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섬에 도착하니 세계에서 손꼽히는 거대 도시인 서울의 한복판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불청객을 경계하는 철새의 울음만이 27만㎡ 규모의 '무인도'를 조용히 채웠다. 밤섬은 식물과 조류의 천국이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섬 전체엔 갈대와 물쑥 애기똥풀 등이 허리 높이까지 자라 있다.
민물가마우지와 청둥오리 왜가리 등 짝짓기와 산란의 장소로 밤섬을 이용하는 새도 많다.
포유류는 홍수 때 떠내려 온 것으로 추정되는 애꿎은 너구리 한 마리가 유일하다. 그나마 발자국만 발견됐다.
밤섬은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위치한 윗밤섬과 마포구 당인동의 아랫밤섬으로 나누어져 있다.
윗밤섬과 아랫밤섬은 한강 수위에 따라 붙고 떨어짐을 반복한다.
대규모 버드나무 군락지로 많은 조류가 발견되는 아랫밤섬엔 민물가마우지 왜가리 중대백로 검은댕기해오라기 등이
서식하며 윗밤섬에선 해오라기, 청둥오리, 흰뺨검둥오리, 꿩 등을 찾아볼 수 있다.
40년 전만 해도 밤섬은 사람이 살던 마을이었다.
갯벌에 기대어 살아 온 620명의 섬주민들이 밤섬을 떠난 것은 1968년 2월 한강개발이 시작되면서다
한강의 기적으로 부르는 인공섬 <여의도> 를 만들기위해 사람들은 밤섬을 폭파했고 그때 생겨난 밤섬의 흙과 돌은
여의도의 기초를 쌓는데 들어갔다. 이렇게 여의도가 생겨났고 밤섬은 그때 사라졌다.
폭파당시 남아있던 밤섬의 암반층은 지난 40년간 강물에 떠밀려온 흙과 생명들을 불러 모았다.
그렇게 폐허에서 다시 시작한 밤섬은 마침내 철새들의 낙원으로 부활하고 진정한 한강의 기적으로 일어선 것이다.
밤섬 옆에는 형제섬 너섬 여의도가 있다.
밤톨 만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밤섬이다.원래 사람이 살았으나 여의도 개발 때 섬 자체가 없어진다.
너섬은 6.25때부터 군용비행장으로 쓰이면서 공사가 시작되고 너섬이 여의도로 개발되면서 옆에 있던 밤섬이 없어졌다.
밤섬을 그대로 두면 여의도가 물에 잠길 것이라 해서 섬을 폭파해버린것이다.
물론 폭파해서 부순 흙을 모두 여의도 바닥에 깔았으니, 밤섬은 자기 몸을 희생했지만 결국은 너섬과 영원히 함께
한 몸이 된 셈이다. 우리가 밟고 다니는 여의도의 땅은 실은 밤섬의 흙인 것이다.
밤섬은 서강(西江)에 가까웠던 탓으로 정조 13년(1789년)에 발간된 호구총수에 한성부 서강방 율도계라는 이름으로
나와있다.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밤섬은 여의도와 함께 고양군 용강면 여율리가 되었다.
<대동지지>에 의하면 서강 남쪽에 있는 한 섬으로 섬 전체가 수십리의 모래로 되어 있으며 거민들은 부유하고 매우 번창한 편이었다고 한다.
특히 경치가 아름다워 <서울명소고적>에서는 율도는 일찌기 마포팔경을 읊은 글 가운데에서도
'율도명사(栗島明沙)'라 하였듯이 맑은 모래가 연달아 있어서 그야말로 한강 강색과 섬의 풍치는 묘하게 어울린다라고] 하였다.
밤섬(栗島)에 관한 조선시대 기록으로, 성현(成俔)의 <용재총화>에 의하면 율도(栗島)는 조선초기부터
뽕나무를 심어 잠업이 성행한 지역이었고, 서울장안에 뽕잎 값이 비쌌을 때 밤섬에서 뽕을 대기도 하였다.
밤섬에 관한 풍습은 명종실록 명종 11년 4월 조(條)에 기록하고 있다.
섬 주민의 생활방식이 문란한 것으로 비쳐져있다. 이는 외부와 교통이 제한되어 남의 이목을 덜 의식했기 때문이다.
동국여지비고]에서도 고려때는 귀양보내던 섬이었으며 도선(渡船)장으로 백사장을 건너 인천으로 가는 간로(間路)가
된다고 하였고 밤섬에 살았던 주민들은 이 곳의 역사가 약 600년이었다고 한다.
1968년 2월 10일, 여의도 개발에 필요한 골재 채취를 하기 위해 이곳을 폭파했다.
마지막 밤섬은 당시 언론에 자세히 소개되었다.그대로 인용한다.
"현재 이 밤섬에는 78가구 6백여 명이 살고 있다. 이 고장의 행정명칭은 마포구 서강동(西江洞) 15통, 6개 반으로
짜여 있다. 서울의 하늘 밑에 살면서도 문명의 혜택을 외면한 채 대대손손을 이어온 이곳 주민들은 5일 내에 살림을
옮겨야 하고 1백 10여 일 후면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는 제 고장에 아쉬움을 돋우고 있는 것이다.
도둑이 없고 질병 없이 살 수 있다는 20세기 신비의 섬마을. 이 모든 은총은 그들만이 모실 수 있는 『부군신』
(府君神)때문이라고 했다. 사실 이곳 주민들은 지금까지 수돗물을 모른다. 한강 물을 그대로 떠다 밥을 지어먹고
냉수로 마시지만 누구 한 사람 설사를 앓지 않았다고 마을 사람들은 말한다.
전기대신 집집마다 『부군등』이라는 초롱불을 켜고 있다.
생업은 예부터 내려오는 조선업. 5일내지 일주일이면 싯가 4만원 짜리 목선 한 대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근년에는 경기가 없어 조그만 나룻배를 만들거나 도선공, 또는 물고기잡이로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언제부터 이 고장에 정착을 했는지는 누구 한 사람 아는 이가 없는듯하지만 동장 김홍성(金弘星.61)씨는
5백여 년 전 한양천도(漢陽遷都)와 때를 같이 했을 곳이라고 내려오는 말을 전했다.
지금도 인(印), 판(判), 마(馬), 석(石), 성(成)씨 등 희성이 많이 살고 있는 것은 한 고장 정착민이 아니라
그 당시 각지에서 서해와 한강을 내다보고 조선업을 일으킬 수 있다는 희망에서 모여 들었다고 볼 수 있다.
『밤섬』이라 이름한 유래는 마포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밤알을 까놓은 것 같았기 때문이라 했다.
이 섬에 재난이 닥치기는 두 번. 을축년 장마 때 주민들은 피난을 하면서 재산을 모두 잃었고,
6.25때 또한 폭격으로 집들이 모두 산산조각이 났었다.
그러나 단지 자신들이 섬기는 부군신당은 기와 한 장 깨지지 않았다는 주민들의 말이었다.
주민들은 해마다 가을이면 부군당에 모여 흰옷을 입고 “올해도 무사히 살았다”고 생선이며 돼지고기를 차려 놓고
절을 해왔다. 섬을 떠나게 된 요즘 주민들은 아침저녁 부군당에 올라가 합장을 한다. 표순조(81)할머니는
“부군당을 떠나면 살 수가 없다”고 집단이주를 서러워하고 있다.
총 1만7천3백 평으로 되어있는 이 섬은 국유지가 6천1백7평, 나머지가 사유지.
이들에게 지불되는 보상은 토지보상비가 8백38만원과 건물보상비가 7백2만원.
주민들은 서울시가 마포구 창천동 와우산에 마련한 연립주택에 집단 이주하게 되었다.
이 섬을 없애는데 드는 TNT값과 공사비가 5천4백40만원, 인부는 석수가 하루 3백 명씩 동원된다.
여기에서 나오는 돌이 무려 4만 트럭. 시 당국은 이 돌은 여의도를 10m 50cm로 쌓아 올리는데 사용하므로
공사비 중 5천만 원은 회수된다고 했다.
서울시민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신비의 섬은 한강개발이라는 거센 물결 때문에 하루 아침에 자취를 잃게 됐다."
그때 밤섬이 없어지면서 이곳에 거주하던 사람은 강제로 이주를 하게 되었고, 마포 밤섬이 고향이셨던 분들이
고향을 그리며 함께 하는 카페 “마포밤섬사랑”(http://cafe.daum.net/bamsumsarang) 도 운영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