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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의 말씀
10월14일 문경답사를 앞두고 변동식가옥의 당호 '개춘정'의 유래를 소개합니다. 집안 이야기를 적는 것이 송구스럽기도 합니다마는, 역사의 편린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자가 아닌 주택이란 점에서 개춘'재' 또는 개춘'당'으로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하겠으나, 이미 소장하고 있는 '개춘정'이란 현판의 의미를 살리고, 지난번 남도답사에서 견학하였듯이 '정'의 개념을 넓은 의미로
해석하면 열린 공간의 주택을 포함할 수있다는 점에서 개춘정으로 부르기로 하였습니다
개춘정(皆春亭)의 유래
-문경 변동식 가옥의 당호와 현판-
이조 선조 때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춘정 변계량 선생 형제분들의 학덕, 재능과 업적을 칭송하여, 변계량 선생의 호 ‘春亭’과 그분의 형님 변맹량 선생의 호 ‘春軒’, 변중량 선생의 호 ‘春堂’에서 따온 봄 ‘春’자 앞에 세분 모두라는 뜻에서 다 ‘皆’자를 넣어 “ 춘정 집안 3형제의 학문과 명성을 기리는 정자” 라는 뜻으로 ‘皆春亭’이라는 휘호를 써 주었는데,
그 글씨를 그의 후손이 판각하여 산강 변영만 선생이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위 가옥의 소유자 변동식의 선친, 변형수 공이 일제 강점기에
연민 이가원 선생과 함께 변영만 선생으로부터 한문학, 국학을 배울 때,
변영만 선생이 종친인 변형수 공의 재능을 격찬하면서 이 현판을 선물로 주었고, 이를 계기로 변형수 공은 아호를 ‘皆春’으로 정하였으며,
당신의 서재를 개춘서실로 이름 지었습니다.
변형수 공은 개춘서실에서 당대의 선비들과 교유하면서 친필로
개춘서실회화를 남겼습니다.
최근에 위 가옥이 경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복원되자,
변동식은 그 당호를 무엇으로 정할 지 고민하다가
초계 변씨 가문의 전통을 변계량 공 형제분들(‘춘헌’, ‘춘당’, ‘춘정’선생의 학문적 흔적이 가득한 정자)에서 변영만 공을 거쳐 변형수 공(‘개춘’선생의 학덕을 기리는 정자)으로 잇는 뜻에서 ‘개춘정’으로 부르기로 하였습니다.
이에, 선대에서 내려오는 개춘정 현판을 사랑마루 밖에 걸고,
위 개춘서실회화를 판각하여 사랑마루 안에 걸게 되었습니다.
皆春書室會話
원작 : 개춘 변형수 / 번역 : 신달식
移居吾擬葛洪居(이거오의갈홍거) : 이곳에 사노라니 갈홍거소 흡사하다
臨路黃花九月初(임로황화구월초) : 길가에는 구월초순 황국화가 피었어라
板上中華才者筆(판상중화재자필) : 현판에는 중국재사 명필이 걸려있고
架頭東國大賢書(가두동국대현서) : 서가에는 동국대현 율곡선생 책이 있네
霜凋赤葉千林瘦(상조적엽천림수) : 서리내려 단풍지니 나무마다 앙상하고
石老蒼苔一逕疎(석노창태일경소) : 노석에는 푸른 이끼 오솔길 한가롭다
沒味爾來邀杜老(몰미이래요두로) : 詩作에 빠져들어 杜詩를 다시보니
春看詩意逼眞如(춘간시의핍진여) : 봄에 본 그 느낌이 참으로 절절하다(
皆 春
南到金陵訪隱居(남도금릉방은거) : 남녘 땅 금릉으로 隱居를 찾아오니
玆山佳麗見今初(자산가려견금초) : 이 산하 아름다움 이제처음 알겠노라
西城才者傳神畵(서성재자전신화) : 중국재사 남긴 신필 대대로 전해오고
東國名人得意書(동국명인득의서) : 동국성현 율곡선생 서책도 함께있네
萬葉風驅鴉外散(만엽풍구아외산) : 가을바람 소슬한데 가마귀떼 흩어지고
一江晴落雁邊疎(일강청락안변소) : 한줄기 맑은 강엔 여기저기 기러기라
親交滿座兼新舊(친교만좌겸신구) : 벗들이 가득하니 신구가 모두 있어
情境還非客裏如(정경환비객리여) : 정다운 이곳이 손님 같지 않은 마음일세
天 爲
幽蹊繞壑入晴霞(유혜요학입청하) : 노을아래 첩첩 만학 오솔길 그윽한데
罷釣歸來霞短簑(파조귀래하단사) : 낚시를 끝내고서 삿갓쓰고 돌아온다
雁外江都寒杵落(안외강도한저락) : 강촌밖 찬 하늘엔 기러기 오락 가락
鴉邊夕照亂山多(아변석조난산다) : 산은 겹겹둘렀는데 석양에 가마귀 난다
酒逢好友量無限(주봉호우양무한) : 좋은 벗에 술 있으니 마셔도 끝이 없네
詩到名園價倍加(시도명원가배가) : 여기에 시 있으니 이곳 이름 드높으리
枝載萍踪今住此(지재평종금주차) : 여기저기 떠돌다가 이제 여기 머무르니(
老松深巷是吾家(노송심항시오가) : 노송 깊은 곳에 이바로 내집일세
皆 春
訪來二客踏仙霞(방래이객답선하) : 두사람 나그네가 선경을 찾아드니
身是江湖未脫簑(신시강호미탈사) : 강호에 노는 몸이 소일이 따로 없다
石可頌功千片小(석가송공천편소) : 공적을 기리는 데 천 쪽 돌이 모자라도
松能持節一枝多(송능지절일지다) : 소나무는 한 가지에 충절이 넘쳐난다
遊緣送日知誰賜(유연송일지수사) : 좋은 인연 함께 하니 고마움을 알겠지만
交許忘年愧我加(교허망년괴아가) : 나이들어 망년교유 년하 벗에 부끄럽네
局外思潮無定處(국외사조무정처) : 국외 사조 백가 철학 담론에 끝이 없다
心專敎學自成家(심전교학자성가) : 마음깊이 교학하여 모두가 大家일세
滄 隱
懶向仙山躡晩霞(나향선산섭만하) : 선경 향한 개으른 발길 늦게야 도착하니
白頭不愧霞烟簑(백두불괴하연사) : 삿갓 쓴 흰머리가 부끄럽지 아니하다
松聲韻客來時作(송성운개래시작) : 손님 올 때 때를 맞춰 솔바람 소리일고
江色征鴻落處多(강색정홍낙처다) : 강가엔 여기저기 기러기 날아 앉네
在世莫歎身未遇(재세막탄신미우) : 때만나지 못했다고 세상한탄 말을 것이(
毓英須記樂無加(육영수기락무가) : 영재모아 가르치니 더한 기쁨 있을 건가(
今行倍覺淸緣重(금행배각청연중) : 이번 길에 좋은 인연 소중함을 더 깨닫고
信宿名園茅二家(신숙명원모이가) : 이곳에 머무나니 또 하나 내집일세 (?)
天 爲
夜雨纔過浥細塵(야우재과읍세진) : 밤비가 겨우 그쳐 흙먼지도 일지 않고
斷霞乍纈落山隣(단하사힐낙산린) : 무지개 아름답게 산머리에 잠간 떴네
半千里外客程遠(반천리외객정원) : 오백리 밖 오신 손님 갈 길은 바이 멀고
十一月初天氣新(십일월초전기신) : 십일월 초순이라 천기도 신선하다
蕭灑風儀晴侶鶴(소쇄풍의청려학) : 소슬한 가을 바람 맑은 학과 어울리고
霏微情話暖生春(비미정화난생춘) : 끝없는 정담은 봄날같이 다사롭다
仙踪明日西歸後(선종명일서귀후) ; 신선 같은 벗들이 내일 여기 떠나가면
寤寐想思也惱神(오매상사야뇌신) : 오매불망 못 잊어서 마음에 선연하리
皆 春
개춘정의 유래와 관련된 인물 소개
1. <변영만 卞榮晩> ( 1889 ~ 1954 )
한국의 법률가이자 학자로 신의주에서 변호사를 지내다가 귀국 후 학문에 전심, 한학(漢學)·영문학의 석학(碩學)이 되었다. 광복 후,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국학(國學)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호 : 산강재(山康齋)·삼청(三淸)·곡명(曲明)·백민거사(白旻居士)
별칭 : 자 곡명(穀明)
활동분야 : 국학
출생지 : 경기
주요저서 : 《산강재문초》,《20세기 삼대괴물론(三大怪物論)》
자 곡명(穀明). 호 산강재(山康齋)·삼청(三淸)·곡명(曲明)·백민거사(白旻居士). 경기 출생. 영로, 영태와 함께 3형제이다. 사숙(私塾)에서 한문을 배우고 1905년 법관(法官) 양성소에 들어가 이듬해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에 진학, 1908년 졸업과 동시에 판사가 되어 광주(光州)로 내려갔다가 이듬해 사법권(司法權)을 일본에 빼앗기자 사직하고 신의주(新義州)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고 국권피탈이 되자 중국에 망명, 베이징[北京]에서 살다가 1918년 귀국하여 학문에 전심, 한학(漢學)·영문학의 석학(碩學)이 되었다. 8·15광복이 되자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국학(國學)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저서로는 《산강재문초(山康齋文鈔)》 《20세기 삼대괴물론(三大怪物論)》 등이 있다.
국학자 산강 변영만 선생 전집 출간
2006-06-21 20:20:26
근대 법률교육을 받은 법관이자 한학ㆍ영문학을섭렵한 국학자로 이름을 날렸던 산강(山康) 변영만(1889-1954) 선생의 업적을 기려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이 '변영만 전집'을 간행하고 이를 기념해 학술대회를 연다.
구한말ㆍ일제시대를 거쳐 해방 후까지 법관ㆍ문필가로 활동한 산강 변영만 선생은 위당 정인보와 함께 쌍벽을 이룬 근대 지식인의 한 명으로, 한문고전을 기반으로서양의 문학과 사상을 폭넓게 수용해 독특한 정신세계를 연 지식인으로 평가받는다.
위당 정인보가 전통적 관습에 익숙한 문장가였다면, 산강 변영만은 일찍이 근대법률 교육을 받은 이후 영어를 통해 세계의 신지식을 흡수한 문장가라고 할 수 있다.
이우성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전집 간행사에서 "산강 선생은 우리나라 근대 명인의 한 분으로 특히 우리나라 천여 년 한문학의 역사에서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한 특출한 존재"라고 평가했다.
해방 이후 성균관대 교수로 재직한 그는 저서로 '산강재문초,' '20세기 삼대괴물론' 등을 남겼다.
성균관대 출판부에서 출간되는 '변영만전집'은 산강의 '산강재문초' 한문 원문과 번역문을 함께 엮은 책 두 권과, 한글로 쓰여진 산문과 시를 새로 정리한 '계황산문집'의 전 3권으로 구성됐다.
또한 성균관대는 16일 오후 인천시 구월동 인천문화재단에서 '근대문명과 산강 변영만'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1910년대 변영만의 해외행적'(최기영.서강대) '변영만의 인물비평과 인간관'(류준필.성균관대) ''관생록'과 변영만의 문명관'(한영규.성균관대) '변영만의 고문론과 문장관'(김진균.성균관대)이 발표되고 종합토론이 이어진다.
변영로 (卞榮魯, 1897~1961)
[책갈피 속의 오늘] 1961년 ‘논개’ 시인 변영로 타계
‘거룩한 분노는/종교보다도 깊고/불붙는 정열은/사랑보다도 강하다/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논개’ 중)
‘논개’의 시인 수주 변영로(樹州 卞榮魯)가 1961년 3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64세였다.
수주(樹州·나무고을)는 경기 부천의 옛 이름이다. 부천시 고강본동에는 변(卞)씨 문중 소유의 산이 있으며 이곳에 변영로와 형제들, 부모와 조부모의 묘가 있다. 변영로는 조상이 500여 년 살아 온 고향의 이름을 아호로 삼았다.
변영로는 서울 재동과 계동의 보통학교를 거쳐 중앙학교에 들어갔지만 체조 교사에게 대든 일로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어학에 재능이 남달라서 1915년 조선중앙기독청년회학교 영어반 3년 과정을 6개월 만에 마치고 부설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918년에는 자신이 졸업하지 못한 모교의 영어교사로 일했다. 이 무렵 영시 ‘코스모스’를 발표했다. ‘폐허’ 동인으로 문단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한참 전이었지만(그는 1920년대 이후 활발하게 시를 썼다) 변영로는 이때부터 ‘천재시인’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문’을 영문으로 번역해 해외로 발송하기도 했다.
‘논개’는 1924년 발간된 시집 ‘조선의 마음’에 수록됐다. 강렬한 ‘논개’뿐만 아니라 시집에 실린 작품 대부분이 민족적 색채가 짙다. 이 시집은 출간 직후 일제에 의해 판매 금지 및 압수령이 내려졌다. 변영로의 시는 올곧고 저항적인 시편들로 알려졌지만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낸 작품이기도 하다. ‘생시에 못 뵈올 임을’ 등이 그렇다. ‘생시에 못 뵈올 임을/꿈에나 뵐까 하여/꿈 가는 푸른 고개 넘기는 넘었으나/꿈조차 흔들리우고 흔들리어/그립던 그대 가까울 듯 멀어라.’
동아일보가 발간하던 여성지 ‘신가정’의 편집장으로 근무하던 변영로는 1936년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에 연루됐다. ‘신가정’ 표지에 손 선수의 다리만 게재하고 ‘조선의 건각’이라고 제목을 붙여 총독부의 비위를 건드린 것이다. 총독부의 압력으로 회사를 떠났지만 마음을 굽히지 않았다. 일제의 압박이 극에 달했던 1940년대에는 향리에 칩거했다.
그의 형제 모두 두드러졌다. 큰형 영만은 국학자로 약관에 법관에 오를 만큼 뛰어났다. 영문학자인 둘째형 영태는 국무총리를 지냈다. 변영로도 광복 후 성균관대 영문과 교수, 대한공론사 이사장 등을 지냈다.
생시에 못뵈올 임을
_ 변영로
생시에 못뵈올 임을 꿈에나 뵐까 하여
꿈가는 푸른고개 넘기는 넘었으나
꿈조차 흔들리고 흔들리어
그립던 그대 가까운 듯 멀어라
아, 미끄럽지 않은 곳에 미끄러져
그대와 나 사이엔 만리가 격했어라
다시 못 뵈올 그대의 고운 얼굴
사라지는 옛꿈보다도 희미하여라.
변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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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태(卞榮泰, 1892년 서울 - 1969년 3월 10일[1])은 대한민국의 전 국무총리였다. 호는 일석(逸石)이다.
1953년 5월 29일 한국전쟁의 휴전 후 5개 중립국의 한국 내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전 한국군을 유엔군 산하에서 탈퇴시키겠다고 유엔군을 위협하였다.[2]
1953년 10월 1일, 워싱턴 D.C.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서명하였다.[3]
변영로, 변영만과 형제 사이이다.
본적 서울
생년월일 1892년
학력 ~ 1912 만저우신흥학교
~ 1916 中 협화대학교
경력 1945 고려대 영어교수
1949 대통령특사로 필리핀 파견
1951 ~ 1955 제3대 외무부 장관
1954 ~ 1954 제5대 국무총리 겸임
1956 ~ 서울대 상과대 교수
~ 1961 고려대 교수
1964 ~ 시사영어학원 강사
2. <변계량>
▷ 변계량비각(卞季良碑閣)
지정번호 : 경상남도지정 문화재자료 제27호
소 유 자 : 밀양시
소 재 지 : 밀양시 초동면 신호리 204-2
수 량 : 1동
시 대 : 근대(1946년)
초동면 신호리 대구마을 입구 큰길가에 있는 이 비각은 일명 변씨3현비각이라고 불리우는데, 고려말 판서 변옥란과 그의아들 춘당 변중량, 춘정 변계량등 삼부자의 성장한 곳과 유적을 기념하기 위해서 1946년에 후손들이 그 행적을 기록하여 세운 비석이다.
판서 변옥란(1322-1395)은 고려말에 3판서를 역임하고 태조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 원종공신에 녹훈되었으며, 그의 아들인 춘당 변중량(1352-1398)은 태조때 좌승지를 역임한 문관으로 시문에 능하였다.
춘정 변계량(1369-1430)은 춘당의 아우이며 조선조 건국초기에 여러 요직을 거쳐 일국
대문장가로써 20여년을 종사하였으며, 특히 세종의 문치시대에는 『태조실록』의 편찬과 『고려사』의 개수는 물론 크고 작은 외교사령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으며, 임금을 잘 보필하여 문장과 덕업이 찬란하였다.
3. <주지번(朱之蕃)>
유 적 명 : 괴산 고산정 및 제월대 (槐山 孤山亭·霽月臺)
주 소 :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제월리 산 59-1
지정사항 : 기념물 제24호
시 대 : 조선
종 류 : 기타 위인선현유적
참고사항 : 충청북도, 1982, <<문화재지>>
선조조(宣祖朝)의 명현(明賢) 서경(西坰) 유근(柳根)이 충청관찰사(忠淸觀察使)로 있을 때 선조 29년 창건하여 ‘만송정(萬松亭)’이라 하였는데, 광해군 때에 혼정(昏政)을 피하여 귀향, 이 곳에 은거할 때 ‘고산정(孤山亭)’으로 개칭하였다. 현판은 완산(完山) 이원(李元)의 글씨이고 ‘호산승집(湖山勝集)’의 현판은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의 글씨이다. 인조조에 명나라 사신 웅화(熊化)가 내조했을 때 유근이 원접사(遠接使)로 나아가 시문의 교분이 두터우니 웅화가 지어보낸 <고산정사기(孤山精舍記)>와 화답시 현판이 게액되어 있다. 이 정자의 건물구조는 건평 9평의 평가건(平架建) 팔작집으로 전면 2칸, 측면 2칸이며 기둥은 율목(栗木)이고 마루를 놓고 목조 난간을 돌렸다. 창건 이래 수차 보수되었으나 현재 다소 퇴락되어 있고 단청이 퇴색되어 있다.
△ 허난설헌의 시비와 무덤. 그는 모순된 조선 현실에 시로 맞서 싸운 저항시인이었다.
8살에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樑文)을 지을 정도였던 여동생의 영특함을 높이 산 조치였다. 허난설헌은 이달과의 만남을 통해 사회 모순에 눈뜨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백광홍(白光弘)·최경창(崔慶昌)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평가될 정도로 당시(唐詩)에 능했던 이달은 서얼이란 이유로 등용되지 못했다. 문(文)의 나라 조선에서 뛰어난 문재(文才)임에도 서얼이란 이유로 천대받는 이달을 보면서 허난설헌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눈을 떴다. 허난설헌이 최경창과 백광홍을 예로 들면서 “낮은 벼슬아치 녹 먹기 어렵고/ 변군(邊郡)의 벼슬살이 근심 많아라/ 나이 들어 벼슬길 영락하니/ 시인이 궁핍하다는 말 이제야 알겠네”(‘견흥’(遣興)) 라고 노래했다. 서얼이 아니었던 최경창·백광홍의 궁핍에 대한 노래는 역으로 서얼 출신 이달의 궁핍 정도를 짐작게 한다.
이달을 통해 사회 모순을 간접적으로 체험했던 허난설헌은 열여섯 무렵 혼인하면서 사회 모순에 직접 발을 디디게 된다. 남편 김성립(金誠立)은 과거에 거듭 낙방했다. 허난설헌은 ‘강남에서 독서하는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寄其夫江含讀書)에서 “규방에서 기다리는 마음 아프기만 한데/ 풀이 푸르러도 강남 가신 님은 오시질 않네”라고 노래하고, ‘연꽃을 따며’(采蓮曲)에서는 “물 건너 님을 만나 연꽃 따 던지고/ 행여 누가 봤을까 반나절 얼굴 붉혔네”라고 노래했다. 그러나 훗날 이수광(李?光)이 <지봉유설>에서 “이 두 작품은 그 뜻이 음탕한 데 가까우므로 시집에 싣지 않았다”고 평할 정도로 아내의 사부곡(思夫曲)까지 음탕으로 몰던 사회였다. 허난설헌은 사부곡까지 음탕으로 몰던 조선 남성들의 처신을 조롱했다.
“누가 술 취해 말 위에 탔는가/ 흰 모자 거꾸로 쓰고 비껴탄 그 꼴/ 아침부터 양양주에 취하고 나선/ 황금 채찍 휘둘러 대제(大堤·중국 호북성 양양(襄陽) 남쪽에 있던 색주가)에 다다랐네./ 아이들은 그 모습에 손뼉 치고 비웃으며/ 다투어 백동제(白銅?·악곡 이름)를 불렀다네.”(‘색주가를 노래함’(大堤曲))
과거에 거듭 낙방하고 난설헌과도 사이가 서먹해진 김성립은 기방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허난설헌이 ‘술집의 노래’(靑樓曲)에서 “길가에는 술집 10만이 늘어서 있고/ 집집마다 문밖에는 칠향거(七香車·향목으로 만든 수레)가 멈춰 있네”라고 노래한 것은 색주가나 드나들던 남편 같은 인물들에 대한 풍자였다.
허난설헌의 불행은 혼인생활만이 아니었다. 18살 때(1580) 아버지 허엽이 상주의 객관에서 객사한데다 어머니마저 세상을 떴으며, 게다가 스물한 살 때인 선조 16년(1583)에는 가장 의지하던 오빠 허봉이 율곡 이이를 탄핵했다가 갑산으로 귀양길에 올랐다. 허봉은 이듬해 귀양에서는 풀려났으나 도성에는 들어오지 못한 채 선조 21년(1588) 38살의 나이로 금강산에서 역시 객사했다.
남편 없는 집에서 허난설헌은 외로움에 떨었다. “시름 많은 여인 홀로 잠 못 이루니/ 먼동 틀 때면 비단 수건에 눈물 자국 많으리”(‘사계를 노래함’(四時詞))라는 노래나 “비단 띠 비단 치마 눈물 흔적 쌓인 것은/ 임 그리며 1년 방초 한탄함이로다(‘규방의 한’(閨怨))”라는 노래는 불행했던 결혼생활을 잘 보여주고 있다.
허난설헌은 이 불행이 남성에 종속되어 살아야 하는 데서 나왔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한정’(恨情)에서 “인생의 운명이란 엷고 두터움 있는데/ 남을 즐겁게 하려니 이 내 몸이 적막하네”라고 노래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시집 간행
허난설헌이 세상을 떴을 때 동생 허균은 만 20살이었다. 그는 누이의 시를 묶어 <난설헌집 蘭雪軒集>을 간행해 서애 유성룡으로부터, “이상하도다. 부인의 말이 아니다. 어떻게 해서 허씨 집안에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이렇게 많단 말인가?”라는 발문을 받았다. <난설헌집>은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에 의해 중국에서도 출간되면서 소천지 조선을 넘어 중국에까지 문명이 알려졌다. 숙종 37년(1711)에는 분다이야(文台屋次郞)에 의해 일본에서도 간행되었으니 조선 여인 최초의 한류였던 셈이다. 그는 자신의 불행을 개인적인 한으로 삭이는 대신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파악하고, 그 부당함을 노래했다. 그는 불행했던 한 여류시인이 아니라 모순된 현실에 시로 맞서 싸운 저항시인이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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