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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나주시 금성관길, 금계동 위치 나주 목사내아(羅州牧使內衙) 금학헌 (琴鶴軒)을 나서서 정수루를 지나 조금 더 내려가면 나주목 객사 금성관이 거대하게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건축물중에 하나인 객사다.그 규모가 호남제일의 목사골이였음을
대변하고 지방에서 중앙 권력을 상징하는 적목조건물이다.
객사는 고려·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것으로 관사 또는
객관(客館)이라고도 한다.객사(客舍)는 고려 전기부터 있었으며 외국 사신이 방문했을 때 객사에 묵으면서 연회도 가졌다.
조선시대에는
객사에 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예(망궐례)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궁궐을 상징하는 궐패(闕牌)와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하여 망궐례(望闕禮)를 올리던 곳으로 사신의 숙소로도 이용하였다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2호이며 1373년(고려 공민왕 22)에 금성군의 정청(政廳)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창건하였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의 익공집식 팔작지붕이다.
금성관은 조선 성종 6∼10년(1475∼1479) 사이에 나주목사 이유인(李有仁 ? ∼1492 성종 23)이 세웠다고 전하나 전남지역의
중심도시였던 고을로 보아 그 이전에 지어졌을 것이라는 상상은 자연스런 일이다.
1603년(선조 36)에 크게 중수했고
이후 조명전(1709~1779)이 쓴 상량문이 전하고 있고, 1884년(고종 21)에 목사 박규동(朴圭東)이 삼창(三創)을 했으며 그후 1963년 9월에 보수, 1976년에 해체 복원공사를 시행하였다.
1977년 정철환(鄭喆煥)이 금성관중건기를 썼다.
나주 출신의 조선 중기의 문인 송재(松齋) 나세찬(羅世纘 1498
연산군 4∼1551 명종 6)의 시가 전하고 있다.
금성의 정자가 처음임을 자랑마라/축하하는 북소리가 이십가(이십가 문장가)에
있네.
이러한 좋은 때에 예날을 회고해보니/ 오로지 호탕한 음악 육장가의 박자로다.
錦城慶事不其誇 賀鼓淵淵十二家 如此佳期俙振古 惟抃浪吟六章歌
동국여지승람에는
금성관의 정문인 2층짜리 망화루도 함께 만들었으나 지금은 망화루의 현판과 내삼문만을 남산시민공원으로 옮겼다. 금성관(錦城館) : 은행정(銀杏亭)
남쪽에 있다. 목사 이유인(李有仁)이 지었다. 누정 무이루(撫夷樓) 객관 동쪽에 있다.
성임(成任)의 시에, "비 개인 뒤 산빛
고운 것이 상심(傷心)되고, 취한 후 봄빛은 얼굴에 가득 뜨누나. 풍경이 아름다우나 내 고장 아니니, 이제부터 고원(故園)에 돌아가 쉴까보다."
하였다.
임진왜란(1592) 때의 의병장 김천일 선생이 의병을 모아 출병식을 가졌던 곳이며, 일본인이 명성왕후를 시해했을 때도
이곳에서 명성왕후의 관을 모셔 항일정신을 높이기도 하였다.
건물의 구조는 18본(本)의 외진주(外陣柱)와 8본의 내진주(內陣柱)를 배열하고 배흘림이 없는 곧고 훤칠한 원주(圓柱)를 세우고 주심포(柱心包)집계의 공포를 가구(架構)한 위에 외목(外目) 도리를 내어 네 귀 추녀를 떠받치게 하여 팔작지붕을 구성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서거정(徐居正)· 김시습(金時習)· 김종직(金宗直) 등과 함께 고려의 음다 유풍이 계승했던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요 18세에
등과(행정고시)하였던 수재 기우자(騎牛子) 이행(李荇 1352 공민왕 1 ~ 1432 세종 14)도 금성관에 오르고 그냥가지
못했다.
객지에 가을바람이 떨어지니 / 읊조리매 흥이 아득하네
산과 시내에는 구름 그림자가 엷고 / 솔과 국화에는 이슬이
곱다
客裏秋風落 唫哦興渺然 溪山雲影薄 松菊露華鮮
게으른 새는 어디로 가는지 / 가는 말은 다시 나아가지 않네
평생에
조그만 보람도 못했으니 / 늙은 승선(승지)이 부끄러워라
倦鳥知何往 征驢更不前 平生無寸効 慙愧老承宣
또 고려 중기의 문신으로 일찍이 나주에서 공부했으며 벼슬은 중서문하성의 습유를 거쳐 안렴사에 올랐던 채보문(蔡寶文)도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내고 금성백(錦城伯) 부인하고 시를 읊기를
이 땅에 와서 논 지 십여 년 만에 / 올 가을에 또
기러기처럼 남으로 왔네
저녁에 발 걷으니 강산은 그대로인데 / 아침에 거울을 여니 귀밑털이 변했구나
此地來遊十餘歲 今秋又作鴈南飛
簾旌暮捲江山是 鏡匣朝開齒髮非
고요한 뜰의 흰 모래에 달빛이 머물렀고 / 깊은 정원의 푸른 대는 봄빛에 취하였네
허리의 누른 띠
새 영화가 중하니 / 뉘라서 나를 옛날의 그 포의라 하느뇨
庭靜白沙留月色 園深綠竹醉春輝 腰黃眼赤新榮重 來去誰云一布衣(東文選
卷13)
허균의 형 허봉도 이곳에 들려 그윽한 감을 나타낸다.
나그네 만리길 가매 / 말 멈추어 차가운 물을
먹이네
큰 길엔 온통 꽃다운 풀들 / 저녁 연기 역루에서 피어오르네
나그네 회포는 어렴풋 꿈과 같아서 / 봄이라지만 거의 가을 같고나
行人萬里去 駐馬飮寒流 芳草遍官道 晩煙生驛樓 旅懷渾似夢 春事半如秋
조선 중기의 시인이요 북평사(北評事) 영광군수 등을 지낸 문인이었던 1576년(선조 9)
1555년(명종 10) 17세 때에 을묘왜란으로 왜구를 만나자, 퉁소를 구슬피 불어 왜구들을 향수에 젖게 하여 물리쳤다는 일화를 남긴 전라도
영암 출신 고죽(孤竹) 최경창( 崔慶昌 1539 중종 34∼1583 선조 16) 도 고향길에 다녀가며 들렸다.
서글픈 대평소
소리 옛고을에서 나는데 / 깊은 강물은 어둠속 급히 흐르네
으스레한 등불 아래 초객의 꿈이요 / 한밤중 중선의 다락일레
찬 비 비록
개었으나 / 고향 생각 또다시 가을을 만났네
殘角生古縣 沈河急暝流 疏燈楚客夢 半夜仲宣樓 寒雨雖逢霽
歸心更値秋
부제학 ·전라도관찰사 이조참판을 지낸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1513~1577)도 이곳에서 1533(중종28) 5월 보름에 도회
시취(都會試取)를 하였는데, 차상(次上)으로 합격하였고 다시 루에 올라 부를 지어 장원을 하고 1535(중종30) 5월 보름에 다시 도회 시취에
또 장원(壯元)을 하였다. 유생(儒生)의 시절에 네 번이나 누에 오른 일을 기억하며 시를 읊는다.
소년 때 이곳을 네 번 올라
재주 겨루어 / 세 번 장원하고 수령 술잔 받아 마셨지
이제야 절월을 들고 다시 찾아와 보니 / 성곽은 의연히 예전 모습
그대로구나
少年較藝四登玆 三度倫魁飮守巵 如今杖節重來日 城郭依然似舊時
일제 강점기에는 칸막이를 하여 청사로 사용하였고, 부족한 공간은 별도로 옆에 따로 건물을 신축하여
사용하였다. 1960년대 들어서면서 나주군청 청사를 새로 신축하는 과정에서 금성관의 정면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나주시는 관아 건물을
복원할 계획을 가지고 연차적으로 현재의 나주시의회 청사를 헐고 망화루를 복원하고, 나주목사가 정사를 보던 정청인 동헌을 복원하는 등 이 일대를
다시 옛날의 모습으로 되돌리기 놓은 것은 후손으로서 해야 할 도리로 다해 다행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금성관은 전남지방에 많지 않은
객사 중 하나로서 그 규모가 웅장하고 나주인의 정의로운 기상을 대표할 만한 건물로 손꼽히는 나주시의 자부심의 공간이다
그리고 금성관 문루 망화루(望華樓)가 자리하고 있다.
나주를 일러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鄭道傳)이 3년동안 유배를 와 나주의 감흥을 <소재동기(消災洞記)>에, "금성산은 단중(端重)하고 기위(奇偉)하여 동북에
웅거하였으니 나주의 진산이다."이라고 했던 산천 금성산(錦城山) 아래 영산강의 물줄기에
자리한 천년 고을 나주에는 나주의 정신이 집결 국난 극복의 논의의 장소가 있다.
조선 선조때 김천일
의병장이 출병식이 있었던 곳, 구한말 고종의 단발령 때 유생들의 통곡으로 울부짖으며 항거했던 곳 , 일제강점기 항일학생운동 때 울분을 토해냈던
곳, 5.18 민주화 운동 등에 이르기 까지 나주의 역사적 장소로 유명한 곳이 망화루(望華樓)이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제일 먼저 나주목관아 등이 훼손되면서 이곳도 시련을 피할 수 밖에 없었다. 망화루는 금성관의 외삼문격으로 전라남도 나주시
과원동 109-5번지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원래 이층 누각의 문루는 당시 조선전전기의 문인이었던 나주목사로 대사헌(大司憲) 참판까지 오른
이유인(李有仁 ? ∼1492(성종 23)이 세웠다고 전한다.
1920년대 이후에 사라지고 단층누각으로 변형되어 현재 남산에 해체
및 복원되면서 원래의 모습이 사라진 상태를 복원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입증하는 시가 당시의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性理學者)
·문신. 영남학파의 종조이며 전라도관찰로 재임중이었던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1431 ~ 1492)이 이유인이 편액을 망화라 써붙이고 시 짓기를
청하자 이곳에서 읊은 시가 전한다.
두공과 처마에는 자주색 놀이 스치는데 / 사군은 날마다 여기에서 서울을 바라보네
벽오동
일천 열매는 봉황이 깃들기에 알맞고 / 화각 소리 세 번에 이미 저문 까마귀 날아드네
芝栱鱗簷拂紫霞 使君日日望京華 碧梧千乳宜棲鳳
畫角三聲已瞑鴉
하채는 시끄러이 바닷가 시장에서 팔고 / 우차는 데굴데굴 마을로 돌아가누나
한 지방의 도회에 누대도 훌륭하니 /
금장으로 해변에 머무름을 한하지 마소
蝦菜喧喧通水市 一方走集樓臺勝 一方走集樓臺勝 莫恨金章滯海涯
羅州李大使諱有仁新作南樓扁以望華索賦]/점필재집 시집 제22권
김종직(金宗直) ‘사림파의 영수’로
전라도인들이 갖는 사상의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그가 1487년 부터 1년 동안 전라도관찰사를 지내면서 순시차 전라도 전역을 다니며 많은
시문을 남겼다. 이곳에 올라 시주를 즐기며 그 감흥을 남겼다.
연꽃 마루와 비늘같은 기와지붕이 자색 노을을 스치는데, 사군(使君)은
날마다 서울을 바라보네.
벽오동 천 열매는 봉이 깃들기에 알맞고, 화각(畵角) 세 소리에 날은 저물어 까마귀 날아드네.
芝栱鱗簷拂紫霞 使君日日望京華 碧梧千乳宜棲鳳 畫角三聲已瞑鴉
생선 파는 바다 저자(海市) 시끄럽고, 우차(牛車)는 디굴디굴
마을로 돌아가누나.
한 지방의 도회(都會)에 누대(樓臺)도 좋으니, 금장(金章 고관의 복색)으로 해변에 머무름을 한하지
말라.
蝦菜喧喧通水市 牛車轆轆返村家 一方走集樓臺勝 莫恨金章滯海涯
망화루와 관련된 유일한 자료는 사진으로 보는 근대 한국에 실린
망화루 광경과 금성교쪽에서 바라본 금성관과 망화루의 사진자료만 전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1755년(영조 31) 전라도 나주의 객사(客舍)에 괘서(掛書)가
걸린 것을 계기로 발생 영조가 왕위 계승의 정통성과 집권 명분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을해역옥(乙亥逆獄)이 1755년 당시 전라감사 조운규가 나주의 객사인
망화루(望華樓) 기둥에 괘서가 걸려 있다고 조정에 보고하면서 시작되었다.(영조실록 31년 2월
4일)
영조는 즉위 직후 그동안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노론
세력을 불러들여 정국을 주도하게 하였다. 그러나 노론의 소론에 대한 보복 정치로 정국이 혼란스러워지고 영조가 의도했던 탕평은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다. 이에 영조는 노론과 소론 내에서 탕평에 동조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탕평파를 구축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소론 계열과 남인 계열 일부가 정치에서 소외되었고, 이들의 주도하에 1728년 무신란(戊申亂)이 발생하였다. 무신란의 처리 과정에서 일부 남아
있던 세력들은 계속 불만이 커졌고, 영조나 정국을 주도하던 노론 세력들은
이들을 색출하여 제거하는 것이 중요한 정치 사안이었다. 을해역옥은 이런 정치적 역학 관계가 작동하면서 발생한 옥사이다.
괘서의
범인으로 지목된 윤지는 결국 체포되었고, 윤지가 조사 과정에서 죄를 시인하지 않고 물고(物故)되었다. 윤지가 아들인 윤광철과
윤희철을 시켜 괘서를 내걸었다는 내용으로 사건의 결론이 모아져 갔다
박찬신·조동정·조동하·김윤 등 많은 소론 측 인물들이 함께 사형되었고, 이광사·윤득구 등은
원배(遠配)되었다.
발굴 조사결과 , 망화루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적심시설과 이 보다 앞선 시기에 축조된 건물의 기단 등이 확인되었다. 또한, 옛 군청과 관련된 담장과 배수로, 현대건물의 기초시설 등이
노출되었다. 출토유물은 자기와 옹기류, 토기류, 기와류, 상평통보 등이 있다. 전남 나주시
과원동 109-5번지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금성관의 정문인 2층짜리 망화루도 함께 만들었다고 확인 할 수 있다.
"궐패로써 망궐례 올리거니/망화루 그 안에 들어 벽오헌에 오른다. " 해월 채헌병이 당시 나주목사의 객관(客館)의 동헌(東軒)이었던 벽오헌(碧梧軒)에 오르며 시은 시이다. 그런 기분으로 은행잎이 눈부시게 발아하고 있는 벽오헌에 올라본다.
신증에는 금성관(錦城館) 은행정(銀杏亭) 남쪽에 있다. 목사 이유인(李有仁)이 지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금성관(錦城館)우측에 자리하고
있다.
벽오헌(碧梧軒)은 나주목의 객사인 금성관의 양쪽의 익사(翼舍)에 해당하며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을 유숙하게 하던 곳으로
벽오정(碧梧亭)이라고도 불렀다.
객사란 고려~조선시대때 지방궁실로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 또는 궐패(闕牌)를 모셔두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고을의 관리와 선비들이 모여 망궐례(望闕禮)를 올리며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을 유숙하게 하던 곳이다.
금성관과
함께 금성관은 조선 성종 18~20년(1487.4.12~1489.7.20) 동안 이유인목사가 2년여 동안 재직하면서 김춘경목사가 건립한 객관의
동헌인 벽오헌 옆에 금성관과 벽오헌 남쪽에 망화루를 건축하여 궁실의 구조를 갖추었다.
이후 선조 36년(1603)에 크게 중수를
하고, 고종 21년(1884) 박규동 목사가 3창을 했다. 최근에 와서는 1963년 9월에 보수하였고, 다시 1976년에 완전 해체ㆍ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주의 호탕 화통했던 인물 임제의 아들 조선 중기의 의병 월창(月窓, 月滄) 임게(林垍)는 이곳에서 감흥을
이렇게 표현했다.
푸른 오동나무를 모두 베어서/원래 어디에다 두려는 것이나
사또의 마음이 뜨겁고 무거우니/아마도 백성들 때문에
마르고 있으리라.
斫塵碧梧樹 原來何所安 使道心熱重 宣用野人乾
벽오헌(碧梧軒)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나주목(羅州牧)에 서거정(徐居正 1420 세종 2~1488 성종 19)의
중신기(重新記)에는 "성화(成化) 기해년에 월성(月城) 김후(金侯)가 선발되어 목사로 왔는데 또 현명한 통판(通判) 오후(吳侯)를 만나,
뜻이 같고 의기가 통하여 정사가 닦이고 폐단이 제거되었다. 개연(慨然)히 관사를 중수할 뜻이 있어 곧 자기의 봉급을 덜고, 공금을 보태어 목수를
부르고 재목을 모아 먼저 이 동헌(東軒)부터 수리했다."고 해 벽오정의 역사를 더듬는 계기가 된다. 어느날 채보문(蔡寶文)은 유학차 나주관에서
서기 박원개(朴元凱)가 그를 맞이하자 시를 읊기를
이 땅에 와서 논 지 십여 년 만에 / 올 가을에 또 기러기처럼 남으로
왔네.
저녁에 발 걷으니 강산은 그대로인데 / 아침에 거울을 여니 귀밑털이 변했구나.
此地來遊十餘歲 今秋又作鴈南飛 簾旌暮捲江山是
鏡匣朝開齒髮非
고요한 뜰의 흰 모래에 달빛이 머물렀고 / 깊은 정원의 푸른 대는 봄빛에 취하였네.
허리의 누른 띠 새 영화가
중하니 / 뉘라서 나를 옛날의 그 포의라 하느뇨
.庭靜白沙留月色 園深綠竹醉春輝 腰黃眼赤新榮重
來去誰云一布衣
나주시 노안면 금안동(金鞍洞) 출신으로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 전적·나주교수를 거처
남원교수 역임했고 기대승(奇大升)·이이(李珥)·고경명(高敬命)의 문하에서 배워 유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의 진중으로 나가 군량의 수집, 수송하고 또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도원수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문서를 관장하고,
의병모집했던 반항당(盤恒堂) 홍천경(洪千璟 1553년 명종 8 ~ 1632년
인조 10)이 어느날 이곳에 들려
봄에 할 일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한가한 시간이 있어/머리에 당건을 쓰니 그 모습 어울려라.
있는
곳이 나루터와 닿아 있으니 새삼스런 일일랑 그만 두어라./담이 구름낀 골짜기로 인해 옛성을 둘러 놓은 듯 하네.
우측엔 고기잡이
노인이 좌측엔 늘은 시인이 있는 듯/앞으로는 긴 강이 흐르고 뒤로는 푸른 숲이 벌려있네
땅거미 내리고 음산한 바람이 불어 비가 내릴
듯하니/처음에는 밥짓는 연기 피어 오르더니 고기잡이 배도 돌아오네
그리고 서거정은 "관사란 것은 관청을 존엄하게 하고 손님을 접대하는 곳으로 나의 사유물이 아니요,
그것의 흥폐(興廢)는 수령에게 달려 있다. 내가 지금 수령을 보건대, 나약하여 무능하고 우활한 자는 공문서를 처리하느라고 땀을 뻘뻘 흘리며
어찌할 줄 모르니, 그 밖의 일에 겨를이 있겠는가. 간혹 현명하고 유능하다 하는 이는 핑계하기를, '나는 나라의 금령(禁令)이 엄함을
두려워한다. 백성의 비방이 일어날 것을 어찌하랴.' 하며 경계를 지적한다.
누정시인이라고 일컬은 성임(成任)이 지은
시로 이곳에 앉아 감성을 음미해 본다.
벽오헌(碧梧軒)에서 벽오동을 보니, 헌(軒)에 가득 푸른 그림자 영롱히 깔렸구나.
그
가운데 앉으니 나의 모든 근심 사라지는데, 더구나 맑은 바람 불어 얼굴에 스치네.
碧梧軒上看梧桐 滿軒翠影敷玲瓏 悠然坐我萬慮空 灑面況復來淸風
한가롭고 편안함이
희황(羲皇) 시대의 사람 이상이니, 눈 앞의 흥미가 아침마다 새롭구나.
기우자(騎牛子 이행(李行)의 호)의 시가 맑디 맑으니, 속됨과
누추함 씻어 진(眞)으로 돌아가누나.
寄傲不数羲皇人 眼前興味朝朝新 騎牛題咏語絶塵 一洗俗陋歸于眞
길이길이 유전(流傳)하여 이
명소(名所) 빛내리니, 어찌 매몰하여 없어지리오.
글의 높고 뜻이 예스러워 세상에 없는 바라, 구슬이 반짝반짝 헌(軒) 귀퉁이 환하도다.
流傳千載輝名區 豈肯理沒隨蓁蕪 詞蒼意古世所無 珠璣燦燦明軒隅
내 와서 봉황의 가지를 휘여잡으니, 완연히 옥산(玉山)같은 풍채
보는 듯하네.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생각하다가, 반일(半日)토록 애써 읊조리며 앞뜰에 섰네.
높은 데 의지하여 멀리 바라보며
구상(構想)하노라니, 동강(東江)의 물 빛이 맑게 일렁거리누나.
我來攀却鳳凰枝
怳見玉山眞容儀 目注心傷無不爲 半日苦吟臨前墀憑高望遠欲搆思 東江水色淸淪漪
조선 시대의 문신이며 어영대장이 되고 우의정 ·좌의정에 올랐던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1533 ~ 1601)와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 1531 ~
1598)과 금성(錦城)의 무이루에서 과거 급제 동기 모임 방회(榜會)를 갖은 후 벽오헌에 오르고 시를 읊는다.
한번 헤어진 뒤로
각자 흩어져 돌아가니, 망망한 물 외로운 배가 희미하게 보이네
그대는 고향 생각 배나 더 간절하리니, 연잎은 찬 못에서 늙고 바람이
사립문을 치네
一自離筵各散歸 孤舟渺渺入望依 知君倍切思鄕恨 荷老寒塘風打扉
을묘년의 현인들은 원우 연간의 현인들과
같으니, 담담한 사귐은 신묘하지 않은 곳이 없었네
벽오헌 밖의 많고 많은 대나무여, 당년의 그런 좋은 모임 다시
기억하네
乙卯人同元祐人 淡交無處不爲神 碧梧軒外千竿竹 更記當年此錦茵
나주 금성관과
역사를 같이한 망화루가 복원되어 다행한 일이다. 또한 이제는 다시는 화를 입지 말고 빛날화(華),바랄 망(望)...이곳이 빛나는 나주시를 바라는
장소이기를 빌어본다.
참조=나주시 현존하고 있는 누정 ►과원동 109 금성관(錦城館) ►봉황면 철천리 철야마을 만호정(挽湖亭) ►세지면 벽산리 벽류정 마을 벽류정(碧流亭) ►다시면 영동리 661 보산정사(寶山精舍) ►노안면 금안리 반송마을 쌍계정(雙溪亭) ►다시면 회진리 91 동촌마을 영모정(永慕亭) ►다시면 죽산리 969 화동마을 장춘정(藏春亭) ►금계동 정수루(正綏樓) ►다산면 풍산리 도천마을 계은정(溪隱亭) ►세지면 벽산리 산계마을 관계정(觀溪亭) ►노안면 금안리 인천마을 귀래정(歸來亭) ►공산면 신곡리 봉곡마을 금강정(錦岡亭)►왕곡면 송죽리 영산강변 외구마을 금사정(錦沙亭) ►다시면 회진면 74 동촌마을 기오정(寄傲亭) ►다시면 영동리 초동마을 남사정(南莎亭) ►다시면 영동리 815 초동마을 남파정(南坡亭) ►세지면 대산리 계양마을 ►담락당(湛樂堂) 반남면 신촌리 성내마을 반계정(潘溪亭) ►공산면 가송리 송산정(松山亭) ►노안면 용산리 송정마을 송산정사(松山精舍) ►공산면 상방리 삼장마을수산정(首山亭) ►노암면 금안리 인천마을 수우시정(守愚詩亭) ►다시면 문동리 108 송촌마을 야우정(野憂亭) ►다도면 풍산리 양벽정(漾碧亭) ►세지면 고산리 본산마을 영춘정(永春亭) ►다도면 풍산리 도천마을 영호정(永護亭) ►다시면 죽산리 홍화동 월계정(月溪亭) ►봉황면 송연리 송길마을 장춘재(長春齋) ►다시면 신석리 산29 창주정(滄洲亭) ►노안면 금안리 인천부락 척서정(陟西亭) ► 내남동 죽림동 지역 남산동원 최고정(最高亭) ►공산면 화성리 화산마을 춘성정(春城亭) ►다시면 운봉리 88 회두마을 칠두정(七頭亭) ►남평읍 남석리 저석천 탁사정(濯斯亭) ►문평면 동원리 쌍정마을 학산정(鶴山亭) ►세지면 벽산리 어촌정(漁村亭) ►공산면 가송리 송정마을 연강정(煙江亭) ►세지면 대산리 죽산마을 연계정(蓮溪亭) ►세지면 벽산리 산계마을 산계정(山溪亭) ►봉황면 각동리 삼행정(三杏亭) ►다시면 동당리 844 석관정 나루터 석관정(石串亭) ►다시면 죽산리 324 죽지마을 소요정(逍遙亭) ►노안면 영평리 영안마을 만향정(晩香亭) ►과원동 109 망화루(望華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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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농촌진흥청은 딸기는 비타민이 풍부하고 소염·진통 효과와 고혈압, 당뇨, 비만 등 성인병 예방효과가 있는 영양 만점의 과일로 딸기는 블루베리, 시금치, 브로콜리, 케일, 근대 등과 함께 항산화 효과가 높다고 밝히고 있다.
뿐만아니아 딸기는 단맛과 신맛이 잘 조화 되어 있는 과일이며 향기가 풍부하고, 과일 중에 비타민C가 가장 많고, 신맛을 내는 유기산이 0.6∼1.5% 함유되어 있다. 비타민 함량은 100g중에 80mg으로 레몬의 두 배로, 딸기 5∼6개(약 70g정도)이면 성인이 하루에 필요로 하는 비타민 섭취량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다. 또 여러 가지 호르몬을 조정하는 부신피질의 기능을 활발하게 하므로 체력증진에 효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