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동교회를 비롯 한신대, 한국기독교장로회 설립을 주도한 장공(長空) 김재준(1901∼1987) 목사의 20주기 추모예배가 25일 한신대 신학전문대학원에서 열렸다.
이날 참석자들은 찬송가 261장 ‘어둔 밤 마음에 잠겨’의 작시자이기도 한 김 목사를 회고했다. 이에 김 재준 목사 20주기를 맞아 그의 삶과 그에 대한 기독교계의 평가를 살펴보았다.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 문제로 목사 파면돼
김 목사는 1901년 함경북도 경흥에서 출생했다. ‘유가적 가풍’ 가운데 자란 그는 소시적부터 한학을 공부해 한문과 서예에 능통했다.
그는 1920년 지방관료(금융조합 서기) 생활을 하던 중 서울로 유학해 중동학교와 YMCA에서 이상재ㆍ윤치호ㆍ신흥우 등의 강연을 듣고 신문화에 눈을 떴다. 이듬해에 승동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우연히 참석했다가 기독교로 입문했다.
이후 자유주의적 신학의 분위기가 강한 일본 아오야마신학원 유학생활(1926∼28)을 거쳐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1년, 웨스턴신학교에서 3년간 구약신학을 전공해 1932년 신학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당대 첨단의 신학적 움직임을 접한 그는 귀국 후 한경직 목사 등과 함께 일제강점기하 한국 신학의 중심이던 평양신학교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935년 당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함에 따라 선교사들은 이를 반대해 평양신학교 문을 닫았다. 이에 김 목사는 1940년 김대현, 송창근 등과 함께 서울에 조선신학교를 세웠다. 또한 1945년에는 경동교회를 설립해 1949년까지 목회했다.
1947년 총회에서 그의 성경해석 곧,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을 문제삼은 신학생들이 진정서를 제출했고, 이후 격렬한 신학 논쟁을 거친 끝에 그는 1953년 총회에서 목사 파면을 당했다. 그러자 그는 새 총회를 열고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설립했다.
한편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건국 초기까지 이렇다 할 사회활동이 미진했던 김 목사는 1965년 굴욕적인 한ㆍ일 수교를 계기로 사회참여운동에 뛰어들어 1969년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장직을 맡는 등 정치 일선에 나서 활동했다.
특히 1970년대에는 함석헌ㆍ천관우ㆍ지학순ㆍ이병린 등과 함께 선봉에 나서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교회의 현실과 민족의 미래를 염려했던 김 목사는 1987년 1월27일 민주화 운동의 결실을 미처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민주화ㆍ신학발전 공로로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장공 김재준 목사는 그와 동시대를 살면서 그와 신학적으로 대척점에 위치했던 박형룡 목사와 마찬가지로 극찬에서부터 그 반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이들은 그를 ‘시대착오적인 근본주의신학에 맞서 싸운 신학자요, 선교사들을 추종하는 교권주의자들의 희생자이며,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투쟁한 정치개혁운동가, 대승적 기독교를 연 선구자, 그리고 깊이 있는 영성을 소유하고 청빈하게 살았던 목회자, 한국의 종교개혁자 등’이라고 극찬했다.
특히 김 목사는 ‘한국교회의 사회참여운동에 앞장서고, 민주화 운동에 교회가 적극 뛰어들도록 길을 펴 독재정권 치하에서 종로5가를 중심으로 한 한국교회가 민주화의 성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에 민주화와 신학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12월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그에게 추서되기도 했다.
“신학사상보다 자유주의적인 신학적 태도가 문제”
반면에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보수주의 신앙노선을 따른다고 자임하는 사람들에게서 이뤄진다.
특히 기록에 의하면 박형룡 목사와 그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김재준은 소위 ‘자유주의신학자’, ‘신(新)신학자’, ‘성경 파괴자’, ‘교회를 문란케 하는 자’, ‘예수의 기적, 부활, 승천을 믿지 않는 자’, 심지어 ‘마귀’라고 불릴 정도였다. 이와 같은 부정적인 평가는 최근에도 계속되고 있다.
고신대 최덕성 교수는 “김 목사는 자유주의자라기보다는 신정통주의자”라면서“문제가 되는 것은 신학사상 자체보다도 자유주의적인 신학적 태도”라고 주장했다.
자유를 구가하는 그의 신학적 태도가 한국교회에 극단적인 자유주의가 도입되는 발판 노릇을 했다는 설명이다.
이와 관련 최 교수는 “그가 기장이라는 교단을 독립해 만들어 나갔기 때문에 (자유주의가)기장 교단에만 영향을 미쳤을 뿐, 한국교회 전체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며 안도의 말을 했다.
서울신학대학교 박명수 교수는 “기록에 의하면 김 목사는 조선신학교 설립의 의의를 ‘서양선교사들의 지배와 보수 신학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말했다”며 “한국교회와 선교사의 관계를 대립구도로 몰고 간 것 역시 잘못”이라고 밝혔다.
이어 박 교수는“그가 한국 장로교 분열의 중심에 선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