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핀 호수(Elfin Lakes)에 간다는 것은 호수를 보러 간다는 것이 아니다. 엘핀 호수에 간다는 것은 엘핀 호수가 있는 산을 보러 간다는 것도 아니다. 엘핀 호수에 간다는 것은 엘핀 호수가 있는 산에서 다른 산을 보러 간다는 뜻이다.
산등성이로 길게 길게 이어진 폴릿지(Paul Ridge-릿지는 산등성이를 타고 가는 길을 말한다)를 굽이굽이 돌아서 걷다보면 어느 자그마한 언덕 위에서 갑자기 엘핀과 만난다. 빨간 앵두 같기도 하고, 맑은 수정 같기도 하다. 두 개의 더 작을 수 없는 귀엽고 앙증맞은 호수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지친 몸으로 ‘내가 이 조그만 호수를 보러 여기 까지 왔던가.‘ 하고 순간 회한에 잠길런지도 모르겠다.
엘핀은 귀여운 동녀(童女)같다. 두 개의 호수가 있으니 다른 하나는 동남(童男)같다고 해야 할까? 영어로 엘핀(Elfin)은 꼬마 요정을 의미한다. 두 꼬마 요정. 언덕 위에서 하나는 작고, 또 다른 하나는 더 작은 호수를 내려다보면서 누군가가 지은 이름을 내가 오늘 마치 인허하는 기분이다. 약 1500미터 높이의 고산에 이슬처럼 맺혀있는 엘핀은 땀을 흘리며 목마르게 올라온 많은 이들의 목을 축여줄 만큼 충분하게 청정하다. 물을 떠서 햇볕에 비쳐보아도 전연 부유물이 보이지 않는다. 엘핀이 있어 선남선녀들이 이곳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쪽은 마실 물로만 사용하고, 다른 한쪽은 목욕도 가능하다. 우리 옛날 이야기 식으로 말한다면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하고 올라갈 때에는 마실 물을 떠가지고 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앨핀으로 가는 길은 스콰미쉬(Squamish)에서 다이아몬드 헤드로 가는 맴쿠암 로드(Mamquam Rd.)에서부터 시작된다. 비포장도로를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40리길을 산길로 달려 올라가서 차를 세우고, 배낭을 메고 숲속 길로 나선다. 5킬로 지점에서 레드 히더 셀터(Red Heather Shelter)를 만나는데 여기서부터 레드 히더와 화이트 히더가 융단처럼 산언덕을 덮고 있다. 멀리서 보면 잔디처럼 보이는 30센티 미만의 작은 관목이다. 6-7월에 종모양의 하얗고 빨간 작은 꽃을 피우는 고산식물이다. 겨울이면 엄청난 눈이 그 위에 쌓인다. 여름에는 뙤약볕 아래 깡마른 가지로 버티며 세찬 바람에도, 쏟아지는 빗물에도, 엄동의 혹한에도 꿋꿋이 이겨내며 사철을 푸르게 인고(忍苦)하는 정말 가만히 들여다보면 고개가 숙여지는 강인함을 안고 사는 식물이다.
내가 여기 오기 전까지 히더는 누구를 그리워하며 살았을까? 하늘을 그리워하며 살았다면 키가 그렇게 작지만은 않았을 텐데. 세상을 그리워하며 살았다면 그 무리가 산 위를 향해 뻗어가지는 않았을 텐데. 히더는 말없이 녹색의 초원을 이루며 내년 봄에 피워낼 꽃을 잉태하고 있는 듯하다.
엘핀은 라운드 마운틴(Round Mt.) 등성이에서 동쪽 켠에 자리하고 있다. 라운드 산은 이름처럼 둥그런 산세에 제 모습을 한 눈에 보여주질 않는다. 1700미터의 높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느 한곳에서도 정상을 볼 수가 없다. 땀방울을 산 위에 떨군 사람만이 폴 릿지에 설 수 있고 그런 사람만이 고산에서 고산을 바라볼 수 있는 장관을 맛보게 해준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멀리 멀리 뻗쳐나가 흰 눈을 머리에 이고 서 있는 장승같은 설산을 바라보는 순간이라면 어느 누구의 마음에 티끌이 남아있게 되겠는가?
맑고 고요함이라는 명제가 여기서 말이 아닌 산이 되어 보는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범접하지 못할 장엄한 산을 보아야 자연의 위대함에 인간은 스스로 겸허함을 알게 된다. 엘핀으로 가는 길은 산 위를 걸으며 산을 보며 가는 길이다. 갈 때는 동쪽의 산들을 보며 가고, 올 때는 서쪽의 산들을 보며 돌아온다. 북쪽의 산들은 다이아몬드 헤드(Diamond Head)가 뿜어내는 웅장함 속에 시녀들처럼 둘러서 있다.
엘핀에 가보지 않고 밴쿠버에서 산에 가봤다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엘핀에서 새벽을 보지 않고 산에서 새벽을 보았다는 말을 꺼내지 못할 것이다. 붉은 노을이 서산에 지기 시작하면 동편에 있는 산들의 산정이 붉게 물든다. 동과 서로 함께 황혼의 빛이 꽃처럼 피어나는 곳이 엘핀이다.
얼핀에서 늦게 일어나는 사람은 정말 불행한 사람이다. 꼬마요정들이 어둠을 밀어내며 동편에서 솟아오르는 여명을 맞이하는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붉은 물결이 동쪽 산 너머에서 움틀 때, 엘핀을 둘러싼 모든 산들이 눈을 비비고 일어나 기지개를 켠다. 히더의 초원이 펼쳐진 산마루에는 산의 신선한 정기가 고요와 함께 호수 위에 감돈다. 엘핀 호수는 유리알처럼 반짝이며 하늘을 담고 웃음을 머금는다.
엘핀 호수에 갈 때에는 카메라를 두고 가야 한다. 보이는 아름다운 것들을 모두 마음의 필름에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눈으로 직접 보아야지 렌즈를 통해서 보면 진정 산과 교감할 수 없다. 눈으로 예쁘게 담아낸 마음의 사진은 돌아와서도 두고두고 꿈속에서조차 피어난다. 엘핀 호수에 갈 때에는 카메라를 가지고 가지 말아야 한다. 그런 사람은 반드시 산에서 내려오며 다시 엘핀에 오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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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핀 셀터(Elfin Shelter)
에밀과 오타는 노르웨이에서 1930년대에 캐나다로 이민을 왔다. 그들은 스키 점퍼로서 산악에서 스키를 타며 지내는 것을 삶의 최대의 꿈으로 여겼다. 비시 일대의 산들을 오르내리며 가장 적합하고 아름다운 곳을 찾아 헤메다가 이곳 엘핀 호수가에 랏지를 세우기로 결심하고 1945에서 46년까지 두 해에 걸쳐 약 30명 정도가 묵을 수 있는 통나무 산장을 그들 손수 지어냈다. 그때는 아마 여기까지 오는데 산간도로도 제대로 없었을 시절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생각해 보면 길도 제대로 없이 어떻게 엘핀까지 올 수 있을까 싶다.
스콰미쉬에서 27킬로미터나 되는 거리이다.
오타는 조안과 결혼해서 세 사람이 겨울에는 스키를 타고, 여름에는 가까운 산들을 등산하며 고산에서 호젓하게 지냈다. 이들이 있었기에 이 아름다운 장소가 알려지게 되었고, 등산 전문가가 아니라도 손쉽게 엘핀에 갈 수 있고, 거기서 새벽을 볼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이다. 에밀과 오타는 27년 동안의 산 생활을 끝내고 1972년에 이곳을 떠났고, 1975년 34명이 숙박할 수 있는 시설로 엘핀 셀터를 주정부에서 건립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풍요롭고 고요하게 영위하려고 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기쁨을 줄 수 있는 자산을 남겨준 사람들이다. 엘핀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전한 사람들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낸다.
'엘핀 호수에 갈 때에는 카메라를 두고 가세요' 참 멋있는 글제입니다. 수필집 제목으로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을 읽은 동안 내내 가슴이 설레었습나다. 엘핀에 가보고싶다는 욕망이 저를 일으켜 세우는 것 같아요. 요즈음 너무 힘 들어서 한동안 홈 페이지에 들어오지않았는데 한힘의 글을 보니 삶에 의욕이 생깁니다. 감사합니다. 한국일보에 보내고저 하오니 타 신문에 투고하셨다면 연락주십시오. 심
첫댓글 오랫만입니다.어제 옛집엘 갔더니 주인이 바뀌고 묘령의 여인이 말 없이 네임카드를 줍디다. 전화해야지하고 벼릅니다. 이제 자유로운 은자되어 좋은 산을 보고 오셨군요. 참 좋은 글입니다.
'엘핀 호수에 갈 때에는 카메라를 두고 가세요' 참 멋있는 글제입니다. 수필집 제목으로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을 읽은 동안 내내 가슴이 설레었습나다. 엘핀에 가보고싶다는 욕망이 저를 일으켜 세우는 것 같아요. 요즈음 너무 힘 들어서 한동안 홈 페이지에 들어오지않았는데 한힘의 글을 보니 삶에 의욕이 생깁니다. 감사합니다. 한국일보에 보내고저 하오니 타 신문에 투고하셨다면 연락주십시오. 심
심 선생님, 오랜만에 뵈니 더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