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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선스님 서예문인화 원문보기 글쓴이: 心虛堂 定禪.
[사미자 보살님의 특별법문]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감사합니다.
저는 많은 강의를 다녔지만 이렇게 편안한 자리에서 여러분과 같이 격의없이 하게 해주신
주지스님 감사합니다.
저는 사미자예요.
지금까지 47년 동안 화면에서 늘 이런 역할, 저런 역할로 여러분들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영화에서도 하고 그래서 저는 나이는 먹었지만 목소리가 나긋나긋하고 항상 얼굴에는 웃음이
방글방글 피어납니다.
여러분이 저를 보시기에는...
“저 여자는 무슨 복이 많아서 저렇게 항상 우아한 역할로 부잣집 할머니로 저렇게 우리를 즐겁게
해 주나.... 아마 부잣집에서 고생도 하나도 안하고 잘 살았을 것이다.“라고 여러분 생각하시죠?
우리 인간이 이 땅에 떨어졌을때 모든 사람이 “너는 잘 살아라.”하고 주시지는 않아요.
모든 역경을 겪고 희노애락을 겪으면서 우리가 그것을 박차고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가는 용기를
주고 인생을 살라는 법도하에 우리가 태어 난겁니다.
저도 그렇게 넉넉한 집에서 잘 살도록 태어나지를 못했어요.
아주 가난 속에서 태어나서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이 자리에 서서 제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가?
역경을 어떻게 헤쳤는가를 여러분과 같이 얘기해보자 이렇게 섰습니다.
제가 오늘날까지 이렇게 살면서 가정을 많이 보면 부모가 강하면 절대 그 집안이 쓰러지지 않아요.
아빠보다는 엄마가 더 강하고 엄마가 더 모성이 강하면 그 집안은 절대 쓰러지지 않습니다.
여기 오신 여러분들 보니까 그 신심으로 가정을 얼마나 행복하게 잘 이끄셨습니까?
물론 역경도 겪으셨을 테지만...
엄마들이 강해야 그 집안의 자식들도 잘 헤쳐 나가게 되어 있어요.
제가 보니까 거의 98%는 그렇게 돼.
물론 아버지의 역할도 크겠지만 엄마가 제대로 된 집안은 절대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렇죠? (신도님들 다 함께 큰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여기 많은 엄마들이 오셨어요.
30대부터 층층이 연령대별로 많은 분들이 오셨는데 우리 엄마들 어디 나가셔서 박수 못 받아 보셨죠?
여러분들은 강하고 여러분들 때문에 가정이 잘 유지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의 신심이 오늘날까지 잘 이끌어 건강하게 사시게 만들어 주시는 겁니다.
그런 뜻에서 우리의 기를 북돋아 주는 의미에서 얼굴 마주보고 박수 한 번 힘차게 쳐 주세요.
(신도님들 모두 큰 박수)
여러분은 박수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예요.^^네. 여러분은 앞으로 정말 좋은 일 많으실 거고
행복하실 겁니다.
더 중요한 것은 건강하셔야 되겠죠.
여러분이 박수치는 만큼 건강해지세요.
두 손바닥이 마주보고 치면 혈액순환이 잘 된데요.
그 박수 나도 좀 받은 걸로 알고 이제부터 네 얘기를 시작할까 해요.
저는 아까도 조금 언급했지만 가난한 집에서 가난한 시기를 겪고 오늘날까지
살아온 사람이예요.
제가 열 살 때 6.25가 일어났어요.
우리 집이 밥은 조금 먹고 살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까 우리 엄마 과부가 삼남매를
데리고 그 무지막지한 전후의 고생을 하게 되었는데 옛날 어른들 그렇잖아요.
아들만 잘 되어야 하기에 두 아들을 어떻게 하던지 대학공부를 시켜야 하니까 막내 딸인 저에게
까지 손길이 펴지지가 않았어요.
초등학교 겨우 졸업하고 중학교를 들어가야 되는데 좋은 학교에 덜커덩 붙었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입학금을 내주지 않아. 없으니까....
딸내미는 그냥 초등학교 졸업했으면 됐지 뭘 중학교까지 보내야 되나. 엄마 너무 힘드니까...
어린 나는 옛날부터 끼가 많았어요.
남들 하는 것 흉내도 잘 내고 친척들 오면 흉내도 잘 내고 라디오 들으면 옛날 가수들 노래를 따라
부르고 그랬어요.
우리 집에서는 저를 아주 별종으로 취급을 했거든요.
옛날에는 텔레비전이 있었습니까? 라디오만 들었지...
옛날 가수들 노래를 하면...
쌍 고동~~~~(직접 노래를 불러 주셨습니다.)^^
여덟 살짜리가 이런 것을 따라 했으니까...ㅎㅎ
그런 것을 따라 했으니까 끼는 많았지...
이건 뭐 초등학교만 졸업해도 저의 밥벌이는 하겠거니 생각했는데 중학교 입학금 낼 날짜가
임박했는데도 엄마는 모른 척하고 지나세요.
난 그것이 너무 슬퍼서 열세 살 어린 나이에 엄마 등만 쳐다보면서 눈을 마주치려고 했지만
엄마는 할 수 없으니까 애써 나를 외면하더라구요.
우리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행주치마를 늘 앞에 두르고 사셨어요.
우리 엄마가 휙 지나가면 행주치마 냄새가 아주 코끝을 싸하게 만들어.굉장히 슬픈 냄새가 났어요.
엄마의 살림냄새도 나고 설거지통 구정물 속에 손을 담갔던 냄새가 나고 내가 나갔다가 울다
들어오면 “아이고, 우리 딸 울지 마라.” 그러면서 눈물 닦아주던 콧물이 범벅된 행주치마를 보면
지금도 그 냄새가 그리워져요.
지금도 그 행주치마가 있어요.
옛날 행주치마를 보면 이러잖아...
정든 님이 오셨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방긋....(노래로 들려주심)^^
됐어요. ^^ 이런 법당 안에서 이런 노래를 하다니...^^
그런 행주치마가 아니예요.
그 행주치마는 멜로드라마가 있는 행주치마지요.
정든 님이 오셨는데 차마 새색시가 비단 저고리, 치마를 입고 하얀 옥양목 행주치마를 두르고
동백기름 발라서 쪽 예쁘게 짓고 낭군이 한양에 볼일 보러 갔다 왔는데 반가워서 나가서 얼싸
안았으면 좋겠는데 시부모님 눈이 무서우니까 차마 나가지 못하고 부엌 문고리를 잡으면서
옆눈으로 한 번 보고서 방긋 웃는 그 모습...그것은 아름다운 그림이 연상되지요.
우리 엄마 행주치마는 그게 아니야.
슬픔이 묻은 그런 행주치마였어요.
지금도 그런 행주치마만 보면 “우리 엄마”하고 엄마를 그리게 됩니다.
마지막 입학금을 내는 날에 제가 생각하기에 금요일이 되었을 거예요.
엄마가 외면을 하시다하시다 저 하고 눈이 마주쳤어요.
“엄마” 하고 부르니까...
우리 엄마가 “에이고” 그러더니...
행주치마를 마루 끝에 팽겨치고 “가자” 그래요.
엄마를 따라서 갔어요.
우리 엄마는 키가 조그마한 분인데 참 예쁘셨어요.
우리 엄마가 예쁘니까 나도 예쁘지요.^^
우리 엄마가 옛날 분 치고는 너무 아름다웠는데 쪼그려져서 그때 할머니가 걸어가는 거야.
우리 엄마는 무학이셨어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시는 분인데...
자식 셋을 데리고 생활을 하니까 생활에 대한 현명함이 깃들어져 있는 분이예요.
제가 이화를 나왔거든요.
이화여중 들어가시더니 여기 돈 내는 곳이 어디예요.
서무과장이 나오시는데 그 앞에서 90도로 절을 하면서 “얘가 내 딸인데 내가 입학금 낼 돈이
없어서 이렇게 왔습니다. 제가 농사를 짓는데 가을에 쌀 팔아서 외상으로 좀 받아주십시오.“
등록금을 외상으로 받아 달래요.
여기도 좋은 유치원도 있는데 주지스님이 좋게 다 선도하시죠?
제가 나온 그 이화도 서무과장님은 지금까지도 내 마음의 기둥이예요.
“아, 그러세요. 참 똑똑하게 생겼구나!“
“이걸 써줄테니까 월요일 입학식에 내보내세요.“
통과 되었어요. 돈 한 푼 안 내고...(신도님들 큰 박수)
제가 이화여중 이라는 곳에 외상학생으로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학교를 열심히 다니는 거예요.
그 해 가을이 되었습니다.
쌀을 팔아서 우리 학교에 돈을 갚았으리라 생각했지요.
우리 엄마는 오빠 등록금이 먼저예요.
등록금 내고 나니까 우리 먹을 쌀 한 가마니 남겨놓고 나니 없어요.
그럼 나는 학교를 어떻게 다녀... 학교가면 매일 눈치를 보는 거예요.
제가 눈이 아주 컸습니다. 지금도 크지만...^^
그 때 눈치 보느라고 힐끗힐끗 봐서 눈이 큰 것이 줄어들지 않고 아직도 있어요.
이렇게 눈치보고 저렇게 눈치보고 1학년이 무사히 넘어가고 2학년이 되니까 선생님이 바뀌니까
나를 불러요. 이제 큰일 났구나!
“사미자”“네, 선생님”
“너 공부 조금만 더 하면 내가 장학생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텐데...”
여자 담임선생님이 그러세요.
어린 마음에 공짜로 공부할 수 있다니까 정말 눈에 불이 붙어요.
내가 螢雪之功형설지공이라는 것을 그 때 알았어요.
옛날에는 전기 값이 얼마나 아까웠어요.
전기 닳는다고 엄마는 늘 불을 꺼라고 그래요.
10시만 되면 15촉짜리 전구를 꺼야 돼요.
나는 책을 들고 나와 달빛아래서 공부를 해.
형설지공螢雪之功이 반딧불과 눈빛으로 공부를 해서 성공한다는 뜻 아닙니까?
달빛으로도 공부할 수 있었어요. 달빛...
달빛으로도 하고자 하면 된다구요.
그런 말이 있잖아요.
[자면 꿈을 꾸게 되지만 자지 않으면 그 꿈을 이룰 수 있다.]
그 좋은 말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그것을 열네 살에 터득을 했어요.
달빛아래서도 공부를 할 수가 있구나!
그렇게 열심히 하니까 성적이 오르지요.
벼락공부를 해서 성적이 오르니까 중학교 3학년까지 졸업을 하고 고등학교까지 들어갔지요.
여러 가지 주위 여건에 의해서 공짜를 많이 받고 살아 왔습니다.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공짜가 너무 많아서 그것을 다 보답하면서 살아야 돼요.
고등학교를 갔는데 제가 생각할 때 엄마가 딱 한번 쌀 두가마니를 팔아서 내주셨어요.
그때는 떳떳하게 다녔는데 그 다음부터는 등록금 안낸 사람 하면 사미자 이름이 제일 앞에
부르는 거야. 그것이 부끄러워서 정말 학교 다니기 싫었어요.
고등학교 2학년이 되니까 고3으로 편성이 안 돼. 고3으로 올라가지를 못해요.
그게 너무 마음이 쓰여서 편두선이 부었는데 보름이 지나도 학교 보낼 생각을 안 하는 거야.
내 인생은 고졸에서 딱 끝나는 거죠.
우리 담임선생님이 반장을 데리고 집으로 찾아 오셨어요.
“사미자, 너 아프구나.!”
선생님을 보니까 눈물이 막 나오는 거야.
“학교 나와야지. 고3 예비반이야. 자식이 말이야.” 그러고 가셨어요.
선생님의 뒷모습은 저한테서 정말 부처님과도 같은 햇빛을 봤어요.
선생님 덕분에 고등학교를 잘 다니게 되었는데 선생님께서...
“너 앞으로 희망이 뭐냐? 앞으로 대학교 어느 대학교 갈 거야.”
“선생님, 저 대학교 못 가요.”“대학교를 가야지, 왜 못가.”
“저는 배우가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오 그래, 내가 네 재능을 몰랐구나. 국어책도 잘 읽고 남의 흉내도 잘 내더니 배우가 되어서
꼭 학교에 와서 한 번 뽐내라.”
그 말씀은 학교에 그 동안 밀린 등록금 좀 갚아라.^^ 하는 말뜻으로 새겨들었습니다.^^
딱 두 번의 학비를 내고 이화여고를 졸업했어요.
얼마나 대학을 가고 싶었던지 친구가 대학교 시험 보는데 따라 갔어요.
그 날 1958년도 3월이예요.
진눈깨비라 억수로 쏟아지는 3월 이화여대 앞을 갔는데 수험표가 없다고 못 들어가게 하고 모두
들어갔어요.
“내 친구는 시험을 잘 보겠지.... 잘 보겠지...” 그러고 진눈깨비를 맞고 있는데...
시험지가 나오더라고....
어떤 남자가 시험지를 걷어서 동생이 보러갔는지 체크를 해요.
“아저씨, 저도 좀 보여 주세요. 했더니 나를 예쁘게 보았는지 보여 주었어요.
그 진눈깨비를 맞으면서 시험문제를 끝까지 풀었어요.
“내가 저 안에 들어갔다면 나는 이 학교에 붙는 것인데...가난이 뭔지 여기서 접자.”
접고 내 꿈을 이루도록 해 보자.“ 그랬는데...
다른 마음속에 “아니야, 넌 이대 붙은 거야. 그렇게 다 맞았는데 왜 못 들어가니...”
친구는 불문과에 붙었대. 내 성적이면 영문과에 붙었을 거야.“ 그랬더니...
“너 나랑 같은 반에 들어갈래...” 그래서 친구 따라서 이대를 다니기 시작했어요.
나는 은밀히 따지면 도둑님 학생이예요.^^
나는 엄마한테 늘 감사하고 살지만 그 때는 인물이 너무 피어 있었어요.
교수님이 들어오시면 훑어보다가 딱 내 얼굴에서 스톱을 해요. 그럼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아.
교수님이 등록금도 안 내고 공부하지...이러실까봐 고개를 숙이는 거야.
사람이 반듯하게 자라도 공부를 해도 제대로 해야지 중, 고등학교는 두 번 학비내고 겨우 졸업을
하고 대학교가서는 도둑님 짓을 하고 살았으니 얼마나 어린 가슴이 매일 졸이고 살았겠수?
그렇게 한 5. 6개월을 다녔나 봐요.
나는 지식의 도둑질은 도둑질이 아니야. 라는 생각도 했지만 돈 안내고 훔치는 것은 도둑질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니까 못 다니겠더라고...
학교를 접고서 배우가 되어야지... 배우가 쉽사리 되는 것은 아니예요,
그러다 어영부영 하다가 남자를 만났는데 자기가 가난하면 남자라도 좀 잘 사는 사람을 만나서
방이라도 한 칸이라도 얻어 주는 대로 가면 우리 엄마 가슴을 아프게 하지 않을텐데...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하고 눈이 만났으니 우리 엄마가 얼마나 가슴을 쳤겠수.
“아이고, 너무 마음에 안 들어. 너만은 잘 살줄 알았더니 어떻게 저런 사람을 데리고 왔냐?“
그러고는 막상 사윗감이 오면 따뜻한 밥을 지어서 먹여 보내고 가고 난 다음엔 마음에 안 든다고
하시면서 행주치마로 코를 팽 푸시는 거야.
그러거나 말거나 정이 들었는데 어떻게 또 배반을 해요.
같이 살아가면서 큰 딸을 낳았는데 걸핏하면 쌀이 떨어지는 거야.
나는 원망할 줄도 모르고 그냥 좋은 거야. 눈 맞으면서 밖에서 연탄불 피워 놓고 밥을 하면서도
좋은 거야. 서방이 좋은 거지...
쌀이 떨어지면 애를 들쳐 업고 엄마한테 가요.
엄마는 딸이 쌀 떨어지고 연탄 떨어졌는지 바로 눈치 채시는 거야.
“엄마”하고 가면...
“에이그” 또 한숨...
그 놈의 에이그 소리... 난 지금도 웬만하면 에이그 소리 안 해.
“에이그” 이거 하지 말아야 돼. 가슴에 못이 박혔어.
“애 뉘어라.” 그럼 엄마는 따뜻한 밥을 지어 주세요.
우리 엄마는 내 생일 때 한 번도 미역국을 끓여주신 적이 없어요.
왜 미역국을 안 끓여주셨나? 나는 그게 의문이야.
제 생일이 5월 8일이거든요.
그 때가 꼭 조기철이예요.
조기를 사다가 알 밴 놈을 사다가 조기국을 끓여서 밥상에 오르기 직전에 쑥갓을 넣어서 먹으라고
갖다 주세요.
몇 번은 그렇게 해서 먹었는데...내가 먹으면 우리 엄마가 저기서 침을 삼켜.
내가 다 먹으면 우리 엄마가 못 잡숴. 나는 이렇게 보다가 나는 알배기만 흐트려 놓고 국물 두 번
떠먹고 “ 아이 맛있어. 엄마, 배 불러.”
‘애야, 그걸 다 먹지. 왜 남겨.“
“엄마, 잡숴요.”
흐트러진 생선이 있는 찌개는 다음 밥상에 다시 오를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엄마가 잡숴요. 난 그것이 효도로 알았어.^^(신도님들 큰 박수)
네, 감사합니다.
시집을 살면서 못 살고 들어오면 쌀밥을 해 주셔요.
너무 철이 없었어.
“그걸 먹으면서 조기국 없어요. 조기국...”
“애야, 철이 언젠데 조기국이 있냐? 미역국 끓여주마..”
아무것도 안 넣고 간장만 넣고 끓이는데도 어쩜 엄마의 솜씨는 그렇게 맛있었던지...
“엄마, 쌀 떨어졌어. 가야 돼.”
“밤에 어두운 다음에 가.”
“엄마, 지금 가야 전차도 타고 가지..”
에이그, 다들 너 잘 사는 줄 아는데 쌀을 끼고 가는걸 보면 동네사람한테 창피하단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 엄마는 참 현명하신 분이야.
저녁에 남편한테 연락해서 옆구리에 끼고 가는 거예요.
한 번은 끼고 가는데 눈에 미끄러져서 넘어지는 바람에 쌀자루 아가리(입구)가 탁 터진 거예요.^^
꼭 양재기에다 열 개를 퍼서 주세요. 그게 얼추 한 말이야...
그걸 옆구리에다 끼고 오다가 터졌으니 반은 눈 속으로 흩어졌지요.
슬픈 일인데도 그 때는 너무 깔깔거리고 웃었던 거야.
우리 엄마가 주신 쌀이 흩어졌으니 얼마나 아까워요.
그것을 주워 담으라고 했더니 눈 속에 있는 쌀을 어떻게 주워 담는냐고...
겨우 반만 건져서는 엄마한테는 말도 못하고 그런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제가 드디어 이래서는 안 되겠다. 이런 가난을 예쁜 딸한테까지 넘겨줄 수는 없다.
나도 직장을 가져봐야 되겠다. 하고 찾는 도중에 동아방송에“성우모집”이라는 걸 봤어요.
성우도 배우의 일종이니까 한 번 해보자. 그러고 가서 천 오백명이 왔는데 그 중에 오십명이
붙었는데 제가 끼었어요.
열심히 교육을 받는데 그때 미혼 남, 녀에 한해서 자격이 있었거든요.
이미 나는 애 엄마인데 또 속이고 들어간 거야.
한 번은 수위아저씨가 오더니 누가 “사미자”를 찾아왔어요.
나가보니까 우리 엄마가 내 딸을 업고 오신거야.
“아이고, 나는 앞이 캄캄해, 엄마, 애를 업고 오면 어떡해. 나를 처녀로 아는데 애가 있는 줄 알면
당장 쫓겨나.“
“어떡하니 애가 우유도 안 먹고 보채서 왔다. 미열도 좀 있고...”그 때 나는 딸보다는 내 앞길이 더
중요했던 거야. 엄마를 화장실로 밀어 넣었어.
빨리 먹어. 엄마가 마음이 급하니까 젖도 잘 안 나와.
우리 아기는 엄마를 보니까 너무 좋은 거야. 6개월밖에 안 된 애기가 젖꼭지만 굴리면서 안 먹는
거야. 빨리 먹어 들키면 큰일 나 하는 도중에 우리 엄마가 앞으로 고꾸라지셔.
문이 열리는 순간 어떤 여자가 들어왔는데 그게 전원주야.^^(신도님들 박장대소 하면서 큰 박수)
전원주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는데 우리 엄마는 넘어졌지, 나는 애를 안고 넘어졌지..
전원주도 놀라고 나도 놀라고...처녀인줄 알았는데 애 젖을 먹이고 있으니...
“원주야, 얘기하지 말아줘.” 얘기 안 할 줄 알았지.
겨우 젖을 먹이고 있는 대로 없는 대로 엄마한테 구박을 해서 내 보내고 문을 열고 나가니까
연습생 성우들 한 50명이 딱 서 있는 거야.
가서 다 분 거야. “사미자 애 엄마야, 애 엄마... 젖 먹이고 있다고...”
이것이 제작부한테 다 퍼졌어요.
아침에 책임자가 오래요.
기왕지사 들킨 것 우리 딸을 업고 갔어요.
난 나쁜 짓 한 것도 아니고 속이고만 들어온 거야.
“여기 앉아요.”
앉아서 애기를 내려서 안고 있는데 “어떻게 할 거예요?”
우리 아기가 방긋 웃어요. “ 아가, 이 아저씨가 굉장히 무서운 아저씨야. 아저씨 안녕 해봐.“
6개월짜리가 알아듣고 잇몸을 내고 방긋 웃은 거야. 그 사람한테...
방긋 웃으니까 아기의 천진난만한 웃음에 “너 관둬라.” 할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
“내일 연속극 녹음할 것 있으니까 나와서 녹음해요.”그러고 가더라구요.
우리 딸이 나를 살렸어요. 딸이 나를 살렸어.^^
성우 수입만 가지고는 먹고 살기가 힘들겠더라구요.
우리 남편은 내가 얘기를 안 해.
얘기를 해 봐야 같이 고생하고 같이 못 벌었으니까 얘기해봐야 소용없어요.
내 얘기만 하는 거예요.
사미자가 인물이 좀 반반하다 그러니까 텔레비젼에서 배역을 놓고 저를 스카웃했어요.
한 번만 출연하면 우리 식구 열흘을 먹을 수 있어요.
쌀 한말하고 연탄 열장만 사면 되거든.
어떤 날은 배역을 못 받는 날은 차비도 없어 집에 걸어오게 되고 희망이 없는 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사도 6개월에 한 번씩 갔어요.
지금은 2년이지요. 지금은 좋은 세상 이예요. 옛날에는 6개월에 한 번씩 가..
애 둘이 있다고 하면 받아주지도 않아요. 방 하나를 얻더라도 애가 하나라고 속이고...
나는 어떻게 속이는 일생같아.^^
애가 둘이라 한 번은 방 두 개짜리로 신수동쪽으로 옮겨갔는데 거기는 기찻길이 연탄을 실어
나르는 기찻길이예요.
애들 집에다 두고 방송국 나갈 때는 걸어가야 하니까 일찌감치 나가야 돼요.
애들한테 아랫목에다가 김밥을 해서 큰아이 열 개, 작은아이 열 개 이렇게 해서 묻어놓고 물
떠다놓고 아이를 두고 나가려니 얼마나 발길이 무거웠겠어요.
어느 날 나갔다가 방송국에서 일도 없고 해서 들어오는데 기찻길을 건너가는데 우리 애들이
저쪽에서 “엄마”하고 쫓아 나와요.
애들 얼굴이 연탄 거기서 놀아서 시커먼데다 눈물 흘렸지 콧물 흘렸지 줄이 좍좍 그었지
두 애들이 거지자식마냥 뛰어드는데 껴안으면서 눈물이 막 났어요.
“내가 여기서 주저앉으면 약한 엄마밖에 안 된다. 이걸 계기로 내 자식한테는 더 이상 가난을
물려주지 말자. 여기서 희망을 찾자. 내일은 뭔가 달라질 거야.“
그런 마음을 먹고 애들 둘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집이 환전 폭풍이 지나갔어.
동네 애들이 들어와서 앨범은 다 뜯어 놓았고 이불은 밥풀이 다 묻어 있었지
먹으라는 김밥은 동네 애들한테 빼앗겼는지 배고프다고 울지...
정말 절망밖에 없었어요.
여기서 찾자. 희망을...
그때 생각난 것이 우리 엄마의 행주치마...
나는 에프런을 앞에 둘렀어요.
그 상황이 ...에프런 자락 입에 물고 입만 방긋....(노래로 들려주심)
이것이 아니예요.
눈물의 에프런을 메고서 우리 애들에게 씻기고 따뜻한 밥을 해서 먹이고 애들을
위한 엄마가 되자. 엄마가 강해야 된다.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까 눈물도 안 나와요.
신수동에서 중앙일보까지 걸어가려면 한 시간이 걸려요.
왜 그 놈의 신발은 자주 떨어지는지 몰라. 그냥 가는 거야. 희망을 찾아서 걷자. 걷자....
그런 세월이 지나고...지나고....
여섯 번인가? 아홉 번 ...결혼하고 8년 만에 아홉 번 이사한 다음에 불광동에 조그마한
집을 사게 되었어요. 열 네평짜리...
우와~~~궁전이야.
29살에 집을 마련했는데 궁전이예요. 그 집을 만지기도 아까워.
세상에! 방 두칸에다가 화장실, 마루 조그마한 것 달린 곳에서 연탄을 떼는 부엌에서 밥을
해도 즐거운 거야.
장 떠로 간다.~~~~(노랫가락으로 불러 주심)
너무 너무 행복한 거예요. 애들이 떠들어도 괜찮고 애들이 뛰어 놀아도 옆집에서 뭐라고
하지 않고 주인집에서 나가라 하지 않고 마음대로 떠들어라. 이제는....
“우리 부자야. 집 있어. 어디 가서 기죽지 말고 마음대로 떠들어. 대신 바르게
자라야 된다.” 아주 용기있는 엄마로 시작한 거예요. 그때부터 욕심이 차츰 생기게 되지요.
재물의 욕심이 생기는 거라...
제가 맨 처음 은행에 갈 때 1965년도쯤 만원을 만들기 위해서 십원, 백원, 이백원
다 모아서 갔더니 9천얼마야. 만원을 만들기 위해서 천 얼마를 겨우 가져가서 만원이 되게
해 주세요.
은행직원이 나를 이렇게 쳐다봐요. 난 부끄러웠지.
그러나 나는 만원이 백만원이 되고 천만원이 되고 일억이 된다. 그 첫걸음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어요.
아주 현명했어요. 가난을 알았으니까...
난 집을 가졌으니까 이제부터 재물단지를 모우는 거야.
고추장 단지를 마음속에 만들어서 거기다가 모우는 거예요.
단지가 차기 시작하기에는 몇 년 걸렸지요.
내가 예상한 것이 이거니까 다음에는 된장단지로 한 번 옮겨 가보자.
열심히 일해서 된장단지가 차고 이왕이면 한 섬짜리 간장단지로 꿈을 키워보자.
잘 될 줄 알았지.
이 세상이 내가 마음먹은 대로 다 나간다면 살맛이 그렇게 있겠어요.
임금님이라고 다 행복하고 그럴까?
난 간장독을 다 채울 거야. 욕심을 과하게 먹는 순간에 돌팔매를 당하는 거야.
다 깨져버려.
인간이 잘 살라고 되지는 않아요. 주위에서 꼭 마가 끼고 있어요.
남편도 그래요. 사업을 한다고 자기가 벌어서 해야지 여자가 버니까 사업 밑천을 대줘야 되잖아.
대주면 잘되면 자기가 나한테 얼마나 좋겠어요.
안 돼. 속으로 원망만 꽉 차서 어떡하나... 그렇게 사업을 몇 번을 대주다 보니까 세월이 흘러서
어느 정점에 와서 섰는데 사람이 가장 욕심이 많을 때가 사십대 말에서 오십대로 될 때 제
인생은 그래요. 욕심의 절정이 생겨요. 여자로서...
나는 욕심이 많아서 아이들 둘을 너무 가난한 시절에 낳았지만 막내아들 하나 만큼은 정말
여자로서 축복받는 출산을 하고 싶어서 그때 36세에 막내를 가져서 낳았거든요.
하얀 시트에 옆에는 꽃으로 만발하고 레이스 커튼이 있는 침대에서 아기를 낳으면 남편이 와서
병원비도 내주고 이런 산모가 되고 싶었어요.
큰아이, 둘째아이 때는 미역국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했으니까 미역국도 끓여주고 여인으로서
그런 사치를 한 번 맛보고 싶어서 막내를 낳았거든요.
낳으니까 내 마음대로 되었어요. 남편이 병원비도 내주고 사람들 시켜서 목욕도 시키고
여인으로서 가장 행복할 때가 이 시기구나.
막내 낳고는 영화도 안한다. 탤런트도 안한다. 은퇴 이러고 딱 들어앉았어요.
딱 들어앉은 그 말하는 순간 삼칠도 안 되서 기가 막힌 배역이 들어온 거야.
나는 이제 일 안 해 여보. 죽어도 당신이 한 달에 만원을 벌어다 줘도 좋고 백만원을 벌어다 줘도
좋고 그걸로 살 거야. 일 안해. 그랬는데 ...
삼칠일 만에 배역이 들어 왔는데 너무 마음에 드는데 내가 한 말은 있고 “이것 못합니다.“
하고 말했어요.
그 감독이 사미자가 안 한다고 하면 다른 사람을 시키면 되는데 전화가 오고 난리예요.
“이건 네가 할 건데 왜 안 오냐고...”
‘애를 낳고 내가 어떻게 하냐고...“그러니까
애 낳고도 치마를 두르고 하니까 괜찮다고 하라고...사흘을 싸운 끝에 “합시다.”
한 것이 1970년도에 나간 “임금님의 첫사랑”이예요.
그때 기억하시는 분! 여기는 안 계실 거예요.
왜냐하면 TBC가 서울, 경기도 지역만 나왔지 여기까지는 안 나왔어요.
제가 아마 KBS에서 그런 역확을 했으면 연기 엄청 잘 했어 하실 분들이 있는데 엄마야, 어찌
한 사람도 없노.“^^(하하하)
그 역할로 제가 안 하고 은퇴하겠다고 한 그 시점에서 그 역할을 함으로서 인기가 중천을 한 거예요.
여기저기서 일이 들어오고 여기저기서“사미자”하는데 그 해 제가 대상을 탔어요.(신도님들 큰 박수)
큰 간장독이 깨어지고 나서 내가 아주 앓아서 드러누웠어요. 척추에 염증이 생겨 가지고...
사람이 너무 너무 화가 나면 그런 병이 생기더라구요.
너무 너무 절망을 하면 화병이 뒤로 갔어요.
화병, 대단히 나쁜 병이예요. 우리나라 화병이 세계적으로도 화병이예요.
화병이 생겨 가지고 꼼짝도 못하고 드러누웠는데 사업이 다섯 번 망하고 그 다음에 잘 나갔어요.
남편이 준 돈으로 차곡차곡 모아가지고 큰 덩치를 만들고....
남편이 회장인데 골프가고 하는 동안에 사장이 남편 앞으로 빚을 해 놓고 야밤도주, 미국으로
도망을 가버렸어요. 그러고 나니까 집안이 깨지기 직전까지 갔어요.
얼마나 남편이 원망스러웠겠어요.
너무 너무 원망스럽고 저 사람하고 삶으로서 지나다 빌딩을 보면 “저걸 내가 살 걸. 이 사람
사업한다고 저걸 놓쳤지.“
“내가 우리 아들한테 이것도 해줄걸. 저 사람 밑천 대주느라 이것도 못했지.”
그런 원망이 쌓이고 쌓이니까 딱 병이 생기니까 내가 일어나지를 못하겠는 거야.
우리 남편은 너무 미안하니까 밖에 나가서 집에도 못 들어오는 거야. 안 들어와요.
“들어오거나 말거나 이제 꼴도 보기 싫어. 안 쳐다 볼 거야.“그랬는데...
20일 정도 누워 있다가 문득 깨달았어요.
뭘 깨달았느냐?
내가 참 바보 같구나. “사미자, 너 왜 이러고 누워 있니?”
“글세. 여태까지 번 돈 다 날렸잖아. 저 인간이 다 날렸어.”
바보야, 너 집 없니? 집 있지. 세 준 다른 집도 있어.
“너 빚 있냐?”
빚은... 있는 돈은 다 날렸지만 우리 노후를 생각해서 넣어 둔 것도 있고 적금 둔 것도 있고
애들 앞으로 둔 것도 있어.“
그런데 왜 드러누워 있어. 빨리 일어나야지...
네가 일어나야지. 네가 일어나야 너희 집이 서는 거야.
“그래, 우리 엄마 행주치마지. 우리 엄마 행주치마 덕분에 내가 이날까지 왔는데..
내가 남편이 이랬다고 내가 쓰러지면 되니? “안 돼.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여보, 들어와요. 어디 가 있는 거야.“
들어왔어요. 이걸로 다시 시작하자.
우리 연기자들은 나만 건강하면 금방 일어날 수 있어요.
다 없어졌다 하더라도 내가 마음먹고 일을 하기 시작하니까 그 다음에 대통령 저축상까지 받았어요.^^
내가 이렇게 원망하는 마음을 풀고 나니까 내 자신이 힘들지가 않더라구요.
내가 생각해왔던, 내가 꿈꾸어 왔던 그 단지는 깨져버렸지만 나한테는 우리 집안을 일으킬 수 있는
강인한 엄마의 행주치마가 있지 않느냐?
거기서 뭘 더 바래. 자식들 올바르게 컸고 누구 덕분이야. 내 덕분이지...
건방진 소리 하지마라.
네 남편이 그만큼 집에서 아이들을 돌봤기 때문에 아이들이 바로 자랄 수 있었던 거야. 넌 왜
모든 걸 네 생각대로 하니?
그렇게 생각하니 남편이 미웠던 점이 다 풀어져요. 주름까지도 예뻐지더라고..
남편한테 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해 줄때“아이고, 지겨워. 내가 이 인간을 위해서 밥을
해야 되나.“ 이랬는데....
내가 우리 남편을 따뜻한 밥을 먹이기 위해서 나도 따뜻한 밥을 먹고 이 남자 고기를 해 주기
위해서 나도 고기 얻어먹고 나물을 무치면서도 우리 남편하고 나눠 먹어야지 하면서 맛있게
무치고 남편덕분에 나도 건강해지는 거라.
이렇게 예쁜 점을 보니까 그 때부터 원망했던 마음이 없어지더라구요.^^
(신도님들 큰 박수) 네, 감사합니다.
나는 이렇게 살면서 내가 꿈꾸어 왔던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내가 하나하나 희망을 갖고 살아왔지만 언젠가 내가 빈 몸으로 돌아와서 나를 봤을 때 “넌 그
동안 열심히 일했으니까 돈 많이 벌어 놓았지.”
제가 사치 안 하고 열심히 사는 것은 주위사람들이 다 알지요.
전원주 짠순이는 따라가지 못하지만 그 뒤는 좀 따라갈 수 있어요.
전원주씨 하고는 45년 친구예요. 나를 많이 팔아먹고 다니더라고...^^
사미자가 주인공할 때 자기는 행랑어멈 했다고...그런데 오늘날 많이 컸다고 많이 하고 있어
내 얘기 그만하고 다니라고 하고 있어요.
그런데 내가 전원주씨 얘기를 하고 있네요. 서로 상부상조 하는 거지요. 뭐..
여기 제목이 안 붙었네...
[살수록 행복해지는 사미자의 짭짤한 삶]
첫 번째는 남편을 원망하지 말아라.
살수록 행복해지는...어떻게 살수록 행복해져...
살수록 흐지부지한 일만 많이 생기고 어느덧 돌아와 거울앞에 선 내 누님같은 파삭 늙은 얼굴밖에
안 남았는데 어떻게 행복해져.
그러나...
살수록 행복해지는 짭짤한 삶 이야기는 정말 제가 만들어 놓은 제목이거든요.
내가 만들어 놓고 너무 너무 신이 났어요.
우리가 어떤 궁극적인 면에서 실망하지 않고 내가 내 삶을 위해서 행복을 위해서 스스로 만드는
거야. 행복을 누가 갔다 줘요. 내가 만들어야 돼.
내 안의 부처가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거지요.
내가 만드는 거지.“당신 해복해라.” 한다고 당신 행복할 수 있어요.
없어요. 만들어야 돼요. 긍정적인 mind마인드로....
나는 그렇게 살아 왔어요. 그것 하나는 자랑하고 싶어.
내가 비록 외상은 많이 했지만 그 외상 덕분에 지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이 세상을 더 현명하게
살 수 있는 덕을 얻었지만 그러나 긍정적인 마인드...
어떤 역경에서도 내가 일어날 수 있는...
왜냐?
‘엄마이기 때문에...“
어떤 집에서도 남자보다 여자가 더 강해야 돼요.
남자 다 늙고 은퇴하게 되면 힘없고 초라해지는데 그걸 기 살리게 하는 것이 또 엄마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왜 살수록 행복해지는 짭짤한 사미자의 삶이냐]?
그 얘기를 마무리 하려고 해요.
말씀드렸지요.
내 남편이 나에게 했던 허망하고 원망, 한...이런 것을 다 잊어버려야 돼.
그걸 다 잊으니까 그때부터 남편얼굴이 환하게 뭔가 뒤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것처럼
예뻐져요.
남편이 암을 딛고 일어난 사람이거든요. 암에 걸렸을 때“아, 이건 내 죄다.”
남편을 미워했고 열심히 안하고 골프나 치러 다닌다고 남편의 뒤에서 했던 것,다 내 탓이다.
내가 기가 세기 때문에 남편을 이렇게 만들었어.
다 내 탓이다. 내가 잘못이다. 라는 것을 느꼈어요.
이 남자를 살려야 되겠다. “여보, 당신 살 수 있어. 걱정 마. 내가 있잖아.
당신은 살아날 수 있어. 절대로 암에 지지 말아요. 이제부터 당신 행복하게 해줄게”
정말로요, 그 암이라는 병은 스트레스 안 주니까 거뜬하게 일어나더라구요.
다행이 전이가 안돼서 수술로 끝났지만 편도 무슨 암인데 목을 다 돌렸어요.
그래도 이 사람이 여자 한 마디에 위안을 얻더라구요.
“여보, 걱정 마라. 당신 일어날 거야.”
거기다 또 무슨 희망을 주었느냐?
이 사람이 사업에 실패는 했지만 저를 참 많이 사랑해 주었어요.
이 사람이 평생소원이 “당신한테 돈벼락 한번 안겨주고 싶어.“ 이런 말을 했거든요.
그 돈벼락을 못 안겨주고 오히려 돈을 다른데다 벼락을 맞추지요.
내가 이 사람을 행복하게 한번 해줘야겠다. 나는 비록 돈벼락을 못 받았지만 내가 이 사람을
돈벼락 맞게 해주자.
남편의 암이 전이가 안 되고 거의 회복되어 갈 때쯤 “당신이 사업도 못할테니까
이걸 가지고 우리 가정을 이끌어 줘요.“ 증권이양을 해버렸어요. 남편한테...
남편은 저금통장도 하나 없었어요. 저금통장도 주면서“당신 이거 유지해 가세요.”
이제 망하지 않겠지. 나이가 70이 다 되어 가는데...
알았수. 내가 당신한테 통장에다 얼마를 넣어줄게. 당신은 어디 가서 골프 치러 가는데 이십 만원
친구 만나러 가는데 십 만원만 줘 그러면...세상에 어떤 여자가 “그러시와요. 여기 있어요.”
하고 내어주나. 돈 못 벌어 오는 백수한테...
“없어. 돈이 어디 있는데..” 그러기가 싫으니까 나는 돈이 없어 하고 나갈 것이 분명하니까
스트레스를 안 주려면 증권을 완전히 이양하자.
당신이 나를 용돈을 줘. 이렇게 해 놓으니까 돈을 함부로 못 쓰더라구요.
평생 돈을 풋풋하게 썼던 사람이 이제는 체계적으로 완전히 좀 짠돌이가 되어 가요.
제가 오늘 올 때도 “여보, 오늘은 지방에 가니까 십 만원은 주머니에 있어야 돼요.”
하니까...지갑에다가 9만원 넣어주고 천 원짜리 열장을 넣어 줬어요.“
“이것 가지고 되겠어요?”
“충분히 되지요. 안 되면 카드로 하면 되니까 걱정 마세요.“
이렇게 만들어 오기까지 내가 얼마나 희생을 했겠어요. 그러니까 내가 잘났다는 얘기지..^^(
신도님들 큰 박수)
한 번은 나도 남편한테 돈 좀 받아봤으면 했는데 이제는 역할을 바꿔보자.
어디 가서 일을 했는데 온라인으로 주겠대요. 돈을...
“은행에서 찾아서 현찰로 주세요.“ 그랬더니 은행에서 열다섯 뭉치를 차에다 실어주더라고. 그
때 얼마나 기뻤는지...
평생을 받고 살았지만 남에게 주는 기쁨이 이렇게 크구나. 오늘은 내가 최대의 행복한 날로 잡자.
낑낑거리며 집에 가져가서“이거 받아요. 당신 거야.”
돈다발을 받으니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평생 못 받은 것을 내가 줬어요. 그 날...
그러니까 남편이 그걸 못 쓰고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손자의 서, 너번의 학비로 썼다고 그러더라구요.
당신이 알아서 쓴 거니까 당신이 현명하게 처리했겠지요. 잘 했어요.
남편을 원망하지 말아라. 잊어버리자. 이왕이면 행복하게 해 주자.
그런 마인드만 있으면 짭짤하게 늙어가게 되는 것 같아.
두 번째는 남편을 우리 집안의 왕으로 만들어야 돼요. 남편을 격상을 시켜야 돼.
내가 남편을 모시니까 며느리도 시아버지를 더욱 어려워하고 더 좋아하더라구요.
모든 것은 남편한테서 나가게...
“어머님, 뭐..”
“아버님하고 의논해라.“
“어머니, 제가 뭐...“
아버지, 아버지한테 허락을 받아라. 아버지... 아버지...
엄마가 “애야” 하고 부르면 “왜 그래요.”그러는데...
아버지가 부르면 “예, 아버지” 하고 두 손을 앞에 모을 수 있도록 자식을 그렇게 만들어 놨어요.
남자가 그 집안의 왕이 되니까 왕비 된 나도 살맛나더라구요.
여러분도 남편을 좀 격상시켜 놓으세요.
“여보, 밥 먹어요. 식사해요.”라는 말 보다는...
“여보, 진지 잡숴요. ” 듣는 남자 대단히 기분 좋다고...
안 그래요. 아저씨...^^(앞에 앉은 거사님께 물어보시면서...)
“밥과 진지“의 사이가 엄청나게 커요.
요즘에는 “진지”라는 말이 없어.
텔레비전에서도 “식사하세요.”이렇게 말한다고...
식사는 어느 나라 말이야...
“공양 하십시오. 진지 잡수세요.” 참 여성스러운 말이잖아요.
반찬 몇 가지 안 해 놓아도“여보 진지 잡숴요.”그러면...
“응” 자기가 무슨 왕이 된 것처럼 앉아요.^^
그렇게 만들어 주니까 항상 나한테도 웃고 애기해요.
내가 매일 방글방글 웃잖아. 그러다가 어쩌다 안 웃고 있으면 ...
“당신, 기분 나쁜 일 있어.” 그렇게 남자를 치켜놓으니까 집안이 편안하더라는 얘기예요.
요즘엔 여자가 굉장히 강해졌잖아.
재산도 내 앞으로도 해야 되고 남편 앞으로도 해야 되고 그런데 나는 너무 왕으로 만들어 주니까
이런 것도 있더라고 ...옛날에 사업할 때 못 갚은 빚이 있어요.
자기 앞으로 딸을 사 놓고 했더니 차압이 들어왔어. 은행은 20년 넘어도 다 찾아가.
자식한테도 넘어가. “왜 이걸 당신 이름으로 해 놓았냐구..”그러다가...
과거는 잊자. 이천 몇 백만원을 내 놓았어요.
빚 있는 사람은 자기 앞으로 했다가는 30년 뒤에도 갚아야 하니까 조심하는데 남편을 왕으로
만들어 주는 것만은 여러분 오늘 딱 기억을 하고 가세요.
세 번째는 스킨 쉽, 터치를 자주하자.
우리는 오래전에 애틋한 애정 표현은 끝났지만 남편하고 뭐라고 할까? 이 터치...
어떤 부부학 강의하는 분은 그러더라구요.
아침 키스는 남편의 연봉을 올라가게 한다. 그건 30, 40대 얘기야.
늙어 봐요. 아침키스는 무슨 아침 키스야. 그냥 볼에다 살짝 하는 것...
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에이프런을 두르고 자기를 위해서 밥을 하고 있으면
“오늘 반찬 뭐야.”하고 나와요. 딱 쳐다보면서...
“아이고, 늙은이가...”속으로는 그러면서 겉으로는 손을 흔들어 “여보”그래요.
그러면 하이파이브를 해요. 손과 손의 터치...
이 터치를 많이 해야 돼요. 부부끼리... 늙어가는 얼굴이라도...
“당신 나 때문에 고생 많이 했구려. 당신 우리 집안 먹여 살리느라고 얼굴에 주름이 많구려.
검버섯까지도 예뻐 보이네..“마음에 없는 거짓말도 좀 해야 돼..^^
나는 이렇게 세 가지 원칙을 꼭 지키고 살고 있는데 어떨 때는 화가 날 때는 속으로 욕도 많이
해요. 그러나 입 밖으로는 안 내요.
목에는 항상 필터를 가지고 살아요. 항상 엄마가 부드럽고 애교있는 엄마로..
엄마가 조금 톤이 높아지면 애들 눈이 동그라져요. 살면서 필터 하나는 달고...
왜 남의 가슴에 못질하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영원히 잊혀지지 않잖아...
이왕이면 좋은 인연,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그러잖아요.
오늘 여러분들이 저의 보잘 것 없는 얘기 들으시느라고 이렇게 귀중한 시간에 많이 와 주셨는데
이것을 인연으로 우리가 서로 좋아하게 되고 또 이런 인연으로 좋게 인연을 맺어 가면 그것 또한
행복한 과정 아니겠습니까?
저는 여러분 오늘 이렇게 뵙게 되어서 너무너무 행복하고 여러분을 뵙고 무슨 애기를 할까?
이렇게 편안히 앉아서 얘기를 하니까 한없이 얘기가 나오는데 그 생각 때문에 2시에 잠이 깨서
꼬박 날을 밝혔어요.
7시까지 다섯 시간이 왜 그렇게 시간이 길어.
“내일 내가 실수하지 않고 여러분한테 좋은 인상 남기고 가게 해주세요.” 하고 마음속의 기도를 했어요.
잠을 자지 않아도 눈이 초롱초롱 빛나지요.^^
그래서 사미자의 살수록 행복해지는 짭짤한 삶이야기는 여기서 끝내지만 여러분들이 꼭 기억
해 주실 것은 원망, 한을 잊어버리고 남편을 왕으로 만들고 스킨쉽을 자주해라. 우리는 길에 갈
때도 꼭 손을 잡고 가요.
우리가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의 행복을 위해서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값어치
있는 나날이 되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성불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첫댓글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인생드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