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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태국에는 '챠오카오'로 불리우는 고산족 80만명(1996년통계)이 살고있다. 이들은 태국전체 인구의 약 1.2%를 차지하며 모두 9부족으로 3,600여 부락을 형성하고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부족은 6부족 (카렌, 몽, 라후, 아카, 리수, 미엔족)으로 이들은 서로 각기 다른 교유의 전통과 문화, 언어, 문자 (카렌족의 경우), 의상, 종교, 예술적인 유산 그리고 역사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부족이 복음을 접하지 못한 상태에 있어서 선교사역의 중요한 대상이기도 한다.
고산족의 대부분은 치앙마이를 중심으로 한 북부 태국의 고산지대에서 산농사를 짓거나 수렵생활을 한다. 한국의 화전민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근래 들어서는 교통의 발달(태국 정부가 이 산족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하여 도로망이 아주 잘 갖추어져 있다)과 생활의 문명화로 인하여 상거래를 하거나 도시로 돈벌이를 찾아내려 오는 젊은이들이 아주 많다. 그러나 정부는 이들에 대한 차별과 통제가 심하여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므로 산족에 대한 선교사역은 복음만을 전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어떻게 문화충격을 흡수하고 적응할 것인가, 그리고 태국의 사회인으로 살아갈 것인가라는 문제까지 제시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산족선교의 한계와 어려움이 있다.
이들은 크게 두가지 그룹으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 하나는 이 일대의 낮은 언덕과 높은 계곡에서 본래부터 거주하던 부족(카렌, 뗀, 루아, 카무)으로 이들은 전통적으로 아편은 재배하지 않는다. 반면, 다른 한 그룹 은 중앙아시아 티벳트나 중국남부가 발원지로 주로 해발 1,000m 또는 그 이상의 고산지대에서 생활하던 부족(몽, 라후, 아카, 리수, 미엔족)이다. 이들은 모두 미얀마와 라오스를 거쳐 태국으로 이주해 왔으며 전통적으로 아편을 재배한다.
카렌족
- 전체산족의 46.4%차지
- 대가족 생활
- 고유의 언어와 글을 소유(번역성경소유)
- 국경근처 주로 거주(미얀마와 독립투쟁)
몽족
- 두번째로 큰 산족(15만명)
- 도시문명의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림
- 기둥없이 땅에 집을 지음
- 외모, 말씨가 중국인을 아주 많이 닮음
미엔족(야엔족)
- 중국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산족
- 대가족 생활
- 기둥 없이 땅에 집을 짓는 것이 특징
- 라오스 국경 근처에 주로 거주
아카족
- 고산지대에서 거주/ 대부분 치앙라이 근처
- 아편을 가장 많이 재배하고 즐기는 산족
- 산족중 가장 화려한 옷차림
- 일부다처제/ 성적으로 개방적
리수족
- 가장최근에 이주해온 산족(70년전)
- 부락이 높은 고산지대에 위치
- 키가 크고 인물이 좋으며 낙천적임
- 젓가락을 사용함
제1장 카렌족 현황
1) 기원과 분포
카레는 오래 전부터 미얀마에 살고있다. 전설에 의하면 그들은 2600년 전에 티벳과 고비 사막에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약200년 전부터 태국으로 이주가 시작되면서 계속 국경을 넘어 들어오고 있는데 소수 부족들 가운데 최대의 인구인 약 270,803명 정도가 살고 있는데 이는 산족 전체의 49.13%이다. 이들은 다시 Karen-skaw, Pwo, Pa-o, Bwe, Donsu 다섯 부족으로 구분되며 미얀마 내에는 480만명 정도가 거주하면서 독립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미얀마 내의 카렌은 상당수가 개화되어 약 50%가 기독교인인데 비해 북태에 거주하는 카렌은 오랫동안 분리된 관계로 미얀마 내에 거주하는 카렌과는 민족 의식에 있어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미얀마에서 넘어온 난민은 방콕에서 서북부 지역을 중심 하여 북태지역으로 분산되어 난민촌을 형성하고 있으며 북태의 카렌은 치앙마이 서부지역에서 집단 적으로 거주하고 있는데, 치앙마이에는 소수가 살고있다.
2) 마을과 가옥구조 그리고 의복
(1) 마을 : Karen은 다른 산족에 비해 고지대에 사는데 해발 500-1500㎥에서 군락을 이루며, 주로 산봉 우리나 산비탈에 마을을 형성하고 살아간다. 구 이유는 주로 이동하는 삶 속에서 적의 공격을 최대한 막아 낼 수 있으며 우기에는 홍수의 범람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마을은 100년 전부터 정착해 왔다. 마을은 모체 마을을 중심으로 하여 가까운 곳에 집단적으로 공동체 형식의 마을 이루며 살고 있다. 카렌족은 타 부족 보다 이동을 적게 하는 편이지만 마을의 사제가 죽은 경우 이동은 필수 적이지만 가까운 거리로 옮겨간다. 이것은 사제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이다.
(2) 가옥 : 가옥의 구조는 주로 나무나 대나무를 이용하여 기둥을 세우고 땅으로부터 1 m 이상의 높이에 방바닥을 대나무로 자리를 만들어 깐후, 같은 대나무를 이용하여 벽을 만들고 지붕은 넓은 나무 입을 엮어서 덮는다. 이 집의 구조에는 창문이 없기 때문에 방안은 언제나 어두운 편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한 칸의 방바닥 중앙에는 가로 1m. 세로 60㎝ 가량의 부엌을 나무로 사각을 만들어 그 안에 흙을 넣고 3개의 적당한 돌을 흙위에 배치한 후 그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 나무로 불을 피워서 음식을 마련하는 형태를 갖춘다. 이 작은 부엌 위에는 1m 가량의 높이에 줄을 매달아 시렁을 만들고 이 시렁 위에서 곡식이나 기타 물건을 썩지 않도록 말리는 일을 한다. 밀림에서는 부엌 용품을 구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주로 대나무를 이용하는데 대나무 솥, 수저, 젓가락, 국자, 물컵, 물통등 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대로 이루어 진다. 특히 밥솥의 경우에는 크고 작은 대나무를 베어서 막힌 한쪽을 남겨두고 반대쪽을 벤 후에 쌀이나 콩을 넣고 약간의 물을 채운 후 나뭇잎으로 입구를 막고 불에 적당히 그을리면 대나무 밥이 되는데 이것을 "카우람" 이라 부른다. 밀림을 이동시에 주로 이용하는 식사이다. 가족들의 동거 생활은 대나무로 만들어진 한 칸의 방에서 생활하며 밤에는 부엌 쪽에 몸을 향하여 온 가족이 한방에 자는데 부모와 자녀들까지 합하여 가족이 한방공동체를 이룬다. 산하 제한을 원해도 방법이 없는 밀림에서의 가족의 수는 상당하다. 그러나 가족은 비교적 핵가족의 형태를 취하는데 그 이유는 주로 부모와 미혼의 자녀들로만 살아가기 때문이다. 결혼하면 분가해 나간다.
(3) 마을제단 : 카렌은 유일하게 마을에 제단이 없는데 신성시되는 지역은 매장 지와 마을밖에 바람과 물의 신이 있는 지역이다. 카렌은 비교적 우상숭배를 하지 않은 민족으로 살아간다.
(4) 의복 : 의복은 남녀의 구별이 뚜렷하다. 모든 남자들은 태어나서 죽기까지 붉은 색 바탕에 여러 가지 실을 군데군데 매달은 붉은 옷과 붉은 가방을 멘다. 이 붉은 가방은 곧 그들의 일생을 담고 가는 가방 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가방 속에서 그들의 생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이 붉은 옷은 주로 할머니, 어머니, 누나가 베틀에 앉아서 몇 개월에 걸쳐 손수 베를 자아 만든 옷들이다. 남자들은 베틀에 앉지 않은다. 이것은 남자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자들은 결혼전 까지는 하얀 옷을 입는다. 이 하얀 옷은 여자들이 손수 만들어 입거나 또는 자녀들에게 입혀준다. 여자들은 어려서부터 길쌈을 배우고 15- 17세가 되어 시집을 갈 무렵이면 작은 대나무 집을 짓고 이 작은 골방에 들어가 장차 만날 낭군을 위하여 베틀에 앉아 옷감을 짠다. 남자의 붉은 정장, 가방, 머플러, 보자기, 작은 액세서리, 그리고 자신이 입을 붉은 옷감에 여러 색을 곁들인 결혼 예복을 준비한다. 시집을 가는 여자는 붉은 옷감에 여러 가지 예뿐색의 실을 곁들이고 수술을 다는 축복을 누린다. 그리고 카렌 사코의 여자들은 유일하게 검은 색 천에다 붉은 색 천을 절반쯤 연결하여 만든 옷을 입는다. 그렇지만 결혼하지 않거나, 못하는 여자는 일생 흰옷과 함께 정절을 지키며 살아간다. 카렌의 여자나 남자들은 다른 부족에 비하여 비교적 정절이 강하고 삶이 아름다워 "하얀 마음"이라는 칭호를 영국의 총독으로부터 수여 받기도 하였다.
3) 법과 추장
마을의 추장과 무당은 그 조상들과 지역 신을 연결시키는 중개인으로 추장의 결정은 영적인 세계에서 직접 온다고 믿고 있으므로 그는 많은 존경을 받고있다. 추장은 세습적이나 혈통성에 있어서 그 추장의 형제 중에 뽑히며 그 형제가 없으면 아들이, 아들이 없으면 가까운 친족 중에서 선출된다.추장은 마을의 대표자로서 마을을 옮기는 때와 장소를 결정한다.
4) 농업형태
카렌족은 그들의 생존에 필요한 경제적 부분을 주로 농업을 통해서 해결한다. 토지를 유일한 생존 수단으로 삼고 있는 이들은 태양, 비, 바람등 기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으며 전천후 자연 영농을 하고 있다. 화전은 이들에게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농사이다. 정착이 된 후에는 천수답을 만들어 경작하고 지역에 따라 현대의 농경형태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 과수원을 만들어 경작하는데 카렌족은 차, 망고 ,사탕수수, 레몬, 파인애플 등을 많이 재배한다. 산 쌀의 경우는 10-11월에 거두어 들 인후 집 모퉁이에 곡식 창고를 만들어 저장해 두고 이것을 매일 새벽마다 드들방아로 찧어서 하루하루 밥을 지어먹는다. 가축은 가정마다 닭, 소, 돼지, 개등을 소유하고 있지만 축산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간혹 몇 가정들이 소몰이를 하는데 이것은 밀림의 지형적 조건을 이용하여 방목을 하는 형태로 아침에 소를 몰고 산이나 들로 나가 풀을 먹인후 밤이면 다시 돌아오는 형식이다. 이것은 밀림의 가장큰 수입 수단이지만 아직은 보편화 되지는 못하고 있다. 현대에 있어 발전된 산족들은 토마토나 양배추를 가꾸어 농가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이 외에도 일반적인 생활 방식으로 우기가 이르면 밀림에 솟아나는 죽순이나 버섯, 그리고 많은 풀잎들이 생계 수단으로 이용된다.
5) 연애와 결혼
카렌족의 결혼은 종족간의 유대를 강화해 나간다. 그들의 결혼 규칙을 소개하면
-사촌 이내는 결혼을 하지 못한다.
-삼촌과 질녀, 고모와 조카 사이에는 결혼을 하지 못한다.
동남 아시아 소수민족가운데 카렌족이 성적으로 가장 보수적이다.
6) 결혼식
카렌족의 결혼식은 2-3일 동안 계속된다. 결혼식날 신랑은 친구들과 함께 악대를 대동하고 춤과 노래를 부르며 신부집으로 간다. 결혼식이 끝나면 신랑과 신부는 신부의 마을에서 살아가게 된다. 이것은 모계 중심 사회를 이루는 카렌족의 풍습에 따라 지속되고 있다. 그래서 부모와 오랫동안 함께 있기를 원하는 남자들의 경우 결혼을 늦게 하는 경향이 있다.
7) 출생
가. 임신 : 카렌족 여자가 임신을 하면, 산모나 태아의 생명에 관계되는 금기 사항을 지켜야 한다. 이중에서도 특히 음식물을 조심 하여야한다. 임신 모는 딴 곳에서 가져 왔거나, 처음 보는 음식을 먹어서는 안된다.
나. 출산 : 출산 때는 대게 남편, 어머니, 또는 친척들이 산모를 도와준다. 임신 모는 천장의 대들보에서 느리운 줄을 붙잡고 웅크리고 앉는다. 이런 자세는 임신모의 출산을 도와준다.
다. 산후조리 : 출산후 산모는 3일 동안 문밖 출입을 삼가고 화로 곁에서 지낸다. 산모는 자기 몸의 피가 갑자기 머리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겁낸다. 그것은 바로 산모의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다.(말라리아 증세와 비슷하다). * 말라리아 증세란? 말라리아에 걸리면 온 몸이 심한 추위를 느끼며 심히 떨리고 두 눈에 흰빛이 나면서 초점을 잃고 설사를 하며 머리에 열이 오르고 온몸이 뜨겁다.
8) 죽음
카렌 족들은 죽은 자들의 영혼이 죽음의 왕인 쿠시드('Khu-See-du)가 지배하는 죽음의 나라로 간다고 믿는다. 내세는 마치 현세의 거울과 같은 존재라고 믿기 때문에 내세로 간 사람들은 현세에서 그가 했던 것처럼 농사도 짓고, 가축도 기르고, 인간 관계도 맺는다고 믿는다. 카렌족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죽으면 쿠시드가 지배하는 천국으로 가지만, 살아 있을 때 카렌족의 규율을 지키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멀어 진다고"
(1) 장례식 : 카렌의 장래 식은 아이들의 경우에는 죽으면 보자기로 싸서 산골짜기나 웅덩이에 버린 후 돌로 덮어 버린다. 이것은 조용히 진행된다. 그러나 어른들의 경우에는 관을 구입하여 시신을 넣고 2- 3일간 안방에 두고 이웃의 손님들을 접대한 후 기다란 통나무 두 개에 관을 묶어서 여러 사람이 매고 동구 밖에 산골짜기로 가서 나무 무더기를 쌓아 두고 관을 위에 올린 후 화장을 한다. 모든 사람은 화장을 하는 동안 곁에 지켜 서서 모둔 것이 불타기까지 바라보다 불이 꺼진 후 돌아오므로 장래는 끝이 난다. 이때는 죽은 자의 전에 지녔던 소지품도 모두 함께 불태운다.
9) 카렌의 신화
카렌족의 신화에 의하면 옛날 이와(Y'wa)께서 한 동산을 만드시고 다나이(Tha-nai)와 에유(Ee-u)를 만들어 그곳에 살게 두시며 "동산에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일곱 가지 열매를 맺는 일곱 가지 나무를 두었노라. 그 중에 한가지 열매는 먹어서는 안된다" 하셨다. 그후 무코리(Mu-kaw-lee)가 찾아와 두 사람을 속이자 둘은 나무의 실과를 먹었다. 그리고 죽음과 슬픔, 질병과 고통이 시작되었다. 이와는 그들의 자녀인 형제들에게 한 권의 책들을 나누어주었다. 카렌의 동생인 백인 형제들은 열심히 책을 읽고 비법을 터득하여 하얀 날개(배)를 타고 서쪽으로 건너가 신천신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카렌은 그만 실수하여 그 책을 잃어 버렸다. 그들은 백인 형제를 생각하며 언젠가 그들이 책을 가져 와서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리라고 믿고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날 한 회교도가 와서 한 권의 책을 카렌의 현자에게 주고 떠났다.
그러나 현자는 그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다시금 그들의 아우인 백인 형제가 책을 가지고 와서 그 책을 읽고 이와 에게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백인 선교사들이 성경책을 가지고 왔을 때 일부 카렌족 들은 그들의 신화적인 예언이 이루어 졌다고 믿고, 서둘러 번역하여 많은 이들이 신자가 되었다. 그들에게 성경을 번역해준 선교사는 누구일까? 그리고 천여 종류의 다신 사회인 미얀마에서 카렌족 이 종교적 순결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백인 형제가 가져올 구원의 책을 기다림에서인가?
10) 카렌의 선교사
미얀마의 가장 유명한 선교사는 아디노람 쥬드슨(Adinoram Judson : 1788출생 - 1812파송 -1850년 봄 해상사망)이다. 그는 해외 선교를 위한 미국 위원회에 의해 파송 받은 회중파 교도 였는데, 선교지를 향해 가는 동안 침례교로 개종하였다. 캐리의 예를 따라 그와 아내는 성경을 버마어, 타이어, 등 여러 언어로 번역하였다. 그들에 의해 개종한 현지인의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중의 하나였던 고우 타 뷰(Ko-Tha-Byu)는 자기 종족인 카렌(Karen)족을 대량으로 회심 시켰다. 그후 카렌은 2차 대전후 미얀마가 공산화되면서 자신들의 왕국을 잃고 사회의 불안정 속에서 조국을 떠나 가까운 국경을 넘어 주변국으로 이주해 오고 있다. 이들 중에는 더 많은 신자들이 섞여 태국으로 들어 왔다. 그러나 태국정부의 이주민에 대한 외교로 정책으로 말미암아 대부분 국경 지역에 머물러 살고 있다. 이제는 국가도, 국적도, 소유지도 없이 유랑하는 이들에게 누가 카렌의 선교사가 되어 영생의 복음을 알려줄 것인가? 그들은 아직도 기다리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태국의 역사와 관련된 카렌족의 몇몇 이야기들을 살펴보았다. 그 이유는 지금도 그들에게 이와의 이야기를 들려줄, 그리고 구원의 길을 알려줄, 바로 그들의 형제를 그들은 고난의 현실 속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누가 그들에게 희망과 소망의 소식을 알려줄 것인가!
고난 속에서도 영적 정절을 지키며 그들은 오늘도 기다리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다음은 카렌족을 향한 선교 전략을 살펴보기로 하자.
제2장 카렌족을 향한 선교전략
선교전략은 주님의 말씀 자체가 된다. 성령의 역사보다 더 위대한 전략은 없다. 이런 차원에서 J.X의 말씀을 현실에 적용하여 전략적 부분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복음전도(방문전도)
선교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복음( )이다. J.X도 이일을 위하여 오셨다(마4:23-24) 복음 증거는 J.X의 지상명령(마28:18-20)이다. 그곳에 성령이 역사 하신다.
2) 교회개척
카렌의 마을마다 방문하여 복음을 증거하고, 신자가 발생하면 그들을 중심으로 예배당을 세운다. 이어서 교역자를 파송 하거나 신자중 전도자의 은사가 있는 이를 세워 교회를 관리하도록 하고 이들을 훈련시키거나 신학교를 보낸다.
3) 고아원 운영
밀림의 카렌족은 열악한 환경, 즉 질병이나 마약으로 부모가 죽는 경우가 많아 그들의 자녀를 대신 맡아 길 러줄 시설로서 고아원이 필요하다. 이것은 복음 증거의 산실이 되기도 한다.
4) 학숙운영
북태 밀림에는 학교, 병원, 문화혜택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들이 많다. 특히 부모들은 자녀교육을 갈망하므로 학숙운영을 통해 그들의 필요(교육)를 채워주고, 이것을 기회로 복음을 증거 한다.
5) 의료선교
밀림에 의료활동을 통하여 복음전도의 접촉 기회를 갖고 진료와 복음증거를 겸한다.
6) 마약재활원
산족들은 의료해택을 받지 못하므로 질병 치료의 수단으로 마약을 먹는다. 결국은 마약 환자가 된다. 이들에게 치료의 기회를 주며 복음을 전하는 것은 효과적이다.(메아이 재활원)
7) 태권도선교
마을을 방문시 복음의 접촉점을 가져다주는 태권도를 통하여 접근하고, 학숙생들을 훈련하여 복음 증거에 일익을 감당하게 한다.
8) 번역선교
많은 부족들은 자국어로 성경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번역해 주므로 복음 증거의 지름길이 된다.
9) 영농선교
이것은 산족들에게 특별한 영향을 줄 수는 없지만 의, 식, 주 해결의 한 방법으로 밀림의 축산과 버섯 재배, 토마토, 과수원, 기타의 특수작물을 할 수 있으나 1차 산업이 풍성한 태국에서는 농가 소득의 경쟁과 판로가 가장 미흡하다. 그러나 산지 족을 지도하는 차원에서 복음 전도의 효과가 있다.
10) 난민 수용소 선교
태국에는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말레이지아등의 주변국에서 많은 이주민들이 들어오므로 이들을 수용하는 곳이 딱, 칸짜나부리등 여러 곳에 있다. 이들을 대상으로 빵과 함께 복음을 증거 한다.
11) 장애인 선교
장애인 선교 다양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밀림에는 소경, 귀머거리, 불구자가 많으나 그들을 돕는 기구는 전무하다. 이들에게 도움을 줌으로서 가족과 장애인에게 복음을 증거할수 있다.
12) 교역자 훈련원
개척된 교회의 대표를 교육하고 또는 신학을 졸업한 학생들을 계속 교육하는 기관으로 매우 중요하다. 이것만을 전문으로 선교할 수 있다.
13) 양로원 선교
자녀나 부양자가 없어서 어려운 삶을 사는 노인들에게 양로원 선교를 통하여 복음을 증거 한다.(쏩란마을)
14) 학원선교
밀림 근처에는 태국 정부에서 지원한 많은 학교들이 있다. 밀림이 깊을 수록 교사가 절대 부족하므로 그들은 효과적인 교육이 어렵다. 이들에게 접근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선교할 수 있다.
15) 동사선교
밀림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살며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 한다.(O.M.F, N.T.M) 지금까지 살편본 선교전략은 선교정책 수립에 도움을 준다. 또한 다양한 선교정책은 많은 부류의 선교 대상자를 만날 수 있고, 풍성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그러므로 선교에 앞서 선교정책 연구는 불필요한 희생을 막을 수 있고 선교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지금부터는 개혁총회 태국선교부 옴꼬이 학숙의 현실을 살펴보고 선교에 많은 도움이 되길 빈다. 늘 기억할 사실은 "선교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는 것이다.
제3장 옴꼬이 학숙운영의 현실과 비죤
조기 교육을 통한 기독교 지도자의 육성을 통하여 태국과 세계의 선교를 목표로 하는 옴꼬이 학숙 운영은 섬세하고도 다양한 선교전략을 필요로 한다. 지금까지 시행되었던 구체적인 선교 현실을 검토해 봄으로서 그 장단점을 살피고 보완된 정책을 수립하므로 학숙운영을 통한 복음증거의 효과를 높이고자 한다.
1) 태국에서 옴꼬이의 지리상위치
옴꼬이(군)는 북태 치앙마이의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매홍손(도)과 딱(도)을 경계로 하는 밀림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주로 국경과 인접해 있는 메홍손과 딱을 넘어오는 미얀마의 이주민들이 모여드는 통로가 된다. 그러므로 주로 미얀마의 이주민이 모여 사는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치앙마이로 부터 오는 일반 국도는 옴꼬이 에서 끝이 나므로 이곳에서의 이동은 주로 도보로 이루어지는 현실이어서 국경을 넘어오는 일이 어렵지만 장점은 국경 수비대에 붙잡히지 않아 많은 이가 이 방법을 선택한다.
2) 옴꼬이 지역의 종교적 상황
옴꼬이에는 난민과 산족의 열악한 환경을 취약점으로 삼아 종교를 전파하려는 다양한 종파들이 모여들어 오고 있다. 그 중에는 태국의 국교인 불교, 이슬람, 천주교, 거듭남교회, 기독교가 있으며 기독교 선교부로는 장로교(KRPM, KGM), 침례교, 홍콩선교회, OMF, CCT, EFT, NTM등이 들어와 선교를 하고 있다.
3) 옴꼬이지역 각 선교부의 학숙상황
옴꼬이를 중심으로 가까이 에는 총 6개의 학숙이 자리를 잡고 있다.
* OMF (옴꼬이에 20여명, 솝란에 30여명, 멜라이띠양에 30여명)
* 홍콩선교회 (쿰옴햇에 20여명)
* KRPM (쿰옴햇에 54명)
* CCT 카렌 침례교 (후에이남카우에 30여명)
4) 옴꼬이 지역의 발전상황
교육기관에 있어서는 국, 중, 고등학교가 있으며 군 보건소와 경찰서 있고, 그리고 20여명을 수용하는 작은 식당과 구멍 가게들이 있으나 시장은 없다. 전기가 들어오며 전화는 관공서만 사용하고 특수지역에 몇 군데 설치되어 있는 상황이다. 밀림에는 국경수비대를 대신하는 산림청 직원들이 배치되어 있다.
5) KRPM 선교부의 학숙상황
(1) 부동산 : 현재 2천여 평의 대지 위에 연건평 300여평의 건물을 마련하고 60여명이 함께 기숙하는 학숙이 운영되고 있다.
(2) 관리인 : 이곳을 관리하는 총책임자인 시완 전도사와 예배와 성경공부를 주관하는 밍에 전도사, 태권도를 가르치는 프리위한사범, 부엌을 담당하는 완펜선생, 학숙을 관리하고 가까운 교회를 돌보는 썸 전도인이 있다.
(3) 학생 : 현재 국민학생 40명, 중학생 9명, 고등학생 2명이 함께 살고 있다.
(4) 학생들의 하루 일과 시간표
*일요일 - 토요일
5 : 20 - 5 : 30 기상 및 정리
- 6 : 00 새벽기도(그룹성경공부:토)(휴식:일)
- 6 : 10 성구 암송
- 6 : 30 태권도
- 7 : 00 소일 : 학숙 청소 및 개임담당 일과 처리 동물사육
- 7 : 30 아침식사
- 8 : 00 등교(옴꼬이 학교까지 40분 걸어감)(토,일요일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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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40 귀가
-17 : 30 자유시간 및 운동
-18 : 00 식사
-19 : 00 밤예배
-20 : 00 숙제 및 연구
-22 : 00 취침
6) 선교를 위한 학숙 운영의 장단점
(1) 장점
불교를 국교로 하는 태국의 종교 교육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를 따라 불교를 신봉하게 되므로 부모가 기독교인의 가정이 아닌 경우에 복음 접촉의 기회가 거의 없다. 산족 또한 마찬가지로서 불교신자나 불신자의 경우는 대부분 교육기관을 통하여 불교를 교육받게 된다. 이러한 자들에게 기독교 선교를 위한 학숙 운영은 첫째 복음을 뿌리는 밭과 같은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둘째로 학숙 운영은 일종의 신학교와 같은 신앙의 기본교육이 가능하므로 기독교 고급 인력을 조기교육하는 효과를 누린다. 셋째로 불신자의 경우 학숙 생활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경우가 많다. 넷째 가난한 학부형들의 필요를 채워 주므로학생의 가정 및 마을을 전도하는 계기가 된다. 다섯째 지역 사회나 선교국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므로 선교사의 활동이 자유롭고 각계각층에 선교의 접촙점을 마련하는 동기가 된다. 여섯째 학생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므로 이를 통해 태국민화되는 지름길을 찾게 만들어 준다.
(2) 단점
첫째 학생들이 부모를 멀리 떠나 있으므로 가족간의 사랑을 늘 그리워한다.(이를 해결하는 차원에서 방학때 나 학교가 쉴 때는 가정 방문을 허용한다. 또한 영성 훈련을 통하여 현실을 극복 할 수 있도록 한다 ).
둘째 사회성이 약한 경우는 학숙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셋째 전념성 병이 발병하면 순식간에 번진다.
넷째 도움을 받는 위치에 있으므로 종속본능이 자리잡는다(이 문제는 자신의 자리를 찾을 경우 해결된다).
7) 옴꼬이의 기후와 생활의 장애
옴꼬이는 고산 지역으로서 건기에는 바람이 많고 건조하며 3-4월에는 화전을 위해 산에 불지름이 심하여 고산 지역에서 태어나 적응되지 않은 경우는 대부분 고산병을 앓게 되어진다. 특히 저지대에 살던 사람은 이 지역에서의 적응이 심히 어렵다. 또한 고산지역에서 살던 사람들의 경우도 도심의 저지대에 적응하기가 어려워 다시 돌아오는 경우를 보게 된다(예: 옴꼬이 학숙에는 외부에서 관리인들이 들어와 돕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얼마가 지나면은 대부분 고산병이 발생한다. 우리 신학생중 날롱, 암폰, 짠타나, 명애와 얄래, 프라위한이 이곳에서 고산병을 앓았다. 그러나 학생들의 경우는 대부분 고산에서 내려오므로 옴꼬이의 적응이 용이하다)고산에 배치된 전도인의 경우는 2-3년이 지나면 대부분 발병하게 되는 경향을 본다. 이는 모두가 열악한 환경과 고산지대의 기후가 빚어내는 비극들이다(손분, 아누찻, 반르). 또한 우기에는 밀림에 지속되는 폭우와 장마로 인하여 이질의 발생률이 마을 단위로 집단적으로 발병하여 사망률이 높다.
8) 옴꼬이 학숙의 운영 시기전망
태국과 미얀마의 정치 변화와 경제의 전반적인 성장이 있기까지는 산족들이 존속하게 될 것이다. 이들이 있는 한 학숙 운영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대략 그 시기는 20년 이상 가리라고 본다. 옴꼬이 학숙의 경우 지금 자라는 학생들이 모두 졸업하기까지는 12년이 걸린다.
9) 학숙운영의 결과
밀림의 많은 학생들이 교육을 받을 기회를 가졌으며 가장 아름다운 일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였다. 수팥은 불신자로서 우리 학숙에 들어 왔으나 변하여 신자가 되었고 떠날때 그는 우리 학숙이 불신자를 많이 받아 예수 믿게 해달라고 건의하였다. 학숙의 국민 학생들은 학교에서 우상에 절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났고 중학생들은 기독써클을 만들어 모임을 가지므로 불교 모임에 가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모두가 스스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학숙을 졸업한 학생들중 많은 이들이 신학을 하였고 도시로나 다른 곳으로 옮겨간 경우라도 신앙생활이 지속되었다. 현재 우리의 선교본부가 있는 치앙마이에 개척한 교회에도 옴꼬이 학숙을 졸업한 학생들이 출석하고 있다.
제3장 옴꼬이 학숙운영의 현실과 비죤
조기 교육을 통한 기독교 지도자의 육성을 통하여 태국과 세계의 선교를 목표로 하는 옴꼬이 학숙 운영은 섬세하고도 다양한 선교전략을 필요로 한다. 지금까지 시행되었던 구체적인 선교 현실을 검토해 봄으로서 그 장단점을 살피고 보완된 정책을 수립하므로 학숙운영을 통한 복음증거의 효과를 높이고자 한다.
카렌족으로 가다
처음 밀림의 카렌을 방문하게 된 것은 1991년 6월 5일 열대 건기의 태양이 작열 하는 늦은 오후, 이곳에 선교사로 오기 위해 현지 답사를 왔을 때였다. 방콕에서 가차로 13시간을 온 후 치앙마이에 도착하여 문짝 없는 버스를 타고 4시간을 밀림으로 올라가자 옴꼬이가 나왔다. 또 다시 옴꼬이에서 고등 학생 손퐁이 타는 오토바이 뒤에 앉아 밀림 길을 가는데 거 반이 나는 밀면서 꽁쌍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 오토바이를 세워두고 후에이콩을 향하여 50분 가량 걸어갔다.
이 마을은 목재로 교회가 세워져 있었는데 옆으로 약간 기운 것이 교회로 올라가는 내게는 약간 불안했다. 이곳을 담임하는 전도인은 출타 중이었고 그의 아내가 나와 인사를 하였다. 그녀는 내게 손짓으로 식사를 하겠느냐고 물었다. 무엇이 나올까 궁금한 맘으로 식사를 하겠다고 했다. 잠시후 식은 붉은 밥 한 바리(소쿠리일종)가 나왔다. 밥이 너무 많아 나는 생각하길 한 20명쯤 와서 식사를 같이 하는 줄 알고 반찬과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잠시 후 전도인의 아내가 오더니 간장이 든 보세기(작은 간장그릇)를 밥 가운 쭉 쑤세 넣으며 혼자 먹으라는 손짓을 하였다. 손퐁은 먹지 않았다. 나도 멋 적었지만 수저도, 젓가락도, 반찬도, 상도 없이 손으로 밥을 집어 간장에 찍은 후 먹음직스럽게 먹고 있는 나의 마음에 이곳에 다시 오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식사 후 카렌족이 사는 가정을 방문했는데 집의 구조가 주로 대나무를 사용하여 지은 집이었다. 대나무 기둥을 세우고 대나무를 빠게서 펼친 후 바닥과 벽을 막고 나뭇잎을 엮어서 지붕을 덮었는데 비가 오면 셀 것 같고 바람이 불면 날아 갈 것 같았다. 한 칸의 방 가운데는 부엌이 설치되었는데 가로 60cm, 세로 1m가량의 나무 띠를 두르고 안에는 흙을 채운 후 그 중앙에는 받침돌 세개가 놓여 있는데 돌 위에 시커먼 냄비가 앉아 있었다. 방의 어느 곳에도 현대의 문명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새끼줄을 처서 걸쳐놓은 몇 벌의 옷이 세간의 전부였다. 나는 이런 환경 보다 마음이 움직이질 않아서 혼자 속으로 "일할 곳이 많은데 하필이면 이런 험한 곳을 내가 온다는 말인가!" 하고 되뇌였다.
잠시 후 전도인의 아내와 "떠브륵" 이란 인사를 마친 후 허전한 맘으로 터벅터벅 꽁쌍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뜨거운 태양이 머리를 익힐 것만 같은데 가슴은 현지 답사 온 보람도 없이 더욱 싸늘해 갔다. 꽁쌍에 도착하자 나는 망고 나무 그늘 아래 지친 몸의 더위를 식히려 앉았다. 잠시 후 9-11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이 세 명이 나를 구경이나 하듯이 내 앞에 와서 앉았다. 그리고 이어서 아주머니 한 분이 만신창이 되어 진물이 흐르는 다리를 끌며 오더니 어린이들 옆에 앉았다. 말이 안 통하니 서로 얼굴만 보고 있는데!....
바로 그때! 나에게 하나님의 선교사명이 부여되는 감동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감동은 식지 않았다. 이 감동 속에서 성령은 나를 밀림으로 이끌어 가신다. 그리고 카렌을 만나면 그들은 나를 흰머리 목사라 부른다. 할렐루야!
(아카족종족파일) (리수족 종족파일) (팍 타이족 종족파일) (소족 종족파일)
태국 메홍선에 최근 임마누엘신학교가 완공돼 태국과 미얀마 그리고 베트남 지역의 선교진지 구축을 위한 교두보가 마련됐다.
이번에 완공된 임마누엘신학교는 메홍선 공항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위치한 깊은 산속에 자리잡고 있는데 바로 미얀마와 국경지대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4년 전 예장(개혁) 선교부 소속 달리다굼선교회(회장 지윤상)가 이곳에 대지 6500평을 매입,서울 창동 염광교회(최기식 목사) 등의 후원과 달리다굼선교회 자체 기금 등으로 600평의 신학교를 완공했다.여기서 배출되는 목회자는 전원 태국․미얀마․베트남 지역의 산지족 선교를 위해 투입된다.따라서 이들에 대한 교육과정 또한 일반 신학과정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신학교 바로 옆에는 대나무로 지어진 막사 5동이 있는데 바로 신학교에 입학한 예비 목회자들이 가족과 함께 거주하는 기숙사다.신학교 수업을 위해 장시간 집을 비우게 되면 부인은 어느새 다른 남자의 품으로 가버리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신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가족과 떨어져 있는 것은 감히 상상을 불허하는 일이다.성에 대한 ꡐ도덕 지수ꡑ가 워낙 낮은 이들 산지족 중에서 예비 목회자를 선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특히 선택된 예비 목회자를 졸업시키는 작업은 더욱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어쩌면 2년동안의 신학교육 과정은 처음 입학부터 졸업때까지 오직 산지족 선교를 위한 사명의식의 고취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지에서 신학교의 운영은 물론 메홍선 전 지역의 선교를 맡고 있는 방정렬 선교사는 이들에게 사명의식을 강하게 불어넣기 위해 구원론과 교회론에 대해서 만큼은 임마누엘선교회팀과 국내 저명 복음주의 신학자들을 참여시켜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완공기념으로 그동안 메홍선 선교센터에서 신학수업을 계속해온 욜라(47․라후족) 솜삭(36․몽족) 키퍼(36․카렌족) 메티(30․〃)씨가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10여명의 예비 목회자가 신학수업을 받고 있다.
이번 신학교 완공식과 안수식에는 태국 복음주의연합회 총회장 칸자나무크다 목사를 비롯해 예장(개혁) 총회장 고병학, 선교국장 이정남 목사, 달리다굼선교회장 지윤상 목사, 총무 신병철 목사, 그리고 메홍선 지역 선교를 위해 열정을 쏟고 있는 목회자 20여명, 현지 성도 등 모두 500여명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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