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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聖)스러운 시험에서 ‘세계의 파괴자’로 | ||||
코드명 ‘삼위일체’ 이름 붙은 맨해튼 계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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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히로시마의 ‘충격’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뚱뚱이’(Fat Man)가 투하됐다. 겨우 3일 뒤의 일이었다. 3만9천여명이 즉사했다. 결국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했고, 전쟁은 끝이 났다. 이와 함께 1942년부터 진행된 ‘맨해튼 계획’(Manhattan Project)도 4년이라는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계획은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편지에서 시작됐다. 1939년 여름 그는 롱아일랜드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이때 나치에 쫓겨 뉴욕에 머물던 헝가리 출신의 독일 물리학자 레오 질라드가 찾아왔다.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그를 설득할 셈이었다. 당시 독일은 이미 핵분열 실험에 성공했기 때문에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을 개발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미국 과학자들은 이 점을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질라드는 독일이 원자폭탄을 개발할 것이라고 확신했고, 이를 저지하려고 했다. 생각 끝에 그는 아인슈타인이 벨기에 왕궁과 친분이 있다는 점을 이용하기로 했다. 아인슈타인이 벨기에 왕궁에 편지를 보내 벨기에령인 콩고의 우라늄광이 독일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요청하도록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질라드와 친분이 있던 알렉산더 작스는 더 좋은 방법을 제안했다. 아인슈타인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직접 편지를 띄우는 것. 작스는 루스벨트의 비공식 자문관이었기 때문에 그 편지를 전달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아인슈타인은 기본적으로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주의자였지만 가공할 위력의 원자폭탄이 독일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질라드의 설득으로 1939년 8월 2일자로 미국의 우라늄광 확보와 원자폭탄 실험을 장려하는 편지를 작성했다. 9월 1일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고, 그의 편지는 10월 11일 루스벨트에게 전달됐다. 루스벨트는 이 편지를 계기로 즉시 우라늄 위원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원자폭탄 실험에 6천달러라는 ‘소박한’ 규모의 예산만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1941년 12월 진주만이 공습을 당하면서 맨해튼 계획에 발동이 걸렸다. 미국이 전쟁에 직접 참전했기 때문이다. 1942년 초 미국내에는 독일과의 원자폭탄 개발 경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됐고, 과학자들 사이에도 독일이 선두에 나설 수 있다는 두려움이 확산됐다. 마침내 1942년 8월 루스벨트는 맨해튼 계획을 승인했다. 맨해튼이란 이름은 당시 핵분열에 관한 연구가 주로 뉴욕의 맨해튼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붙여졌다. 2백억달러가 넘는 거금이 투입된 원자폭탄 개발이 공식적으로 시작됐다. 맨해튼 계획은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됐다. 미국민들은 물론 의회에도 비밀에 부쳐졌다. 심지어 원자폭탄 투하 결정을 내린 트루먼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맡기 전까지는 맨해튼 계획의 존재 여부조차 몰랐다. 맨해튼 계획이 실패할 경우 감당해야 할 정치적 책임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었다. 특히 원자폭탄의 성능을 시험하는 일은 비용이나 안전성의 측면에서 위험천만한 작업이었다. 플루토늄은 우라늄에서 인공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가격이 비싸고 한번 얻기도 힘들어 시험이 실패한다면 거액을 고스란히 날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시험 장소 인근의 농부들을 대피시키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원자폭탄 폭발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방사능 낙진은 어느 정도인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원자폭탄 성능 시험은 시작됐다. 코드명 ‘삼위일체’(Trinity)라는 성스러운 이름이 붙여졌다. 시험을 지켜보는 이들은 모두 바닥에 엎드려 얼굴을 아래로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아무도 이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 사진 기자들에게는 용접용 안경에 자외선 차단 로션이 지급됐을 뿐이었다. 무방비 상태로 원자폭탄의 구름 사진을 촬영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쨌든 1945년 7월 16일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 실험은 성공했다. 뛰어난 과학자들과 무한정의 예산 지원에 요행까지 결합된 ‘삼위일체’가 이뤄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맨해튼 계획은 마지막까지 잡음이 많았다. 원자폭탄 개발이 끝나갈 무렵인 1945년 6월 폭탄의 사용 여부를 두고 과학자들의 의견이 갈렸다. 사실상 맨해튼 계획을 탄생시켰던 장본인인 질라드가 이번에는 원자폭탄의 사용을 반대하고 나섰다. 일본을 투항시킬 목적으로 원자폭탄을 사용한다면 이후 미국은 러시아와 원자폭탄 무기 개발 경쟁을 벌이게 될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반면 맨해튼 계획의 책임자였던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전쟁을 끝내는 데는 원자폭탄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고 주장했다. 흥미로운 점은 원자폭탄의 투하를 찬성한 과학자들 대부분이 나가사키 폭탄투하에 대해서는 즉각 반대했다. 원자폭탄의 가공할 파괴력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원자폭탄은 과학자들의 손을 벗어나 있었다. 결국 오펜하이머를 비롯해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자신을 ‘세계의 파괴자’라며 자책할 뿐이었다. 특히 연합군이 독일을 점령한 후 밝혀낸 독일 원자폭탄 개발팀의 연구진척 정도는 미국의 과학자들에게 알려졌던 내용과는 달리 우라늄의 핵분열 반응에도 성공하지 못한 수준이었다. 박진희 박사는 2003년 독일 베를린공대에서 기술사를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물리학 환상여행’‘철도여행의 역사’ 등을 번역하기도 한 필자는 기술의 발전이 인류에 미친 영향에 대해 관심이 많다. 10년이 넘게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 독일의 완벽한 철도체계가 가장 인상 깊었다고. |
첫댓글 좋은 정보에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