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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6월 19일 수요일
[(녹)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 엘리야를 하늘로 들어 올리실 때, 엘리사는 스승의 영의 두 몫을 청하여 엘리야의 겉옷을 받아 기적을 일으킨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갑자기 불 병거가 나타나더니,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갔다.>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2,1.6-14
1 주님께서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에 실어 하늘로 들어 올리실 때였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길갈을 떠나 걷다가, 예리코에 도착하자
6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너는 여기 남아 있어라. 주님께서 나를 요르단 강으로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사는 “주님께서 살아 계시고 스승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저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은 함께 떠났다.
7 예언자들의 무리 가운데 쉰 명이 그들을 따라갔다.
두 사람이 요르단 강 가에 멈추어 서자, 그들도 멀찍이 떨어져 멈추어 섰다.
8 엘리야가 겉옷을 들어 말아 가지고 물을 치니, 물이 이쪽저쪽으로 갈라졌다.
그리하여 그 두 사람은 마른땅을 밟고 강을 건넜다.
9 강을 건넌 다음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물었다.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서 데려가시기 전에,
내가 너에게 해 주어야 할 것을 청하여라.”
그러자 엘리사가 말하였다.
“스승님 영의 두 몫을 받게 해 주십시오.”
10 엘리야가 말하였다. “너는 어려운 청을 하는구나.
주님께서 나를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대로 되겠지만,
보지 못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11 그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걸어가는데,
갑자기 불 병거와 불 말이 나타나서 그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그러자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다.
12 엘리사는 그 광경을 보면서 외쳤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기병이시여!”
엘리사는 엘리야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자기 옷을 움켜쥐고 두 조각으로 찢었다.
13 엘리사는 엘리야에게서 떨어진 겉옷을 집어 들고 되돌아와 요르단 강 가에 섰다.
14 그는 엘리야에게서 떨어진 겉옷을 잡고 강물을 치면서,
“주 엘리야의 하느님께서는 어디에 계신가?” 하고 말하였다.
엘리사가 물을 치니 물이 이쪽저쪽으로 갈라졌다.
이렇게 엘리사가 강을 건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6.16-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2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3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4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5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6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16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17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18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제1독서에서 엘리사에게 이어진 사명을 통해서 하느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다름을 묵상하게 됩니다. 엘리야의 사명이 엘리사에게 넘어가며 주님의 시간과 사업은 계속 이어집니다. 엘리야가 주님께 받은 사명을 엘리야라는 한 인간의 생애에서 본다면, 그 사명은 실패한 것 같습니다.
한 인간의 생애는 하느님의 사명이 완전히 이루어지기에 너무나 짧습니다. 온 생애를 통한 엘리야의 헌신에도 이스라엘은 아직 회개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때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뜻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채로 하느님께서는 엘리야를 하늘로 불러올리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간에서 엘리야의 사명은 엘리사에게 넘어갔고, 구원사는 변함없이 계속해서 흘러갑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 저마다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 사명으로 교회와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고, 복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세우려 하지만, 우리의 힘만으로는 그 무엇도 이루어진 것이 없어 보이고, 목적지는 너무나 멀어 보입니다. 교회와 사회는 바뀌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우리의 시간은 너무나 빨리 지나가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야 할 듯이 여겨집니다. 그러나 사명은 다른 이를 통해서, 다음 세대를 통해서 계속됩니다. 하느님의 시간 안에서 그분 계획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믿고 희망합니다. 우리 노고의 열매가 비록 이 시대에 드러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희망 속에서 사명을 한결같이 수행하여 나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태도입니다. 그분께서 맡기신 사명을 묵묵히 충실하게 실천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나라가 성장합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우리가 살아가며 짓는 숱한 죄를 기워 갚을 수 있는 비결 3가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는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주님께, 그리고 이웃에게, 또한 자연에게 별의별 과오와 실수를 저지르며 죄를 쌓아갑니다. 때로 이 산더미 같은 죄 어떻게 보속해야 되나, 고민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숱한 죄를 기워 갚을 수 있는 비결 3가지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자선과 기도와 단식입니다. 죄를 보속하고 청산할 길이 있으니 천만다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냥 자선•기도•단식이 아니라 제대로 된, 진정성있는 자선•기도•단식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강조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자선•기도•단식의 실천에 있어 ‘위선자들’의 모습을 배격하라고 크게 외치십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위선자들, 거짓 신앙인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가관이었습니다.
허영심과 허세, 자기 과시욕으로 가득했던 부자들은 쥐꼬리만한 적선을 하면서도, 그것을 크게 떠벌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습니다. 소리소문없이 예의바르게 자선을 베풀지 않고, 공개된 자리에서, 플래카드도 크게 내건 다음, 사람들 잔뜩 불러놓고, 그렇게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그들의 자선을 진정한 의미의 자선이 아니었습니다. 궁핍한 사람들의 비참한 처지를 이용해, 은근히 자신들의 관대함을 과시하면서, 스스로를 높이 치켜세우는 가장 비인간적, 비신앙적인 이벤트를 펼쳤던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 앞에 당대 위선자들이 펼쳤던 치졸한 자선의 행태는 차마 견뎌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위선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지적은 아주 날카롭습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 2)
우리는 자선•기도•단식의 실천에 있어 위선자의 반대편, 대척점에 서 있는 누군가를 찾아봐야겠습니다. 그 사람은 겸손한 사람, 진실한 사람, 언행이 일치되는 사람이겠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베풀었던 작은 사랑의 실천 앞에 언제나 겸손해야겠습니다. 진실해야겠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칭찬한다면 이렇게 대응해야겠습니다.
“저는 보잘 것 없는 종일 뿐입니다. 솔직히 저는 아무 것도 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다 하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함께 한 동료들, 이웃들이 도와줘서 가능했습니다.
이웃들을 향한 자선을 베풀 때, 우리는 한 가지 진리를 결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자선을 베풀려는 상대방은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하느님이라는 진리를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준 천사들이라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지니고 있는 모든 부(富), 그리고 또 다른 부인 시간, 재능, 경험과 연륜 등등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으로 온 것이라는 진리를 기억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 하느님께로 되돌려 드린다는 마음으로 자선을 베풀어야겠습니다.
매일 이 세 가지를 실천하지 않으면 목표가 없는 사람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도 산상수훈이 이어집니다. 특별히 기도와 자선과 단식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는 가톨릭교회가 2천 년 동안 삼구, 곧 세속-육신-마귀를 이기기 위해 우리가 특별히 사순절 동안 실천해야 할 세 가지 원칙이었습니다. 원칙은 왜 세워질까요?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수확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곡식이 저절로 자라기는 하지만, 물을 주고 풀을 뽑아주고 거름을 주는 등의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합니다.
나의 노력은 이 시스템이 있느냐, 없느냐로 판가름 납니다. 평생 유지할 기도, 자선, 단식의 매일 루틴을 결정한 자는 이미 믿음으로 삼구와 싸우고 있는 사람입니다. 세속-육신-마귀와의 싸움은 비록 종교인만이 아닌 모든 꿈을 좇는 선한 이들이 매일 하는 일입니다.
우선 꿈이 있는 사람들은 매일 독서, 명상, 감사일기 등을 씁니다. 우리로서는 이를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승호 회장은 책 100권 읽기를 하였고 원하는 것을 매일 100번씩 썼습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매일 독서, 감사일기를 하였고 트위터 공동 설립자인 잭 도시는 매일 명상을 하였습니다. 김연아 선수는 신앙을 받아들이고 묵주반지를 끼고 대회 때마다 성호를 그으며 기도하였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꿈이 없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들은 또한 자신의 육체적 욕망이 꿈의 성취를 방해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매일 건강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과 싸웁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간 단식한 것과 같습니다. 잭 도시는 간헐적 단식을 하였고 긴연아 선수는 “야식이 뭐예요?”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자기 육신의 욕망을 이길 줄 모르는 사람은 목표를 이룰 수 없습니다.
연예인 중 유재석이나 박진영 씨의 몸 관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그들이 왜 그토록 자기 육체를 괴롭힐까요?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드웨인 존스가 왜 굳이 매일 새벽에 운동을 몇 시간씩 하겠습니까? 자기를 이기는 게 곧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꿈이 있는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자선입니다. 매일 자선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목적으로 살 수는 있습니다.
왜 굳이 김연아 선수가 많은 돈을 기부하였을까요? 돈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세상을 위해 노력해야 더 나은 성과가 올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잭 도시는 코로나 구호 활동 및 기타 자선 활동에 10억 달러를 기부하였습니다. 10억 달러는 1조 3천억 원 정도 됩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재단까지 설립하여 가난한 이들을 도우려 하고 주윤발 씨는 자신은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도 1조 원 가까운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였습니다. 목적이 있는 사람들의 목적은 돈이 아닙니다.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돈으로 퇴색시키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루카 복음 6장 20~23절 행복 선언에서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고, 배고픈 자는 복이 있으며, 지금 박해받아서 우는 이들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결국 세속, 육신, 마귀를 이긴 이들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이루지 않고는 ‘사랑’이라는 목표가 완성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삼구는 사랑과 반대 욕구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늘 나라의 목표를 지니고 있다면 매일 삼구와 싸우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곧 기도-자선-단식을 매일 실천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이 없다면 성공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기도, 자선, 단식을 하지 않아도 천국을 원하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한복음에서 심금을 울리는 말씀이 있는데 그 중에 요한복음 8장 32절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 강의를 들으면서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전제조건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전제 조건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된다.” 그렇습니다.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 말씀에 머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비로소 진리를 알게 되는 겁니다. 그때 아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겁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많습니다. 자명한 수학적인 진리도 있고, 존재의 근거를 알려주는 철학적인 진리도 있고, 현대사회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자본과 물질의 진리도 있습니다. 수학적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철학적인 진리도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경제적인 진리도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황제의 권위에 대항하여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던 그는 감시의 그물에 걸려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사형 집행일에 그는 성당의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이렇게 삶이 끝난다는 생각에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를 마치자 황제의 명령이라면서 사형집행이 취소되었습니다. 그는 시베리아에서 10년 동안 유배를 갔습니다. 추운 시베리아에서 10년을 보낼 수 있었던 힘은 성경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유배가 끝나 자유인이 되었던 그는 성경 말씀이 녹아있는 작품을 발표하였습니다. 유명한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있습니다. 러시아가 공산주의가 되면서 성경이 금서로 되었을 때, 그의 작품은 읽을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지성들은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솔제니친이 감옥에서 위로를 받았던 것도, 극한의 고독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말씀의 힘이고, 이 말씀이 진리이며, 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초대교회가 극한의 순교와 박해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말씀’의 힘이었습니다. 주문모 신부님이 1801년 순교한 후, 한국교회는 파리외방 전교회의 사제들이 올 때까지, 30년간 목자 없는 교회로 있었습니다. 사제가 없이, 미사가 없이 한국교회가 30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성경직해’라는 성경말씀입니다. 교우들은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청하였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박해가 심해서가 아닙니다. 교회의 위기는 조직이 무너져서도 아닙니다. 교회의 위기는 자본주의와 물질의 파도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의 위기는 우리가 말씀에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살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지난 1990년도에 ‘2000년대 복음화’를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사목지침으로 정하였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2000년대 교회가 나아갈 방향은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주된 내용은 ‘복음나누기 7단계’였습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어려움이 있었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복음나누기는 미국의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의 성인
성 로무알도(Romuald)
신분 : 은수자, 수도원장
활동연도 : 951?-1027년
같은이름 : 로무알두스, 로무알드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의 오스티네 귀족 출신인 성 로무알두스(Romualdus, 또는 로무알도)는 부친의 살인 사건 때문에 클라세의 산 아폴리나레 수도원으로 피신하였다가, 20여세 때에 그곳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더욱 엄격한 생활을 하려고 수도원을 떠나 베네치아(Venezia) 교외에 살던 마리누스(Marinus)라 부르는 은수자의 제자가 되었다. 978년경 베네치아 공화국의 총독인 성 베드로 우르세올루스(Petrus Urseolus, 1월 10일)가 마리누스와 성 로무알두스를 쿡사(Cuxa)로 데리고 와서 베네딕토 회원이 되게 하자, 이들은 수도원 가까운 곳에 은둔소를 짓고 은수자로 살았다.
그 후 그는 부친이 회개하여 수도자가 되었음을 알고 부친을 만나기 위하여 이탈리아로 갔으며, 이때 오토 3세 황제는 그를 산 아폴리나레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2년 뒤에 사임하고는 페레움(Pereum) 교외에서 은수생활을 하였다.
그 후 헝가리의 마자르인(Magyars)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다가 강제로 쫓겨나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고령에 따른 질병으로 인하여 1027년 6월 19일 파비아노 교외의 발 디 카스트로(Val di Castro)에서 운명하였다.
그가 세운 다섯 개의 은둔소들 가운데 카마돌리에 세운 것은 후일 카말돌리회의 모원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Gregorius V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율리아나 팔코니에리(ST. Juliana Falconeria)
동정
활동지역 : 플로렌스( Florence )
활동연도 : 1270-1341년 성인과 같은이름 : 율리안나, 줄리아나,
쥴리아나, 팔코네리아
플로렌스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성모의 종 수도회 창설자(Seven Founders of Servants of Mary)중의 한분인 알렉시오 팔코니에리와 어머니의 교육을 받고 성장하였다.
그녀의 부모는 플로렌스에서 안눈시아따로 불릴 정도로 교회 일에 헌신적인 분들이었다.
그러나 율리아나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안 사람들은 그녀를 결혼시키려 하였다.
그녀는 이 결혼을 완강히 거부하고, 15세 때 성모의 종 수녀회의 3회원이 되었다.
그녀는 거의 20년 동안이나 자기 집에서 재속 수도자로서 기도와 자선활동을 하며 살았는데, 1304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4세의 율리아나는 기도와 자선활동에 헌신할 수 있는 일단의 복장을 하였으므로, "망토 수녀회"란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그녀의 수도회가 정식으로 승인받은 것은 120년 후이다.
그녀는 71세의 일기로 선종하였고, 1737년에 시성되었다.
성 데오다토 (Deodatus)
활동년도 : +679년?
신분 : 주교
지역 : 느베르(Nevers)
같은 이름 : 데오다또, 데오다뚜스, 데오다투스, 디디에르, 디디엘, 디에
고향에서는 디에(Die) 혹은 디디에르(Didier)로 알려져 있는 성 데오다투스(또는 데오다토)는 프랑스 전역에서 널리 공경을 받는 성인이지만 기록상으로는 전무한 상태이다. 그는 655년경에 느베르의 주교가 되었고, 657년에는 성 아만두스(Amandus)와 성 엘리기우스(Eligius), 성 우앙(Ouen), 성 팔라디우스(Palladius) 그리고 성 파로(Faro)와 함께 상스 시노드(Synod of Sens)에 참석하였다. 7년 동안 주교직을 수행한 그는 스스로 사임하고 보주(Vosges)로 가서 고적한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기간에 대한 이야기들은 불확실한 것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그는 여러 명의 성인들과 유대를 맺었고, 그의 성덕은 매우 빛났다고 한다. 그러나 주민들의 성화를 이기다 못해 이곳을 떠나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로 갔으며, 여기서 이미 공동생활을 하고 있던 은수자들과 합류하였다. 성 데오다투스는 곧 그들의 지도자로 뽑혔고, 국왕 킬데릭의 도움으로 성당을 짓기도 하였다. 이 공동체가 점점 커지자 이곳은 에벨샴 수도원이 발전하는 모태가 되었다.
자신의 관상생활과 현실적인 직무에 조화를 기하는데 어려움을 느낀 그는 또 그곳을 떠나 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길 수 있는 곳을 찾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지금의 생디에(Saint-Die)에 정착하자 곧 제자들이 몰려들어 또 다시 수도원을 세워야만 했다. 이때의 규칙은 성 콜룸바누스(Columbanus)의 것을 채택했다. 그는 성인이 되신 히둘푸스(Hidulphus)와 절친한 사이였으며, 서로 방문하고 성사를 집행하는 등 두 성인의 일치를 심화시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