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南 昇州郡의 땅이름 연구 - 유래와 어원을 중심으로 - 임 해 권 차 례 Ⅰ. 서론 Ⅱ. 땅이름 연구 의의와 필요성 Ⅲ. 땅이름의 내력 가. 우리 나라 땅이름의 시초 나. 삼국 시대와 통일 신라 시대 다. 高麗 시대 라. 朝鮮 시대 마. 일제 시대 바. 광복 후 Ⅳ. 명명 과정에서 본 땅이름 가. 유연성에 의해 생성된 땅이름 1) 형상에 따라 형성된 땅이름 2) 유물, 유적에 관련된 땅이름 3) 동물과 관련된 땅이름 4) 식물과 관련된 땅이름 5) 전설, 민담 및 인물에 관련된 땅이름 6) 풍토와 관련된 땅이름 7) 사물과 관련된 땅이름 8) 물과 관련된 땅이름 9) 신, 구와 관련된 땅이름 10) 숫자?색깔과 관련된 땅이름 11) 방언형으로 된 땅이름 12) 풍수지리설에 의한 땅이름 13) 方位에 따라 형성된 땅이름
나. 음운 현상에 의해 생성된 땅이름 1) 음운 첨가 2) 자음동화 3) 원순모음화 4) 평순모음화 5) 단모음화 6) 모음이화 7) 된소리되기 8) 민간어원설 9) 뒤섞임 (혼태) 10) 오분석 11) 없앰(생략) 12) 구개음화 13) 전설모음화
다. 조어형식의 유형 1) 고유어 2) 한자말 3) 고유어와 한자어의 섞임 4) 반절식 표기
Ⅴ. 지명의 구조 분석 1. 한자어의 쓰임 구조 2. 地名의 문법적 구조 3. 지명의 한자어화 형태 Ⅵ. 결론 참고문헌 Ⅰ. 서론 땅이름(地名)은 그 토지의 역사를 말하고, 그곳의 지리를 말한다고 한다. 인간이 이 지구상에서 땅을 이용하여 삶을 영위하기 시작하면서 땅이름은 생겼을 것이고, 인간 생활의 역사와 더불어 그 땅이름은 형성되고 변천을 거듭하여 왔을 것이다.1) 따라서 땅이름은 무의미하고 자의적인 음성이 아니라, 지나온 역사와 지형 및 지리와 잃었던 자연을 가르쳐 주고, 오랜 역사를 통하여 우리의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아 온 언어로써 잊혀진 고어와 방언을 제공해 주는 寶庫이며 향토사 연구의 첫 걸음일 것이다. 즉 동일한 언어공동체의 언어에는 그 공동체가 오랜 역사를 함께 하면서 누려온 경험과 정서 및 정신 세계가 반영되기 마련이며, 이의 전승을 통하여 문화를 전수해 가게 되는데 땅이름도 이에서 예외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땅이름은 언어 문화의 化石이다. 땅이 있는 곳에 반드시 이름이 있었고 또한 그 이름은 무턱대고 아무렇게나 지은 것은 아니다. 언어는 생명성을 갖는다고 한다. 地名도 언어이므로 조금씩 변화를 겪었지만, 다른 언어에 비하면 보수성이 아주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희승님도 ‘지명은 그 토지와의 固着性이 가장 强하여 容易히 變하는 것이 아니다’2)고 하였으며, 최범훈도 ‘그 고장 사람들의 입에 익고 鄕土味가 깃들인 지명은 一般語辭보다 保守性이 강하고 그 고장의 애호를 받으며 音相과 意味가 累代를 綿綿히 持續되기도 한다’3)고 하였다. 그러나 지명도 지형을 바꾸거나 역사적인 사건이 생기면 새로운 이름이 옛 이름을 대신하게 된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뀐다 하더라도, 인간과 인간의 本性까지 바꿀 수는 없다. 자연을 중시하던 우리 조상들의 삶은 이 땅이름에 크게 영향을 주었으리라 짐작하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땅이름을 조사하고 연구해보는 것은 우리 겨레의 삶의 모습을 알고 이해하는데 무척 중요한 수단이라고 볼 수 있다. 땅이름 연구가 언어학(국어학)의 자료(연구대상)가 될 수 있음은, 그 땅이름(지명) 자체가 우리의 언어를 매개로 하는 자의적 표현이면서, 하나의 체계와 역사성을 갖추고 있는 고유명사이기 때문이다. 일반 언어가 신생, 성장, 사멸의 과정을 반복하는 생명체의 특성을 가진 것 같이 땅이름도 똑같은 과정을 밟는다. 따라서 땅이름의 연구는 바로 우리 국어학 연구의 한 분야가 된다.4) 本考에서는 우리 나라 3대 사찰의 하나인 송광사로 유명한 전남 승주군을 그 연구 대상으로 하였다. 승주군은 全羅南道 5市 22郡의 하나로 본래 백제의 땅으로서 지형이 낮고 평평하므로 감평(?平) 또는 사평(沙平) 혹은 무평(武平)이라 하였는데, 신라 35대 경덕왕이 昇平으로 고치고, 고려 6대 성종14년(995)에 昇州 또는 昇化로 고쳤다가 10대 정종 2년(1036)에 승평군이 되었다. (중략) 조선 27대 순종 융희 2년(1908)에 樂安郡의 7개 面을 편입하여 20개 면이 되었다가 1949년 8월 14일 대통령령 제 161호에 의하여 순천읍과 도사면의 전역과 해룡면의 왕지, 조례, 연향의 3개 里를 병합하여 순천시로 승격함에 따라 군 이름을 승주군으로 고쳐 11면이 되고 1973년 7월 이후 11면 162리를 관할하고 있다. 동쪽은 광양군, 서쪽은 보성군과 화순군, 남쪽은 여천군, 고흥군과 보성군, 북쪽은 곡성군과 구례군, 중앙은 순천시에 닿아 있다.5) 이 글에서는 全南 昇州郡(11개 面, 162里)의 地名을 중심으로 현재 쓰이고 있는 漢字地名과 과거 지명(俗地名)과의 관계를 분야별로 알아보기로 한다. 글의 정확성을 위해서는 필자가 직접 踏査하여 연구해야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나, 여러 여건상 진인호님(광주 전남 향토사 연구회 회원, 순천시 지명 위원회)의 ‘지명을 찾아서’(순천문화원;1998)를 토대로 했음을 밝힌다. 글의 순서는 먼저 땅이름 연구의 의의와 필요성, 땅이름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본 다음, 1) 속지명이 현재지명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생긴 음운현상 2) 命名관계 3) 조어 형식의 유형, 지명의 구조 분석 순서로 알아본다. 지금까지 先學들에 의해 지명(땅이름)에 관한 연구는 많았지만 대체로 과거나 혹은 현재 불리는 地名만을 대상으로 하였거나, 음운론적6), 형태론적7)으로 어떻게 변했는가에 집중되어있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유래(淵源)와 연관? 것8)만 밝히되 그 유래가 단순한 것은 생략9)하고 그것을 다시 여러 갈래로 나눠서 알아보았고 그 어원이 밝혀지지 않거나 알기 어려운 것은 가능한 排除하였다. Ⅱ. 땅이름 연구 의의와 필요성10) 언어의 본질이 자의적인 음성기호 체계(a system of arbitrary vocal symbols)임은 사실이지만 고유 명사로서의 지명은 일반 언어와는 달리 애초의 명명 과정에서 배의성(motivation)이 강하게 작용한다. 바꾸어 말하면 유연성이 짙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한 고장의 전래 지명에는 그 고장 사람들만이 경험한 애환과 특유의 정서가 담겨 있으므로 향토성과 애향성이 매우 짙은 구심적 특징을 지닌다. 지명은 방언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공통어에서는 찾기 어려운 옛말이 어느 지역의 방언 속에 화석화하여 매장되어 있는 경우를 우리는 허다히 경험한다. 지명어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러기에 양자는 우리말의 보고를 찾고 또 변천 역사를 추적하는 데 자못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여 주는 점에서도 우리말 연구자들에게는 더욱 소중한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지명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지명학(toponomy)은 연구자의 관심과 시각에 따라서는 방언학 외에 지리학, 역사학, 고고학, 민속학, 사회학, 정치?경제학, 설화?구비문학 등의 연구자에 이르기까지 빼놓을 수 없는 조보학문의 자료가 된다. 여기에 지명의 가치가 있고 연구의 필요성이 있다. 우리 나라의 고대 지명에 대한 최초의 어학적 연구는 일본 학자 시라토리(白鳥庫吉:1985)에서 시작 되었고, 우리 나라에서는 이희승의 ‘지명 연구의 필요’(한글 제 2호, 1932)라는 짤막한 글에서 처음으로 지명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11) 그 뒤로 소수의 역사학자들에 의하여 상고사의 연구 과정에서 단편적인 논의가 있었고, 또 『삼국사기』지리지의 지명 해독을 위한 연구가 있었으나,12) 지명 자체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 연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66년부터 한글 학회가 주축이 되어 전국에 걸친 지명의 발굴 조사 작업을 실시하여 『한국 지명 총람』이 간행되면서부터 지명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최현배는 우리말 지명의 수집 목적을 다음 다섯 가지로 나누어 지적한 바 있다.13) 1) 우리의 역사?지리?풍속?제도들 문화 생활의 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요, 2) 우리의 옛말, 말소리의 변천, 말의 꼴과 변천, 배달말의 계통들 언어과학적 연구에 다방면으로 소용될 것이요, 3) 배달 겨레의 성립 및 이동에 관한 연구에 무슨 기틀을 줄 수 있을 것이요, 4) 우리와 이웃 겨레와의 겨레스런, 문화스런 관계의 천명에 필요한 자료를 대어 줄 것이요, 5) 뒷날에 우리 나라의 따이름을 순 우리말로 되살리게 될 경우에는, 크게 소용이 될 것이다. 위의 내용은 지명 연구의 의의와 목적을 잘 지적한 것으로 생각한다. Ⅲ. 땅이름의 내력14) 어느 나라나 거의 같지만, 우리 나라에서도 언제부터 이 땅 곳곳에 땅이름이 있었는가는 확실하지가 않다. 다만, 우리 조상들이 만주와 이 땅에 퍼져 살기 시작하면서 땅이름이 하나 하나씩 붙여졌을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땅이름은 어떤 모습이고, 얼마나 있고, 어디에 그것이 남아 있고를 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가. 우리 나라 땅이름의 시초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랜 역사책인 <三國遺事> 앞쪽에 보면, ‘아사달산(阿斯達山)’이란 땅이름이 가장 앞에 나온다. ‘위서(魏書)에 말하되 2천 년 전에 단군 왕검이라는 자가 있어, 아사달산(經에는 無葉山이라 하며, 또는 白岳으로, 白州 땅에 있다 하며, 開城 동쪽에 있으니, 지금 白岳宮이 그것이라한다)에 도읍을 세우고 개국하니 이름이 조선이다’ <三國遺事 其一> 따라서, 역사에 기록된 땅이름으로는 ‘아사달산’이 처음이라 할 수가 있다. 연구에 의하면 ‘아사달’의 ‘아사’는 옛말 ‘?(‘일찍’, ‘새로’ 또는 ‘아침’의 뜻)에서 온 것이고, ‘달’은 ‘땅’(또는 ‘들’)의 옛말이니, 결국 이 이름은 ‘아침의 땅’이란 뜻이 된다. ‘조선(朝鮮)’도 이 ‘아사달’의 漢字式 表記라 한다. 그러므로 ‘아사달’을 한자로 풀이함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이어서 <삼국유사>에는 ‘태백(太白)’, ‘신시(神市)’, ‘궁홀산(弓忽山)’, ‘금미달(今彌達)’ 등의 땅이름이 나오는데, 당시의 땅이름들은 이처럼 모두 한자로 표기되었다. ‘高句麗’, ‘가야,(伽倻)’와 같은 땅이름도 순순한 우리말인 ‘크다’나 ‘唐(나라)의 뜻을 가진 옛말이 한자로 표기된 것이라는 사실은 익히들 알고 있는 터이다. 나. 삼국 시대와 통일 신라 시대 신라는 삼국 통일 후, ‘삼국 이전은 연대나 도읍지 등에 관해 생각지 않는다(年代國都不可考)’라는 금도(今度)에 따라 삼국 시대 이후만을 말할 수 있었다. 신라가 고구려나 백제의 잔재를 없애려 그들 문화를 흔적 없이 하는 정책을 썼던 탓일 것이다. 삼국 시대의 땅이름은 우리말에 한자를 빈 이두나 향가식 문자로 나타난다. 고구려의 ‘달기현’(達己縣, 지금의 고양시), 백제의 ‘두잉지현(豆仍只縣, 지금의 충남 연기군), 신라의 ’감화랑곡현(甲火郞谷縣, 지금의 경남 기장)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통일 신라 경덕왕 때에 이르러 모든 郡縣 이름 등의 땅이름이 거의 일제히 두 자씩으로 된 중국식으로 옮겨졌다. 이러한 땅이름의 큰 변동으로 삼국 또는 그 이전의 우리말 땅이름들의 본뜻을 알아내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생기게 되었다. 다. 高麗 시대 고려 시대에 와서도 땅이름이 다시 한번 크게 바뀌었다. <三國史記>와 <高麗史>의 地理誌가 刊行되었는데, 여기에 새 땅이름이 많이 실려져 나왔다. 라. 朝鮮 시대 조선이 건국되고 國勢가 안정되면서 <世宗實錄地理誌>가 간행되었는데, 이 때 또 한 차례의 땅이름 개칭이 있었다. 이 지리지에 실린 땅이름은 무려 8,129개에 이르며, 별도로 간행된 <경상도지리지>에는 7,202개의 땅이름이 실려져 있다. 양성지(梁城之)의 <팔도지리지>, 노사신(盧思愼) 등의 <東國與地勝覽> 및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와 <大東地志>에는 땅이름이 2만 개 가량 실렸다. 그러나, 이들 자료에는 순수한 우리 땅이름이 모두 漢字로 표기되어 일반인들에게 익히 불리던 ‘할미산’은 ‘노고산(老姑山)’으로, ‘모래내’는 ‘사천(沙川)으로, ’애고개‘는 ’아현(阿峴)으로, ‘삼개’는 ‘마포(麻浦)’와 같은 식으로 되어 있다.
마. 일제 시대 19세기 말, 일본은 대륙 침략의 길잡이와 토지 수탈을 목적으로 한국의 지형도를 간행하고자 본격적인 땅이름 조사에 착수했다. 이 때 모아진 땅이름은 약 180만 개로서 상당수가 일본 육군 참모본부 간행의 지형도에 기입되었다. 1899년, 육군 참모본부 간행의 지형도(축척 5만분의 1)는 300 장이었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 때 6만 개 마을 이름(법정지명)을 반 정도로 줄여서 이 지도에 표기하였다. 그러나, 이 때의 땅이름 조사, 정리는 불충분했고, 더욱이 일본 사람들의 사용에 편리한 땅이름으로 변질된 것이 상당히 많았으며15), 또 지형도에는 일본글인 가다가나를 倂記했으므로 여기에서 파생된 혼란이 더 심했다.16) 1914년의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에는 많은 땅이름들이 없어지거나 변질되었는데, 이는 행정 구역을 크게 줄임으로써 일어난 현상이었다. 즉, 郡이 377개에서 220개로 줄었고, 面은 1,338개에서 2,521개로, 洞, 里는 62,532개에서 28,366개로 줄게 되었다. 바. 광복 후 해방 후엔 청소년이나 市, 邑, 面 직원이 한자 지식에서 멀어짐에 따라 부정확한 발음과 誤記로 땅이름의 混用, 誤用이 많아졌다. 이같은 혼란은 군사면에도 큰 지장을 주었다. 지도상의 땅이름과 現地의 땅이름이 서로 달라 작전상 막대한 차질을 빚었다. 또한 미군이 로마자 표기에서 채택한 매큔-라이샤워(McCune-Reishawer) 식의 표기로 미군과의 작전 수행에 불편도 따랐다. 이에, 땅이름 호칭과 로마자 표기의 통일을 위해 국무회의 결정으로 1958년에 국방부 산하에 지리 연구소와 중앙 지명 제정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이어서 市道, 市郡, 邑面 지명 제정 위원회가 구성되어 남한의 124,198개의 땅이름이 審議, 採擇되었다. 이를 토대로 新版 지형도의 편찬 간행이 끝나고, 땅이름 제정 사업은 일단락, 그 기능은 새로 제정된 측량법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땅이름의 誤記, 억지, 作名, 改作 등에 의한 혼란은 심각하므로 땅이름의 정리를 위한 작업은 더욱 꾸준히 연구되고 계속 나가야 할 것이다. Ⅳ. 명명 과정에서 본 땅이름 땅이름이 생성되는 과정에는 어떤 有緣性이 있게 마련이다. 그 유연성을 알게되면 대체로 땅이름의 말밑(語源)을 캐낼 수 있다. 그 이유는 삼국 시대 당시 고유 명사는 因異明之의원칙이 두루 준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번 생성된 땅이름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변형되어 그 말밑을 찾기가 아주 어렵게 된 것도 있다. 그 요인도 음운 변화, 音借?訓借에 의한 변화, 동음 견인에 의한 변화, 꼴이나 뜻을 잘못 인식하는 데서 오는 변화, 땅이름의 통합에서 오는 변화, 전수 과정에서 訛傳되어 오는 변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요인에 의해 변천해 오고 있다.17)
가. 유연성에 의해 생성된 땅이름18)
1) 형상에 따라 형성된 땅이름 꼭두바구19); 직각모양으로 꺾어진 바위.〈꺾진바위 環谷; 산이 고리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다고 해서.〈고리메 깃대봉; 뾰쪽한 모양의 峰. 月坪; 반달 모양의 지형.〈와달평?왁다리 갈미峰; 봉우리 모양이 원뿔 같아서20) 錦谷; 멀리서 보면 마치 베틀처럼 보인다고 해서〈쇠골 도롱골; 강이 돌아서 흐르는 곳 月山里; 모후산이 桂枝掛月 곧 계수나무에 걸린 달의 형국이라고 해서 주벅바우; 밥주걱 모양의 바위 地形이나 地勢를 꾸미는 형용사로 大, 小, 高, 長, 新, 廣, 太 등을 사용한 ‘고봉재’, ‘대평’, ‘소래골’, ‘대파니’, ‘매산박골’, ‘큰밤맘골’, ‘큰엉골’, ‘큰정잿골’, ‘작은골’, ‘나발둥’, ‘병풍바우’, ‘문바구’ 등도 많이 썼지마는 ‘덕석바구’, ‘쇠스랑고개’, ‘가래새미’ 등 農器具 모양의 땅이름도 있었다. 2) 유물, 유적에 관련된 땅이름 소죽대 거리; 소도, 소대를 세웠던 거리,〈소죽대 강씨정; 강씨가 세운 정자가 있었다고 해서 永歸亭; 정자이름을 따서 松光面; 松光寺가 있는 面 역몰; 역이 딸린 마을 外松; 송광사 밖에 있는 마을 校村; 鄕校가 있는 마을 어떤 특이한 건물이나 한양에서 내려온 유명한 선비가 세운 정자, 절, 향교 등의 이름과 연관된 것이 많아 자연스레 이름이 붙여졌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堂里’, ‘당골’, ‘당산골’, ‘堂谷’, ‘당산들’, ‘당산밑’, ‘당산밑보’ 등이 많았는데 이는 이웃과 공동체를 중시하고 마을의 安寧을 바라는 마음의 發露라고 생각된다. 3) 동물과 관련된 땅이름 한구미; 거북 꼬리 같다고 해서.〈大龜尾 白鹿; 흰 사슴 모양 같다고 해서 수별등; 마을이 자라가 떠있는 형상 같다고 해서 寐牛; 뒷산이 자고 있는 소의 모양 같다고 해서 鴻頭; 기러기모양 麟蹄洞; 달리는 사슴형국 新鷄; 닭모양의 마을.〈당모리?닭머리 酉峙; 닭머리 모양의 고개.〈닭재 黃山; 마을의 형태가 누런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세(黃鷄抱卵形)같다고 여겨서. 〈흙구덩 龍頭; 龍 모양의 봉우리.〈용머리 烏院; 가마귀 형태의 마을.〈가막안 白鹿; 마을 뒤의 山勢가 사슴 형국이어서 괴솟골; 언덕이 고양이같아서 여수박골; 여우가 나타난다는 골 閑龜尾; 마을이 거북꼬리 밑처럼 생겼다고 해서.〈한구미21) 鶴棲; 山勢가 학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형국이어서 지형의 생김새가 어떤 동물의 생김새와 비슷하거나 그 지역에 많이 서식하는 동식물의 이름을 따 붙인 지명이다. 龍, 사슴(麒麟), 거북은 호국 민간 신앙의 상징으로 또한 성스러운 동물로 여러 설화에 연관된 지명이 많다. 그 외에 ‘龍谷’, ‘개구리 바구’, ‘사자바구’, ‘鶴구리’, ‘청룡들’, ‘학동’, ‘구룡리’, ‘괭생이’, ‘괘바구’ 등의 지명이 많았으며 특히 소(牛)와 관련된 ‘쇠머리골’, ‘소고개’, ‘쇳등’, ‘소말산’ 등은 農耕社會의 特性이라고 보인다. 4) 식물과 관련된 땅이름 麻田, 楮田; 닥나무가 많아서.〈딱밭 栗領; 밤(栗)과 연관된 지명은 매우 많다.〈밤재, 栗田〈밤밭골, 栗峙〈밤티재 松亭; 소나무 앞에 정자가 있어서.〈소정지 竹川; 대나무 앞 천.〈대내 苧洞; 모시가 많이 나서.〈모시골 杏亭; 큰 은행나무가 있는 마을.〈은행정 蓼谷; 〈여꾸실22) 竹林; 대밭이 마을을 감싸고 있어서.〈대숲골 花盞; 강이 ‘ㄱ’자 모양으로 꺾어 흐르는 곳.〈‘고잔’ 혹은 ‘고자내들’ 栗木亭; 밤나무가 많은 강변이란 뜻.〈밤남쟁이 蒜山; 마을 뒤에 있는 마늘 모양의 산.〈마늘봉 外洞; 외를 가꾸는 마을. 〈외동 위의 식물과 관련된 이름은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닥나무, 대나무, 은행나무와 연관이 깊다. 다른 마을에 비해 특히 유명하다기보다 조금만 연관이 있어도 命名한 것은 자연을 사랑하고 아낀 자연관을 드러낸 것이라고 본다. ‘송내리’, ‘下松里’, ‘버들이’, ‘참나무징이’, ‘竹坪里’, ‘竹洞’, ‘竹淸’, ‘竹洞’, ‘松林’, ‘桂月’ 등의 이름이 많았다. 이돈주님도 草木名 등에 관한 어휘 조사에서도 ‘소나무, 대나무, 버드나무’가 가장 많은 빈도수를 가진 것으로 연구된 바23) 있다. 그 외, 槐木(회나무), 꽃밭등, 잔디터, 香梅里, 梨邑, 蓮洞里, 栗里, 栗田里, 밤실 등 ‘밤(栗)’과 연관된 이름도 많이 보였다. 5) 전설, 민담 및 인물에 관련된 땅이름 泉坪; 보조국사가 지팡이로 땅을 뚫어 샘터를 잡아주어서.〈샘바대 돌이봉?돌이봉산 ; 산이 돌아갔다고 해서 짐치까끔; 김치 한사발과 바꿔 먹었다는 산 쑥떡배미; 흉년에 쑥떡 한 덩어리와 바꿔 먹었다는 논배미 無愁山; 송광사 어느 高僧이 어머니의 근심을 덜어 주려 모후산에서 수도하다가 科場 에 나가 알성급제를 하여 어머니의 근심이 없어져서 붙였다는 이름 농바구, 다리미바구, 몰똥바구24); 말거리재 부근에 있는 여러 바위들의 명칭 留京; 홍건적의 난(1361)을 피해 공민왕이 숨었던 곳이라고 해서, 혹은 ‘王臺’(임금이 머물렀던 곳이라고 해서), 또는 母后山(산이 마치 어머니 품속 같다고 해서)라 고도 부른다. 우산; 광해군 때 낙향한 안방준의 호를 따서 산쟁이; 산에서 약초를 캐거나 사냥을 하는 사람이 사는 골짜기 소구봉, 장고봉, 광대골25); 구 면사무소 뒷산에 있는 여러 바위들의 명칭 못등; 奸臣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려 죽자 사람들이 집을 부수고 연못으로 만들어 버린 곳 쇠머리바구; 호랑이를 죽인 소(牛)가 호랑이 가죽을 널어놓은 바위를 들이받아 죽었다 고 해서 영계배미; 흉년에 문전 옥답 세 마지기를 영계 한 마리와 바꾸어 먹었다고 해서 전설이나 인물과 연관된 조사는 흥미로웠다. 글에서는 간단히 기록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을 이름과 정말 연관이 있었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약간 공상적인 내용도 많았지만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과 연관된 것도 있었다. 그 외 ‘朴義士旌門’, ‘?미바구’, ‘총쟁이못골’ 등의 지명이 있다. 6) 풍토와 관련된 땅이름 사제; 모래 성분이 많아서.〈모새밭 黑石; 검은돌; 검은 돌이 많이 난다고 해서 南巖; 푸른 기와쪽이 흩어져 있었다고 해서.〈푸른박골 동너리; 돌이 많아서.〈독너리26) 오미실; 물이 많은 마을, 白峴; 봉우리의 흙이 흰색을 띠어서.〈흰재 南巖; 바위가 푸른 빛이어서.〈푸른박골
땅의 특질이나 모래, 바람과 연관된 마을이름이다. 땅은 농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고 그 특질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7) 사물과 관련된 땅이름 弓角; 활끝모양의 지명.〈활부리 芝洞; 원래 ‘池洞’이었다.〈못골 白峴; 봉우리의 흙이 흰색을 띠어서.〈흰재 南巖; 바위가 푸른 빛이어서.〈푸른박골 거그메; 봉우리의 형태가 男根 모양의 봉우리 점토골; 과거에 白土로 사기를 구웠다고 해서 소죽대 거리; 소도?소대를 세웠던 거리.〈소죽대 구정지; 당산나무 9그루가 서있는 곳이라고 해서 秋洞; 가래나무정자가 있는 골짜기란 뜻에서.〈楸洞 三淸里; 물 맑고, 바람 맑고, 달 맑은 곳이란 뜻으로, 水淸, 風淸, 月淸이라 새겨진 바 위가 있다. 점앞보; 甕器店 앞에 있는 洑 約村; 향약재(건물)가 있는 마을,〈鄕約亭 독종골; 독을 빚어 팔던 곳
다른 이름보다도 그 고을만에 특징이 있는 사물이 있는 경우 地名이 되는 경우이다. 산봉우리가 男根의 형상이라 ‘거시기’라는 말의 준말을 붙여 ‘거그메’라고 붙인 것이 흥미로웠다. 8) 물과 관련된 땅이름 廣灘; 물이 많아서 도메; 물이 휘돌아 가는 곳 芝洞(〈못골) 갱머리배미;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해서 勿下; 물아래 있는 마을 당연하겠지만 물은 인간의 삶과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행정상 큰 단위의 지명뿐만 아니라 한 마을 내에도 그러한 이름이 많았다. 水德里, 九水里, 南江里, 海倉, 水坪里, 海村面, 九江, 등도 있었지만, 개(浦), 나루?날(津), 배기(泊), 새미?샘(泉), 갱(溪), 모래(沙),들(川), 못(池) 등이 접두, 접미사의 역할을 하는 지명도 물과 연관이 있다고 본다. 9) 신, 구와 관련된 땅이름 新基; 마을 사람들이 화재 후 새로운 장소로 이전하여,〈새터 新月; 새로 뜨는 달이 커지면서 밝혀주리라는 뜻,〈새터 舊基; 신기가 형성된 뒤 생긴 마을 〈옛터 지명 중에 ‘새’가 접두사처럼 붙은 것은 거의 漢字 ‘新’을 訓借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기존에 있던 땅이름에서 새로 생긴 것이라는 변별적 기능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新’, ‘새’ 가 붙은 것은 통시적으로 ‘舊(옛)’ 字가 붙은 것보다 나중에 생긴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지명은 아주 많았다. 10) 숫자?색깔과 관련된 땅이름 구정지(당산나무 9그루가 서있는 곳) 黃山; 마을의 형태가 누런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세(黃鷄抱卵形)같다고 여겨서. 〈흙구덩 九龍; 산줄기가 많아서 여덟냥 고개; 원님이 고개를 넘다 도승에게 여덟 냥을 주고 길을 물었다해서 아홉냥 고개; 상여를 매고 가다 관리를 만나면 길을 막고 아홉 냥을 받고 길을 열어주 고 가게 했다고 해서 二美里, 上三里, 三亭里, 三淸, 五林, 五山, 九龍이 특히 많았고, 九岩, 九水, 九上里, 九上峙, 大九里 등 ‘九’가 들어간 지명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11) 방언형으로 된 땅이름 동너리 혹은 독너리; ‘독’은 돌, ‘너리’는 ‘나리’의 사투리로 ‘돌이 바닥에 깔린 나루’의 뜻 한구미; 마을이 거북꼬리처럼 생겨서 역몰; 역이 딸린 마을이란 뜻 웃자작물; 신작로를 내면서 장작을 메워 도로를 내면서 생긴 못 짐치까끔; 김치 한사발과 바꿔 먹었다는 산 쑥떡배미; 흉년에 쑥떡 한 덩어리와 바꿔 먹었다는 논배미 고깔바구; 바위 모양을 따서 고잔 혹은 고자내들; 강이 ‘ㄱ’자 모양으로 꺾어 흐르는 곳 모실; ‘마실’(마을)이란 뜻으로 유마마을(송광면 후곡리 소재) 사람들이 말거리재를 넘 으면 처음 나타나는 마을이어서 붙인 이름 농바구, 다리미바구, 몰똥바구; 말거리재 부근에 있는 여러 바위들의 명칭 한두바구; (한은 크다이고 두는 ‘우두머리’로 큰 바위란 뜻. 지석묘로 밝혀졌다 아들바구; 여인들이 돌을 던져 바위 위에 얹히면 아들을 낳는다고 여수박골; 여우가 나타난다는 골 덜밑; 너덜27) 바위 밑에 있는 마을 야달 냥 고개; 樵童들이 令旗를 펄럭이고 고개에서 대치하다가 관리의 행차가 지나가 면 영기로 문을 닫아 돈 여덟 냥을 받고 통과 시켰다고 해서 처음부터 사투리로 命名되지는 않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저절로 化石化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바구(岩)’가 많았다. 12) 풍수지리설에 의한 땅이름 麟蹄; ‘박힌 말발굽’을 신성한 동물인 ‘기린의 발자국’으로 바꿈〈印蹄 長明; 오래 밝으라고 孝洞; 효자들이 많다고 하여〈灰洞 文星; 서당에서 공부하는 학동들이 기라성같이 빛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水坪; 화재가 자주 발생하여 住岩; 배가 손님을 가득 싣고 항해하면 마을이 번창하고, 손님이 내려 버리면 쇠퇴한 다고 하여 손님이 계속 머물게 하려고〈舟岩 아들바구; 여인들이 돌을 던져 바위 위에 얹히면 아들을 낳는다고 塵土재; 재를 넘으면 절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로 신성한 절과 대비시켜 ‘世俗’을 의미 하는 이름을 붙였다.〈진터재 섯재?서거리재; 釋迦佛이 서있다고 해서 芙蓉山; 연꽃과는 연관이 없었으나 비슷한 음을 따서 붙였다.〈夫言山 소박한 우리 조상들의 염원을 엿볼 수 있는 지명들이 많았다. 커다란 소망이나 소원이 아닌 자식들이 공부 잘하라고 붙인 이름이나, 화재를 막기 위하여 붙인 지명으로 주술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는 것도 많았다. ‘효동’, ‘福多’, ‘복다실’ 등은 백성들이 평범하지만 가장 바라고 원했던 소망이 아닌가. 또한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풍수지리는 매우 영향이 크다. ‘장군석’, ‘벅숫거리’, ‘병마봉’ 등의 지명이 많음도 그 영향이라고 본다. 13) 方位에 따라 형성된 땅이름 上於; 윗마을, 아랫마을.〈상어왕리, 하어왕리 酉東?酉西; 닭실의 동쪽?서쪽에 있는 마을이어서 西洞; 길다란 모양의 마을.〈細洞 南巖; 바위 남쪽에 있는 마을.〈푸른박골 새들, 샛?, 새태 등과 南亭, 洞山(동뫼, 도메), 南岩 등의 지명은 동쪽을 기준으로 하고 집과 농사에서 남쪽을 중시했던 경향을 잘 보인다. 그 외에 上古, 下古, 上栗, 下栗, 하람, 外西面, 북들, 西亭, 西面 등의 명칭이 있었다.
나. 음운 현상에 의해 생성된 땅이름
땅이름은 주로 지리적 조건 등 유연성에 의해 생성되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음운 탈락, 첨가, 동화 따위의 과정을 거쳐 여러 가지로 변천하게 된다. 여기에서는 특히 형태음운 변화에 의해 생성된 땅이름을 통시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형태 음운 변동에 의해 생성되는 땅이름은 일단 유연성에 의해 형성된 것이 음운의 탈락, 첨가, 동화 등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변화를 거쳐 재생성된 땅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 변화의 과정이나 원인을, 원칙 없이 잘못 발음하는 과정을 거쳐 굳어졌기 때문에, 쉽게 알아낼 수 없는 것도 많지마는 대개는 깊이 연구하면 말밑을 밝힐 수 있다. 땅이름 연구는 이러한 부분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1) 음운 첨가 松亭; 정자의 이름을 따서〈소정. 2) 자음동화 雲洞; 보람산(제석산)의 신선봉에서 신선이 구름을 타고 가다가 쉬었다가 간다고 하 여 〈운마을 (〈웃마을) 가는골〈가늣골; (버느나무 가지가 가늘게 늘어진 마을) (〈간골) 솔래〈솔내; 소나무가 우거진 마을 3) 원순모음화 雲月(領)(〈운알; 고개가 높아서) 4) 평순모음화 갱들 <괸돌; 지석묘가 있는 마을
5) 단모음화 니비〈네비 (네 왕비가 태어날 명당이란 곳), 6) 모음이화 선산; 마늘이 많이 나서,〈蒜山(산산), 西洞; 마을 형상이 길게 생겨서,〈細洞, 雲月(領); 고개가 높아서,〈운알, 가래굴; 가래나무 정자가 있는 골짜기에서,〈가래골 7) 된소리되기 싹시; 史氏가 살던 골짜기란 뜻에서,〈사씨골 꼭두내; 마을 모양을 따서,〈곡두내 8) 민간어원설 정말 유래담이 명칭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믿기 어려운 것이 있었는데 그 말이 가진 뜻을 이미 자기가 잘 알고 있는 말로써 해석하여 널리 알려지다 보니 마침내 그 말의 소리까지도 그렇게 바꿔버린 것28)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짐치까끔; 김치 한사발과 바꿔 먹었다는 산, 쑥떡배미; 흉년에 쑥떡 한 덩어리와 바꿔 먹었다는 논배미 9) 뒤섞임 (혼태) 우리가 일상 쓰는 말 가운데는, 뜻이 똑 같은 말, 또는 뜻이 비슷한 말이 꽤 많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떠한 말을 하려고 할 때는, 이러한 말 가운데에서 그 선택을 망설이는 일이 있다. 이리하여 두 말을 합쳐서 한 말을 만들어 내는 일도 있는데, 이것을 뒤섞임이라한다.29) 이러한 예는 매우 많았는데 그 이유는 일제가 1914년 지명을 정리하면서 里를 통폐합 하는 과정에서 매우 많아졌다. 홍내(홍두와 내동), 新鶴里(新昌里과 仙鶴里), 竹鶴里(竹林里와 舞鶴里), 鳳山里(鳳川과 山尺里), 大坪里(新垈와 月坪), 葛坪里(葛田과 武坪) 10) 오분석 일반 사람들은, 비록 어원학자가 아닐지라도, 자기가 쓰고 있는 말에 대해서, 그 말이 가진 뜻을 자기가 이미 잘 앍고 있는 말로써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예는 ‘소나기’, ‘행주치마’, ‘袴衣’ 등의 예가 있다.30) 獒山(〈게재,기재)31) 梅雨(〈寐牛〈잔소)32) 五味實(〈오미실)33) 花盞(〈‘고잔’ 혹은 ‘고자내들’)34) 11) 없앰(생략) 말의 속도를 빨리 하고, 노력을 덜기 위해서, 그 말의 특색을 드러내는 데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요소를 아주 줄여 없애는 것을 생략35)이라 하는데 이는 수효가 많지 않아 어떤 갈래를 잡기는 어려웠다. 泉坪〈泉字坪 멀메〈머흘36)메; 山勢가 험해서 月峰〈雲月峰 도메(‘물이 돌다’의 ‘돌’에서 ‘ㄹ’을 없앰), 저우실(‘절’에서 ‘ㄹ’ 없앰, ‘웃’에서 ‘ㅅ’ 없앰), 約村(〈鄕約亭; 鄕約齋(건물)가 있는 마을), 웃자작물(〈웃 + 장작 + 물; 신작로를 내면서 장작을 메워 도로를 내면서 생긴 못) 댕춘(대흥사의 村) 관원 〈沙斤館院 (사근관원; 낙안읍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澗院) 차남기 〈참남기 (眞木) 12) 구개음화 밤치〈밤티; ‘티’는 ‘산골 마을’의 의미 13) 전설모음화 민재(〈蚊峙; 보조국사가 송광사를 창건하면서 佛力으로 모기를 쫓아버렸더니 모기들이 민재를 넘어 산척(승주읍 봉산리 소재)으로 넘어갔다고해서), 다. 조어형식의 유형 1) 고유어 ㄱ. 마을 선바구; 마을 앞에 서있는 사람 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웃느렝이; ‘웃’을 ‘上’으로 ‘느렝이37)’를 ‘於’로 옮김. 〉上於. 한구미; 마을이 거북꼬리 밑처럼 생겼다고 해서. 새터; 새로 생긴 마을〉新基 혹은 新月. 오미실; 물가 마을. 한실; 큰 마을(웃한실, 아래한실). 〉大谷. 도롱골; 강이 돌아서 흐르는 곳. 느레골; 길게 늘어진 골. 괴솟골; 언덕이 고양이같아서. 송뱅이; 임진난 때 朴益文이 소나무 밑에 숨었다고 해서. 〉松方. ㄴ. 고개 산밭끔?산바꿈?삼바꿈38). 〉麻田. 갈재; 갈대가 많은 고개. 바구설; 바위가 많은 고개. 머물개미; 섯거리재를 넘나드는 길손들이 머물다 가는 길목. ㄷ. 골 쇠골;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베틀처럼 보인다고 해서. 〉錦谷. 대숲골; 대나무가 마을을 감싸고 있어서. 〉竹林. 산쟁이; 산에서 약초를 캐거나 사냥을 하는 사람이 사는 골짜기. 〉山尺.
ㄹ. 내 곰챙이; 돌아 흐르는 곳
ㅁ. 들 뗏등; 풀이 많은 벌판. 〉茅田. 쑥떡배미; 흉년에 쑥떡 한 덩어리와 바꿔 먹었다는 논배미. 느레골; 길게 늘어진 모양의 밭. 〉於田39). 可用坪; 고인돌이 있는 들판40).〈갱들. 온배미; 백(온)마지기의 논배미, 즉 큰 벌판. 〉溫夜. ㅂ. 등성이(산) 고리메; 산이 고리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다고 해서. 돌이봉?돌이봉산; 산이 돌아갔다고 해서. 가랭이; 갈림길이란 의미. 솔메; 솔(소나무)가 많은 산. 〉松廣山. 짐치까끔; 김치 한사발과 바꿔 먹었다는 산.
ㅅ. 못 웃자작물; 신작로를 내면서 장작을 메워 도로를 내면서 생긴 못. ㅇ. 바위 우렁이 바구; 마치 황새가 날아 우렁을 쪼려는 것 같다고 해서. ㅈ. 산 거그메; 남자의 ‘거시기’ 모양의 봉우리. 멀메 ; 먼 곳에 있는 산. 멀메; 〈머흘메.山勢가 험해서.
ㅊ. 나루 동너리; ‘독’은 돌, ‘너리’는 ‘나리’의 사투리로 ‘돌이 바닥에 깔린 나루’의 뜻.〈독너리 . 정문거리; 齋의 정문이 있는 거리. 2) 한자말
ㄱ. 마을 約村; 〈鄕約亭, 鄕約齋(건물)가 있는 마을. 新基; 〈새터, 마을 사람들이 화재 후 새로운 장소로 이전하여. 江基洞; 강물이 흐르기 시작한 곳. 外松; 송광사 밖에 있는 마을. 農所; 〈農鼠, 마을의 山勢가 쥐의 형상이어서. 校村; 鄕校가 있는 마을. ㄴ. 등성이 강씨정; 강씨가 세운 정자가 있었다고 해서.
ㄷ. 바위 路巖; 해오라기가 바위에 앉아 있는 곳. 〈鷺巖.
ㄹ. 기타 구정지; 당산나무 9그루가 서있는 곳이라고 해서. 永歸亭; 정자이름을 따서. 3) 고유어와 한자어의 섞임 ㄱ. 마을 역몰; 역이 딸린 마을이란 뜻. 중한실; 中’은 ‘중간 크기’의 뜻이며, ‘한’은 ‘大’, ‘실’은 ‘谷’. ㄴ. 골 沙器店골; 사기를 굽던 터. 山祭泊골; 여인들이 이 샘에서 제를 지내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점토골; 白土로 사기를 구웠다고 해서. 鍮店洞;〈놋점골. 놋그릇을 만들어 팔던 곳. ㄷ. 내 대내; 대나무 앞 천. ㄹ. 들 관안들; 관아의 안들. 갱머리배미41);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해서. ㅁ. 등성이 고부터(古?+터). ㅂ. 못 가마沼(가마모양의 못). ㅅ. 산 마늘峰(마늘 모양의 산), 시루峰. ㅇ. 기타 점앞보(甕器店 앞에 있는 洑). 가래굴(갈림길 +窟). 地境터(송광사와선암사의 경계). 4) 반절식 표기 ㄱ. 마을 琴坪; 〈상거름, ‘거’에서 ‘ㄱ’을, ‘름’에서 ‘ㅁ’을 취함. 鳳谷; 〈보광골, ‘광’에서 ‘ㅇ’만 따고, ‘골’은 谷으로. ㄴ. 고개 波知城; 〈벌재, ‘波’는 ‘바’ 또는 ‘버’의 소리이며, ‘知’는 ‘ㄹ’이고 ‘城’은 ‘재’. ㄷ. 내 熊川; 〈古音川, ‘音’에서 ‘ㅁ’만 취함. ㄹ. 들 豆原; 〈‘荳(두)’는 ‘드’를, ‘屹(흘)’은 ‘ㄹ’을 나타내어 ‘들’이란 뜻. 斗坪; 〈드뭇들; ‘드무’를 ‘두(斗)’로 ‘들’을 ‘坪’으로. 可用坪;〈갱(들); ‘用’에서 ‘ㅇ’을 취함. Ⅴ. 지명의 구조 분석 우리 나라의 地名은 서울을 제외하고는 모두 漢字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한자로 지어 부르지는 않았다. 한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땅이름을 지어 불렀을 것이므로 의당 토박이말 곧 우리말로 지어 불렀다고 보아야한다. 그들은 글자를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저 입에서 입으로 부르고 전해 왔다. 그런데 중국에서 漢字가 전래되자 문자 생활을 비로소 하게 되었고 다라서 지명도 한자로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기록한 글자가 漢字일지라도 지명은 토박이말로, 즉 우리말 이름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말 지명에 한자의 옷을 입힌 것일 뿐 한자어로 된 지명이 아니다.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에 표기된 郡縣 이상의 고을 이름들은 오늘날 지명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오늘의 지명은 모두 두 글자로 漢字語化 했는데 옛 지명은 두 글자에서 네 글자로 되어 있어 한자어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借用해서 기록했기 때문이다. 지명을 한자를 차용해서 기록하는 방법은 뜻 옮김, 소리 옮김과 이를 混用한 것이 있다. 우리의 지명은 漢字의 그늘에 가려 실상을 알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우리의 地名은 역사적으로 크게 세 번 변화하였다. 맨 처음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唐의 문화를 모방하면서신라 경덕왕 16년(757) 郡縣 이상의 지명을 두 글자로 된 지명으로 모두 바꾸었다. 두 번째는 고려 건국 후 문물 제도를 고치면서 지명도 다시 한번 고치게 된다. 오늘날 우리의 군청 소재지 이상의 지명은 이렇게 命名되었다. 세 번째는 일제가 1914년 조선의 377개 郡을 220개 군으로, 4338개 면을 2521개 면으로, 里?洞은 62,532개에서 28,366개소로 축소하였다.42) 당연히 승주군의 지명도 이러한 역사적 변천이 과정을 겪었으리라. 승주군 11개 읍면에 散在한 마을이 ‘승주 향리지(1997)’에 실린 478개 마을 이름을 중심으로, 마을 이름에 쓰인 漢字, 漢字語化한 마을 이름의 구조, 漢語化 過程, 한자의 우리말 표기 등을 밝혀 마을 이름의 실상을 알아본다. 1. 한자어의 쓰임 구조 땅이름에 쓰인 漢字는 任意의 글자가 아닌 필연적인 有緣性에 뿌리를 두고 命名하였다고 생각되는 바, 그 이름의 모든 것에 어떤 의미가 內包되어 있으므로 소홀히 할 수 없다. 따라서 마을 이름에 쓰인 漢字를 앞 글자, 뒷 글자, 셋째 글자로 나누어 그 사례를 구별하여 조사하였다. 이를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승주는 여러 천년 동안 우리 민중과 삶의 애환을 같이하고 전통의 강인한 줄에 묶이어 독특한 우리 문화를 창조하여 대물림했으며, 가까이는 개화 이래 일제의 강압적인 전통 말살에도 무저항의 저항으로 왜색화를 거부하며 조선 사람임을 고집한 조상의 삶의 터울이요, 현대인의 고향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우리 글로 표기해야 하는데 모두 한자로 표기하고 우리말 이름을 촌스럽다고 업신여긴다. 그래서 오직 주암면의 ‘잿등’만을 한글로 표기하고 있다. 478개 마을 지명을 표기하는데 사용된 한자는 앞 글자가 192자, 뒷 글자가 131자, 끝 글자가 8자이다. 그리고 두 글자로 된 지명이 470개이고 세 글자로 된 이름이 8개이다. 그 가운데 앞 글자에 新, 龍, 九, 大, 竹, 上, 月, 松, 下, 內 등 10자가 132곳에, 德, 花, 長, 東, 鳳, 西, 水, 道, 山, 鶴, 平, 蓮, 南, 石, 仙, 中, 五, 金, 古, 文, 雲, 堂, 飛 등 23자가 이름에 사용되었다. 다시 말하면 33개 글자가 242곳(51.6%)에 사용되었다. 이것은 새롭고 크고 또한 평화로운 것을 좋아하며 달, 솔, 대, 물, 금, 봉, 학, 신선, 연꽃, 구름을 아끼고 부러워한 우리 조상들의 정신세계를 말해주고 있다고 본다. 고을의 이름은 거기에 살던 사람들이 불교의 極樂淨土이기를, 유교에 醇化된 道德의 場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많은 글자들 가운데서 마음에 드는 글자를 선택해서 표기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글자도 마찬가지이다. 478개 地名을 표기한데 쓰인 글자는 모두 131자로, 그 가운데 洞, 山, 谷, 村, 坪, 田, 亭, 龍, 基, 川, 林 등 11개 글자가 213개 곳에, 峙, 溪, 垈, 岩, 月, 頭, 安, 水, 大, 星, 鶴 등 11개 글자가 69곳에 사용되어 모두 282곳(58.9%)에 사용되고 있음을 보인다. 이들 글자 역시 자연을 아끼고 소중히 하며 자연과 함께 살려고 했던 우리 先人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산, 골짜기, 밭, 정자, 터, 내, 숲, 고개, 바위, 달, 물, 별, 학 등의 단어를 사용한 것은 우리 민족이 아름답고도 순수하고 소박하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세 글자 마을은 주암의 국사동(國寺洞), 송광의 오리치(五里峙), 내우산(內牛山), 와우산(臥牛山), 상이읍(上梨邑), 오미실(五味實), 황전의 상수평(上水坪), 내모전(內毛田), 등 8개인데, 오미실, 오리치를 제외한 6개 이름에 內?外?上의 세 글자가 접두사로 붙은 이름으로 두 글자 이름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우리 나라 땅이름에 많이 쓰이는 한자는 山, 谷, 新, 大, 松, 峴, 石, 上, 內, 南, 岩, 東, 水, 下, 浦, 村, 井, 長, 龍, 月 등의 차례이며, 이 중에서도 자연에 대한 땅이름을 많이 썼고, 불교에 관계되는 塔, 寺, 金剛 등의 땅이름이나 忠孝나 仁, 義, 禮, 智, 信 등 五常에 관한 한자가 땅이름으로 많이 쓰이고 있는 것도 우리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43) 2. 地名의 문법적 구조 두 글자 이상이 결합해 造語된 漢字語 구성은 修飾, 述目, 主述, 述補, 竝列 관계의 구조를 보인다. 지명의 한자명도 하나의 단어라고 여기고 그 구조의 측면을 살펴봄으로써, 마을 이름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표에서 본 바와 같이 地名의 문법적 구조는 修飾 관계가 80.8%, 병렬 관계가 5.6%, 주술 관계가 3.6%, 술목 관계가 1.5%, 기타가 9.4%이므로 수식 관계가 주종을 이룬다. 기타는 비록 한자로 표기되었다 하더라도 한자어가 아닌 우리말 이름인데 한자의 옷을 입혀 우리말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모든 地名, 里名이 원래 우리말로 짓고 불러오다가 한자의 옷을 입고 다시 정치적, 문화적, 사상적 힘에 의하여 우리말 이름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漢字名이 차지해 버려 이제는 지명와 里名에서 우리말의 본질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우리 나라의 지명은 비록 문헌에 한자로 표기되었을지라도 본바탕은 우리말이었다. 그것은 신라 경덕왕 때, 고려 건국 후, 그리고 日帝에 의해, 총 3차례 크게 바꾸었는데 그중 일제가 바꾼 것이 가장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첫째, 旣往의 한자명을 소리 그대로 쓰면서 획수가 간단한 글자로 代替하여 원래의 뜻을 전혀 짐작할 수 없게 한 것이 많았고, 둘째, 전혀 연관이 없는 이름을 멋대로 붙인 것도 많았다. 예를 들어 松光의 牛山里는 대대로 ‘소메’, ‘소매’라 부르고 牛山이라 한자로 표기했는데 이를 寒川으로 고쳐버렸다. 셋째, 두 지역 혹은 그 이상 지역의 이름을 합하여 새로운 이름으로 만들어 버렸다. 예를 들어 黃田面의 內洞, 竹洞, 漏亭里, 鳳亭, 長星 등을 합하여 內竹里라 改稱해버린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地名은 여러 受難을 겪어 왔다. 그런데 남의 탓만을 할 수 없는 것이 외세에 편승해 우리 스스로가 우리말 이름을 버리고 남의 말 이름을 추종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 더 문제이다. 우리의 정신 세계를 지배하는 사상의 노예가 되어 버린 것이다. 심지어 언론에서도 어느 특정 지역을 지칭하여 MK니 PK니 하는 식으로 보도를 하고 이에 덩달아 정치인의 이름도 DJ니 JP니 YS니 하는 식으로 부르는 세상이 되었다. 이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스스로 좋아서 그렇게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더 심각한 일은 그것을 잘하는 것인 양, 유식한 일인 양 생각한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얼마 전 북한 최고의 언어학자가 남한에 와서 한 첫 마디가 우리의 무분별한 외래어(외국어) 사용을 꼬집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이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지적한 것이라고 본다.
3. 지명의 한자어화 형태 승주군 11개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우리말(俗地名)과 漢字地名과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훨씬 많은 지명이 있었지만 그 변화 관계를 알 수 없는 것, 연관성이 없는 것은 제외하고 지명에서 우리말과 한자어와의 형태를 조사하였다.
우리말에서 마을 이름은 ‘실’, ‘골’, ‘몰(말)’의 형태를 원형으로 볼 수 있다. ‘구랑실’, ‘한실’, ‘오미실’, ‘모실’, ‘구피실’, ‘배골’, ‘덕골’, ‘가래골’, ‘절골’, ‘날몰’ 등의 마을 이름이 이를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모든 마을에 行政上 공식 명칭인 한자명과 노인들의 입에 남아 있는 우리말 이름이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 원래는 우리말 이름이 먼저 존재했었고 뒤에 한자명이 덧붙어 주인을 쫓아내고 안방을 차지하고 있는 꼴이다. 일본이 저지른 일을 이제는 당연히 여기고 대한 민국에서 그래도 사용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말 마을 이름이 한자 이름으로 바뀌는 과정은 소리 옮김44), 뜻옮김45), 뜻과 소리를 혼용하여 옮김, 기타46)의 방법이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방법인 것 같지만 이에도 유연성, 풍수지리설 등에 영향을 받아 옮겼으리라고 본다. 이 글을 쓰면서 꼭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일제의 蠻行으로(1914년) 원래의 뜻과 전혀 다르게 변한 이름이 많다는 것이다. 五山〈獒山), 九水〈龜水), 西洞〈細洞), 池洞〈芝洞, 古山〈鼓山, 秋洞〈楸洞, 用水〈龍首, 農所〈農鼠, 九巖〈龜巖, 士峰〈麝峰, 路巖〈鷺巖 등으로 매우 많았는데 기막히게도 수십 년이 지난 현재도 그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마음을 아프게 했다. Ⅵ. 결론 지금까지 전남 승주군의 지명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본 바를 요약 해 보았다. 첫째, 지명의 생성면에서, 지명은 여러 가지 요인의 유사성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형상, 동?식물, 전설?민담, 풍토, 사물, 숫자, 방위, 유물?유적, 신?구, 방언형 등에 의해 생성되었음을 밝혀 보았다. 둘째, 그러한 유연성이나 유래에 의해서 생성된 이름이라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언중에 의해서 생략, 동화, 교체, 첨가 등의 여러 원인의 음운 변동으로 재생성 됨을 밝혀 보았다. 셋째, 지명을 계통면에서 볼 때, 우리말로 형성되어 있는 것, 우리말과 한자어의 혼합으로 되어 있는 것, 순 한자어로 되어있는 것, 반절식으로 되어 있는 것 등이 있었고 무엇보다 일제에 의해 原形이나 원래의 뜻이 많이 變質된 것이 많았음을 알아보았다. 넷째, 지명을 구조 분석 해 본 결과, 한자어의 쓰임 구조면에서는 478개 마을 지명을 표기하는데 사용된 한자는 앞 글자가 192자, 뒷 글자가 131자, 끝 글자가 8자이다. 그리고 두 글자로 된 지명이 470개이고 세 글자로 된 이름이 8개이다. 다섯째, 그 지명에는 앞 글자에 新, 龍, 九, 大, 竹, 上, 月, 松, 下, 內 등 10자가 132곳에, 德, 花, 長, 東, 鳳, 西, 水, 道, 山, 鶴, 平, 蓮, 南, 石, 仙, 中, 五, 金, 古, 文, 雲, 堂, 飛 등 23자가 이름에 사용되어 33개 글자가 242곳(51.6%)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는 바 이것은 자연과 평화를 좋아하며 달, 솔, 대, 물, 금, 봉, 학, 신선, 연꽃, 구름을 아끼고 부러워한 우리 조상들의 정신세계를 알 수 있었다. 여섯째, 지명의 문법적 구조에서는 修飾관계가 80%로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곱째, 우리말은 크게 3차례에 걸쳐 漢字語化 하였는데 이중 일제는 의미를 축소하거나 획수가 간단한 글자로 바꿔버려서 원래의 뜻을 짐작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매우 가슴 아픈 일이었다. 여덟째, 지명의 한자어와 형태에서는 뜻옮김(訓讀), 뜻과 소리의 옮김, 소리옮김(音讀), 기타의 방법이 있었는데 그중 뜻옮김의 방법이 64.9%로 나타났다. 이것은 원래 우리말이 있었는데 나중에 한자로 바꿨음을 알 수 있었다.
세상에서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있다면 어머니와 고향일 것이다. 하지만 요즘의 현실은 고유한 땅이름들이 최근 급격한 도시화와 지역 개발에 의해 밀려나고 있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유서 깊은 땅이름들이 소멸되고 새로운 이름으로 변해 가는 사례가 많다. 그러나 어느 마을 이름이나 정자나무의 하찮은 유래라 할지라도 그 자체가 우리 민족의 전통의 산 역사요 기록임에는 틀림없다. 일찍이 ‘사회 과목 교육은 모름지기 향토 교육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들은 민족 차원의 공통성도 크지만 그 원초적 형태는 지방의 작은 공동체 속에서 태어나서 자란 것이다. 고도 성장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땅이름에 대하여 다시 한번 평가해야 할 것이다. 중?고등학교 국어나 국토지리 과목에 땅이름에 관한 학습 단원을 설정하여 내 고장의 지리와 역사 그리고 땅이름을 익히고 다른 나라,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정확히 알고 소개 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제 고장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을 가질 수 잇고 향토애를 통하여 애국심을 고취할 수 있다.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위대한 국가 건설의 이면에는 고장 사랑이 바탕이 된 훌륭한 향토인의 정신이 있었다. 가장 향토적인 것이 가장 민족적인 것이며,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처럼 가장 토속적인 것을 올바르게 전승?발전시키는 것이 우리의 정신 문화를 살지게 할 수 있다는 인식이 우리들 모두에게 지금 절실하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고향을 바르게 인식시켜 가슴속 깊이 향토에 대한 역사 의식을 새롭게 하려는 긍지를 갖게 해야 한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국어나 지리 담당 교사들이 국립지리원과 협조하여 학생들과 함께 현재 국내에서 발행되고 있는 국가 기본도 등 각종 지도에서 잘못 표기되어 있거나 누락되어 있는 자기 고장의 땅이름을 바로 잡는 일에 앞장 서 줘야 한다.47) 나름대로 조사했지만 미흡한 점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느낀 것은 첫째, 이 지역에 오랫동안 살면서도 날마다 보고 듣던 이름에 몰랐던 사연과 연관성을 알게 되었고, 더욱 애착심을 갖게 되었다. 둘째, 그 땅에서 태어나서 그 땅과 함께 살다가 그 땅에 묻혀있는 분들의 소박하면서도 인정 많은 숨결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게 되었다는 점이다. 셋째, 당연한 이야기지만 현재 살고 있는 우리들 세대에게 그 유서 깊은 땅이름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을 느꼈다. 땅이름을 연구하고 지키고 또한 전승해야 하는 이유는 막연한 鄕愁的인 감상은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땅이름을 단순히 옛것을 남기기만 하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운동은 더욱 아니라고 본다. 우리나라에는 엄청난 주옥같은 땅이름이 아직도 지방마다 고을마다 남아 있다. 그 속에는 먼 옛날부터 전승되어 오는 것도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내 고장의 역사를 지키고 보존하려는 차원 높은 주민 의식과 사명감이 필요한 때이다. 참고 문헌 한글학회(1982), 한국지명총람 14. 전남편(Ⅱ). 지명유래집(1987), 건설부 국립지리원. 진인호(1998), 지명을 찾아서, 순천문화원. 강길부(1997), 땅이름 국토사랑, 집문당. 김윤학(1996), 땅이름 연구 - 음운?형태 -, 박이정. 허웅(1985), 국어 음운학 - 우리말 소리의 오늘?어제 -, 샘문화사. 李乙煥, 李喆洙(1985), 韓國語文法論, 교학사. 이돈주(1998), 땅이름(지명)의 자료와 우리말 연구, 『지명학』, 한글지명학회. (1965), 전남지방의 지명에 대한 고찰, 『국어국문학』, 29. 국어국문학회. (1968), 한국 지명한자어의 통계와 분석, 전남대 『논문집』, 14. 정영숙(2002), 지명어의 음운변화 연구, 충남대학교박사학위논문집. 손정현(1993), 밀양군 부북면 땅이름 연구 - 토박이 말을 중심으로 -, 창원대학교대 학원. 공문택(1993), 전남 여천군 돌산도의 땅이름 연구,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강성수(1986), 고유어 지명에 관한 고찰, 전남대교육대학원, 안인숙(1999), 포천군의 땅이름 연구 - 생성과 변화를 중심으로 -, 대진대학교 대학 원. 주재경(2001), 고흥 지역 지명 연구, 순천대교육대학원. 윤평원(1983), 地名語의 形態?音韻 硏究 - 巨濟郡 地名을 中心으로 - , 高麗大學校 敎育大學院. |
출처: 임해권의 새로운 집 원문보기 글쓴이: 임해권
첫댓글 그 옆에 살아도 난 당췌 뭐가 뭔지 몰갔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