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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생활 · 운동 자연치유 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이현수
◈ 주역참동계고이(周易參同契考異) 소고(小考)
박 지 현 ; 한국학대학원 철학전공 박사과정 수료
1. 들어가는 말
朱熹가 직접 道敎의 전적을 다룬 대표적인 것이 周易參同契考異와 陰符經考異이다. 도교에 대한 주희의 입장이 표면적으로는 비판하고 경계하는 것이지만 신유학에 있어서 인간과 자연을 통합하는 자연론적 발상은 도교로부터 제공된 것임에 틀림없다. 주희의 신유학이 이미 유교, 불교, 도교를 아우르는 통합적인 체계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것은 곧 도교에 대한 그의 폭넓은 이해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희가 도교의 전적을직접 다루고 그에 대한 저작을 낸 것은 어떤 면에서는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다
周易參同契는 後漢 말기 도교의 眞人으로 알려진 魏伯陽의 저작이다. 周易을 이용하여 煉丹修鍊의 과정을 설명하는 저작으로 후대에 煉丹術에 관해 으뜸으로 꼽는 丹經이다.
易學史나 道敎史에 있어서 그 의의가 적지 않으니 宋代 象數易學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며 도교 연단술의 이론 구축에도 기여했다.
주희가 주역참동계 를 직접 주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의미는 충분하다. 성리학의 집대성자인 그가 이단으로 배척해야 마땅할 도교전적에 대해 보인 관심은 표면적으로는 항상도교와의 연관성을 배제하려 노력하면서도 그 이면에 어쩔 수 없이 도교에 빚지고 있음을인정하는 일면이기도 하다.
劭雍의 先天學과 周敦頤의 太極圖說이 그 연원을 陳摶에게 두고있으며 진단학설의 연원은 다시 참동계 에 있다는 것을 승인하기 때문에 주희 스스로 참동계 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참동계 가 주역 을 해석하는 하나의 이론이라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면서 도교의 전적이기 이전에 이 점을 중시하고 있다.
참동계 가 비록 연단술을 전개하는 목적으로 서술된 것이지만 그 배경이 되고 있는 주역에 초점을 두고 위백양이 설파하는 坎離說과 月體納甲說은 이론적 성과를 인정하는 입장이다.
종교화된 도교의 神仙思想이나 長生不死 추구가 원리적으로 불가능함을 날카롭게 지적하여 배척하지만 그 이론적 배경이 되고 있는 주역 연구의 탁월함은 주희도 부정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주돈이와 소옹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으나 도교적 경향으로 흐르는 것은 끝가지 경계하였다. 주희는 자신의 성리학 이론의 범위 안에서 이러한 것들을 수용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주희는 음부경고이 와 마찬가지로 주역참동계고이 에서 자신의 이름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절묘하게 은폐하고 있는 것은 주희의 깊이 감추어진 속내를 조금은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주역참동계고이 를 저술한 시기는 그가 매우 사랑하던 제자 蔡元定이
귀양길을 떠나던 즈음이니, 주희는 이미 연로하였고 불우한 시절에 처해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새삼 밀쳐두었던 주역참동계 를 들추며 사제간에 토론하여 考異라고 이름 붙이기는했지만 주석서의 일종인 이러한 책을 저술했다.
주희가 고이 를 저술하였던 영향으로 조선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이단으로 배척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널리 읽히고 적지 않은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李滉은 참동계 가心身을 수련하는 방법으로 여기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祈福的인 도교는 물론 이단의 대상으로 배척되었으나 이론적 근거를 가지고 출발하는 수련도교는 실질적인 金丹道 수행과 함께참동계 의 연구 등 직접적 도교전적의 학문적 저술이 진행되면서 오히려 조선조에 크게 발달되어 뚜렷한 학맥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황을 비롯하여 그 이전의 金時習 등은 수련도교 특히 養生秘傳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수용하는 입장이었다. 조선의 수련도교는 도서의 다양한 주석연구와 함께 全生保眞의 이론전개와 사상적 관심은 의학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실제로 건강비법으로 다양하게 활용되기도 하였다.1)
본고에서는 韓國精神文化硏究院 藏書閣本 주역참동계고이 를 중심으로 주희의 주역참동계 에 대한 입장을 그가 표면적으로 의도한 것처럼 주역 이해의 한 방면으로 그 내용과영향을 중점적으로 고찰한다. 그러므로 도교에 대한 측면은 크게 부각시키지 않는다. 다만주역참동계 에 대한 배경은 반드시 고려되어야 하므로 충분히 살펴보고자 한다.
2. 주역참동계 의 출현과 그 이해
(1) 저자와 성립시기
이 책의 저술 시기와 저작자에 대해서는 대체로 東漢 시기의 魏伯陽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참동계 에 관한 기록은 舊唐書(945년경)에 처음 나타나며, 그보다 앞선 것으로는後蜀 彭曉의 周易參同契通眞義 서문과 葛洪의 神仙傳에 의거해서 대략적인 것을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주석본인 周易參同契通眞義에는 다음과 같이말했다.
神仙傳을 보면 眞人인 魏伯陽은 會稽 上虞사람이다. 세습 벼슬의 집안이었지만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채 조용히 몸을 감추고 眞氣를 수련하여 無作爲의 虛無에 뜻을 두어 心志를 길렀으며, 博學하고 文才가 뛰어나 緯候에 통달했다.…어느 스승에게 학문을 전수 받은 것인지는 알 수 없고 누군가로부터 古文 龍虎經을 얻어 신묘한 뜻을 터득하여 參同契 3권을지었다.2)
또 말하기를 세밀하게 미진한 것이 있어 다시 補塞遺脫 1편을 지었으니 煉丹經의
……은밀히 靑州 徐從事에게 보이니 서종사가 이름을 숨기고 주해하였고後漢 孝帝 桓帝때 이르러 그가 다시 고향사람이 淳于叔通에게 전수하여 마침내 세상에 유행하게 되었다.3)
1) 송항룡, 한국도교철학사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1987 PP.66-74
2) 주희는 참동계 와 용호경 의 선후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여기에서와 같
이 참동계가 용호경 의 비결을 터득하고 나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용호경 을 후대 사람의깊은 뜻을 이어받았다.
갈홍의 神仙傳「魏伯陽」傳에 의하면, 위백양은 吳나라 사람으로 원래 고관의 자식으로도술을 좋아하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채 은거하며 수련했으므로 당시에 그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뒤에 제자 세사람과 산에 들어가 神丹을 만들어 먹고는 죽었다가 살아나 신선이되었으며 參同契와 五相類 3권을 지었다고 한다. 이미 위백양을 신선으로 묘사하고 있으므로 실존했던 인물인지 여부는 정확히 확인하기는 어렵고 참동계 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가탁하였을 혐의가 짙다. 아무튼 통진의 서와 신선전 에 의하면 대체로 위백양은 동한후기 사람으로 연단가임을 알 수 있다.
위백양이 참동계 를 비전했다는 淳于叔通은 후한 桓帝 때 사람으로 徐州 縣令, 洛陽 郡守 등에 임용되었으나 후에 관직을 버리고 은둔하여 養性修眞하던 사람이다. 후세에 “萬古丹經”으로까지 존숭받게 되는 참동계 가 처음에는 순우숙통의 은둔과 함께 아주 오랜 동안연단을 믿고 숭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서로 유포되다가 宋代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많은사람들이 그 중요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수서 경적지 에는 참동계 에 대한 기록이 없고,구당서 경적지 「오행류」에 처음으로 주역참동계 2권, 주역오상류 1권이 위백양의 찬이라 하여 저술목록에 들어가게 된 것도 이러한 것이 연유한다. 본격적인 연구가 활발히 진행된 것도 역시 송대 이후이니 참동계 에 관한 주해서가 이 때에 많이 등장했다.
주역참동계 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주역 과 관계가 있는 저작이다. 특히 漢 代의 역학이 이루어낸 성과를 다양하게 응용하고 있다.
여러 학파에서 주역 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된 것은 兩漢 시대이다. 양한시대는 역학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기이니, 대체적으로 세 가지 경향의 역학 연구풍토가 조성되었다. 우선 후대에 象數派라 불리기도 하는 孟喜, 京房, 焦贛 등을 필두로 漢易의 주류를 형성한 대표적인 흐름이 있었다. 다른 조류는 후대 義理學派로 발전한 것으로 費直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이와는 달리 道家黃老學과 결합한 학파가 있으니 嚴遵과 揚雄을 중심으로 주역 의 내용을 인용하여 道德經을 해석하였다.
이렇게 도가황로지학으로 역을 풀이하는 경향은 후에 道敎로 변모하게 된다.
이렇게 도가황로학과 결합한 한 대의 도가들은 煉丹述과 長生不死를 추구하여 金丹道敎의선구가 되기도 하는데, 이 때 위백양이 등장한다. 그는 주역 의 원리를 이용하여 연단술을강론하는 주역참동계 를 저술하여 한역의 卦氣說과 陰陽五行說 등을 연단술을 해석하여주역 을 연단술의 이론적 기초로 삼았다. 그러므로 주역참동계 는 한역의 다양한 연구 성과들을 발전시켜 도교의 역 해석전통을 수립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4)
위작이라고 본다. “朱子曰 或門參同本是龍虎上經 果否 曰不然 盖是後人見伯陽傳有龍虎上經一句 遂僞作 大槩皆是檃括參同之語而爲之也”( 고이 상편 제10절 부록)
3) “按神仙傳 眞人魏伯陽者 會稽上虞人也 世襲簪琚 惟公不仕 修眞潛黙 養志虛無 博贍文詞 通諸緯候……不知師授 誰氏得古文龍虎經 盡獲妙旨 乃約周易 撰參同契三篇 又云 未盡纖微 復作補塞遺脫一篇 繼演丹經之玄奧……密示靑州徐從事 徐乃隱名而註之 至後漢孝桓帝時 公復傳授與同郡淳于叔通 遂行于世”
그러므로 위백양은 陰陽消息觀을 근본으로 天文, 律曆, 樂律등을 가져다 卦易의 象에 배당하는 한 대 象數易學을 그대로 흡수하고 또한 易과 老子의 도를 아우르고 있으며 경방역에서 자주 등장하는 납갑법을 계승한 月體納甲을 설명하고 있다. 이 월체납갑설은 吳나라 虞翻이 다시 받아들여 역을 해설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고, 또한 魏晉시대의 대표적인 王弼의역해설의 영향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에 위백양이 참동계 를 저술한 시기는 魏晉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5)
또한 주역참동계 는 중국 고대 민간신앙에서 문제삼던 精靈, 天神 및 그에 대한 주술적행사들과 관련하여 합리적 설명을 위해 陰陽五行說과 연관된 方術이 발전하여 심신의 평안과 불로장생의 현실성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기존의 다양한 민간신앙의 요소와 활발히 분화되었던 제반 이론을 두루 포괄하면서 도교의 이론적 기반이 수립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것은 갈홍의 포박자 와 주역참동계로 집약된다. 주역참동계 와 포박자 는 도교의 학문적 이론의 체계화인 동시에 종교적 이론의 체계화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특히 주역참동계 는 주역 의 八卦와 음양오행설을 결합하고 黃老學의 養生述을 포섭한 수련술 그리고 연단술을 비교적 정돈된 체계로 정리한 것이다.
연단술에 있어서 주역참동계 에서 치중하는 면은 사실 外丹인 丹藥제조과정에 있지만 內丹은 후에 太極圖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매우 중요하다. 太極圖가 송대에 이르러 象數易學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지고 성리학적인 해설로 새롭게 부각되기 전까지 이것은내단 수련의 과정을 묘사하기 위한 의도로 그려진 것이다.
(2) 참동계 와 주해서
참동계 는 고어투의 난해한 문체와 신비적 색채를 띠고 있어 진의 파악이 쉽지 않아 주해서가 여러 가지로 나오게 되었다. 현재 道藏 본에 수록된 것은 다음과 같다.
周易參同契 3권 原題 長生陰眞人 註 (122년)
周易參同契註 3권 原題 無名氏 註
周易參同契考異 宋 朱熹 註 黃瑞節 附錄 (1199년경)
周易參同契通眞義 3권 彭曉 註 (947년)
周易參同契註 2권 南宋 無名氏 撰
周易參同契發揮 9권 宋 兪琰 註 (1284년)
周易參同契釋義 1권 宋 兪琰 撰
周易參同契解 3권 宋 陳顯微 註
周易參同契註 3권 儲華谷 註
그 밖에도 몇 가지 알려진 주해서들이 더 있으니 대략 아래와 같다.
周易參同契分章註 宋 陳致虛 (1331년경)
周易參同契闡幽 淸 朱元育 (1639년)
周易參同契注解 3권 明 張位
古文參同契集解 3권 明 蔣一彪 (1614년)
參同直指 淸 劉一明 (1799년)
參同契章句 1권 일명 參同契注 淸 李光地
參同契注 2권淸 陳兆成
古文周易參同契注 8권 淸 袁仁林
周易參同契正義 3권 36장 淸 董德宁
이중 가장 시기가 이른 陰眞人의 주해서는 唐代에 가탁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실제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은 五代 後蜀 彭曉6)의 周易參同契通眞義이다. 팽효본에는補塞遺脫 1권이 부가되어 있고, 이후의 주해서는 대부분 팽효본을 따르고 있다. 주요한 것으로는 劉琰의 周易參同契發揮, 陳致虛의 周易參同契分章註 1권 등이다.
4) 심경호, 주역철학사 제 2 장 참조.
5) 박병수, 「위백양의 주역참동계 연구」, 한중철학 제 2집, (1996, 한중철학회) 참고
팽효본은 章을 나누어 주해했기 때문에 「分章註」라고도 하는데 전체를 모두 3권으로 나누어 上卷 40장, 中卷 38장 下卷 12 장 등 총 90장으로 구분하고 글의 첫머리에 네글자를 가지고 각장의 이름을 대신한다.
이것은 老子河上公註의 分章형식을 본뜬 것이다. 서문에 광정 19년(947)이라는 기록이 있으며 위백양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기록과 참동계 의 저술의도를 밝혀놓고 있다. 팽효본의 서문은 이후의 거의 대부분 주해서들이 여기에 의거하고 있는 한편 팽효가 주해를 낸 것으로 인해 참동계 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설이 일기 시작했다.
通志「藝文略」에 의하면 참동계 의 주해자는 팽효를 포함하여 다섯을 거론하고 있지만 팽효와 陰眞人의 것을 제외하고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주희의 주역참동계고이 는 “考異”라고 하여 교감문이라는 의미의 제목을 달고 있지만 사실은 주석서이다. 실제로 오류를 바로잡은 곳은 몇 곳에 지나지 않으며 문구를 따라 주해를한 것이다.
유염의 發揮는 세부적으로 의미를 해석하여 글자와 문구를 따라 일일이 밝혀놓았으며 일반적인 대의도 함께 논술하였다. 동시에 광범위한 자료를 인용하여 참동계 와서로 비교하여 밝히고 증거로 삼았다. 釋義는 문자와 판본을 정정한 것으로 주희에 비해자세하다. 팽효본이 비교적 도교의 내단수련 쪽에 치중해서 설명하는 경향이 짙다면 주희는시종일과 주역 과의 연관성에만 관심을 두어 해설하였다.
유염은 남송시기에 태어나 원나라 초기 까지 살았으며(1258-1314) 1284년에 발휘 를 찬했는데, 팽효본의 원문을 과감하게 뜯어 고치고 주희의 해설조차 삭제해버렸다. 또한 팽효의서문도 싣지 않았으며 스스로 여러 판본을 비교하고 교정하여 마침내 확정본을 만들었다고주장했다. 유염본의 특징은 북송이래의 內丹學說을 모조리 유가로 회통시켰으며 광범위하고철저한 고증을 시도한 것에 있다.
이것은 주희 이전에 대부분 주해서들이 도교 연단술에 치중한 것이었고, 주희는 주역 과 관련된 부분을 끌어들여 자신의 학설의 기반으로 재개편하 고 있다면 유염은 완전히 유가의 입장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6) 眞一子, 字는 秀川이며 五代 後蜀 永康人.
陳致虛는 1331년경에 찬했는데 스스로 上陽子라는 호를 쓰며 나이 40에 道를 배우고 神仙煉丹술을 강론했다고 한다. 그는 팽효본이 90장으로 나눈 것에 대해 전체를 35장을 다시 나누어 각각 그 장의 내용을 요약하여 각 장의 이름을 붙였다.
참동계 는 3편 또는 3권이 기본으로 明代 중기까지 이 3편 체제설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이러한 3편의 체제를 갖춘 참동계 를 전통적인 것으로 今文參同契라 한다면, 이와 달리 명나라 중기 揚愼이 石函에서 발견했다는 古文參同契가 있다.7) 楊愼은 嘉靖 丙午(1546)년에 서문을 지어 이것을 공개하였다. 참동계 의 본문에는 三四五言이 뒤섞여있는 것에 비해 고문참동계 는 본문의 四言은 위백양의 지은 經文으로 五言은 徐景休가 지은 傳文으로 확연히 구분하고 長短句와 三言은 補遺로 처리하여 정연한 체제를 갖추었다.고문참동계 가 원본의 체제를 개편한 뒤로 그 영향으로 자의적으로 개편하는 풍조가 일어나기도 했다.
참동계 가 아무리 주역 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하더라도 결국 본래 목적은 연단술을 펼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四庫全書에서는 이 책을 「子部 : 道家類」에 넣고 있으며, 「堤要」에서 “이 책은 대부분 納甲法을 빌어 坎離水火를 말하고, 龍虎, 납과 수은으로 불로장생의靈藥을 만드는 요점을 말한다.……후대에 연단술을 말하는 것은 모두 이 책이 鼻祖가 된다고 하였다.
갈홍은 이미 신선전 에서 이러한 점을 말했다.
“위백양이 參同契와 「五相類」 3권을 지은 것은 주역 을 해석한 듯 하지만, 사실은 爻象을빌려다가 煉丹述의 뜻을 논한 것이다. 그런데 유학자는 神仙의 일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陰陽으로 주석하니, 그 오묘한 뜻을 잃었다.”8)
갈홍의 이 말은 참동계 의 성격을 단적으로 지적한 것이라고 하겠다. 주역 에 대한 정연한 이론체계는 유학자들의 관심을 크게 끌었지만 위백양의 본래 의도는 卦氣說의 이론을빌어다 연단의 이치와 과정을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참동계 의 후반부는 64괘의순서에 의거하여 화력을 조절해서 煉丹을 만들어 내는 방법과 節氣變化에 순응한 화력 조절의 법칙을 대대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寒疫의 陰陽說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니 坎은 곧 水, 月, 陰에 해당하고 離는 火, 日, 陽에 해당하므로 坎離의 상호 교합은곧 음양의 배합이다. 결국 乾坤을 바탕으로 삼고 坎離를 작용의 요체로 삼는 음양사상을 전개한 것이다. 결국 참동계 는 겉으로는 주역 의 형식을 취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내단과 외단의 방법과 기술을 가지고 煉丹修仙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논술한 것이다.
(3) 조선의 참동계
7) 고문참동계 는 이미 위서로 간주하지만 학파의 형성과 도교사에서는 비중이 적지 않다.
8) “伯陽作參同契 五行相流 凡三卷 其說似解周易 其實假借爻象 以論作丹之意 而儒者不知神仙之事 反作陰陽注之 殊失其大旨也”
참동계 가 우리나라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이른 시기로, 신라말 당나라 유학생들에 의해 다양한 도교전적이 유입되면서 함께 들어왔다. 이미 널리 많은 사람들에게 애독되었으며 조선후기에는 참동계학파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참동계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된 것은 중국의 예와 크게 다르지 않으니, 송대 이후 즉 조선중기를 지나 다양한 주해서들이 나오게 된다. 실제로 조선조에있어 최초의 道史는 광해군 2년(1610)에 韓無畏가 지은 海東傳道錄이다.9)
여기서는 太上老君(노자)이 도교의 비조로서 道經 오천언을 짓고 위백양이 노자의 전통을 계승하여 참동계 삼편을 서술하였다는 道統論을 전개하고 있다. 이장의 주석에서 道德經과 參同契가 丹學의 鼻祖가 됨을 밝히고 있다. 이런 체계적 서술은 조선조 도교의정통성을 확립하고자 한 시도로써 禪佛敎의 法統과 성리학의 道統관념을 의식한 것으로 볼수 있다.10)
그런 중에 전통적인 참동계 를 따르는 일파가 생겨나기도 했으니 權克中을 위
시해서 南九萬, 徐命膺을 중심으로 참동계학파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참동계 를 주해하여權克中 參同契註解(1639), 南九萬 參同契吐註兩章朱子解全(1673, 1712), 徐命膺 參同攷(1786)가 대표적으로 모두 전통적인 금문참동계 에 대한 것이다. 이밖에도 고문참동계 를존숭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姜必孝(1764-1848) 古文參同契朱子解, 姜獻奎(1797-1860) 古文參同契兩朱解, 張之琬(1806-1858) 參同契章句, 仇兆鰲 古文周易參同契集註(1704), 金宗陽의 古本周易參同契集註補 등 이다.11)
이와 같이 조선시대에 도교가 이론적으로 체계를 갖추어나가며 학파를 형성하는데 대표적인 도교의 계보류의 도사로 여겨지는 해동전도록 에서 참동계 와 위백양을 태상노군을 계승하는 조선단학의 비조로 존숭하고 있다.
도교사상은 조선중기이후 임진왜란을 전후로 크게 세력을 떨치게 되는데 실제로 전쟁을 겪으면서 혼란해진 사회분위기와 불안한 정국으로인해 도교적 養生修練의 기풍이 크게 일어났던 것이다. 표면적으로 이끌어가던 유학의 道學적 기풍은 점차 공소화하고 현실적인 救難에 직접적인 기대가 옅어지면서 일반대중 뿐만 아니라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도교적 仙風에 관심이 적지 않았고, 그러한 것은 문학방면에서두드러지게 나타나 이 시기를 전후하여 도교적 수련양생을 완성한 도교적 異人,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작품이 많이 등장한다.
그러면서 양생수련의 내단술과 금단제조의 외단술을설명하는 참동계 에 대한 주해서들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저술된 것도 그와 같은 영향과관계가 적지 않다. 성리학이 주류이던 조선에서 이단으로 내몰리던 도교에 대한 활발한 연구성과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해서 본격적으로 시도되고 성리학의 도통관과 선불교의 법통을 겨냥한 도교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참동계 를 부각시키게 된 것이다.
9) 海東傳道錄은 韓無畏가 지어 李植이 세상에 유포시켰는데, 실제로 이식이 전한 것은 해동전도록 이 아니라 東國傳道秘記라고 한다. 이 두 가지는 대동소이하지만 원류관계를 따져 면 동국전도비기 가 앞선다. 이 문헌은 참동계 가 도맥상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전래수용과정을 고찰할 수 있다. 김륜수, 「동국전도비기 와 해동전도록 」, 한국 도교의 현대적 조명(1992, 아세아문화사)
10) 김륜수, 위의 글, 179 쪽.
11) 같은 글, 219-220쪽.
이러한 도교내의 참동계 이해와는 조금 다른 갈래가 있었으니 참동계 의 양생수련 특히 내단수련의 방법을 취하거나 직접 의술에 응용하기도 하였다. 의술에 응용한 대표적인것이 許浚의 東醫寶鑑이다. 동의보감 은 그 기본입장이 도교사상에 근본을 두어 체제를세운 것으로 도교의 煉丹法이나 導引法 등의 養生法을 활용하는 한편 이론적인 면으로 도가의 우주생성론, 人身形成論 등을 채용하고 있다. 동의보감 에 인용된 것은 莊子 列子등 초기 도가서들 뿐만 아니라 抱朴子, 參同契, 黃庭經 등의 도교경전을 비롯하여 매우 다양하며, 특히 내단사상에 관계된 전적들이 폭넓게 언급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도교는 집단적 종교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고 개인적인 수련을 통한효과가 秘傳되는 수련도교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러한 수련도교의 수행은 도교인들 사이에서만 행해지던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의 신체수련의 건강관리요법으로 널리 유행되었다.
金時習은 그러한 도교적 수련을 몸소 시행하고 심호흡에 의한 導引行氣術, 정신, 신체의 수련술 등을 직접 언급하였다. 이 때문에 김시습을 도교사에서는 조선단학의 대표자로 꼽기도한다.
김시습의 수련술은 후에 鄭Ꜿ(정렴 1506-1549)에 의해 일상생활에 실제적 수련방법으로 간결하게 정리된 龍虎秘訣을 편찬하게 하는데 그는 동의보감 을 허준과 함께 편찬한鄭碏(정작1553-1603))의 형이기도 하다. 수련도교의 수행술은 대부분 참동계 의 내단수련에서 나온 것이며 동의보감 은 본격적으로 기존에 폭넓게 행해지던 수련양생술을 실제 생활과 관련하여 예방의학적 차원에서 다루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수련술은 참동계 에서이미 정연하게 체계적으로 서술되어있었고 동의보감 은 실제로 그것을 응용하여 의술로 발전시킨 것이라 하겠다.
조선조에 있어 이미 개인적 신체수련을 위한 양생술은 일반인들에게까지 친근한 것이었다.
이러한 양생법은 참동계 의 內丹修練述의 발전 내지는 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황은이러한 도교수련술에 상당히 조예가 깊었으며 실제로 그 수련술을 실천하기도 했다. 이황이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신체적 건강을 이유로 이러한 수련술에 관심을 보인 것도사실이지만 그의 중심철학인 敬의 실천에 主靜의 방법이 채택되고 도가의 坐忘이나 불교의無念과는 다른 차원에서 調息을 시행하여 主靜을 保持하는 것은 참동계 에 나타나는 호흡법 등 내단 수련술에서 상당부분 원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황의 「언행록」에 의하면 그의 나이 35세무렵 여주 목사 이순과 참동계 의 수련법에 대한 토론을 벌인 일이 있다.
이것은 그가 이미 참동계 의 수련술을 알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비록 도가의 사상이 이단으로 배척받고 현실적인 기반을 잃기는 했지만 지식인들 사이에서 도가의 사상이 희구하는 유토피아적 지향이 전혀 상실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바램은 사회가 혼란되면 될수록 강하게 나타나지만 조선시대에는 전면적으로 부각되기는 힘들었고, 다만 지하로 면면히 흐르는 지하수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도가의 사상 내지 도교의 모든 사유들이 일시에 부정되거나 제거된 것은 결코 아닌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황은 실제적인 생활에서 潛心修養하는 방편으로 도교의 수련술인 참동계 의 내단수련방법에관심을 가졌던 것이고 스스로 병약한 몸이기에 양생수련에 힘을 기울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敬공부의 主靜法이 곧 그러한 수양에 도움이 된다고 여겼다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3. 주역참동계 에 대한 주희의 관심과 이해
(1) 참동계 의 성격
팽효의 통진의 서문에서 참동계 가 저술된 본래 의도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참동계라는 것은 연단수련과 천지의 변화과정이 같은 길을 간다고 했다. 그러므로 역의 象에 근거하여 그것을 논했다.
군신관계를 빌려 내단과 외단을 밝혔고, 離坎의 순서로 납과 수은의 제조과정을 가리켰다. 乾坤에 따라 정렬해 솥그릇을 헤아려 안치함은 부모라는 개념으로 밝히고, 始終의 이어짐을 부부관계에 합하여 보이고, 음과 양이 相交하여 얽힘을 남녀에 비유했다. 번식하여 생겨남을 드러내는 데 음양으로 풀이했다. 반복하여 도입하는데 초하루와 보름으로 예시하였다. 오르고 내림을 통하게 함에 卦爻로 배당했다. 변화를 드러내길 북두 자루에 따라 했다.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별을 취하여 아침 저녁을 나누고 刻漏(시계)에 밝혔다.”12)
이것은 참동계 에 대한 총괄적인 시사를 하는 것으로 주역 이 연단수련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대략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유염은 발휘 에서 “참동계”라는 말을 보다 자세하게 설명하는데 “參은 易에 참여하는 것이니 생각해 보아도 틀림이 없고, 同은 易과 같다는 것이니 합치하여 어긋나지 않고, 契는易과 맞는 것이니 무언중에 깊이 이해하여 저절로 깨달아진다.”13)고 했으니 역시 “참동계”가 주역 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나타내준다.
주희는 고이 의 첫머리에서 “참동계”의 의미를 밝히고 있는데, “參은 雜이고, 同은 通이고, 契는 合이니 곧 주역 과 이치가 통하고 바로 맞아 떨어진다는 뜻이다”14)라고 하여 곧바로 주역 과 이치가 통하고 합치하게 한다고 풀이했다. 이것은 팽효본을 조금 수정한 것으로 팽효는 “모든 丹經과 이치가 통하여 뜻이 합함을 말한다(謂與諸丹經理通而合義也)”라고 하였으나 주희는 단경대신 주역 을 언급했다. 이렇게 참동계 의 제목과 내용을 살펴보더라도 주역 으로 연단을 해석하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유염은 또한 발휘 서문에서 “參은 三이고 同은 相이며 契는 類이다”라는 풀이를 하고있는데 여기서 三이란 구체적으로 참동계 에서 언급하는 “大易” “黃老” “煉丹”15)의 세가지를 말한다. 이 세가지는 참동계 의 대체를 이루는 주요한 이론으로, 대역은 곧 한 대 상수
12) “參同契者謂修丹與天地造化同途 故托易象而論之 莫不假借君臣以彰內外 敍其坎離直指汞鉛 列以乾坤奠量鼎器明之父母 係以始終合以夫婦 拘其交姤譬諸南女 顯以滋生析以陰陽 導之反覆示之晦朔 通以降騰配以卦爻 形以變化隨之斗柄 取其周星分以晨昏脗諸刻漏”
13) “參者謂與易參 考之而不謬 同者謂與易同 合之而不違 契者謂與易契 黙而識之而自會也”
14) “參雜也 同通也 契合也 謂與周易理通而義合也”
15) “大易情性 各如其度 黃老用九 較而可御 爐火之事 眞有所據 三道由一 俱出徑路”
역학을 지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니 맹희와 경방의 괘기설 및 납갑설 그리고 십이소식설,육허설 등의 역학이론을 수렴한 것을 말한다. 참동계 에서는 비록 황제나 노자를 신격화하는 것은 나타나지 않지만, 당시 크게 유행하던 황로사상을 기본적인 바탕으로 받아들이고있다.
참동계 에 나타난 우주변화의 생성순차에 따라 신선이 되기 위한 연단수련의 모형을역으로 도출해내는 방식은 바로 황로도가의 영향으로 구성된 것이다. 이것은 우주생성론의외적인 변화법칙이 곧 인간의 신체내의 정기의 운용변화법칙과 같다는 천인합일적 관점을단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참동계 에서 언급하고 있는 연단술은 외단의 연금술에 관한 내용을 기술하는 것과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양생술에 관한 내단수련의 기술이 함께 등장한다. 대체로 내단을 위주로외단을 논급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지만 외단서로 취급하는 경향도 있다.16)
근래의 중국학자인 黃釗(황소)나 李遠國등도 역시 참동계 의 연단술이 내단을 위주로 내외단을 함께 말한 것으로 본다. 黃釗는 그의 저서 道敎通論-兼論道家學說- (1991, 齊魯書社)에서 참동계 의 성격을 주역 상수학을 방법으로 황로우주관을 밝히는 내외단 兼修의 논저로 보았다.17)아무튼 참동계 는 주역 의 음양팔괘사상을 기초로 삼아 황제와 노자의 청정무위의 종지를 융합하고 외단의 연단술을 결합한 체계로 내단외단 수련을 위한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2) 주희의 주역참동계 고이 편찬
주희는 그의 절친한 벗이자 學友인 蔡元定(1135-1198)18)의 영향으로 주역참동계 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참동계 의 주석서인 고이 를 집필하게 된 것도 채원정의 도움을 받았다. 채원정은 상수학과 도교적 방술에도 뛰어났으며, 이미 易學啓蒙도 그와의 합작이다.
慶元 丁巳년(1197)에 채원정이 道州로 귀양을 가는 길에 주희는 그와 작별을 하기 위해 寒川亭舍에 머물렀다. 주희도 이미 연로하였고, 제자가 아니라 나의 사우라며 아끼던 채원정이 돌아올 기약없는 귀양길을 떠나보내며 강개한 심정으로 며칠 밤을 새우며 참동계를 읽고 토론하는데 몰두했던 것이다.
이 때는 귀양가는 채원정은 말할 것도 없고 주희 역시 말년의 불우한 처지였다. 채원정은 이듬해 죽고 주희는 그보다 2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귀양가는 길에 마주앉는 사제의 정경은 자못 비감이 든다. 황서절 부록에서는 어려운 때를당해 스승과 제자가 세상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그 심정에 깊은 공감을 나타낸다.19)
16) 王明의 周易參同契考證(1948)이나 吉田光那의 鍊金術(1963)에서는 전형적인 외단서로 보
고 있다.
17) 박병수, 「위백양의 주역참동계 연구」, 한중철학 제 2 집(1996, 한중철학회) 131-133쪽.
18) 자는 季通, 福建 建陽사람. 全祖望은 「西山蔡氏學案敍錄」에서 “서산 채문절공은 朱門의 영수이지만 그의 律呂象數學은 대개 집안의 전함을 얻었다”고 했고, 주희도 그의 가학이 훌륭하다고 평했다. 저술로는 大衍詳說, 律呂新書, 「燕樂原辯」, 黃極經世指要, 太玄潛虛指要, 「洪範解」, 「八陣圖說」 등이 있다. 그는 비록 주희의 문인이기는 하지만 그의 역학은 상수에 특장이 있어서 주로 漢宋 상수학의 전통을 계승하여 「하도」,「낙서」 등의 문제에 특히 관심이 많았고 소옹이 역학을 더욱 발휘시킨 면이 있다.
19) “慶元丁巳季通編置道州 將別留宿寒泉 相與訂正參同契 終夕不寐 嗚呼 是師是弟處憂患不亂如此
주희는 짐짓 “空同道士 鄒訢”이라고 하여 자신의 성명을 감추고 있다. “鄒訢”이라고 할 때鄒는 본래 춘추시대의 邾 나라를 말하는 것인데 이 글자의 오른쪽 변을 떼어내면 朱가 된다.
訢은 예기 「악기」에 “天地訢合”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정현은 주에서 訢은 “熹”자로 써야 한다고 했고, 「집운」에서도 訢자와 熹자는 발음이 같다고 했으니, 추흔은 바로 주희를 말하는 것이다. 사고전서제요 에서는 心丹結을 연구하는 것이 유학자 본연의 임무가 아니기때문에 이름을 감추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공동도사”라는 말은 장자 「재유」편에 등장하는 廣成子가 살았다고 하는 곳이다.광성자는 무위자연의 이상적 인간으로 비유되는 인물이니 실존하는 사람은 아니다.
「재유」편에서 황제가 즉위하여 공동산을 찾아 광성자에게 도를 물었는데 그 내용이 몸을 어떻게 다스려야 장수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마음을 고요히 지니고 외부와의 접촉을 모두 단절한 채 도의 본원에 이르러 도와 합일하는 경지에 이르러 영원히 장생불사한다는 광성자의말은 내단수련의 궁극의 경지에 이른 것으로 이미 신선임을 자처한다. 주희가 이러한 광성자의 이름에 가탁한 것은 성리학자로 도교전적에 이름을 차마 드러내지 못함인지 아니면 짐짓 신선을 희구함인지 잘라 말하기 어렵다.
본고에서 다루고 있는 한국정신문화 연구원본 주역참동계고이 는 표제를 “參同契”라고만하였으며 첫장의 제목은 “周易參同契”로 되어있다. 앞 부분에 “晦庵先生 朱元晦 解” “盧陵黃瑞節 附錄”이라고 명기하였다.
이 책은 주역참동계 의 순서를 따라 상편, 중편, 하편으로나누어져 있는데 본문 앞에 부록을 먼저 붙이고 있다. 이 부록은 서문에 해당하는데, 팽효의주역참동계통진의 서를 인용하여 위백양이 참동계 를 저술한 경위와 의도 및 편제를 밝히고 있다.
또한 참동계 에 대한 주희의 입장 등을 알 수 있다. 참동계 의 본문의 순서에따라 주해를 달고 하권 말미에 「五相類」와 「鼎器歌」를 실었다. 하권 뒤에는 「讚序」를 붙였고 이에 대한 부록과 해설이 있는데 주희가 고이 를 저술한 경위를 밝혀놓았다. 부록은 元代의 학자인 黃瑞節이 대개 주희의 말을 원용한 것으로 1341년 간행한 朱子成書에 수록된후 부록을 합간한 형태로 유포되었다.
권말에 南九萬20)의 「朱子解周易參同契跋」(1673)과 「參同契吐註」가 붙어 있다. 이것으로장서각본의 간행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숙종 38년(1712) 崔錫鼎21)이 주역참동계토주 를간행했는데 이 토주본은 그의 스승인 남구만의 유작을 완성한 것이다. 남구만은 1673년 유염의 주역참동발휘 속에서 주희의 “고이”와 황서절의 “부록”을 가려 뽑아 朱子解周易參同契를 간행한 뒤 그것이 소략하므로 직접 원문에 현토를 달고 다시 주해하였다고 한다.
“乾坤者易之門戶”부터 “處中以制外”까지를 제1장, “數在律曆紀”부터 “五行得其理”까지를 제2장이라 하여 토주를 하였으나 1711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기 때문에 더 이상 진행시키지못했다. 그 뒤 그의 제자인 최석정이 주자해주역참동계 에다 吐註兩章을 덧붙여 다시 간행했는데 이것이 널리 유포되었다.22) 남구만이 처음에 간행한 주자해주역참동계 에는 아직
而獨于參同拳拳焉 脫屣世外之意決矣”
20) 1629-1771 호는 藥泉으로 朴世堂의 처남이다.
21) 1646-1715, 초명은 錫萬, 자는 汝和, 호는 明谷, 存窩으로 崔鳴吉의 손자이다.
22) 金侖壽, 「東國傳道秘記와 海東傳道錄」, 한국도교의 현대적 조명 한국도교사사연구회
토주본이 붙어있을 수 없으므로 이 장서각본은 1712년 이후에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주희는 스스로 여러 번 교정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교정한 것은 몇 글자에 지나지 않는다.23) 예를 들어 “熺자는 본래 喜자로 되어 있고 어느 본에는 僖로 되어있는데 모두 이치에맞지 않는다.
설문에는 희는 炎이라고 하였는데 후한시기에는 이 자를 많이 썼다.(熺字本作喜 一本作僖 今按皆無理 說文熺炎也 後漢多用此字)” “修는 아마도 循자일 것이다. 당나라 사람들이 이 두글자를 흔히 바꿔 쓴다.(脩疑作循字 唐人兩事多互)” “鉛은 아마 飴자일 것이니비슷하지만 틀렸다.(鉛疑是飴字 以似而誤也)” “離氣內營衛는 일찍이 선배들이 內를 納으로읽었으니 그 말이 옳다.(離氣內營衛 嘗見前輩讀內爲納 其說是也)” “虎가 어느 곳에서는 礜로어느 곳에서는 礬으로 되어 있으니 세자 모두 가명이다.(虎一作礜 一作礬 按三字皆假名)” 등이 고작이다.
대부분은 각 절마다 아래에 해설을 붙였으니 본문을 주해한 것이다. 그러나 그 주해도 대체로 소략하고 ‘釋義’의 형식에 가까운 글자 뜻풀이가 많다. 여러 곳에서 “未詳”이라는 말을하고 있는데, 고이 전체를 통해 볼 때 주희는 이렇게 해설을 유보한 부분이 적지 않다. 대개 연단술에 관한 부분에 대해서 이러한 태도를 취하여 직접적인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24)
주희는 솔직하게 “그간에 상당히 의심스러운 것이 있었으나 모두 다 들춰내지는 못했다”25)고 유감을 토로했다. 하지만 양생방법 등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태도를 보이고, 가장 주력한부분은 역시 역 의 이론과 관계된 것들이다.
(3) 참동계 에 대한 주희의 입장
주희는 고이 서문에서 “이 책은 역을 밝히기 위해 찬술된 것은 아니지만 역은 광대하여포괄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 책이 한 체계를 형성했으므로 미루어 헤아리면 역을 밝히는데 해로울 것이 없다”26)고 하였다.
참동계 를 찬술한 본래 의도가 주희의 생각과 부합하는것은 아니지만, 주희는 참동계 를 주역을 이해하는 이론적인 체계의 하나로 일단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주희가 “參同契”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에서도 드러났듯이 “참은 잡이고, 동은 통이고, 계는 합이다. 곧 주역 과 이치가 통하고 바로맞아 떨어진다는 뜻이다”27)라고 하여 주역 의 원리를 밝히는 방편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참동계 에서는 본래 역 과 黃老 그리고 연단술을 함께 일컫고 있고, 주희도 그 점을인정하기는 했지만 역시 주희의 관심은 연단수련에 있다기 보다는 어디까지나 그 배경이 되고 있는 역 의 원리를 설명하는 데 있다.
편, (아세아출판사, 1992) 참조
23) 사고전서본 주역참동계 1권 「제요」에서도 주자가 교정한 것은 예닐곱 곳에 지나지 않으며그 나머지는 각 절마다 아래에 해설을 했으므로 실제는 전주체이며 문자를 모두 정정한 것이아닌데도 고이라는 이름을 붙인 뜻을 알 수 없다고 했다.
24) “此言內丹 而言入口 未詳其旨” 또는 “此言爲外丹者 藥非同類不能成寶”
25) “其間尙多疑晦 以未能盡祛”
26) “此雖非爲明易而說 然易中無所不有 苟其言自成一家 可推而通則亦無解于易”
27) 參雜也 同通也 契合也 謂與周易理通而義合也
참동계 에서 역학과 관련된 부분으로 가장 주요한 것은 易爲坎離說과 月體納甲說인데,주희는 역시 여기에 상당히 주목한다. 참동계 는 坎괘와 離괘를 64괘의 변역의 근거이자근원으로 보고 있는데 乾坤坎離 4괘를 기본 괘로 대단히 중시하면서 특히 坎離 2괘가 변역의 근원이라고 한다.
坎離는 마치 日月이 천지(乾坤)사이에서 운행하듯이 어떤 한 계절을 주관하지는 않으나 사시의 변역의 근원으로 건곤 2괘에 작용한다. 坎離는 日月의 象이고, 일월의 운행이 없으면 절기의 변화도 있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역이 坎離를 말한다고 하는 설명은 역위 에서 일월을 역으로 보는 설과 관계가 있다. 이것은 한역 괘기설에서 파생되었거나 진일보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주희는 참동계 의 易爲坎離說 월체납갑설과 같은 이론이 본래 역 해석을 위해서 제기되지 않았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지만,28) 水火를 중시하는 음양이론이 오행과 밀접한 관련을지니며 팔괘의 방위배치를 특징으로 하는 월체납갑설에 주목하는 것은 주돈이의 태극도설과소옹의 선천학과의 연관성 속에서 읽어야 한다.
참동계 는 陳摶 학설의 원류이며 소옹의선천도는 바로 진단의 학설을 전수받은 것이다. 고이 에서는 이 점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 “위백양의 참동계 는 아마도 희이(진단)학설의 원류가 어느 정도 된다.”29) 또한 “소옹이 선천도를 발명했는데 도는 희이로부터 전수받은 것이다.
희이도 전수받은 바가 있으니대개 방사의 기술을 수련에 사용했는데 참동계에서 말한 바가 이것이다.”30) 주희가 선천도와 도교와의 연관성에 대해 애써 부정하는 태도를 취했던 것과는 달리 여기서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陳摶31)은 오대 宋初의 유명한 도교학자이자 신선가로 그의 학문은 송대의 내단도 및 상수역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진단은 역해석에서 도식을 이용하는 방식이 특징적인데, 이러한 역 해석의 형식은 도식을 통해 연단과정을 설명하는 도가의 전통을 계승한 면이 있다.32) 진단은 圖書로 상수를 논하는 송대 상수학의 창시자가 되며그가 제작한 「無極圖」, 「先天圖」, 「太極圖」 등이 바로 周敦頤(1017-1073)의 「太極圖說」과 邵雍(1011-1077)의 「선천도」를 낳게 한 것이다.
「태극도」는 곧 「先天太極圖」 또는 「天地自然之圖」라고도 하는데 선천과 천지자연은 도교연단가가 연내단을 할 때 생겨나 갖게 되는 기질을 가리키는데 사용하던 용어이다. 진단의「천지자연지도」는 음양이기의 소장을 말하고 있으며 이 도식은 바로 참동계 에 연원을 두고 있다.
참동계 의 건곤을 천지의 상으로 삼고 감리를 일월의 상으로 삼아 건곤을 상하에두고 감리를 좌우에 두어 단약 제련의 법을 천지일월에 상에서 취한다고 하는 4정괘설에 뿌리를 둔다. 「천지자연지도」에서 음양이 서로 둥글게 싸고 있는 형상은 또한 참동계 의 월체납갑설에 근원을 두고 있으니 「천지자연지도」는 음양이기의 소장을 강론하며 음양동정을
28) “參同契本不爲明易 姑借此納甲之法 以寓其行持進退之候”
29) “伯陽參同契恐希夷之學有些自其源流”
30) “邵子發明先天圖 圖傳自希夷 希夷又自有所傳 蓋方士技術 用以修煉 參同契所言是也
31) 자는 圖南, 自號는 扶搖子. 宋 太宗이 希夷先生이라는 호를 내림. 指玄篇 81장을 저술하여導引과 還丹을 말했다고 전해짐. 鄭樵의 通志「藝文略」에 진단의 저서로 赤松子八誡錄1권,指玄篇 1권, 九室指玄篇 1권, 人倫風鑑 1권을 수록.
32) 팽효는 통진의 에 「明鏡圖」 「水火匡廓圖」 「三五至精圖」 등의 도식을 제작했으며, 이것은주역 의 원리를 해석하면서 연단과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된 것이다. 진단은 오대 이래의이러한 도식 이용법을 계승하여 卦爻象을 강론하였다.
말하니 이것은 후대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 참동계 는 이러한 것을 상권 첫머리에서 말하고 있는데, 건과 곤은 음양으로 모든 현상의 근본을 대표하여 팔괘의 문호가 되며 건곤의결합으로 제일 먼저 생성된 리괘와 감괘는 각각 火와 日, 水와 月을 대표한다. 이렇게 건곤은 음양의 체가 되고 감리는 음양의 용이 되어 온갖 변화가 모두 여기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무극도」는 곧 방사의 연단술을 논한 것으로 내단의 제련과정을 설명하는 도식이다. 이도식의 형식도 역시 참동계 의 연단술을 발전시킨 것이니 진단은 주역 의 범주로 연단술을 설명하여 도교역학과 성리학 모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주돈이의 「태극도설」은 그 성립배경에 대해 몇 가지 이설이 있지만 도교의 「선천태극도」와 진단의 「무극도」에 그 연원이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주희는 태극도설을 주돈이 자신의 독자적 작품이며, 도교와의 관련은 배제하고 시종일관 도교적 색채를 지우는데 주력하였다.
「태극도설」의 무극태극설은 가장 오랜 기간 쟁점이 되었고 중요한 문제였다.
아무튼 주희는 고이 에서 선천도 태극도설 등 성리학의 주요한 내용들이 도교와 연관성이 실제로 있음을 승인하고 있다. 주희가 참동계 를 직접 주해하게 된 까닭도 이 점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여준다.
고이 가 그 분량이 많거나 내용이 풍부한 것은 아니다. 참동계자체에 비추어 볼 때도 주희의 작업은 많은 공을 들인 것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어류 나 문집 에서와 다른 태도로 도교를 바라보는 주희의 시각이 드러나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주희가 자신의 이름을 바꾸었던 이유도 이런 점에서 추측해 볼 수 있다.
본문을 따라 살펴보면, 우선 참동계 상편의 총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 첫머리에
“건과 곤은 역의 문호이며 모든 괘의 부모가 된다. 감과 리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이며 수레바퀴통을 움직이는데 굴대가 잘 들어맞는 것과 같다. 음양의 네괘가 배합하여 풀무가 된다.”33)
건과 곤은 하늘과 땅으로 음양의 대표이니 모든 현상의 근본을 대표하는 것으로 팔괘의문호가 된다. 건괘가 곤괘 중에 효를 얻어 리괘가 되어 양에 속하며 火와 日을 대표하고, 곤괘가 건괘 중에 효를 얻어 감괘가 되어 음에 속하여 水와 月을 대표한다. 건은 天으로 위에있고 곤은 地로 아래에 있으며 리와 감은 일과 월로 천지사이에서 오르고 내리니 건과 곤이리와 감의 광곽이 되어 그 밖을 둘러 싸고 있다. 건곤은 또 수레의 바퀴축을 상징하고 리감은 수레의 바퀴통을 상징하여 수레의 운행의 바퀴통과 바퀴축이 제대로 맞아야만 한다. 이렇게 건과 곤은 음양의 본체가 되고 감리는 음양의 작용이 되어 실질적인 온갖 변화가 감리의 이용에 의해 펼쳐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건곤감리 사괘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지극히 일반적인 것이다. 앞으로 연단술의 논리를 전개하기 위한 서두를 떼어놓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주희는 미리 이 점을 지적하고있다.
“역이란 것이 모든 음양변화를 가리키는 말이고 사람에 있어서는 이른바 金丹大藥이라면 그렇다면 건곤은 그 약을 다리는 솥이 되는가 ?”34) 주희는 일관되게 주역 에 대한 논리적 이론부분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타나내며 자세
33) “乾坤者 易之門戶 衆卦之父母 坎離匡廓 運轂正軸 牝牡四卦 以爲槖蘥”
34) “凡言易者皆指陰陽變化 而言在人則所謂金丹大藥者 然則乾坤其爐鼎歟”
한 설명을 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은 가볍게 건너 뛰며 해설을 유보한 것이 대부분이다. 참동계 에서 상편의 건곤감리사괘에 대한 이 부분 이외에 감리진손간태의 6괘로 달의 차고 기움에 따라 배당하는 월체납갑설과 12벽괘를 6괘에 분납하여 설명하는 것 두가지가 역을 가지고 설명하는 이론이라고 본 것이다. 참동계 의 대요는 감리 두 글자에 집약되므로 그 핵심만 터득하면 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주희가 참동계 를 보는 시각이기도 한 것이다.
주희가 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주해를 하고 있는 월체납갑설은 상편에서 가장 중요한부분으로 보고 있다. 납갑설은 京房 역학35)과 虞翻 역학36)에 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위백양은 십간과 오행방위에 안배한 기초 위에 해와 달이 차고 기우는 상을 연역해 내어 팔괘로 표현하는 월체납갑설을 제시하고 있다. 한 달을 여섯절로 만들어 6괘에 분속시켜 진 1,태 2, 건 3, 손 4, 간 5, 곤 6으로 하고 매 5일이 1節이 되므로 초하루 아침인 진에서 용사가시작되며 일월음양의 교감하는 처음이 되니 여기에 수련의 공을 가한다는 말임을 설명한다.
연단에 사용하는 화력을 달이 차고 기우는 변화와 달이 뜨는 방위에 맞추어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니 坎․離 2괘로 日․月을 대표하고 나머지 6괘로 달의 차고 이지러짐을 대표하여 이 팔괘를 간지에 각각 배당하고 6괘의 납갑의 순서를 서술한다.
주희는 “위백양의 납갑법은 본래 역 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납갑법을 빌려 행지진퇴의 처세를 비유하고자 했다”고 하여 참동계 의 월체납갑설의 본래 의도를 정확히 지적하였다. 월체납갑설을 또한 일년의 변화를 十二辟卦로 설명하고, 한달 30일의 변화를 60괘의괘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십이벽괘란 孟喜가 제출한 12월괘설인데 1년 12월에 復괘 壬괘 泰괘 大壯괘 夬괘 乾괘 姤괘 遯괘 否괘 觀괘 剝괘 坤괘의 순서대로 12괘를 뽑아서 대표하게한 것으로 괘상 가운데 剛柔 2효의 변화가 음양이기의 소장과정을 체현할 수 있도록 배정한것이다.37) 이렇게 월체납갑과 消息, 12벽괘 등에 대해서는 아주 친절한 해설을 하고 있다.
35) 납갑설은 경방이 처음으로 제창하였는데, 납갑이란 乾․坤․震․巽․坎․離․艮․兌의 팔궁괘를 각각 十干에 배당하고 팔궁괘의 각 효를 十二支에 배당하는 것이다. 甲이 十干의 첫머리이므로 納甲이라고 하고 十二支에 배당하므로 納支라고 하며 통칭하여 納甲이라 한다. 乾坤 2괘는 內外卦로 나뉘므로 건괘의 내괘는 甲에 배당(納甲)하고 외괘는 壬에 배당(納壬)하며, 곤괘의 내괘는 納乙 하고 외괘는 納癸한다. 나머지 震․巽․坎․離․艮․兌 6괘는 庚․辛․戊․己․丙․丁에 나뉘어 납입하는 것이 경방의 납갑설이다. (심경호, 주역철학사 193-194 쪽)
36) 우번의 납갑설은 경방의 납갑설을 더욱 발전시켜 그믐달과 초승달, 달의 차고 기움을 가지고팔괘를 상징하고 다시 天干을 도입하여 팔괘의 消息을 드러낸 것이다. 즉 十天干을 팔괘에 납입하는데 역시 甲이 십천간을 대표하기 때문에 納甲이라고 한 것이다. 팔괘의 부호는 震은 초3일에 서방에서 떠오르는 초승달의 상을 나타내어 納庚이고, 兌는 초팔일의 상현달을 나태내어 納丁이다. 乾은 보름달을 나타내어 동방에 거하니 納甲이다. 巽은 16일의 이지러지기 시작하는 달이니 納辛이고 艮은 23일의 하현달을 나타내어 남방에 거하니 納丙이다. 坤은 30일 그믐달을 나타내어 동방에 거하니 納乙이다. 이렇게 팔괘의 음양이 消息함을 명시함으로써 음양이 때를 잃지 않기를 달이 하늘에 행함과 같이 하고자 한 것이 우번의 납갑설이다. 앞의 책,231-233쪽
37) 復卦 11월중 겨울 1양이 생김 姤卦 5월중 여름 1음이 생김
臨卦 12월중 겨울 2양이 생김 遯卦 6월중 여름 2음이 생김
泰卦 정월중 봄 3양이 생김 否卦 7월중 가을 3음이 생김
大壯卦 2월중 봄 4양이 생김 觀卦 8월중 가을 4음이 생김
夬卦 3월중 봄 5양이 생김 剝卦 9월중 가을 5음이 생김
그런데 연단과 직접 관계되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태도가 달라진다.
“감리 수화 용호 연홍 등등은 단지 서로 그 이름을 바꾸었을 뿐이니 사실은 精과 氣 두가지
일뿐이다.
精은 水이고, 坎이고 龍이고, 수은이다. 氣는 火이고, 離이고 虎이고, 납이다. 그 방법을 신묘하게 운용하니 정과 기를 결합하여 단약을 만드는 것이다. 양기는 아래에 있어 처음에물이 되고 불로 끓이면 응고되어 단약이 된다고 하니 그 말이 매우 괴상하다”38)
참동계 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개념들이 실제로는 精 氣 두가지로 해명 될 수 있는 것이며 단약을 만들기 위해 구사되는 방법에 대해서는 그 불합리성을 단호히 지적한다.
상편과 중편은 서로 표리의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고, 앞에서 주역 을 들어 내세운 이론들이 결국은 모두 연단술로 귀결됨을 보고 견강부회한 것으로 깊이 연구할 바가 아니라는입장을 취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주희는 선천도와 태극도설 등에 도교 특히 참동계 와 모종의 연관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참동계 에서 사용된 도식들을 전혀 싣고 있지 않으며 한마디의 언급도 없다. 그 이유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없어 주희의 직접적인 의도를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주희가 참동계 가 소옹, 주돈이, 진단의 학설에 어느 정도의연원이 되고 있는 것은 인정하고 있지만 본래 입장은 도교와 직접인 연관성을 배제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구태여 참동계 와 관계된 도설을 여기에 싣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주희는 참동계 가 주역 을 해석하는 한 방편으로 생각하고 특히 감리설이나 월체납갑설에 관심을 보인 것 뿐이지 도교의 연단수련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또한 「태극도설」을 정리하면서 이미 충분한 연구를 했으니 도식을 다시 여기서 주해할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다.
4. 맺음말
주희는 주역참동계 를 통해서 오로지 주역 만을 읽은 것이다. 주역참동계 는 분명 황로도가와 역과 연단술을 함께 말하고 있는데 주희는 여기서 주역 만을 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물론 주역 을 읽는 길이 다양하지만 주희는 당연히 이미 완숙한 자신의 성리학적 시각으로만 읽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동계 에서 본래 추구하였던 연단술은 논외로삼았다.
도교의 연단술은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과학 기술적 측면에 대한 모색이었고, 주역참동계 는 그러한 기술적 이론의 탁월한 성과이다. 주역 에 대한 응용기술이 이론적으로乾卦 4월중 여름 6효 모두 양 坤卦 10월중 겨울 6효 모두 음
12 벽괘는 24절기와 72후의 변화를 상징하기 때문에 12消息卦라고도 한다. 앞의 6괘는 양의생장과 음의 소멸을 상징하므로 息卦라 하고, 뒤 6괘는 음의 생장과 양의 소멸을 상징하므로消卦라 한다. 심경호, 주역철학사 「제 2 장 양한시대의 역학」 참조
38) “坎離水火龍虎鉛汞之屬 只是互換其名 其實只是精氣二者而已 精水也坎也龍也汞也 氣火也離也虎也鉛也 其法以神運精氣結而爲丹 陽氣在下 初成水以火煉之則凝成丹 其說甚異”
정비되고 체계를 갖춘 것이지만 그 진전은 주희에 의해 저해되었던 것이다.
참동계 가 조선에서도 애독되었고, 어느 정도는 심신수련의 방법으로 응용되기는 했지만역시 주희의 그 같은 입장에 의해 많은 부분 제약이 수반될 수밖에 없었다.
주역참동계 가 본래 성립의도와는 크게 다르지만 송대 상수학의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주희가 뒤늦게 다시 주역참동계 에 몰두했던 것도 이 점과 관계가없지 않을 것이다.
또한 금단도교가 한때 대대적인 유행을 했고 그에 따른 치명적인 부작용을 고려하면 참동계 의 연단술은 대단히 위험한 요소를 안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주희가철저히 막으려 했던 것은 그러한 폐해이기도 하다.
아무튼 주희는 주역참동계고이 에서 소옹과 주돈이의 학설이 진단에게서 전수받은 것이며 진단은 다시 그 학문적 연원을 위백양에게 두고 있다는 점을 조심스레 밝히고 있다. 이러한 언표가 신유학의 집대성자인 주희에게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주희는 이미 이전의 모든 연구성과를 다양하게 소화하여 유가의 본령을 지키면서 우주론과 형이상학을 아우르는혁신을 구사한 것이다.
즉 인간의 윤리적 가치를 전체로서의 자연이라는 배경에서 체계화시키는 작업을 시행하여 신유학으로 불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역참동계 가 의의를 갖는 것도 그러한 이론의 배경으로 기여했다는 점에 있다.
(출처/naver blog ~ 德田의 문화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