운 분들이지요.수필가는 아니지만 좋은 수필 올리도록 노력할게요.
새해에는 우리 문화재를 더욱 아끼고 사랑하며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은 나라, 전통을 소중하게 계승하려는 노력을 하는 나라, 자신의 문화를 진정으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나라에 살고 싶다." 라는 말씀에 공감하며 담아 봅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