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산(梵山) 김법린(金法麟), 그의 일생은 고난 극복의 역사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어려선 가난 때문에 힘들었고, 나라 잃은 설움을 알게 된 후에는 하루하루 살아가는게 벅찼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노력과 불심(佛心)으로 이겨냈다. 13세에 출가해 불법(佛法)에 귀의한 뒤 중국, 프랑스, 일본 등 낯선 땅을 떠돌며 수행자이자 독립운동가로 살아온 그가 의지한 곳은 부처님 가르침. 그 안에서 “주권을 되찾고, 일제에 짓밟힌 한국불교를 바로 세울 것”이란 희망을 안고 살았다. 그런 그가 세상을 향해 말한다. “이상을 갖고 살라”고….
불교계 비밀결사 ‘만당’조직 활동
세계 피압박민족대회 대표 참석도
해방 후 동국大 총장 전념하다 순직
범산은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어려서 집을 떠나 은해사 양휘허(楊揮虛)스님 밑에서 공부했다. 은해사에서 1년간 수학했는데, 주지스님은 “크게 될 아이니 공부를 더 시켜야겠다”며 그를 범어사로 보냈다.
당시 범어사는 금어암에 명정학교를 설립해 인재양성에 힘쓰고 있었다. 범산은 범어사 명정학교와 불교전문강원 과정을 마친 뒤 고등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휘문고보 졸업을 1년 앞두고 그는 불교중앙학림에 편입했다.
당시 불교중앙학림에는 만해스님이 강사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학생 여럿이, 스님이 청년불교운동을 위해 설립한 서울 계동의 유심사(惟心社)에 모여 교리를 배우고, 민족사상을 공부했다. 1919년 2월28일 만해스님은 자신을 따르던 학생 몇 명을 유심사로 불렀다. 잡지 〈유심〉의 편집 실무를 맡았던 범산 역시 참석했다. 그 때 만해스님은 3월1일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에 대해 이야기했다. 스무살 청년의 가슴은 달아올랐다.
3일 뒤 그는 김상헌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갖고 범어사로 내려갔다. 동래 장날을 이용해 만세운동을 기획했으나 일본헌병의 탄압으로 주동자들이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어렵사리 몸을 피한 범산은 임시정부가 수립(1919년 4월13일)됐다는 소식을 듣고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임정 요인들과 함께 항일운동을 벌였다. 그는 상해 안동현에서 독립신문 안동지국을 운영하는 한편 쌀가게인 동광상점을 차리고, 불교계 자금전달과 정보제공 등을 맡았다. 백두산 밑 초산 지역에서 폭 50m 정도의 강을 헤엄쳐 건너 독립자금을 전했던 그는 “얼음이 녹은 직후라 강물이 어찌나 차갑던지 살이 에였다”고 회상한 바 있다.
그 때 그의 나이 스물두살, 뭔가 허전했다. 범산은 “이 길로 만주로 가 독립군에 가담할 것이냐, 아니면 미국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할 것이냐”는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했다. 상해에서 영어와 중국어를 공부하던 그는 프랑스 유학을 결심했다. 당시 중국에는 유능한 청년을 선발해 유학을 보내주던 ‘유법검학회’라는 장학단체가 있었다. 범산은 중국인 유학생 틈에 끼어, 법윤(法允)대신 팔린(法麟)으로 이름을 바꾸고 유학길에 올랐다.
1920년 프랑스 마르세이유에 도착해 고등학교 과정에 들어갔다. 저녁에는 청소부, 간호사 등을 해가며 학비를 벌었다. 고초는 그의 의지를 더 강하게 만든 자극제였다. 1923년 파리 소르본 대학 철학과에 입학한 범산은 3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근세철학을 연구했다. 그 무렵 벨기에 브뤼셀에서 세계피압박민족 반제국주의대회(1927년 2월5일~14일)가 열렸다. 불어가 유창한데다 독립에 대한 남다른 의지를 갖고 있던 범산이 대표로 참석했다. 당시 독일에 유학하고 있었던 이극로(李克魯. 1897~1982), 〈압록강은 흐른다〉의 저자 이미륵(李彌勒. 1899~1950 본명 이의경), 황우일(黃祐日) 등도 동참해 일제의 잔혹상을 폭로했다. 그해 12월 벨기에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피압박민족대회 간부회의에 참석해 한국의 실정을 보고했다. 유럽에서 범산의 활약은 동아일보에 상세히 보도됐다.
파리로 돌아온 그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조선불교중앙종단이 보낸 편지에는 “귀국해 불교계를 위해 일해 달라”는 내용과 함께 당시 돈 6000원이 동봉돼 있었다. 각 본산 주지가 평균 10원 씩 약 300원을 낸 것과 김상호 스님이 전국 사찰을 돌며 마련한 여비였다. 프랑스에서 계속 공부할 마음도 있었지만, 불교계의 간곡한 호소로 결국 범산은 귀국길에 올랐다.
1928년 1월, 돌아온 그를 기다리는 조선불교의 현실은 암담했다. 〈조계종사-근현대편〉이 밝힌 식민지 한국불교는 “사찰령 체제에서 자주권을 상실”했고 “조선총독이 30본산 주지들의 인사권과 경제권을 장악해 재정적으로 어려웠으며 교육사업은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귀국 후 최초로 범어사에서 강연을 하고, 경성불교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한 그는 침체된 한국불교계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불교유신운동과 불교청년운동,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 개최, 만당(卍堂)결사 등을 주도했다. 부천대 김광식 교수는 ‘김법린과 피압박민족대회’에서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에 이르는 당시 불교계의 주요한 움직임의 중심에는 범산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특히 불교혁신과 항일독립운동을 모색하던 범산은 1930년 5월 김상호.이용조.조학유 등과 만나 불교계 비밀결사인 만당을 조직했다. 만해스님을 당수(黨首)로 추대하고 ‘정치와 종교 분리, 불교행정확립, 불교대중화’를 결의했다. 그러나 만당결사 자체가 비밀이었기 때문에 선언.강령도 암송으로 전하고, 당수인 만해스님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일제의 감시 속에 활동하고 있는 스님에게 누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결국 만해스님은 범산을 비롯해 다수 회원들이 검거된 후에야 만당의 존재를 알았다. 만당 결성 후 일본 고마자와(駒澤)대학으로 유학을 간 범산은 만당 동경지부를 책임졌다. 귀국 후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거세지자 경남 사천 다솔사로 피신했다. 2년 간 다솔사에서 기거하며 불교전문강원을 열고 후학을 가르쳤다. 그 후 합천 해인사와 범어사서 강당을 열었다.
이 무렵 그는 불교혁신운동 뿐만 아니라 조선어학회가 주관하는 조선어사전 편찬위원으로 참가해 조선어 보급에도 관심을 갖고 활동했다. 그러나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이 발생했다. “사전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라는 판결과 함께 내란죄가 적용됐고 범산도 감옥에서 2년을 보냈다.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범산이 원장으로 있던 범어사 금정불교전문강원(현 금정중학교)이 강제 폐교됐다.
광복 후 그는 조선불교혁신준비위원회를 조직해 각황사(현 조계사)서 조선승려대회를 열고 불교혁신운동에 앞장섰다. 건국운동 때 불교대표로 참여했으며, 고시위원회 위원장(1952년), 문교부장관(1952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장.3대 민의원(1953년), 초대 원자력 원장(1959년) 등을 역임했다. 1962년 동국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학위를 받고 이듬해 동국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범산은 자신의 삶을 회향하듯 동국대 발전을 위해 열정을 바쳤다. 외국어교육원을 신설하고, 대학박물관을 개설했다. 동국역경원 설립에도 일조했다. 그러나 총장취임 8개월 만인 1964년 3월, 과로로 인한 심장마비로 세연을 마감했다. 실로 가쁜 삶이었다. 13세 때 불문에 귀의한 뒤 독립과 불교혁신을 위해 평생을 뛰어다녔던 그가 부처님 품 안에서 안양(安養)을 찾은 것이다.
그는 고난을 극복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국내에서나 상해, 프랑스에서 독립을 외치고, 불교혁신을 위해 뛰어다녔던 어느 한 순간 외롭고 힘들지 않았던 때가 없었지만, 이겨냈고 더 강해졌다. 명예에 대한 유혹도 뿌리쳤다.
정계진출에 대한 권유도 많았지만 그는 동국대로 돌아왔다.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학교에 쏟아 부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피안의 세계로 떠났다. ‘내 인생편력의 회랑에서’라는 글을 통해 범산은 이렇게 말했다. “소아(小我)적인 안이(安易)와 영욕의 포로가 되지 말고, 심원(深遠)한 포부와 목적을 위해 의연히 나아가되, 어떤 역경과 고통이 자기를 마해(魔害)할지라도 꺾이지 말고 싸워 나가라고 권하고 싶다. 명예.권력.금전 이런 것들이 사회생활의 질서 유지를 표면화시키는 한 방법은 될지언정 인간의지의 전부는 아니다. 이것들을 구유(具有)한 것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과로로 쓰러지는 순간까지 일에 정열을 쏟았던 그는 진정 ‘행복한 사람’이었다.
- 만해스님과 범산
19세 때 처음 만난 후 평생의 스승으로
교리.민족 함께 배우며 3.1운동 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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