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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시: 2021. 2. 7.~9.(일~화) - 음력(12. 26.~28.), 일출 07:32~일몰 17:36
●산행지: 여수지맥 1구간 (미사봉-창무리)
●산행코스: 심원마을 황전터널 입구(등산로 안내판 있는 곳)→미사치→여수지맥분기점→안치→712m봉→725m봉→계족산(725m)→714m봉(비봉산분기점)→547m봉→임도→용계산(625.6m)→541m봉→임도→265m봉→구상치(840번 지방도, 남해고속국도)→봉화산(310.1m)→비포장도로(공사중)→238m봉→웅방산(311.5m)→233m봉→순천시 생활폐기물 매립장→156m봉→2번국도(성가롤로병원 입구)→145.3m봉→경전선 철도→66m봉→전라선 철도→147m봉→119m봉→전라선 철도→옥녀봉(120.9m)→863번 지방도→도로→검단산성(136m)→검단고개(전라선 철도, 17번 국도)→천황산갈림길(208m)→134m봉→169m봉→곡고산(343.4m)→앵무산(343.4m)→375m봉→봉두마을(봉두고개)→145m봉→142m봉→국사봉 갈림길(293m봉)→국사봉(289.8m)→국사봉 갈림길→수암산(371m)→콘크리트 도로→297m봉→여수시립공원묘원 주차장→도로→황새봉(393.6m)→306m봉→204m봉→294m봉→복촌마을→복촌고개→248m봉→279m봉→198m봉→사곡리도로→193m봉→마산마을 및 도로→121m봉→184m봉→216m봉→비봉산갈림길→비봉산(257m)→180m봉→덕곡마을 및 도로→155m봉→양회임도→207.1m봉→22번국지도→4차선 화산도로(안산동)→무선산→859번지방도/ 여천교회→259m봉→안심산(347.8m)→227m봉→사방산(252m)→도로→창무고개/ 22번국지도
●먹거리: 생수2리터, 빵4, 콜라, 땅콩샌드3, 단백질바2, 자유시간, 양갱, 홀스3, 사탕15, 게비스콘5, 미니자유시간5
●준비물: 경량우모, 쟈켓, 바람막이, 스틱, 구급약, 마스크3, 충전지3, 충전짹, 헤드랜턴2, 반장갑, 장갑, 손수건, 휴지, 우의, 물티슈, 긴팔, 양말, 부직반창고, 매트리스, 장단스패츠, 안대, 귀마개
●거리: 약 82.41km
●소요시간: 40.44h
●누구랑: 나홀로
●경비: 순천고속버스33,800, 편의점4,850, 식사11,000, 편의점4,900, 모텔40,000, 편의점4,550, 택시5,130, 택시5,300, 저녁12,000, 편의점5,900, 모텔35,000, 아침6,000, 택시7,600, 고속버스36,600, 뒤풀이9,500
●날씨: 4~13, 아주 맑음
●산행경과:
*2. 7.
- 07:06 : 심원마을
- 07:29 : 미사치
- 08:17~30 : 여수지맥분기점, 삼면봉(순천군 서면, 황전면 → 광양시 봉강면)
- 08:24 : 깃대봉(858.2m)
- 08:50 : 안치
- 09:32 : 계족산(729.4m)
- 09:55 : 비봉산분기점
- 10:40 : 판교리임도
- 10:58 : 용계산(626.5m)
- 11:44 : 구상치임도
- 12:43 : 압곡육교
- 13:14 : 봉화산(310.3m)
- 14:22 : 웅방산(311.4m)
- 15:21 : 성가롤로병원
- 15:23~15:58 : 우미네식당
- 16:55 : 경전선 철도
- 18:06 : 경전선 철도
- 18:57 : 옥녀봉(121.9m)
- 19:11 : 매안교차로/ 미강서원
- 19:52 : 검단산성 입구/ 차고지
*2. 8.
- 06:12 : 검단산성(138.4m)
- 06:56 : 17번국도/ 여순로/ 용전주요소
- 07:25 : 천황산갈림길/병목산
- 07:41 : 용전재
- 08:30 : 곡고산(343.3m)
- 08:58 : 앵무산(394.6m)/ 순천시-여수시 경계
- 09:52 : 봉두마을/ 봉두고개(16번도로)
- 11:17~11:30 : 국사봉갈림길
- 11:22 : 국사봉(292.9m)
- 11:40~55 : 식사/ 행동식
- 12:42~52 : 수암산(371.5m)
- 14:02 : 연화길/ 여수시립공원묘원
- 14:30~43 : 황새봉갈림길
- 14:37 : 황새봉(393.6m)
- 15:34 : 복촌고개
- 17:23 : 장골고개/ 사곡로
- 17:58 : 솔향기찻집
- 18:08 : 마산마을 도로/ 가게/ 마산교회
- 20:10~36 : 비봉산갈림길
- 20:23 : 비봉산(256.2m)
- 21:26 : 덕곡마을/ 덕곡고개(조산마을)
*2. 9.
- 08:48 : 덕곡재/ 조산마을
- 09:57 : 죽림고개/ 22번도로(화산육교)
- 10:14~11:04 : 무선산갈림길/ 호랑분맥
- 10:31~10:50 : 무선산(216.7m)
- 11:22 : 여천장로교회/ 859번지방도
- 11:55 : 유월드/ 82번버스
- 12:16~26 : 안심산(347.9m)
- 12:56 : 소제고개/ 소호터널
- 13:00 : 창무성지
- 13:17 : 사방산(251.7m)
- 14:15 : 창무고개/ 22번국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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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지맥[호남정맥]: 모암재 적지봉~지호대교(104km)
*여수지맥[호남정맥]: 안치봉~힛도마을(81.1km)
*화원지맥[땅끝기맥]: 첨봉~목포구등대(83.5km)
*수도지맥[백두대간]: 초점산~합천군 청덕면 적포리(황강, 105.8km)
*비슬지맥[낙동정맥]: 사룡산~밀양 종남산 오우진나루(밀양강, 146.5km)
*영월지맥[한강기맥]: 삼계봉~태화산 각동리 샘골(남한강, 136km)
*춘천지맥[한강기맥]: 청량봉~춘성대교(북한강, 127.4km)
*보현지맥[낙동정맥]: 가사봉~상주시 중동면 우물리(낙동강, 166.8km)
*호미지맥[낙동정맥]: 백운산~호미곶(98km)
*팔공지맥[보현지맥]: 석심산~상주시 중동면 우물리 새띠마을 우물교(낙동강, 120.7km)
*금오지맥[수도지맥]: 수도산~김천시 고아읍 오로리 선주교(낙동강, 81.4km)
*도솔지맥[백두대간]: 돌산령~소양2교(소양강, 88km)
*주왕지맥[한강기맥]: 계방산~영월읍 하송리(동강, 86km)
*덕산지맥[낙동정맥]: 새신고개~안동시 용상동 법흥교(낙동강, 83.1km)
*문수지맥[백두대간]: 옥돌봉~예천군 용궁면 삼강리 삼강다리(낙동강, 114.5km)
- 분기봉~성가롤로병원 24.4km
-. 분기봉~구상치 17.3km (접속2.5km)
-. 구상치~검단고개(여순로 17번국도) 21.8km
- 성가롤로병원~연화고개 26.9km
-. 미강서원~연화고개 19.6km
-. 검단고개(17번국도)~연화고개 18.2km
- 연화고개~상촌고개 34km
-. 연화고개~여천장로교회 19.7km(황새봉, 비봉산, 무선산 왕복)
-. 연화고개~창무리 31.6km
* 사전 정보 및 식수 공급처
- 여수지맥분기점: 호남정맥 깃대봉(858.4m봉)까지 왕복 500m
- 성가롤로병원: 약국과 식당
- 신대지구식당, 신대사기리 우회전 케이마트
- 검단고개: 알뜰주유소, 백반집
- 천황산: 갈림봉에서 왕복 12분 소요
- 곡고산 직전: 약수샘(0.1km)
- 국사봉: 왕복 500m, 10분 소요
- 수암수양관: 수양관 마당 수도꼭지
- 황새봉: 왕복 500m, 15분 소요
- 소라면 택시: 061-683-9000
- 마산고개: 마산마트
- 비봉산: 왕복 600m, 15분 소요
- 덕곡재: 민들레식당(추어탕, 김치찌게백반)
- 무선산: 왕복 1km, 30분 소요
- 안심산: 유월드편의점
- 사방산: 사방산 지나 (약수터 0.2km)
- 화양면 택시: 061-682-8272
- 비봉산: 왕복 300m, 15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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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서 미사치 가는길
- 센트럴시티~순천: 06:10, 06:50, 07:30~20:10, 23:50, 3.40h, 30,800
- 센트럴시티~광주: 05:30, 05:50, 06:45, 07시, 07:20,~20:50, 23:40, 24:00, 3.20h, 19,100~28,100~31,000
- 순천~청소리 심원마을 종점: 53번시내버스, 06:20
- 심원마을~황전터널: 도보16분
* 여수에서 서울 올라오는길
- 창무고개~여수시내: 23번 시내버스
- 백야도~여천: 28번 시내버스
- 여수~서울: KTX
- 여수~서울: 15:40, 16:20, 17:40, 19:00, 20:40, 24:00, 4.20h, 33,200~36,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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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방방곡곡 인연맺기 프로젝트 162지맥 탐사길이 인생의 행복과 여유를 찾아 떠나는 힐링 공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두번째 만난 지맥은 여수지맥입니다. 여수지맥은 여수·순천 1019사건을 넘어서지 않고 갈 수 없는 지맥입니다. 여순반란사건이라고 하면 안됩니다. 광양만과 순천만(여자만), 가막만에 둘러 쌓이고 바다 멀리로 거문도가 있네요. 여수 하면 임진왜란의 이순신장군과 근대사의 비극인 여순사건이 먼저 떠오르는데 좌빨과 토왜는 극복하지 못하고 현재도 계속되는 서글픈 명제입니다. 지맥의 좌우측에 펼쳐진 여자만과 가막만의 섬들은 왜구들의 침략에 맞선 이순신장군의 선혈이 뿌려진 곳이기도 합니다. 해방정국에서 좌우 이념의 대립으로 골육상잔의 6.25를 겪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이라고 나아진게 있나요. 아직도 국민들간 반목과 대립의 정서는 허물어지지 않았습니다. 여수지맥을 걸으며 여순사건과 이순신장군을 생각해봅니다.
호남정맥 미사치와 깃대봉 사이 삼면봉(순천시 황전면, 서면, 광양시 봉강면)에서 계족산방향으로 여수지맥이 분기하여 성가로병원에서 해룡면과 만납니다. 검단산성에 올라 광양만 순천왜성을 바라보며 임진왜란을 떠올리고, 지맥은 앵무산에서 여수시와 경계에 닿습니다. 여천 율촌에 들어서니 장흥위씨 집성촌 봉두리가 반겨주네요. 수암산에서 묘도 너머 남해 노량을 짚어보고, 소라면 여수시립 공원묘원에 내려섭니다. 죽림리와 화장동에서 호령분맥이 분기하는 무선산에 올라 가막만을 둘러싼 대미산 돌산도와 금오도, 자봉도, 개도, 백야도의 섬들을 찾아봅니다. 장관이네요. 여천공단과 묘도 너머 광양 포스코, 영취산과 호랑산, 지나온 지맥길과 순천만 넘어 서쪽 고흥의 팔영산까지 사위로 한눈에 펼쳐집니다. 다시 안심산에 올라 소호포구앞 굴강 선소를 바라보며 소호터널을 넘어 창무성지에서 화양면에 들어서며 3일에 걸친 1구간을 마치고, 여수로 나와 선소유적지를 직접 둘러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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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지맥(麗水枝脈)이란?
백두대간 중 호남정맥은 함양의 영취산에서 분기하여 주화산 조약봉에서 금강정맥을 내보내고 광양 백운산 아래 망덕산까지 진행하는데, 이 호남정맥 중 미사치에서 갓걸이봉 지나 동쪽 백운산쪽으로 2.2km 떨어진 깃대봉 못 미쳐 3면경계봉(미사봉, 약 820m, 순천시 서면, 황전면, 광양시 봉강면)에서 호남정맥은 북으로 올라가고, 남으로 한 줄기가 뻗어 내려가며 두개의 천을 나누는데 하나는 광양읍내를 가로질러 광양만으로 흘러드는 광양 서천(西川)이고 다른 하나는 순천시를 가로질러 순천만으로 흘러드는 순천 동천(東川)이다. 여수지맥은 계족산(725m), 용계산(624.7m), 봉화산(310.1m), 웅방산(311.5m), 옥녀봉(120.9m), 앵무산(343.4m), 국사봉(289.8m), 수암산(371m), 황새봉(393.6m), 무선산, 안심산(347.8m), 비봉산(311m), 안양산(327m), 봉화산(372m), 고봉산(363.7m)을 지나며 남쪽으로 뻗어 내려가 여수반도의 끝단인 여수시 화양면 안포리 힛도마을에서 그 맥을 바다에 넘긴다. 호남정맥 분기점에서 힛도마을까지 이어지는 도상거리 약 81.1Km의 크고 작은 산줄기를 여수지맥(枝脈)이라고 부른다.
여수지맥은 땅끝기맥, 호미지맥, 고흥지맥, 변산지맥등과 같이 산이름이 아닌 지형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지맥의 명칭을 붙였다. 지맥의 길이로는 인근의 고흥지맥이 더 길으나 한반도에서 가장 길게 이어지는 산줄기라는데 큰 의미가 있겠다. 즉, 함경도 끝 연두봉에서 남쪽 끝 여수의 힛도까지 연두봉~131.8km(온성기맥)~조두봉분기점~264.8km(관북정맥)~설령봉분기점~1,434.2km(백두대간)~영취봉분기점~482.2km(호남정맥)~미사봉분기점~81.1km(여수지맥)~힛도는 도상거리 2,394km로 한반도에서 가장 긴 산줄기다. 실질적으로 갈 수 있는 남한땅 향로봉에서 힛도까지는 1,176.3km가 된다. 향로봉~613.1km(백두대간)~영취봉분기점~482.2km(호남정맥)~미사봉분기점~81.1km(여수지맥)~힛도까지 도상거리 1,176.3km이다.
*여수지맥 개념도
*구간거리
심원마을 미사치에서 여수지맥(미사봉)분기점-3.4km-계족산-3.8km-용계산-6.1km-봉화산-2.9km-웅방산-9.2km-옥녀봉-2.1km-검단산성-1.6km-천황산-2.9km-앵무산-3.3km-봉두고개-3.1km-국사봉(-3.1km)-1.3km-수암산-3.4km-황새봉-10.1km-비봉산(-0.6km)-4.1km-무선산(-0.5km)-2.7km-안심산-4.6km-비봉산-4.9km-안양산-5.4km-고봉산-1.2km-봉화산-4.9km-힛도까지 약81.1k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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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시
대한민국 전라남도 남동부에 있는 시로서 1995년 동광양시와 광양군이 통합되어 도농통합시 광양시가 되었다.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의 유물·유적이 광양읍 일대에서 발견되었으나, 그 분포는 많지 않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마로현이었으나, 757년 희양현으로 고치고 승평군의 영현이 되었다. 통일신라 말엽 풍수지리설로 유명한 도선이 이곳 백운산 줄기인 백계산의 지기를 보고 옥룡사를 창건하여 독자적인 선문을 열었다. 940년(고려 태조 23) 광양현으로 개칭되었으며, 1108년 감무가 파견되어 독립했다. 남해안 연변의 다른 군현들과 같이 고려말 왜구의 침탈이 심했다. 조선초 군현제 개편으로 1413년 광양현이 되었다. 1895년 지방제도 개혁으로 군이 되었으며, 1896년 여러 섬들을 돌산군에 이관시키고 전라남도에 속하게 되었다. 1949년에는 광양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1년 11월 광양에 대규모 제철공장 건립이 확정되어 1986년 골약면과 태금면을 분리, 광양지구 출장소를 신설했다가 1989년 동광양시로 승격, 분리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대대적인 행정구역개편으로 하나의 생활권을 이루어왔던 광양군과 동광양시가 통합되어 광양시가 되었다. 광양제철소의 입지가 결정된 1981년 전까지는 광양만을 중심으로 김·조개류의 양식업이 활발했으나,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산업구조가 2·3차산업 중심으로 전환되어 우리나라 철강공업의 중심지이자 해외무역의 전진기지로서 발전해왔다. 이 지역은 1989년부터 광양군 골약면 앞바다를 메워 도시로 조성하였고, 국내 최대 규모인 컨테이너 항 광양항이 건설되면서 산업도시로써 자리잡게 되었다. 전체면적의 약 73%가 산지를 이루며, 호남정맥의 줄기인 백운산(1,218m)을 중심으로 시의 북쪽에 형제봉(861m)·도솔봉(1,123m)·매봉(865m) 등이 이어져 있다. 섬진강이 동쪽 경계를 따라 흐르고, 북부 산지에서 발원한 서천·동천·수어천이 각각 세 갈래로 나뉘어 남쪽으로 흐르다가 광양만으로 유입된다. 광양제철소 건설과 함께 태인도·금호도 등이 매립되었고 간석지가 간척되어 광양만 내에 있는 섬들은 점차 육지화되고 있다.
*순천시
대한민국 전라남도 동부에 있는 시로서 1995년 승주군과 통합시를 이루었다. 시의 남쪽은 순천만에 접해 있으며, 전라선과 경전선이 만나는 곳에 입지하여 영호남을 연결하는 전라남도 동부의 교통요지이다. 시의 북동쪽에서 남서쪽 방향으로 호남정맥의 지맥들이 뻗어 있어 지형은 대체로 북서쪽이 높고 동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낮아진다. 시의 중앙부에 솟은 조계산(884m)을 비롯하여 계족산(468m)·갈미봉(639m)·용계산(626m)·봉두산(753m)·희아산(764m)·문유산(688m)·국사봉(526m)·수리봉(550m)·고동산(709m)·금전산(668m)·모후산(919m)·망일봉(652m)·한동산(648m) 등 대부분 1,000m 미만의 산들이 곳곳에 솟아, 이들 산줄기가 이 지역의 주요하천의 분수령이 되었다. 보성군 웅치면에서 발원한 보성강이 송광면·주암면을 지나 북류하다가 구례군과 경계를 이루면서 이 지역의 북부를 흐르는 섬진강에 합류하고, 이사천(伊沙川)이 남류하여 순천만에 흘러든다. 또한 계족산에서 발원한 동천이 중심 시가지를 흘러 석현천과 옥천을 합류하고 시가지의 동쪽을 남류하며 순천평야를 이룬다. 옛 승주군 지역은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문화유산이 풍부한 관광지역이다. 승주군이 위치했던 지역은 옛 순천군과 낙안군이 통합된 곳이다. 옛 순천군 지역에서는 주암댐 수몰지구 유적 조사 결과 구석기 유물이 출토되고, 청동기시대의 고인돌과 주거지 등이 발굴되어 이 지방에서의 인간의 거주가 오래되었음을 보여준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사평군이었다. 고려초인 940년(태조 23) 승주(또는 승화)로 고치고,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설치할 때 승주목이 되었다. 995년(성종 14) 곤해군 절도사가 파견되고, 1012년(현종 3) 안무사로 고쳤다가, 1036년(정종 2) 다시 승평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때 부유현·돌산현·여수현·광양현을 속현으로 거느렸다. 1309년 승주목, 1310년 순천부가 되었다. 1413년(태종 13) 조선초의 군현제 개편 때 도호부로 승격하여, 조선시대 동안 순천도호부는 전라좌도 남부의 중심 역할을 했다. 1479년(성종 10) 속현이었던 여수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설치되어 전라좌도 해안방어의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다. 순천의 별호는 "평양"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 남원부 소속 순천군, 1896년 전라남도 순천군이 되었다. 1896년 돌산군을 신설함에 따라 도서지역이 돌산군에 이관되고, 1897년에 순천군 소속 율촌면·소라면·삼일면·여수면을 나누어 여수군을 신설함으로써 면적이 축소되었다. 그러나 1908년 낙안군을 폐지하여 낙안군의 7개면이 순천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에 의하여 서면·황전면·월등면·쌍암면·주안면·송광면·상사면·별량면은 그대로, 소안면·장평면은 순천면으로, 해촌면·용두면은 해룡면으로, 도리면·하사면·읍내면·내서면은 도사면으로, 동상면·동하면·초하면·초상면은 동초면으로 폐합되었다. 1931년에는 순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49년 순천읍·도사면·해룡면의 일부가 합하여 순천시로 승격되고, 순천군이 승주군으로 개칭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던 승주군과 중심도시기능을 담당했던 순천시가 하나로 통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도농통합시인 순천시를 이루었다.
*여수시
동쪽은 여수수도(麗水水道)를 끼고 경남 남해군, 서쪽은 순천만을 끼고 고흥반도의 동남쪽과 바다로 경계를 이루며, 남쪽은 남해, 북쪽은 순천시와 접하고 있다.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의 유물인 석기와 토기가 돌산읍 둔전리·죽포리, 남면 소리도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고인돌은 돌산읍·율촌면·소라면·화양면, 둔덕동·오림동·봉제동·중흥동 등에 약 500여 기가 분포되어 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땅으로서 지금의 여수지역에 원촌현(猿村縣)이, 지금의 돌산지역에 돌산현(突山縣)이 두어져 감평군(欿平郡) 또는 삽평군(歃平郡)에 예속되었다. 그런데 이 감평 또는 삽평이라는 칭호는 꽂을 삽(揷)이 오기되어 마실 삽(歃) 또는 감(欿)으로 변이된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삽평군(揷平郡) 또는 고지들이라 해야 옳다. 1350년(충정왕 2) 처음 현령이 파견되어 주읍으로 승격되었다. 공민왕 때 유탁(柳濯)이 장생포(長生浦)에서, 정지(鄭地)가 관음포(觀音浦)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치는 전과를 올려 「장생포곡 長生浦曲」이라는 전승가가 불리게 되었다. 이 후 남해안 방위의 요충지가 되어 많은 진포가 설치되는 군사지역이 되었다. 1396년(태조 5) 현령 오흔인(吳欣仁)이 신왕조에 불복하였다 하여 폐현이 되었다가 다시 순천도호부에 편입되어 조선시대 동안 계속되었다. 같은 때 진례(進禮)에 진이 설치되었다가, 1423년(세종 5) 진례만호진이 폐지되었고, 내례만호진(內禮萬戶鎭)이 설치되었다. 1479년(성종 10) 진이 폐지되었고 대신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이 설치됨으로써 전라도 동남부의 수군을 통할하게 되었다. 1485년부터 전라좌수영성이 5년 8개월에 걸쳐서 축조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李舜臣)이 좌수영함대를 주축으로 하여 일본의 해군을 격파했다. 이듬해에는 이곳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되어 전라·경상·충청도의 수군을 통제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1601년 통제영이 경상도 거제로 옮겨감으로써 좌수영만 남게 되었다. 1620년(광해군 12)에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가 세워졌다. 1725년(영조 1)여수도호부가 설치되어 전라좌수사를 겸임하게 했다가 이듬해 폐지되었다. 1885년(고종 22년) 4월 23일 영국군이 삼산면의 거문도를 점령하여 1887년 3월 1일까지 주둔한 거문도점령사건이 일어났다. 1894년(고종 31) 동학혁명군이 전라좌수영성을 공격하여 이곳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1895년 전라좌수영이 폐지되었고, 1896년 도서지방에 돌산군이 신설되었다. 1897년 육지 지역에 여수군이 신설되어 순천도호부에서 분리, 독립되었는데, 여수·율촌·삼일·소라의 4개 면을 관할하였다. 뒤에 여수면이 현내면과 쌍봉면으로 분리되는 등 종래의 4개 면이 7개 면으로 분할되었다. 1914년 돌산군이 폐지되었고, 그 관내의 5개 면이 여수군으로 편입되어 10개 면으로 분할되었다. 1931년여수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48년 10월 주둔하고 있던 14연대의 일부 병력이 반란을 일으킨 여수순천1019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10여 일 후에 진압되었으나 이곳 주민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1949년 6월여수항의 개항이 선포되고, 8월 여수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나머지 지역은 여천군이 되어 여수시와 분리되었다. 1973년 여천군 돌산면 경호리가 시에 편입되어, 경호동이 신설되었다. 1980년 12월 1일에 돌산면과 삼일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0년 12월 1일에는 돌산대교가 착공되어 1984년에 준공되었다. 1986년 1월 1일에 여천지구출장소가 여천시로 승격되었다. 1987년 경호동 일부가 여천시로 편입되었다. 다시 1998년 4월 1일에 여천시·여천군·여수시가 통합되어 새로운 여수시가 되었다. 여수반도와 연륙교로 이어지는 돌산도의 지형은 마치 H자형을 이루고 있다. 호남정맥에서 이어져 온 높고 낮은 산들이 여수반도 북쪽의 앵무산을 비롯하여 국사봉·수암산·황새봉으로 이어져 오다가 동북쪽으로 가마봉·전봉산(戰鳳山, 379m)·영취산(靈鷲山, 510m)·제석산(帝釋山, 336m)으로 연이어 있다. 동남쪽으로 호랑산(虎狼山, 470m)·천성산·봉화산(烽火山, 422m)이 솟아 있다. 남쪽으로는 비봉산(240m)·안심산(安心山, 347m)·안양산(324m)·이영산(336m)·고봉산(364m)·봉화산(烽火山, 371m)이 연이어 뻗어 있다. 여수만(가막만)을 가운데 두고 동쪽에 돌산도의 대미산(359m)·천왕산(385m)·봉황산(鳳凰山, 441m), 남쪽에 개도의 봉화산(338m)·화태도의 삼각산(118m)이 둘러싸고 있다. 이렇게 기복이 심한 산맥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뻗어 있고 경사가 심하여 평야가 적다. 반도 북쪽에 소라평야가 넓게 퍼져 있으며 남쪽은 가막만으로 함몰한다. 연화천(蓮花川)이 북부를 관류하여 순천만에 들어간다. 연등천(蓮燈川)은 호랑산에서 발원하여 남동쪽으로 흘러 여수만으로 흘러든다. 전봉산과 영취산의 서쪽·북쪽 산기슭에 비교적 넓은 여천평야가 전개되어 농경지로 이용되고, 북쪽 평지의 대부분 지역은 여천 공업단지로 개발되어 있다. 여수반도와 돌산도 사이에는 여수수도가 있는데 흐름이 빠르다. 여수반도의 동남단 앞 바다에는 대경도(大鏡島)·소경도(小鏡島)·가장도(加長島)·야도(冶島)·오동도(梧桐島)·돌산도(突山島) 등의 도서가 천연의 방파제를 이루고 있어 여수항은 천혜의 양항이라 할 수 있다. 유인도 46개, 무인도 268개, 연륙도 3개 등 총 317개의 섬이 있다. 기후는 온화하여 눈이 내리지 않는 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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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순천 10·19사건(麗水順天十一九事件)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근간에 벌교에서 일어난 좌,우익의 대립으로 선택의 기로에 섰던 소작농과 민초들의 삶의 현장을 가고 있다. 나라가 망하고 양반과 지도층은 재빠르게 친일의 길로 들어서 부를 축적하는데 골몰하고 일반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한다. 광복을 맞고 조선 반도는 토지개혁이라는 혁명을 기대하는데... 철석같이 믿었던 이승만 정권은 유상보상 유상분배의 토지개혁을 발표하며 소작농과 빈농의 반발을 산다. 이미 북한에 들어선 북조선 인민위원회는 1946년 3월5일 "북조선토지개혁법"에 의해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에 따라 빈농 머슴을 중심으로 농지개혁 위원회를 조직하고 일본인, 민족반역자, 5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의 땅을 무상 몰수하여 토지가 없거나 부족한 농민에게 가족수에 따라 무상으로 분배한다. 대부분이 소작농이거나 빈농이였던 벌교 지역 농민들은 이 소식을 접하고 크게 반발한다. 좌우가 대립하며 수많은 희생자를 낸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전라남도 동부 6개 군을 점거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정부는 대규모 진압군을 파견하여 일주일여 만에 전 지역을 수복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상당한 인명·재산피해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에서는 「국가보안법」 제정과 강력한 숙군 조치를 단행하게 되었다. 여순사건의 배경은 그 주체에 따라 크게 두 가지 요소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첫째, 국방경비대 제14연대의 반란 배경과 둘째, 여기에 호응했던 여수·순천 지역의 동향이다. 우선 사건의 시발점이 되었던 제14연대의 반란 배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4연대는 1946년 2월 15일 광주에서 편성된 제4연대가 모체이며,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朝鮮國防警備士官學校) 3기생으로 이 기수는 80%가 넘는 인원이 사병 및 민간인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중에는 좌파적 경향을 띠는 인물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이는 당시의 간부 모집 주체였던 미군정이 인력 충원에 집중하고자 간부후보생들의 이념적 성향을 거의 신경 쓰지 않았던 점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여수·순천 지역의 정치적 동향을 살펴보면, 해방 직후 이 지역은 우익 계열의 우세 속에 좌·우익간의 공존 관계가 지속되고 있었다. 평온했던 이 지역의 분위기는 1948년 들어와 급변하는데, 이는 단독선거 시행을 둘러싸고 우익과 좌익이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선거가 다가오면서 빈발하기 시작한 양측 간의 충돌은 유혈사태로 이어지기도 하였으며, 투표소 습격, 경찰지서 습격 행위로 발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단독 정부 수립이 확정되고 남로당의 투쟁이 점차 급진·폭력화되면서 이 지역의 단독 정부 반대 움직임은 대중적 운동보다는 점차 소수 인원에 의한 급진적 투쟁의 형태로 변모되어 갔다.
1948년 10월 19일부터 10월 27일까지, 전라남도 여수시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 군인들이 동족을 학살할 수 없다는 것과 38°선을 철폐하고 조국통일을 이루자는 명분으로 제주 4·3사태 진압을 위한 출동명령을 거부하고 순천 등지까지 무력점거를 확산시킨 사건이다.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단선단정에 반대하는 제주 4·3사태가 확산되자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제14연대를 급파하기로 했다. 이에 지창수·김지회 등 좌익계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제주도 출동을 거부하고 친일파 처단, 조국통일 등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1948년 10월 19일 저녁 8시경, 14연대의 군인 일부가 무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하고 비상나팔을 불어 전연대 병력을 집결시킨 다음, 선동과 위협으로 반란군에 동참하게 했다. 이들은 곧 경찰서와 관공서를 장악하고 여수·순천을 순식간에 휩쓴 뒤 곧바로 벌교·보성·고흥·광양·구례 등 전라남도 동부 5개 지방을 장악했다. 10월 22일에는 곡성까지 점령했다. 초기 진압작전에서 반란군에 밀린 이승만 정부는 20일 열린 미국 군사고문단 수뇌부 회의에서 광주에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21일, 여순 지역에 계엄령이 발효되었다. 사흘간의 교전 끝에 이들 정부군은 25일 장갑차와 박격포, 항공기, 경비정 등을 동원해 여수를 포위해나갔고, 27일 진압에 성공했다. 여수를 빠져나간 반란군은 지리산 인근으로 흩어져 11월부터 1950년 초까지 게릴라로 활동했다. 비록 미군의 협조로 진압에는 성공했으나 이 사건은 3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신생 정부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진압 과정에서 반란군과는 무관한 민간인들이 희생당했고, 막대한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확인된 사망자는 3,400여 명이며, 행방불명자는 800여 명, 추정 사망자는 1만 여 명으로 밝혀졌다.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각계각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 제정,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무제한적인 탄압을 제도화시켰다. 또한 대대적인 숙군을 단행, 좌익계와 광복군계를 포함한 모든 반이승만 성향의 군인을 제거해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하게 되었으며, 미국은 이 사건 이후 대한군사지원을 훨씬 강화했고 주한미군철수를 1949년 6월로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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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지맥분기점/ 삼면봉(순천시 서면, 황전면 → 광양시 봉강면)
순천시 서면, 황전면 광양시 봉강면 시계이자 3면 경계인 여수지맥 분기봉이다.
♤ 순천시 서면 청소리(淸所里)
청소리는 청소마을·송내마을 등 2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청소리 명칭은 계곡의 맑은 청쏘(淸沼)에서 유래했다. 지금은 청소가 메워져 버렸으나 소(沼)를 마을 이름으로 쓰면서 한자로 ‘청소(淸沼)’로 표기한 것 같다. 마을 사람들은 물이 맑고 신선한 곳이라고 ‘청소(淸所)’라고 하였다. 청소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송내리·원동리·심원리를 병합하여 순천군 서면 청소리로 개설되었고 1949년 순천읍이 순천시로 승격됨에 따라 승주군이 분리되면서 전남 승주군 서면 청소리가 되었다. 1995년 도농통합 정책에 의해 순천시와 승주군이 통합되어 전남 순천시 서면 청소리가 되었다. 청소리는 서면에서 가장 넓은 임야를 차지하고 있듯이, 대부분이 산지로 되어있다. 마을의 배후는 호남정맥을 이루는 갓꼬리봉(688m)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물줄기는 주변 600m 이상의 준봉에서 시작하는 작은 계곡물이 청소골로 모여 동천을 이룬다. 남북으로 곧게 뻗은 청소골은 순천 이남 사람들이 한양으로 가던 길목에 해당하여, 순천시가 ‘옛날 과거 보러 가던 길’을 재현해 놓았다.
♤ 안치(615m)
광양시 봉강면 조령리와 순천시 서면 청소리를 잇는 고개인 사거리 안부 안치에 내려선다. 뚜렷한 고갯길이며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지 길은 반질반질 하다. 안산과 안치 그리고 질마재의 연관성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무에 커다란 안치를 알리는 산패가 있다.
♤ 계족산(鷄足山, 729.4m)
광양 계족산은 전라남도 광양시의 서부 봉강면과 순천시 서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도솔봉의 남서쪽에 위치하며 남쪽 비봉산으로 산줄기가 이어지고 신룡천이 발원하여 광양 서천에 합류한다. 계족산은 깃대봉(858.2m) 형제봉(861m) 매봉(867m)과 남쪽으로 전남 순천시 서면 청소리 716번지 일대의 1,300년 고찰이라는 정혜사를 가지고 있으며 3면계 서면, 황전면, 광양시의 봉강면을 접하여 순천 광양 여수를 조망 할 수 있는 명산이다. 여기서 갈림길 좌측으로 내려서야 하고 우측은 정혜사 방향이다.
♤ 정혜사
정혜사는 순천시 서면 청소리 계족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이 사찰은 지금으로부터 약 1,300년 전 신라 혜조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이 지방에서는 고찰로 이름나 있다. 승평지에 따르면 옛 시대에는 대찰로 이름나 있었는데 여순사건 후에 세가 기울어 얼마되지 않은 스님이 살았고, 고려 때의 승 충지가 참선했던 사찰이라 한다.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을 겪는 동안 공비들 때문에 국보급(개불) 등 귀중품을 많이 잃었다. 사찰 부근 숲에서는 고로쇠물 채취가 성하며, 가을 단풍이 유명하다.
♤ 714m봉/ 삼거리봉/ 비봉산갈림길
여수지맥이 순천시와 광양시의 경계를 잠시 벗어나 순천시 서면으로 접어들며, 이 분기점에서 시계를 따라 비봉산(555.7m)과 일자봉(407m)을 산행하고 지곡마을로 하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능선을 따르고 성처럼 보이는 레스토랑 라콘티넨탈을 지나는 오르막에서 다시 시계와 합쳐집니다. 지맥은 우측 용계산 방향으로 갑니다.
♤ 비봉분맥
호남정맥상의 광양 백운산 월출재 아래 3개 시군 경계지점에서 지능선이 북으로 갈미봉 매재를 지나서 다시 두 갈래로 나뉘는데 하나는 둥주리봉을 거쳐 오산으로 향하고 다른 하나가 북쪽으로 곁가지를 뻗어 구례군의 또 다른 계족산(730m)을 솟구친 후 섬진강으로 내려앉는다. 그런데 순천시 서면과 광양시 봉강면의 경계를 이루며, 안치를 지나 광양 계족산(725m)을 일으킨 여수지맥(麗水枝脈)이 여수지맥 분기봉(714m)에서 좌측(남쪽)으로 다른 한줄기를 보내는 바, 비봉산(555m)과 일자봉(407.8m)을 만들고 광양 지곡마을 광양 서천에서 그맥을 다하는 멋진 분맥을 만든다.
♤ 순천시 서면 판교리(板橋里)
전남 순천시 서면에 있는 리로서 동쪽으로는 용계산이 있고 서쪽으로는 동천이 남류하며 대부분 낮은 산지로 되어있다. 판교리에는 구멍바위와 동천 주변으로 웃터들과 노은 앞들이 있다. 자연마을로는 쟁골(재궁리, 재궁골), 진섶(점, 진신) 등이 있는데 쟁골은 재궁(재실)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나 1948년 여순사건으로 폐동되었고 진섶은 진흙이 났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판교(板橋)마을·노은마을·기동마을·추동마을 등 4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판교는 우리말 이름이 ‘너더리’, ‘너드리’이다. ‘너’를 널(板)로, ‘더리’를 교(橋)로 여기고 한자로 ‘판교(板橋)’라 표기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판교에서 기동으로 널판자로 다리를 놓고 건너다녀서 그 다리를 ‘너더리[판교]’라고 불렀고 그것이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판교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재궁리·기동리·추동리·진신리를 병합하여 순천군 서면 판교리로 개설되었고 1949년 순천읍이 순천시로 승격됨에 따라 승주군이 분리되면서 전라남도 승주군 서면 판교리가 되었다. 1995년 도농통합 정책에 의해 순천시와 승주군이 통합되어 전남 순천시 서면 판교리가 되었다. 판교리는 호남정맥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려온 깃대봉(401m) 산줄기와 용계산(625m) 산줄기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동천을 가운데 두고 마을들이 형성되어 있다. 계곡물이 맑고 주변 경관이 수려한 곳으로 이름이 높은 곳이다.
♤ 서면 판교리 임도
철탑을 지나고 잠시 후 판교리 임도에 내려선다. 직진하는 임도길을 버리고 좌틀하여 임도길을 따라 직진하다 우측 용계산으로 오른다.
순천시 서면 판교리에 소재한 산이다. 능선에 오르니 지도상 용계산이고 선답자 띠지만 여러개 보인다. 아무런 표시가 없다. 산세는 부드럽고 옥류의 맑은 계곡을 품은 산이다. 전남 순천시 서면 청소리에서 전남 광양군 광양시 봉강면 구랑실을 넘는 원시 산림 임도가 개발되어 있어 테마거리로 조성이 가능하다. 여수지맥상의 산이다.
♤ 용계산 고룡사(古龍寺)지
숭주군 서면 용계산 고룡골에는 천년 사찰 고룡사(古龍寺) 터가 있다. 고룡골은 멀리서 보면 임신한 여인의 모습과 같다. 각시소 바로 위에 만삭한 여인의 배처럼 불룩한 산봉우리가 있고, 남북으로 뻗은 산줄기가 사람의 가랑이 모습 그대로이다. 가슴 부위에 유방처럼 생긴 봉우리가 나란히 두 개 있고 그 위에 고개를 뒤로 젖힌 것처럼 생긴 봉우리가 있다. 그래서 여신산(女身山)이라 한다. 신라 말기에 도선국사(827~898)가 광양 옥룡사(玉龍寺)에 기거할 때의 일이다. 하루는 제자들을 이끌고 지금의 봉강을 거쳐 순천 서면으로 넘어오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은 광양 봉강과 서면 청소리 및 구례 간전을 잇는 길목이었다. 그러더니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내 여기에 절을 지을 것이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제자들이 임시 거처를 마련하자 도선국사는 제자 몇에게 각자 할 일을 일렀다. 도선국사는 용봉 아래 고룡골에 돌 일주문을 세우고 사찰을 건립하는 한편으로 수리봉 정상에는 커다란 돌을 둥그렇게 다듬어 올려놓았다. 또한 국사봉 정상에는 청동용마 건추(楗椎인도에서 전해진 것으로 범종의 기원)를 세워두었다. 묵묵히 일을 하던 제자 가운데 한 명이 하루는 더 이상 궁금증을 참지 못하여 물었다. “스님, 도대체 왜 여기에서 불사를 일으키십니까?” 그러자 국사가 아무 말 없이 제자들을 이끌고 수리봉 정상에 이르러 말문을 열었다. “내 여기 용봉 아래에 돌 일주문을 세우고 사찰을 건립한 것은 불법을 펴고 수행 정진하는데 목적이 있다. 하지만 또한 이곳에 있는 수리봉과 용봉이 풍수지리학적으로 긴밀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는 풍수에 대해 자세히 일러주었다. 수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금시조로서, 이 금시조는 수리와 흡사하지만 오직 용만을 잡아먹고 사는 새다. 그래서 앞의 용을 잡아먹으려는 금시조 머리에 큰 둥근 돌을 올려놓아 금시조가 용을 공격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수리봉과 용봉 사이에 국사봉이 있는데, 국사봉에 건추를 세운 것도 건추를 수시로 크게 두드림으로써 금시조가 용을 공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도선국사가 고룡사를 창건한 후 처음에는 매우 번창하였지만 점차 쇠락해졌다. 고룡골의 형상이 여신(女身)을 닮아서인지 젊은 스님들이 정진하지 못하고 심지어 파계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수리봉의 돌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였고 국사봉의 건추는 두드리는 이도 없었다. 그래서 절을 찾는 스님보다 떠나는 스님이 더 많아져 고룡사는 점차 주인 없는 절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 고려 원종 1년(1259년)에 송광사 5대국사인 양천영(梁天英 1215~1283) 원오국사가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 폐사가 된 고룡사를 보게 되었다. 그래서 마을 노인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마을 노인이 고룡사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이에 원오국사가 수리봉의 돌을 바로 세우고 건추를 수리하는 등 고룡사를 크게 중창하면서 여기에 더해 3층석탑과 부도를 세웠다. 그런데 원오국사는 고룡사 터가 음기가 강한 곳이어서 비구들이 지내기에는 적절치 않다며 비구니 사찰로 만들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고룡사는 비구니들이 기거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비구니들이 문제였다. 고룡골의 음기가 지나치게 강해서인지 여승들이 바람이 나서 걸핏하면 마을 남정네들과 눈이 맞아 문제를 일으켰다. 급기야 마을 사람들이 절에 불을 놓아 태워버리는 바람에 고룡사는 일주문 등 일부 석물만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고룡사에 있었다는 3층 석탑은 우석 김종익 선생에게 넘어갔다가 지금은 순천고등학교 교정에 있다. 수리봉의 둥근 돌은 1960년대 초반 무렵까지 있었다는데 누군가에 의해 산 아래로 굴러 떨어져버렸다고 한다. 건추 역시 사라진지 오래다.
♤ 판교봉(542.6m)/ 갈림길
판교봉은 전남 순천시 서면 판교리에 소재한 산이다. 계족산, 용계산과 같은 능선상의 여수지맥상의 산이다.
갈림길이다. 여수지맥 방향은 길이 없는 구상마을 방향으로 내려선다. 준희님 541m 산패가 있다.
♤ 순천시 서면 구상리(九上里)
구상리는 구상(九上)마을·마륜마을·세동마을 등 3개 자연마을과 가는골, 강촌, 구랑실, 모시밭골, 배나뭇골로 구성되어 있다. ‘구상’은 우리말 이름이 구랑실 또는 웃구랑실이다. 웃구랑실 또는 구랑실 위란 뜻을 ‘구상’으로 한자로 옮긴 것이다. 그리고 구상은 구상천(九上川) 거북보에 거북바위가 있는데 그 형상이 마을을 향해 올라가는 모습이라고 또는 거북바위 위에 있는 마을이라고 ‘구상(龜上)’이라고 썼는데 일제가 ‘구상(九上)’으로 적었다고 한다. 구상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구상리에 마륜리·세동리·학동리 일부 지역을 통합하여 순천군 서면 구상리로 개설되었고 1949년 순천읍이 순천시로 승격됨에 따라 승주군이 분리되면서 전남 승주군 서면 구상리가 되었다. 1995년 도농통합 정책에 의해 순천시와 승주군이 통합되어 전남 순천시 서면 구상리가 되었다. 구상리는 호남정맥에서 뻗어 나온 계족산에서 비봉산(555m)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와 계족산에서 용계산(625m)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사이에 있는 산간분지이며 마을 앞으로 홍대천이 흐른다. 구랑실 계곡은 물이 깊고 맑으며 유량이 풍부하여 여름 피서지로 주목받고 있다. 구상천은 남쪽으로 흘러 광양 서천에 합류한다.
♤ 구상리 임도
순천시 서면 판교리와 구상리를 잇는 구상임도는 시멘트 임도다. 좌틀하여 우측 산길로 진입한다. 한동안 편안한 능선이 이어진다.
♤ 순천시 서면 압곡리(鴨谷里)
압곡리는 압곡마을·당본마을·당본마을·화정마을·건천마을·용림마을·율리마을 등 7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압곡은 우리말 이름이 ‘압실’이다. ‘압실’을 한자어로 ‘압곡(鴨谷)’으로 표기하였다. 압(鴨)은 단순히 소리 옮김 한 글자이고, 곡(谷)은 ‘실’의 뜻 옮김이다. 한편 마을 사람들은 마을 이름과 관련하여 계곡에 소(沼)가 있는데, 그 소에 겨울철이면 오리가 찾아들어 오리골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압곡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압곡리에 당본리·화정리·월평리·교두리·율리·건천리·용림리·용곡리를 병합하여 순천군 서면 압곡리로 개설되었고 1949년 순천읍이 순천시로 승격됨에 따라 승주군이 분리되면서 전남 승주군 서면 압곡리가 되었다. 1995년 도농통합 정책에 의해 순천시와 승주군이 통합되어 전남 순천시 서면 압곡리가 되었다.
- 계족산이 남쪽으로 뻗어 오다 용계산을 지나서 양 갈래로 나뉘는데, 압곡리는 그사이 골짜기를 중심으로 입지한다. 압곡리 배후산지에서 발원하는 평곡천은 남서쪽으로 흐르다 선평리에서 동천과 합류한다. 평야는 골짜기 사이에 좁고 길게 분포한다.
방금전 순천-완주고속도로를 지하도로 통과했는데 여기서 840번지방도로를 따라 남해고속도로 위에 놓여진 압곡육교를 또 건너야 합니다.
♤ 구랑실재/ 서면 압곡리 용림마을
구랑실은 순천 서면 삼거리에서 구상리와 광양으로 넘어가는 주요한 교통로였다. 변두리를 잇는 정겨운 길은 피학살자의 수송로가 되었고, 포근했던 골짜기와 능선은 학살지와 매장지가 되었다. 1948년 10월 23일과 24일 순천북초등학교에서 협렵자로 분류된 순천읍민을 이곳에서 학살하였으며,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순천과 광양경찰서가 소집한 보도연맹원들을 집단적으로 처형한 곳이기도 하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은 곳이어서 시신이 쌓인 골짜기라는 의미로 '송장골'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2008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고속국도 공사가 많이 진행된 시점에서 발굴을 하였지만 유해 1구와 신발을 수습하는데 그쳤다.
♤ 압곡육교 양회임도로 내려서고, 조금 지나서 좌측 순천JC 근처 굴다리를 넘어서 지맥길은 순천JC근처이지만 지나 갈 수가 없어서 빙 돌아가는 곳이다. 압곡육교를 지난다. 육교 아래에는 남해고속도로이다.
- 순천JC 옆 남해고속도로 위 압곡육교를 출발하여 육교를 건넌 후 좌측 고갯마루로...
순천시 서면 압곡리와 구상리를 잇는 2차선 도로이다. 순천-완주 고속국도 아래 굴다리를 건너간다. 압곡육교를 지나 용림마을 버스정류장까지 도로를 따라 걷는게 낫다. 직진으로 조금 진행해 옹벽이 낮은 곳에서 숲으로 오른다.
♤ 순천시 왕지동
왕지동은 전남 순천시 원도심에서 정동 방향으로 8km 지점에 있으며, 대부분이 봉화산과 웅방산 사이의 산록과 좁고 완만한 분지 지형으로 구성되어있다. 북쪽은 순천시 서면, 동쪽은 광양시 광양읍·봉강면, 남쪽은 순천시 해룡면·조례동, 서쪽은 조례동과 접해있다. 왕지동에는 운곡(雲谷)마을·현남(峴南)마을·대동(大洞)마을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왕지동 지명은 처음에는 왕씨(王氏)들이 못자리를 이루듯 살았다 하여 ‘왕지(王之)’라고 표기되었는데, 임금이 지나간 곳이라고 일제강점기 때 ‘왕지(旺之)’로 바꿨다고 하는 것에서 유래한다. 왕지동은 원래 순천군 해촌면(海村面)에 속했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동리(大洞里)·현남리(峴南里)·왕지리(旺之里)·운곡리(雲谷里)·범암리(帆岩里)·장치리·두지리(斗旨里)·비봉리(飛鳳里)·주영리 등의 각 일부를 통합하여 왕지리라 하고 해룡면(海龍面)에 편입시켰다. 1949년 8월 순천읍이 지방자치제 시행으로 순천시로 승격되면서 왕지리·조례리·연향리가 순천시로 편입되어, 전라남도 순천시 왕지동(旺之洞)이 되었다. 1964년 1월 순천시의 33개 법정동을 16개 행정동으로 조정하면서 왕지동과 조례동을 통합하여 왕조동(旺照洞)으로 운영하다가 2003년 10월 왕조동의 인구 증가로 인해 행정동인 왕조1동과 왕조2동으로 분동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남 순천시 왕지동은 순천-완주 고속도로와 국도 17호선인 무평로가 남북으로 지나고 있고, 남해고속도로 순천나들목에서 순천 신도심을 연결하는 백강로가 지나고 있어 접근성이 양호하다. 왕지동은 최근 쾌적한 주거환경과 편리한 교통여건으로 고급 아파트단지들이 들어섰다.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 광주지방검찰청 순천지청, 순천왕운중학교, 순천왕운초등학교 등이 있으며 휴식공간으로 왕지공원이 있고 유적으로 운곡마을에 고인돌 5기가 있다.
♤ 봉화산(烽火山, 310.3m)/ 3등삼각점/ 서면-왕지동 면계
순천시 서면과 시내지구 왕지동의 경계이다. 파묘자리가 있고 나무로 장의자를 만들어 두어 쉬어 갈 수 있다. 좌측 남동방향으로 내려선다. 전국에 봉화산 지명이 워낙 많아 헛갈린다. 고로 여기도 마찬가지 봉화산(310.3m)은 순천시 용당동과 조곡동 및 서면의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시가지 북동쪽에 위치하며 산에서 발원한 하천들이 산의 서쪽을 흐르는 동천에 합류한다. 봉화산(356m)은 조선 시대에 봉수가 있었던 것에서 지명이 유래하였으며 성황당산이라고도 불리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순천에 성황당산 봉수는 부의 동쪽 10리에 있으니 동쪽으로 광양 건대산 봉수와 응하고 서쪽으로는 다만 관문에 보고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대부분의 지리지에 순천부의 4대 봉수로 돌산도 봉수, 백야곶 봉수, 진례산 봉수와 함께 수록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의 19첩 4면에는 성황당으로 1872년지방지도에는 성황봉대로 기재되어 있으며 봉화가 묘사되어 있으며 현재 봉수대가 복원되어 있다. 즉, 지맥상의 봉화산(310.3m)이 순천시가지 뒷산인 봉화산(356m)과 다른 위치이며 지맥상의 봉화산에서 순천의 뒷산인 봉화산으로 산줄기 하나가 바로 여기서 분기해 나가는 것이다.
2012년 개최된 여수엑스포를 지원하기 위해 2010년 말에 개통된 순천완주고속도로(順天完州高速道路)에 2012년 순천-여수 국도를 연결하였고 남해고속도로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 순천-완주 고속도로
대동교 다리밑으로 도로를 따라 건넌다. 성처럼 보이는 서양식건물(레스토랑 라콘티넨탈)이 보이는 골프연습장갈림길 삼거리가 나온다. 순천시 서면으로 들어갔던 지맥이 160m봉에 이르러 다시 광양시 봉강면과 경계에 접한다.
- 성처럼 생긴 건물에 캐슬 라콘티넨탈이라는 외식업체와 그 우측으로 파라다이스골프클럽 건물이 보이는데 그 뒤로 돌아 가는 산줄기가 바로 여수지맥 마루금이다.
♤ 웅방산(熊坊山, 311.4m)/ 곰방산, 삼면봉(순천시 왕지동, 광양시 봉강면 → 광양읍 덕례리)
순천시 왕지동과 광양시 봉강면과 광양시 광양읍 덕례리에 걸쳐 있으며 정상부에는 묘만 몇기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옛 지도를 보면 한자로는 웅방산으로 표기하고 일본어 가타가나로 곰방산으로 적고 있어 아마도 원래 곰방산을 웅방산이라고 한문으로 표기한듯 하다. 웅방산 하부에는 순천-완주고속도로 태방터널이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다. 정상에는 무덤 세기가 넓게 자리하고 있다. 우측 남서방향으로 진행하다 내림길에 바로 좋은 길을 버리고 우틀해야 한다. 거리는 짧지만 급내리막이다.
웅방산을 내려서서 건너편 232.9m봉으로 가며 등로 좌측으로는 광양시 덕례리마을이 내려다 보입니다.
♤ 광양읍 덕례리
전남 광양시 광양읍에 있는 리로서 농촌지역이며 마을 앞으로 억만천이 흐른다. 자연마을로 회암, 동주마을, 덕산마을 등이 있는데 회암마을은 도치바구라는 뜻으로 도끼처럼 생긴 바위가 마을에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동주마을은 주령과 동지에 걸쳐있는 마을로 1957년에 두 마을의 이름을 따서 동주라 부르게 되었다. 동남쪽으로 인덕 저수지가 있으며 덕산마을에는 선사시대 유적인 고인돌 8기가 있다. 그 덕례리마을 좌측으로는 순천완주고속도로가 시원스럽게 뻗어 있는 모습도 보인다.
병원 앞 상비교차로 육교 건너 식당... 성가로병원 정문 건너편 우미네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 성가롤로병원/ Saint Carollo Hospital/ 카롤로 보로메오(Charles Borromeo)
1969년 순천시 장천동에 독일 '가롤로 보로메오 수녀회'의 지원으로 설립된 성가롤로 의원이 병원의 시작이다. 1974년 한국의 '예수의 까리따스수녀회'가 경영권을 인수했다. 600병상 규모 종합병원으로 전남동부권의 권역응급의료센터로 지정되었 있다. 원래 순천시청 지척에 있었는데 1998년 현 부지로 이사했다. 수녀가 병원장이고 수녀외헤서 운영하는 병원이라 바쁜 종합병원치고 친절하게 대해준다.
- 우측으로 성가롤로병원 어린이집을 끼고 내려서서 순천시 해룡면 복성리 592-7 성가롤로병원 입구에 도착한다. 성가롤로병원 우측의 무명봉을 지나면서 지맥은 다시 순천시 조례동과 해룡면의 면계를 따른다.
♤ 순천시 해룡면(海龍面)
전남 순천시 남동부에 있는 면으로 1914년 순천군 해촌면(海村面)과 용두면(龍頭面)의 통합으로 해룡면이 되었다. 면명은 해룡산에서 따왔는데, 정작 해룡산은 해룡면이 아닌 순천만 건너편 도사동에 자리하고 있다. 해룡면은 전체적으로 200m 이하의 구릉성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쪽에는 앵무산이 솟아 있다. 산줄기가 서쪽으로 치우친 탓에 큰 물줄기는 광양만으로 흘러간다. 해룡면 북쪽에는 도심형 주거단지가, 남동쪽 해안에는 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있고, 서쪽으로는 순천만국가정원과 순천만습지와 접하고 있다. 해룡면은 전남 순천시 남동부에 있으며, 동쪽의 광양만과 서쪽의 순천만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북서쪽은 순천시 시내 지구, 동쪽은 전라남도 광양시 광양읍, 서부는 순천만, 남쪽은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과 접해 있어 여수반도로 통하는 길목에 해당한다. 동천이 북서경계를 지나 순천만에 흘러든다. 면의 북쪽에 위치한 상삼리와 복성리는 지리적으로 순천 도심에 속하고 경전선 등으로 인해 해룡면의 다른 지역과 사실상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해룡면에서는 도농 통합 이전인 승주군 시절부터 상삼출장소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광양만경제자유구역의 배후주거단지로 조성된 신대리의 인구가 2013년부터 빠르게 증가하여, 2017년 1월 16일에 신대리를 관할로 신대출장소가 설치되었다. 과거 전국 최다 면의 끝판왕이었던 김해시 장유면이 동으로 승격되고, 2015년 9월 23일부로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면이 정관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2019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순천시 해룡면이 대한민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면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복성리는 순천시 해룡면에 있는 동네로서 근매봉과 안산 등으로부터 낮은 산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등성이와 골짜기가 발달해 있다. 자연마을로는 매봉, 바구-배기, 비럭굴 등이 있는데 매봉은 북성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매봉산의 밑에 있다고 하여 산의 이름을 따서 매봉이라 칭하였더. 바구-배기는 북성의 서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며 상비라고도 불리고 비럭굴은 상비마을의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 66.1m봉은 태양광시설이 건설되어 연두색 휀스로 따라 올랐다가 내려와야 하는데, 공사장 우측으로 길을 따라 돌아가면 가내가 두루 편안합니다.^^ 경전선 철로 다리를 통과하고....
순천시 행정동에 있는 율산교차로입니다. 정원수가 있는 곳으로 행정동 뒷산인 133m봉으로 오릅니다.
- 아주통신(주)옆 지하통로를 건너(직진)
- 147m봉, 제주양씨 가족묘, 82번 철탑, 계속 임도 따라서
♤ 대가마을/ 해룡면 대가사거리
다음으로 올라서야할 산릉(옥녀봉)을 바라보며 신대배후단지 지하통로로 진입한다. 전라선 철로로 인하여 우측 성산역방면으로 진행하는 방법도 있는가보다...
발 아래로 미강서원이 보이고요. 저 광양만쪽으로 순천왜성 자리에 대기업건물이 우뚝합니다. 율촌산업단지와 여천공단의 불빛이 화려하네요.
♤ 옥녀봉(玉女峰, 121.9m)/ 광양4등삼각점, 팔각정, 체육시설, 화장실/ 해룡면 신대리
순천시 해룡면에 있는 검단산성을 중심으로 보면 서쪽에는 해발 183.4m의 천황산이 있고 북쪽으로 121.9m 높이의 옥녀봉이 위치해 있다. 신대배후단지 개발로 사라진 해룡면 신대, 향매, 매안마을에는 옛부터 '천황과 옥녀'에 얽힌 애절한 사랑의 설화가 전해져 왔다. 정유재란 시기였던 1598년의 순천왜성 전투와 관련된 이야기도 전한다. 임진왜란 이후 국토와 민행이 피폐해지고 부역하는 민초들의 고난도 이루말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 지역의 부녀들은 이순신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승리와 싸움터에 나간 남편과 자식들의 무사귀가 등 국태민안을 빌기 위해 옥녀봉에 소복을 입고 지성으로 제를 드렸다고 한다.
- 순천 신대 옥녀봉 숲놀이터가 조성되어 있다. 비닐로 두른 팔각정이 있다. 멀리 광양만이 조망된다.
- 옥녀봉을 내려서니 863번 지방도로이다. 미강서원은 신대 배후단지 건설로 이곳으로 옮겨졌다는 안내 표석이 있다.
♤ 미강서원(美岡書院)
전남 순천시 해룡면 해광로 175(해룡면) 미강서원은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조선시대 학자인 배숙(裵숙, 1516~1589) 배향소이다. 이 서원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처음 매곡동에 세워졌었는데 대원군 때인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2000년도에 신대지구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이곳에 이전 된 것으로 추측된다.
♤ 해룡면 성산리 대법마을
성산리는 순천시 해룡면에 있는 동리로서 성재, 옥녀봉 등이 위치하여 낮은 산지를 이루어 고개가 발달해 있고 들이 분포되어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대법, 송산이 있는데 대법은 성산리의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며 법풍이라고도 불린다. 송산은 성산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며 소나무가 많은 산에 위치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대법 남쪽에는 조선시대 때 쌓은 조선산성이 있다. 잡풀들이 우거진 묵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걸어 내려가 묵은 과수원을 지나 민가 한채가 나타나는데 등로는 그 민가 앞으로 이어진다.
- 건물안으로 따뜻한 불빛이 보이니 웬지 부러운 느낌이 들고... 개스끼는 짖어대고...
♤ 순천 검단산성(138.4m, 順天檢丹山城)/ 피봉산/ 사적418호
전남 순천시 해룡면 성산리는 여수반도와 순천시를 잇는 길목에 있다. 이 마을 뒤에 야트막한 야산이 주민들에 의해 ‘안산’ 혹은 ‘검단산’이라고 불리는 ‘피봉산’이다. 검단산성은 여수반도와 순천을 잇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며 산 동남쪽으로 광양만이 한 눈에 바라다 보인다. 서쪽으로는 순천시 홍내동 해룡산 토성이 바라보이고, 동쪽으로는 정유재란 때 왜적이 쌓은 신성리 순천 왜성(倭城)과 대치할만한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다. 검단산성(劍丹山城)은 이곳 피봉산 정상 7~9부 능선에 있다. 정상 가까이 완만한 경사면을 빙 둘러 산성을 쌓았다. 산정상을 머리띠로 둘러맨 듯 쌓아 테뫼식 산성으로 분류된다. 축성은 내외협축(內外夾築)식이다. 성벽 안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을 돌로 채우는 방식이다. 이는 백제말기 축성기법으로 알려져 있다. 검단산성은 그간 정유재란 당시 조명연합군이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전시에 급하게 쌓아 그런지 기단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95년 발굴 결과는 의외였다. 백제시대 축성방식이 완연한 삼국시대 산성으로 확인된 것이다. 오랜 세월 1m 가량이 흙속에 파묻혀 원형이 매우 잘 보존돼 있었다고 한다. 주변에는 백제 기와 수백점이 출토됐다. 철촉, 어망추, 쇠로 만든 못 등도 발견됐다. 산성 아래에는 확인된 고인돌이 20여기나 됐다. 조개무지와 백제시대 토기와 기와 가마터 등도 확인됐다. 순천은 삼국시대 백제 영역에 속했다. 당시 지명은 삽평(揷平)이었다. 산성이 백제시대 치소였을 가능성이 다분하지만 백제 멸망과 함께 폐성의 비운을 걷는다. 그런데 검단산성은 조선조 선조 31년(1598년) 정유재란으로 군사전략적 중요성이 다시 부각된다. 그 해 8월 16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사망하고 왜군이 철군을 서두를 무렵이었다. 전란 막바지 왜군 주력부대는 울산과 사천 그리고 순천에서 끈질기게 항전 중이었다. 그중 조선 침공 선봉대 제1군 지휘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부대는 순천왜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철수하려는 왜군들이 속속 모여든 순천왜성 왜군은 무려 1만 4천 명이었다. 이를 파악한 조선군 도원수 권율(權慄)과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은 순천왜성을 마지막 격전지로 삼는다. 권율 휘하 전라감사 이광악이 이끄는 조선군 1만 명과 유정 휘하 명군 1만 3천 600명은 공격 채비를 서두른다. 이때 조·명연합군 출발지가 바로 검단산성이었다. 순천왜성 북동쪽에 있고 거리도 불과 2.7km로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적의 동태 파악이 쉽고 공격과 후퇴에도 적지였다. 백제시대 산성이 정유재란으로 다시 유용하게 쓰인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검단산성은 조선산성(朝鮮山城), 한성(漢城) 등 새 이름을 얻게 된다. 마침내 9월 19일 조·명연합군은 왜성을 향해 물밀 듯 몰려간다. 인근 장도와 송도에 진을 치고 있던 조선 수군과 명나라 도독 진린(陳璘)의 함대도 이에 가담한다. 일진일퇴 공방전이 치열하던 무렵 인근 사천성에서 아군이 대패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전의를 상실한 유정은 조선군 지휘부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10월 초 결국 군사를 철수시키고 만다. 이를 틈타 철수 준비를 마친 왜군은 11월초부터 300척 구원전군 전함으로 해상 탈출을 감행한다. 이 때 고금도 진영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의 함대가 여수 앞바다로 달려온다. 이순신은 왜군 전함을 노량앞바다로 이끌어내 200여 척을 수장시킨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은 안타깝게 목숨을 잃지만 7년간 끌던 전란은 막을 내린다.
- 잔디로 넓게 조성된 성터에 올라서면 둥글게 돌아가며 안내문이 있다. 팔각집수정, 남문지, 저장구덩이, 다각형건물지, 성벽... 다각형 건물지에는 삼각점도 있다.
남해안에 왜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쌓은 성으로 분류하는데 약 30개 정도가 있었습니다. 울산왜성, 사천왜성, 순천왜성은 정유재란 당시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던 곳입니다. 축성이 워낙 견고하고 겹미로식이라 공략하기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기존의 성돌을 뜯어다 자재로 사용했고, 단기간에 조선인을 노예처럼 부려 축성했겠지요.
♤ 순천 왜성(順天 倭城)
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광양만을 따라 쌓은 조선시대의 성으로 1999년 2월 26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171호로 지정되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49호로 지정되었다가 지방기념물로 격하된 것이다. 면적은 188,428㎡이고 이름이 왜교성, 왜성, 왜성대, 왜교, 예교(曳橋), 예교성, 망해대(望海臺), 신성리성, 순천성 등 여러 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순천 왜성은 정유재란(1597) 당시 육전에서 퇴진한 왜군 선봉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도다카도라[堂高虎]가 전라도를 공략하기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해 3개월간 수륙요충지로 쌓은 토·석성이다. 또한 침략 최정예 부대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1만 4000여 명의 왜병이 주둔하여 조·명 수륙연합군과 두 차례에 걸쳐 최후·최대의 격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중국 명의 육군 장군 유정(劉綎)과 조선 육군 도원수 권율이 이끄는 육군 3만 6,000여 명, 명의 해군 제독 진린(陳璘)과 이순신(李舜臣)이 이끄는 수군 1만 5,000여 명의 병력이 순천 왜성을 비롯하여 장도(노루섬) 등을 오가며 왜군을 격퇴하였고, 이순신이 27일간 머물면서 고니시를 노량 앞바다로 유인하여 대첩을 거두었다. 바로 이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하였다. 순천시가지에서 여수 쪽으로 6㎞ 정도 가다가 왼쪽으로 6㎞ 더 가면 신성리 마을과 이순신을 배향한 충무사가 나오고, 여기에서 남쪽 200m 지점의 광양만에 접한 나지막한 송림에 순천 왜성이 자리잡고 있다. 왜교 또는 예교란 명칭은 축조 당시 왜군들이 피습이 두려워 조·명 연합군이 축조한 순천 검단산성(사적 418호) 쪽의 육지부를 파내고 바닷물을 끌어들여 마치 해자의 역할을 하도록 하고 출입하기 편리하게 연결다리를 설치한 데서 유래하였다. 남해안 28개 왜성 중 전라도 지방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왜성이다.
♤ 해룡면 용전리(龍田里)
용전리는 용전마을·신월마을 등 2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용전리는 마을 앞에 커다란 연못에서 용이 승천하였다고 용(龍)자를 쓰고, 현룡재전(現龍在田)이란 성현의 말씀을 따라서 전(田)자를 써서, ‘용전(龍田)’이라고 하였다. 또한, 마을 사람들이 산의 형상이 아홉 마리 용이 마을을 향한 것 같다고 하여, 마을을 ‘용밭(龍田)’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여수-순천 간 일반국도 제17호선(엑스포대로)이 전남 순천시 해룡면 용전리를 관통하고 있다. 용전리는 전남 순천시 해룡면의 가장 큰 산줄기인 앵무산 산줄기가 남쪽과 서쪽을 감싸고 있어 분지 지형을 이루고 있다. 순천에서 여수반도로 이어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앵무산에서 발원하는 하천은 남동쪽으로 흘러 광양만으로 흘러든다. 용전리는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순천군 용두면 원동리·신월리·용전리·서당리·발흥리·구상리·목거리·도롱리 각 일부를 합쳐 용전리라고 하였다. 1949년 전남 순천시와 승주군이 분리되면서 승주군 해룡면 용전리가 되었다. 1995년 도농통합 정책에 의해 순천시와 승주군이 통합되면서 전남 순천시 해룡면 용전리가 되었다.
♤ 검단고개/ 여순로 17번국도/ 해룡면 용전리
해룡면 도롱리와 선월마을을 이어주는 17번 국도로, 여순로에 도착하여 건너편 강동레미콘옆 임도가 산행 들머리이다. 지맥은 조금 직진으로 진행하다 우측 산길로 진입한다.
- 천황산은 여기 갈림봉에서 왕복 12분 소요된다고도 하고 1km 떨어져 있다고도 하고... 그냥 좌틀합니다.
♤ 천황산(天皇山, 183.4m)/ 병목산/ kt해룡기지국
천황산으로 갈라지는 갈림봉으로 지맥은 좌측으로 꺾어지나 천황산이 멀지않은 거리에 있어 들려서 간다. kt철탑 울타리에 천황산, 병목산이라는 패찰은 있지만 지도상 천황산은 우측으로 왕복 약 1km 거리에 있다. 별 볼일 없는 밋밋한 능선상의 특징없는 천황산에 올랐다가 천황산 갈림봉으로 되돌아나와 남쪽길로 향한다.
♤ 용전고개(70m)/ 용전재/ 해룡면 용전리 용전마을
천황산갈림길에서 내려서면 곡고산 2km, 천황산 0.8km가 쓰여있는 이정표가 있다. 서쪽의 해룡면 도롱리와 용전리를 잇는 고개이다. 용전재는 고갯마루 우측에 용전리라는 마을이 있어 불려진 이름인데 용전리는 전남 순천시 해룡면에 있는 동리로서 괘등산, 중봉, 천황산, 호산 등이 위치하여 낮은 산지를 이루고 있으며 용전저수지가 있다. 자연마을로는 원동, 발산, 꽃갈봉 등이 있는데 원동은 신월의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원집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발산은 용전 동쪽에 있는 마을로 발흥이라고도 하며 발흥제가 위치해 있으며, 꽃갈봉은 신월의 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꽃이 많이 피는 산봉우리에 위치하여 꽃갈봉이라 불린다. 그 용전리 좌측인 서쪽으로는 도롱리마을이 있다.
- 우측 철조망 너머로 남해고속도로와 넓게 펼쳐진 순천만의 습지대를 바라보며 용전재로 내려선다.
고개 이름은 모르겠어요. 용전마을 광양만 쪽으로 0.5km, 해창마을 순천만 쪽으로 0.9km
♤ 해룡면 해창리
해창리는 전남 순천시 해룡면에 있는 동리로 산지에 위치하여 골짜기와 등성이가 발달해 있으며 서쪽으로 동천이 흐르는데 고려 때 해룡창이 있었으므로 해창 또는 해평이라 칭하였다. 자연마을로는 솔대거리, 청룡, 새터 등이 있는데 솔대거리는 청룡의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소나무와 대나무가 많이 자라는 거리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청룡은 새터 옆에 있는 마을로 푸른 숲이 용처럼 보인다고 하여 청룡이라 불리며, 새터는 새텃골에 위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운좋게도 날씨가 받쳐주었어요. 중앙에 첨산이 보이는거 같기도 하네요. 저 우측 맨 뒤가 조계산 쪽입니다.
호남정맥의 끝부분이 저쯤 일거라고....
앵무산에서 수암산을 지나 비봉산까지까지 우측으로 순천만이 가깝고 좌측으로 광양만이 가까운 여수반도의 모가지 부분에 해당합니다. 전망이 아주 좋아 광양제철소와 백운산과 억불봉도 찾아봅니다.
♤ 곡고산(穀庫山, 343.3m)/ 광양이등삼각점
곡고산은 정유재란 때 순천 왜성에 입성한 소서행장의 왜적과 대적하기 위해 이순신 장군과 권율 장군의 군대병력의 군량미를 산 중턱에 쌓아놓아서, 곡식 곡(穀), 창고 고(庫)의 곡고산이다. 양미산(糧米山)으로 부르는 이유는 고려시대에 순천에서 생산된 쌀을 세금으로 거둬서 쌓아놓은 창고가 있던 해창(海倉)의 뒷산이라는 의미이다.
여기도 순천만 쪽으로 전망 끝내줍니다. 예전에는 정상에 나무는 없고 잔디만 무성했다고 하네요.
날씨가 어쩜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요. 이런 경치를 그냥 보여주다니 돈 받아야 됩니다. ㅋㅋ^^
왼쪽이 순천만 건너 고흥반도 팔영산 쪽입니다. 그 좌측으로 우미산능....
♤ 앵무산(鸚鵡山 394.6m)/ 순천시 해룡면-여수시 율천면 시계, 면계
여수반도를 순천시와 여수시로 경계짓는 산으로 여수시 율촌면 산수리와 순천시 해룡면 해창리에 걸쳐있다. 앵무산은 산 밑에 닭이 많이 있어서 꼬꼬산으로 불리다가, 세련미를 더하여 꾀꼬리로 되었는데 꾀꼬리의 古語인 곡고리를 한자화해서 꾀꼬리 앵(鶯)을 쓰는 앵무산으로 변했다고 하며, 여수 반도의 영산(靈山) 조산(祖山) 주맥(主脈)으로 불리며 여수의 주산(主山)으로 여겨져 왔다. 예로부터 열두 산하를 거느린 산이라는 의미로 "앵무산 12머리"라 하였는데, 12머리란 새머리는 봉두(鳳頭)마을, 구시머리는 죽현마을, 대초머리는 대초마을, 뱀머리는 외청마을, 누에머리는 외청마을, 말머리는 취적마을, 닷머리는 중앙마을, 봉머리는 중앙마을, 학머리는 김대마을, 여우머리는 호두마을, 닭머리는 당두마을, 용머리는 해창마을을 가리킨다. 산정에는 하늘에 제를 올리던 천제단이 있다. 천제단 아래쪽에는 옛날에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는 벼루처럼 생긴 샘이 있어 이 샘물을 이용하여 천제단 기우제를 지내면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고 전해진다.
- 순천만 습지대와 순천만 생태공원의 조망이 빼어나다. 갯벌 사이로 흐르는 강에 유람선이 꽁지에 하얀포말을 뿜으며 강을 거슬러 올라오고 순천동천(東川)이 S자로 구불거리며 들판을 양분한다.
- 순천시 해룡면과 여수시 율촌면에 있는 시계이다.
- 곡고산에서 체육시설이 있는 평여마을갈림길 안부를 지나 10분 정도 진행하여 나무벤치등 쉬어갈수 있는 조망좋은 앵무산 정상에서 순천만등 아기자기한 바다풍광을 감상해 본다.
♤ 374.9m봉/ 육각정자
앵무산의 남쪽 봉우리입니다.
- 앵무산을 만나면서 해룡면과 율촌면의 면계를 걷던 마루금은 213.4봉 부근에 이르러 봉두리로 내려서며 율촌면 안으로 들어서서 수암봉 지나 여수시립공원묘지로 떨어지기 직전 293m봉에서 소라면을 만나게 된다.
♤ 여수시(麗水市) 율촌면(栗村面)
여수반도의 가장 북쪽에 자리한 율촌면은 밤나무가 많은 고을로, 밤골을 한자로 표현한 이름이나 지금은 밤나무가 많은 고장이 아니다. 여수시의 북서부에 있으며, 동쪽 해안으로 율촌지방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있고 광양만에 접해있으며, 서쪽은 여자만, 남쪽은 소라면, 북쪽은 순천시와 각각 접하고 있다. 앵무산·국사봉·수암산 등으로 이어지면서 중앙지대가 높은 편으로 동~서는 낮은 산들이 흘러내려 광양만과 여자만으로 뻗어 내려가 농경지를 이루고 있다. 본래 순천부 지역으로서 고려 때 율촌부곡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율촌면이라 하여 평촌·가장·난화·중산·연화·삼산·반월·내리·봉전리 등 40개 리를 관할하였다. 1897년에 여수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구산면의 신풍·우산·중흥·산곡·덕산·학서리 등 17개 리를 병합하여 가장·반월·봉전·산수·상여·신풍리 등 9개 리로 개편되었다. 1998년 4월 1일 여천군·여천시·여수시의 통합으로 여수시 율촌면이 되었다. 전라선과 17번 국도뿐만 아니라 여수공항이 위치해 교통의 요지이다.
봉두마을 입구로 나왔습니다. 관덕문이라고 쓰여있는 사당도 있었어요.
장흥 위씨인 고딩 선배 떼 빠꼴님 고향이네요. 앵무산 중턱 고향마을을 떼밭골이라고 했다고...
♤ 봉두고개/ 오직예수교회, BUS정류장
하사마을로 내려서서 고인돌을 지나 실로암요양원이 있는 봉두고개를 지나 철탑이 보이는 능선으로 향한다.
봉두마을 사거리에 마을 표석과 장흥위씨세장산비가 있다.
♤ 여수시 율촌면 산수리(山水里) 봉두(鳳頭)마을
장흥위씨 후손들은 현재까지 여수시 율촌면 산수리 봉두마을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으며, 봉두마을은 원래 새가 많이 날아들어 조촌(鳥村)이라 불리다가 마을 뒤 앵무산 봉우리가 마치 새머리 모양과 같다 하여 봉두(鳳頭)라 칭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에 장흥위씨 입향조 위효징(魏孝徵)이 터를 잡아 현재의 종손까지 누대로 살아온 ‘봉황포란지혈(鳳凰抱卵之血)’이라는 명당에 관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임진왜란 중 상주영장(尙州營將) 위대경(魏大經)이 이순신 막하에서 순절하자 위대경의 부인인 전주최씨(全州崔氏)가 아들 위효징과 함께 고향 장흥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마을 옆을 지나가는데 오동나무에 둥지를 틀어 알을 품고 있는 봉황을 발견하고 그곳에 집을 지어 살면서부터 장흥위씨가 번성했다는 것이다. 원래 이 마을은 1582년경 광산김씨 김명운(金命韻)이 충청남도 연산에서 이곳으로 입향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봉두마을 옆 산수리에 중종 때 사화를 피해 17세손 위종로(魏宗魯)의 아들인 위용이 먼저 입향한 것으로 보아 위효징의 어머니 최씨는 친척인 이들을 찾아온 것으로 보인다. 위효징은 율천면 산수리 봉두마을 광산김씨 입향조 김명운의 딸과 혼인하여 봉두마을에 정착했다. 봉두마을 위씨들은 17세손 위종복(魏宗復)의 차남인 위유정(魏由貞)의 후손이 된다.
장흥위씨 영장공파 5대조할아버지 동생분 기적비 뒤쪽으로~
고인돌 구경을 하고... 묘지를 지나 밭을 가로질러~
실로암요양원을 통과합니다.
나무 틈 사이로 보이는 광양만과 율촌 여천공단의 조망이 끝내줬을 장소인데 아까운 곳이네요. 주위 사계청소를 하고 정자 하나 지어놓으면 관광명소가 따로 없겠는데...
- 국사봉갈림길에서 국사봉을 다녀옵니다.(왕복 500m, 10분 소요)
♤ 국사봉(國師峰, 292.9m)/ 광양3등삼각점
전남 여수시 율촌면 중앙 취적리의 남동쪽에 있는 산이다. 북동쪽 사면은 경사가 가파르지만 남동쪽 사면은 비교적 완만한 편이다. 국사봉에서 발원한 수계의 물이 산 동쪽에 위치한 취적저수지로 유입되어 취적리 일대 농업용수로 사용되며 조선 후기에는 이곳 국사봉과 근처 수암산 언저리에 백자 도요지들이 있었다. 주변에 특별한 오염원이 없어 국사봉에서 율촌천으로 유입되는 지류의 수질은 1급수에 가깝다.
- 고도를 높여 국사봉 갈림길(289.8m)에 당도한다. 지맥에서 벗어나 있지만 그리 먼 거리가 아니라 국사봉을 왕복한다. 숲으로 쌓여있어 조망은 없다. 지맥길은 우측이고 좌측 국사봉으로 향한다.
수암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광양만 묘도가 보입니다. 저 아래 도로로 내려서서 채석장 정문 초소가 있는 삼거리에서 폐가가 된 수암산 수양관이 있는 곳으로 우틀하여 수암산자락이 시작되는 전봇대가 있는 곳에서 부터 올라왔습니다. 한쪽면이 채석장으로 파헤쳐지고 있는 사진에 보이는 371.1m봉을 올랐다가 내려와야 하는데 그냥 도로를 따라서 이쪽 수암산으로 올라섰습니다.
지나온 방향인데 오른쪽이 국사봉이고요. 그 위쪽으로 공장건물이 순천왜성 쪽입니다. 자꾸 검단산성과 순천 왜성이 있는 쪽으로 눈길이 가네요.
뒤쪽 배경은 순천만이 되겠습니다.... 수암산 정상의 전망이 사방으로 막힘없이 퍼져나가네요.
조그만 강아지와 할아버지가 사이좋게 근무... 오른쪽으로 큰 회사 건물이 순천 왜성이 있었던 자리입니다.
바다 건너가 고흥 팔영산입니다. 그 좌측으로는 우미산이겠죠. 그 밑에 더 아래로 우미산능과 해창만 마복산 정도이겠고요... 팔영산 우측으로 멀리 운암산도 짐작해볼 수 있겠네요.
저 수암봉에 올랐다가 내려섭니다. 건너편 팔영산과 우미산능이 보이시죠.^^ 오늘 날씨 정말 좋습니다.
♤ 수암산(水岩山, 壽岩山, 371.5m)/ 무인산불감시탑과 초소, 태봉성지/ 죽암산성
수암산은 여수시 율촌면 가장리에 있는 산으로 자세한 명칭유래는 알 수 없으나, 산정부에 있는 투구봉 바위와 관계된 지명으로 추정된다. 율촌면의 중앙에 있는 산으로, 산의 정상인 투구봉은 임진왜란 당시 죽암산성[투구성터]에서 왜군과 전투가 있었는데, 산 정상에 보이는 거북바위와 투구봉이 왜군 장수들이 쓰는 투구와 비슷하게 보인 모양이다. 왜군은 저렇게 큰 투구를 쓰는 장수가 있다면 큰 거인으로 힘이 장사일 것이라고 생각해 모든 전투력을 투구봉으로 집중시킴으로써 전력이 소모되었고, 아군의 반격에 크게 패해 도망갔다고 전해진다. 투구봉 아래는 죽암산성이 있는데, 돌로 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길이는 약 250m이고,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약 1.5m, 폭 2m 정도이다.
- 수암산 오름길은 뚜렷한 등로가 없어 송전탑을 오간 희미한 족적을 따라 올라서는게 한가지 요령이다. 또 한가지 요령은 수암산 수양관 앞 도로를 따라 계속 올라가면 산불조심 간판이 있는 곳이 수암산의 정상적인 등산로이다. 그곳으로 올랐다가 다시 내린다면 아주 편안하다. 수암산 정상은 산불초소가 있고 초원같은 넓은 공간이 평화롭다. 사방이 트인곳으로 광양만과 순천만이 훤히 보인다. 암봉 직전 작은 바위, 지맥은 여기서 좌측 내리막으로 가야한다. 고흥 팔영산도 깨끗하게 조망된다.
- 국사봉에서 숲을 헤치고 골재 채취장 도로로 내려서서 마루금은 좌측 능선이나 편하게 도로따라 진행하다 채석장 정문 초소가 있는 삼거리 갈림길에서 우측길로 들어 폐가가 된 옛 수암산수양관으로 향해도 된다. 수암산을 바라보며 도로를 따르다 들머리를 찾아 길도 없는 편백나무 숲으로 들머리를 잡는데, 마루금을 고집하여 길없는 산길로 들어서서 서쪽 방향을 향해 나무숲을 헤치며 오른다.
- 그야말로 멧돼지 길을 각개약진으로 오르는 식이다. 좌측 능선의 바위길을 직등하기는 어렵고 우측에 보이는 송전탑으로 돌아서 올라야 수월하므로 처음부터 송전탑을 보며 길흔적을 찾는게 요령이다. 송전탑을 지나 철쭉군락지 사이에 조그마한 길흔적이 정상까지 희미하게 나있다. 통신탑이 보이는 수암산 정상을 향해 바위길을 힘겹게 올라선다.
수암봉에서 바라본 가야할 방향인데요. 중앙의 산이 지맥에서 벗어난 소라면 가마봉(366m) 같습니다. 가마봉은 지맥상 연화시립묘원을 지나 간리봉으로 분기하는것 같은데 지맥은 수암산에서 황새봉을 지나 비봉산까지 계속 좌측의 가마봉을 바라보며 남진하는 형태입니다.
가장봉... 여기까지 가셨다면 알바입니다. 직전에서 좌틀해야 합니다. 어쩐지 나무에 라바콘이 꽂혀있더라니...
♤ 율촌면 가장리 임도
임도를 가로질러 숲길로 들어서며 잡목으로 가득하다. 잡목과 잡풀을 제끼며 능선을 찾아 숲을 벗어나면 여수시립공원이 발 아래로 내려다 보인다.
- 율촌면을 지난 지맥은 수암봉 지나 여수시립공원묘지로 떨어지기 직전 293m봉에서 소라면을 만나고, 소라면과 율촌면의 면계를 걷던 지맥 마루금은 운암재 가기전 262.2m봉에서 율촌면과 작별하고 소라면 안으로 진행한다.
♤ 여수시 소라면(召羅面)
소라면의 지명 유래는 주삼천과 율촌면 신풍리의 신풍천이 봉두와 대포 지역을 지나 소라천에 유입되어 비단을 짜듯이 교차하면서 바다로 흘러가는 교류지 역할을 하는 포구였다고 하여 부를 소(召)자와 비단 라(羅)자를 따서 부른 소라포구(召羅浦口)가 면의 동북쪽 지역에 있어 유래하였으며, 또한 조선시대에 소라포면(召羅浦面)이라 부른 데서 유래를 찾기도 한다. 현재의 소라면 지역은 고려시대 940년(태조 23)에는 무주승평군 여수현에 속하였다. 조선시대 1406년(태조 6)에는 순천부 소라부곡 소속이었으며, 1897년(고종 34) 행정구역 개편으로 여수군 덕안면에 속하였다. 1949년 8월 15일 여수시 승격 분리로 전라남도 여천군 소라면이 되었으나, 1998년 4월 1일 여수시·여천시·여천군 통합에 따라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으로 되었다. 소라면 북쪽은 여수시 율촌면, 남쪽은 여수시 화양면, 남동쪽은 시가지인 여천동과 경계하는 지역으로 국도 17호선인 여수로가 북에서 동으로 이어진다. 개발제한구역 24.343㎢에 대한 해제로 소라면 죽림마을과 덕양마을을 중심으로 도시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국도 17호선과 지방도 863호선 등의 연결 지역으로 농수산 중심의 산업구조를 띠고 있다.
시립묘원에 내려섰어요. 저 앞에 보이는게 올라야할 황새봉입니다.
뒤돌아 봅니다. 중앙 위쪽에 십자가 예수형상으로 연화묘원에 내려서서 이쪽으로 걸어왔습니다.
시립묘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도로로 내려섰네요.
♤ 연화고개/ 여수시 소라면 봉두리/ 연화마을~상의곡간 도로(11번군도)
2차선 도로 영락묘원(봉두하늘공원)입구이다. 서쪽 율촌면 가장리와 동쪽의 봉두리를 잇는 고개이다. 시멘트 도로따라 임도로 들어서서 우측 송전탑 길로 오른다.
♤ 율촌면 연화리
연화리는 이제 가장리로 통합되어 자연마을 중 한곳으로 변한 곳인데 가장리는 전남 여수시 율촌면에 있는 동리로서 동쪽은 국사봉의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쪽으로 난화천이 흘러간다. 자연마을로는 가장, 송정, 중산 등이 있는데, 가장은 오곡이 풍부하고 수목이 좋아 아름답고 봉두재를 넘어 상봉재 밑까지 길게 뻗어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가장이라 불린다. 송정마을은 뒷산에 소나무가 많고 마을 앞 나무 밑에 샘이 있었는데 예전에는 식수로 사용되고 빨래도 했다 하여 송정이라 하고 중산은 산의 중앙에 위치한다고 하여 중산이라 불린다.
정상의 조망보다 조금 아래에 있는 바위전망대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광양1등삼각점이니 필히 확인하고,,,
지나온 연화시립공원묘원이 잘 내려다 보이네요. 시립묘원 뒤쪽으로 수암산이 보이고요. 우측 채석장과의 사이에 멀리 국사봉입니다. 좌측 멀리 지나온 앵무산도 보이고요.
황새봉갈림길에서 황새봉을 다녀옵니다. (왕복 500m, 15분 소요)
♤ 황새봉(393.6m)/ 앵조산(鸚鳥山)/ 관학산/ 광양1등삼각점 여수시 소라면 봉두리와 율촌면 가장리 사이에 있는 산으로 자세한 명칭유래는 알 수 없으나, 산의 모양이 황새와 비슷하다 하여 황새봉이라고도 한다. 산 전체의 경사가 가파른 편이다. 대포천과 연화천의 발원지이며, 남동쪽에 대포저수지, 남서쪽에 반월저수지가 있다. 산 중턱에는 임진왜란 때 피난했던 곳이라 전해지는 금대굴이 있고 산의 북쪽에는 여수시립공원묘지와 연화저수지가 있다. 교통은 남해고속도로 순천나들목에서 여수방면 국도 17호선이 소라면 대포리에서 지방도 11호선과 산 아래까지 이어져 있다. 이 외에도 산의 오른쪽으로는 대포리 삼거리~여수시립공원묘지 간의 시도(市道)가 지나고 있다.
- 정상에 공터가 널찍하고 소나무가 많다. 지맥에서 약간 벗어나 있지만 좌측으로 향하여 황새봉을 다녀온다.
- 황새봉에서 내려서서 앞에 봉을 넘어야 하나 좌측으로 내려서서 임도를 따릅니다.
민가가 서너채 있는데 사람 구경은 못하고 갑니다. 수도가 보이니 여름에 물은 구할 수 있을것 같아요.
♤ 봉두굿당 안부/ 삼산마을 고개
소라면 금대와 율촌면 삼산을 잇는 안부로 마을이 자리하고 있고, 정자나무 아래 쉼터와 좌측 임도쪽엔 봉두굿당이 있다. 쉼터에서 오른쪽으로 조망이 트여 아름답게 보이는 순천만을 감상하고 276.2m봉을 향해 오른다.
♤ 소라면 운암재
운암재는 지맥의 좌측으로 보이는 봉두리 운암마을에서 차용된 이름으로 보이는데 좌측의 운암마을과 우측의 사곡리 상복마을을 이어주던 고개로서 예전에는 민초들의 삶의 터전으로 넘어다닌 고개이지만 이제는 잡목과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 지맥꾼 외에는 찾는 사람이 없을 것 같은 왕래가 끊긴 고갯마루이다.
- 율촌면과 소라면의 면계를 걷던 지맥 마루금은 운암재 부근에서 율촌면과 작별을 하고 소라면 안으로 진행을 한다.
- 276.2m봉을 넘어서서, 소라면 운암과 상복을 잇는 묵은 임도가 있고 정병옥묘가 있다.
- 상복마을 고개, 오른쪽 상복마을과 바다를 보면서 넓은 헬기장이 있는 287m봉을 지나 내려선 안부에는 경주정씨묘가 있고 좌우산길이 뚜렷하다.
지나온 산봉우리를 깍아먹고 있는 좌측 채석장(두산산업 석산)에서 나는 소음이 심합니다. 나무에 먼지도 많고...
우측 순천만 방향으로 사곡리이고 좌측으론 봉두리를 바라보며 걷습니다.
♤ 여수시 소라면 사곡리(沙谷里)
남해안 최대 어족 산란장인 여자만에 위치한 여수시 소라면 사곡리는 지금은 갯벌로 변했지만 예전에는 모랫배가 드나들 정도로 해안과 계곡에 모래밭이 많아 사곡(沙谷)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토질도 비옥해 한 때 여수지역 최대 목화단지이기도 했다. 북쪽은 황새봉이 자리하고 있고, 서쪽은 순천만과 접하고 있는 평지이다. 마을 앞 여자만에 그림처럼 떠 있는 모개도와 복개·장구도 등 3개의 무인도를 배경으로 주변 풍광이 빼어나다. 모개도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매입한 1983.48㎡(600평) 섬으로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경관이 좋다. 복개도는 썰물 때 100여m의 바닷길이 하루에 두번 열려 육지와 연결된다. 사곡마을은 ‘일몰’도 장관이다. 복개도와 모개도 사이의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일몰 광경을 구경하기 위해 매년 연말이면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마을 앞에 개설된 해안로도 그래서 도로명이 ‘해넘이도로’다. 주변 광장은 ‘해넘이 관광지’로 불린다. 자연마을로는 장척, 진목, 활목 등이 있는데 장척은 하사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긴 재 밑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고 진목은 장척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참나무가 많았다고 하여 진목이라 불리며 활목은 하사 서남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마을 서쪽으로 활처럼 휘어져 나간 목이 있어서 활목 즉 한자어로 궁항이라 칭하였다.
- 사곡봉(279m)을 지나고, 전주이씨 묘지의 돌담을 지나고, 봉사봉 전망대에서 다시한번 사곡리와 고흥 방향 풍경을 감상하고...
봉사봉이라는 표지석이 있는 내려온 쪽이고요. 내려오는 곳에 진입로를 내어놓고 건물을 세울려는지 커다란 포크레인이 터를 닦고 있군요. 앞으로 장골고개가 사람 사는 곳이 될것 같습니다.
개구멍을 통해 올라가야할 방향입니다.
♤ 장골고개/ 도리깨재/ 여수시 소라면 사곡로
소라면 사곡리에서 봉두리로 넘어가는 2차선 도로로 봉사봉(鳳沙峯) 표석이 서있고 지맥은 가로질러 올라서야 하는데 단단한 철망이 가로막고 있다. 장골재의 유래는 골짜기가 길어서 장골이라 했지않았을까 추측될 뿐이다. 장골재는 도로 좌측의 복산리와 우측의 사곡리를 이어주는 고갯마루로서 도로 한쪽에는 봉사봉이라는 커다란 이정석이 보인다. 봉사봉의 유래는 어느 지역 사람이 설명하기를 이곳 소라가 고향인 분이 소라면장으로 부임을 해 짧은 기간 재직할 때 희망근로 일손을 빌려 면내 여러 숲길을 다듬었는데 그중 한곳이 바로 봉두에서 사곡으로 넘어가는 장골재로서 사곡과 봉두마을의 화합을 위해 마을 이름의 첫 글자를 따 봉사봉이란 이름을 차용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선답자의 표지기가 붙어있는 곳에 낙석방지 철망 아래 배수로로 이어지는 개구멍으로 진입하여 수로를 타고 잠깐 가파르게 올라치면 우측에 묘지를 통해 능선길로 합류한다.
♤ 소라면 복산리(福山里)
마을을 복되게 하기 위하여 만든 산이 있으므로 조산 또는 복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소라면의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덕양리, 서쪽은 바다, 남쪽은 현천리, 북쪽은 사곡리와 각각 접하고 있다. 본래 여천군 덕안면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마산·풍류·신흥·달천·대곡·당산·월내리를 병합하여 복산리가 되어 소라면에 편입되었다. 1998년 4월 1일 여천군·여천시·여수시의 통합으로 새로운 여수시 소라면이 되었다. 북쪽에는 옥녀봉과 이 외에도 월백산 등의 산이 있다. 남쪽에도 남풍류저수지와 조산저수지에서 내려온 물은 대곡마을 근처에서 바다로 흘러들고 있다. 서쪽 해변에 자리한 복산리는 육지쪽인 조산마을에서 섬달천까지 소라면의 중앙에서 서쪽 끝 해변까지 이어지는 마을이다. 주민들은 농업을 주업으로 하며, 달천과 섬달천마을은 바다와 너른 개펄을 보유하고 있어 꼬막의 채취와 어업을 병행하고 있다. 교통은 남북 방향으로 지나는 지방도 22호선의 덕양리나 죽림리에서 서쪽 도로를 이용하면 마을을 지나 달천도 근처까지 이어진다.
영업을 하지 않는건지 솔향기팬션이 조용해요. 건물 옆에 수도가 있어서 물보충이 가능합니다.
가게에 들어가 컵라면이 보이길래 먹을 수 있느냐고 물으니깐 아들인지 정신지체장애자가 가게를 지키는데 안된다고 그러네요.
♤ 마산고개/ 여수시 소라면 복산리 마산마을
임도로 내려서면 솔향기카페가 보이고 아래로 마산마을이 가깝다. 마루금이 밭과 사유지로 바뀌어 있다. 소라면 복산리 마산마을 버스 종점, 마산마트와 마산교회가 있다. 마트에서 음료와 맥주로 갈증 해결이 가능하다.
- 지맥길은 마산교회 뒤 밭으로 올라가는데 잠깐이지만 들입구에 대나무밭이 있어 한바탕 씨름이다.
- 황해도민 사설묘지인 "회향원(懷鄕園)"이란 커다란 비석이 보인다.
- 우측 아래로는 황해도민의 사설묘지가 나란히 줄지어 서 있고 여자만의 바다가 바라다 보여 일몰이 지는 아름다운 여자만과 고흥쪽 풍경들을 조망하고 출발합니다.
- 우측으로 여자만에 떠있는 장구도와 모개도가 보인다. 황해도민 사설묘지 회양원을 지나 무지막지한 잡목속을 헤치며 올라선 184m봉을 출발, 소라면 복산리 임도에 내려 잠시 임도길로 진행한다. 엄청난 잡목숲이라 한밤중에 왜 여길 헤매야 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고~ ㅋ
♤ 여수시 소라면 복산리 서부로/ 사지곡길
평산신씨세장천비가 서있고 우측엔 한우목장이 있어 고약한 분뇨 냄새가 진동한다. 신성농장 안내판이 서있는 삼거리다. 좌측 시멘트 임도길로 진입한다. 길건너 올라서면 시끄러운 개사육장을 지나고 40번 송전탑을 만난다.
비봉산갈림길에서 비봉산을 찾아 올라갈 땐 좋았는데 다시 삼거리갈림길로 내려올 땐 길을 잘 찾지 못해 헤맬 수 있을것 같습니다. 야간에는 더더욱이나...
왼쪽 화장동(무선동)과 무선산 그리고 우측 굴강이 있는 여수 웅천지구 해변가인것 같은데...
갈림길에서 (왕복 600m, 15분 소요)
♤ 비봉산(飛鳳山, 256.2m)/ 통신탑
여수시 소라면 봉두리, 덕양리 일대에 걸쳐있는 산이다. 난시청해소용 한국방송 통신탑이 서있고 정상표지는 없다. 조망도 없다. 비봉산은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지맥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지맥길은 우측으로 내려선다.
- 덕곡재로 내려서는데 길이 없어서 한밤중에 잡목을 헤치고 고생좀 했습니다. 그래도 가시가 걸리면 뒷주머니에 전지가위를 꺼내 싹뚝싹뚝 자르며 진행하니 여간 수월하지가 않더라는....
- 이튿날 반대편으로 올라가며 보니 송전탑을 보고 내려오면 줄무덤이 있고 그리로 내려서면 바로 조산마을표지석이던데 민가 뒤쪽 절개지로 내려가느라 생고생을 했더라 싶습니다.
개고생하며 민가 뒤쪽 절개지로 내려서서 도로를 따라 민들레 식당을 바라보며 조산마을 표지석쪽으로 향하는데 빈 택시가 지나가네요. 아저씨~~~!!!
나에게는 여수지맥 원샷원킬의 기회가 한번 더 있다고 철야행군을 할 욕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택시를 보는 순간 춥고 떨리고 배고프고 모든 여망이 순식간에 무너져 날라갔더랬습니다. ㅠㅠ
여천 터미널이 있는 롯데마트에서 내리니 숙박업소가 휘황찬란합니다. 7만원이라는데 하룻잠 자기엔 너무 아깝더군요. 21:30분에 돼지국밥으로 저녁을 먹고 마지막 버스를(82번?) 타고 여수시청쪽 소방소 골목으로 이동하여 현금으로 35,000을 지불하고 투숙했습니다.
요즘 식당이나 카페는 코로나-19로 인해 영업을 하는건지 도시당초 짐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93번 여수 시내버스가 정차하는 덕곡버스정류소입니다. 정상석 뒤로 보이는 왼편으로 올라서면 들머리입니다.
민들레식당에서 식수보충, 수도
♤ 덕곡재/ 조산마을 표지석/ 민가 마당 수도(지하수)
여수시 소라면 덕양리(德陽里)에서 현천리(玄川里)로 넘어가는 고개로 8번 군도가 지난다. 덕곡고개는 덕양리의 덕곡마을과 복산리의 조산마을을 이어주는 고개로서 덕곡마을의 이름을 차용해 사용하는듯 보인다. 덕양리 덕곡마을은 마을이 들어서기 전 역이 있는 고개란 뜻으로 역고개라고 부르던 곳에 하나 둘씩 마을이 들어서자 음이 비슷한 덕곡으로 불리게 되었다. 내기 마을을 중심으로 한 덕양의 5구 마을 주변에는 일제 시대 금을 채굴하던 금광이 여러 곳에 남아있으며 돌부처가 있던 독부처골 소의 구시같이 홈이 파인 구시밭골, 두엄산, 주름산 등의 땅이름이 전해온다.
- 덕곡마을과 다음으로 올라 서야할 155.5m봉을 바라보며 덕곡재로 내려선다.
- 버스정류소와 조산마을 표석이 있는 좌측 밭으로 진입한다. 거친 길로 들어 가파르게 올라선 155.5m봉에서 좌틀로 꺽어 긴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 조산마을에서 묘지가 있는 155.5m봉을 오르지 않고 좌측으로 돌아 덕곡고개로 오르는 길은 수풀과 늪지대가 혼제되어 155.5m봉을 오르는 것이 더 편하고 빠르다.
몇 기의 잘 관리되고 있는 묘지를 지나 내려가니 양회임도가 지나는 안부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 역시 덕양리와 복산리를 이어주는 고개이나 아무런 표식이 없는 무명안부입니다.
♤ 공지산 둘레길(직진)
이름을 모를 고개인 양회임도를 가로지르니 공지산 둘레길 이정표가 나오고 좌측길로 올라서면 지금까지 괴롭히던 잡목길은 끝나고 잘 조성된 등산로 따라 여유롭게 걸어간다.
- 비실이선배님부부 띠지가 눈에 많이 띄었어요. 애매한 곳에는 어김없이 간격을 좁혀 붙여주셨더군요.
♤ 소라면 죽림리(竹林里)
죽림리는 화양면 지역과 소라면 서부 지역을 이어주는 서여순로가 갈라지는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죽림리의 이름은 말 그대로 마을 주변에 대나무가 많아서 지어졌다고 한다. ‘죽림청풍(竹林淸風) 고사용출(高士聳出)’이라 하여, 예로부터 뛰어난 선비가 많이 배출된 마을로 전해온다. 원죽마을·신송마을·상금마을·하금마을·차동(車洞)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죽마을은 죽림마을이 처음 터를 잡았던 곳이다. 신송마을은 저수지 부근에 있는 마을로, 마을 주변에 20여 기의 고인돌이 전해오고 있어 오랜 역사를 짐작하게 한다. 특히 1960년대 밭을 개간할 때 고인돌 무덤방에서 돌로 만든 쟁기가 발견되었는데, 여수반도에서 선사시대 이전부터 농사를 지었던 흔적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상금마을과 하금마을은 처음 ‘쇠실’이라고 불리던 지역을 한자로 ‘금곡(金谷)’이라 하였다가, 위·아래 마을로 나뉘게 된 이름이다. 쇠실 일대는 예로부터 철이 많이 나던 지역으로 알려져서, 일제강점기에는 금을 채굴하던 광산까지 여러 군데 들어섰다. 그러나 경제성이 떨어지면서 폐광되었다. 마을 아래로는 관기들에 물을 공급하는 죽림저수지가 조성되어 있어 민물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무선산 아래에 자리한 차동은 ‘수리골’이라고 불렸던 옛 이름에서, ‘수리’를 훈이 비슷한 ‘수레 차(車)’로 바꿔서 차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여수군이 설립될 때 덕안면 지역으로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금곡·차동·덕현·중금·하금·신송리를 병합하여 소라면에 편입하면서 법정리인 죽림리가 되었다. 1949년 8월 15일 여수시 승격 분리로 여천군 소라면이 되었으나, 1998년 4월 1일 삼여통합에 따라 여수시 소라면이 되었다.
여수시와 만나 여수시와 소라면의 경계를 따른다. 죽림고개에서 성산공원방향으로 내려가 하루 쉬어가기 좋다.
♤ 죽림고개/ 22번 국도/ 생태통로(육교)/ 여수시 소라면 죽림리-여수시 화장동 경계
여수시 화장동에서 소라면 죽림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22번 국도가 지난다. 동물이동통로인 화산육교를 지나간다. 정면 좌측으로 지맥길에서 약간 비켜나있는 무선산이 바라다 보인다.
죽림리유적지(청동기시대 무덤군)를 지나고, 묘지가 있는 작은 바위봉(호랑분맥 갈림길)을 지나 내려서니 운동시설이 있는 삼거리에 도착하면 무선산 갈림길이다.(죽림고개에서 10분 소요) 지맥은 직진, 무선산은 좌측 내리막이다. 무선산 안부와 체육시설을 지나 직진하여 계단을 올라서면 바윗길이 이어진다. 무선산갈림길에서 전망좋은 무선산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 호랑분맥은?
여수지맥상의 무선산 0.5km전방 분기점에서 무선산(217m), 둔덕재, 호랑산(481.8m), 봉화산(464m), 제석산(335,9m)으로 해서 여수 북단 광양만으로 떨어지는 도상거리 23.4km의 산줄기로 호랑산에서 다시 영취단맥을 분기시킨다.
여수지맥을 하며 곡고산과 수암산의 조망도 좋지만 무선산의 조망을 놓치면 반은 놓치는거 같아요. 정면으로 가막만의 모습입니다. 왼쪽은 대미산과 돌산도, 정면 멀리 금오도이고 우측으로 자봉도, 개도, 백야도 순입니다.
북쪽으로 여천공단과 광양만 포스코도 보이네요. 우측은 묘도로 연결된 다리 이순신대교도 보이고요.
왼쪽은 진달래가 유명한 전봉산이고 멀리 보이는게 진례산과 영취산입니다.
호랑산과 우측으로 봉화산...
아래로 죽림저수지가 보이고, 서쪽으로 멀리 순천만 건너 고흥 팔영산이 보입니다.
가야할 안심산입니다. U-월드루지테마파크가 산위로 올라가 있어요. 우측 아래 여천교회도 보이는군요.
무선산 갈림길에서 (왕복 1km, 30분 소요)
♤ 무선산(舞仙山, 216.7m)/ 광양4등삼각점/ 여수시 화장동-선원동경계
여수시 선원동에 있는 산으로 멀리서 바라보면 산의 형상이 신선이 춤추는 것 같이 보인다는 뜻에서 유래가 되었다. 산 동쪽은 경사가 가파르지만 서쪽은 완만한 편이다. 여수군읍지에 군의 서쪽 25리라고 하였고 여수읍지에는 무선산은 군의 서쪽 20리에 있고 산 정상에 기우제를 지내던 기우단이 있으며 또한 기암이 신선과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의 순천에는 쌍봉면의 산으로 기재되어 있고 여수군읍지의 부도에 전봉산 서쪽의 산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조선지형도에 경지로 둘러싸인 선원리의 산으로 묘사되어 있다. 동쪽 아래에는 도원초등학교와 여천중학교가 있으며, 시내를 잘 조망할 수 있는 공원시설이 산중턱에 마련되어 있다.
- 무선산 안내도와 벤치가 있고 사방으로 조망이 좋다. 남쪽 아래로 소호항이 보인다. 가막만 바다에 떠있는 많은 섬들 너머로 돌산도와 금오도도 보인다. 우측(서쪽) 여자만 쪽으로 고흥반도가 보이고 팔영산과 그 옆구리로 운암산도 볼 수 있다.
까막섬이 가막만의 중앙에 떠있어요. 순천 여자만의 중앙에는 여자도라는 섬이 있구요.
♤ 가막만/ 까막섬
까막섬은 여수시 돌산읍 금봉리 산1번지로 가막만의 중앙에 있다. 가막만은 수산자원 보호지역 및 청정해역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미국 식품의약국(FDA) 지정 청정 해역으로 여수의 상징적인 바다이다. 까막섬이라고 부르게 된 유래는 섬의 모양이 까마귀처럼 생겼다고 하여 또는 멀리서 보았을 때 까맣게 보인다 하여 까막섬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자로 표기하면서 ‘오도(烏島)’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정식 이름은 ‘까막섬’이다. (1961. 4. 21. 행양수산부 고시). 해도(海圖)와 여수지역 여객선 항로도에는 57년 동안 정식 이름이 아닌 ‘오도’로 실려 있었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까막섬과 가막만의 관계를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까마귀’는 옛말 ‘가마귀’가 된소리로 변한 것이다. 최근에 까막섬을 해도에 표시해 줄 것을 국립해양조사원에 건의하여, 항행통보 제46호 999항 (2018. 11. 16. 해양수산부 국립해양조사원 발행)에서 ‘오도(Odo)’를 ‘까막섬(Kkamakseom)’으로 고침으로써 57년만에 까막섬이 해도에서 본래 이름을 찾게 되었다. 까막섬의 동쪽에 금죽도(金竹島. 유인도)가 있다. 개도에서 여수항으로 배를 타고 오면 서쪽에 금죽도가 있다. 표시된 항로에는 양식장이 많으므로 보통 때는 금죽도와 소죽도 오른쪽으로 다닌다. 금죽도의 바로 아래 서쪽으로 멀리 보이는 섬이 까막섬이다. 면적은 29,058㎡(8,790평. 여수 진남종합경기장 면적의 1.3배)이며, 섬 둘레 0.7km, 최고점의 해발 고도는 20m이다. 여수시 신월동 히든베이호텔에서 약 4.5km 거리에 있으며, 일반 배로 가면 15분 정도 걸린다. 가막만은 북쪽의 여수반도(소호동·시전동·웅천동·국동·경호동 등)와 서쪽의 고돌산반도(화양면), 동쪽의 돌산도(돌산읍), 남쪽의 개도(화정면 개도리) 등으로 둘러싸인 만으로, 길이 15㎞· 폭 9㎞이다. 가막만에는 대경도・소경도・금죽도 등의 유인도와 까막섬・취도・소죽도(小竹島)・가덕도(加德島)・두력도・가장도(加長島)・삼도(三島) 등의 무인도가 있다.
내려선 쪽은 부영아파트, 건너편은 양우내안에 아파트입니다. 건너편으로 바로 여천교회가 보이는데 6차선의 도원로를 건너는 횡단보도가 없어서 횡단보도를 찾아 빙 돌아와야 합니다.
저쪽 정면에 보이는 부영아파트 110동으로 내려와 울타리를 타고 코너로 나와서 빙돌아 이쪽으로 건너왔습니다.
♤ 863번도로/ 여천 장로교회/ 여수시 쌍봉동-소라면 죽림리 경계
여천 장로교회입구에서 여수시 쌍봉동과 소라면 죽림리의 경계를 타고 안심산 들머리인 유심천 입구까지 진행하는데 길도 없는 지맥길이 이어진다.
- 길건너 여천교회 우측 주차장으로 올라간다. 여천교회 주차장에서 안심산이 보인다. 통신탑 뒤로 지난다. 낮은 봉우리(105m, 삼각점)를 넘으면 안심산이 바라보이는 은혜로운 교회 앞으로 내려선다.
왼편에 은혜로은교회 보이시죠 그리로 내려왔습니다. 오른쪽 끝으로 무선산도 보이고 여천교회도 보이네요. 우측으로 정자가 있는데 심곡마을 표지석이 있어요.
♤ 여수시 안산동
전남 여수시에 있는 법정동으로서 명칭유래는 서쪽에 있는 안심산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현재의 장성마을, 여수마을, 심곡마을과 통합되어 여수군 쌍봉면 안산리가 되었다가 1986년 여천시 쌍봉동 관할의 법정동인 안산동으로 바뀌었고 1998년 여천시와 여천군 및 여수시가 여수시로 삼여통합됨에 따라 여수시 쌍봉동으로 통합되었다. 안심산의 동쪽과 북쪽 산자락에 세 곳이 마을을 이루고 점차적으로 시가지로 조성되었으며 동쪽 장성마을 앞으로는 가막만이 펼쳐지고 여수마을과 심곡마을 앞에는 무선산과의 사이에 형성된 평지가 들을 이루고 있다. 장성과 지망이, 짚은골(심곡) 등의 마을이 있으며 북쪽으로 도로를 경계로 하여 선원동, 서쪽으로 소라면 죽림리, 남쪽으로 소호동과 접해 있으며 동쪽은 가막만과 접해 있다. 여수마을과 장성마을은 택지지구로 조성되어 아파트와 사택 지구 및 상가 지역이 되었고 심곡마을은 주택지로 변모하였으며 부영여자고등학교와 안산중학교가 있다.
♤ 유-월드 루지테마파크
마루금은 좌측 봉우리를 올라야 하나 도로따라 오른다. 안심산과 유월드(안심사, 유심천 온천, 호텔 등이 자리함)가 보인다. 편의점에 다녀올 수도 있다. 안심산 등산로 안내판 뒤로 오르다가 지맥길과 합류하여 오른쪽 안심산으로 오른다. 안심산으로 오르는 길에 여수 시가지가 내려다보이고 웅천지구 이충무공이 조선기술을 가진 나대용과 함께 거북선을 만들었던 선소와 굴강이 보인다. 굴강(堀江)은 선박을 대피하기 위해 만든 구조물이 작은 만(灣)처럼 굽어 있는 곳을 말하며 조선시대 선박의 수리보수, 군사물자의 하역 등을 목적으로 중요한 군사시설의 방파제 역할을 한 곳이다.
정상석도 없이 초라합니다. 그나마 휴식터는 조성이 되어 있어요.
중앙에 가막섬이 보이는 가막만의 모습입니다. 뒤쪽으로 소미산-무슬목-대미산으로 시작되는 돌산도이구 우측으로 금오도, 자봉도, 개도, 백야도 순입니다.
여수지맥의 끝 백야도쪽을 더 선명하게 당겨보았습니다.
고흥의 진산 팔영산은 그 우락부락한 골격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 보이죠.
좌전방 끝이 웅포지구 해변에 있는 굴강(거북선을 만들던 선소유적지)입니다. 우측으로 가덕도와 장도가 보이고요. 뒤쪽으로 호랑산 진봉산의 가운데 멀리 진례산과 영취산....
다시 자세히 볼까요. 왼쪽 끝머리에 굴강이 숨어있고, 굴강 뒤쪽으로 정면에 보이는 얕은 산이 망포산입니다. 선소유적지 주변으로는 병사들이 망을 보고 훈련을 하던 곳이에요. 소호항과 웅포를 연결하는 다리공사를 하고 있고요.
방금전 지나온 무선산 뒤로 저 광양만 포스코까지 환하게 보입니다. 오늘 오나전 미친 날씨입니다. ㅋ~
마지막으로 지나온 여수지맥 길을 살펴보고 출발할려고 합니다. 우측 아파트 뒤로 비봉산 kbs송신탑이 보이고요. 죽림저수지 위 좌측으로 가마봉을 가운데 두고 C자 형상으로 돌아 왔습니다. 가마봉 뒤로 연화시립묘원이 조금 보이고요. 그 좌측으로 황새봉입니다.
♤ 안심산(安心山, 347.9m)/ 소라면 관기리- 여수시 쌍봉동(소호동) 경계
여수시 소호동과 소라면 관기리 사이에 있는 산으로 무선산에서 이어지는 여수지맥이 통과하는 곳이며, 죽림천의 발원지에 해당된다. 옛날에 안심사와 죽림사 옛터가 있었는데 최근에 중건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들의 휴식처였기 때문에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북쪽사면의 경사는 완만한 편이나 동쪽과 남쪽사면은 경사가 가파르다.
- 벌거숭이 산인데다 공동묘지로 사용하고 있어서 많은 묘들이 있지만 시내에 있는 산이라 시민들이 많이 이용한다. 좌측 편으로 확 터진 바다를 볼 수 있고 우측으로는 안심산 중턱까지 유심천온천호텔시설이 들어서 있다.
- 산불초소와 산불감시탑이 있는 안심산 정상에 서니 여수 시내와 멀리 금오도까지 산으로 둘러싸인 가막만의 조망이 좋다. 죽림 저수지 등 죽림리 일대를 바라보고 우측 서쪽방향의 지맥길로 들어선다.
- 안심산을 지나면서 소라면 관기리와 경계를 잠깐 걷다가 화양면을 만나게 되고 소라면 관기리와는 작별하고 화양면과 여수시의 시계를 잠깐 걷다 사방산에서 좌틀하면서 온전하게 화양면 안으로 들어와 진행하다 여수반도의 끝인 힛도에서 그 맥을 잠기게 된다.
♤ 여수시 화양면(華陽面)
이 지역에서 말을 기르던 목장(牧場)이었던 역사적 사실에서 그 연유를 찾을 수 있는데, 본래의 뜻은 사서삼경의 하나인 『서경』이란 책에 나오는 주나라의 이야기 『주서(周書)』에서 인용된 고사이다. 이 중 귀마우화산지양(歸馬于華山之陽)이라는 구절(句節)에서 화양이라는 뜻을 인용하게 되었고, 곡화목장을 관리하던 감목관이 거주하던 돌고개마을의 뒷산 이름도 화산이었던 것이 고지도에서 확인되기도 한다. 본래 순천부 지역으로서 소라면 상도에 속하였다가 그 뒤 곡화목장을 설치하여 감독관을 두었는데, 1895년(고종 32)에 이를 폐지하고 1897년 여수군에 편입되어 화양면이라 하여 나지·소장·석교·서상·서하·봉동 등 37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덕안면 성본리 일부를 병합하여 나진·서촌·안포·옥적·용주 등 10개 리를 관할하였다. 1998년 4월 1일 여천군·여천시·여수시의 통합으로 여수시 화양면이 되었다. 여수시의 남서부에 위치해 있으며 동·서·남 3면은 가막만과 장수만, 여자만 등 바다에 면하고, 북쪽은 소라면(召羅面)과 접한다. 북쪽의 비봉산(飛鳳山), 서쪽의 서이산과 이영산(二影山), 남쪽의 고봉산(高峰山)과 봉화산(烽火山) 등 해발 200~400m의 산지 사이에 화양·대옥·석교·소장·소옥·이목천 등 20여 개의 소하천이 농경지를 가로 지르며 흐르고 있다. 해안선은 굴곡이 심하며, 연안의 바다는 갯벌이 발달한 지역과 갯벌이 없는 암반 지역으로 나뉘어진다. 교통은 소라면에서 갈라진 지방도 22호선이 남쪽 백야도로 이어져 있으며, 이 외에도 작은 도로가 해안을 따라 개설되어 있다.
♤ 소호고개/ 여수시 소호동
소호고개는 소호동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소호동은 여수시에 있는 법정동으로서 소호동이란 명칭은 일제강점기 소제리와 항호리를 합하여 소호리가 된 데서 유래하였다. 삼국시대에는 삽평군, 통일신라시대 승평군 해읍현에 속하였다가 1396년(태조 5) 순천부 여수현에 속하였으며 1896년(고종 33) 순천군 여수면 관할이 되었다. 1949년 여수시 승격에 따라 여천군이 신설되어 여천군 쌍봉면 소호리가 되었으며 1976년 전라남도 여천지구출장소 관할이 되었다가 1986년 여천시 승격에 따라 여천시 소호동이 되었다. 1998년 삼여통합에 따라 여수시 소호동이 되어 쌍봉동 관할이 되었다. 소호동의 북쪽과 서쪽으로는 안심산이 자리하고 동쪽으로는 남해 가막만과 접하고 있다. 소호동은 여수시 서남쪽 가막만 해안가에 위치하며 동쪽은 시전동, 서쪽은 화양면과 소라면과 각각 접하고 있다. 소지개, 목섬, 소제, 항호, 송소 등의 자연마을과 고개인 소제고개, 무인도인 가덕도가 있으며, 소호동은 1988년 여수국가산업단지 건설에 따른 택지조성 사업 시행으로 1990년 대기업의 사택 단지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변모한 지역이다. 2007년에 2012여수세계박람회 개최됨에 따라 대형 호텔과 요트장, 리조트가 연계된 위락시설이 건설되었으며 잘 꾸며진 해변도로를 중심으로 생선회 타운과 카페 지역이 들어서 있다.
♤ 창무성지/ 삼면경계면(소라면 관기리, 화양면 창무리, 여수시 쌍봉동)
소호고개를 넘으며 동쪽 가막만과 서쪽 여자만의 거리가 불과 5.3km에 지나지 않는다. 창무성지는 화양면에 설치된 곡화목장과 관련하여 말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이중삼중으로 성을 쌓은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것 같다. 야트막한 봉우리 넘어서면 안부에 돌로 쌓은 성벽이 남아있다.
- 안심산에서 가파른 등로를 내려서면 사방산등산안내도가 있는 안부를 지나고 생태이동통로를 지나 좌측 절개지 끝에서 오르게 되고 흔적도 없는 '창무성지'를 지나 사방산에 오른다.(직전 육각정)
사방산 정상에 띠지를 찍긴 했는데 어디갔나~~? 사방산 정상 100m 직전에 있는 정자입니다.
♤ 사방산(251.7m)/ 성주산(聖主山)
산의 북사면은 경사가 완만하나 동사면은 경사가 가파르다. 산정상은 여수지맥에서 벗어나 있으며, 동사면은 가막만과 접하고 있다. 안심산과 사방산 사이에서 발원한 하천이 소호제(蘇湖堤)를 지나 가막만으로 유입된다.
- 지리원 지형도에는 표기 지명이 없고, 영진 지도에 표기되어 있다. 벤치2, 돌산방향이 조망된다.
- 지맥은 창무성지에서 소라면 관기리와 헤어지고 화양면과 여수시 쌍봉동의 시계를 잠깐 걷다가 사방산에서 서틀하여 온전하게 화양면 안으로 들어서서 진행한다.
- 사방산에서는 정면(남쪽) 길흔적 따라 계속 내려가면 약수터갈림길에서 우측으로 꺾이면서 시멘트길을 만나고 지맥은 직진하는 좋은 길을 버리고 우측 납골묘 쪽으로 가야한다.
♤ 여수시 소라면 관기리
전남 여수시 소라면에 있는 동리로서 여수반도에 위치하고 죽림저수지 남쪽에 비교적 비옥한 농토가 전개되며 관청이 있었으므로 관터 또는 관기라 칭하였다. 자연마을로는 고재, 상관터, 하관터 등이 있는데 고재는 하관 남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 시대 화양면 용주리 마성의 관문이 되었다고 하고 상관터는 관터(관기)의 위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하관터는 관터(관기)의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하관터라 불린다.
- 등로 좌측으로는 창무리가 내려다 보이고 화련마을 고개에서 조금 더 걸어 오르니 전주이씨 성녕대군파 묘지들이 보이고 그 묘지 뒤로 돌아 능선으로 오르니 무명묘를 지나 130.5m봉인 문덕산에 도착한다. 국토지리원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는 산명이나 다른 지도에는 문덕산으로 표기된 정상이다.
- 사방산 내리막을 내려서자 마자 우측으로 리본을 따라 진입하면 화련마을 고개를 지나 납골묘가 있는 곳으로 또 한 차례 문덕산(130.5m) 봉우리를 넘어야 주유소가 있는 도로로 내려서게 된다.
♤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昌武里)
여수시 화양면에 있는 동리로서 바다로 길게 뻗은 육지에 위치하여 양쪽 옆이 바다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부분의 지역은 낮은 산지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마을로는 창무, 성줏골, 배낭골, 백초 등이 있는데 성줏골은 창무마을과 용창초등학교 사이의 마을로 곡화목장의 성주가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고 배낭골은 마을 북동쪽에 있는 작은 마을로 배나무골이 변한 말이다. 백초는 마을 주변이 갈대와 같이 하얀색을 띤 풀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마을이 하얗게 보인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신추라고도 하였다. 화양면의 입구에 있는 창무마을은 일제강점기 이전까지도 '문꾸지'라 불렸는데 이는 창무 마을의 순 우리말 이름으로 곡화목의 마성 성문이 있던 곳이란 뜻으로 지어졌다. ‘문꾸지’는 ‘문이 있는 곳’이란 뜻이다. 조선시대 화양면 지역에 곡화목장이 설치되어 말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송소마을에서 오천마을에 걸쳐 성을 쌓고, 성문을 이 마을에 두었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다. 지금의 ‘창무’란 이름도 ‘문꾸지’와 관련이 있다. 이 지역의 옛 땅 이름 중 하나인 ‘창마징이’의 유래에서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고 전해오는데, ‘칭마징이’는 ‘창으로 막고 있는 곳’이란 뜻이다.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있어서 생겼다는 이야기와 돌산만호진 입구를 지키는 창을 든 초병에서 유래했다는 두 가지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온다. 북으로는 소라면 관기리에 접하고 남으로는 용주리에 접하며 마을 동쪽으로 국도 77호선이 지난다. 마을 서쪽은 비봉산이 있어 서고동저형의 지형으로, 평지에 마을이 들어서 있다. 대부분이 바다를 끼고 있는 화양면 지역에서 바다와 접하지 않은 마을에 속한다. 관기마을과의 사이에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관기들이 넓게 펼쳐진다.
지맥길이 내려온 곳에 있는 폐주유소입니다.
♤ 창무고개/ 22번도로
소라면 관기리에서 화양면 나진리로 넘어가는 22번 도로가 지나고 우측에 SK명진주유소가 있다.
지맥에 밭이 있어 작물을 밟지 않기 위해 우회하여 창무리 마을길 따라 진행하기도 한다. 비봉산을 향한 오름길이 빡시다.
- 130.5m봉을 넘어서고 마을길 임도를 지나 화련삼거리 버스정류소가 있는 창무리 22번 도로로 나아간다.
- 화련삼거리 마을버스 정류소 뒤로 창무리 마을 표지석이 보인다. 20번대 버스는 대부분 여수시내를 오간다.
- 화양로에서 비봉산 등로가 시작되는 '창무옻닭' 식당까지는 밭지대를 지나야 하기때문에 98.1m봉을 우회해 임도를 따르는 것이 유리하다.
- '창무옻닭' 식당에서 등로를 오르다 우측 리본이 있는 마루금을 따르지 말고 등로를 따르는 것이 극성스런 잡목을 피할 수 있다.
다음 구간은 접근성 면에서 창무리 이상 더 가면 오히려 불편하겠단 생각으로 창무리에서 1구간을 끊습니다. 심야버슬 이용해 하루 거리로 남겨두기에도 적당해 보이고요. 또 연 3일째라 더 이상 무리할 필요가 있나 싶었습니다.
일찍 산행을 마치니 넘 여유가 넘쳐납니다. 사실 덕곡재에서 창무리까지 오며 숱한 명감나무의 모가지를 자르고, 묘지를 지날 때마다 어느 가문의 휘자가 어떻게 되시는지 살펴보는 여유도 누렸습니다. 그 질긴 명감나무를 댕강댕강, 그동안 수많은 선배님들을 괴롭힌 죄값을 물으며 잘근잘근 조각을 내는데 어찌나 속이 시원하던지 원...
어플을 끄지도 못한 채로 곧바로 도착한 23번 버스에 올라 여수시내로 향하는데 지맥길이 지나는 여천교회 고개를 넘어 큰 사거리에 내렸습니다. 굴강 구경가려고요.^^
반대편 멀리 안심산이 보입니다.^^
굴강을 빠져나가는 입구를 보니 거북선이 그다지 큰 것은 아니었더군요. 제원을 보니 승무원은 125~130명으로 추정되고, 1층에는 노를 젓는 격군이, 2층에는 모두 14문의 포가 사방으로 장착되고, 거북선의 가장 큰 특징이 덮개(蓋板)로 덮어 배안의 군사들을 보호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밀물 때 바닷물이 차면 여기서 진수식을...
거북선을 만들던 굴강입니다. 저 뒤쪽으로 대장간과 세검정이 보이네요.
지휘소이기도 하고요. 옆 창고는 무기를 보관하던 무기고이기도 합니다.
처음 알았는데 거북선에 대한 기록은 태종실록에 이미 보여 왜구의 피해가 극심했던 고려말~조선초에 걸쳐 비밀리에 만들어 오던 특수전투함이었데요. 거북선을 만들고 수리했던 선소가 세곳 있었는데 본영선소, 돌산도 방답진선소, 그리고 여기 여수선손데요. 무기를 정비하던 대장간(무수막)과 세검정도 복원해 두었네요.
집에 와서 알게되었는데요. 아 글씨 언제부터인지 등산화에 깔창이 없이 다녔단 억울한 사실 ㅠㅠ
어쩐지 발바닥이 족저근막염에 걸린듯 통증이 심하더라니.... 흐흑~
호남정맥에서 압곡리 내려서기까지 산군이 우람하고 이후의 여수지맥은 사실 크게 높은 산이 없습니다.
1구간으로 2박3일 진행한 창무고개까지 82.41km인데요. 심원마을에서 출발하기까지 깃대봉 다녀온것 포함 4.2km를 제한 78.2km가 1구간으로 진행한 여수지맥의 실거리가 되겠네요. 감사하고 후기가 너무 길어 죄송합니다. 저도 너무 힘들었어요. ㅠㅠ
첫댓글 수고 많았습니다 3일 연속 종주 대단하십니다
진행에 앞서 많은 공부를 하신듯 합니다
지역의 문화 해설사 수준의 세세한 산행기 멋 집니다
몇년전 진행했지만 완전 새롭습니다 감사합니다.
묵언선배님! 네~~~
가기 이전에 충분히 자료를 찾아 정리하는데도 현지에 가서 알바도 하고, 공부한거 기억을 전혀 못하는 경우도 많고, 가서 보면 순서를 틀리게 아는 경우도 많고, 새로 알게 된 궁금증도 많아 다녀와서 사진을 첨부하여 조금 더 보충하는 식으로 후기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후기가 너~~무 길어 읽기에 부담 되시죠? 그럼에도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자료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정리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풍라라님의 답사기를 보면서 징그러웠던 지맥을 다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비실이는 이젠 편안하게 방콕에서 풍라라님을 뒤 쫒아 가는걸로~~ 잘 부탁드립니다.
비실이대선배님!
설명절 잘 쇠고 계시죠?
방구들에서 비실비실 거리면 진짜 비실이가 아니죠.
비실이는 산길을 누벼야 진짜 비실이입니다.^^
여수지맥에서도 비실이 선배님 디따시만한 띠지 많은 도움 받았습니다.
이제껏 계속 보아왔지만 아무리 어려운 길도 우회하지 않고 항상 정통 맥길을 추구하셨더라구요.
비실이선배님은 접고가자고 해도 장모님이 먼소리냐며 깐깐하게 다그쳤을것 같습니다.^^
날씨가 좋아도 너무 좋았네요.
천왕봉이 고향이 여수라 한때는 자주 갔었는데.
지금은 장모님이 근처로 오셔서 갈일이 별로 없는곳이 되였습니다.
시림공원묘지에는 장인께서 계시는 곳이라 여수지맥할 때는 꼭 한번 둘러바야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여수지맥 한구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천왕봉님이 남면 금오도라면서요.^^
여수지맥 하시면선 필히 시립공원묘원에 쇠주한잔 뿌려드리고 가셔야겠네요.
제가 부뜰이운영자님 편하게 하시라고 가시나무, 명감나무 많이 잘라드렸습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요, 감사합니다.^^
대단하신 퐁라라님^^
연 삼일동안 200리 넘게 40시간이나 주파하셨네요.
날씨도 받쳐주니 남해의 정취를 듬뿍 누렸으리라 생각됩니다.
순천, 광양을 지나 여수권역으로 내려서신거구요.
순천만 주변의 풍광이 눈이 시리도록 펼쳐지니 복받은 심정이셨겠습니다.
여수지맥길에 여순사건과 이순신장군 선혈의 역사도 생각해보는 의미있는 길이었네요.
남은 구간 멋진 휘날레 기대할께요.~
수고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방장님!
뜻깊은 설명절 지내고 계시죠.
날씨도 넘 좋았고요. 그리 춥지도 않았습니다.
이번엔 띠지 41장 가져가서 20장 사용하고 두분에게 한장씩 드렸습니다.
한장은 검단산에서 내려오는 버스기사님 드렸는데 한북, 한남만 못하고 정맥까지 하신 산악회 회장님 이시더군요.
또 한장은 선소유적지 안내센터에 계신 아줌니 드렸습니다.
등산이 취미시다며 벽에 걸린 지도를 보고 여수지맥을 설명드렸더니 아주 관심있어 하셨습니다.^^
3일동안 수고많으셨습니다. 퐁라라님
준비도 꼼꼼히 하시고 산행기도 꼼꼼히
후답자 분들을 위해서 꼼꼼히 체크해주시고
머리에 지진 나시겠어요 ㅎㅎ
지맥 마무리 하시고 여유로운 굴강 구경도
하로 가시고...
지맥을 알차게 즐기시는듯 하네요 ㅎㅎ
휴무일도 주말이 아닌 일월화 로 해서
번잡함을 피하셨구요 ^^
홀산으로 즐기면서 하는 지맥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즐길수 있어 좋은듯 하네요 ^^
여수지맥 수고하셨습니다. 퐁라라님 ^^
네 다류대장님!
설명절에 가족에게 점수 듬뿍 따고 계시죠.^^
무선산에서만 등산객을 본 넘 한적한 지맥길이었습니다.
원샷원킬 욕심이 없었던건 아니었지만 요즘 운동을 그치니 철야행군할 체력이 못되더군요.
경치구경은 실컷 했으니 흐린 날도 상관없이 심야버스로 내려가 하루 더 다녀올려고 합니다.
아침 7시에 출발하여 오후 네다섯시엔 끝낼 계획입니다. 백야도는 들어가지 못할것 같구요.
감사합니다.^^
옥천군 청산의 산수(도덕봉,덕의봉,금마봉, 관모봉,삼승산)을 한 바리 하고 왔더니
퐁라라님의 산행기가 카페에 올라와 있더군요.
방대한 양이 조금 부담이 되긴 했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열독했습니다.
산행기라기보다는 '인문지리 해설서'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靑華山人의 향기가 솔솔 피어오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택리지의 복거총론에서, 지리·생리·인심·산수로 나누어 종합적인 인문지리적 접근을 시도했던....
퐁라라님의 열정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냅니다. 즐감했습니다.
범산선배님!
범산선배님 산행기에 비한다면 여기저기서 가져다 베낀 그야말로 누더기 졸작에 불과합니다.
자료를 찾아 구글에 검색하니 디지털문화뭐라던가 하는 동리 지명 소개가 자세히 나와있어 필요한 것만 옮겨왔을 뿐입니다.
너무 잘 하려고 해도 범인들의 시샘을 받고, 뒷말을 많이 하는 분들이 두려운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젠 그런걸 두려워할 나이가 지났다고 보고있고요.
범산선배님처럼 제대로 보아주는 눈도 계신 것으로 충분히 만족합니다.^^
항상 겸손하게,,,
오로지 뒤를 쫒아오는 후답자 분들이 시간을 절약하여 여기저기 자료를 찾는 번거로움을 덜어드리고자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후답자분들이 제 후기를 토대로 테마와 스토리가 있는 더 완성도 높은 후기를 작성할 수 있다면 대 만족입니다. 감사드립니다.^^
여수지맥 미사치 접속하여 길게도 가셨네요 좌우지간 응원합니다 저도 이번주 가족여행겸 1구간 입문예정입니다 잘보고 가겠습니다 화이팅입니다 ~~~~
앗! 세르파선배님, 그럼 화원지맥은 마무리 하신건가요?
여수지맥은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것 같습니다. 영산, 땅끝, 화원에 비기면 꽃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수지맥을 지나며 묘도가 궁금했습니다.
가족여행 가신다면,,,
순천만 국가정원 습지를 관람하시고,
광양시에서 이순신대교로 묘도를 건너 전라좌수영인 오동포, 여수의 진남관을 구경하심 어떨까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풍라라님..
여수지맥 수고 많으셨읍니다.
글...읽기가 압박입니다....ㅎㅎㅎ
늘...즐거운 맥길 이어가시길 응원합니다.
즐거운 한주 되십시오 ^^
감사합니다.
네 무영객형님!
설명절 잘 보내셨죠?
빼먹은 게 많은데에도... 스압이 대단하네요.^^
불필요한 부분은 건너 뛰시고 제목만 살피는 것도 요령입니다.^^
1구간에서 못다한 여수지맥 2구간에 채워넣고 있습니다. 계속 공부중입니다. ㅎㅎㅎ
와.... 힘들게 걸으신 만큼 광대한 자료입니다.
한번에 다 못 읽고 여러번 나눠서 읽어야 겨우 읽어낼 정도입니다.
대단하십니다.
매번 이렇게 무자비(?)한 3일간 집중산행 하시니 대단하다고밖에~ ㅎㅎ
올 신축년에도 행복한 산행 이어가시기 바라며 좋은 일들만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홧팅입니다~ ^^
부케님!
안경까지 쓰셨는데 의무방어처럼 힘들게 읽지 않아도 돼요.^^
순천 왜성에 붙여 묘도와 장도까지 함께 써내려가야 되는데... 생략한 부분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또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전에...
왜군이 광양만의 묘도와 장도에 드나들며 미로같은 다섯겹의 순천왜성을 축성하고, 군량미를 비축해 전쟁준비를 했다는데
그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유언에 따라 철군을 서두를 때 순천왜성에 고립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탈출시킨게 진린제독입니다. 뇌물을 받고 사천왜성에 구출을 요청하는 연락선을 묵인했다고 하더군요.
광양만에서 벌어진 순천왜성의 군사는 조명연합수군과 육군, 일본군 합해 7만여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에 그 사실이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1598년 11월 19일 새벽 관음포(노량해전)전투로 이어졌습니다. "한놈도 살아서 보내지 마라~~"
ㅎㅎ 괜히 부끄럽네요
진짜 의무감으로 읽어내기엔 너무도 방대한 양이라...
죄송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여수지맥 1구간 2구간 다녀와서 보니 정말 자세하게 기록한 산행기입니다
그저 산행기 정성스런 글에 감탄할 따름입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화이팅입니다~~~
세르파선배님! 감사감사!!!^^
여수지맥은 꽃길입니다.^^
세 군데만 힘들더군요.
사지곡길로 내림길, (야간이라 더 힘들었던듯)
창무옻닭에서 비봉산 오름길, (잠깐)
박야곶봉수대 내려서서 골프장 가는길입니다.^^ (여기가 통과하기 젤 힘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