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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크 더글라스 [Kirk Douglas ]
생년월일 : 1916. 12. 9
출생지 : 미국 뉴욕 암스테르담
학 력 : 세인트로렌스대학교
본 명 : Issur Danielovitch Demsky
유명한 영화배우 마이클 더글러스의 아버지로, <스파르타커스>(60)의 주인공으로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배우다. 아카데미 상을 받은 바는 없지만, 말년에 미국 영화상(87), 독일 황금 카메라상(88) 등을 수상했다. 또한 오랜 기간 계속해 온 민간 봉사 활동의 결과,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민간인 최고의 영예라고 알려진 장의 메달(1981)을 받았으며, 1983년에는 제퍼슨 훈장을 받기도 했다.
86년 버트 랭커스터와 공연한 <터프 가이들>을 마지막으로 영화계 활동을 중단, 자서전 [넝마주이의 아들], 소설 [악마와 춤을] 등 작품 집필에만 몰두해 왔다. 이후 8년만인 94년 <탐욕(Greedy)>에 출연했다.
날카로운 눈매, 움푹 들어간 볼에 매력적인 저음 보이스를 가진 미남 배우이며 마이클 더글러스의 아버지로도 유명하다. 가난한 이민자의 후손으로 태어나 브로드웨이에서 연기 경험을 쌓았따. 연극 무대에서의 성공을 기반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한 그는 <챔피언>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되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빈센트 반 고흐의 생애를 다룬 <열정의 랩소디>, 존 스터지스의 서부 활극 등에서 리딩 롤을 맡아 배우로서의 몸값을 올린 그는 <영광의 길>과 대작사극 <스팔타커스>에서 스탠리 큐브락 감독과 호흡을 맞추게 되지만 두 사람의 강한 개성이 충돌하면서 이들의 유대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일제시대를 겪은 40년대, 6.25이후의 50년대,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고 군사정권이 들어선 60년대,
그리고 유신치하의 70년대, 이런 격동의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헐리웃 영화와 스타들, 이 시대의 영화들을 '고전영화'라고 부르고, 수많은 미남미녀
배우들이 우리나라에서 폭발적 인기를 모았습니다. 그 소위 '고전배우'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중 1910년대에 태어난 배우중에서 보기 드물게 생존해 있는
배우가 바로 '커크 더글러스'입니다.
1946년 데뷔이후, 1970년대까지 수많은 영화가 쉬지 않고 우리나라에 개봉되었죠.
그는 역대 헐리웃 배우 베스트 50에 끼일 만한 인기배우였지만 유독 우리나라에서
꾸준히 많은 영화가 개봉된 배우입니다. '30세'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마사 아이버스의
위험한 사랑'이라는 영화에 데뷔한 이래 1949년 출세작 '챔피언'이후 '탐정이야기'
'해저 2만리' '율리시즈' '유성과 같은 사나이' 'O.K목장의 결투' '건 힐의 결투'
'바이킹' 등 50년대에 출연한 영화, '스팔타카스' '석양의 건파이터' '텔레마크의 요새'
'거대한 전장' '열망' '공과해' '만날 때는 언제나 타인'등 60년대 출연 영화들,
'빅맨' '재뉴어리' '안개속의 미행자' '그레이트 씨맨' '대탈옥' 등 70년대 출연한 영화들이
계속 개봉되었을 만큼 우리나라에서 꽤 인기를 누렸습니다. 20편이 넘는 영화가 개봉된 배우이죠.
'바이킹' '스팔타카스' '율리시즈'같은 대작 사극영화에서 전사같은 이미지로 스크린을
휘어잡았고, '탐정이야기' '악인과 미녀' '스피드의 왕자(The Racer)'같은 영화에서는
강렬하고 정열적 이미지의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공과해' '영광의 길' '
'거대한 전장'에서는 군인의 모습으로 '챔피언'에서는 복서로 '유성과 같은 사나이(Man
Without a Star)' '석양의 건파이터(The Last Sunset)' '건 힐의 결투' 등에서는
서부의 총잡이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그의 최고 대표작은 'O.K 목장의 결투'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이 O.K목장의 결투는 사실 '버트 랭커스터'가 주인공입니다. 커크 더글러스가 공동 주연을
맡기는 했지만 역할의 비중은 버트 랭커스터가 더 높았죠. 하지만 전설의 보안관인 와이어트
어프역의 버트 랭커스터 보다는 역시 전설적인 서부시대의 명사수 닥 할러데이 역의
커크 더글러스의 강력한 카리스마가 더 뇌리에 깊게 박힌 영화였죠. 이 영화에서 두 명의
서부의 전설을 연기한 버트 랭커스터와 커크 더글러스가 주고 받는 '팽팽한 대사'의 재미는
굉장히 뛰어납니다. "나중에 신세갚으로 찾아가겠네" "안 오는 것이 신세를 갚는 방법이네"
라든가 '내 결혼식에 와 주겠나" "장례식이라면 몰라도 결혼식은 서툴러서" 같은 대사들이죠
이 O.K목장의 결투에서 커크 더글러스가 연기한 '닥 할러데이'는 '빅터 마츄어(황야의 결투)'
'월터 휴스턴(무법자)' '제이슨 로바츠(속 O.K 목장의 결투)' '발 킬머(툼스톤)'
'데니스 퀘이드(와이어트 어프)' '아서 케네디(샤이안)'등의 여러 배우들이 다양한 영화에서
연기를 했지만 커크 더글러스의 카리스마를 따라갈 배우는 없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단연 최고의 '닥 할러데이'의 연기는 O.K 목장의 결투에서의 커크 더글러스였죠.
만성적 '폐렴'에 걸려서 기침을 콜록콜록하며 폐인같은 생활을 하는 듯 하면서도 귀신같은
속사권총으로 상대를 해치우고, 깔끔한 양복과 올백머리를 한 강인한 인상에 와이어트 어프와의
숙명적인 우정을 나누는 서부의 전설적 명사수 닥 할러데이는 커크 더글러스 자체였죠.
커크 더글러스는 거장 '스탠리 큐브릭'감독의 초기 시절에 그와 두 편의 영화를 함께 작업했습니다.
스탠리 큐브릭은 감독으로 커크 더글러스는 제작자이자 주연배우로 나섰죠. 그 두 편의 영화는
'영광의 길'이라는 전쟁영화와 '스팔타카스'라는 대작사극이었습니다. 이 두 영화는 커크 더글러스가
일생에 출연한 모든 영화들중에서 최고 걸작 2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준 초기 영화이죠. 당시 헐리웃의 영향력있는 스타배우이자 제작자인
커크 더글러스가 '신예 감독'인 스탠리 큐브릭을 고용하여 완성한 두 편이었는데 스팔타카스
개봉이후에 두 걸출한 영화인은 헤어졌습니다. '카리스마'하면 둘째 가라면 서러운 고집쟁이
스탠리 큐브릭은 커크 더글러스의 지나친 간섭에 반기를 들고 '두 번 다시 그와 영화를 안하겠다'
라고 선언하고, 스팔타카스를 자신의 영화라고 할 수 없다고 선언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팔타카스는 벤허나 십계 같은 대작과 견주어도 뒤질 것이 없는 대작사극이었고, 거대한
엑스트라를 동원한 전투장면은 정말 장관이었죠. '로렌스 올리비에' '찰스 로튼' '진 시몬즈'
'토니 커티스' '피터 유스티노프'같은 베테랑 인기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3시간짜리 대작은
갓 30대를 지난 스탠리 큐브릭이 통솔하여 영화를 완성해 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합니다.
물론 그 3년전에 완성한 전쟁영화 '영광의 길'은 1차대전을 소재로한 영화중에서 최고 걸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커크 더글러스는 '아카데미상'과는 인연이 없는 배우였습니다. 평생 세차례의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고, 그중 1956년에 출연한 '불의 사나이 고호(Lust for Life)'에서 유명한 화가 빈센트 반 고호
역을 맡아서 혼신의 열연을 보여주지만 아깝게 왕과 나의 율 브리너에게 수상이 돌아갔죠.
그 외에도 '챔피언' '탐정 이야기' '스팔타카스'에서 정열적인 연기를 보여주었지만 아카데미상과
인연을 맺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날카로운 눈매와 뾰족한 턱을 가진 카리스마 넘치는 그의
외모에서 풍기는 강렬함은 그가 출연한 모든 영화에서 빛났죠. 그는 대부분의 영화에서 주인공을
연기했지만 다른 명배우들하고의 공연을 통하여 영화를 더욱 재미있게 이끌어가기도 했던 배우입니다.
버트 랭커스터(O.K 목장의 결투, 5월의 7일간)와는 여러 차례 공연을 했고, 존 웨인(무장마차, 공과해)
로버트 미첨(과거로부터, 서부로 가는 길), 로렌스 올리비에(스팔타카스), 토니 커티스(스팔타카스,
바이킹), 안소니 퀸(건힐의 결투, 불의 사나이 고호, 율리시즈), 록 허드슨(석양의 건파이터) 등이 그와
공연한 적이 있는 주요 배우들이죠. (커크 더글러스가 못 받은 아카데미 상은 아들인 마이클 더글러스가
1987년 '월 스트리트'라는 영화로 수상을 하였죠. 아버지가 못한 숙원을 아들이 푼 셈입니다)
커크 더글러스는 헐리웃 배우중에서 꽤 '잉꼬부부'로 유명합니다. 1943년 첫 결혼 이후 이혼하고
1954년에 결혼한 현재의 부인과 50년이 넘는 부부생활을 해오고 있습니다. 그의 장남인 역시
유명한 제작자이자 배우인 '마이클 더글러스'가 상당히 바람둥이이자 문란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커크 더글러스는 여성편력이야 있었겠지만 꽤 오랜 부부생활을 해오고 있는 보기 드문 헐리웃
스타배우입니다. 그는 또한 날카롭고 강렬해 보이는 인상이 그의 뾰족한 턱 때문이기도 한데
턱의 가운데가 쏙 들어간 독특한 특징은 커크 더글러스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죠.
정말 가장 독특한 모양의 턱을 가진 배우입니다. 아들인 마이클 더글러스는 아버지와 쏙 빼닮은
외모이죠. 요즘 배우중에서 '숀 펜'도 커크 더글러스와 비슷한 인상입니다.
1916년에 태어난 커크 더글러스는 그의 자서전 '넝마주위의 아들'에서 볼 수 있듯이 굉장히
가난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프로레슬러 등을 거치며 어렵게 살아가다가
1946년 루이즈 마일스톤(서부전선 이상없다로 유명한 감독이죠) 감독의 '마사 아이버스의
위험한 사랑'에서 비중있는 역할로 데뷔한 이래 자크 투르뇌, 조셉 L 맨키위츠, 로버트 로센
마이클 커티즈 등 역량있는 감독들의 영화에 계속 출연하는 행운을 달렸습니다. 그의 출세작은
1949년 데뷔 3년뒤에 출연한 로버트 로센 감독의 '챔피언'이었고, 이후 1951년에는 거장중의
거장 '윌리암 와일러'감독의 '탐정 이야기(Detective Story)'에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행운을
얻고, 명연기를 보여주어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되죠. 1950년대는 전성기를 누리며 많은
영화에 출연하여 부와 명예를 얻게 됩니다. 국내에서 인기를 모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은
'율리시즈' '해저2만리' 'O.K 목장의 결투' '스팔타카스' '바이킹' 등 주로 흥미진진하고 오락적인
작품이지만, '악인과 미녀' '탐정 이야기' '유리 동물원' '불의 사나이 고호' '세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등 고품격의 수작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의 영화중에서 국내에 마지막으로 개봉된 작품은 1975년에 출연한 '재뉴어리(Jacqueline
Susann's Once Is Not Enough)'라는 성인영화였죠. 70년대 출연작중 개봉작품들은
대체로 범작에 그친 영화들로 '그레이트 씨맨' '재뉴어리' '안개속의 미행자'등은 혹평을 받은
작품들이죠. 아무래도 나이가 든 70년대에는 그다지 좋은 영화들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우리나라 미개봉작인 '전율의 텔레파시(The Fury)'나 '최후의 카운트다운(The Final Countdown)'
같은 작품들이 그의 '후기 수작영화'에 속합니다.
현재 무려 91세에 달한 그는 '그레고리 펙' '윌리암 홀덴' '로버트 미첨' '율 브리너'
'버트 랭커스터' '프랭크 시나트라' '리처드 위드마크'등 동시대에 활동한 배우들이 모두
사망하였지만 아직 꿋꿋하게 살아있습니다. 물론 노쇠하여 더 이상 영화출연은 2004년
'일루전'이라는 작품을 마지막으로 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고 노쇠하여 한 때
말이 나오지 않는 장애를 겪었지만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여 80세가 넘는 나이까지 배우로
활동한 것입니다.
비록 지난 30여년 동안 그가 출연한 영화가 개봉되지 않았고, 그의 모습은 이미 한참 흘러간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추억의 배우이지만, 그가 연기한 O.K목장의 결투에서의 '닥 할러데이'의
이미지는 두고 두고 서부영화의 향수를 되새겨줄 명연기로 기억될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실제의 '닥 할러데이'보다 더 멋진 인물일 것입니다.
[ 또 다른 필모그라피 ]
커크 더글러스(1916~ )
미국배우
1946년 '마사 아이버스의 위험한 사랑'으로 데뷔
출세작 '챔피언(49년)'
대표작 : O.K 목장의 결투, 스팔타카스, 바이킹, 율리시즈, 해저 2만리
영화배우 마이클 더글러스의 아버지
일제시대를 겪은 40년대, 6.25이후의 50년대,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고 군사정권이 들어선 60년대,
그리고 유신치하의 70년대, 이런 격동의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헐리웃 영화와 스타들, 이 시대의 영화들을 '고전영화'라고 부르고, 수많은 미남미녀
배우들이 우리나라에서 폭발적 인기를 모았습니다. 그 소위 '고전배우'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중 1910년대에 태어난 배우중에서 보기 드물게 생존해 있는
배우가 바로 '커크 더글러스'입니다.
1946년 데뷔이후, 1970년대까지 수많은 영화가 쉬지 않고 우리나라에 개봉되었죠.
그는 역대 헐리웃 배우 베스트 50에 끼일 만한 인기배우였지만 유독 우리나라에서
꾸준히 많은 영화가 개봉된 배우입니다. '30세'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마사 아이버스의
위험한 사랑'이라는 영화에 데뷔한 이래 1949년 출세작 '챔피언'이후 '탐정이야기'
'해저 2만리' '율리시즈' '유성과 같은 사나이' 'O.K목장의 결투' '건 힐의 결투'
'바이킹' 등 50년대에 출연한 영화, '스팔타카스' '석양의 건파이터' '텔레마크의 요새'
'거대한 전장' '열망' '공과해' '만날 때는 언제나 타인'등 60년대 출연 영화들,
'빅맨' '재뉴어리' '안개속의 미행자' '그레이트 씨맨' '대탈옥' 등 70년대 출연한 영화들이
계속 개봉되었을 만큼 우리나라에서 꽤 인기를 누렸습니다. 20편이 넘는 영화가 개봉된 배우이죠
'바이킹' '스팔타카스' '율리시즈'같은 대작 사극영화에서 전사같은 이미지로 스크린을
휘어잡았고, '탐정이야기' '악인과 미녀' '스피드의 왕자(The Racer)'같은 영화에서는
강렬하고 정열적 이미지의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공과해' '영광의 길' '
'거대한 전장'에서는 군인의 모습으로 '챔피언'에서는 복서로 '유성과 같은 사나이(Man
Without a Star)' '석양의 건파이터(The Last Sunset)' '건 힐의 결투' 등에서는
서부의 총잡이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그의 최고 대표작은 'O.K 목장의 결투'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이 O.K목장의 결투는 사실 '버트 랭커스터'가 주인공입니다. 커크 더글러스가 공동 주연을
맡기는 했지만 역할의 비중은 버트 랭커스터가 더 높았죠. 하지만 전설의 보안관인 와이어트
어프역의 버트 랭커스터 보다는 역시 전설적인 서부시대의 명사수 닥 할러데이 역의
커크 더글러스의 강력한 카리스마가 더 뇌리에 깊게 박힌 영화였죠. 이 영화에서 두 명의
서부의 전설을 연기한 버트 랭커스터와 커크 더글러스가 주고 받는 '팽팽한 대사'의 재미는
굉장히 뛰어납니다. "나중에 신세갚으로 찾아가겠네" "안 오는 것이 신세를 갚는 방법이네"
라든가 '내 결혼식에 와 주겠나" "장례식이라면 몰라도 결혼식은 서툴러서" 같은 대사들이죠.
이 O.K목장의 결투에서 커크 더글러스가 연기한 '닥 할러데이'는 '빅터 마츄어(황야의 결투)'
'월터 휴스턴(무법자)' '제이슨 로바츠(속 O.K 목장의 결투)' '발 킬머(툼스톤)'
'데니스 퀘이드(와이어트 어프)' '아서 케네디(샤이안)'등의 여러 배우들이 다양한 영화에서
연기를 했지만 커크 더글러스의 카리스마를 따라갈 배우는 없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단연 최고의 '닥 할러데이'의 연기는 O.K 목장의 결투에서의 커크 더글러스였죠.
만성적 '폐렴'에 걸려서 기침을 콜록콜록하며 폐인같은 생활을 하는 듯 하면서도 귀신같은
속사권총으로 상대를 해치우고, 깔끔한 양복과 올백머리를 한 강인한 인상에 와이어트 어프와의
숙명적인 우정을 나누는 서부의 전설적 명사수 닥 할러데이는 커크 더글러스 자체였죠.
커크 더글러스는 거장 '스탠리 큐브릭'감독의 초기 시절에 그와 두 편의 영화를 함께 작업했습니다.
스탠리 큐브릭은 감독으로 커크 더글러스는 제작자이자 주연배우로 나섰죠. 그 두 편의 영화는
'영광의 길'이라는 전쟁영화와 '스팔타카스'라는 대작사극이었습니다. 이 두 영화는 커크 더글러스가
일생에 출연한 모든 영화들중에서 최고 걸작 2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준 초기 영화이죠. 당시 헐리웃의 영향력있는 스타배우이자 제작자인
커크 더글러스가 '신예 감독'인 스탠리 큐브릭을 고용하여 완성한 두 편이었는데 스팔타카스
개봉이후에 두 걸출한 영화인은 헤어졌습니다. '카리스마'하면 둘째 가라면 서러운 고집쟁이
스탠리 큐브릭은 커크 더글러스의 지나친 간섭에 반기를 들고 '두 번 다시 그와 영화를 안하겠다'
라고 선언하고, 스팔타카스를 자신의 영화라고 할 수 없다고 선언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팔타카스는 벤허나 십계 같은 대작과 견주어도 뒤질 것이 없는 대작사극이었고, 거대한
엑스트라를 동원한 전투장면은 정말 장관이었죠. '로렌스 올리비에' '찰스 로튼' '진 시몬즈'
'토니 커티스' '피터 유스티노프'같은 베테랑 인기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3시간짜리 대작은
갓 30대를 지난 스탠리 큐브릭이 통솔하여 영화를 완성해 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합니다.
물론 그 3년전에 완성한 전쟁영화 '영광의 길'은 1차대전을 소재로한 영화중에서 최고 걸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커크 더글러스는 '아카데미상'과는 인연이 없는 배우였습니다. 평생 세차례의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고, 그중 1956년에 출연한 '불의 사나이 고호(Lust for Life)'에서 유명한 화가 빈센트 반 고호
역을 맡아서 혼신의 열연을 보여주지만 아깝게 왕과 나의 율 브리너에게 수상이 돌아갔죠.
그 외에도 '챔피언' '탐정 이야기' '스팔타카스'에서 정열적인 연기를 보여주었지만 아카데미상과
인연을 맺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날카로운 눈매와 뾰족한 턱을 가진 카리스마 넘치는 그의
외모에서 풍기는 강렬함은 그가 출연한 모든 영화에서 빛났죠. 그는 대부분의 영화에서 주인공을
연기했지만 다른 명배우들하고의 공연을 통하여 영화를 더욱 재미있게 이끌어가기도 했던 배우입니다.
버트 랭커스터(O.K 목장의 결투, 5월의 7일간)와는 여러 차례 공연을 했고, 존 웨인(무장마차, 공과해)
로버트 미첨(과거로부터, 서부로 가는 길), 로렌스 올리비에(스팔타카스), 토니 커티스(스팔타카스,
바이킹), 안소니 퀸(건힐의 결투, 불의 사나이 고호, 율리시즈), 록 허드슨(석양의 건파이터) 등이 그와
공연한 적이 있는 주요 배우들이죠. (커크 더글러스가 못 받은 아카데미 상은 아들인 마이클 더글러스가
1987년 '월 스트리트'라는 영화로 수상을 하였죠. 아버지가 못한 숙원을 아들이 푼 셈입니다)
커크 더글러스는 헐리웃 배우중에서 꽤 '잉꼬부부'로 유명합니다. 1943년 첫 결혼 이후 이혼하고
1954년에 결혼한 현재의 부인과 50년이 넘는 부부생활을 해오고 있습니다. 그의 장남인 역시
유명한 제작자이자 배우인 '마이클 더글러스'가 상당히 바람둥이이자 문란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커크 더글러스는 여성편력이야 있었겠지만 꽤 오랜 부부생활을 해오고 있는 보기 드문 헐리웃
스타배우입니다. 그는 또한 날카롭고 강렬해 보이는 인상이 그의 뾰족한 턱 때문이기도 한데
턱의 가운데가 쏙 들어간 독특한 특징은 커크 더글러스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죠.
정말 가장 독특한 모양의 턱을 가진 배우입니다. 아들인 마이클 더글러스는 아버지와 쏙 빼닮은
외모이죠. 요즘 배우중에서 '숀 펜'도 커크 더글러스와 비슷한 인상입니다.
1916년에 태어난 커크 더글러스는 그의 자서전 '넝마주위의 아들'에서 볼 수 있듯이 굉장히
가난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프로레슬러 등을 거치며 어렵게 살아가다가
1946년 루이즈 마일스톤(서부전선 이상없다로 유명한 감독이죠) 감독의 '마사 아이버스의
위험한 사랑'에서 비중있는 역할로 데뷔한 이래 자크 투르뇌, 조셉 L 맨키위츠, 로버트 로센
마이클 커티즈 등 역량있는 감독들의 영화에 계속 출연하는 행운을 달렸습니다. 그의 출세작은
1949년 데뷔 3년뒤에 출연한 로버트 로센 감독의 '챔피언'이었고, 이후 1951년에는 거장중의
거장 '윌리암 와일러'감독의 '탐정 이야기(Detective Story)'에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행운을
얻고, 명연기를 보여주어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되죠. 1950년대는 전성기를 누리며 많은
영화에 출연하여 부와 명예를 얻게 됩니다. 국내에서 인기를 모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은
'율리시즈' '해저2만리' 'O.K 목장의 결투' '스팔타카스' '바이킹' 등 주로 흥미진진하고 오락적인
작품이지만, '악인과 미녀' '탐정 이야기' '유리 동물원' '불의 사나이 고호' '세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등 고품격의 수작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의 영화중에서 국내에 마지막으로 개봉된 작품은 1975년에 출연한 '재뉴어리(Jacqueline
Susann's Once Is Not Enough)'라는 성인영화였죠. 70년대 출연작중 개봉작품들은
대체로 범작에 그친 영화들로 '그레이트 씨맨' '재뉴어리' '안개속의 미행자'등은 혹평을 받은
작품들이죠. 아무래도 나이가 든 70년대에는 그다지 좋은 영화들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우리나라 미개봉작인 '전율의 텔레파시(The Fury)'나 '최후의 카운트다운(The Final Countdown)'
같은 작품들이 그의 '후기 수작영화'에 속합니다.
현재 무려 91세에 달한 그는 '그레고리 펙' '윌리암 홀덴' '로버트 미첨' '율 브리너'
'버트 랭커스터' '프랭크 시나트라' '리처드 위드마크'등 동시대에 활동한 배우들이 모두
사망하였지만 아직 꿋꿋하게 살아있습니다. 물론 노쇠하여 더 이상 영화출연은 2004년
'일루전'이라는 작품을 마지막으로 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고 노쇠하여 한 때
말이 나오지 않는 장애를 겪었지만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여 80세가 넘는 나이까지 배우로
활동한 것입니다.
비록 지난 30여년 동안 그가 출연한 영화가 개봉되지 않았고, 그의 모습은 이미 한참 흘러간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추억의 배우이지만, 그가 연기한 O.K목장의 결투에서의 '닥 할러데이'의
이미지는 두고 두고 서부영화의 향수를 되새겨줄 명연기로 기억될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실제의 '닥 할러데이'보다 더 멋진 인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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