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겨나기엔 너무 젊은…재입사엔 너무 늙은…30代 명퇴
구조조정 전 연령층 확산 … '열외' 없어
KT 명퇴자 5505명중 30代가 532명
승진 못한 대리들 정리 '계급정년'도
한국 사회가 초유(初有)의 ‘30대 명예퇴직 시대’로
접어들었다.
IMF 위기 직후에도 30대는 비교적 구조조정의 안전 연령층에 속했지만, 한국의 직장에서 30대는 더이상 ‘열외(列外) 대상’이 아니다.
38세의 L모씨는 얼마전 우리금융 계열사 ‘우리CA자산관리’에서 명퇴했다. 바로 옆자리에서 근무하는 인사담당 후배로부터 “(명퇴) 대상이 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15개월치 월급을 명퇴 위로금으로 받은 L씨는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 회사 명퇴자 14명 중 30대는 L씨를 포함해 4명이나 된다.
◆연령불문 명퇴바람=‘구조조정의 찬바람’이 불고있는 여의도 증권가에는 ‘30대 명퇴’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공적자금 재투입이 거론되고 있는 한국투신증권은 올
상반기 중 144명의 직원을 내보냈다. 이 가운데 30대
명퇴자는 54명. ‘흔들리는 중년’으로 취급되던 40대(51명)와 50대(13명)를 제치고, 30대가 명퇴 연령층 1위로 올라선 것이다. 대한투신증권과 제일투자증권도 명퇴자의 20% 이상을 30대로 채웠다.
이달 초 ‘300명 감축 목표’를 밝힌 우리은행의 구조조정 리스트에는 30대 대리급이 100명 가량 포함되어
있다. 무려 5505명의 명퇴자를 낸 KT에선 희망퇴직자
중 532명이 30대였다. ‘30대 명퇴’는 이제 대부분의
산업현장에서 목격되는 현상이 됐다.
◆승진 늦으면 명퇴대상=30대 명퇴가 늘어나는 것은
기업들 인사시스템이 바뀐 결과다. 주로 나이 많은 직원들을 타깃으로 삼던 과거의 명퇴 시스템은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 대신 전 직급에 걸쳐 고르게 인원을 감축하는 서구형 시스템이 들어섰다.
우리은행이 대상으로 삼은 30대 명퇴 대상자는 4급 12호봉 이상으로, 고참 대리들이다. 동료들보다 승진이
4~5년 늦은 은행 대리들에게 일종의 ‘계급 정년’을
적용하겠다는 뜻이다.
우리은행 조성권 홍보팀장은 “직원들이 안 따라줘 성과를 제대로 못 내면 당장 내 연봉이 깎인다”며 “철저히 성과를 따져 인사를 할 수밖에 없고, 명퇴 대상도
마찬가지 기준에 따라 선정된다”고 말했다.
한국투신증권의 명퇴 구조 역시 임원·지점장·차장
등을 고르게 솎아내 조직의 골격이 유지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한투증권 송돈규 홍보팀장은 “인사담당
직원 자신이 명퇴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철저히
계량화된 성과에 따라 명퇴 대상자를 선정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창업 전선으로=30대 명퇴자들은 “아직 젊지만, 재취업을 하기에는 나이가 많다”고 털어놓고 있다. 대기업에는 들어갈 자리가 없고, 중소기업도 실무라인에
들어가기에는 나이가 많다는 것이다. 최근 금융기관에서 명퇴한 김모(39)씨는 “대부분 동료들이 재취업을
원하지만, 실제로 직장을 다시 잡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래서 30대 명퇴자들 가운데는 창업의 문을 두드리는
경우가 많다. 한국창업지원센터 고종옥 소장은 “올
여름 이후 특히 30대의 문의 전화가 부쩍 늘었다”며
“30대들은 1억원 정도로 시작할 수 있는 아이템을 구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30대 후반들이 많이 찾는 인터넷 사이트 명퇴닷컴(www.myungtoe.com)에도 이런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 사이트를 관리하는 최익준 팀장은 “재취업보다 창업정보 조회 회수가 더 많다”고 전했다.
(박종세기자 jspark@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