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입학, 1934년 교현초 25회로 졸업한 교현역사의 산증인인 김영호 옹이 취재기자와 만나 대화를 하고 있다.
교현초 119년의 역사를 대부분 기억하고 있는 94세의 동문이 있어 화제다.
1928년 7살에 교현초에 입학, 1934년 12살에 졸업한 김영호(94, 충주시 성내동 현대타운 나동 303호)옹이 그 주인공.
따라서 1928년부터 현재까지 교현초의 역사는 물론 충주지역 역사를 훤하게 꿰고 있다.
김 옹은 "당시는 일제시대라 전부 일본식 교육이었어.'남녀칠세 부동석'이라고 남학생은 현 충주교육청 자리, 여학생은 옛 충주세무서자리에서 따로 분리돼 공부를 했는데 4학년때 지금의 교현동 자리로 이전했지, 그래도 앞교사는 남학생, 뒷교사는 여학생이 교실로 써 서로 왕래를 못했어요.혹여 남녀가 교실을 잘못 들어 가기라도 하면 뺨을 맞고 혼난어요 "라고 회고했다.
또 "만주사변때 비행기가 떴다고하면 전 학생들이 운동장에 뛰쳐나와 구경하곤 했다 "며 "1937년 조선말 교육을 폐지, 일본말을 국어라고 배웠다"고 암울했던 시절 얘기를 꺼냈다.
"동기생중에 살아있는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그는 교현초를 졸업, 청주고, 경성 법학전문(현 서울대 법대)을을 졸업(1944년)할 만큼 뛰어난 학생이었다.
1945년 충주농고 교사, 1948년 충주사범학교 교사를 하다가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육군 소위로 6사단에 들어 갔고, 대구방위사령부 신병교육대 교관겸 중대장을 맡아 훈련병을 배출, 전쟁터로 보내는 일을 했다.
동락전투의 영웅 김재옥 여교사도 김옹의 충주사범학교 제자다.
"당시 총1자루에 200여명이 한번씩 만져보고 낙동강 전투에 참전했다"며 "풍전등화와 같았던 조국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슬처럼 사라져 간 그 희생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고 눈시울을 붉혔다.
낙동강 전투에서 청력을 잃어 큰소리로 말을 해야 알아듣는 그는 1954년6월 대위로 제대한뒤 제대장병보도회 충주지회(현 재향군인회)를 창설하고 초대회장을 맡았으며, 낙동강 전투의 희생자를 생각해 자신이 100환을 내고 회원들과 지역 유지들이 100만환을 보태 1955년 전국에서 최초로 순수 민간모금을 통해 탄금대에 '충혼탑'을 건립한뒤 추모행사를 거행해 왔다.특히 전국에서 유일하게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로 '忠魂塔'글씨를 받아 건립했다.
그는 1963년 북여중교장으로 교육일선을 떠난 후에도 충주농고, 충주여중·고 육성회장 등을 맡아 충주교육을 이끌어 왔으며, 5천1번이나 결혼식 주례를 설 만큼 충주의 역사와 시민발전에 밀접하게 관여해 왔다.
교현초 2학년때 타기 시작한 자전거를 94세인 지금도 타고 시내를 돌아다닌다는 그는 "다른 욕심은 없고 나라가 평온하고 남북통일이 하루 빨리 되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