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적인 영웅 스토리를 만드는 데 전쟁만한 소재가 없다. 우리의 예상대로, 정명석, 허경영 같은 비범한(?) 인물들은 그들의 신적인 모습을 부각하기 위해 월남전 참전 ‘썰’을 이용했다.
정명석은 자신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는 적을 "사랑하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적군을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는 개구라를 시전하는데. 월남전에서 전사한 5,000여 명의 전우들을 생각하면 3대(다행히 정명석은 법률상 총각이라 자식이 없다;;)를 걸쳐 욕을 먹어도 부족할 지경이다.
난 허경영과 군 생활을 함께 했다. 그의 개구라를 누구보다 낱낱이 파헤칠 수 있는 증인이자, 군 생활 동료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나는 생사고락 중 그와 ‘생(生)’을 함께 한 전우로서 허경영을 비난하려는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자랑스럽고 그의 무용담을 즐기고 있다. 이렇게 각박한 세상에서 큰 웃음을 제공하는 능력은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의 추종자 중 본 기사에 악플을 달고자 하는 분이 계신다면, 제발 너그러이 넘어가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리며, 고소장은 앞장서서 그를 조롱하고 웃음거리로 만든 딴지일보에게 하도록 하자.
박정희의 비밀 보좌관
박 대통령에게 받은 지휘봉이라 주장하는 허경영 당시 대선 후보
출처 - <엠빅뉴스>
2009년 10월 어느 날,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담당 작가로부터 쪽지가 왔다. 허경영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후속편을 하나 더 방영할 예정이라고 했다. 자료 수집 차 인터넷을 뒤지다가 블로그에 기록한 허경영 관련 내용을 읽고 협조를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그것이 알고 싶다> 1회 방영분 대본을 받게 되었다.
인터뷰에서 본인이 고 박 대통령의 비밀 보좌관이었다는 부분을 강조하면서 월남 이야기가 나온 시점.
허경영: 내 군대 생활기록부 봤습니까? 군대 생활기록부 보세요. 청와대로 돼있어요.
PD: 월남전 가셨다고...?
허경영: 그러니까 청와대에서. 월남에는 심부름 갔지. 대통령이 보내서 간 거고 월남 휴전 때, 월남에 있는 금괴.. 금괴를 월남의 대통령이 박 대통령한테 아 이걸 좀 한국으로 옮겨 달라, 인천으로. 근데 그걸 LAT(?)를 가져가서 청룡부대가 가서 그 금괴를 싣고 오라는데 대통령이 거기 응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일단 내가 월남에 갔죠. 가서 전반적인 걸 봤는데, 사태가 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헬리콥터 타고 돌아오고 말았는데.
저나 나나 병역 의무 이행을 위해 징집된 일개 사병에 불과했는데,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연 인원 30만 이상 파월, 5,000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한 월남전에서 빽이 좋았던지 운이 좋았던지… 어떤 이유든 간에 편한 곳에서 근무하다 살아 돌아온 것을 감사하고 살아야지.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멋대로 지어내는 것은 파병 전우들을 모욕하는 행위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무슨 헛소리를 하든지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함께 보초를 섰던 전우들이, 그들의 고귀한 목숨을 바친 전쟁을 황당무계한 무용담으로 꾸며서 국민을 속이는 일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인터뷰를 수락했다. 하지만 인터뷰는 방송 기획 의도와 맞지 않게 진행되어 결국 방영되지 못했다.
전쟁터에서 구겨진 양복을 입다
1972년 월남전 참전 당시, 허경영은 백마부대 본부중대 법무부에서, 나는 같은 부대 군종부에서 근무했다. 젊었을 때 그의 모습은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는 웅지를 품은 모습은 아니었다. 명분이나 대의나 공익과는 거리가 먼, 그저 어떻게 조금이라도 편하게 군대 생활을 할까 요령 피우는 보통 젊은이들과 다르지 않았다(물론 나도 마찬가지였음;;).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자기에게 유리하면 타인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노골적으로 행동하는 타입이었다.
얼마 전 귀한 사진 한 장을 찾게 되었다. 부대 철수 당시 트럭에 실려 나트랑 공항에 도착했다. 살아 돌아간다는 안도감과 처음 타보는 비행기에 대한 걱정으로 살짝 긴장한 상태였다. 사이공에서 수원 비행장까지 오는 미군 용역 민간항공기에 탑승하기 전, 총 없는 단독군장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한가하게 개인 기념사진을 찍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과연 허경영!! 그는 그 순간에도 개인 사진을 남기고 있었다.
허경영 뒤쪽으로 보이는 비행기 탑승 대기 행렬에 나도 있었다.
이 사진 덕분에 허경영에 대한 또 다른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다. 한 번은 보급품 수송 작전의 경계병으로 트럭을 타고 이동 중이었다. 같은 트럭에 허경영도 타고 있었다. 잠시 안전한 곳에 정차해 모두 야자나무 아래서 땀을 식히고 있는데 갑자기 배낭을 뒤지기 시작했다. 입고 있던 군복을 벗고 배낭에서 꺼낸 구겨진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아무리 비교적 안전한 경계 임무라 하더라도 작전 수행 중인 놈이 배낭에 사복, 그것도 양복을 넣고 다니는 것은 기상천외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면 영창감이지만 평소에 워낙 기이한 행동을 많이 했던 탓에 인솔 하사관도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더욱 웃기는 일은 주머니에서 스카치테이프를 꺼내더니 귀를 올려붙이는 것이었다. 그의 귀가 당나귀 귀처럼 늘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진을 찍겠다고 철저하게 미리 계획을 세웠던 모양이다.
야자수를 배경으로 마치 관광객처럼 폼을 잡고, 가지고 온 사진기를 내밀어 다른 전우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당시 나는 전입한지 얼마 안 되는 신병이었고 그는 선임급에 속했기 때문에 “전쟁터에서 저래도 되나?” 하고 어리둥절 했는데 다른 병사들은 그의 특이한 행동에 이력이 났었는지 낄낄거리면서 웃기만 했다. 몇몇 고참들이 야유를 하자 경영이는 오히려 큰 소리를 쳤다.
"내가 너희들한테 무슨 피해를 주냐? 상관하지 마라."
이처럼 허경영은 부대에서 “호기로운 군인”이기보다 “그저 웃기는 놈”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월남전 이후, 두 번의 재회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80년대 후반. 을지로 인쇄 골목에서 우연히 그를 마주쳤다. 우리는 조용한 다방으로 들어가 차를 주문했다. 건강하게 잘 지냈는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개인 사업 중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난 빈민 운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통 빈민 운동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대단하다는 호의적인 반응과 왜 사서 고생을 하냐는 부정적인 반응. 허경영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듣더니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변했고 나중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반응은 내가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기에 그것이 어떤 의미였는지 한동안 곱씹어 보게 되었다.
그를 다시 만난 건 2018년 10월 토요일 오후, 종로 3가 피카디리 극장 앞이었다. 지인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좁은 골목으로 롤스로이스 한 대가 들어오더니 허경영이 차에서 내렸다. 차량 앞에 선 아주머니 몇 명이 피켓을 들고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허경영! 허경영!”
그는 몇 명 없는 그의 팬을 향해 손을 흔들었고 한참 동안 누군가가 사진을 찍자고 말하길 기다리는 듯이 포즈를 잡고 서 있었다.
알고 보니 매주 토요일 오후 3시 피카디리 극장 6층에서는 그의 강연이 열린다고 했다. 그 시간이면 의례적으로 벌어지는 해프닝이었다. 난 순간적으로 장난기가 발동해 “어이, 경영이!” 하고 불러볼까 했지만 이내 단순한 장난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대한 예의 때문이 아니라 내 신변을 염려해서 내린 순간적인 판단이었다.
허경영의 월남전 참전에 대한 인터뷰 영상(링크)이다. 그를 언급한 영상은 올린 지 몇 해가 지나도 지지자들의 비난 댓글이 꾸준히 달린다(아마, 당시 순간적인 나의 판단은 이런 사태를 예상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혀'경영이 가는 길
출처 - <그것이 알고싶다>
그를 보면 한때 서구 사회 일각에서 유행했던 사이언톨로지 교주 로날드 허버드(Ronald Hubbard)가 생각난다. 사람들 모두 ‘이성적’으로는 허버드의 이론이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하지만, 나약해진 인간의 의존 심리를 교묘하게 파고든다는 점에서 허경영과 같은 부류라고 할 수 있다.
허경영은 대중들에게 끊임없이 웃음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에 종교적 색채가 짙어도 반(反) 사회적인 인상은 주지 않는다. 대중은 그의 캐릭터를 소비할 뿐 그 배후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에서 시작해 종교, 문화 코드를 절묘하게 넘나든 그는, 자연스럽게 대중에게 노출되며 친숙도를 높였다.
2021년 12월 13일 자 한겨레신문에 실린 '세상 읽기(한승훈 종교학자·원광대 동북아시아 인문사회 연구소)'의 한 부분이다.
"분명 그는 개인적인 명성과 카리스마를 이용해 이례적으로 단기간에 성공을 이루고 있는 신종교 지도자로 보인다. 그러나 정치권력에 대한 노골적인 지향은 일반적인 한국 근현대 신종교의 전형적인 문법에서 어느 정도 일탈해 있다. 오히려 그에게서는 조선 후기 비밀결사 지도자들과의 유사성을 상당 부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종종 강력한 정치적 욕망을 노출했고, 그 때문에 역모 혐의로 지목받곤 했다."
"17세기 초, 정묘호란 이후의 혼란 속에서 유민, 화적, 전직 군인, 추노꾼, 도망 노비 등을 포섭해 무장집단을 이룬 이충경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강원도 깊은 산속 거점에 세 명의 장군신을 모신 신당을 차리고 제를 지내며 자신이 장차 정권을 장악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추종자들에게 영의정, 병조판서, 이조참판 등 나중에 차지할 관직을 미리 부여하는 방식으로 결속을 강화하였다."
"허경영 또한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대통령 대리’니, ‘암행어사’와 같은 직책을 약속하였다. 이충경 집단이 만든 일종의 정책집인 20개 항목의 <개국대전>은 허경영의 33가지 혁명공약만큼이나 구체적이고도 비현실적이었다. 18세기 말에는 지리산을 거점으로 추종자를 모으며 모반을 계획한 조직이 있었다. 그들의 종교적 지도자인 문양해는 자신이 여러 신적 존재와 접촉할 수 있으며, 그들을 통해 미래의 정치 상황을 환히 내다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중앙의 정치권력에서 밀려난 양반들을 포함한 지지자들은 재물을 갖다 바치고, 큰 건물을 짓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왕조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퍼트리거나 군사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허경영은 강연에서 <송하비결>, <격암유록> 등 예언서를 풀이하며 자신이 ‘만국의 성인’이라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문양해 등이 <정감록>이나 <진정비결> 같은 당시의 예언서를 이용한 방식과 대단히 닮았다."
"유사한 종교현상은 유사한 조건에서 출현한다. 정치 참여의 길이 막혀 있거나 제도정치에서 아무런 효능감을 느끼지 못할 때 종교 지도자에게 현실 변혁의 욕망을 투영하는 일은 어느 시대에나 일어날 수 있다. 허경영은 대의정치와 온라인 미디어,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전근대적 정치-종교운동을 재현하고 있다."
허경영에 대한 나의 견해와 가장 근접한 평가였다. 내가 경험한 허경영은 혀를 교묘하게 경영할 줄 아는 ‘혀’경영이었다. 증산 강일순, 수운 최재우의 길을 따르지 못할망정 박태선, 문선명의 길을 따라가니 한때 전우로서 안타까움만 있을 뿐이다. 얼마 남지 않은 여생, 이제라도 다른 길로 가면 좋으련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가던 길에서 방향을 틀면 굉장히 좁고 어려운 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에게 소개하고 싶은 구절이 있다.
그때에 누가 너희에게 '보아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아니, 여기 있다' 하더라도, 믿지 말아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들과 기적들을 행하여 보여서, 할 수만 있으면, 선택받은 사람들까지도 홀릴 것이다.
(마태 23:23-24)
아마 그는 성경을 공부하면서 위 구절을 놓쳤을 것이다. 제대로 보았으면 그렇게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