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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의 문단사
남 진 원
* 정선군 벽탄국민학교에 근무하였다.
* 1월 21일 한국방송통신대학보 시조 ‘밭일구기’ 발표
* 2월 12일 강원일보에 ‘이슬의 노래’ 발표
* 3월 25일 교원복지신보에 ‘봄날(2)’ 발표
* 3월 ‘열매’지에 시 ‘눈병’ 발표
* 3월 31일 아동문학연구 2집에 평론 ‘범문단적인 풍토를’ 발표
* 4월18일 - 5월 23일 까지 6회에 걸쳐 어린이강원에 연재 동화 ‘왕밤할아버지와 달래’ 발표
* 4월 11일 평론 ‘아리랑 문예지 제2집’ 을 읽고
* 5월 27일 권영상 동시집 출판기념회 참석.
* 6월 30일 미래시 7집에 시조 ‘머슴의 사랑’외 발표
* 7월 어깨동무에 동시 고향집 발표
* 10월 4일 동화교실 제4집에 동시 ‘한가위’ 발표.
* 11월 7일에는 두 번째 시집 『나비, 청산의 나비』(시집, 아동문예사) 발행
⁂고향집
바람은 바람끼리
물은 물 끼리
이때 쯤이면
귓속말을 한다.
나무는 나무끼리
꽃은 꽃 끼리
이때 쯤이면
서로 몸을 기댄다.
별이 몇 개
문을 열고
살며시 내려다보는
꿈을 꾸듯
조용한
시골 밤 마을
달님이
시골집 봉창에
밤 깊도록 동양화를 그리고 있다.
고 향
인절미 한 접시에도
정이 철철 넘쳐나던
그 눈길 그 손길
반겨 잡은 손바닥에
눅눅한 눈물이 솟는다
인정이 그리운 오늘
찔레꽃 환한 웃음
유년의 내 강기슭
물결은 잔잔한 미소
어머니로 다가앉네
어질디 어진 바람이
저녁으로 불고 있네
흙냄새 살쪄가는
흙냄새 풀빛 마을
개구리 울음소리도
달큰하게 섞여 살고
송아지 젖빛 목소리
물컹 고인 숭늉내
( 1980. 시조문학 출신 특집 시조. 21페이지)
故 鄕
2022. 1.29, 2023. 5. 13.
사람은 없고
집만 덩그렇게 크다
산 밑이나 큰 길 옆에
무덤들이 자주 보인다
전에 웃고 떠들며 정답던 이들
다 저곳으로 가셨구나
이런 줄 알았으면
그때 그 벗들
좀 더 살갑게 대했을 것을
그때 그 이웃 어른들
좀 더 잘 대해 드렸을 것을
산, 들판
묵묵히 먼저 간 이들을 품에 안고
어머니처럼
살아가는 구나.
( 정선 문협 카페 2024. 4. 5.)
고향
칠순을 바라보며 고향집을 그리노니
울밑에 봉선화들 제일 먼저 달려온다
하늘은 노을을 펴고 잠자리를 날리네
(2020. 5. 14.)
고 향
고향 땅 살이는 고작 10년 정도여도
백년의 삶보다 더한, 깊은 생애 담겨 있어
한 천년 그리고 또 천년 이어나갈 情이네
( 2020. 6. 15. )
고향가는 길
우뚝 선 포플러 따라
황토길 굽이 굽이
아래로 젖줄 드러낸
시냇물이 따라오고
그 위에 물오리 몇 송이
꿈꾸는 듯 떠 있더니
소나무 자작나무
이끼 묻은 바위서리
초가집 매운 연기
고갯길 성황당
모두가 그리운 얼굴
새잎으로 돋아난다.
( 1991. 9월호. 『아동문예』 )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출판사.
고향 그 옛강
얼음장을 깨고
겨울을 녹이는
빨래 방망이 소리가 커질 때면
산마다
진달래 꽃송이가
소쩍새 울음소리처럼 피어나고
봄 봄 봄
물소리도 흥겨워
산 밑에 젖줄처럼 누워
흐르는 강물
온갖 물고기들이
도란도란 모여 사는
너래 반석 깊숙이
백 년도 더 묵은 자라를
전설처럼 키워가고
여름철이면
밭이랑마다 익어가는
옥수수 냄새도 떠내려와
그 속을 함께 흐르고 있는
산골의 아늑한 정
우거진 떡갈나무들이
거꾸로 잠겨
코를 대면
진하게 배어나오는
떡갈나무 냄새
산봉우리가 드리우는
산 그림자에
고요로움이 안개처럼 감돌 때면
바람도 보랏빛으로
강가에 나와
목화송이 같은
송아지 울음을 풀어놓던
아, 고향 그 옛강
( 1982. 5. 『아동문예』)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출판사.)
고향길 들어서면
고향길에는
낯선 돌이 없다
언 듯 언 듯 스치는 모양새
그래, 몇 번 씩은 본 얼굴이다.
고향길에는 낯선 나무가 없다
소나무, 포플러, 미루나무, 대추나무, 밤나무 …
흙속에 굳게 뿌리 내리고
똑 같은 얼굴로 반겨 준다
들과 산은
옛모습 그대로인데
그날 그 아이들은 어디서 무얼 할까
운동장에서 공을 따라다니던 고함 소리와
유리창을 닦으며
깔깔거리던 웃음 소리
고향길로 들어서니
떼지어 선 코스모스
그리운 얼굴처럼 손을 흔든다
아프도록 손을 흔든다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출판사.
고향 냄새
비가 오면 나는 자주 고향 냄새를 맡았다
깡통 차기 하면서 뛰놀던 고샅 거리
영화의 한 장면 같이 눈앞에 늘 보였네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시조작품집 좋은 작품상 수상 (시조문학사) -
고향 땅
귀엽고
정다운 것만
모여 산다
예쁘고
소란스런
새들의 지저귐
돌돌거리며 달려드는
물소리의
아늑함
생각에 잠겨
강둑에 선
누렁이 소
그 모두
내 마음에 닿아
따뜻한 것이 되던
고향
땅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출판사.
고향 산
투박하고 미련스럽다
그래서 더욱
믿음직스러운 고향 산
세월이 가고 또 가도
떠날 줄 모르며
고향을 묵묵히 지켜가며
살아가는 산
올해도 부돌이네 토종 벌통
듬뿍 꿀이 들게
싸리꽃을 피워놓고
밤이면 산은
야경꾼처럼 마을을 살피다
문득 정화수 떠 놓고 비는
경수 어머니의 소원을
물 한 그릇으로 들어주고
백 년 묵은 산삼
마음 착한 할아버지 드리려고
착하게 착하게 사는
어느 할아버지의 꿈 속길을
산신령님이 되어 찾아나선다.
( 1982. 5. 『아동문예』)
고향 살이
고향 땅 살이는 고작 10년 뿐이어도
백 년의 삶보다 더한 깊은 정이 담겨 있지
한 천년 그리고 또 천년 이어나갈 끈이네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시조작품집 좋은 작품상 수상 (시조문학사) -
고향 서정
뭉쉥이 한 덩이에 기쁨을 주고받던
그 손길 그 맘으로 나누던 흙의 가족
눅눅한 삶이었다네 산심 인심 피던 정.
물레방아 돌아가니 마을이 분주했지
장엄한 문래산은 흐뭇해서 내려다보고
장난기 심한 똥개는 설레발이 쳤었지.
아픔을 터놓고는 슬픔을 나누다가
마주 보고 짓던 웃음 들꽃처럼 해맑았지
땀 묻은 얼굴만큼이나 편안했던 사람들
갈래머리 나풀대며 고샅길 뛰놀던 얘들
돌담 돌면 왁자그르르 그 음성 나올 듯 해
가만히 숨을 재우고 귀 세우고 있었지
황톳길 신작로에 줄지어 선 포플러
구름 쉬던 그 나무들 모두 들 흔적 없다
목 아파 보던 고목이 전설 같은 일이 될 줄
어릴 때 인정 많던 아저씨 아주머니들
안부를 묻고 싶어도 인적이 드물어야
뒷산이 북망산이네 무덤 만이 반긴다
하늘 붉던 저녁노을 봉숭아 반쯤 피고
풋고추 상추쌈에 시름 섞던 얘기들
오래된 거미줄처럼 녹슨 채로 숨었구나
싸리울 초가지붕 굴뚝에 연기 피고
별 세던 한 여름밤 신화같은 신비의 밤
들떠서 찾아왔건만 아아, 나는 낯선 손님
그렇게 그리웠던 고향이 아니더냐
고향을 찾아와도 고향은 먼 먼 이국
이제는 외진 풍경들 적막강산이구려.
고향 언덕
양지바른 언덕바지
고향 언덕에
소식처럼 파랗게 봄이 돋았다
언덕에 내가 앉아
하늘을 보면
구름이 흐르는지
내가 흐르는지
그 숲속 그 언덕에
혼자 앉아서
그 옛날 그때처럼
풀피리 분다
삘리리 삘리리
옛날을 분다.
(1979. 4. 10. <문래어린이>신문 창간호).
고향에 대한 색다른 異見
조부모님, 부모님의 수목장을 한 곳, 문래리 고향 뒷산
나무와 풀을 정리하기 위해 갔다
땀을 흘리며 연신 물을 먹으며 톱질을 하고 낫질을 하고 괭이로 뿌리를 캐고 예초기로 마무리하였다
무성하던 풀밭이 예쁜 동산이 되었다.
그 옛날 어른들은 모두 뒷동산에서 둥근 무덤으로 누웠고 논과 밭 대부분은 사과나무 과수원으로 바뀌었다 이제 고향은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피는 마을이 아니었다
하루 종일 정리를 하고 방터골로 오니,
놀라워라!
집 둘레 돌아다니는 다람쥐며 돼지감자 꽃, 키 큰 코스모스, 들꽃들이 무리지어 반겨주었다.
아,
내 귀여운 풀들과 가끔 고라니와 꽃뱀, 새들이 찾아드는 방터골은 이제
정작, 내 고향이 되었구나.
(2023. 9. 26.)
고향에 오니
피로가
단번에
풀린다
고향에 오니
얼마만 인가,
산밑 푸른 강물은
예나 이제나
그 빛을 잃지 않고
저녁노을
한 다발
떠가는 하늘
차에서 내리자
“ 야, 반갑구나!”
철수가 어른이 돼서
흙묻은 굵은 손을
쑤욱 내밀고
“언제 이렇게 컸노?”
내 손을 잡으시는
경수 할머니 손에서
물씬 감자 냄새가 났다.
( 1982. 11. 20. 조약돌 10집)
고향에 오니
피로가
단번에
풀린다
고향에 오니
얼마만 인가,
산밑 푸른 강물은
예나 이제나
그 빛을 잃지 않고
저녁노을
한 다발
떠가는 하늘
차에서 내리자
“ 야, 반갑구나!”
철수가 어른이 돼서
흙 묻은 굵은 손을
쑤욱 내민다.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출판사.
고향에 찾아오니
미운 일곱 살이던 아이가 할아버지가 되어 고향 마을로 들어서니
운동회 하던 날 코스모스처럼
키만 덩그라니 큰 코스모스가 온몸으로 반긴다.
학교는 폐교가 되어 덩치만 큰 꺼칠한 상자 같아졌다.
뭔가가 빠져있는 듯
허전한 느낌이었다.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출판사.
고향은
귀엽고
정다운 것만
모여 산다
예쁘고
소란스런
새들의 지저귐
돌돌거리며 달려드는
물소리의
아늑함
생각에 잠겨
강둑에 선
누렁이 소
그 모두
내 마음에 닿아
따뜻한 것이 된다
( 1982. 11. 20. 조약돌 10집)
고향 이야기
우리 어머니가 살던 고향 마을에 크고 작은 샘이 솟고 있었다. 어머니가 이고 오는 물동이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하늘이 컴컴한 부엌 한 쪽에 웅크리고 있었는데 저녁이면 뒷산에서 우는 부엉이 소리가 물동이에 고인 하늘을 몰래 퍼나르고 어머니는 꿈속에서도 훠이 훠이 부엉이를 쫓고 있었다.
선사시대부터 살던 바람소리가 이따금 동구밖에서 들릴 때가 있다. 내 꿈 속에서도 가끔 낯익은 얼굴로 만나는 바람의 손, 고향 사람들은 잠 속에서도 바람이 앞산에서 내려오는 시간을 안다. 그런 밤이면 마을은 녹말처럼 가라앉았다.
송화가루가 뻐꾸기 울음처럼 날리던 날, 영자 누님은 보따리에 어머니 한숨을 싸 담고 떠났다. 다음 해 보리가 패면 돌아온다던 누님은 속초 어디에서 바다를 파는 비린내 나는 소문만 들려오고 산도라지처럼 뿌리 박고 살자던 할아버지는 대대로 함께 늙어온 고향 달빛을 지고 그해 가을 홀연히 운명하셨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는 어머니 고무신에 성황당 고갯마루 푸른 달빛만 쌓이고 쌓였다. 열병으로 죽어가는 막내 곁에 침묵으로 더욱 붉게 고이는 어머니 가슴앓이
날이 새자, 산 너머 쏟아져내린 생생한 햇살에 파랗게 잠이 깬 까치들이 소금처럼 익은 어머니 눈물을 고향 뒷산에 묻고 있었다.
지금 내리는 눈은 대낮처럼 밝아 와도 저 벌판의 끝에서 맨살 떨고 선 나무들, 한 덩이 매운 맛으로 겨울 낮달이 뜬 채 그날 고향 어른들은 들새처럼 떠나가고 있었다.
( 1989. 4. 15. 제5시집,동시집>, 『가을바람과 풀꽃, 그리움에게』)
( 2015. 4. 15. 남진원동시선집. 지식을 만드는 지식)
*** 고향집과 고향 찾기
고향은 어머니 품처럼 편안하고 따스하다
기계문명 속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잊혀진 고향을 찾아주고 싶다
어린이들에게는 고향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그래서 좀 더 넉넉하고 풍요로운 정신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길 바란다.
이런 뜻에서 나의 고향찾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다.
( 1991년 4월. 『소년문학』)
고향집
이맘때면
고향
여름 집
풀벌레 짙은
모깃불 피고
멍석 위에
풍성하게
쏟아지는 별빛
아늑하게
흐르는
바람
모두가
참으로
평화로워
이맘때면
내 고향
여름 집
나는
지붕 위
하얀 박꽃이 된다
첫 시집 (동시집), 『싸리울』, 1982. 12. 10. 아동믄에사)
(1985. 11. 15. 『 별마을 꿈마을』,한국 명작 동요 동시집)
( 1989. 4. 15. 제5시집,동시집>, 『가을바람과 풀꽃, 그리움에게』)
( 2015. 4. 15. 남진원동시선집. 지식을 만드는 지식)
고향집
보리밥 시래기국 앞에
식구들이
모여 앉으면
가난한
살림에도
웃음이 솟고
숭늉 그릇
모락모락
깊어가는 정
질화로에선
잉걸불이
환하게 타오르고
사락눈
사락사락
깊어가는 밤
호롱불 밝혀놓고
글을 읽다가
할머니 무릎 베고
잠이 들던 집
( 1982. 5. 『아동문예』)
( 1989. 4. 15. 제5시집,동시집>, 『가을바람과 풀꽃, 그리움에게』)
고향집
싸리울
포근히
감싸고 있다
봄, 가을
싱그러운
바람이 살고
새들이
천진스레
노래하는
내 고향
시골 집
모두
한 식구 되어
살아간다.
( 1982. 5. 『아동문예』)
( 1989. 4. 15. 제5시집,동시집>, 『가을바람과 풀꽃, 그리움에게』)
고향집
바람은 바람 끼리
물은 물끼리
이때 쯤이면 귓속말을 한다
나무는 나무끼리
꽃은 꽃끼리
이때 쯤이면
서로 몸을 기댄다
별이 몇 개
문을 열고
살며시 내려다보는
꿈을 꾸듯
조용한
시골 밤 마을
달님이
시골집 봉창에
밤 깊도록 동양화를 그리고 있다.
( 1985. 7. 『어깨동무』)
( 1989. 4. 15. 제5시집,동시집>, 『가을바람과 풀꽃, 그리움에게』)
고향집
파아란
하늘 아래
고추잠자리 날고
해바라기
한나절
해 따라 도는
마당엔
채송화도
곱게 피어서
봉숭아
손톱마다
꽃물들이며
담 밑에
모여앉아
소꿉장난 하던
어린 날
꿈이 살던
아, 고향집
( 1986. 11. 30. 『조약돌』 14집 )
( 1989. 4. 15. 제5시집,동시집>, 『가을바람과 풀꽃, 그리움에게』)
고향집
문을 열면
앞산이
성큼 달려들었다
매미 소리가
몇 줄기
대추나무에 걸린 채
푸르게 흔들리고
어머니 목소리에
반들반들 닳은
부뚜막
반갑지 않은 것 있으랴
봇도랑 물소리가
저 혼자
뒹굴며 놀 때
달님은
노오란 물감을
밤 내내 칠해놓고 갔다.
( 1986. 11. 30. 『조약돌』 14집 )
( 1989. 4. 15. 제5시집,동시집>, 『가을바람과 풀꽃, 그리움에게』)
고향집
문을 열면
앞산이
성큼 달려든다.
매미소리가
몇 줄기
대추나무에 걸린 채
푸르게 흔들리고
어머니 목소리에
반들반들 닳은
부뚜막
반갑지 않은 것이 있으랴
봇도랑 물소리가
저 혼자
뒹굴며 놀 때
음 메 =
송아지 목청이
더 없이 평화로웠다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출판사.
고향집
한밤중에
우리 엄마가
순희네 울 너머로
가만가만 순희 엄마를 부른다
마루 밑에 있던 봉당개가
반가와 콩콩콩
먼저 짖어댄다
얼기설기 엮어놓은 싸리울 너머
슬그머니 밀어 넣는
엄마 손엔
김오르는 인절미 한 접시
철철 넘치는
인정을 받아 쥔 순희 엄마가
달빛처럼 웃는데
지붕 위 바꽃도
흐뭇해서
내려다본다.
( 1986. 11. 30. 『조약돌』 14집 )
( 1989. 4. 15. 제5시집,동시집>, 『가을바람과 풀꽃, 그리움에게』)
고향집
어릴 때
나를 찾아보고 싶어
아릴 때 살던 집을
찾았습니다
세월은 흘러
흘러 갔어도
고향집 풀포기는
그대롭니다
배나무집 순희는
시집을 가고 없어도
순희네 배나무엔
올해도 배꽃이
피었다 지고
산 너머
뻐꾸기가
자꾸 웁니다.
( 1986. 11. 30. 『조약돌』 14집 )
( 1989. 4. 15. 제5시집,동시집>, 『가을바람과 풀꽃, 그리움에게』)
고향집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글썽글썽 눈물만 고였다
신 잃어버리고
꾸중 들을 일
너무 무서워
울밖에 서서 울먹이다
눈물 젖은 얼굴을
울에 기댄 채
나는 그냥 잠이 들었다
아, 달님이 가만히
내 눈물을
닦아주던,
나는 고향집 울타리를 만지고 섰다.
( 1986. 11. 30. 『조약돌』 14집 )
( 1989. 4. 15. 제5시집,동시집>, 『가을바람과 풀꽃, 그리움에게』)
고향집
강변에 누우면
물소리 바람소리
다
내 것이다
논두렁 밭두렁
길을 지나면
흙냄새 풀냄새
모두
내것이다
잠들면
창문엔
환한 달빛
잠 깨면
싱싱한 닭울음 소리
그 모두
그 모두
다 내것이다.
( 1989. 4. 15. 제5시집,동시집>, 『가을바람과 풀꽃, 그리움에게』)
고 향 집
마음이 외로울 때
언덕에 올라
그리운 내 고향
불러 봅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저 하늘 너머
흰 구름 뭉게뭉게 떠도는 그곳
풀밭엔 채송화 맨드라미가
노을처럼 붉게 타는
머언 고향집
대추나무 잎새마다
노래가 익어
매미소리 치렁치렁
늘어지는 한낮
파아란 하늘 속에
고추잠자리
검둥소 한가로이
풀 뜯는 마을
밤이면
꿈속에서
찾아갑니다.
( 1989. 4. 15. 제5시집,동시집>, 『가을바람과 풀꽃, 그리움에게』)
고 향 집
키 큰 나무 그리고 울
술래 잡던 넓은 마당
뒤란엔 잡초만
키 자랑 하고 섰고
빗물 괸 오지 그릇에
숨어 웃는 어린 날
뽀얗게 볕이 묻은
터밭의 깨나무 밑
순희와 소꿉놀던
발자국도 찾아보고
그 속에 깔깔거리던
웃음소리도 찾아본다.
청솔 태우며 밥 지으시던
새댁 때 엄마 모습도
한 여름 대추나무에
푸르게 울던 매미소리도
품어서 안고 살아가는
고향 옛집 싸리울
( 1989. 4. 15. 제5시집,동시집>, 『가을바람과 풀꽃, 그리움에게』)
고 향 집
- 선생님 -
밤마다 찾아오셨다
모자란 공부를 가르쳐주시려고
가난한 농사꾼 아들에게
지혜로움을 넣어주시던
엄봉학 담인 선생님
문밖을 나설 땐
손톱에 때가 낀
내 손을 잡아 주시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지
아제와 오늘과 내일을
고마움으로 살 수 있는 건
더운 손길로 사랑을 주신
우리 선생님 덕분인데
요즘은 어디 계시는 걸까
어디서 무엇을 하시는 걸까
고향집 속에
늘 살아 계시는
우리 선생님
( 1990. 8월. 『아동문학』)
고향집
인절미 한 접시에도 정이 철철 넘쳐 나던
그 눈길 그 손길 반겨 잡은 손바닥에
눅눅한 눈물이 솟는다 인정이 그리운 오늘.
찔레꽃 환한 웃음 유년의 내 강기슭
물결은 잔잔한 미소 어머니로 다가앉네
어질디 어진 바람이 저녁으로 불고 있네.
흙냄새 살쪄 가는 내 고향 풀빛 마을
개구리 울음소리도 달큰하게 섞여 살고
송아지 젖빛 목소리 물컹 고인 숭늉내.
(「나래시조문학」 1981년 봄호)
( 「바다시 낭송 카페」2010. 1. 8.)
(「한국시조큰사전」,한춘섭. 박병순. 이태극. 1985. 3. 23. pp249-250)
- 남진원의 사진과 약력, 시조 작품을 수록 -
( 시조집 『내 인생 밭을 매면』, 삼환인쇄사. 1991.)
고 향 집
등잔불을 켤 때면
옥수수 수염 같은 어둠이
옹기종기 모여 앉는다
모여 앉았다가는 슬며시 드러눕는다
등잔불이 켜지고
어둠은
메주 덩이 뒤쪽에 가서 거꾸로 매달리고
할머니
얘기주머니 속에 들어가
잠을 자기도 하고
그런 어둠과 불빛이 만들어내는
어스름 속에서
길쌈을 하시는
어머님과 고모님 그리고 할머님은
한 폭의 수묵화였다.
( 1992. 91 아동문학 우수작 선집, 『달달달달 콤콤콤콤 외』계몽사 )
고향집
비오는 날이면 고소한 기름 냄새
집집마다 숯을 피워 부침개를 부쳐냈다
마을이 잔칫날 같았지, 그저 기분 들 뜨던 집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시조작품집 좋은 작품상 수상 (시조문학사) -
고향집 겨울 아침
고인 물을 떠내고
새물을 담듯이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먼지를 터시는 할머니
살찐 송아지 울음도 들어앉고
발가락이 시린 새소리도 내려앉고
여물 끓는 냄새도
푸짐하게 들어찼지
잉걸불 담긴 화로가
방안에 놓여지면
그때서야
게으름뱅이 해님이 우리 집에 찾아와
해해해
밝은 웃음을 깔아놓곤 했지.
( 제8십, 동시집 『할아버지 이뽑기』, 1997. 9. 25. 대교출판 )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출판사.)
고향집 경수네 대추나무
한 아름도 더 되는
경수네 대추나무
살금살금 정지를 지나
울안으로 들어서면
나무엔 꿀따는 벌들
잔치 한창 이었지
서산 머리 해 기울 쯤
대추나무 아래에 서면
황금 날게 옷을 입은
매미들 둘 셋 넷 …
꿈꾸고 있는 것일까
쉬고 있는 것일까
심심하면 경수네 집
대추나무 밑에 가서
숨어 있는 매미들을
찾아보곤 돌아왔지
까마득 너무 높아서
목 아프던 그 시절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출판사.)
고향집 대추나무에서
고향집 뒤란에서 자라던 대추나무
여름날 심심했나 매미를 데려와서
낮잠에 들려던 나를 거침없이 불러냈지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시조작품집 좋은 작품상 수상 (시조문학사) -
고향집 박꽃
이맘때면
내 고향
여름 집
풀냄새 짙은
모깃불 피고
멍석 위에
풍성하게 쏟아지는
별빛
아늑하게
흐르는
바람
모두가
참으로
평화로워
이만때면
내 고향
여름 집
나는
지붕 위
하얀 박꽃이 된다
( 제17시집, 『조그마하게 살기』,2023. 5. 태원 )
고향집 밥상
가난에 힘겨운 날
우리 모두 그랬던 날
없어도 주고 싶은
웃음 하나 사랑 하나
호박을 쩍쩍 따개며
검정 쇠솥에 삶았지
보름달 등 삼아
마당에 자리하면
상위에 김 오르는
옥수수며 감자며
새큼한 물김치 맛도
꿀맛이던 그 시절
( 1991. 9. 25. 조약돌 19집. 제목에 ‘밥상’을 덧붙임 )
( 1991. 5. 『한국시』. )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출판사.
고향집 선자 아재 어머니
뙤약볕 아래에서
호미질로 늙으셔도
고향길 들어서자
반겨맞아 주시면서
더운 밥 지어 놓으시고
많이 먹으라 하셨지
일하시던 땀 닦으며
덥석 손을 잡으시고
지노이 많이 컸구나
핌들재, 공부하느라
인정이 단꿀로 흐르시던
선자 아재 어머니.
( 1991. 9. 25. 조약돌 19집. 제목에 ‘밥상’을 덧붙임 )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출판사.)
그때, 시골의 고향집에서
깨꽃 같은 눈 잎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포옥 마을을 감싼다
나는 아랫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빼꼼이 밖을 내다본다.
한 겹 한 겹 부침개를 부쳐놓듯이
눈이 자꾸 쌓인다
풍년 들라나?
윗방에서 할아버지 고드랫돌 넘기시는 소리 옆에
할머니 목소리도
눈발에 쌓여갔다
그때, 시골의 고향집에서….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고향집에서 나를 찾다
우리 어머니가 살던 고향 마을에 크고 작은 샘이 솟고 있었다. 어머니가 이고 오는 물동이에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하늘이 컴컴한 부엌 한 쪽에 웅크리고 있었는데 저녁이면 뒷산에서 우는 부엉이 소리가 물동이에 고인 하늘을 몰래 퍼나르고 어머니는 꿈속에서도 훠이 훠이 부엉이를 쫓고 있었다.
선사시대부터 살던 바람소리가 이따금 동구밖에서 들릴 때가 있다. 내 꿈 속에서도 가끔 낯익은 얼굴로 만나는 바람의 손, 고향 사람들은 잠 속에서도 바람이 앞산에서 내려오는 시간을 안다. 그런 밤이면 마을은 녹말처럼 가라앉았다.
송화가루가 뻐꾸기 울음처럼 날리던 날, 영자 누님은 보따리에 어머니 한숨을 싸 담고 떠났다. 다음 해 보리가 패면 돌아온다던 누님은 속초 어디에서 바다를 파는 비린내 나는 소문만 들려오고 산도라지처럼 뿌리 박고 살자던 할아버지는 대대로 함께 늙어온 고향 달빛을 지고 그해 가을 홀연히 운명하셨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는 어머니 고무신에 성황당 고갯마루 푸른 달빛만 쌓이고 쌓였다. 열병으로 죽어가는 막내 곁에 침묵으로 더욱 붉게 고이는 어머니 가슴앓이
날이 새자, 산 너머 쏟아져내린 생생한 햇살에 파랗게 잠이 깬 까치들이 소금처럼 익은 어머니 눈물을 고향 뒷산에 묻고 있었다.
지금 내리는 눈은 대낮처럼 밝아 와도 저 벌판의 끝에서 맨살 떨고 선 나무들, 한 덩이 매운 맛으로 겨울 낮달이 뜬 채 그날 고향 어른들은 들새처럼 떠나가고 있었다.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고향집 우물
고향집 뒤울 사이 대추나무 기대며 크고
그 길 따라 밭 가에는 생명 水 솟았는데
또 언제 맛볼 수 있을까 세월 속에 묻힌 우물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시조작품집 좋은 작품상 수상 (시조문학사) -
고향집 유리창
밤새 잠든 사이
유리창에는
동장군이 그림을 그려놓고 갔다
창 너머 검정색 굴뚝도 보이지 않고
까치소리도 빨갛게 얼어버린
오늘 아침은
유리창에 신기한 요술 궁전 한 채가 또 지어졌다
동장군이 밤마다 새롭게 그려놓은
그림을 보며
나는 날마다 새로운 마법의 성에 사는
환상의 꿈이 커 갔다.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출판사.)
고향을 생각하다
봄이면 산은 웃음을 쏟아냈다. 순정의 진달래 웃음과 찔레꽃 순백의 웃음, 모두 유년의 내 강기슭에 피어나고 있네.
어질디 어진 바람은
저녁 같은 따스함으로 불고
물결은 잔잔한 미소로 다가오지
흙냄새 진한 풀빛 마을, 고향에는
개구리 울음소리도
달큰하게 섞여 살았지.
그런 고향에는 정이 있고 마음 편한 어머니가 계셨지. 어디 그뿐이던가, 개구리 울고 황소의 큰 눈에 보이던 순한 모습이 스크린처럼 다가왔지.
그렇지, 사람살이는 情이 최고라,
인절미 한 접시 주고 받더라도
정이 철철 넘쳐나던 고향 마을
음식에 담긴 그 눈길 그 손길 …
돌아보니 눅눅한 눈물이 솟는다
인정이 그리운 오늘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출판사.
고향집 울타리
그땐 왜 그렇게 무서웠나,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글썽글썽 눈물만 고였다.
신 잃어버리고
꾸중 들을 일
무서워
울밖에 서서 울먹이다
눈물 젖은 얼굴을
울에 기댄 채
그냥 잠이 들기도 했지.
달님이
내 눈물을 닦아주던......
나는 지금
고향집 울타리를
만지고 섰다.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출판사.
고향집의 겨울밤
-
등잔불 아레
책을 펴놓고
공부를 하던 날
그리워라
꿀물을 타 주시던
불빛처럼 따스한
어머니 손
어슴프레한 어둠이
너무 따뜻해
평화로움만 넘실대던 방 안
아궁이에선
탁, 탁
군불지핀 장작이 타오르고
부엉이 울음이
책갈피 사이로
가만가만 찾아들었던
가장 마음 편한 밤이 된 것은
어머니의 평화로움 때문이었다..
( 1990년 봄 『아동문학평론』 )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고향집의 겨울 아침
고인 물을 떠내고
새 물을 담듯이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먼지를 터시는 할머니
살찐 송아지 뽀얀 울음도 들어앉고
발가락이 시린 새소리도 내려앉고
여물 끓는 냄새도
푸짐하게 들어찼다
잉걸불 담긴 화로가
방안에 놓여지면
그때서야
게으름뱅이 해님이 우리 집을 찾아와
해해해
밝은 웃음을 깔아놓곤 했다..
( 1990년 봄 『아동문학평론』 )
고향집의 경수네 대추나무
한 아름도 더 되는
경수네 대추나무
살금살금 정지를 지나
울안으로 들어서면
나무엔 꿀따는 벌들
잔치 한창 이었지
서산 머리 해 기울 쯤
대추나무 아래에 서면
황금 날게 옷을 입은
매미들 둘 셋 넷 …
꿈꾸고 있는 것일까
쉬고 있는 것일까
심심하면 경수네 집
대추나무 밑에 가서
숨어 있는 매미들을
찾아보곤 돌아왔지
까마득 너무 높아서
목 아프던 그 시절
( 1991. 9. 25. 조약돌 19집. 제목에 ‘밥상’을 덧붙임 )
고향집의 해 저문 저녁처럼
박넝쿨 주저리주저리
감겨 올라간 지붕 위로
핏빛 노을이 흐르고
청솔 타는 냄새
자욱한
울 너머로
순희가 나를 부르던
고향집도
싸리울도
이젠 먼 얘기지만
아직도 깊은 산
외딴 집 뒤란엔
왕거미줄이 걸리고
방안엔
몇 식구 옹기종기 모여
등잔불처럼 훈훈한
저녁을 나누고 있을 게다.
(1982. 조약돌 10집)
(1988. 8. 30. 제4시집<동시집>, 『풀잎과 코스모스에게 』)
(1989. 4. 15. 제5시집,동시집>, 『가을바람과 풀꽃, 그리움에게』)
( 2015. 4. 15. 남진원동시선집. 지식을 만드는 지식)
고향 친구들
나른해져서
졸음 같은
봄날이면
은자 영자 선자 순희 옥희
바구니마다
아지랑이도 가득히
파릇한 달래도 가득히
그들 순한 눈빛은
달래 뿌리에서
뽀얗게 피어났다.
또 있지 또 있어, 맑은 웃음도
마구 냉이처럼 헝클어진 채
바구니에 담겼지
또 있지 또 있어
소 꼴 가득 베어 한 짐씩 지고 소나기 맞으며 들어가던 친구와,
논물 대러 가던 친구들 …,
고 애들
나처럼 홀딱
늙어가고 있겠지
아들 낳고 딸 낳고 말이야
시집 장가보내고
할배, 할매가 되어가겠구나, 우습다.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출판사.
*한가위
남진원
은하의
물결이 흐르고
하얗게 메밀꽃이 핀 밤
아이들은
조개처럼 하얀 송편을 먹고
살찐 달빛을 먹고
강강수월래 강강수월래
목소리가 환하게 어우러지면
맑은 웃음이 고여
달빛에 익는
누나의 옷고름
황금빛 노래에
들판마저
꿈에 부풀어 일렁이고
마을은 온통
강강수월래
강강수월래
신명난 아이들 목소리로
또 하나 커다란 보름달이 뜬다.
- 1985. 10.4 동화교실(제4집) -
*아리랑 문예지 [제2집]을 읽고
예부터 정선, 영월, 평창은 중앙으로부터 소외된 지역으로 낙향한 선비들이 살았거나 아니면 역적으로 몰려 죄인들이 은거한 유배지로 알려져 있다. 산세가 험하고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제일 문화적인 혜택을 받지 못해 온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곳에서 김길식 회장이 앞장서서 문학의 꽃을 피우기 위해 온갖 정성을 쏟고 있는 것을 보니 눈물겹도록 고마운 일이다.
아리랑 문예지 창간호를 필두로 이제 2집이 나오고 또 3집을 발간 한다고 하니 문학동호인으로 즐거운 마음 한량없다.
앞으로 4집, 5집, 6집 계속해서 나오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며 아리랑 문예지 2집에 발표된 회원들의 작품을 독자의 한 사람으로 느낀점을 몇가지 적어 본다.
0. 오늘 같은 날(안광오)
불가에서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라는 말이 있다. 푸른 안경을 쓰고 보면 세상이 모두 푸르게 보이고 붉은 안경을 쓰고 보면 세상이 붉게 보이는 것처럼 모든 게 마음을 아떻게 갖느냐에 따라 사물의 위상이 달라 보인다는 뜻이다.
안광오님의 [오늘 같은 날]은 처갓집에 가서 장인, 장모님을 뵙고 즐거운 마음을 시로 엮은 것 같다. 옛말에 처갓집 말뚝만 봐도 절을 하고 싶다는 말이 있는데 그만큼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다는 뜻일 게다.
[아! / 내 마음은 피어나는 장미꽃 주인]의 표현은 가귀다. 시 전체적인 조화가 원마하게 이루어졌다.
0. 봄(김삼복)
봄의 아름운 정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수 놓여진 작품이다.
[ 나의 세상 만난 송아지 / 아지랑이 피는 양지에서 / 껌 씹듯 되새김질하고 ]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형상력이 뛰어나 보인다.
0. 가을밤(신혜숙)
[머언 산 넘어온 가을 지나는 소리]
청각적 이미지가 돋보인다.
0. 당 집 (신혜숙)
전통적이고 토속적인 소재를 시로 다루었는데 구성이 야무지고 시적 에스프리가 뛰어나다.
0. 삶 (김길식)
삶에 대한 진솔한 마음이 퍽 감동적이다.
생과 사 그 속에서 우리들은 어쩌면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곡예사 같다. 김길식님의 시는 인생의 한 가운데에서 생을 관조하는 안목이 매우 높다. 지면 관계상 다른 회원들의 작품을 일일이 거론하지 못함을 송구스럽게 생각하며 시란 뚝심 있는 농부가 부지런히 밭을 일구는 것과 같은 작업이라고 생각되어 우리 아리랑 회원들, 앞으로 더 좋은 작품 쓰기를 믿는다.
끝으로 시작에는 왕도가 없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지어보기를 부탁한다. 다음 기회엔 이번에 거론하지 못한 회원님들의 작품에 대해 거론하도록 하고 아리랑문예지의 발전을 멀리서 손모아 빈다.
(1985.4.11)
* 동화마을 여름호에 동화, ‘한여름 밤의 꿈’ 발표
⁂ 한 여름 밤의 꿈
별남이는 강원도 어느 산속에 사는 아이입니다.
어느 날 밤이었어요.
별남이는 숲속으로 자꾸 걸어가고 있었어요. 숲속에 숨어있던 어둠이 조용히 밀려들고 있었지요. 어둠은 나무와 풀잎과 새들에게 다가가서 새 옷을 입히기 시작했어요. 연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어둠의 옷을 입히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어둠은 나무와 풀과 새들을 편안하고 아늑한 꿈길로 데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답니다.
별남이가 얼마만큼 어둠을 따라 걷다보니 별남이 몸에도 풀풀 어둠이 묻어나고 있었어요. 그때 나무와 풀잎과 새들은 어둠이 깔아놓은 꿈속 나라로 들어서고 있었어요. 그런데 거기에는 풀벌레들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어요. 풀벌레들은 파랑 노랑 색색의 악기를 들고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했어요.
별남이는 깜짝 놀랐어요. 이런 일은 생전 처음 겪어보는 굉장한 일이었지요. 그곳에는 황금옷을 입은 기린도 있었고 별남이가 마음 속에서 그려보던 얼굴이 예쁜 사슴도 있었어요, 그런데 더욱 놀란 것은 폴벌레들이 연주하는 악기 속에서 하나 둘 셋…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아기별들이 날개를 팔랑이며 날아 나오고 있었어요.
악기 속에서 나온 별들은 큰 나무 위를 오르내리기도 하고 이쪽 저쪽 풀잎 뒤에 숨어 술래잡기도 하며 놀기 시작했어요. 어떤 별은 나뭇잎과 소곤거리며 얘기를 나누는 모습도 보였어요.
“얘, 너도 함께 저기 가서 놀고 싶지 않니?”
누군가가 별남이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귓가에 속삭였어요. 바람이었어요. 따뜻한 바람이었어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걸요?”
정말이지 별남이는 몇 번인가 발걸음을 옮겨 보았지만 걸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꼼짝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어요.
“넌 착한 아이가 아니구나. 마음이 착하지 못하면 누구든지 이곳에 함부로 들어올 수가 없단다."
어느새 날개를 단 아기별 하나가 별남이에게로 와서 말했어요. 아기별의 말을 듣고 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었어요.
공부시간에 장난을 하다 선생님께 꾸중 들은 일, 옆짝 영순이를 괴롭혀 주던 일, 남의 일기장을 훔쳐 보던 일, 그런 것들이 생각나자 별남이는 부끄러웠어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니? 옳아, 너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 모양이구나.'
아기별이 별남이에게 말했어요.
“어떻게 알지? 너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요술거울이라도 가지고 있니?”
별남이는 아기별이 자기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이상스러웠어요.
“ 그런 것쯤은 대번에 알 수 있지. 너의 머리를 만져 봐.”
별남이는 아기별의 말을 듣고 머리를 만져봤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별남이의 머리에는 그림에서만 보던 도깨비 뿔이 세 개나 돋아났어요. 별남이는 갑자기 무서워졌어요. ‘어떻게 하면 좋지, 내 머리에는 뿔이 나다니…’
별남이는 부끄럽고 슬퍼서 울기 시작했어요.
“그래, 울으려무나. 눈물이야말로 용서해주고 사랑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빛이란다. 나를 잘 보렴.”
아기별은 별남이를 위해 기도하듯 눈물을 흘렸어요. 아기별의 초롱초롱한 눈에서 눈물이 흐를때마다 별의 눈빛은 더욱 맑아지고 눈물은 나무와 풀잎과 숲에 닿아 수많은 별이 되어 빛나고 있었어요.
별남이는 아기별의 눈물을 보고 있으니 온통 꿈을 꾸는 것처럼 기쁨으로 가득찼어요, 어두운 밤이었지만 별남이의 눈에는 모든 게 신비스런 빛으로 가득찼어요.
“아름다운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어둠 속에서도 모두가 아름답게 보이는 거야. 별남이는 이제 사랑의 눈을 가졌구나.”
바람이 조용히 별남이에게 속삭이고 있었어요.
“그러나 사랑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니? 그건 바로 조금 전에
아기별이 흘린 눈물처럼 남을 용서해 줄 수 있는 마음이란다.”
별남이는 바람이 하는 말을 들으며 머리를 도 만져보았어요. 그런데 도깨비 뿔 대신 머리엔 금빛으로 수놓은 풀잎모자가 씌워져 있지 않겠어요?
“어, 이게 어떻게 된 이이지?”
별남이는 어리둥절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별남이의 머리엔 보기에도 흉측한 도개비 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별남아! 이제는 너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란다. 이 모자는 사랑의 눈을 가진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영광스러운 모자란다.”
아기별은 별남이의 모자를 가리카며 말했습니다.
“자, 너도 이젠 우리와 같은 친구가 된 거야.”
아기별은 힘껏 별남이의 손을 끌어당겼어요.
그러자 별남이의 몸은 갑자기 하늘로 둥둥 뜨기 시작했어요.
숲속에서 놀던 아기별들이 하나, 둘 날개를 팔랑이며 하늘로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어요. 풀벌레들은 더욱 신나는 노래를 부르고 나무와 풀잎들은 작은 손을 꽃잎처럼 흔들어주었어요.
여러분, 여름밤에 가만히 하늘을 쳐다보세요. 그러면 그 중에 유난히 반짝이는 별 하나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반짝이는 사랑의 별을 말이어요.
아동문학연구 2집 - 아동문학인에게 드리는 공개장-
凡文壇的인 風土를
남진원
혹자는 말하기를 ‘아동문학이 몰지각한 인간들에 의해 짓밟혀 있는 것을 본다. 지금 우리의 아동문학은 천박한 유행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 혹은 말장난이 되고 웃음거리가 되어 있다. 아동문학은 동심과 꿈을 팔면서 사치한 인간들이 사는 천당으로 가 버리고 이 땅에는 없다.’고 한다.
이글을 쓴 작자의 의도를 충분히 짐작은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도 말초적이고 신경질적인 표현이 아닌가 싶다.
대저, 창작 행위는 자체가 개인의 자아실현과 인간완성에 있다는 것을 일반적 대명제로 한다면 아동문학이라고 이러한 문학의 범주 속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위의 말을 인용한 대로라면 이러한 표현을 한 본인과 그 외 자화자찬 격인 국히 소수의 엘리트群(?)을 제외하고는 그 외 아동문학인들은 작가적 양심도 없이 천박한 유행에나 쫓는 작품들을 생산해 내고 있다는 말인가? 사실이 그렇다면 개탄을 금치 못할 일이다. 허나 취중에서 서너잔 마신 술로 하여 제 작품만 잘ㄹ 났고 참된 문학이라고 씨부렁거리는 것은 술 때문이라고도 보아 줄 수 있지만 무릇, 한 시대의 작품을 두고 논할 때에는 좀더 넓은 식견과 안목으로 명확한 논리 진술과 문제점을 도출하여 그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해야 되리라고 본다.
더더욱 세간에 발표된 몇몇 작품을 보고 유아독존의 자세로 마치 전체가 다 그렇다는 식으로 매도하는 편협된 평은 멀쩡한 정신을 가진 식자라면 반드시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글을 쓰는 작가가 개인의 영달을 위해 처세술에만 골몰하여 문단 정치 행각을 일삼는데 헛된 시간을 보낸다거나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그 좋은 문학상(?)이나 하나 타 볼까 하는 부질없는 공명심에 연연하는 일, 그리고 작품 발표의 기회에 급급한 나머지 알량한 이름 석자나 활자화 되길 바라는 치졸한 짓을 한다면 이 얼머나 뭇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겠는가?
나는 아동문학을 순수와 사랑의 토양속에서 가꾸어 가는 나무라고 말하고 싶다.
순수와 사랑, 그 절대적 자유의 바탕 위에서 아동문학이라는 나무를 심고 가꾸고 꽃 피워야 할 일은 우리 아동문학인 모두의 권리이며 의무인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동문학은 오늘날 안이한 생활, 편리한 생활만을 추구해나가는 부류의 인간들에게, 또 기계와 기름, 소음, 공해에 찌든 채 병들어가는 물질 만능의 현대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오늘의 문학이자, 미래의 문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작가가 작품을 쓴다는 것은 신이 부여33한 은혜로 알고 감사해야 할 일이다. 글을 슨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보상을 받고도 남는 일이 아니겠는가.
비록 야산에 피어 있는 보잘 것 없는 꽃잎일지라도 향기가 좋으면 먼 곳에 있는 나비가 찾아오기 마련이고 밤(栗)이 익으면 절로 송이가 벌어지는 것과 같이 우리 아동문학인들은 애오라지 한 마음이 되어 범 문단적인 풍토 아래 글 쓰는 일에 전념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무슨 회니, 네가 무슨 회니 하는 아집에 찬 소속감도 버리고 강원도니 경상도니 전라도니 제주도니 하는 지역적인 배타관념도 불식하면서 아동문학이란 정점을 축으로 하여 사랑과 순수의 토양 아래 혼신의 힘을 다하여 아동문학의 꽃을 피우자고 볼초 소생이 강호 제현들에게 무례함을 무릅쓰고 천명하는 바이다.
*동화- 왕밤 할아버지와 달래
<1>
봄이라곤 해도 아직은 아침 저녁 콧잔등이 시린 바람이 붑니다. 연화산 언덕배기 양지쪽에는 ‘달래’라는 꽃씨가 땅속에서 싹이 틀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캄캄한 어둠 뿐인 땅속에는 아직 으스스한 추위만 감돌았습니다. 그러나 달래는 땅위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희망으로 가득 차서 조금은 기쁨에 들떠 있습니다. 작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았습니다.
‘아휴, 갑갑해.’ 달래는 짜증이 났습니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꼼짝 할 수 없습니다. 이러다간 여영 땅 속에 묻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두려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애야, 조급하게 굴 것 없다.”
달래의 쬐그마한 귓속으로 어디선가 훈훈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누구세요?”
달래는 어둠 속에서 소리나는 곳을 향하여 귀를 오무렸습니다.
“나 말이냐? 난 이곳 터주대감이란다. 이곳에서 살아온 지가 올해로 꼭 삼백년이 된다.여기서는 모두들 왕밤 할아버지라고 부르지.”
왕밤 할아버지는 긴 뿌리를 약간 움직이며 자랑스러운 듯 말했습니다. 달래는 자기 말고 또 다른 누가 곁에 있다는 것을 알자, 한결 마음이 놓였습니다.
“할아버지, 저는 언제쯤 바깥 세상으로 나갈 수 있나요?”
달래는 하루 빨리 칙칙하고 습한 땅 속을 벗어나 넓은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습니다. 어둡고 캄캄한 이곳은 정말 달래에겐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더구나 전과는 달리 달래의 가슴이 점점 갑갑해져 왔고 숨이 찼습니다.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이곳에서 오랫동안 살아 오셨기 때문에 달래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달래는 생각했습니다.
“할아버지, 말씀 좀 해 주세요. 저는 언제 쯤 숨막힐 듯한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지요?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나요?”
그러나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한동안 무겁고 어두운 시간이 흘렀습니다.
“기다려야 하는 거야. 너처럼 그렇게 성미가 급해서야 될 일도 안 되지. 세상에 쉬운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법이란다. 조금 더 참고 기다려 보려무나.”
무조건 기다리라는 말에 달래는 화통이 터졌지만 꾹꾹 눌러 참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지낼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달래는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아무도 달래의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가 없다는 게 슬펐습니다. 왕밤 나무 할아버지는 마음이 좋아 보였는데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무슨 이야기라도 좋으니 누가 이럴 때 아무 얘기라도 들려주었으면 갑갑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달래의 주위에는 왕밤나무 할아버지의 다리 같은 길다란 나무 뿌리만 이리저리 뻗어있고 칙치한 흙냄새만 풍겼습니다.
“아이, 속이 메스꺼워라.”
며칠 전 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머리도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현기증이 날정도로 정신이 어질거리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쓰러져서는 안 돼. 나는 새 잎을 틔워야 해.”
달래는 아픔을 가까스로 참으며 몸을 꼿꼿이 치켜드는 작업을 했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수를 셀 수도 없을 만큼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허사였습니다. ‘새 잎을 틔워 보기도 전에, 땅 위 세상에 나가 보기도 전에 영영 죽고 마는구나!’
달래는 슬픔이 복받쳐 오르는 것을 참을 길이 없었습니다. 엉엉 소리내어 울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울려고해도 울 기운조차 이제는 없었습니다. 달래는 피곤해지는 몸을 가누지못한 채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얼마나 잤는지 모릅니다. 달래가 잠에서 개어났을 때에는 연화산 등성이에 듬성듬성 버짐 먹은 얼굴처럼 붙어있던 겨울눈도 모조리 자취를 감춘 날이었습니다. 꽁꽁 얼어붙었던 연화산 골짜기에는 시냇물이 파란 하늘을 물 밑에 곱게 깔아놓았습니다.
그러나 역시 달래의 눈앞에 보이는 건 캄캄한 어둠뿐 이었습니다. ‘내가 살아 있었구나!’ 달래는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살아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래서 또다시 몸을 치켜들고 땅위로 솟아오르려고 했습니다.
‘나는 밝은 세상에서 살고 싶은 거야. 어둠 속의 세상은 싫어.’ 달래는 온 힘을 모아 뒤채었습니다. 흙벽에 자신의 몸을 부술 듯 흔들었습니다. 살점이 떨어져나갈 듯 아팠지만 하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쾅!’ 가슴이 쪼개지는 고통을 느끼며 달래는 가물가물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2>
간 밤에 밤새도록 봄비가 내린 탓으로 연화산은 목욕을 한 것처럼 말끔했습니다.
올해 들어 유난히 포근한 아침 햇살이 연화산에 담뿍 쏟아져내리고 있습니다. 앙상했던 나무들은 생기있게 물을 빨아올리기 시작합니다. 남쪽에서 꽃 내음이 달큰하게 묻은 봄바람이 이곳 연화산에도 찾아왔습니다.
제일 먼저 겨울잠에서 깨어난 버들개지가 흔들거리며 봄바람을 반깁니다. 바위 밑에 웅크리고 있던 개구리도 햇살을 한입 물고 껑충껑충 뛰어 봅니다. 숲속에 숨어 있던 새들이 신이 난 듯 날개를 파득이며 푸른 하늘 속으로 솟구쳐 오릅니다. 졸졸거리며 흐르는 시냇물 소리도 맑은 공기 속으로 굴러 퍼지고 있습니다. 연화산 산 속 식구들은 모두가 즐거운 봄나들이를 하고 있습니다.
왕밤나무 할아버지도 큰 나뭇가지를 흔들며 기지개를 켰습니다. 그러나 몸이 전 같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내가 너무 늙었어.”
생각해 보니 다른 산짐승이나 나무들 보다 더 오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득 왕밤 나무 할아버지는 지난 날의 일들이 아련한 추억으로 떠오릅니다.
연화산이 붉고 노란 단풍잎으로 꽃대궐을 이룬 어느 가을 날,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나뭇가지가 찢어지도록 탐스러운 밤송이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습니다.
“야! 이 밤 송이 좀 봐.”
‘어휴, 세상에 이렇게 큰 밤송이는 처음 보겠다.“
다람쥐와 산토끼가 부러운 듯 저마다 한마디 씩 재잘거리며 지나갔습니다. 그럴 때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여간 자랑스럽지가 않았습니다.
“햇볕에 잘 익혀서 산속 친구들에게 선물을 해야지.”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산속 친구들에게 주렁주렁 열린 왕밤을 선물한다고 생각하니 기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달님이 환하게 떠오르는 밤이면 왕밤을 잘 익게 해달라고 빌기도 했습니다.
그 해 늦가을, 첫 서리가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은 날 아침,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알밤을 하나, 둘 모두 산 속 가족들에게 보내주었습니다.
“맛있다. 맛 있어.”
“이렇게 맛 좋은 알밤은 처음인 걸.”
다람쥐며 토끼, 노루들까지 우루루 몰려 들어 알밤을 까먹으며 좋아했습니다.
왕밤나무 할아버지가 일년 내내 익힌 알밤은 해마다 연화산 산속 가족들에게 햔겨울 동안 큰 식량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산짐승들은 커다랗고 우람한 밤나무 할아버지에게 ‘왕밤나무 할아버지’란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참 즐거웠습니다. 남에게 도움을 베풀어주는 일이 이렇게 기쁜 일인지를 전에는 몰랐습니다.
“왕밤나무 할아버지, 재미있는 얘기 좀 해 주세요.”
어미 배에서 태어난 지 몇 달 안 되는 아기 토끼들은 왕밤나무 할아버지를 찾아와서 응석을 부리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바다 건너에서 날아온 커다란 새들이 이곳까지 와서 어린 새들을 마구 잡아먹는 이야기이며 배불뚝이 총각 사슴과 곱단이 처녀 사슴이 결혼하던 이야기들을 구수하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왕밤나무 할아버지가 10여년 전부터 심한 병을 앓아오면서 전처럼 탐스러운 밤송이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말할 기력조차 점점 없어져 갔습니다. 봄이 되면 어린 나무들은 힘차게 푸른 잎을 틔우는데 왕밤 나무 할아버지는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이러다간 정말 죽고 말지….’
은근히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팔이 아프도록 왕밤이 달리던 때는 다람쥐며 산토끼 사슴 너구리 심지어는 여우까지 찾아와 인사를 하며 아침 저녁 건강을 걱정해 주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한 해 두 해 왕밤나무 할아버지의 몸이 점점 더 쇠약해지자 산짐승들의 발걸음도 뜸해지더니 요 몇해 동안은 아예 발걸음도 안 했습니다. 행여 왕밤 나무 할아버지가 있는 곳을 지나가게 되면 ‘흥, 이제는 대추씨 만한 밤도 안 열리는 쓸모없는 늙은이가 되었구나.’ 하는 눈빛으로 힐끔힐끔 보며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럴 대마다 왕밤나무할아버지는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어쩌는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요 몇 해 사이에 더욱 폭삭 늙어 쪼글쪼글해졌습니다. ‘죽을 날이 가까이 온 모양이야.’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힘 없이 중얼거리며 바싹 말라빠진 자신의 몸을 찬찬히 어루만져 보다가 뿌리 밑둥 부근에 눈이 닿자, 빙그레 웃음을 머금었습니다.
“요놈이 용케 땅을 뚫고 올라왔수나!”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흙속에서 빠꼼이 고개를 내민 달래를 보았습니다. 연두색 몽당 크래용만한 새싹이 할아버지의 곁에 돋아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3>
달래는 어디선가 불어오는 향긋한 향기에 정신이 들었습니다. 한결 몸이 가벼워진 것 같았습니다.
“여기가 어디지?”
살그머니 눈을 떴습니다.
“아이, 눈 부셔!”
눈을 뜨자 햇살이 잘금잘금 은가루처럼 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연화산은 연두색 물감이 퍼진 듯 고왔고 땅속으로부터 아지랑이들이 시샘을 하듯 날아 오르고 있습니다. 들판은 지난 밤 봄비가 내린 탓으로 기름을 칠해 놓은 것처럼 윤이 났습니다.
“내가 땅위 세상으로 나왔구나!”
“어, 내 몸이 이렇게 예쁜 연두색이었구나!”
달래의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땅을 뚫고 나왔지?’ 쇠망치로 얻어맞은 듯 큰 충격을 받으며 정신을 잃었던 달래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달래야, 기분이 좋으니?”
고개를 들고 보니 하늘에 닿을 듯 큰 나무가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내가 바로 왕밤 나무 할아버지란다.”
달래는 아름드리 고목 나무가 바로 어둠 속에서 목소리로만 듣던 왕밤나무 할아버지라는 것을 알고 시무룩해졌습니다.
“그 동안 애 많이 먹었지?”
“ …… .”
생각하니 왕밤나무 할아버지가 얄미웠습니다. 땅 속에서 어렵고 힘들었을 때에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도와주기는 커녕 참고 기다리라고만 하던 말이 새삼 떠올랐던 것입니다.
‘너, 나를 미워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내가 너를 도와주고는 싶지만 그런 일은 아무도 도울 수가 없단다. 누구든지 태어날 때는 그런 아픔을 겪는 것이란다. 그러니 그만, 오해를 풀려무나.“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뾰루퉁해진 달래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었습니다.
풋풋한 흙냄새 속에 섞여 오는 봄향기가 달래의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었습니다.
“비쭁, 호르르르.”
어디선가 맑은 새소리가 들렸습니다. 달래는 뾰루퉁해진 마음도 봄눈 녹듯 슬그머니 풀렸습니다. 하늘엔 조약돌 같은 하얀 구름 떼가 한가롭게 떠다니고 있습니다. 땅 위 세상은 살기가 너무 좋구나! 여기에서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참, 왕밤나무 할아버지, 누가 저를 땅위로 끌어올린 거예요?”
달래는 궁금해서 물어보았습니다.
“그것도 모르다니…. 바로 네 스스로의 힘으로 올라 온 거야. 네가 열심히 노력하고 애를 썼기 때문에 너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키가 큰 것이란다.”
‘내 힘으로 솟아 올랐다니….’ 달래는 잘 믿어지지가 않았지만 자랑스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번 땅 속에서 답답하고 가깝하던 일과 머리가 깨어질 정도로 고통스럽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쇠망치로 얻어 맞던 것처럼 아프던 일도….‘
이 모두가 지금의 달래에겐 좋은 추억으로 여겨졌습니다.
" 좋은 봄날이구나!”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마른 나뭇가지를 흔들며 중얼거렸습니다.
“할아버지는 잎을 안 틔우세요?”
연화산의 나무들은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서로 서로 잎을 피우느라 야단들이었지만 왕밤나무 할아버지 만은 큰 몸을 움직이지도 않은 채 꺼칠한 모습으로 서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잎을 피워야지!”
할아버지는 뿌리에 힘을 주고 땅속 물을 빨아 올리려고 하였습니다.
“너도 해 보렴.”
달래도 천천히 심호흡을 한 뒤 뿌리에다 땅 속의 수분을 모았습니다. 참 쉬웠습니다. 물 오르는 소리가 달래의 귀에도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숨이 차구나!”
왕밤나무 할아버지의 힘에 겨워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힘이 안 드는데요? 오히려 신나는 걸요.”
“그럴거다. 나도 전에는 그랬으니까. 이제는 몸이 통 말을 안 듣는구나.”
“그래도 힘을 내세요.”
달래는 왕밤 할아버지가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올해는 밤알은 커녕 잎사귀 하나 제대로 피워내기가 힘들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왕밤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쳐져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세요?”
달래는 우두커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왕밤나무 할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주먹 같은 왕밤이 열리기는 틀린 거여.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왕밤을 주렁주렁 달아보아야 하는데….”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다시는 왕밤을 맺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무척 섭섭하신 모양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무슨 좋은 수가 있을 거예요.”
“그래, 고맙구나.”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달래의 말을 듣고 대견하다는 듯이 빙그레 웃었습니다.
<4>
이제는 달래도 몰라보리만큼 자라서 아기 손바닥 같은 잎을 너울거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달래는 부지런히 땅속의 물을 빨아 올렸기 때문입니다.
연하ㅘ산을 휘돌던 바람이 왕밤나무 할아버지를 칭칭 감고 맴을 돌았습니다.
“이 녀석아, 어지럽다. 그만 두지 못 해?”
“히히히 할아버지, 저는 신나는 데요?”
“이 노옴!”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노여움을 참지 못해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얘, 꼬마 바람아? 어른을 그렇게 놀리다니….”
달래도 바람이 뺑뺑이를 도는 틈에 정신이 어지럽고 쓰러질 것 같아 핀잔을 주었습니다.
“아니, 뭐라고? 쬐끄만 게 누굴 보고 꼬마래.”
바람은 땅위에서 한창 자라나고 있는 달래를 보고 아니꼽다는 듯 쏘아붙였습니다. 달래는 그 말을 들으니 심술이 났습니다.
“너 때문에 나도 어지럽단 말이야. 이 꼬마 바람아.”
“아니, 또 꼬마라고..... 꽃도 피우지 못하는 주제에 참 별꼴이야.”
달래는 바람의 심술궂은 말에 한바탕 싸움을 벌이려고 하였지만 꽃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꾹꾹 눌러 참았습니다.
“꽃이라 그랬지?”
달래는 다그쳐 물었습니다.
“그래, 꽃이라 그랬다. 넌 꽃도 모르니? 내 몸 가까이에서 냄새를 맡아 봐. 향긋한 냄새가 나지? 이게 다 내가 저쪽 삿갓봉 밑에 살고 있는 꽃들이 내게 준 선물이야. 부럽지, 부럽지?”
바람은 달래에게 역을 올렸습니다. 달래는 바람의 몸에 커를 대 보니 정말 바람의 몸에서 난생 처음 맡아보는 달큰하고 기분좋은 냄새가 났습니다.
“호 - ” 달래는 다투던 것도 잊고 바람에게 물었습니다.
“그 꽃이란 건 어떻게 생겼니?”
“그것도 모르니, 넌 촌놈이구나. 그럼 내가 설명해 주지.”
바람은 어깨가 으쓱해졌습니다.
달래에게 꽃잎의 모양에서부터 여러 가지 빛깔들의 꽃에 대한 이야기를 신이나게 종알거렸습니다. 그리고 알록 달록 멋진 옷을 차려 입은 호랑나비 왕자가 찾아와서 삿갓봉 꽃님들을 매일매일 쓰다듬어 주며 귀여워한다는 말까지 덧붙였습니다.
바람으로부터 꽃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난 달래는 삿갓봉 밑에 살고 있는 꽃들이 무척 부러웠습니다. 달래는 자신도 멋진 꽃을 피워보고 싶었습니다.
‘나도 꽃을 피워야지.“
“흥, 네까짓 게 무슨 꽃을 피우니?”
바람은 빈정거렸습니다. 바람이 돌아간 뒤 달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 나도 어떻게 하면 예쁜 꽃을 피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만 머릿속에 꽉찼습니다. ‘옳지.’ 달래는 날이 밝으면 왕밤나무 할아버지에게 물어보아야 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달래야, 잠을 안 자니?”
왕밤나무 할아버지도 잠이 안 오는 모양입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몸을 흔들고 있는 달래를 불렀습니다.
“예, 잠이 안 와요.”
“무슨 걱정거리라도 생겼니?”
“할아버지, 어떻게 하면 꽃을 피울 수 있어요?”
“옳아, 그 일 때문에 잠이 안 오는 모양이로구나. 걱정할 건 없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저절로 꽃이 된단다.”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마음을 가질 수 있어요?”
“남을 미워하는 생각을 버리면 자연히 아름다운 마음이 생기지.”
“왕밤나무 할아버지의 말을 들으니 아가 바람에게 퉁명스럽게 대답한 일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달래는 갑자기 어두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왜 아무 말이 없니?”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달래가 입을 꼭 다물고 있자, 또 토라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또 토라졌니?”
“그래서 그런 게 아니어요.”
“그럼?”
왕밤나무 할아버지가 다그쳐 묻자, 그제서야 달래는 아까 바람에게 ‘꼬마’ 라고 한 말과 퉁명스럽게 바람에게 말대꾸한 것이 걱정이 되어 그랬다고 했습니다.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달래의 말을 듣고 껄껄 웃었습니다.
“너는 참 마음씨가 착하구나. 자신의 잘못된 점을 뉘우치는 그 마음이야말로 아름다운 마음이란다.”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달래를 칭찬했습니다. 처음으로 왕밤나무 할아버지로부터 칭찬을 들었고 또 멋진 꽃을 피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 즐거움이 샘처럼 솟아났기 때문입니다.
<5>
달래는 날개가 있다면 어디든지 훨훨 날아가고 싶도록 기분이 좋습니다.
“나도 아름다운 꽃을 피워야지.”
그러면 틀림없이 삿갓봉 밑에 살고 있는 꽃들보다 훨씬 더 예블 것이라는 자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람에게 말로만 들은 호랑나비 왕자님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벌서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합니다.
여름이 한창 익어갈 무렵 달래는 훤칠하게 큰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꽃 피우기에 마지막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왕밤나무 할아버지, 더운 날씨지요?“
‘덥다 마다.“
왕밤나무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더위를 이기지 못해 마치 고무풍선이 빠지는 듯 힘이 없는 목소리였습니다. 여름이 되면서부터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눈에 띄도록 쇠약해졌습니다. 다른 나무들은 부채살 같은 잎을 흔들며 춤을 추고 있었지만 할아버지만은 거무스레한 나뭇가지에 겨우 몇 개의 잎사귀 밖에 달지 못했습니다.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왕밤을 달아보고 싶었는데....”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왕밤을 다는 게 이제는 소원이 되다시피 한 것 같습니다. 달래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할아버지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 제가 대신 꽃을 피우면 되잖아요.”
“그래, 고맙구나.“
달래는 왕밤나무 할아버지에게 아름다운 꽃을 피워 즐겁게 해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연화산 봉우리에서부터 산 밑까지 온통 초록색 크레용을 칠해 놓은 것 같은 여름 날, 달래는 도 한 번 심한 아픔을 느끼며 꽃을 피웠습니다.
“내가 드디어 꽃을 피운 거야.”
달래는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입니다. 멀지 않아 호랑나비 왕자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달래는 여간 즐겁지 않았습니다.
저쪽에서 초록 잎사귀를 밟으며 바람이 오고 있습니다. 달래는 은근히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얘, 바람아, 어때 멋 있지?”
달래는 바람이 칭찬해 줄 것이라고 짐작하고 으스대는 듯이 말했습니다. 달래의 말을 듣고난 바람은 깔깔거리며 웃었습니다.
“야, 야, 배꼽이 다 아프다.”
바람은 제자리에서 곤두박질을 칠 듯 웃었습니다.
“요것도 꽃이라고 피웠니? 삿갓봉 밑에 가면 너 같은 꽃은 수를 셀 수도 없을 만큼 많단 말이야. 나비 왕자는 너 같은 것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으실 거다.”
바람은 달래가 피운 꽃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말했습니다. 달래는 한꺼번에 품었던 희망이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어, 무슨 꽃이 요렇게 생겼어?”
다람쥐도 자나가다가 시큰둥하게 말합니다.
“쬐그만 게 볼품이라곤 없다. 그지?”
토끼도 지나다가 저희끼리 한 마디씩 주고받으며 지나갑니다.
달래는 죽고 싶었습니다. 왕밤나무 할아버지가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면 예쁜 곷을 피울 수 있다던 말도 모두 거짓말 같습니다.
‘난 어쩌면 좋아?’ 달래는 점점 초조해지고 마음이 불안해졌습니다. 하루하루가 달래에겐 지겹고 살아 있다는 것이 짜증스럽기만 했습니다.
‘난, 미운 얼굴이야. 모두가 날 거들떠보지도 않아.’ 이런 생각을 하니 지금까지 땅 위 세상으로 나와 꽃을 피우기까지 애썼던 일들이 억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대 벌 한 마리가 날아와 달래의 꽃잎 위에 사뿐이 앉았습니다.
“넌 누구니?”
달래는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난, 일벌이라고 해.”
달래는 일벌을 보아도 별로 즐겁지가 않았습니다. 몸집이라곤 콩알만한 것이 웬 목소리는 그리 큰지 작은 날개를 파득이며 날 때마다 왱왱 기분 나쁜 소리가 났기 때문입니다.
“넌 여기 뭣하러 왔니?”
달래는 맥 빠진 소리로 물었습니다.
“난 네가 좋아.”
“뭐라고?”
달래는 속이 상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모두가 자기를 미운 얼굴이라고 했는데 일벌이 자기를 좋아한다고 하자 비웃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너, 나를 못생겼다고 일부러 비웃는 거로구나.”
“아니, 아니야. 난 정말 네가 좋아서 내 마음을 그대로 얘기했을 뿐이야.”
“그래, 흥.”
달래는 그래도 일벌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들 나를 밉다고 하는데, 왜 너 만은 그렇게 생각 안 하지?”
“그건 각자 보는 눈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그런 거야.”
달래는 일벌의 말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일벌의 눈이 특별하게 생겨서 그런가?’ 달래는 그날 밤 일벌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6>
어둠이 풀풀 날릴 것 같은 밤입니다.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피곤한 지 벌써 깊은 잠이 든 것 같습니다. 풀벌레들이 여기저기에서 나무 잎사귀를 간질이며 사근사근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아니야, 괜히 그런 거야. 일벌이 나를 놀리려고 그랬던 거야.”
달래는 도리질을 해 봅니다.
“괜히 그런 게 아니란다.”
‘누구지?“
주위를 둘러 봐도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렴.”
어디선가 또 속삭이는 듯 아까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야, 아름답구나!”
달래는 놀랐습니다.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로 은구슬을 깔아놓은 듯 했습니다. 그 중에 유난히 반짝이는 아기 별 하나가 달래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달래야, 난 너를 밤마다 지켜 보았지.“
아기별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습니다. 달래는 아기별에 비하면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볼품 없는 꽃 같아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넌 참 예뻐!” 아기별이 말했습니다.
달래는 이젠 아기별에게 까지 놀림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욱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아가 일벌도 나를 좋아한다고 하더니 너도 나를 놀릴 셈이로구나. ”
달래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달래야, 너는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 아름답다는 것도 일벌이 말한 것처럼 보는데 따라 다른 것이란다. 일벌은 원래 착하기 때문에 거짓말도 할 줄 몰라. 너도 남을 한 번 사랑해 보렴.”
“그러나 나는 내가 생각해도 내 자신이 미운 걸, 어떻게 남을 사랑하니?”
“그건 네가 바람과 토끼 다람쥐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기 때문일거야.”
“일벌은 멋있지도 않은데?”
달래는 심드렁해져서 말했습니다.
“우리들은 ‘아름답다’는 말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아. 그가짓 겉만 반지르르한 나비가 뭐가 좋으냐? 거기 비하면 마음 좋고 성실한 일벌이 네게는 훨씬 잘 어울린다. 우리 별나라에서는 겉 모양 보다 속 마음이 고운 별들 끼리 더욱 위해 주고 사랑해 준단다.”
달래는 아기별의 말을 들으면서 아기별이 점점 좋아졌습니다. 아기별은 바람이나 토끼 다람쥐처럼 남을 얕잡아 보지 않았습니다.
아기별과의 만남이 있은 후로는 달래는 외롭지가 않았습니다. 심심한 밤이면 아기별이 내려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어느 날은 달래의 꽃잎 속에서 꼬박 잠이 들었다가 새벽녘에야 올라가기도 했습니다.
일벌은 달래를 만나던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찾아왔습니다.
달래는 어느 사이 큰 즐거움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바로 일벌을 기다리는 일입니다. 아기별로부터 좋은 얘기를 듣고 난 다음 날 부터는 일벌이 찾아와도 싫지 않았습니다.
일벌이 달래의 꽃잎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줄 때는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차츰 차츰 일벌을 만나면서부터는 달래는 세상이 무지개 색깔로 보였습니다.
이제는 호랑나비 왕자 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호랑나비 왕자를 생각한다는 것조차 머리에서 지웠습니다.
달래는 일벌이 자주 찾아주는 것이 미안하기만 했습니다.
‘일벌 도령님, 나는 미안해서 어쩌지요? 도령님이 나를 이토록 생각해 주는데 나는 아무 것도 드릴게 없으니까요.“
달래는 정말로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사실은 난 달래에게 큰 도움을 받고 있는 거라오. 내가 매일매일 찾아오는 건 달래가 예쁘고 귀엽고 보고 싶기도 하지만 달래에게서 난 맛있는 꿀을 얻어가고 있는 거라오. 그러니 그런 생각일랑 조금도 갖지 말아요.”
일벌의 이야기를 듣고 난 달래는 꼭 꿈속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행복한 일은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달래는 일벌 도령에게 자신도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기쁨이 하늘에 닿을 것 같았습니다.
여름도 끝나가는 어느 초가을 밤이었습니다. 일벌은 달래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일벌 도령님, 제게 줄 선물이 무엇이셔요? ”
달래는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일벌 도령은 싱긋이 웃기만 했습니다.
“벌써 주었는 걸?”
“뭔데요?”
“우리들의 아기.”
달래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닌게아니라, 달래의 몸에서는 새로운 꽃씨들이 오롱조롱 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달래는 너무 행복하여 눈을 감았습니다. 그때 왕밤나무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달래야? 너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꽃이 되었구나! 나도 아기별이 내 소원을 이루어주어 마지막 눈을 감으면서도 행복하구나.”
달래는 왕밤나무 할아버지를 쳐다보았습니다. 달래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왕밤나무 할아버지의 앙상한 나뭇가지에도 아기별들이 왕밤처럼 주렁주렁 열리고 있었습니다.
[시집 차례 및 내용] 나비, 청산의 나비
●차례
서시 5 서문 박유석 6 발문 최도규 97
제1부 아내의 가게 13
나무심기 15 작약꽃 16 꽃이 피는 창가에서 17 달 18
여인 19 겨울 스케치 20 정사 21 사랑법 22 단식 23
어느 화가 24 바람들은 25 봄빛 26 아침 새 28 그날이 오면 29
장마 30 돌과 물 31 코풀기 32 눈병 33 탑 34 아내의 가게 35
도시의 아침 36
제2부 사랑, 그 외로움의 그물을 깁는.... 37
1.이슬 2.나무 3.풀벌레 4.노을 5.달맞이꽃 6.밤새 7.별 8.풀꽃
9.기다림에 비워 둔 꽃잎 하나가 10.사랑, 그 외로움의 그물을 깁는
제3부 아라리, 정산 아라리 49
제4부 임이여, 청산에 꽃 되오서 71
당신이 곁에 있으면 73 임이 비 되어 오신다면 74 너는 한 줄기 바람이더니 75
사랑은 76 샘 77 사랑 78 행복 79 그리운 이가 그리운 밤에 80
하얀 눈이 펑펑 내리는 날 81 대숲 아래서 82 돌이 되고 싶은 날 84 부러운 밤 85
이슬의 노래 86 라일락 피는 봄에 87 봄 밤 88 어느 산기슭 풀꽃처럼 살다가 90
알아나 보자 91 임이여, 청산에 꽃 되소서 92 산유화 94 도라지 96
*저자 근영 3 *저자 약력 4
발문 恨 意識의 계승
박유석
恨이 많은 詩人 그는 南鎭源이다.
그를 만난 것은 오래지만 그의 人間과 文學을 함께 참 모습으로 느끼게 된 것은 같은 직장에서 근무를 하고 한 방에서 두 달 이상을 숙식을 같이 한 벽탄에서 시작되었다.
남 시인은 정선아리랑의 고장인 이곳 정선 골지리 출생으로 그를 대하고 있으면 靑山의 풀내음과 솔바람 소리를 느끼며 뜨거운 정에 이내 同化돠고 만다.
이번 詩集 「나비, 靑山의 나비」는 4부로 나누어 노래하고 있다.
그의 詩 世界 전반에 깔려 있는 意識은 정선아라리에 숨겨진 恨의 비애를 강한 배경으로 하고 있다.
詩人이기에 앞서 한 人間으로서 日常과 生에서 아파야 하는 것들에 깊은 애착을 통해 언어만으로가 아닌 淸純함으로 詩를 잉태하고 있다.
또한 아픔과 외로움 속 혼의 事物들을 사랑으로 그물을 짜며 그것을 더 높은 次元의 傳統的 아라리의 恨으로 여울져 흐르게 하고 있다.
그 한은 또다시 개성있는 순수한 詩精神으로 형상화되고 體質化하여 그 나름의 靑山에 작은 우주를 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번뜩이는 예지와 표현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헤어지는 법도 잊었다가
만나는 법도 잊었다가
친구야 외로울 때 바람이 되자
어느 산기슭
풀꽃처럼 살다가
먼 기억들을 되살려서
달 뜨는 밤이면
달맞이꽃 처럼 일어서서
숲을 지나고
강을 건너
그렇게 바람이 되어 만나는 거다.
풀물든 얼굴로 만나는 거다.
‘ 어느 산기슭 풀꽃 처럼 살다가’ 의 일부이다.
이렇듯 남 시인은 정선아라리의 恨 意識을 자신의 詩脈 속에 용해하여, 임이여 靑山에 꽃 되소서로 시를 통해 다시 태어나고 있어 기쁘다.
1985. 10. 20
정선 벽탄에서
江原兒童文學會長 朴裕錫
제1부 아내의 가게
나무 심기
나무를 심는다.
아내와 내가
언젠가
비좁도록 공간을 메울
목숨의 푸른 줄기를c
땀을 버무려 넣으며
아내의 살갗처럼 흰
웃음을 다독거리며
사과나무를 심는다.
아내의 행주치마에 담은
우리의 미래를 나눠 심는다.
작약꽃
고향을 더나 있으면
내 마음 속엔
고향인냥 그리웁게
피는 꽃이 있다.
초여름 뒤 울안
수줍은 새색시처럼
솔곳이 피어나는 작약꽃
막걸리 한 사발에
고향을 풀어넣고
손가락으로 휘저으면
거기
뻐꾸기 울음과 함께
풀물처럼 묻어나오는
꽃 한 송이
오늘은
뉘집 뒤란에서
흙냄새로 물씬 피고 있을까.
꽃이 피는 창가에서
사는 게 때로 피곤할 때면
창가에 앉아
꽃을 본다.
인생은
다들 혼자로
피어난 꽃들
어둠이 풀어지는
창가에 서면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사는 게 더러 힘이 들 때면
사는 게 이리도 아플 때면
창가에 기대
꽃을 보다가
빈 배가 된다.
달
한 밤에
고무신 가득히 고이는
선지피.
여인
여안은
화초
사랑의 물을 줄 때에야
싱그럽고 윤기있게 피어 오르는 꽃.
겨울 스케치
눈이
내린다..
간간이
바람의 작은
기침 소리
산에서 내려오고
뿌연
낮달이
눈 내리는 저 너머
생각 속에 잠겨 있다.
정사
다리가
보일 뿐
숲에는
하늘이 열린 채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사랑법
부풀어
출렁이는 바다
빛과 소리가 슬프도록 차다.
단식
찢어진
북이 되어 앉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살들이
흐물흐물
흘러내리고
보아야 한다.
지금
죽음 저 너머에서
하얗게 일어서는
내 뼈를.
어느 화가
무지개가 몇 층 식 둘러선 가운데
동양화를 그리며
산을 마구 팔던 너
너의 노래는
귀에 쟁쟁한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고
우린 그때
하늘의 피부 깊숙이
네 손이 닿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바람들은
마을 밖에서 달려오는
저 눈물의 깊이 나는 몰라
어디쯤서 태고의 바람이 부는지
츨량할 수 없는 은밀한 불안으로
나는 밤마다 잠들다 놀라 깨고
어둠으로 부푼 벽에
죽음처럼 널려있는 우리들의 옷
오늘 밤 탈출의 의미를
나는 저 방황하는 속에서 듣는다.
뜨락에 지는 오동잎, 거기
불행이 될 수 없는
조용히 기울이는 바람의 눈동자
비 오는 동구밖 떠나는 것들이
네것이 된다해도
허전하게 고이는 빛깔들을
그렇게 사랑하는 바람들은
아픈 것을 나란히 눕혀놓고
밤마다 꿈을 꾸며
들을 수 없던
어둠의 음성까지
파란 속 잎을 틔우게 하고
저 깊은 나무들의 뿌리
맑고 깨끗한 신경을 퍼올리며
밤 내내 눈을 뜬 채
걸어가는 소리.
봄 빛
1
새벽으로 가는 안개들의
푸른 길 옆에
산의 손시린 물소리
마을로 오고 있다.
들판은
번쩍이는 햇살과
귀가 아픈 새떼 속에 일어서고
우리들의 삶
그 한가운데
희디 흰 소금으로 남아
짭짤하게 등허리를 절이고 있는
풀 뿌리 밑에서
아침은 깨끗한 피부를 드러낸다.
벌써 몇 광주리씩 푸른 바람을 이고
대문을 나서는‘아주머니들
땀과 거름으로
기름진 잎들이
그림자를 드리운 채
빛 속에서
누군가와 만나고 있다.
2
미루나무 잎새들이 부풀어오르는 한나절
따뜻한 것으로 닿아
살 섞이는 돌과 풀
눈썹같은 아지랑이들이
꽃씨들을 파랗게 들어올리는
햇빛 속으로
웃대 할아버지의 송화가루
풀풀 뻐꾸기 울음으로 날리면
종달새가
보릿대궁 피워 물고 솟아오르는 하늘 속엔
유리알 같은 오월의 바람이 불고
네 이름과 내 이름이 가슴 속까지 닿는
우리들의 눈동자가 젖어 있었다.
아침새
신비의
숲에서
새가 운다.
우는 소리가
차가울수록
아름다워서
산이
바람처럼
일어서고
새벽의 강을
건너오는
꽃 한 송이.
그날이 오면
옷을 벗는 일이다.
옷을 벗고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일이다.
내 목숨의 빈 잔 거두어갈 때
당신의 손에 끌려가지 않고
당신의 뒤에 따라가지 않고
다만 내 스스로
걸어가도록 준비하게 해 주소서
나는 당신의 나라를 모르지만
당신이
나를 찾아오는 줄은 압니다.
질병과 무서움, 괴로움의 병정을‘거느리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건
남루한 옷을 벗기기 위한
당신의 예법이기에
정영, 내가 나의 임을 사랑하듯이
그날이 오면
나는 나의 문을 열어 놓고
그렇게 당신을 맞이하여
옷을 벗으리
옷을 벗고도
부끄러워 하지 않으리.
장 마
생채기 투성이다.
누가 뒤에서 조종하는 손을
잡기는 커녕 보지도 못한 채
자꾸 뜯김을 당하고만 있다.
어둡고 혼돈한
비가 내리고
물아개만 푸르딩딩한 넋으로 살아
물 위를 거닐고 있다.
돌과 물
물이 돌을 부순다.
온 몸이 박살나는 물
그렇게 흩어진 물 알갱이들은
또 다시 모여서 돌을 부순다.
이제는 어리석은 물이라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세상을 걸어 잠근
돌이 미울 뿐이다.
코풀기
코를 푼다
썩은 콧물을 풀어낸다.
가난한 그 시대의 다락방에서
눈물보다 매운 코를 풀어 던진다.
온 몸의 힘을 콧구멍에다 쏟고
숨통이 콱 터지라고
풀어내는 코지만
아가리가 시커먼 그놈은
되려 눈만번들거리고
은밀한 곳에서 썩어가면서도
썩는 줄 모르고
세도를 누리고 있다.이, 팍 물어 쳐죽일
콧구멍 때야
이놈의 코
이놈의 코.
눈병
눈이 꽤나 속이 상해 있었다는 걸
눈병이 나서야 알았다.
너무 더러운 것을 많이 본 죄로
더러는 안 볼 것을 본 죄로
눈이 앓고 있다.
곪아터진 후에야 원망을 하는
나 자신을 비웃으며
나 대신 눈이 앓고 있는 것이다.
눈이 이제는 좀
세상을 가려가며 보라고 한다.
한 동안 한쪽으로만
정성스럽게 보는 법을 익히라고 한다.
탑
일하는 사람들 여기 모여
배움의 탑을 쌓는
청정한 손날
더러는 아프고 배고픈 노동이지만
돌의 중량 만큼이나
층층이 쌓이는 기쁨으로
탑을 쌓는다.
두 발은 견고하게 땅을 딛고
하늘로 솟아오를
꿈을 꾸며
오늘도
시린 손 끝에 온 힘을 모아
어둠의 한 쪽을 깨뜨리는 이여
광활한 땅 위에
우리의 뼈로 쌓아가는
탑은 높아만 가고
어느 날
손바닥 부르튼 피멍으로
일어서는 탑을 보게 되리
그때
탑 속에서 울려나오는
빛과 소리
그 푸른 눈물로 신나게 울자.
아내의 가게
자동차 바퀴의 소음 속에서
아내는 잠을 깬다
도시의 한 귀퉁이에서
3백원 짜리 떡볶기를 팔고
김밥을 파는 아내
처음 가게문을 열고나서
손님이 오니
신랑보다 더 반갑더라고
활짝 웃으며 말하는 목소리에서
억센 풀꽃이 피어있는 것을 보았다.
가진 것이 남루해도
늘 행주질을 하며 사는 아내
봄꽃보다 아름다운 수줍음도 몇 개
소매 끝에 숨겨둔 채
오늘도 아내는
빈 그릇에 수북히 담겨지는 도시의 소음
그 폐수를 닦아내며
키 큰 손님
키 작은 손님의 목소리 따라
분주히 간을 맞추고 있다.
도시의 아침
자동차 소음과 번쩍이는 간판과
골목에 숨었던
때 묻은 바람 소리로
도시의 아침이 깨어나면
고단한
간밤의 꿈을
옷섶에 여며 넣으며
서둘러 문을 여는 사람들
그리고 부지런히
시림들은
살찌우기 출발을 하고 있다.
제2부 사랑, 그 외로움의 그물을 깁는…
(1)사랑
사랑은
아침 햇빛에 매달린
투명한 울음
내가
네 속에 사는
네가
내 속에 사는
사랑은
슬픈
맞물림
(2)나무
바람이
불면
우리는
한 그루 씩의 나무
빈 하늘
이쪽 저쪽에
서로 외로운 이름을 쓴다.
서로 허전한 얼굴을 그린다.
(3)풀벌레
무후한
어둠 속에 젖는
풀잎들의
저 눈물을 보아요.
달빛이 구부러진
숲길에
목소리만 남아
가슴 속 입술만 남아
설움을 만지고 있는
풀벌레 갸름한
손
(4)노을
외로움이 깊어서 바다가 될 때
당신이 부르시면
난 멀리서 대답하는 노을이 될래요.
먼 길에 당신 모습만 봐도
난 벙어린데
난 벙어린데
당신 앞에 서면
말이 없어도
황홀한 말씀
당신이 오실 땐
마냥 부끄러워서
눈을 감아도
자꾸만 가슴이 뛰는데
내 그리움 너무 깊어
당신이 찾으시면
난 멀리서 우는
노을이 될래요.
(5)달맞이꽃
아파도
고운 약속이라서
그리움만 짙은
네가 피운 꽃은
슬퍼도
아름다운 약속이라서
기다림만 물든
네가 피운 꽃은
사랑은
외로운 약속이라서
밤에만 몰래
네가 피운 꽃은
울음소리도 작게
네가 피운 꽃은…
(6) 밤 새
그리도
애닲은
혼만 남아
달빛 푸른
숲
숲에 고인 새야
울다가
지치거든
고운
고운 잠 자라.
(7)별
머나먼
그
하늘 밭
터질듯
외로운
몸짓으로
밤에만 피어나는
들꽃
내 작은 들꽃
눈빛이 고와
눈빛이 맑아
가슴에 훈장처럼
너를 달고 싶은
밤
(8)풀 꽃
우리가
이름 없는
풀꽃이어도
가리울데 있는
서런
잎이지 말자
잊힌듯
볼품없는
빛깔이어도
하늘과 물과 바람과 별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살자
피어서
꽃이라고
불러줄 이 없어도
내가 네곁에서 피고 있는 것을
네가 내곁에서 피고 있는 것을
감사하며 살자.
기도하며 살자.
(9)기다림에 비워 둔 꽃잎 하나가
초록 햇살이 내리는
길 위론
눈이 아려서
당신 오실 길도
눈이 아려서
비워 둔 채
귀가
아픈
내
이름은
작은 꽃망울
(10) 戀歌
처음도 끝도 없는
늘 설레임의 마당
내 사는 곳은
다시 갈 수 없는 그대 울밑이라도
늘 서성거리는 마당
그대 사는 곳은
- 기다림으로만 살았어도 좋아라
- 그리움 만으로 살았어도 좋아라
세월에 흰 머리카락 날리며
풋풋한 바람처럼
영혼이여, 육신을 떠나 날아 오를때면
오오, 그때야
그대 기다림으로 비워 놓은 자리에
온전하게 살을 붙이리
내 영혼의 집을 지으리.
제3부 아라리, 정선아라리
1
내 입김만
닿아도
스며 아지랑이
되는 임
그 연한
외롬만 짙어…
어느
천년
꽃이 될까.
2
바람이 불어오는 밤은
무섭다.
오늘처럼
어느 산기슭 이름 모르는
꽃이 피는 밤은
더 무섭다.
어둠이 일어서서
돌 하나를
흔들어대는 밤
하늘에
미친 달이 타고
아아
머리칼이 빠진 바람이 분다.
3
하늘 아래
울음 빛
푸르른 봄날
성마령
골짜기에도
산수유가 피고
나는
색동옷 입은 나비
임 그리던
생각을 모아
날개를 짠다.
하늘 아래
울음 빛만
푸르른 봄날
4
임 계신
꽃대궐
어디신가
그리던 생각일랑
날개에 싣고
잠들면
환한 세상
꿈밭길에서
가자
또 가자
나비
청산의 나비
5
먼 산에
아지랑이 같은
오오, 나의 림은
그 연한
외로움만
푸르르게 돋아
봄 오고
또 봄 오는 들판에서서
가슴에 돋아나는 그리움들을
파랗게 파아랗게 시로 씁니다.
먼산에
아지랑이 같은
오오, 나의 임은
6
임은
작은 별
쏟아질 듯
총총총
별 빛나는 밤
불어라
바람아 바람아 바람아
7
그리움이
소망으로 젖어드는 밤
바람이 사는 언덕에서
당신 젖가슴이 고운
달을 보자던
오늘은
달처럼 또 하나 달이 떠서
마음이 그립도록 번져가도
임이 깰까봐
숨어 비치는
달
팔 아픈 달
8
하늘 창창한 봄날
이별보다 싯푸른
울음이 섞여
산굽이도 한줄기 틀어져 내려와
입이 시리게 섞여 도는
혼백의 강
꿈에라도 손이 닿는
사랑길이라면
눈물 맛 한 백년 아우라져도
단맛만 나리
단맛만 나리
산비알 굽이굽이 외로움만 짙은
서른 세 살의 강 모래톱엔
탱탱 가슴이 빈
머슴의 눈빛 같은 싸리꽃만 피고
이 빠진 기다림에
이승을 지키고 선 내 나룻배엔
저승에서 쫓겨 온
오오, 불쌍한 임의 손톱자국만
아프게 흔들리고 있다.
- 아우라지강-
9
헤어질 사람도 없는데
서럽게 울 눈물도 없는데
꽃이
피어
외로운
봄밤
촛불을 켜고
그리운 것들을
다시 데운다.
10
생자의 목숨 가지에
날아와 앉는
새야
궁금타
입술 마른
사랑의
식량 때문
오늘은
하느님의 나라도
비어
말 없는
햇살만 콩가루처럼
섭섭하게
진종일
배 고픈
연두색 미운
봄날
11
당신은
강물이구려
흐르기만 하는
떠돌기만 하는
나는 눈 먼 사공의
낚싯대가 되어
당신의 가장 깊은 곳에
추를 드리고
천년
또 천년
당신의 살 속에서 익으리.
12
열두번 도 더
산을 오르고 싶다.
연한 새순이 돋아
만산
채운이 도는
임의 살결
그 같다면
그 같다면
열백번도 더
산을 오르고 싶다.
13
오늘 밤에 든
달은
천년
푸른 솔가지 태워
조총처럼 구운
그리움
단 한번 피우려다 엉겨 붙은
사랑의 풀꽃 무더기 무더기
잠이 든 그대 창가에
밤 내내
소망인냥 떠 있거라
내 임을 그리사와 우니나니.
14
사는 게
꿈인가
꿈 속이
삶인가
청산에
저 나비
임이라시면
꿈 속에
뵈는 임
왜 보내셨나.
15.
너, 내가
하늘과 땅 그 머나 먼 거리도
아프락싸스
그분이 예비하신
온 몸을 떨어
울어
눈물이 빛날 때 까지
너, 내가 만나냐 할
열매, 젖가슴, 그리움
장밋빛 해
우리가 어둠을 나누어 섞을 때
사랑이 두 개 네 개 여덟 개…
하늘 밭에 번져갈
눈물을 처음 보신
아프락싸스
그분이 예비하신
카인의 표지
땅과 하늘의 사랑
16
설운 사랑도
여물면
분이 나는가
외로움도
달디 단
씨가 되어서
제 홀로
여문
희디 흰 울음
슬픈 사랑도
여물면
분이 나는가.
17
맺히고 싶은
열망이
오죽이나 컷으랴
지금
몽글몽글한
푸른 맛으로 채워지고 있는
포도나무를 보고 있으니
먼 산 보듯
바라보고 사는
임과 내가
부럽다.
18
임도
나도
모르게
꿈속에서만
쬐끔 씩
키우는 사랑
빨갛지도 하얗지도 못한
자주색
감자.
19
물을 태우고
바위를 태우는
불
사랑 불
나도
나의 임도
태우리
태워서
희디 흰
꽃씨 만드리.
제4부 임이여, 청산에 꽃 되소서
당신이 곁에 있으면
당신이 곁에 있으면
나는 연둣빛 연한 오월의 사슴
정녕
나는 당신의 사슴일레요.
당신이 곁에 있으면
나는 6월의 바람
우윳빛 당신의 젖줄 같은
사랑을 물고
언제나 당신의 바람일레요
당신이 곁에 있으면
당신이 곁에 있으면
오, 그래요
나는 한 송이 꽃일레요
질 수 없는 당신의 꽃이 될레요.
임이 비되어 오신다면
임이 비 되어 오신다면
나는 세상보다 큰 솜덩이가 되어
앉으리다.
참으로 석지 않는
솜이 된 채
내 살을
당신의 비로 적시리.
너는 한 줄기 바람이더니
내 창가에 달디 단 향기로 묻어나는
너는 한 줄기 바람이더니
꽃가지를 흔들며 내 귓가에 속삭이는
너는 봄 아침 은은한 빗소리더니
저 들녘 새 잎 돋아나는 아우성처럼
와 - 와 -
소리 없이 번져
내 빈 가슴 속 자리 잡은 너는
칠색 무지개더니
오늘은 귀가 귀가
네 귀가 고와라
스물 네 살 쑥 내 나는 푸른 바람이여.
사랑은
사랑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근원에서 나와
너와 나를 적셔주는 봄비 같은 것
사랑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저 언덕 연두색 들판의 아지랑이 같은 것
사랑은 주면 줄수록
더 많이 고여
주어도 주어도 철철 넘치는
여름 아침의 샘물터 같은 것
그러나
사랑은
해 지고 달 뜨면 울고 싶은
사랑은….
샘
마주
앉으면
우리는
하나
나는 네게로
너는 내게로
언제까지고
주기만 하는
너와 나
샘이고 싶다.
사랑
하늘 속에서
울리는
푸른 떨림을
그대
땅에 스며
흙의 기운으로 되울리는
너와 나는
한 개 씩
혼으로 우는
진동 항아리
행복
내 속에
송두리
네가 살고
네 속에
송두리
내가 살고.
그리운 이가 그리운 밤에
오늘 밤은
그리운
촛불을 켜렵니다
그대
외로워
잠 못 이루던
그 많은 밤을 위하여
그 많은 날을 위하여
어느 머나 먼 나라의
소망처럼
별이 빛나듯
눈물로
고운 촛불을 켜렵니다.
손 모두어
밝히는
촛불을 켜렵니다.
하얀 눈이 펑펑 내리는 날
꽃가지를 흔들듯이
너를 자꾸만 흔들고 싶은
바람이고 싶어…
매화 향기 불어오듯
그렇게 네 가슴에 번져드는
향기이고 싶어…
가을엔 내 속살 송두리
너로 하여 익어가는
과일이고 싶다.
그러다
하얀 눈이 펑펑 내리는 날
내 하늘 빛 기다림은 겨울바다에서
또 한해 새움으로 돋아날
바람이고 싶어서
봄이고 싶어서….
대숲 아래서
당신은저렇게 굽이굽이
아랑의 안개에 젖고 있다.
생각도 젖어 흐느낌도 젖어
그 달 같은 옷고름도
자꾸 젖는 밤
이땅의 모두가 슬픔이라도
바람이 자고
또 바람이 자면
당신은
예맥의 여인
소망의 어느 산기슭에서
작으디 작은 등을 켜는가
산다는 것이 혼돈이어도
혀 아닌 가슴으로
한 세월 사랑의 옷을 깁고 앉은
당신의 눈 먼 바늘 귀
산도 바다도 가라앉는
눈물이 젖어
밤은 깊어가고
달빛이어라, 당신은
내 온 몸 소리없이 젖는 달빛이어라.
돌이 되고 싶은 날
하늘이 푸른 날은
나는
가라앉는 돌이 된다.
아지랑이
실실이 붉은 날은
차라리 눈이 먼 채로 돌이 된다.
하늘 구만리
저리도 고운 노을은
죽어서도 내가 남아 울다
바람이 자면 가라앉는
나의 돌
해 지면
달아
뜨지 말아라.
부러운 밤
나무 이파리들이 흔들린다.
주고받는 이야기가 싱거운 거야
상관없다.
그들에겐 이야기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함께 있다는 확인이 중요하다.
말이 없어도 좋은 밤에
서로가 서로를 흔들고 있다.
이슬의 노래
내가 물방울이라면 당신 생각으로
몽친
다만 그 하나
외로움에 떠는
햇빛에 눈부셔
무지개 내 속에서 빛나도
그건 오직 그대 가슴에 들고픈
두근거림의 빛
상기도 풀잎에 매어달림은
네 마른 입술에 스밀
투명한 눈물이기에
해가 뜬 한낮에도
젖은 채
아아 내 눈부신
울음을.
라일락 피는 봄에
라일락 옆에 서면
나도 라일락 꽃 될까부다.
사는 것이
눈물나도록 고마운
봄 하늘 아래
네 앙가슴
작은 말들이
푸르러지도록 귓속말로 들리는
라일락 옆에 서면
네 숨결 내 가슴에
하나로 모아
정말은 나
네 속에 번져나는
솔방 향기이고 싶다.
(* 솔방: 몽땅이란 뜻)
봄 밤
봄밤은 떠나간 이름들의
발자국 소리
그렇게 떠나간 이들이
스며드는 소리
천리 먼 내 임의 울음소리도
개구리 울면 문밖에 나와
외로운 갈꽃인냥 흔들고 있어
별이 반짝이면
숨었던 바람들이
얼굴을 들고 찾아오고
서리서리 굽이쳐 돌다
물끼 어린 눈동자로 오는 바람아
너무나 소중한 것들끼리
그렇게 만난 이유 하나로
죽은 듯 살아온 식구들아
주는 것이 없어도 좋아서
받는 것이 없어도 좋아서
시작도 끝도 없는
그리움 만이
발자국 소리로 흐르는 밤에.
어느 산기슭 풀꽃처럼 살다가
헤어지는 법도 잊었다가
만나는 법도 잊었다가
친구야
외로울 때 바람이 되자
어느 산기슭
풀꽃처럼 살다가
먼 기억들을 되살려서
달 뜨는 밤이면
달맞이꽃처럼 일어서서
숲을 지나고
강을 건너고
그렇게 바람이 되어 만나는 거다.
풀물든 얼굴로 만나는 거다.
헤어지는 법도 잊었다가
만나는 법도 잊었다가.
알아나 보자
궂은 비
눈보라
인욕으로 사는 한 생
알아나 보자
새가 우는 까닭을
세상사 끊이잖고
물레처럼 도는 시름
알아나 보자
꽃이 피는 까닭을
한 목숨 피고지면
흙이 되어 썩을 육신
행자여, 옷을 깁듯
시름 속에 깁는 사랑
알아나 보자
해가 뜨는 까닭을
알아나 보자
달이 뜨는 까닭을.
임이여 청산에 꽃 되소서
그리운 이가 그리운 날에
임이여 꽃 되소서
나는 한 마리
나비 되오리다.
가다가 곤하면
갈섶에서 잠이 들고
잠 들면 꿈속에서
임의 꽃 가르쳐주소서
그리운 이가
그리운 날에
임이여 꽃 되소서
나는 한 마리
나비 되오리다.
가다가 힘들면
아무 꽃잎에 앉으리까
아무 풀잎에나 앉으리까
그리운 이가 그리운 날에
임이여
가는 길도
임의 향기로 가르쳐주소서
임의 향기로 붙들어주소서.
산유화
한 세상
구비 돌면
외진
그런 곳에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사는
산유화
산유화
가슴이 맑아
산에
피었나
보일 듯
말 듯
바람에 흔들리며
석양에
물드는
노을을 닮아
그리운
그 모습을
그려 보다가
저 혼자
산에
산에
피워보는 꽃.
도라지
깊은 산
뻐꾸기 울다
지나가는
파란 하늘
그 아래
아무도 없는 외딴 산길
산처녀 같은
도라지
도라지꽃
피었습니다.
발문
최도규(시조시인, 아동문학가)
‘나비 청산의 나비’라는 조그마한 시집을 하나 내겠다고 어느 토요일 저녁 남선생이 찾아왔다.
보석함이 어디 커서 값진 것을 담았던가 무엇을 담느냐가 문제인것이다.
나는 일주일 만에 만난 아내와도 아야가를 나눌새 없이 술 한 잔을 나누며 밤 늦도록 남선생과 시집에 관한 의논을 했다.
일찍이 아동문학으로 등단을 하여 동시집 ‘사리울’을 내 놓았고 시조문학과 월간문학에 시조로 당선하여 문제작을 발표하더니 그것도 부족해 몇 년 전시로 다시 신춘의 문까지 통과한 남시인이다.
문학이라는 것은 사색하는 것이고 너그러움을 키우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시와 치열한 정신의 승패 없는 싸움을 해 온 그였다.
이런 남선생의 시집에 발문을 쓰게 되어 영광스럽긴 하다.
그러나 각 시편마다 잘 짜여진 이미지의 직조를 서투른 가위로 재단하고 또 보기 흉한 실올까지 보이게 한다면 시에 대한 해설이나 분석은 오히려 해가 되는 일이므로 나만의 감상으로 그칠까 한다.
남시인은 강원도 하고도 ‘울고 가서 울고 왔다’는 정선 태생이다.
연작으로 쓴 ‘아라리 정선 아라리’에서 시인의 내밀한 꿈을 읽는 것 같아 차분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빨갛지도 하얗지도 못한 / 자주색 / 감자’에서 향토작인 깊은 의미와 현실성과 역사성을 전달시키고 있다.
‘슬픈 사랑도 / 여물면 / 분이 나는가’
‘천년 / 또 천년 / 당신의 살속에서 익으리’ 에서피의 진함을 인간의 바램속에서 염원하고 있다.
‘지금 / 죽음 저 너머에서 / 하얗게 일어서는 / 내 뼈를’
‘남루한 옷을 벗기 위한 / 당신의 예법이기에/ 옷을 벗으리’
죽음은 하나의 공포가 아니라 눈물이 진주알로 순화될 그런 빛남의 유앙스를 지나는 깊은 곳의 이야기도 길어올렸다.
죽음을 바탕으로 한 삶의 긍정을 바로 삶 그 자체에 폭 넓은 애정의 근겅를 두었기 때문임을 이내 찾을 수가 있다.
남시인의 시는 설명이 필요없는 시다. 그 만큼 쉽게 쓰여졌을 뿐만 아니라 관념과 정서와 이미지가 하나로 무르녹아 있기 때문이다.
또 노래하는 시라기 보다는 생각을 요구하는 시에 속한다. 이러한 냄새는 그의 시가 거느리고 있는 포괄적인 의미 구조에서 충분히 감지된다.
수년 동안 동시를 다루어 온 원숙미가 바로 시에 그대로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티없는 동심과 천심이 어우러진 그의 고백이 우리에게 넉넉한 감동의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고 있기 때문이다.
남시인의 재치는 상상력의 뒷받침에 의해 돋보인다.
“봄빛” 작품 전체에 흐르고 있는 밝은 색조도 많은 작품들에서 쉽게 발견할 수 없는 현상이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글이란 기발한 낱말이나 절묘한 기교 등에서 오는 수사력이 아니다 저변에 도도히 흐르는 사상 우리의 혼을 흔들어 깨우는 상상력 묵중한 사색에서 오는 끈덕진 이야기들만이 우리 피부에 와 닿는 흡착력을 지니게 마련인데 남시인은 상당한 소화력으로 주어진 소재들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앞으로 제2 제3의 시집이 장마 뒤 봇물 터지듯 이어 나오길 기대하면서 박수를 보낸다.
〠남진원 시집 나비, 청산의 나비
1985년 11월 5일인쇄
1985년 11월 7일 발행
펴낸이: 박 종 현 발행소: 아동문예사
등록: 1977년 6월 23일 (마 No. 36호)
서울 종로구 인사동 16-2 (402호) TEL 723-6288
*3월 23일 한국시조큰사전(한춘섭. 박병순. 이태극. pp249-250)에 남진원의 사진과 약력, 작품을 수록
<내용>
❖남진원(南鎭源) 1953.10.18 -
시조시인. 동시인. 시인. 호 청파(靑波). 강원도 정선군 골지리에서 출생. 강릉교육대학졸업(1973), <교육자료>, <새교실> 및 <샘터>를 통해 동시가 천료되어(76) 문단에 데뷔. 그후 (아동문예), <기독교교육>에서도 각각 동시가 천료 또는 입선되었으며 (77~78), 1980년 <시조문학.에는 시조 ‘매미소리’가 천료되기도 하였고, <월간문학> 신인작품상에 시조부문이 당선되었다.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83), 현재 한국문인협회․아동문예작가회․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이면서 한국아동문학회 이사이기도 하다. <조약돌> ․ <여울> ․ <미래시> 동인에 참여하면서 첫 시집인 <싸리울>(82)을 간행했다. 강원아동문학회 ․ 아라리문학회 회원으로서 강원도 정선의 벽탄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임.
고향
인절미 한 사라에도 정이 철철 넘쳐 나던
그 눈길 그 손길 반겨 잡은 손바닥에
눅눅한 눈물이 솟는다 인정이 그리운 오늘.
찔레꽃 환한 웃음 유년의 내 강기슭
물결은 잔잔한 미소 어머니로 다가앉네
어질디 어진 바람이 저녁으로 불고 있네.
흙냄새 살쪄 가는 내 고향 풀빛 마을
개구리 울음소리도 달큰하게 섞여 살고
송아지 젖빛 목소리 물컹 고인 숭늉내.
(나래시조문학. 1981. 봄)
밤의 숲
어둠 갈피 갈피 고요를 접어 넣고
잎새들 설핏한 머리칼 잘라 먹는 바람 한 떼
짓푸른 피냄새 맡으며 바람 뒤에 내가 섰다.
갈기갈기 펄렁이는 개구리 울음처럼
목 말라 목이 말라 갈증을 펄렁이는 풀벌레
갈색 잠 연한 개울가에서 물소리를 씹는다.
별들이 산에 안겨 무성하게 자라는 밤
하늘은 달을 떼다 산마루에 매어 놓고
외로움 짙은 눈빛을 풀어 잠든 산을 태운다.
(월간문학. 1980.8)
뻐꾸기
숲 뒤에 혼자 남아 생각조차 물든 설움
송화가루 묻은 눈을 잎새 뒤에 숨겨놓고
해 종일 누굴 찾는가 가슴 아리게 우는 한낮
고사리 참나물 뜯는 치마폭에 고여 와서
뒤 울안 장단지 속 장맛으로 섞여가고
더러는 마당에 남아 그냥 그렇게 스러집니다.
괜스레 울적한 맘 그냥 슬퍼지는 날은
뜻 없이 발 닿는 대로 개울가로 내려와서
한 마리 나도 뻐꾹새 꺼칠한 소리로 웁니다.
(시조문학. 제24호. 1980. 가을)
약탕관
어머님 체온을 넣고 한지 덮은 약탕관
부채로 일구는 정성 숯불 더운 사랑 속에
여름 날 푸른 신앙으로 끓는 그 생명의 청수(淸水)여.
내 유년 파란 샘터에서 꿈을 켜든 어머님
가슴에 고인 달빛 버무려 죄 버무려
눅눅한 수액을 풀어가는 자욱자욱 아린 손.
모조리 아픈 것은 여울져 끓고 있다
흙빛 약탕관도 고열로 신음한다
어머님 맑은 눈물도 함께 담아 데우며.
(노래하는 항아리. 1981.6)
정선아라리.1
대밭에 가 보아라 술에 취한 왕건의 수염을 봤는가
저 만큼 돌아누워 산을 파는 아낙 곁에
머리칼 하이얗게 센 조양강도 흘렀거니
마을이 텅텅 비어 바람마저 외출중인 때
온몸을 벗어들고 태양 속을 걸어가는 여자
전생과 이승과 내생 그 모두를 태우고 있다.
(월간문학. 198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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